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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2025. 4. 15.~16.(화,수) - 음력(3. 18.~19.), 일출 05:58~일몰 19:04
●산행지: 사자지맥 1구간(1박2일) 졸업
●산행코스: 사자산 활공장-사자산정상석/사자산미봉 분기점(667.5m)-활공장-사자산두봉(569.2m)-기산고개-당뫼산(164.7m)-덕림재-억불산(517.4m)-정남진천문과학관-277.5m봉-자푸재-321.9m-광춘산(387.9m)-자울재/23번국도-235.2m봉-288.4m봉-404.5m봉-바람재-385.8m봉-392.4m봉-괴바위산(462.8m)-446.7m봉-장구목재-513.7m봉-503.4m봉-부용산(611m)-476.7m봉-384.2m봉-363.8m봉-초당연수원-깃대봉(361.6m)-262.6m봉-골치재/827번도로-313.3m봉-양암봉(469.2m)-가지재-천태산(552.3m)-435m봉-493.4m봉-기잿재/819번도로-부곡산-409.8m봉-392.8m봉-공성산(367.2m)-309.1m봉-91.3m봉-신리삼거리/23번도로-78.2m봉-오성산(215.5m)-내저마을-172.2m봉-131.7m봉-172.5m봉-157.3m봉-84.6m봉-사자곶/지맥끝자락-옹암리 방파제-옹암마을
●먹거리: 생수1,500cc, 튀김건빵1, 다이제스트2, 맘모스빵, 단백질바1, 양갱2, 사탕15
●준비물: 바람막이, 원드스토퍼, 폴라텍하의, 자켓, 모자, 은박매트리스2, 매트, 3M장갑, 스틱, 헤드랜턴, 충전지2, 충전짹, 휴지, 물티슈, 비닐우의, 안대, 귀마개, 양말, 띠지10
●거리: 약 56.9Km
●소요시간: 34.5h
●누구랑: 나홀로
●경비: 고속버스20,800원, 시외버스11,500원, 야식7,500원, 편의점3,900원, 택시20,700원, 신리슈퍼음료6,700원, 대덕터미널음료1,700원, 뒤풀이24,000원, 시외버스11,500원, 고속버스30,800원, 약국드링크2,000원, 휴게소음료6,300원
●날씨: 4~22, 날씨 좋음
●산행경과:
* 4. 15.(화), 30.5Km
- 05:59~06:37 : 활공장
- 06:16~20 : 사자지맥 분기점 출발/ 사자산 미봉
- 06:55 : 사자산 두봉(569.2m)
- 08:05 : 기산고개
- 08:24 : 당뫼산(164.7m)
- 08:39~57 : 덕림재, 행동식
- 10:18 : 며느리바위
- 10:34 : 억불산(517.4m)
- 11:06 : 정남진천문과학관
- 11:18 : 자푸재
- 11:55 : 광춘산(387.9m)
- 12:20 : 자울재/23번국도
- 13:43~59 : 세연봉(404.5m), 행동식
- 14:23 : 351m봉, 군계봉
- 15:30 : 장진저수지 삼거리
- 15:50 : 392.4m봉
- 15:59 : 괴바위
- 16:30~38 : 괴바위산 삼거리
- 16:35 : 괴바위산(462.8m)
- 17:13~30 : 장구목재(305m), 행동식
- 18:04 : 513.7m봉
- 18:17 : 503.4m봉
- 18:34~19:05 : 부용산분기점
- 18:51 : 부용산(611m)
- 19:47 : 임도
- 19:54 : 363.8m봉
- 20:35 : 초당연수원
* 4. 16.(수), 26.4Km
- 03:11 : 초당연수원
- 03:42 : 깃대봉(361.6m)
- 04:19 : 골치재/827번도로
- 04:47 : 313.3m봉
- 05:56~06:05 : 양암봉(469.2m), 행동식
- 06:50 : 가지재
- 07:14 : 459.6m봉
- 08:03 : 삼면봉(498m)
- 08:20 : 천태산(552.3m)
- 08:50 : 헬기장
- 09:20 : 493.4m봉
- 09:47 : 임도
- 09:54~10:15 : 기잿재/819번도로, 행동식
- 11:18 : 부곡산
- 11:56 : 392.8m봉
- 12:39 : 공성산(367.2m)
- 13:03 : 309.1m봉
- 13:45 : 신리삼거리/23번도로
- 14:29 : 오성산갈림길
- ??:?? : 오성산(215.5m)
- 14:49 : 내저마을
- 15:11 : 172.2m봉
- 15:47 : 172.5m봉
- 15:54 : 157.3m봉
- 16:25 : 84.6m봉
- 16:35 : 사자곶/ 남해바다
- 17:10 : 옹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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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자지맥이란...
사자지맥(獅子枝脈)은 호남정맥상 이군삼읍면봉인 사자산 미봉(667.5m)에서 남쪽으로 분기하여 탐진강의 동쪽 울타리를 이루는 산줄기로 사자산 미봉(667.5m), 활공장, 사자산 두봉(569.2m), 당뫼산(164.5m), 덕림재, 억불산(517.2m), 자푸재, 광춘산(387.9m), 자울재, 바람재, 괴바위산(462.8m), 장구목재, 부용산(610.7m, -0.2km), 초당연수원, 깃대봉(361.6m), 골치재, 양암봉(469.2m), 가지재, 천태산(549.2m), 기잿재, 부곡산(424.6m), 공성산(367.2m), 서신마을, 오성산(215.5m, -30m), 내저리를 지나 장흥군 대덕읍 옹암리 남해바다까지 이어지는 도상거리 약 53km인 산줄기이다. 이 산줄기의 서쪽에는 취진강, 영동내 등이 흐르며, 이 산줄기의 동쪽에는 홍거천, 남상천, 석남천, 신평천, 고읍천, 연정천, 대덕천 등이 남해로 흘러간다. 분기점이자 가장 높은 봉우리인 호남정맥상의 사자산 미봉의 이름을 따 사자지맥이라 하였으며, 세종 홀산아선배님이 바다와 만나는 사자지맥의 끝머리에 사자곶이라는 멋진 이름을 선사해 주셨다.
♤ 사자지맥 개념도
* 사자지맥을 지나는 동네
* 보성군(寶城郡)
전남 동남중서부에 위치하고 남쪽으로는 남해에 접하며, 벌교읍과 남해를 사이에 두고 고흥군과 인접해 교류가 많다. 본래 백제의 복홀군(伏忽郡)이다. 757년 보성군(寶城郡)으로 개칭하고 대로현·계수현·오아현)·마읍현을 관할하였다. 940년 오아현은 정안현으로, 마읍현은 수령현으로 개칭하여 영암군의 속현이 되고, 대로현은 회령현으로, 계수현은 장택현으로 개칭하고 그대로 보성의 속현이 되었다. 능성의 영현인 복성현, 곡성의 영현인 동복현, 추성의 영현인 옥과현, 낙안의 영현인 조양현, 남양현, 태강현, 두원현이 보성의 속현이 되었다. 1395년 고흥현이 왜구의 침임을 피해 보성의 속현인 조양현으로 이전하였다. 1441년 고흥현이 관아를 지금의 고흥읍으로 이전하면서 조양현 땅을 보성에 돌려주고, 보성의 속현이던 옛 남양현, 태강현, 풍안현, 도화현, 고다산부곡, 저천부곡 땅이 고흥에 편입되었다. 1895년 23부제 시행으로 나주부 보성군이 되었다가, 1896년 전라남도 보성군이 되었다. 1908년 낙안군이 폐지되면서 고상면·고하면·남상면·남하면이 보성에 편입되었다. 호남정맥의 백이산(伯夷山:584m)·망일봉(望日峰:650m)·존제산(尊帝山:740m)·방장산(方丈山:576m) 등이 남서 북동방향으로 해안을 따라 솟고, 제암산(帝岩山)에서 발원하는 섬진강의 지류 보성강을 사이에 두고 제암·벽옥·천마 등의 여러 산이 솟아 좁은 해안지대와 중앙의 보성강 유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산으로서 호남지방에서는 운봉(雲峰) 다음 가는 고지대를 이루고 있다. 군의 중앙으로 섬진강의 지류인 보성강이 흐르며 다목적댐인 주암댐이 위치한다. 보성군의 특산로는 녹차와 꼬막이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국도제2호선이 보성읍에서 벌교읍 방향으로 관통하며, 경전선 철도가 노동면, 보성읍, 득량면, 조성면, 벌교읍을 통과한다. 주요 철도역으로는 보성역, 득량역, 예당역, 조성역, 벌교역이 위치하고 있다. 해안 지방은 교통이 편리하나, 내륙은 산지이기 때문에 벌교에서 북서쪽 화순으로 통하는 국도가 통할 뿐 큰 도로는 없다. [포털에서 발췌정리]
* 장흥군(長興郡)
전남 남부에 위치한 군으로 동쪽은 보성군·고흥군, 서쪽은 강진군·영암군, 남쪽은 완도군, 북쪽은 화순군과 접하고 있다. 호남정맥과 사자지맥이 이어져 노년기 잔구성 산지가 분포하고 있다. 북부는 비교적 고지대로 산지를 이루며, 남부는 해안지대로 간척사업이 이루어져 비옥한 해안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지질은 화감암·편마암 및 제4기 충적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은 금성산(錦城山, 401m)·제암산(帝巖山, 807m)·골치산(骨峙山, 664m)·사자산(獅子山, 666m), 서쪽은 국사봉(國師峰, 613m)·부용산(芙蓉山, 609m)·수인산(修仁山, 561m) 등이 있다. 남쪽은 양암봉(陽巖峰, 465m)·천관산(天冠山, 723m), 북쪽은 국사봉·봉미산(鳳尾山, 506m)·가지산(迦智山, 510m), 중앙에는 억불산(億佛山, 518m)·용두산(龍頭山, 551m)·광춘산 등이 있다. 탐진강(耽津江)이 북서부를 남류하다가, 유치면에서 옴천천(唵川川), 장흥읍에서 금강(錦江) 등 여러 지류를 합류해 강진군을 지나 남해로 흘러든다. 그 밖에 홍거천(洪巨川)·남상천(南上川)·고읍천(古邑川) 등이 있다. 해안지대는 간척지가 발달하여 있다. 우산도·장재도·장관도 등 대부분의 섬들이 인공 제방으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마한시대에는 이곳에 건마국(乾馬國)이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나 확실하지는 않다. 백제의 영역에 편입된 뒤로 이 지역에 오차현(烏次縣)·마사량현(馬斯良縣)·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계천현(季川縣)·두힐현(豆肸縣) 등이 있었다.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오차현은 오아현(烏兒縣), 마사량현은 대로현(代勞縣), 고마미지현은 마읍현(馬邑縣), 계천현은 계수현(季水縣)으로 개칭되어 모두 보성군의 영현이 되었다. 두힐현은 강원현(薑原縣)으로 개칭되어 분령군(分嶺郡)의 영현이 되었다. 신라 말 경문왕 때 도의(道義)와 체징(體澄)에 의해 선종의 가지산문(迦智山門)이 보림사(寶林寺)에서 개창되어 선종구산문이 성립되기 시작하였다. 장흥(長興)이란 지명은 고려 인종이 이 곳 장흥 관산면 출신 공예태후를 맞아 의종·명종·신종을 낳은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내려줬다고 하는데, ‘장흥(長興)’엔 ‘길이 번창하라’는 임금의 바람이 담겨 있는 것이다. 1274년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일본정벌 때 선박 제조의 임무가 부과되어 천관산 부근의 목재로 전함을 만들었다. 또한 동정군(東征軍)이 회주성에서 출발하였다. 고려 말기에는 왜구의 침입 때문에 수인산성·상잠성 등 많은 성을 쌓았다. 1379년(우왕 5)에는 철야현으로, 1389년(공양왕 1)에는 보성군으로 주민들이 옮겨가서 이곳은 공지가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위대기(魏大器)·선세신(宣世臣) 등은 이순신(李舜臣)의 막하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리고 김헌(金憲)·김응생(金膺生) 등은 조헌(趙憲)의 의병군에 가담해 금산싸움에서 순국하였다. 1599년권율(權慄)의 청에 의해 병영을 강진에서 장흥으로 이설했다가 1604년 다시 강진 구영(舊營)으로 옮겼다. 1894년 동학운동 때 읍내의 석대에서 이곳 출신의 접주 이방언(李芳彦)이 이끄는 동학군이 관군·일본군과 접전을 벌여 동학군이 패함으로써 호남 지방의 동학운동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1895년나주부 장흥군으로, 1896년 전남 장흥군으로 개편되었다. 이 때 대덕면 등에 딸린 섬은 모두 완도군에 이속시켰다. 1950년 6·25전쟁 때 3개월간 적의 치하에서 시달렸으며, 잔존 공비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 1951년 7월 대규모의 토벌작전으로 공비는 거의 소탕되었다. 그러나 이 때 보림사가 소실되었다. 김생산량은 완도가 으뜸이지만, 장흥김도 맛과 향이 독특하고 품질이 우수하다. 연안의 바다에는 전어·멸치·숭어 등 각종 어류가 서식하고 있다. 탐진강의 은어는 여름철 이 지역의 명물이다. 교통은 장흥읍을 중심으로 목포∼부산간의 국도가 이 군의 중앙부를 동서로 통과한다. 보성·강진·나주·영암 등을 연결하는 국도와 지방도 등의 도로망이 사방으로 뻗어 있어 편리한 편이다. 또한, 해상교통이 발달된 지역으로 회진면 회진항은 노력도(老力島)와 완도군 생일도(生日島)·조약도(助藥島) 등을 연결하는 유일한 항구이다. 그러나 항구 시설의 미비로 선박 통행에 불편을 주며, 폭풍이나 해일시에는 큰 피해를 입고 있다. 안량면 수문리에는 수문포 해수욕장이 있어 매년 해수욕객이 증가하고 있다. 이 해수욕장은 경사가 완만하고 해안을 따라 흰모래가 1㎞ 가량 발달하고 있어 해수욕장으로 자연적 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최근 인공조림으로 송림이 울창해 경관이 뛰어나며,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포털에서 발췌정리]
* 강진군(康津郡)
강진군은 삼한시대 마한의 54국 중 구해국(狗奚國)이 강진에 있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백제의 도무군(道武郡)과 동음현(冬音縣)이 이 지역에 설치되었다. 신라의 통일 이후 757년(경덕왕 16)에 도무군을 양무군(陽武郡)으로, 동음현은 탐진현(耽津縣)으로 개칭하였다. 이 시기에 무위사·백련사·정수사(淨水寺) 등 많은 사찰이 세워졌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양무군을 도강현(道康縣)으로 개칭하고 1018년(고려 현종 9)에 영암군에 속하게 했으며, 1172년(고려 명종 2)에 감무가 설치되었다. 탐진현은 처음 영암군에 속했다가 후일 장흥부에 속하게 되었다. 1417년(태종 17)에 도강과 탐진의 두 현을 합쳐서 강진현(康津縣)으로 만들고 탐진에 치소(治所)를 두었으며, 병마도절제사의 영은 도강의 치소로 옮겼다. 현의 치소는 이후 1429년(세종11)에 도강의 송계(松溪)로 옮겨졌다가 1475년(성종 6)에 탐진으로 되돌아왔다. 임진왜란 때 이 지방 출신의 많은 인물들이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들어가 큰 공을 세웠다. 순조 때 정약용이 이곳에 귀양을 와 18년을 지내면서 그의 저술을 대부분 완성하였다. 그 때 거처했던 귤동의 다산초당은 다산실학(茶山實學)의 산실로 유명하다. 한편 무위사의 극락전은 조선 초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1914년에 현재와 같은 강진의 윤곽이 잡혔으며, 1936년에는 강진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1읍 8면으로 되었다. 1919년 전국에서 일어난 3·1운동에 자극을 받아, 김안식(金安植)·오승남(吳承南)·김윤식[金允植, 김영랑(金永郎)] 등이 주축이 되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강진군의 지형은 풍수지리학적으로 황소가 누워있는 와우형국으로 봉은산 정상을 우두봉(牛頭峰)이라 하고 강진읍내의 지명이 소와 관련된 지명(초동. 싯끝, 초지, 가우도)이 많다고 한다. 남해안에 쑥 들어와있는 강진만은 따스한 '요니'처럼 육지속으로 쑥 들어와 조붓하고 아늑하게 보인다고 한다. 어느 작가가 ‘요니(女陰:여성의 성기)’로 표현하였는데 강진의 산과 물의 생김새를 토대로 강진의 지형을 살펴보면 영락없는 여성의 자궁과 같은 형국이라고 한다. 강진군으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상징물이 청자모형인데, 강진군의 모토가 ‘청자의 고장’ 이라고 한다. 강진군 대구면 일대는 9세기에서 14세기까지 고려청자를 제작하였던 지역으로, 우리나라 청자의 변화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는 "청자의 보고(寶庫)"이다. 이와 같은 중요성으로 1963년 국가사적 제68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이 지역에서 지표조사된 청자가마터(窯址)는 총 188기로, 이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청자가마터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숫자이다. [포털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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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구간거리
사자지맥분기점-1.8km-두봉-2.3km-18번국도-1km-당뫼산-2.2km-억불산-1.2km-정남진천문관-2.3km-광춘산-1.4km-자울재-3.5km-바람재-2km-장산재-1.7km-괴바위산-1.5km-장구목재-2.9km-부용산-3.4km-초당연수원-0.7km-깃대봉-0.9km-골치재-3.7km-양암봉-3.7km-천태산-3km-기잿재-2km-부곡산-2.6km-공성산-2.5km-신리삼거리-1.9km-오성산-1.2km-내저마을-3.9km-옹암마을갈림길-1.5km-사자곶/남해합수점-1.8km-옹암마을
* 구간거리
접속: 보성제암산휴양림주차장~지맥분기점 2.5km, 장흥공설공원묘지/ 제암산주차장~지맥분기점 3.5km
- 지맥분기점 ~ 골치재 28.8km
-. 지맥분기점 ~ 자울재 12.1km
-. 자울재 ~ 골치재 16.6km
- 골치재 ~ 옹암마을 29.4km
-. 골치재 ~ 기잿재 11.8km
-. 기잿재 ~ 신리삼거리 6.9km
-. 신리삼거리 ~ 옹암마을 10.7km
-. 사자곶/남해바다 ~ 옹암마을 탈출 1.8km
* 식수 공급지 및 산행 정보
- 보성 택시: 061)852-1414, 2525
- 제암산 자연휴양림(전남 보성군 웅치면 대산길 330): 1박 4만원, 061)852-4434, 예약: 숲나들e
- 정남진 천문과학관: 수돗물, 주차장, 화장실
- 초당약품연수원: 관리사택 뒷마당 수도
- 장흥 택시: 터미널 뒤편 합동사무실
- 자울재 아래 용산면 어산리: 함지안 찜질방 7,000원(영업 중단)
- 자울재 ~ 덕재정류소(장흥농어촌버스): 도보 30분(2.3km)
- 관산 개인택시: 061)867-0988,3400,2626, 010-3607-0708, 1만원, 왕복 20분
- 관산읍 여관: 여인숙, 모텔
- 천관산자연휴양림: 전남 장흥군 관산읍 칠관로 842-1150: 1박 45,000원, 061)867-6974, 골치재에서 5.5km
- 신리삼거리: 슈퍼, 풍년식당, 샘터, 밀창문 쉼터
- 대덕 택시: 061)867-0820, 010-3615-1525
- 옹암마을 버스정류장: 밀창문 쉼터, 팔각정자
* 서울에서 사자지맥 분기점 내려가는 길
- 보성터미널 ~ 웅치면 ~ 보성제암산휴양림 주차장 숲속휴양관
- 센트럴터미널 ~ 장흥시외버스터미널: 07:20, 08:40~ 15:05, 16:05, 17:10, 5h, 44,200원
- 센트럴터미널 ~ 보성버스터미널: 08:40, 15:10, 4.40h, 39,900~43,800원
- 센트럴시티터미널 ~ 광주유스퀘어: 00:45, 01:00, 05:30, 06:15~16:50,~3.20h, 20,800~30,800~40,000원
- 광주유스퀘어 ~ 장흥시외버스터미널: 06:05, 07시, 08:10,~18:40, 20:30, 1.30h, 11,500원
- 광주유스퀘어 ~ 보성시외버스터미널: 06:40~, 1.50h, 10,500원
- 광주 송정역 ~ 보성역: 05:52, 10:34, 15:41, 20, 1.17h, 4,300원
- 장흥시외버스터미널 ~ 사자산 활공장: 장흥택시 17,000원
- 보성시외버스터미널 ~ 웅치면 ~ 제암산휴양림: 보성택시 061)852-1414, 2525
* 옹암리마을회관 버스정류장 서울 올라오는 길
- 옹암리마을회관 ~ 대덕공용버스터미널 ~ 장흥시외버스터미널 ~광주유스퀘어
- 옹암리 ~ 대덕 시골버스: ~17:20, 18시
- 대덕읍 ~ 광주 ~17:45, 18:20
- 장흥시외버스터미널 ~ 센트럴시티: 08, 09, 10, 11, 13:40, 14:30, 15:30, 16시, 17시, 5h, 44,200~54,000원
- 장흥시외버스터미널 ~ 유스퀘어: 10, 14:30, 15:50, 16:20, 18:20, 20:30, 1.30h, 14,200원
- 광주유스퀘어터미널 ~ 동서울: 12:40, 13:20, 14, 14:50, 17, 19:10, 19:50, 21:20, 3.30h, 22,500~33,300원
- 광주유스퀘어터미널 ~ 센트럴: 19:45, 20, 20:10, 20:20, 21, 21:15, 22:30, 23:20, 24, 3.20h, 30,800~48,000원
- 광주 송정역 ~ 용산: 05:38, 06:01, 06:10, 07:41, 08:04~, 20:30, 20:50, 21:20, 22:30, 2.02h, 34,700~46,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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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작성하는 산행후기가 우리나라에 있는 1대간 9정맥 6기맥 162지맥의 산줄기 체계에 한분이라도 더 관심과 흥미를 가지는데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바빠서 정보를 취합하기 힘든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시간을 절약하는데 도움이 되었음 하는 바람입니다. 지맥을 하는 방법은 취향에 따라 각인각색입니다만 저는 대중교통을 원칙으로 합니다. 기존에 걸려있는 띠지를 보수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여 산행 중 띠지는 따로 걸지 않습니다. 저 또한 선답자님들 산행기와 인터넷에서 자료를 취합한 것이기에 얼마든지 가져다 쓰시되 더 훌륭한 산행기를 남겨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노벨문학 도시로 뜨고 있는 장흥군에는 부산면이 있고 강진군에는 대구면이 있군요. 오호^^ 순창군에는 강진면도 있어요. 일단 알고 갑니다. 가시잡목과 큰 고도 편차로 체력적인 부담이 큰 반면에 바다를 바라보는 조망이 줄곧 눈을 호사스럽게 합니다. 호남정맥인 사자산 미봉(667.5m)에서 분기되어 서남으로 뻗치며 안양면 기산리 미륵댕이를 거쳐 우드랜드 편백 숲을 거슬러 올라 억불산(518m), 광춘산(387m)을 지나고 자울재와 용산면 어산리 뒷산을 거치고, 장흥과 강진의 군계를 따릅니다. 땅끝기맥과 가장 근접한 괴바위산(464.1m)을 지나면서 남직진하여 부용산(610.9m)을 거치고 이어 깃대봉(361.5m), 숙구봉(331.2m)을 지나고 양암봉(469.2m)에서 남서진하여 대덕읍 천태산(549m)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남진하여 493.4m봉에서 군계를 벗어나 장흥군으로 진입하여 부곡산(424m), 공성산(361m), 오성산(216m)에서 옹암리 앞 남해로 빠져드는 산줄기가 사자지맥입니다.
비가 내리는 야심한 밤 10시에 장흥에 내려 모텔과 여관을 대여섯 곳을 돌았지만 때맞춰 전국레슬링대회를 개최하는 통에 방을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할 수 없이 **모텔 맨 위층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 위에서 텐트를 펼쳤네요. 벌어진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태풍급이었습니다. 콩나물해장국집은 6시에 문을 연다기에 편의점에서 빵, 우유로 간단히 요기하고 새벽 05:30분 택시를 잡아 사자산 활공장을 향했습니다. 기럭시로 말한다면 비슬, 보현, 팔공 등등 쟁쟁한 지맥이 많지만 명감나무 가시와 이제 막 세력을 뻗치기 시작한 찔레, 줄딸기 등이 산죽에 섞여 있어 정강이는 남아난 곳이 없고 가시에 머리채를 몇 번이나 잡아뜯겼는지, 땅바닥에선 발을 잡아끄는 넝쿨식물하며 사자지맥은 지금까지 제가 졸업한 지맥 중에 가장 강력한 지맥이었습니다. 산죽과 잡목지대도 다른 어느 지맥보다 많았고 사람 키를 훌쩍 넘기는 산죽밭을 헤쳐나가는데 스틱이 방해가 된다는 생각도 젤 많이 들었습니다. 첫날 야간 행군으로 좀 더 길게 갈 수 있었지만 초당연수원에서 비박한 이유는 물, 핸폰 충전 때문이었고, 신리삼거리에서 시간이 촉박하게 느껴져 옹암리에서 막차를 탈려면 마지막 신의 한수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오성산을 패스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다녀와도 되었더군요. 제암산과 천관산은 굉장해서 제 아무리 무서운 사자산이라도 주눅이 들 수밖에 없을것 같던데요. 시작에 제암산을 두고 정남진으로 향하며 줄곧 천관산과 동행합니다. 기잿재에서 올라선 연해산성(만리성)은 이 지역 고대사를 베일에 가리게 하는군요. 『삼국사기』 장보고 열전에서 청해진(淸海鎭)은 완도군 장도(將島)로 기록하고 있지만 그 곳은 전초기지일 뿐 장보고의 주 생산무기인 도자의 본요지인 강진이 주본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땅끝기맥을 하며 완도에는 지맥이 없어 섭섭한 마음이 일었는데 사자지맥이 완도로 항해(航海)하는 지맥이군요. 그렇게 사자지맥의 끝에서 완도를 마주보고 해상왕 장보고대사와 만나게 됩니다. 사자지맥은 왜구와 왜적을 소탕한 성웅 이순신과 해상왕 장보고가 천관산과 제암산으로 사자처럼 포효하는 지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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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차를 이용하시는 산객님은 콜택시로 회수까지 고려하면 장흥쪽에서 들머리를 잡아야 유리합니다.
♤ 사자지맥 들머리
사자지맥 분기점인 사자산은 제암산휴양림에서 담안저수지를 지나 임도에서 산행을 시작해 계곡 등로를 따라 고산이재에서 호남정맥을 접근해 오른쪽으로 사자산을 오르는 편이 가장 빠른 접근이 된다. 그러나 지맥 분기점으로 어프로치하는 시간을 고려하면 활공장까지 택시를 이용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다.
호남정맥을 하며 사자산 미봉을 2019. 4. 14. 10:42분 지났으니 6년 만입니다.^^
♤ 사자산 미봉(獅子山 尾峰, 667.5m)/ 지맥분기점/ 정상석/ 군계/ 삼읍면봉(웅치면 대산리 → 장흥읍 삼산리, 안양면 비동리)
사지산 미봉 정상에 도착하면 앙증맞은 정상석이 있다. 준희선생님의 사자지맥분기점 산패가 철쭉나무에 매달려 있었으나 바람에 날라갔는지 지금은 없다. 사자산 정상에서 득량만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정상은 거대한 암반으로 이루어졌다. 사자산은 호남정맥에 속하는 산이며, 전남 보성군 웅치면 대산리와 장흥군 안양면 비동리, 장흥읍 삼산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보성군의 진산이며, 곰재를 사이에 두고 제암산과 마주보며, 제암산 사이에 철쭉 군락지로 유명한 능선이 동서로 400m 길게 뻗어 있으며 매년 5월 철쭉제가 열린다. 제암산, 억불산과 함께 장흥을 둘러싸고 있다. 산 모양이 사자가 장흥을 향해 머리를 두고, 날씬하게 등줄기를 뻗고 서쪽 보성을 향해 꼬리를 세워 엎드려 고개를 든 채 일어서려는 형상을 하고 있어 사자산이라고 부르며 장흥은 안양면 모령리 마을 쪽에서 보면 수사자가 앉아있는 모습이고, 장흥읍에서 보면 사자의 머리쯤으로 생각되는 곳이 일본의 후지산을 닮았다 하여 장흥의 후지산으로도 부른다.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후지산으로 불렀고 이곳에 쇠말뚝을 박았다고 전한다. 머리 쪽은 사자산 두봉(頭), 꼬리 쪽은 사자산 미봉(尾)이라 부르며 두봉과 미봉의 거리는 약2km이다. 사자지맥 두봉 못미쳐 좌우에 활공장을 지난다.
♤ 장흥군 장흥읍(長興邑)
장흥군의 중앙부에 위치한 읍으로 읍소재지는 기양리이다. 본래 장흥군 지역으로서 장흥부(長興府) 소재지이므로 부내방(府內坊) 또는 부내면(府內面)이라 하여 11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 개정에 의하여 장흥부를 장흥군으로 고침과 동시에 군내면(郡內面)으로 고치고 1914년에 장흥면이라고 해서 15개 리로 개편되었다. 1932년에 부동면의 12개 리를 편입하여 27개 리가 되고 1942년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삼국사기지리지』(보성)에 "마읍현(馬邑縣)은 본시 백제의 고마미지현(古馬弥(彌)知縣)으로 경덕왕이 마읍(馬邑)으로 개명, 지금의 수령현(遂寧縣)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수령현이 현재의 장흥읍이다. 『해동지도』(장흥)와 『호남지도』의 장흥읍 일대에 벽사역(碧沙驛), 예양서원(汭陽書院), 연곡서원(淵谷書院) 등이 기록되어 있다. 동쪽은 사자산, 서쪽은 수인산(561m), 남쪽은 억불산(517m)·광춘산(384m) 등에 둘러싸여 분지를 이루며 보성군·강진군 등과 접해 있다. 탐진강이 읍의 중앙부를 관류해 남서류하다가, 송암리 일대에서 금강(錦江)과 합류해 강진군으로 흘러 남해로 흘러든다. 하천 연안에는 비옥한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벼농사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콩·감자·고구마·깨 등이며, 특산물로는 인삼·표고버섯 등이 있다. 교통은 기양리를 중심으로 강진·보성·영암 등을 잇는 국도와 지방도가 있어 편리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교촌리의 장흥향교, 원도리의 연곡서원, 예양리의 영회단, 송암리의 사인정, 기양리의 창랑정, 덕제리의 독취정, 평화리의 고영환가옥, 기양리·남동리의 장흥읍성지, 건산리의 중녕산고성이 있다.
땅끝기맥 영암군 금정면 궁성산을 오르며 대나무숲 아래 탐진강 발원지를 다녀왔던 추억을 소환해 봅니다.
♤ 탐진강(耽津江)
장흥군 유치면·장동면에서 시작되는 56㎞ 강줄기로 부산면을 거쳐 장흥읍의 중심부를 가로질르며 영암군·장흥군·강진군을 흘러 남해로 유입된다. 영암군 금정면 세류리 궁성산(484m) 북동쪽 계곡에서 발원 남동쪽으로 흘러 장흥군 유치면 보림사 앞을 지나 남쪽으로 바꾼다. 유치천과 제비내를 합류하고, 장흥읍을 관류하여 남서쪽으로 흐르다가 금강을 합류한 후 강진군 강진읍 남쪽에서 남해 도암만으로 흘러든다. 영산강, 섬진강과 더불어 전남 3대강의 하나로 "납양강(納陽江)" "예양강" "수녕천"이라고도 불리운다. 탐라도 사람이 육지에 처음 배를 대어 올라왔다하여 탐진강이라 부른다. 아직까지 오염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백옥같은 물줄기로 굽이마다 울창한 숲과 기암괴석의 절경이 함께 어우러져 이곳 강줄기마다 풍류를 즐기고 시국을 논하던 10 개 정자가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머무르게 한다. 탐진강 하천명은 탐라의 사자가 신라에 조공할 때 배가 이 강 하구의 구십포에 머물렀다고 해서 탐라국의 탐자와 강진 진(津)자를 따서 탐진이라 한데서 유래되었다. 강유역에는 용반평야를 비롯하여 부산평야·장흥평야·강진평야가 분포한다. 탐진강 하구 구십포는 수심·수온 등이 장어가 살기에 알맞아 장어 서식지며 은어도 서식하나 하천오염으로 인해 줄고 있다. 유역 내에는 보림사를 비롯한 고성사·금곡사·무위사 등의 사찰과 궁성·수인산성·수암서원·연곡서원·사인정·부춘정 등의 유물· 유적이 있다. 이 강의 지류인 금강(또는 금강천)의 상류지역은 월출산국립공원에 속한다.
♤ 장흥군 안량면(安良面)
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으로 면 소재지는 운흥리이다. 본래 안양면(安壤面) 지역으로서, 1886년 안상면·안하면으로 분리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안량면으로 되었다. 동쪽은 골치산, 서쪽은 억불산, 북쪽은 사자산 등이 솟아 있다. 사자산에서 발원하는 월계천(月溪川)과 억불산에서 발원하는 수대천(水大川)이 합류해 홍거천을 이루며, 면의 서부를 남류하다가 득량만으로 흘러든다. 하천 연안에는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벼농사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해안에는 해안 평야가 이루어져 있으며, 장재도는 인공 제방으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잡곡·마늘·고추·양파 등이며, 수산물로는 키조개·피조개·꼴뚜기·낙지 등이 있다. 교통은 강진·보성 등을 잇는 국도가 연결되어 있으며, 목포∼여수간의 여객선이 운항되어 편리한 편이다. 주요 관광지로는 수문리에 수문포해수욕장이 있어 여름철의 휴양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문화유적은 기산리의 기양사(岐陽祠), 학송리의 충현사(忠顯祠), 수양리의 학성·사현사(四賢祠), 운흥리의 운곡단·포충사 등이 있다.
저곳 비동리 비동제(飛洞堤) 옆에서 달바우산(399.2m)으로 사자지맥을 어프로치 하는 분들도 계시던데 거리도 멀고 구간도 힘들다고 알려졌네요.
♤ 장흥군 안양면 비동리(飛洞里)
장흥군 안양면 비동리는 사자산 앞 평지에 자리한 농촌마을로 벼랑처럼 된 층암이 바닥에 깔렸으므로 비렛골, 비래동 등으로 불리다가 비동리로 개칭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비동, 동촌, 중골, 절테, 붓당골마을 등이 있으며, 비동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로, 지명유래 또한 비동리의 그것과 같다. 동촌마을은 비동의 동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중골마을은 비동과 동촌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고 절태마을은 절터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붓당골마을은 불당이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천관산과 제암산은 포스와 아우라가 올림프스 산의 제우스급 입니다.^^
♤ 제암산(帝岩山, 806.2m)
제암산은 장흥읍, 장흥군 장동면 용곡리·반산리, 보성군 웅치면 대산리에 걸쳐 있으며 호남정맥에 위치하며 장흥군과 보성군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일명 곰재산이라고도 한다. ‘임금 제(帝)자’ 모양의 3층 형태로 높이 30m 정도되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골짜기마다 샘이 많으며 장흥의 진산답게 웅장한 모습을 자랑한다. 지명의 유래는 수십명이 한자리에 앉을 수 있는 이 정상의 바위를 향하여 여러 바위와 장흥 인근의 모든 산들이 이 산을 향하여 기립한 듯하고 또한 모든 산들이 이 산을 바라보고 임금에게 공손히 절을 하고 있는 형상이라 임금바위(帝巖)이라고 부르며 이 산을 제암산이라 한다고 전해진다. 웅장하고 남성스러운 느낌을 강하게주는 산이다. 산 속에는 가난한 형제가 나물을 뜯으러 갔다가 떨어져 죽어 바위가 되었다는 형제바위가 있고, 형제바위 아래 좌우에 의상암자와 원효암자가 있다. 정상은 제암단이라 하여 예부터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제암산은 정상 바위가 임금 제(帝)자와 비슷하다 하여 ‘제암산’이라 불리고 있다. 지형적으로 남동쪽 사면은 비교적 완만하지만, 북서쪽 사면은 급경사를 이룬다. 남쪽으로는 사자산·억불산·천관산, 북쪽으로는 금장산·용두산·봉미산 등이 뻗어 있고, 동쪽으로는 보성을 지나 고흥반도까지 그 여맥이 이어지고 있다. 산 정상부는 넓은 풀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높은 곳에 3층으로 된 바위가 있어 100여 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다. 호남정맥의 한 줄기로 서남해와 장흥군 보성군의 경계를 품어 안은 산으로 군의 경계를 이루면서 완만한 능선과 기암괴석이 조화를 이루어 다양한 등산로, 소나무와 철쭉 그리고 다양한 산야초가 자생하고 있어 등산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중턱에 자연휴양림이 조성되어 있으며 용추골 용추폭포는 관광지로 유명하다. 제암산 정상인 제암(帝岩)바위는 장흥군 장동면 하산리 산 172-2번지로 이곳에서 바로 보면 장흥군과 보성군 일원이 발아래 굽어 보이고 동으로 팔영산, 남으로 다도해, 천관산, 부용산, 서쪽으로 두륜산과 월출산, 북으로 모후산, 무등산 등 호남 일원의 크고 작은산을 다 조망할 수 있다. 제암산의 볼거리는 뭐니뭐니해도 정남진의 따뜻한 훈풍에 힘입어 4월 하순부터 5월 중순까지 피어오르는 화려한 진분홍빛 자생 철쭉이다. 사자산 하단부에서 시작되는 자생 철쭉은 사자산 등성이와 곰재산, 제암산 정상을 지나 장동면 큰 산에 이르기까지 총 6km 길이에 폭이 많게는 200m에서 적게는 50m에 이르고 있다. 그중에서 사자산 ~ 간재3거리 ~ 곰재 ~ 곰재를 잇는 능선이 제암산의 가장 유명한 남도제일의 철쭉군락지이다. 남쪽 사자산 사이에 있는 철쭉 군락지대에서는 1991년부터 매년 5월 제암 철쭉제가 열리고 있다. 제암철쭉제는 전국 철쭉제 중에서 맨 처음 시작되는 시발지로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 사자산 패러글라이딩 활공장
장흥에는 천관산과 사자산 두개의 활공장이 있다. 천관산이 큰 비행이 가능한 곳이라면 사자산은 초중급자들이 즐길만한 곳이다. 사자산의 허리(脊椎: 등뼈)에 해당하는 지점으로 주위에 억새가 많아 마치 사자의 갈기를 연상케 한다. 장의자와 평상이 있는 첫번째 활공장을 지나고, 고 임재량 추모비를 지나 두번재 활공장이 있다. 이곳은 패러글라이더 30대가 동시에 이륙할 수 있는 이·착륙장이 있고, 5~9월까지는 항상 남풍이 불어 패러글라이딩의 명소로 이름나 있다. 그래서 해마다 9월 초에는 장흥 재향군인회에서 주관하는 사자산 일주 산악구보 행사와 함께, 사자산과 탐진강(耽津江)변에서 전국패러글라이딩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활공장에서 내려서 사자의 이빨을 연상하는 멋진 주상절리를 보며 사자산 두봉으로 향한다.
두봉에 이르기 직전 만나는 주상절리가 지맥의 왼쪽이 안양면 비동리에서 기산리로 바뀌는 읍면계이자 삼리봉 지점입니다.
♤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岐山里)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는 중국의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도읍하였던 기산과 흡사하다하여 기산(岐山)이라고 하였다 한다. 기산, 동계 등의 자연마을이 있다. 마을 앞에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조선 중엽 팔문장이 태어난 곳으로 장흥에서는 으뜸 마을이라 하여 일기산이라고 불려왔다. 지맥은 기산고갯 마루 왼쪽의 절개지를 따라 산으로 오른다. 사자산 두봉에서 기산리 내안을 통과한 지맥이 당뫼산을 올라서며 장흥읍 향양리와 만난다.
사자산의 머리가 좀만 더 높았더라면 위엄이 있었을텐데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 사자산 두봉(獅子山 頭峰, 569.2m)/ 읍면계/ 삼리봉(장흥읍 삼산리, 안양면 비동리 → 기산리)/ 산불감시카메라, 국가지점번호판
제암산, 일림산, 땅끝기맥 월출산, 활성산, 주작덕룡, 두륜산, 남해바다 득량만, 소록도 장계지맥... 이게 다 보인다니 생각만으로도 시원하다. 사자산(獅子山) 두봉은 길게 뻗어 안양면의 월계골까지 이어지는데, 흡사 고개를 들고 먼 산을 바라보는 풍수지리상 사자앙천형(獅子仰天型: 사자가 하늘을 우러러 포효(咆哮)하는듯한 지세)의 이 산은 장흥읍내를 지키는 수문장처럼 보인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 고장 사람들은 이 산을 사자산이라 하였고, 일제강점기 장흥에 살았던 일본인들은 이 산의 모습에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사자산이 일본의 후지산과 닮았다고하여 장흥 후지산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장흥읍내와 남해로 빠져나가는 탐진강을 바라보며 계단으로 만들어진 두봉에서의 내림길로 내려선다. 하지만 끝까지 평탄하지만은 않다. 지맥은 두봉 정상에 서있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기산마을 1.8km 방향으로 왼쪽으로 휘어져 내려선다.
사자지맥은 줄곧 제암산, 득량만, 천관산의 세벗을 친구삼아 완도를 향해 진행합니다.
♤ 득량만(得糧灣)/ 보성만(寶城灣)
득량만은 전남 고흥군의 고흥반도 북서쪽에 있는 만으로 『조선지형도』에 의하면 본래는 장흥반도와 고흥반도 사이에 있는 지금의 보성만 전체를 아우르는 만이었다. 그러나 보성만(寶城灣)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고 그 구획이 설정되면서 득량만(得粮灣)은 고흥군 · 보성군 · 장흥군으로 둘러싸여 있는 보성만의 후미 부분만을 일컫게 되었다. 만(灣) 깊숙한 곳에는 고흥군 남양면의 우도(牛島)와 무인도인 각도섬, 하구룡도, 중구룡도, 상구룡도가 있고 주변 해안에는 간척지가 널리 펼쳐져 있으며, 고흥군 대서면 남정리와 보성군 조성면 예당리에는 득량만방조제가 건설되어 넓은 간척평야가 조성되었다. 지명은 득량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서 식량을 얻었다하여 득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득량만(得糧灣)을 글자대로 풀이하면 ‘양식(糧食)을 얻는 만(灣)’이라는 뜻이다. 천혜의 청정지역으로 장어, 김, 키조개가 많이 수확되고 각시바위 등 기암괴석이 있어 해변 경관이 아주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
원칙을 고수한 선답자의 띠지가 안내를 해줍니다. 나무와 잡목에 빗물이 남아 옷과 신발이 다 젖었습니다.
♤ 동향표고(1.1km) 이정표
사자산 두봉에서 계단을 따라 약 10분쯤 내려선 지점으로 국가지점번호판과 글씨가 다 지워진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삼거리이다. 원지맥길은 여기에서 오른쪽 잡목숲으로 동향표고 방향으로 들어선다. 동향표고(1.1km) 길을 계속 따라도 물길을 건너게 되기에 중간에 왼쪽으로 꺾어서 임도로 내려서며 한천골 편백나무와 대나무 군락지에 소재한 광산노씨의 사당 효성사(孝星祠)을 만나 사당 정문에서 우틀하여 양회임도를 지나 갈림사거리에서 과수원과 마늘밭, 차밭으로 빠져나가 양회임도를 따른다.
광산노공효행비와 효성사(孝星祠) 입구 표지석이 있네요. 들입구는 주유소를 지나지마자 진입하면 편리합니다. 사자산 두봉에서 내려서며 양회임도를 만나 18번 국도까지 편하게 임도를 따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 기산(岐山)고개/ 18번국도/ 4차선도로/ 미륵댕이
기산고개는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를 넘나드는 4차선 포장도로인 18번국도가 지나가는 고개로 날머리는 기산마을 진입로이고 들머리는 LPG충전소 간판 왼쪽 절개지이다.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에 있는 고개라서 붙여진 이름인듯 하다. 왼쪽으로 가야할 억불산이 바라보인다.
당뫼산 정상에 삼각점을 찾기 힘들다는데 약 3~4m 떨어진 곳에 오룩스 위치에 정확하게 있습니다.
♤ 당뫼산(164.7m)/ 4등삼각점(장흥 420/ 2001. 6. 재설)/ 읍면계/ 삼리봉(안양면 기산리, 장흥읍 향양리 → 우산리)
들머리는 공동묘지 오른쪽이다. 묘지 지대를 지나고 군부대 예비군 각개전투훈련장을 지나 정상에 오르니 정상에도 묘지가 있고 백두사랑산악회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져 있다. 삼각점은 정상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다. 지맥의 오른쪽이 장흥읍 향양리에서 우산리로 바뀌는 읍면계이자 삼리봉 지점이다. 왼쪽 등로따라 내려선다. 당뫼산이라는 이름이 산은 전국에 많다. 예전에 산꼭대기에 기도터 성격의 성황당, 당집이 있었던 곳이다. 당뫼산이나 당산이나 기도터 때문에 접근성이 좋게 크게 높지 않고 오르기 쉬운 정도의 산이다. 동쪽으로 내려서서 공동묘지를 지나고, 버려둔 배 과수원안으로 들어가 나무 밑을 지나 과수원을 빠져나간다.
버려진 배밭을 약 2~300m를 지나 덕림재로 내려서며 반대편으로 곧바로 올라서면 우드랜드 임도입니다. 손석연씨묘로 들어가는 안내표지를 만나는데 이분이 임야 일부를 장흥시에 기증해 우드랜드를 조성했다 합니다. 지금 묘지 단장 공사를 하고 있는데 이 묘지를 지나 며느리바위 아래로 들어가 옛 등산로로 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 덕림재(120m)/ 2차선 차도
덕림재는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와 장흥읍 우산리를 넘나드는 포장 2차선 우드랜드길이 지나가는 고개로 말안장 처럼 생겨 예전 명칭은 질마재였던 모양이다. 좌우측에 사자지맥 들날머리가 있다. 날머리는 과수원이고 들머리는 우드랜드 진입 임도 길이다. 왼쪽의 마루금을 따라 며느리바위 바로 아래까지 가는 예전의 정규등산로가 원마루금과 가까운 지맥길인데 안전을 이유로 등로가 폐쇄되어 중간에 길이 없어지고 가시잡목에 가팔르고 위험하여 덕림재에서 억불산 오름길은 잡목이 심하기로 악명이 높다. 상부에 너덜지대도 나온다. 조금 돌더라도 신설된 우드랜드 임도를 따라 오르면 편하다. 말레길을 따라 오르다 정상 2km 지점에서 말레길을 버리고 왼쪽으로 등산로를 찾아 억불산을 우에서 좌로 횡단하며 오르기도 한다. 기산고개에서 억불산 정상까지 2,650m를 데크로 연결한 말레길을 따르길 추천하지만 선택은 각자 자유다.
포토존에서 조금 더 오른 출입금지 간판이 있는 곳에서 왼쪽 오래된 산판도로를 따라 올르다가 며느리바위만 보고 사선으로 접근했는데 등고선이 조밀한 벼랑을 암벽을 타고 올르기도 하고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산판도로로 며느리바위 바로 아래까지 가서 옛 등로를 찾아 올르면 편하겠더군요.
♤ 며느리손바닥바위/ 며느리바위의 전설
며느리손바닥바위를 지나 정상에 오르면 정상 약간 아래로 며느리바위가 있다. 재미있는 전설이 담긴 며느리 바위는 어린애를 업은 여자의 형상, 아니면 스님이 합장하고 기도하는 부처 모습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 웅장함에 놀라게 된다. 며느리바위에는 장자못계의 유래담이 전해 온다. 옛날 박씨와 임씨가 사는 탐진강변 마을에 구두쇠영감이 살았다고 한다. 구두쇠 영감은 시주하러 온 도승을 박절하게 대하자 며느리는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도승은 며느리에게 "모월 모일 이곳에 물난리가 있을 것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산으로 가라"는 예언을 해 주었다. 도승의 예언이 있던 날 며느리는 물난리를 피하여 산을 오르다가 '며늘아가! 나를 두고 혼자만 가느냐?' 하는 구두쇠 시아버지의 애절한 부름에 뒤를 돌아보자 그만 그대로 돌로 변하였다. 그 바위를 '며느리 바위'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며느리가 쓰고 있던 수건이 남풍에 날려 떨어진 곳은 지금의 '건산(巾山)마을' 이며 구두쇠 영감이 살던 곳 장랑정 앞에는 박림소가 있으며, 2008년부터 정남진 장흥 물축제가 개최되고 있다. 황해도 몽금포 장연읍에도 애기를 업은 형상의 며느리바위가 있어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세종시 양화리 전월산에도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이야기의 모태는 성서의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와 같고 형상은 우이동의 우이암과도 같다.
장흥읍내를 조망하고, 장흥읍내 뒤쪽 톱날능선의 수인산 뒤로는 강진군 병영면입니다. 제암산쪽은 화순이구요. 탐진강이 발원지가 있는 활성산 팔랑개비도 잘 보입니다. 가야할 지맥 능선도 바라보며, 강진만과 득량만의 남해바다, 멀리 천관산도 바라보고 마지막으로 출발한 제암산쪽 사자산을 뒤돌아보고 출발합니다. 국가지점번호 위치에서 암릉길을 따라 내려섭니다.
♤ 억불산(億佛山, 517.4m)/ 봉수대/ 삼읍면봉(장흥읍, 안양면 → 용산면)
정확하게는 정상은 안양면 기산리와 수양리의 경계이고, 서쪽으로 조금 내려선 곳의 바위 전망대가 있는 무명봉이 삼읍면봉이다. 장흥읍 우목리·수양리, 안량면 기산리, 용산면의 계산리·모산리에 걸쳐있는 삼읍면봉이며 지맥의 왼쪽이 안양면 수양리 → 용산면 모산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벼락바위에서 억불산 정상을 향하며 중간쯤에 등산로와 데크길 두갈래 길이 나오는데 산길쪽이 등로도 괜찮고 직선거리도 가깝다. 가야할 지맥 능선이 환하게 보이는 조망 명소이다. 천문과학관에서 등산로로 1km 거리이고 데크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비박 명소이다. 지맥은 벼락바위에서 왼쪽 천문대쪽으로 향한다. 장흥읍 동남쪽에 있어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는 억불산은 높이가 비교적 낮은 편이지만 능선이 길고 부드러워 마치 고운 여인이 치맛자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걷는 것과 같은 형상이다. 억불산이라는 이름은 정상 부근의 바위 모양이 억 개의 부처가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이름 지었다 한다. 옛날 봉수대가 있던 정상부에는 기암괴석이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고 특히 탐진강과 함께 장흥을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고 있다. 지형적으로 남쪽 사면은 비교적 완만하지만, 북쪽 사면은 급경사를 이룬다. 억불산 봉수는 동쪽으로 전일현(全日峴)에 응하고 남쪽으로 천관산에 응하며 북쪽으로는 강진의 수인산에 응한다. 전일현(全日峴)의 봉수는 부의 동쪽 36리에 있는데 동쪽으로 보성군 정흥사(正興寺)에 응하고 남쪽으로 천관산에 응하며 서쪽으로 억불산에 응한다. 천관산 봉수는 동쪽으로 전일현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강진현의 남원포(南垣浦)에 응하며 북쪽으로 억불산에 응한다. 능선 끝에는 장흥 남부로 통하는 덕림재가 있다. 억불산은 편백나무가 많기로 유명하다. 20만 평의 편백숲이 산책로로 최적이어서 아침 산행을 하는 사람들과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오르는 산으로 장흥 사람들의 건강을 지켜 주는 산이기도 하다. 특히, 산 중턱에 천문과학관이 개관되면서 5부 능선에 있는 천문과학관까지 4~6m 폭의 임도가 잘 조성되어 있고 가로등과 음향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낮이든 야간이든 누구나 부담 없이 공원에서 산책하는 기분으로 오를 수 있다. 억불산 기슭에 정남진 편백숲 우드랜드가 자리잡고 있다.
♤ 장흥군 용산면(蓉山面)
군의 중남부에 위치한 면으로 면 소재지는 접정리이다. 본래 영암군 정안현 지역으로서, 장흥부에 속하고 장흥읍 남쪽에 있다 하여 남면(南面)이라 하였다. 1886년 남상면·남하면으로 분리되었다가, 1932년 다시 남면으로 고쳤으며, 고마·죽청·하발의 3개 리가 관산읍으로 편입되고 1940년 용산면으로 되었다. 동쪽은 노승산, 서쪽은 괴바위산(477m)·부용산, 북쪽은 억불산·광춘산·연대봉(燃臺峰, 397m) 등이 있으며, 분지를 이루고 있다. 남상천이 면의 중앙부를 가로질러 동류하다가 득량만으로 흘러든다. 하천 연안에는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벼농사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잡곡·고추 등이며, 특산물로는 조개·표고버섯·유자 등이 있다. 연근해에서는 숭어·장어 등이 어획되고 있다. 교통은 강진·보성 등을 잇는 국도와 지방도가 있어 편리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월송리의 조선백자도요지, 어산리의 푸조나무와 당곡사(唐谷祠)·영석재, 계산리의 충렬사와 연대봉 아래 성지가 있다. 이 밖에도 모산리의 용강사(龍岡祠)·월산재(月山齋), 상금리의 수원백씨열녀비, 운주리의 부용사 등이 있다.
♤ 장흥군 용산면 모산리(茅山里)
억불산 앞에 자리하였으며, 작은 하천이 흐르는 농촌마을이다. 마을 가운데 연못이 있고 뒷산에 띠(矛)가 많이 있어 모산리라 하였다. 띠가 묘를 말하는 것은 아닌지, 자연마을로는 모산, 건네뜸, 서잿골, 여시골, 저탯골마을 등이 있다. 용산면 모산리에 있는 포곡(蒲谷)마을은 고려 시대 장흥부가 위치하였던 관산읍과 인근하고 있어 관산의 세력권에 속해 있던 곳으로 장흥위씨, 창녕조씨, 영광김씨, 장흥고씨 등 집안의 재각과 사원이 자리한 곳이다. 이곳에 있는 월산재라는 강당은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73호로 지정되었다.
♤ 억송정(사각정자)/ 읍면계/ 삼리봉(장흥군 용산면 모산리, 장흥읍 우산리 → 평화리)
억불산에서 천문과학관으로 진행하다 김해김씨세장산 오석 표지석이 있는 사각정자 억송정이 있는 지점에서 지맥의 오른쪽이 장흥읍 우산리에서 평화리로 바뀌는 삼리경계면이다.
광화문의 정동쪽 동해바다 정동진에서 따왔답니다. 정북진은 압록강변의 중강진이라네요.
♤ 정남진(正南津) 천문과학관
정남진은 정동진이 서울 광화문에서 정 동쪽으로 내달으면 도착하는 나루라는 유래를 가진 것에 착안하여 장흥군이 발굴한 지역 이미지 브랜드로서 서울 광화문에서 정남쪽으로 내려오면 도착하는 해변이며 북쪽의 가장 추운지방인 중강진과 일직선상에 있다. 그 좌표점은 장흥군 관산읍 신동리에 표시되어 있다. 정남진 천문과학관은 며느리 바위의 애닮은 전설이 깃든 억불산 자락에 위치한 전남 최초의 천문과학관이다. 2006년 7월 7일 개관하였으며 부지면적 4,855㎡, 건평 438.48㎡(연면적 733.84㎡) 규모의 지상 2층 건물이다. 7m의 원형돔으로 된 주관측실에는 600mm 리치크레티앙식 반사망원경과 아포크로메틱 굴절망원경이 설치되어 있고 슬라이딩돔의 보조관측실에는 6대의 다양한 반사망원경과 굴절망원경이 있어 낮에는 태양의 표면을, 밤에는 행성, 은하, 성운, 성단, 달 표면, 태양의 흑점과 홍염 등을 자세히 관측할 수 있다. 또한 천체투영실에서는 밤낮이나 기상에 관계없이 사철 가상의 별자리를 볼 수 있고 시뮬레이터로 생동감 있는 별들 사이의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교육프로그램으로 사계절 별자리여행, 다큐멘터리 등을 상영하기도 한다. 천문과학관은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주간에는 태양 관측을, 오후 8시부터 9시까지 야간에는 별자리 및 태양계 천체 관측을 할 수 있다. 화장실에 물도 나오고, 그 앞에도 식수대가 있다. 천문과학관에서 왼쪽 도로로 차고지를 지나 뒤쪽 산으로 오른다.
♤ 275.7m봉
천문과학관에서 직진하여 돌계단을 타고 잡목능선으로 오른 편백나무로 조림된 별 특징은 없으나 엄연히 사자지맥의 족보있는 봉우리이다.
♤ 자푸재(215m)/ 장흥군 용산면 모산리
정남진 천문과학관을 지나 양회임도가 지나가는 자푸재를 횡단해 표지목 뒤로 이어지는 폐임도를 진행한다. 자푸재는 장흥군 용산면 모산리 포곡마을과 장흥읍 평화리를 넘나드는 양회임도가 지나가는 고개이다. 왼쪽 모산리 방향으로 창녕조씨세장산비가 서있고, 이정표가 있으며 임도를 벗어나 산길로 들어서 광춘산(387.9m)을 향해 오른다. 자푸재는 인근 자올재가 자울재로 음운 변화한 것처럼 모산리에 있는 포곡마을을 넘나드는 고개란 의미의 자포(自蒲)재가 자푸재로 음운이 변화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 321.9m봉
약 15분 산길을 오르면 준희선생님 산패가 굵은 참나무에 높게 매어 있다. 이후 산죽길이 나오며 지나온 지맥능선과 탐진강이 휘돌아 나가는 장흥읍내를 조망하며 지난다. 남쪽인 지맥 왼쪽으로는 남해바다 득랑만이 보이고, 그 뒤로 바다 건너가 고흥반도이다.
♤ 광춘산 0.7km 이정표/ 읍면계/ 삼리봉(장흥군 용산면 모산리, 장흥읍 평화리 → 덕제리)
이제는 이정표 글자가 모두 지워져 있다. 지맥의 오른쪽이 장흥읍 평화리에서 덕제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장흥시내에서 바라보면 억불산, 정남진천문과학관, 광춘산이 기다랗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광춘산까지는 억불산에 딸린 산줄기로 보아야 할것 같습니다.
♤ 광춘산(廣春山, 387.9m)/ 2등삼각점(장흥 24/ 1990 재설)
백두사랑산악회 산패가 참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다. 조망도 없고 정상석도 없지만 등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정상에 텐트 한동 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다. 자울재까지 내려서는 등로는 비교적 편안하다.
♤ 315m봉/ 함질봉갈림길/ 읍면계/ 삼리봉(장흥읍 덕제리, 용산면 모산리 → 어산리)
지맥의 왼쪽이 함질봉(413.5m)으로 향하는 분기점으로 용산면 모산리에서 어산리로 바뀌는 삼리봉 지점이다.
자울재 아래로 자울재 터널이 뚫리면서 지금은 차량 왕래가 뜸한 편입니다. 자울재 아래 용산면 어산리로 내려서면 함질산 아래 참숯가마 '함지안' 찜질방이 있다는데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 자울재(135m, 眠峙)/ 23번국도/ 자오현(自吾峴)/ 왕복4차선/ 장흥읍 - 용산면
자울재는 장흥군 용산면 인암리와 어산리, 장흥읍 평화리와 덕제리를 넘나드는 왕복4차선 포장도로인 장흥대로와 아래로 터널이 지나가는 고개이다. 들머리는 절개지 좌측 비포장 임도길이나 도로 오른쪽 옹벽이 끝나는 지점에서 오른다. 『해동지도』(장흥)에 억불산 서쪽, 읍치 남쪽에 면치(眠峙)로 표기되어 있다. 자울재의 유래는 신라 무열왕 때에 영통(靈通)스님이 이 고개에 이르러, 갑자기 졸음이 와서 졸면서 걷다가 영산면 몽오치(夢悟峙)에 이르러 비로소 잠이 깨었는데, 꿈의 암시를 받고 꿈에 그의 지팡이가 날아가서 꽂힌 자리를 찾아 나무를 베고 수풀을 쳐내어 천관사를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여기에서 상대 높임으로 잘재 〉 자올재 〉자울재로 변형되고, 면치(眠峙), 면래치(眠來峙)로도 불리게 되었다.
♤ 동학혁명사 전투지/ 자울재전투
장흥은 동학농민혁명의 최후.최대의 전투지로 공주.논산전투 패배 이후 꺼져가는 혁명의 불씨를 되살려 낸 곳이다.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면서 27개의 전투상보를 작성하였는데 그중 5개가 장흥지역의 전투상보로, 장흥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와 농민군의 희생을 보여주고 있다. 장흥읍과 용산면의 경계인 자울재 전투는 1894년12월14일부터 15일까지 이틀에 걸쳐 농민군 3만명이 석대들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태로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화력과 관군의 유인전술에 말려들어 큰 피해를 입고 남쪽으로 퇴각하면서 벌어진 전투이다. 조양에서 동학농민군이 패해 어산촌으로 몰려오자 이인환과 이방언 대접주를 위시한 지도부는 숙의 끝에 15일 새벽 일본군을 공격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또 지도부는 병력 보강을 위해 보성과 해남, 영암의 동학농민군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전라남도 일대의 동학농민군이 장흥으로 집결해 동학농민군의 수는 3만 명에 육박한 대부대가 되었다. 15일 아침 동학농민군 선발대는 장녕성 북서쪽 산봉우리 일대를 차지하고 선제공격에 나섰다. 당시 일본군 2개 지대 200명과 관군은 30명은 장녕성 안과 남문 옆 남산 봉명대에 진을 치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의 선제공격으로 일본군과 관군이 수세에 몰리자 강진으로부터 온 시라키 중위가 일본군 60명과 교도대 30명을 이끌고 동학농민군의 배후를 공격했다. 그리고 민병을 출동시켜 동학농민군을 산림지대에서 석대들로 유인했다. 석대들로 동학농민군의 본진이 이동하게 되자 전세는 금세 역전됐다. 우수한 무기를 가진 일본군과 관군은 동학농민군이 접근할 수 없는 거리에서 동학농민군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화승총과 창칼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 쪽으로 접근할 수 없었다. 석대들에서 2시간 가까이 동학농민군의 저항이 이어졌지만 양쪽에서 전개해 오는 일본군과 관군의 월등한 화력을 견디지 못하고 흩어져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은 갖고 있던 대포 4문과 회룡창 1자루를 회수하고, 활과 화살, 총탄, 화약 등은 모두 불태웠다. 이후 동학농민군이 후퇴하면서 송정리와 자울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4시간 가까이 저항하는 가운데 날이 저물어 전투가 중단됐다.
지나가며 장흥읍 아래쪽, 자울재 아래로 석대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건너편 산에 세단으로 된 바위가 있고요. 그 앞쪽으로 넓은 들이 펼쳐져 있는데 아, 저기가 석대들이로구나 하며 지났습니다.
♤ 장흥 석대들전투/ 장흥군 장흥읍 남외리
장흥 석대들 전적지는 동학농민혁명의 최대·최후의 격전지이자 당시 강진현, 전라병마절도사영, 벽사역, 장흥도호부, 자울재를 지나는 길목에 있는 지리적 요충지로 △장성 황룡 전적지(사적 제406호)와 △정읍 황토현 전적지(사적 제295호), △공주 우금치 전적지(사적 제387호) 와 함께 동학농민전쟁 4대 전적지로써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유적지로 알려졌다. 1894년 12월 12일에는 소모관(召募官) 백낙중(白樂中) 등이 이끄는 경군(京軍)이 장흥도호부에 도착하여 장흥지역 농민군과 최초로 전투를 벌였으며 12월13일 일본군 제19대대 제1중대, 제2중대의 지대(枝隊)와 일본군 제18대대 시라카(백목:白木)중위가 지휘하는 교도중대와 연합하여 세 방면에서 진격하여 12월 13일 일본군과 경군(京軍)이 동학농민군들을 공격하여 농민군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출처: 일본방위청 방위연구도서관 소장 “전사편찬준비서류(58)동학당상황”) 장흥석대들 전투는 1894년 11월 11일 공주 우금치에서 패한 동학농민군, 이방언을 중심으로 한 장흥지역 동학농민군과 전남지방 동학농민군 3만 여명이 장흥석대들에 집결하여 12월14일~12월 15일 수성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벌인 전투였다. 장흥 석대들 전투가 벌어진 것은 전봉준(全琫準)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의 지도부가 모두 관군에 체포된 뒤였다. 이 전투에 참여한 농민군 규모는 3만 명에 달하였으며, 피아간의 사상자가 2000명이 넘었다고 전한다. 이는 이 전투가 농민군 주력부대와는 별개로 이루어졌으며, 지도부가 와해된 뒤에도 농민군의 항전이 지속되었음을 시사하는 점으로서 동학농민운동의 전체 현황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되며 2009년 5월 11일 국가지정유산인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 주력부대는 이방언지도자가 이끄는 동학농민군 이였다. 12월 12일 남문 밖과 모정 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동학농민군은 13일 새벽 통위대 교장 황수옥(黃水玉)이 이끄는 30명과 12일 밤늦게 장흥에 도착한 일본군과 1차 접전을 하였으나 신식무기의 위력에 눌려 수십 명의 희생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동학농민군은 13일부터 14일 사이에 재집결하여 수만의 군세를 이루면서 장흥부를 재차 포위하였다. 12월 15일 동학농민군은 자울재를 넘어 석대들을 가득 메우며 장흥부로 진격해 들어왔다. 12월 15일 이진호(李軫鎬)가 이끄는 관군 교도중대와 일본군 제19대대본부 및 제3중대가 장흥석대들에서 농민군 약 3만 여명과 전투를 벌여 농민군 수백여명이 희생당하고 나머지 농민군은 자울재를 넘어 퇴각하였으며 농민군은 일본군 신식무기 위력 앞에 굴복하고 동학농민군의 대일전쟁은 끝났다.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남소서랑:南小西郞)는 장흥강진전투이후 ‘동학농민군을 많이 죽이는 방침’을 취하는 이유는 ‘소관(小官,미나미 고시로) 한 사람만의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훗날에 제기할 가능성을 제거하기위해 다소 살벌하다는 느낌을 살지라도, 그렇게 하라는 공사(公使, 이노우에카오리)의 명령이 있어 장흥석대들 전투 이후 1895년 1월 11일까지 장흥일대에서는 또 다른 피의 살육전이 벌어졌다.
♤ 235.2m봉
산사면에 심어진 편백나무 숲길과 잡목능선을 오르면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 288.4m봉/ 4등삼각점(장흥 432/ )
백두산악회 산패가 물푸레나무에 매달려 있다. 삼각점의 시멘트가 부스러져 글자가 식별 불가다. 남해바다 득량만이 바라다 보인다.그 너머가 고흥반도인데 고흥지맥은 했지만 장계지맥은 아직 계획마저도 미정이라서 언젠가 다시 가야될 곳이라는 기대감이 있다.
♤ 385m봉
키 큰 산죽과 잡목이 가득하다. 산 아래로는 어북제 옆에 2015년 8월, 40년만에 500명 수용 규모로 신축 이전한 장흥군 용산면 어산리 소재 장흥교도소와 어북제가, 그 앞쪽으로 장흥군 용산면과 안양면의 조망이 훌륭하다. 1974년 장흥읍내 원도리에 수용정원 250명 규모로 개청한 옛 장흥교도소는 장흥군에서 32억원에 매입해 문화예술복합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문화예술복합공간 조성 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 폐산업시설 유휴공간 문화재생사업 공모에 선정되면서 시작돼 2020~2024년 103억원이 투입되어 드라마, 영화 촬영지로 손꼽는 로케이션이 되었다.
♤ 세연봉(404.5m)/ 읍면계/ 삼리봉(장흥읍 덕제리, 용산면 어산리 → 운주리)
지맥의 왼쪽이 용산면 어산리에서 운주리로 바뀌는 읍면계이자 삼리봉 지점이다. 사각형 나무판자로 만든 정상석이 도마로 가져다 쓰면 딱이겠다. 저 명패를 달아 맨 분께서는 어떤 사연으로 세연봉이라 했을까. 뒤로는 제암산 앞으로는 천관산이 웅장하다. 모두 다 지맥의 외곽에 있는 산이지만 이름부터 뿜어내는 아우라가 대단하다. 장흥읍내 뒤편 수인산 그리고 그 왼쪽으로 비파산과 화방산 라인 뒤에 월출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세연봉을 지나며 잡목능선과 암봉을 오르내린다.
♤ 장흥군 용산면 운주리(雲柱里)
용산면의 가장 서쪽에 자리잡은 마을로서 면의 진산인 부용산을 주산으로 하고 그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문헌상에는 이 마을들의 지명이 1747년에 발간한 영조丁卯誌에 운주동, 봉황동이 처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래 장흥군 남상면의 지역으로서 이 마을은 연꽃 뿌리 형국으로 항상 구름이 끼어있는 부용산 밑이 되므로 운주동(雲柱洞), 운동(雲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봉황리, 금방리를 병합하여 운주리라 하고 남면(蓉山)에 편입하였다. 운주마을은 옛날 운동과 쟁몰, 골안, 오작골 등 네개 촌락으로 형성되었으나 골안은 교통이 불편한 산골로서 주민들이 타마을로 이동하던 중 6.25동란으로 마을을 소개(疎開)시킴으로서 폐촌이 되었다. 쟁몰은 남상천 언덕 넘어 있는 촌락이라 하여 제골(堤谷, 帝官)이라 부르며 남상천 본류를 앞에 두고 운주동과 서로 바라보고 있다. 인천인 이맹장군이 임란때 장군동(장구먹)에서 왜적을 물리친 후부터 장군동이라 부르고 임산배수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맹장군이 이곳에 정착하였다 한다. 북쪽으로는 운주리2구인 봉황리가 있고 동으로는 면소재인 접정마을이 있으며 마을 뒤에 큰 저수지가 있고 남쪽에 오도재 저수지가 있어 용산면 수원의 발원지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용산면의 본류인 남상천 상류가 마을앞을 흐르고 있다. 마을 남쪽 오도재를 넘으면 관산읍이요 백제때 삼치소였던 석남동은 여기서 오솔길로 4km에 있다. 마을뒤 장구먹재를 넘으면 강진군 칠량면이요 북쪽으로는 바람재를 넘으면 군동면이다. 이와같이 북, 서, 남쪽에 큰 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동쪽으로는 남상평야를 바라볼 수 있다.
사자지맥은 여기서부터 천태산을 지난 493.4m봉까지 장흥군과 강진군의 군계를 길게 따릅니다.
♤ 350m봉/ 군계/ 삼읍면봉(장흥군 용산면, 장흥읍 → 강진군 군동면)
커다란 봉우리를 왼쪽 옆구리로 우회하며 우회한 암봉을 왼쪽 사면으로 힘들게 올라서면 선답자 띠지가 정상을 지키고 있다. 좌틀하여 고도를 낮추며 바람재로 내려서는 마지막 봉우리에서 지맥이 강진군과 닿고 오른쪽이 장흥읍 덕제리에서 강진군 군동면 장산리로 바뀌어 이제부터 장흥군 용산면과 강진군 군동면의 군면계를 따른다.
♤ 강진군 군동면(郡東面)
군의 중앙부에 위치한 면으로 면소재지는 나천리이다. 본래 강진군 지역으로 대곡면이라 해 월평·장항·중산·상대곡 등 17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호라면·금천면·대곡면의 3개면을 병합해 군의 동쪽에 있는 면이라고 해서 군동면이라 하였다. 북부와 서부는 산지로 되어 있고 중앙에 탐진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며, 북쪽의 비파산(399m)에서 발원한 금곡천(金谷川)과 남쪽의 금사봉에서 발원한 하천이 호계리와 석교리에서 탐진강에 합류해, 하천유역에 군동평야를 이루고 강진평야다. 경지면적은 논의 규모가 군 내에서 제일 크고 쌀과 보리가 많이 생산된다. 주요 농산물로는 무·배추·마늘·수박·참외·양배추 등의 채소류와 배·감의 과실류가 있다. 금강리의 비닐하우스에서 딸기·오이·고추 등의 원예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탐진강의 은어·잉어 등이 특산물이며, 호계리에 가축 사료공장과 양송이 가공공장 및 제재소가 있다. 도로는 강진읍과 장흥읍을 잇는 긴선도로가 면의 중앙부를 횡단한다. 문화유적으로는 파산리에 금곡사, 화산리에 화암사, 나천리에 화방사·강덕사가 있다. 금곡계곡은 기암괴석, 우거진 송림, 그 사이에 흐르는 계류가 아름다워 많은 사람이 찾는다. 삼신리에는 장흥마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 강진군 군동면 장산리(獐山里)
전남 강진군 군동면에 있는 리로서 평야가 넓고 서쪽은 강진읍내로 이어지고 남쪽에 부용산 자락의 괴바위산이 있는데 산이 상당이 크며 용두봉, 장산제, 금사봉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2번국도가 동서로 통과하고 있으며 근동교차로가 있다. 자연마을로는 장항, 중산, 대곡이 있는데 장항은 마을이 산이 노루처럼 생겼는데 이 마을이 노루의 목부분에 해당되어, 노루 장(獐)자와 목덜미 항(項)자를 사용하여 지어진 이름이고, 중산은 마을이 산에 둘러싸여 소쿠리 안과같이 고요하다 하여, 대곡은 큰 마을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오른쪽으로 중간 기착지로 많이 이용하는 장산저수지를 바라보며 지납니다.
♤ 바람재/ 군면계/ 장흥군 용산면 - 강진군 군동면
세종 홀산아선배님의 바람재 코팅지가 잡목에 묶여있다. 바람재는 장흥군 용산면 운주리 바람골 마을에서 강진군 군동면 장산리를 넘나드는 옛 고갯길로 지금은 사람들의 왕래가 끊어져 가시잡목이 빽빽하다. 남도 바닷가에는 바람재라는 지명이 유난히 많은 편이다. 바닷바람이 센 영향으로 보인다.
♤ 385.8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꼬롬한 썩은 나뭇가지에 매어 있다.
가시가 무서운 사자지맥에서 활엽관목인 소사나무가 보이면 일단 그 주위에는 가시나무가 없습니다.
♤ 소사나무
소사나무는 자작나무과 서어나무속으로 3~10m 정도 자란다. 잎은 달걀 모양이고 나무껍질은 짙은 회색으로 나이가 들수록 잘게 거칠어지거나 세로방향으로 얇고 불규칙하게 갈라진다. 가지는 회갈색이며 가늘며 광택이 난다. 줄기는 보통 한 줄기로 자라지만 동시에 여러 줄기가 함께 고불고불 자라는 경우도 있다. 낙엽 활엽 관목으로 가뭄과 더위에 잘 견디며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데 서어나무보다 작기 때문에 소서목(小西木)으로 불리다가 소서나무로 그리고 소사나무로 이름이 변했다. 내한성이 강해 월동이 잘 되며 햇볕을 좋아해 해변 산기슭 암석이 많은 양지에서 주로 생장한다. 우리나라는 주로 서해안 및 남해안에 분포되어 있으며 잘린 가지에서 새싹이 잘 돋아 분재로도 인기가 높다. 강화 마니산 참성단 옆에는 150년 된 멋진 소사나무가 천연기념물 502호로 보호받고 있다.
♤ 장산저수지 갈림길/ 강진군 군동면
세종 홀산아선배님의 코팅지가 잡목 가지에 매달려 있다. 산죽과 잡풀 사이에 청미래넝쿨과 가시나무가 섞여 있어 지나기 힘든 구간이다. 군동면 장산리의 장산저수지까지는 약 1.1km로 50분 정도 소요된다. 장산저수지로 탈출하여 콜택시를 이용할 경우 강진군 군동면에 있는 장산리 저수지라고 주소를 똑바로 알려주어야 한다. 인근에 장흥군 회진면에도 장산저수지가 있어 기사가 일부러 다른 장소로 가서 볼멘 소리를 하며 요금을 더 요구하는 경우도 있어서다.
♤ 392.4m봉
여름에는 진행하기 쉽지않은 잡목구간으로 참나무에 선답자 띠지가 걸려있는 잡목봉이다. 지맥은 급좌틀이다.
♤ 괴바위(猫巖)
한국지명총람의 기록에는 괴바위봉이 고양이를 닮아서 묘이암 또는 묘암(猫巖)으로 나와 있다. 괴바위를 왼쪽 사면으로 우회한다. 괴바위를 지나서도 산죽지대를 헤치며 암릉지대를 오르내린다.
사자지맥 장흥과 강진의 군계 중에 강진의 약 80%가 여기부터 천태산 직전까지 칠량면에 해당하네요.
♤ 462.8m/ 괴바위산 전위봉/ 군면계/ 삼면봉(장흥군 용산면, 강진군 군동면 → 칠량면)
백두사랑산악회 괴바위산 462.8m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잡목능선을 올라서면 몇개의 바위가 있고 커다란 참나무가 있는 괴바위산 전위봉에 도착한다. 지맥의 오른쪽이 강진군 군동면 장산리에서 칠량면 삼흥리로 바뀌는 삼면봉 지점이다. 전위봉에서 지맥은 급좌틀로 내려서지만 오른쪽으로 강진군 군동면과 칠량면의 면계를 따라 약 200m 벗어나 있는 괴바위산을 다녀온다.
삼면봉에 배낭을 놓고 괴바위산을 다녀옵니다. 특별하게 봉우리도 없고, 선답자 띠지가 서너개 휘날립니다.
♤ 괴바위산(猫巖山, 464.2m)/ 면계/ 강진군 군동면 - 칠량면
괴바위산은 강진군 군동면 장산리와 칠량면 삼흥리의 경계이다.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괴바위산은 강진군의 군동면 장산리 대곡 마을에 위치한 산으로 산꼭대기에 고양이 바위가 있는데, 여기서 지명이 유래하였다. 한자로 표기하면 묘암산(描巖山)이다. 산의 모양이 고양이의 형국이라고도 한다. 북쪽의 탐진강 맞은편, 군동면 금강리에 안풍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는 월출산에서 뻗어온 비파산 동쪽 줄기가 뒷산을 이루고 있는데, 산의 모양이 쥐의 형국이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대곡 마을 묘암산의 고양이가 안풍 마을 뒷산의 쥐를 노려보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안풍 마을과 대곡 마을 사이의 탐진강에는 다리를 놓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탐진강 뒤편으로 화방산(402m)과 비파산(403.5m) 줄기가 병풍을 둘르고 있는데, 산너머가 강진군 작천면과 병영면이다. 왼편으로는 성전면 뒤쪽으로 흑석산(652.8m)이 보이고 왼쪽 강진만 맨 위쪽으로 강진읍 뒷산이 서기산(511.3m)이니 땅끝기맥과 가장 가까운 지점이 된다.
♤ 강진군 칠량면(七良面)
칠량면은 전남 강진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면으로 면소재지는 영동리이다. 강진군의 해상 관문인 구강포 깊숙한 동편에 자리잡고 있다. 본래 강진군 지역으로 칠량면이라 해 송산(松山)·구로(舊路)·벽송(碧松) 등 40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초면과 후면을 합해 칠량면으로 개칭되었다. 강진만에 접한 서쪽을 제외하고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군동면과의 사이에 금사봉이 있다. 반계천(磻溪川) 등 여러 하천이 서부와 중앙부에 넓은 평야를 형성하고 강진만으로 흘러간다. 북서쪽 탐진강 하구에는 간척지 개간에 의한 넓은 농경지가 분포한다. 해안선의 길이는 12.5㎞이며, 강진만에는 무인도로 알려진 죽도가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콩 등의 식량작물과 인삼·참깨·고추·마늘 등이 생산되고, 작약의 재배도 성하다. 수산업으로 봉황리와 장계리에서 바지락·김의 양식업이 발달했고, 죽도는 바지락 양식업의 기지이다. 어패류의 통조림 공장이 있어 바지락을 가공한다. 봉황리에서는 옹기가 생산된다. 도로는 강진읍과 대구면을 잇는 국도가 면의 중앙부를 지난다. 문화유적으로는 단월리에 임진왜란의 의병장 염걸의 묘소가 있고 송정리에는 지석묘군, 영동리에는 152기의 남방식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으며, 삼흥리에는 삼흥도요지가 있다. 인접한 대구면의 요지는 고급스런 청자를 생산했던 곳인 데 반해, 칠량의 도요지는 일반 서민용으로 질이 떨어진 분청자를 생산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영동·송정·삼흥·단월·명주·흥학·장계·현평·봉황·영복·동백·송로 등 12개 리가 있다.
♤ 강진군 칠량면 삼흥리(三興里)
삼흥리는 전남 강진구 칠량면의 법정리다. 도암산과 부용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으며, 마을에 삼흥 저수지와 삼흥리 도요지가 있다. 강진 삼흥리 가마터는 대구면의 청자가마터와 인접한 삼흥리 저수지 동남쪽에 있다. 삼흥은 신흥마을과 삼강마을에서 삼과 흥을 가져와 합성한 단어다. 신흥(新興) 마을은 한씨들이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한 때 모든 사람들이 떠나고 사라졌다. 사람들이 다시 모여 살면서 ‘새로 부흥하라’라는 뜻으로 신흥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삼강(三康) 마을은 이름에서도 보이듯 이 마을은 도자기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일제시대 삼흥리는 5개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도암, 신흥, 도강, 농소, 삼거리였다. 삼강 마을을 현재 삼흥 저수지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저수지 아래에도 마을이 있었지만 삼흥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원래 있던 마을과 가마터가 수몰되고 아래로 내려왔다. 삼흥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는 고급스런 고려 청자가 아닌 서민용 분청자이다. 분청사기는 수작업이 많이 들어가는 삼감법이 아니 대량생산을 위한 칙칙한 사기다. 조잡하지만 가능한 빠르고 많이 생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대구면에서 생상되는 자기들이 대부분 고급스런 고려 청자였다면 칠량면의 도자기는 초벌에 가볍게 만들어 파는 분청사기가 대부분이었다.
♤ 강진 도요지(陶窯址)
사적 제68호로 지정된 강진 도요지는 전남 강진군 대구면과 칠량면에 광범하게 분포한 고려시대 가마터이다. 도요지란 ‘도자기를 굽던 가마의 터’라는 뜻이다. 1992년 정밀 지표조사 결과에 따르면 강진군에서는 총 188개의 도요지가 확인되었으며, 도요지의 운영 시기 또한 9세기경부터 14세기까지 고려 전시기를 포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 세계적으로 그 역사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고려청자를 논할 때 강진 도요지는 결코 빠뜨릴 수 없는 핵심적 공간으로, 고려청자를 낳은 산실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진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 신설된 행정구역이다. 고려시대에 강진은 도강군(道康郡)과 탐진현(耽津縣)으로 나뉘어 각각 전라도 영암군과 장흥부에 예속되어 있었다. 태종(太宗)이 재위하던 1417년(태종 17) 도강군과 탐진현은 비로소 강진현으로 통합되어 탐진현의 치소(治所)를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현재의 전남 강진군으로 이어지게 된다. 고려시대에는 강진 지역에 ‘대구소’와 ‘칠량소’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소(所)는 수공예품, 철, 금, 은 등의 특산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기 위하여 고려가 운영한 특수행정구역인데, 대구소와 칠량소는 다양한 품목 가운데 고려청자만을 전담 생산하던 곳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특산품의 안정적인 수급을 위하여 고려시대 소의 백성들이 집단적으로 예속·관리되고 거주, 혼인 등 다양한 영역에서 제약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신분이 천민인지 양인인지를 둘러싸고 연구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으나, 소의 백성들이 부담하던 일들이 일반 양인층 사이에 고역(苦役)으로 취급되어 기피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즉, 소의 백성들은 신분상 양인이었을지라도 조선시대의 특수 신분층인 신량역천(身良役賤)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강진군에 산재한 188개의 도요지는 대구소와 칠량소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강진군 대구면의 경우 용운리에서 75개, 계율리에서 59개, 사당리에서 43개, 수동리에서 6개의 도요지가 확인되고, 칠량면 삼흥리에서는 5개의 도요지가 확인된다. 전국 곳곳에 새로운 가마가 만들어졌으나 고려중기 이후 고품질의 청자는 강진 일대에서 집중 생산되었다. 물론 강진 내에서도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강진 내에서 청자 생산의 주도권은 다른 지역으로 넘어갔다. 강진 사당리와 계율리 도요지는 고려중기의 주요 청자 생산지로 알려져 있다. 용운리 도요지에서도 고려중기까지 청자를 생산하였으나 그 명맥은 고려후기에 끊어졌고, 삼흥리 도요지는 고려중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이미 청자 산지로서의 입지를 잃었다. 고려후기에는 사당리, 계율리 도요지와 함께 수동리 도요지에서 고품질의 청자 생산이 이루어졌다. 강진에서는 중국과 한국의 기술을 결합한 독창적이고 세련된 비색청자(翡色靑瓷)와 상감청자(象嵌靑瓷)가 생산되었다. 청자의 생산과 유통에 최적화된 지리적 이점이 강진 도요지 그리고 고려청자의 역사를 만들어 내었다. 강진에서 생산한 고려청자가 해로를 통하여 수도 개경으로 유통되었다는 사실은 2007년 발견된 태안선으로 증명되었다. 그 자체로 고려청자의 역사와 다름없었던 강진 도요지의 역사는 고려왕조와 함께 막을 내렸다. 강진 도요지의 쇠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왜구(倭寇)의 출몰이다. 14세기로 들어서면서 왜구는 불시에 고려 해안가에 나타나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였고, 내륙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여 게릴라전을 펼쳤다. 공민왕(恭愍王) 즉위 이후 원(元)과 수차례 군사적 갈등을 겪었던 데다 설상가상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많은 전력까지 상실하였던 고려 정부는 왜구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왜구 토벌에 큰 공을 세웠던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에게 민심이 집중될 만큼 고려말 백성들은 왜구의 폭력 앞에 무자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바다와 인접하여 청자 운송에 용이하였던 강진의 지리적 이점은 왜구의 노략질이 잦아짐에 따라 거꾸로 큰 재앙이 되었다. 『고려사』에서는 1372년(공민왕 21) 왜구가 순천(順天)·장흥·탐진·도강군에 침입하였다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왜구가 손쉽게 배를 정박할 수 있었던 해안가 일대는 해변으로부터 30~50리 사이에 연기 나는 집이나 농사짓는 사람을 찾아볼 수조차 없을 만큼 피폐해졌다. 그 여파로 훗날 강진으로 통합된 탐진현과 도강군에서는 청자 생산시설들이 파괴되었고 도공(陶工)들이 내륙으로 흩어졌다. 설령 청자를 생산하더라도 바닷길을 활용한 운송 시스템이 파괴된 상황에서 청자들을 운송할 수도 없었다. 고급 청자의 산실이었던 강진의 쇠락은 고려청자의 쇠락으로 직결되었다. 14세기 중엽부터 고려청자는 그 예술적 가치를 잃어갔다. 종래의 화려한 문양은 흐트러졌고, 상감기법 등 고도의 기술은 후퇴하였다. 왜구 때문에 도자기 생산에 집중할 수 없었던 도공들의 고통이 그 당시 청자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조선 건국 이후 왜구의 노략질이 뜸해지자 강진 삼흥리 등지에서 도자기 생산이 재개되었으나 더 이상 고려청자와 같은 고품질의 도자기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조선전기 강진의 도요지에서 생산된 것은 분청사기 또는 하층민들이 주로 사용하던 토기류였다. 강진에 깃들었던 고려인의 예술혼은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게 되었다.
괴바위산 전위봉을 지나고부터는 가시잡목과 산죽지대를 벗어나니 발걸음이 한결 수월합니다.
♤ 446.7m봉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내려서는 왼쪽으로 낭떠러지라 조심스럽다. 왼쪽으로는 장흥군 용산면 운주리 운주저수지가 보이고 그 뒤로는 노승산(342.8m) 뒤쪽으로 득량만이 보인다. 서쪽으로는 멀리 해남의 땅끝기맥 주작, 덕룡, 푹 꺼진 오소재를 지나, 노승봉(683m), 가련봉(700m), 두륜봉(629m), 대둔산(674m) 라인이 바라보인다.
임도가 말발굽처럼 에돌아가는 곳입니다.
♤ 장구목재/ 장군동/ 임도/ 장흥군 용산면 - 칠량면
장구목재는 임진왜란 때 인천인 장사 이맹(李孟)이 장구목처럼 좁은 이곳에서 활을 쏘아 왜적을 죽여서 피란민들을 안전하게 했다고 한다. 장구목재의 동쪽은 골안을 거쳐 장흥군 용산면 운주리로 가는 길이고, 서쪽은 강진군 칠량면 삼흥리 모재골로 가는 비포장 임도 사거리다. 지맥은 임도 건너편으로 오른다.
♤ 513.7m봉
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조망은 잡목으로 기대하기 어렵고, 차라리 장구목재에서 올라선 전위봉 격인 바위 암봉에 올라 조망을 두루 살필 수 있다. 북서쪽 강진읍 뒤로 월출산, 제암산에서 사자지맥 분기점을 지나 일림산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을 감상하기 좋다.
♤ 503.4m봉
잡목과 산죽지대를 오르내린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높이 매어 있고 지맥은 우틀이다.
♤ 507.6m봉
조망이 좋다. 남서쪽으로 강진군 칠량면 삼흥리 소재 삼흥저수지가 내려다보이고 그 뒤로 강진만과 대구면의 여계산(女鷄山, 311.3m)도 보이고 그 뒤쪽으로 땅끝기맥 두륜산 산줄기와 완도의 상황봉 산줄기도 바라보인다.
부용산 갈림길은 산죽밭이라 특별한 표식이 없어요. 하지만 띠지는 여기저기 많이 걸려 있네요.
♤ 부용산갈림길(芙蓉山, 534m)/ 군계/ 삼읍면봉(강진군 칠량면, 장흥군 용산면 → 관산읍)
지맥은 오른쪽으로 직진이고 부용산은 왼쪽으로 0.6km 떨어져 있는데 주변이 산죽군락지로 다녀오는 길이 만만하지 않다. 왕복하는데 약 40분 소요된다. 지맥의 왼쪽이 장흥군 용산면에서 관산읍으로 바뀌는 삼읍면봉 지점으로 부용산은 장흥군 용산면 운주리와 관산읍 성산리의 경계를 따라 다녀온다.
♤ 장흥군 관산읍(冠山邑)
장흥군의 남부에 위치한 읍으로 북쪽은 용산면에 접하고 남쪽으로는 대덕읍.회전면과 접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남해바다 득량만을 끼고 있어 각종 해산물이 풍부하다. 또한 대덕읍과 경계를 이루는 호남 5대 명산 천관산(天冠山, 724.3m)이 읍내를 바라다 보고 있어 관산의 지명유래가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고상면과 고하면을 고읍면(古邑面)으로 합면하였고, 1931년 4월 1일 고읍면을 관산면으로 개칭하였으며, 1980년 12월 1일 관산면을 관산읍으로 승격하였다. 옛 지명은 백제때 오차현(烏次縣). 신라때는 오아현(烏兒縣). 고려때 정안현(定安縣)으로 불리었는데고려 17대 인종왕비인 공예태후 임씨(장흥임씨)의 탄신지라 하여 이름을 장흥(長興) 으로 고치고 장흥부로 승격시켰는데, 공예태후 임씨를 총애한 인종이 고을 명칭을 오래도록 흥할 고장이라는 뜻으로 장흥이라 지어 하사하여 명칭이 유래되었다. 현재도 관산읍을 가로지르는 고읍천이 흐르고 있어 그 옛날 고읍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사자지맥의 분기점이자 출발지인 사자산 미봉(667.5m)을 제외하곤 600고지 이상은 부용산 하나입니다. 부용지맥이라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호서정맥 음성에서 충주로 가는 부용지맥이 이미 이름을 가졌습니다.
♤ 부용산(芙蓉山, 611m)/ 2등삼각점(장흥 25/ 1990 재설)/ 헬기장/ 읍면계/ 장흥군 용산면 - 관산읍
부용산과 부용산의 이름을 딴 부용리는 수도 없이 많으나 유명한 부용산은 전국에 네개를 꼽을 수 있다. 장흥 부용산은 장흥의 젖줄인 탐진강을 가르는 산줄기며, 춘천시 산북읍의 소양호를 품은 부용산(878m)은 오봉산을 마주 보고 마치 새가 날개를 펴는 형상이다. 꽃동네로 유명한 충북 음성의 부용산(645m)은 가섭산을 마주 보고 있으며, 경북 예천의 부용봉(689m)은 도효자의 전설을 간직하고, 사각뿔 모양의 부도가 있는 연화사를 품고 있다. 부용산 정상에는 정상석과 2등삼각점 그리고 백두사랑산악회 산패가 있다. 장흥군 용산면을 서쪽에서 안고 있는 웅장하고 의연한 산이 부용산이다. 장흥군 관산읍 성산리, 용산면 운주리와 강진군 칠량면 삼흥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부용산에서 발원한 부평천이 생산리를 지나 남송리에서 부평천(夫平川, 대내, 죽천)이 되어 옥당리에서 고읍천과 합하여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부처가 솟은 산이라 하여 불용산(佛聳山), 약초가 많다하여 약다산(藥多山), 돌이 많아 석다산(石多山)으로도 불리어진 부용산은 1897년 갑오농민전쟁시 전봉준 장군과 쌍봉을 이루는 이방언 장군을 따르는 장흥인(長興人)들이 최후 격전지인 장흥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뒤 이곳 부용 산으로 들어와 끝까지 항거하다 일본군과 관군의 포위에 의해 전멸당한 피맺힌 한을 간직하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창건년대가 확실치 않은 부용사란 암자는 갑오년에 부용산으로 은신한 농민군을 전멸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에 의해 불탔으나 6.25이후 개인이 수도를 위해 암자를 지었는데 지금까지 이어져 사설절로 이용되고 있다. 부용사에서 한숨을 돌리고 오른쪽으로 오르면 가파른 능선이 나오는데 여기서 용샘까지가 조금은 가파르지만 거리가 짧아 그런대로 오를만하다. 승려 능감(能鑑)이 구름을 보고 도를 깨쳤다 한다. 또한, 용샘(용시암, 용정, 용천)은 바위틈에서 나오는 약수터로 아주 심한 가뭄을 빼고는 거의 마르지 않아 날이 가물면 용제(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옛날부터 마을 사람들이 병이 났을 때 이곳 8부능선의 용샘에서 물을 떠다먹으면 병이 나았다는 구전이 전해져 오고 있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등산객들이 목을 축였으나 요즘은 관리를 하지 않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용샘에서 5분정도 오르면 정상이다. 100여 평의 넓은 헬기장으로 정비되어 있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이곳에 오면 바람이 멋는다. 정상에서 남쪽으로 천관산, 북쪽으로 억불산, 제암산, 멀리 땅끝기맥 월출산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는 득량만, 서쪽으로는 강진만의 푸른 바다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부용산은 예부터 알려진 명산이지만 천관산, 제암산, 수인산 등, 장흥의 이름난 산들에 묻혀서 아직은 많은 등산객이 찾지 않아 조용한 산행을 즐길 수 있다.
♤ 승주단맥
사자지맥 부용산에서 계속 동쪽으로 분기한 승주단맥은 보록산(163.6m), 승주봉(12km, 331.4m), 노승산(15.2km, 342.8m)을 지나 남해 득량만으로 맥을 다하는 길이 18km의 장흥 지역에 위치한 단맥으로 좌우로 남해로 흘러드는 지류를 흐르게 한다. 우연하게도 보록산, 승주봉, 노승산은 모두 불교 관련 용어이다.
♤ 476.7m봉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지맥은 좌틀로 내려선다.
♤ 355m봉/ 군계/ 읍면계/ 삼리봉(장흥군 관산읍 성산리, 강진군 칠량면 삼흥리 → 명주리)
384.3m봉에서 내려선 봉우리로 커다란 고사목이 부러져 있고 선답자 띠지가 지키고 있다. 지맥의 오른쪽이 강진군 칠량면 삼흥리 → 명주리로 바뀌는 삼리봉 지점이다. 여기부터 지맥의 오른쪽이 천태산 직전까지 명주리 경계를 따른다.
♤ 강진군 칠량면 명주리(明珠里)
명주리는 전남 강진군 칠량면 법정리다. 칠량면소재지를 지나 장흥군 관산읍으로 굽이굽이 이어진 지방도를 따라 한참을 넘어가는 길목에 산이 병풍처럼 에워싼 명주마을이 나온다. 마을이 깊어 오지 마을로 불렸다. 노승이 염주를 가지고 불공을 드리면서 머무르던 지역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연주동 뒷산인 뒷골은 쥐의 형국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마을 앞산에 해당하는 안산엔 고양이를 닮은 괴바우가 서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괴바우가 뒷골의 쥐를 위협하기 때문에 마을에 큰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속설에 따라 대나무를 많이 심어 괴바우가 보이지 않게 했다는 옛 얘기가 전해져 온다. 이 마을에서 명주저수지를 지나 고갯길 골투재를 넘으면 바로 관산읍이다. 장흥과 지척인 마을답게 천관산의 모습이 한눈에 바라다 보인다. 예전 골투재를 넘나드는 행인이 아그배나무에 돌을 던져 소원을 빌었다. 이 민간신앙에서 골투(谷投)란 지명도 생겼다. 명주, 신기, 연주동, 사구 마을이 있었다. 현재 사구 마을은 따로 분리 되어, 나머지 세 마을은 명주 마을로 합쳐서 불린다. 장흥과 경계가 되는 골짜기인 미새기골도 재밌는 유래를 담고 있다. 옛날 장흥군에서 세금을 받으러 오면 강진땅이니 강진고을에 내야 한다고 돌려보내고, 강진군에서 오면 장흥땅이니 장흥에 내야 한다고 하여 양쪽 군에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 363.8m봉
부용산에서 초당연수원으로 향하는 등로 옆으로 내려다보이던 임도를 지나 오르는 봉우리이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커다란 소나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안부에서 조금 전 다녀온 부용산을 바라보며 오르는 봉우리로 선답자 띠지가 매어 있다. 부용산에서 계속 동쪽으로 분기하는 승주단맥의 산줄기가 잘 살펴진다.
♤ 332m봉/ 전망바위
지맥은 우틀하여 초당연수원으로 향하지만 왼쪽에 보이는 전망바위로 조망이 좋다. 지맥 왼쪽의 아래쪽에 장흥군 관산읍 성산리의 성산저수지가 보이고 천관산이 뚜렷하게 보인다. 급경사로 초당연수원으로 내려선다.
진행한 지맥 거리가 약 30km로 중간지점을 넘어선 지점이네요. 여기에서 물을 보충해 신리삼거리까지 진행해야 합니다. 클라이밍 부상으로 지어먹다가 남은 소염진통제, 근육이완제를 두봉다리 가져가 지맥 마치고 고속버스 타고 오면서 한봉, 그리고 여기서 한봉을 먹고 잠을 잤습니다.
♤ 초당연수원/ 관리실/ 군계/ 읍면계/ 삼리경계면(강진군 칠량면 명주리, 장흥군 관산읍 성산리 → 부평리)
초당연수원으로 내림길도 가파르고, 초당연수원에서 깃대봉 오름도 가파르다. 초당연수원은 종로5가 백제약국이 모태가 되어 초당약품을 설립했다는 소개가 있는 창업자의 가족 묘지가 있다. 이 지방의 유지인 백제약품과 초당제약 창업자 김기운 명예회장이 60년 전부터 백합나무, 리기다소나무, 편백나무 등의 경제림을 식수 육림, 조림사업을 하여 약 350만 평의 초당림(草堂林)을 인공적으로 조성하는 성과를 이룬 곳으로 휴식공간을 만들어 놓은 공간이 연수원이라고 하며 김기운 회장은 1993년 11월 운영하는 학교법인 초당학원(草堂學園)에서 1994년 3월 7일 ‘초당산업대학교’를 개교하기도 하였다. 초당학원에 초당대학교, 백제약품도 특수관계이다. 초당연수원 운동장을 거쳐 바라보이는 깃대봉을 치고 오른다.
깃대봉 오름이 잡목에 엄청나게 가파른 급사면이네요.
♤ 깃대봉(361.6m)/ 군계/ 읍면계(장흥군 관산읍 - 강진군 칠량면)
백두사랑산악회 산패가 날개가 떨어진 이정목에 매어져 있다. 남해안을 바라보는 조망이 멋지다. 강진군 칠량면 명주리에 속해 있는 산으로 대부분의 깃대봉 명칭이 그렇듯 이곳 역시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 때 측량을 위해 깃대를 꼽았거나 깃대처럼 보여 생긴 이름으로 추측되지만 석대들전투와 관련한 동학혁명군이 꽂은 깃대일 수도 있겠다.
♤ 262.6m봉/ 4등삼각점(장흥 464/ )
백두사랑산악회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깃대봉에서 500m 더 진행한 곳으로 삼각점봉이다. 반반한 등로를 따라 내려서다 오른쪽 능선으로 골치재에 내려서면 편하지만 급좌틀하여 망개나무 가시로 꽤 고생스럽게 골치재에 내려선다.
천관산자연휴양림 입구이며, 인천이씨 장흥 남면 종중 수정재(水晶齋) 안내도가 서있네요. 동학농민군 장흥 접주 장태장군 이방언(1838-18917)도 인천이씨이군요.
♤ 골티재(骨峙, 178m/ 827번도로/ 골투(谷投)재/ 칠관로/ 군계/ 읍면계(장흥군 관산읍 - 강진군 칠량면)
골치재는 장흥군 관산읍 부평리와 강진군 칠량면 명주리를 넘나드는 2차선 포장도로 827번 지방도로가 지나가는 고개이다. 명주저수지에서 관산읍으로 넘나드는 골투재는 옛날 이 골짜기(터골)를 통해 관산읍을 넘나드는 행인이 고갯마루에 서있는 아그배나무에 돌을 던져 소원을 빌었다는 민간신앙에서 골투(谷投)재라 붙은 이름이다. 골치재로 내려서는 길이 간벌지에 일어선 가시나무로 골치가 좀 아프다. 절개지 오른쪽으로 골치재에 내려서면 천관산 자연휴양림입구이다. 들머리는 군경계 이정표 뒤쪽으로 절개지를 치고 올라 능선으로 진행하나 오른쪽으로 철문을 넘어 임도를 약 1.5km, 20여 분 따르다 왼쪽 산길로 들어서도 마루금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 313.3m봉/ 강진군 칠량면 명주리 - 장흥군 관산읍 부평리
산패는 없고 선답자 시그널이 지키고 있다. 임도를 따르지 않고 마루금으로 진행하면 만나는 첫번째 봉우리이다. 마루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임도로 나오고, 봉을 내려서며 골치재에서 올라오는 임도와 두번 만난다. 산죽밭에 청미래넝쿨이 섞여있어 진행이 불편하다.
♤ 460m봉/ 숙구봉갈림봉/ 군계/ 읍면계/ 삼리봉(칠량면 명주리, 관산읍 부평리 → 농안리)
이정표가 쓰러져 있고 지맥은 급우틀이다. 숙구봉갈림봉으로 올라서며 오른쪽으로 칠량면 들녁과 바다 건너 다산초당이 있는 만덕산과 땅끝기맥 서기산 능선이 희미하게 바라보인다. 왼쪽으로 능안저수지와 관산읍이 보이고 천관산도 뚜렷하게 보인다. 관산읍 들녁과 휘봉산 능선 뒤편으로 지나온 억불산 - 광춘산 능선이 희미하다. 숙구봉 갈림봉에서 한바퀴 돌아보고 천관산 분기점인 양암봉으로 향한다.
♤ 숙구봉(331.2m)/ 장흥군 관산읍 농안리(農安里)
양암봉과 천관산 사이에 있는 관산읍 농안리 소재 봉우리로 그 아래에 저수지 농안제가 보인다. 숙구(叔舅)는 어머니의 남자 형제나, 봉건시대에 임금이 성이 다른 제후(諸侯)를 말할 때 쓰던 말로 만일 한문으로 숙구봉(叔舅峰)이라면 천관산에 딸린 봉우리라는 점을 강조한 작명이 아닌가 싶다.
양암봉 오름은 가파르고, 내리막은 암릉입니다. 천관산을 감상하고 가야할 472m봉, 459.6m봉 그 뒤로 천태산(552.3m)을 살펴보고 오른쪽으로 출발합니다.
♤ 양암봉(陽岩峰, 469.2m)/ 군계/ 삼읍면봉(강진군 칠량면, 장흥군 관산읍 → 대덕읍)
아침에 해가 뜨면 제일 먼저 이 바위에 비친다 하여 양암(陽岩)이다. 양암봉은 지맥의 왼쪽이 관산읍 농안리에서 대덕읍 연지리로 바뀌는 삼읍면봉으로, 양암봉삼거리에서 왼쪽으로는 깊은재를 지나 구름봉, 천관산, 소산봉, 큰봉산으로 이어지는 천관분맥의 분기점이다. 대구 김문암선배님이 설치한 골판지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골치재에서 3.7km 거리인 양암봉으로 진행하며 왼쪽으로 보이는 천관산 조망이 줄곧 좋다. 양암봉은 양암봉에서 안부를 지나 사자머리 바위 위로 장소를 옮겨서야 조망이 3면으로 트인다. 부용산 너머 제암산에서 일림산으로 향하는 호남정맥 능선이 뚜렷하다. 그 오른쪽 아래는 승주단맥 노승산릉이고, 남해 바다에 고흥반도 보성만 득량도도 구분이 된다. 청교저수지 대덕면 읍내 뒤로는 남해 바다 회진항이 바라보이고 왼편은 고흥반도 거금도와 장계지맥이다. 그 오른쪽 산줄기가 가야할 사자지맥의 끝머리로 가는 부곡산, 공성산 줄기이다. 오른쪽 멀리 주작, 덕룡의 땅끝기맥 장벽을 바라보고 우틀로 꺽어 바윗길로 내려선다. 조망이 줄곧 좋다.
양암봉에서 장흥군 대덕읍 연지리의 청교저수지와 그 아래 대덕읍을 조망합니다. 대덕읍 오른쪽으로 사자지맥의 마지막 능선이 바라보이며 사자곶과 마주하며 바다 위에 떠있는 조약도와 고금도도 찾아봅니다.
♤ 장흥군 대덕읍(大德邑)
전남 장흥군 남부에 있는 읍으로 동쪽은 바다 건너 고흥군 금산면에, 남쪽은 바다 건너 완도군 약산면과 고금면에 닿고, 서쪽은 강진군 대구면(大口面), 북쪽은 관산읍과 접한다. 본래 장흥군의 지역으로서, 크게 번창하라는 뜻으로 대흥방(大興坊) 또는 대흥면이라 하였는데, 1914년에 대흥과 내덕면의 이름을 따서 대덕면이라 하였다. 『1872년지방지도』(장흥)의 대흥면 일대에 연지(蓮池)·거정(巨井)·신리(新里) 등이 기록되어 있다. 1980년 12월 1일 대덕면에서 대덕읍으로 승격하였다. 북계(北界)에 천관산(天冠山, 723.9m)·양암봉(陽岩峰, 469.2m)·천대산(天臺山, 552.3m) 등의 고봉이 있으며, 서부에는 부곡산(424.8m), 공성산(367.2m)과 남부도 해발고도 200m 내외의 산지로 이루어져 있다. 중앙에 동서 방향으로 펼쳐진 평야와 개펄을 막아서 조성한 간척지가 농경지를 이루며 동부를 흐르는 연정천 유역을 따라 평야가 펼쳐져 있다. 읍 소재지인 신월리를 비롯하여 연정리 등 9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주요농산물은 쌀·보리·참깨·들깨 등이며, 그 외에도 원예작물로 양배추의 재배가 성하고, 기후가 따뜻하여 유자생산도 많다. 해안에서는 김을 양식하며, 신리(新里) 앞바다에서는 굴 생산이 많다. 광주·장흥·대덕을 지나 읍의 남단에 위치하는 회진(會鎭)까지 정기버스가 운행하고, 회진에서 완도군 금일읍(金日邑)과 신지면(薪智面)을 연결하는 정기 여객선이 매일 운항한다. 문화재로는 장흥 탑산사 지석등(長興塔山寺址石燈:전남문화재자료 196), 연지리 탑산사지(蓮池里塔山寺址)·관죽전(官竹田), 산정단(山亭壇), 내산단(萊山壇) 등이 있다.
♤ 천관산(天冠山, 724.3m)
천관산은 장흥군 관산읍과 대덕읍 사이에 있는 산으로 옛이름은 천풍산(天風山)·지제산(支提山)이다. 장천재의 깊은 계곡과 치솟아 있는 산정 일대의 봉우리는 정말 아름답다. 지리산·월출산·내장산·내변산과 함께 호남지방의 5대 명산 가운데 하나이다. 수십 개의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있는 것이 마치 천자(天子)의 면류관과 같아 천관산이라는 이름이 생겼으며, 신라 김유신(金庾信)과 사랑한 천관녀(天官女)가 숨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천관녀(天官女)는 화랑 김유신이 사랑했던 기생으로, 김유신은 어머니로부터 술집을 다닌다고 꾸중을 듣고 천관녀와 절교를 선언했다. 김유신은 술에 취한 자신을 천관녀의 집으로 안내하는 애마의 목을 검으로 베어버렸다. 천관녀가 김유신을 원망하며 향가 원사(怨詞)를 남기고 산으로 들어가서 비구니가 되었다. 천관녀가 머문 산이라는 뜻으로 천관산이 유래했다. 과거에는 천관산 내에 8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천관사와 탑산사만 남아있다. 산 정상 주변에는 당암(堂巖)·고암(鼓巖)·사자암(獅子巖)·상적암(上積巖) 등의 기암괴석들이 이어져 있으며, 몇몇 봉우리에서는 다도해 경관을 볼 수 있다. 봄이면 붉은 비단폭 같은 진달래와 동백꽃이 물들고, 가을이면 산 능선이 은빛 바닷물 같은 억새가 무성하며 국내 최대 규모 동백숲을 이룬다. 천관산은 가끔 흰 연기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서린다고 하여 신산(神山)이라 부르며 예로부터 월출산, 내변산, 추월산, 내장산과 더불어 호남의 5대 명산으로 불린다. 고려 충렬왕 때 여몽 연합군이 일본정벌을 위해 천관산의 소나무로 전함을 만들어 황폐화시켰다. 천관산 연대봉에는 고려 의종 때 세워진 봉수대가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때까지 주요한 통신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조선 태종 때 천관산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전라병영에 위기를 전달했다. 동학농민군이 천관산 석대벌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마지막으로 토벌됐다. 이러한 이유로 1998년 10월 13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한국의 100대 명산 중 하나이며 2021년 3월 8일 명승 제119호로 지정되었다.
♤ 장흥군 대덕읍 연지리(蓮池里)/ 천관산 탑산사(塔山寺)
장흥군 대덕읍에 있는 리(里)이다. 천관산 끝자락에 자리한 마을로, 논농사가 주로 행해지는 곳이다. 고려 때 연지라는 예쁜 처녀가 살았다 하여 연지테 또는 연지대라 불려 오다가 연지리로 개칭되었다. 자연마을로는 모래샘, 베락바웃골, 빈대절테, 산박골, 방죽안마을 등이 있는데 모래샘마을은 모래 속에서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다 하여, 베락바웃골마을은 벼락맞은 바위가 있다 하여, 빈대절테마을은 빈대가 성하여 폐사한 절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산박골마을은 천관산의 바깥쪽에 자리하였다 하여, 방죽안마을은 앞에 방죽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천관산 탑산사(塔山寺)는 장흥군 대덕읍 연지리 천관산(天冠山)에 있는 한국불교태고정에 속하는 사찰로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영통화상(靈通和尙)이 800년(애장왕 1년) 창건한 사찰로 절 이름은 절의 북서쪽에 있던 아육왕탑에서 유래되었으나, 현재 탑은 전해지지 않는다. 탑산사는 창건 이후조선 중기까지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원래 이 절에 있다가 1923년 화재 때 해남읍 헌병수비대에 보관하다가 만일암을 거쳐 대흥사로 이전된 탑산사명 동종은 높이 79㎝, 입지름 43㎝인 고려 말의 작품으로, 1963년 보물(88호)로 지정되었다. 대덕읍과 유치면 사이 연지리에 동학농민군 사령부가 있었다. 2013년 개원한 정남진 수목원은 황칠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 종려 등 다양한 난대 수목과 특색있는 주제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 가지재/ 가리재/ 강진군 칠량면 - 장흥군 대덕읍
475m봉에서 오른쪽으로 꺽어서 묵은 임도로 내려서고 다시 임도를 따라 오른다. 임도를 따라 10여 분 진행하면 또 다른 임도와 만나는 임도삼거리 가지재에 도착한다. 오른쪽에 묘지가 한기 있다. 가지재는 장흥군 대덕읍 연지리와 강진군 칠량면 명주리를 넘나드는 비포장 임도가 지나는 고개이다. 잡목에 묻힌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능선으로 오른다. 이름의 유래를 알 수 없으나 명주저수지로 흘러내리는 골짜기를 통해 넘나드는 고개이고, 골짜기에 가재가 많이 살아 가재재라고 하다가 가지재로 변화되지 않았나 내맘대로 추측해본다.
♤ 양갓봉(459.6m)/ 조망맛집
가지재에서 정면의 임도를 따라 지그재그로 힘들게 능선에 올라서면 맥길에서 오른쪽으로 50m 벗어나 있는 봉우리로 소나무 가지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달려 있고 오른쪽으로 지나온 양암봉과 천관산이 바라보인다. 지맥은 왔던 길로 되돌아가 우틀로 내려선다.
♤ 493m봉/ 군계/ 삼읍면봉(장흥군 대덕읍, 강진군 칠량면 → 대구면)/ 여계단맥 분기봉
정상 약 400m 직전에 지맥의 왼쪽이 대덕읍 연지리 → 연정리로 바뀌며, 지맥의 오른쪽이 강진군 칠량면 명주리에서 대구면 용운리로 바뀌는 군계이자 삼읍면봉인데 산패는 없고 선답자 띠지가 지키고 있다. 북쪽으로 강진군 대구면과 칠량면의 경계를 따라 여계단맥이 분기하는 지점으로,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논밭을 가로질러 대구천이 강진만(탐진강)과 만나는 곳에서 끝맺기까지 약 11.4km의 산줄기이다. 정상부에 오르면 장흥군 대덕읍이 넖게 펼쳐져 있고, 그 뒤로 가학리와 회진리 방향의 낮은 산줄기 뒤로 수많은 섬들이 이어져 있는 남해바다가 조망된다.
♤ 강진군 대구면(大口面)
전남 강진군 남동부에 있는 면으로 면소재는 수동리이다. 1753년(조선361년) 대구면으로 호칭되었고, 1908년 완도군 고금면을 분면하여 대구면이 되었다. 본래 강진군 지역으로 대구면이라 해 저액·운곡 등 22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현 위치에 면사무소를 건립 10리로 개편하였다. 1989년 4월 1일 마량리, 영동리, 원포리, 상흥리, 구수리 일부를 마량면으로 분면하여 현재에 이른다. 면의 동쪽과 북쪽은 산지이며, 서쪽은 바다에 접하고 있어 고도가 비교적 낮다. 동북쪽에 천태산(552.3m)·여계산(311.3m)·만경대(391.2m), 남쪽에 관찰봉(388.5m) 등이 솟아 있으며, 뒷내·영동내 등의 하천유역에는 소규모의 평야가 분포하고, 천대산에서 발원한 대구천이 강진만으로 흘러들어 그 일대에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주요 농작물은 쌀·양파·마늘·유채 등이며, 수산물로는 많은 어패류와 해조류가 생산된다. 과거에는 고령토가 산출되었으나 현재는 함안·하동 등지에서 생산된 고령토를 사용하여 도자기를 생산한다. 대구면은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청자의 발상지이며 청자생산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곳이다. 12세기경 청자의 비색을 완성한 시기의 대표적 명품 중 80% 이상을 이곳 강진에서 생산하였다고 하니 고려청자 하면 곧 강진이라고 말해도 무리는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한 청자 중에서 가장 높이 평가되는 출토품은 사당리에서 생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지금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청자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다. 강진 고려청자 요지는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특히 상감기법의 청자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창안되었다. 사당리 당전부락은 고려청자의 발상지로서 많은 도요지가 발견되었으나 농어촌진흥공사에서 당전둑을 막아 10여 개의 가마터가 물에 잠기게 되었다. 도로는 강진읍과 마량항을 잇는 23번국도가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다.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사당리의 푸조나무는 푸조나무는 약 500년 전 사당리에 고려자기 소(所)를 창설할 때부터 있었다고 전해오며 과거에는 개평나무로 불리던 것을 1973년 푸조나무로 개칭하게 되었다.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 동제를 지낸다. 용운리에 정수사, 구수리에 만리성이 있다.
♤ 524m봉
잡목과 잡풀과 바위를 헤치고 오른 천태산의 전위봉이다. 두루두루 지나온 지맥의 조망이 멋드러진 바위 봉우리이다.
강진만 뒤로 해남의 땅끝기맥과 그 오른쪽으로 월출산도 찾아봅니다. 정상에서 남해바다와 함께하는 전망이 뛰어나고 가짓재 지나 가야할 지맥 능선도 한꺼번에 내려다 보입니다. 지맥은 정상 이정표에서 여계산, 계치마을 방향입니다.
♤ 천태산(天台山, 552.3m)/ 天盖山 天台峰)/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 장흥군 대덕읍 연정리
천태산은 강진 도암만을 굽어보고 있는 강진의 명산으로 천개산의 개는 덮을 개(盖)자를 쓰는데 불상을 덮었다는 의미이고 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상에서 서쪽으로 몇 발짝 이동하면 수십미터 절벽이고 오른쪽으로 가야할 부곡산, 공성산이 보이고 정면으로는 회진 앞바다 그 너머로 약산, 조약도 삼문산. 거금도 적대봉까지 조망된다. 오른쪽으로 완도도 보이고 해남땅 달마산도 보인다. 이곳은 산세가 깊으면서도 전망이 뛰어나고 무엇보다 장흥 천관산(723.1m)의 걸출한 암봉인 구룡봉, 구정봉, 환희대의 기암괴석과 남서쪽 능선의 웅장한 모습을 접하게 된다. 수려한 계곡이 숨어 있는 곳이다. 강진과 장흥 경계에 솟은 천태산은 호남정맥 사자산(668m)에서 출발해 억불산, 괴바위산, 부용산, 천태산을 거쳐 오성산 아래 옹암마을로 빠지는 사자지맥(47㎞)의 중간에 있다. 첩첩산중 오지나 다름없는 곳에 위치하지만 충북 영동 천태산(714.7m), 경남 양산 천태산(630.9m), 전남 화순 천태산(497m)처럼 강진 천태산도 이름값 하는 산이다. 동북쪽 안부에 호남의 5대 명산의 하나로 꼽히는 장흥 천관산이 위용을 드러내고 남쪽으로 확트인 장흥군 대덕읍내와 장흥만의 푸른 파도가 한 눈에 들어 온다. 왼쪽 송대방향으로 내려서는 길이 상당히 가파르다. 천태산 아래에 정수사는 천태종의 본사라고 일컬어지며 대웅전이 도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주변에 고려청자 가마터를 손쉽게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는 길에 청자자료 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또한 정유재란 때 강진 출신 의병장 퇴음당 염걸(退隱堂 廉傑, 1545-1598)이 구십포에 상륙한 왜군을 정수사 계곡으로 유인해 싸웠던 격전지이기도 하다. 염걸장군은 이순신장군 휘하에서 맹활약하며 장흥 회령진전투 승리, 몰운대왜교성을 공격하고, 1598년 노량해전에서 퇴각하는 적군을 거제도까지 추격 백병전을 벌이다가 거제도해전에서 부자형제가 모두 순절(一門二世四忠) 하였다. 정수사 좌측에 강진군에서 1995년에 시설한 사방댐이 있고 깊은 계곡이 있어 가뭄에도 수량이 풍부하며 계곡 상류 8부 능선에는 여름에도 얼음을 볼 수 있는 얼음골이 있다고 전한다.
♤ 완도군(莞島郡)
완도군은 55개 유인도와 146개 무인도로 이루어졌다. 완도라는 지명은, 풀과 나무가 무성해 왕골풀과 같다 하여 완도라고 했다는 설과, “청해진(淸海鎭)은 조음도(助音島)에 있다.”의 조음도(좋은 섬)가 빙그레 웃는(莞) 좋은 섬으로 의역되어 빙그레 웃는 섬(莞島)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는 금산봉송(禁山封松)의 섬은 즉 국원(國苑)의 섬과 같아, 원도가 완도로 와전되었다는 설 등이 있으나 모두 확실하지 않다. 읍이 자리한 완도는 완도군의 중심으로 우리나라에서 여덟 번째로 큰 섬이다. 해남군 남창을 연결하여 1969년 육지가 되었다. 강진에서 들어가는 길도 이어졌다. 마량에서 고금대교를 건너면 고금도이다. 장보고 대교를 건너면 신지도, 신지대교를 건너면 완도다. 약산도는 고금도와 이어졌다. 해남과 강진과 세 개의 섬을 이은 동그란 원이다. 중심이 강진만과 묘당도와 청해진이다. 배로 연결되는 나머지 섬들이 동그랗게 이들을 감싸고 있다. 노화도·보길도·소안도는 완도 화흥포항에서, 평일도·생일도는 약산도 당목항에서, 금당도는 장흥군 노력도에서 들어간다. 완도항은 손꼽히는 해태김 출하항이다. 제주도·청산도·추자도로 연락선이 오간다. 섬과 섬 사이에는 김과 전복 양식장이 들어섰다. 통일신라시대 장보고(張保皐, 785~846)는 당나라에서 군인으로 활약하다 해적들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리는 신라인들을 지켜주기 위해 귀국하여 흥덕왕 3년(828)에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다. 해상왕으로 불리는 장보고는 신라 왕실의 왕위 계승 분쟁에 휘말려 자객 염장에 의해 살해되고 이후 청해진은 폐쇄된다. 그 후 섬을 모두 비우는 공도정책에 따라 모두 섬에서 쫒겨나고 고려 충정왕 3년(1351)까지 500년 동안 섬에 들어와 살 수 없었다.
♤ 435m봉/ 폐헬기장/ 군계/ 읍면계/ 삼리봉(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장흥군 대덕읍 연정리 → 신월리)
지맥의 왼쪽이 장흥군 대덕읍 연정리에서 신월리로 바뀌는 군계이자 읍면계이자 삼리봉이다. 폐헬기장인 435m봉을 지나며, 높다란 전파송신탑 공사로 등로가 정비되어 있어 그나마 덕을 본다. 서쪽으로 마령면에 뾰족한 관찰산(觀察山, 388.5m) 뒤로 완도 숙숭봉-백운봉-상황봉이 바라보인다. 그 옆으로 해남땅 땅끝기맥 달마산도 찾아본다.
지맥이 강진군과 군계를 벗어나 온전하게 장흥군 내안으로 들어섭니다.
♤ 493.4m봉/ 군계/ 읍면계/ 삼리봉(장흥군 대덕읍 신월리,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 장흥군 대덕읍 분토리)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다. 20m쯤 진행하다 좌틀하여 길이 없는 곳으로 가파르게 내려선다. 지맥의 오른쪽이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에서 장흥군 대덕읍 분토리로 바뀌는 삼리봉 지점으로 지맥은 군계를 떠나 장흥군 대덕읍 내로 진입하여 분토리와 신월리의 경계를 따른다. 30분 정도 온갖 가시잡목에 찔리고 긁히며 급경사를 단숨에 내려서는데 이런 경우는 속도를 늦추고 선답자의 흔적을 찾아 따라야 한다. 등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청미래넝쿨숲으로 생지옥이 따로 없다. 반가운 묘짓길을 만나지만 정면으로 내려선다.
고금분맥 오른쪽으로 강진군 도암면과 대구면에 걸쳐있는 여계산(女鷄山, 311.3m)이 바라보이고, 여계산 능선 뒤 강진만 건너 주작산 덕룡산 만덕산 땅끝기맥 마루금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 고금분맥이란
사자지맥은 493.4m봉에서 길없는 곳으로 좌틀하여 기잿지로 내려서지만 계속 능선을 따라 진행하여 500.2봉-423.7봉-만경대 분기능선-819번 도로-관찰봉(388.5봉)-354.3봉-임도-259.4봉-필봉 갈림길-필봉(239.3봉)-임도-두루봉(122.3봉)-영춘 도로-93.1봉-77번도로(마량2교)-88.4봉-빨간색 아치형 다리인 고금대교를 넘어 92.1봉-고금휴게소까지 이르는 약 16.35km의 산줄기를 말한다.
♤ 완도군 완도읍 장도(將島)/ 청해진(淸海鎭) 유적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 앞 바다에 전복을 엎어놓은 듯 둥글넓적한 섬 장도가 있다. 이 섬엔 통일신라의 유명한 무장 장보고(張保皐, 785~846) 장군과 그가 이룩한 청해진의 유적이 있는데 장보고 장군은 이곳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삼해의 해상권을 장악, 신라, 일본, 당나라 3국의 해상교역에서 신라가 주도권을 장악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청해진 본영은 장도 섬이고 인근의 완도 본섬 부분은 병사들이 머문 군영과 기타 시설이 산재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청해진은 신라 흥덕왕 3년(828) 장보고가 설치한 해군기지이자 무역기지로, 전라남도 완도 앞바다의 작은섬인 장도에 있다. 진(鎭)은 변방 지역의 군사적 요충지역에 설치한 군사 주둔지를 의미한다. 전남 사적 308호로 지정된 완도 청해진 유적은 장보고가 828년(신라 흥덕왕 3년)에 설치하였다가 851년(문성왕 13년)에 철폐되기까지 20여 년간 해상 무역 왕국의 명성을 날렸던 곳이다. 당시 이곳은 신라와 당,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장보고는 평민 출신으로 당나라에 건너가 장군이 되었으나, 해적들이 신라사람들을 노예로 삼는 것에 분개하여 신라에 돌아와 왕의 허락을 받고 828년 청해진을 설치하였다. 청해진은 국제무역의 중심지로 동아시아 무역을 독점하여 번영을 누리며 큰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장보고는 왕위계승과 관련된 권력다툼에 휘말려 자객 염장에 의해 846년 암살당하였고, 문성왕 13년(851)에 청해진은 폐쇄되었다.
♤ 장흥군 대덕읍 분토리(分土里)
강진군 대구면 만경대 중턱 기잿재에서 강진의 동쪽 끝마을인 마량면 하분마을까지는 폭 15m 정도 개울이 하나 흐른다. 그 서쪽은 강진이고 반대편은 장흥이다. 기잿재를 중심으로 강진쪽에 관찰봉과 용마산, 봉대산이 하분마을까지 준엄한 산세를 자랑하고 있다. 장흥쪽으로는 부곡산과 공성산, 오성산이 역시 대덕읍 분토리를 거쳐 서신, 신리, 이신마을로 산세를 형성하고 있다. 기잿재에서 내려 온 물이 관찰봉에서 흐르는 물과 만나고, 이 물은 다시 부곡산 물과 공성산 물이 합쳐지면서 조그만 내를 이뤘다. 개울은 내려와 분토저수지에서 만난다. 저수지 부지중에 장흥의 분토땅이 많이 들어가서 붙혀진 이름이다. 마량 상분마을(왼쪽)과 장흥 분토마을 사이를 가로질러 흐르는 개울은 멀리 관찰봉 아래서 시작해 신리 방조제까지 군계를 이룬다. 분토는 원래 현재의 하분 저수지 안에 있었는데 저수지를 만들면서 대부분의 집들이 이주하게 되었다. 그중 일부는 외지로 나가고 대부분은 저수가의 물이 차지 않는 상류 쪽으로 이주했다. 개울 주변에 강진 마을, 장흥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강진쪽에 하분, 상분이라는 두 마을이 있고 개울 건너 장흥쪽에는 호동과 분토라는 마을이 있다. 그중에서도 강진의 상분마을과 장흥의 분토마을은 말 그대로 개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마을이다. 작은 천을 사이로 동쪽은 분토이고 서쪽은 상분이다. 대덕읍 분토리 마을은 큰 마을이었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떠나고 현재는 작은 마을이다.
앗! 바쁘게 가다보니 공부를 했으면서도 관찰봉 사진을 빼먹었네요. 어쩐지 뾰족한 봉우리가 눈에 띄더라니...
♤ 관찰봉(觀察峰, 388.5m)/ 까치산/ 강진군 마량면 상흥리
관찰봉은 강진군 대구면 계율리 난산마을에 있다. 생김새가 까치머리와 같아 까치산이라고도 불린다. 정상이 거대한 암봉이고 용두바위가 있다. 정상에 서면 일망무제의 전망이 트이는 곳이다. 남쪽으로 마량면 봉대산(358m)과 이어져 있다. 1583년 음9월경 전라관찰사(全羅道觀察使) 구봉령(具鳳齡, 1526~1586)이 회령포鎭에서 1박 하고 기재재(蟹峴)를 지나던 흔적이다. 임진왜란 이후 고금도의 망덕산(望德山, 192m), 조약도의 삼문산(三門山, 399m), 신지도의 상산(象山, 320m), 완도의 상왕산(象王山, 644m), 장흥의 천관산(天冠山, 723.9m), 강진의 관찰봉을 연결하는 봉수대가 있었다.
♤ 난산(卵山) 마을/ 강진군 대구면 계율리(桂栗里)
청자촌이 지척으로 보이는 난산마을은 지네형국의 뒷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아랫마을과 윗마을로 나눠져 있다. 윗마을은 지네형국인 뒷산에 지네가 잘 살 수 있도록 밤나무 숲이 조성돼 있어 율촌으로 일컬어졌으며 아랫마을은 닭의 알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알메라고 불리다 해방직후 난산마을로 통합되었다. 이웃마을 계치(鷄峙)의 뒷산이 대계산(大鷄山, 391.2m)/만경대로 수탉형국이며 당전마을의 뒷산인 여계산(女鷄山, 311.3m)이 암탉형국으로 마을은 알에 해당하는 삼각지대를 형성하고 있어 난산(卵山)이라 칭하게 되었다. 풍수설에 따르면 닭의 형국인 계치와 지네 형국인 난산은 상극 관계이지만 마을 앞에 큰 내가 가로 막고 있어 양마을이 피해없이 지내고 있다고 전한다.
기재, 즉 해현을 말하는데 옛사람이 생각하기에 끊임없이 줄을 지어 이어지는 갯벌의 게를 연상하리 만큼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고개란 뜻입니다.
♤ 기잿재(蟹峴, 819번도로)/ 계치(戒峙)/ 대대로/ 리계(장흥군 대덕읍 분토리 - 신월리)
기짓재는 해유령(蟹踰嶺)의 작은 말인 해현(蟹峴)이다. 갯벌에 사는 게가 어떻게 높은 산을 넘을까? 옛 사람은 고개를 넘나드는 인파가 게가 이동하듯 끊이지 않고 일정하게 열을 짓는 모습을 재치있게 해유령으로 표현한 것이다. 기잿재는 게가 넘나드는 해현(蟹峴)을 말한다. 기재라고 해도 되는데 재가 반복되었다. 절벽에 가까운 가파른 내리막으로 기잿재에 내려선다. 기잿재는 장흥군 대덕읍 신월리 내동과 분토리를 넘나드는 2차선 포장도로로 강진군 대구면 계율리로 이어지는 819번지방도로가 지나가는 고개이다. 해동지도(장흥)'에 계치(界峙)로 표기되어 있으며 월정리 서남쪽에 있는 긴 고개이다. 고갯마루에서 800m쯤 아래에 있으며 들날머리 모두 절개지 오른쪽이다. 도로 난간으로 올라서면 묘지가 나오고 묘지 뒤로 치고 오른다. 관찰산이 바라보이는 고갯마루에서 도로 옹벽으로 올라서면 성터 흔적의 돌무더기가 나온다.
♤ 연해산성(沿海山城)/ 만리성(萬里城)/ 고장성(古長城)/ 계치성(戒峙城)
고장성(古長城)이 장흥 문헌에 등장한 것은 《장흥읍지-정묘지》에서이다. 즉 ‘대흥방’편 고적조에 나오는데, “고장성 : 진목리 뒤(영보마을)에서부터 평원을 가로 뻗혀 계치(戒峙)를 너머 강진 경계에 이른다. 석축 면이 모두 안을 향하고 있다. 연대는 알 수 없다. 古長城 : 起自眞木里後 橫 平原, 踰戒峙至康津界, 石築面皆向內, 年(代)未詳”의 기록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석축은 바깥 즉 해안 쪽이 아니라 내륙을 향하여 쌓은 성이라는 의미다. 강진군 대구면 남호마을에서 대구 구수마을을 거쳐 관찰봉을 지나 장흥군 대덕읍으로 이어지는 실체를 알기 어려운 돌성이 있다. 지금까지 어떤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인지 조사된 적도 없다. 대구 남호마을에서 장흥 회진까지 장장 12㎞나 건축돼 있는 이 성은 분명 잊혀져서는 안될 유적임에도 성머리 마을에는 집안 구들장부터 장독대까지 성의 돌이 없는 곳이 없다. 대덕쪽 돌성은 60년대 초반 회진, 덕촌등에 간척사업이 벌어지면서 대부분 실려가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옛 유물이 이렇게 와해되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달리 막을 방법이 없다. 대구면 남호마을의 다른 이름은 성머리마을이다. 이곳에서 시작해 굽이굽이 산허리를 지나 장흥 회진 바닷가까지 30리 돌담이 이어지기 때문에 붙혀졌다. 성의 끝마을은 장흥 회진의 성갯마을이다. 성과 갯벌이 만나는 지점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성의 범위는 마량을 완전히 포위하는 형국이다. 돌성은 대부분 파괴되고 아주 띄엄띄엄 흔적이 남아 있지만 무언가를 막기 위한 기능이 있었다는 것은 확연하다. 대구, 마량 사람들은 이곳을 만리성(萬里城)이라고 부른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이 성이 만리가 넘고, 성이 바닷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전해 지고 있다. 성머리마을 서남쪽 바닷가에 성의 흔적이 지금도 있다. 또 만호성이라고도 한다. 장흥 대덕 사람들은 이곳을 만리장성, 또는 고장성(古長城), 계치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둥그렇게 육지를 둘러싼 성의 면적은 엄청나다. 지금의 마량면을 중심으로 대구면 일부, 장흥 대덕읍 일부, 회진면 일부를 포함하고 있어 고대 부족국가 면적을 상상케 한다. 군사용 성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남해바다를 등에 업고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 아무도 선뜻 말하지 못하고 있다. 분토마을엔 이 성과 관련 구전이 많이 남아 있다. 대개 바닷가의 성은 바다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한 성인데, 이 성은 반대로 바다 쪽에서 육지를 방어하는 성이기 때문에 《정묘지》에서 석축 면이 모두 안으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성을 중심으로 율지 마을을 성안, 연평 마을을 성밖 마을이라고 부른다. 1996년 《대덕읍지》 664페이지에서 ‘본성을 답사한 이은상 선생의 말씀이 ‘이 성은 당시를 그려보면 장보고의 성이 아닐 수도 없고, 당시 (장보고에) 끌려 온 당인(唐人)들이 남아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기록돼 있다”고 설명하고 “장보고가 이 성을 쌓은 목적은 만가촌과 보문사(普門寺는 율치촌에 있었다)를 보호하고 보문제(普門題)를 통해 식량조절을 하겠다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덧붙였다. 《대덕읍지》로 들어가 보자. ‘분토리 분토마을’조의 성촌과 관련, 첫 시작이 “신라 때 만리성 쌓은 노역부들이 촌락을 이루었다 하며, 구룡촌(九龍村)이라 불렀고…”이다. 이어진 부문에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 문성왕 때, 장보고가 당나라와 황해도 사람들까지 동원하여 (만리성) 축성하는데 노역부로 썼으며, 성북(황골)에는 당나라 사람들이 살면서 토기를 구웠으며, 황해도 사람들은 성남에 살면서 어업을 하였다고 한다. 이들이 석성(만리성)에 올라서서 만리나 떨어진 고향을 바라보며 슬퍼했다는 뜻에서 만리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조사 과정에서 이석춘의 증언에 따르면, 본성을 답사한 이은상 씨가 ‘이 성은 당시를 그려보면 장보고의 성이 아닐 수도 없고 당시 끌려온 당인 도공이 남아서 마을을 이루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그들 성씨들이 살았다는 ‘집터자리’가 남아있다. …‘성안’은 옛 석성 터가 진목리에서부터 들을 건너 이곳(성안)을 지나 연정리의 지갯재까지 뻗혀 있는데 그 안쪽을 성안이라고 부른다.” 또 《대덕읍지》 ‘고려시대 문화유적’ 조에는 ‘만리장성지(萬里長城址)(古長城)’ 부문에서 더 장황히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만리장성에 대한 소개 내용은 일제 때의 조사 기록인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의 강진군 ‘용운리성지조(龍雲里城址條)’와 ‘구수리성지조(九修里城地條)’의 조사 내용까지 곁들였다. “용운리성지조= 성명(城名)은 연해장성(만리성)이라는 하는데 성벽이 대체로 완전하다. 횡단면은 구형(矩形-곱은 형태)이다. 연해장성은 옛날 돌성(석성)으로 진도에서 시작하여 강진 대구면 해변, 장흥 대흥면(현 대덕읍)을 거쳐 바다 건너 흥해(興海)의 연해제산에 이르고 경상도 연해까지 이어진다. 고려 문종 원년, 1046년에 동해로부터 해남(남해안)까지 연해에 성벽(城壁)과 농장을 쌓아 준동하는 해적을 방위하였다.(고려사). 그러므로 하등 구비(口碑)와는 상관이 없다.” 이어 ‘구수리성지조 九修里城地條’ 조사 내용도 기록했는데, 그 내용은 거의 유사하다. 그리고 제시된 문헌으로 한 기록도 첨언했다. 즉, 《고려사》의 내용으로,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병부낭중(兵部郞中) 김경(金瓊)을 보내 동해(東海)로부터 남해(南海)에 이르기까지 연변(沿邊)에 성보(城堡)와 농장(農場)을 만들어 해적의 요충을 제압하게 하였다. 文宗卽位 遣兵部郞中金瓊, 自東海, 至南海, 築沿邊城堡農場, 以扼海賊之衝.”(《고려사》志>卷第三十六)를 소개하고, “이 사료를 근거로 어렴풋이나마 남도 성역에도 해적에 대한 방비책을 갖추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고 기록했다. 그렇지만, 위 사료들이 밝히는 ‘해적을 방어하기 위해 축성되었다’는 내용에 대해서, 현지 조사 결과 성축은 해안이 아닌 내지를 향해 축조되어 있어, 이들 사료에 의혹이 간다는 식으로 기술하였다. 유적 현황에서는 민가나 도로 등이 있는 부문은 많이 파괴되었지만 ①대덕읍으로는 기잿재 부근에서 완전한 형태의 성축 일부가 보이고 ②강진군과 경계지점인 분토리 ‘가는 골’에도 300m 가량이 비교적 양호한 형편이고 ③강진군의 관찰봉 주변으로는 거의 파괴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고 기술했다. 장흥의 향토학자 양기수 씨도 《장흥읍지》 기록 외에, 강진의 황상(黃裳,1788∼1870)이 “성의 이름을 마류장성(馬留長成)이라 하여 말이 머무는 긴 성이 있다”고 소개한 사실과, 강진의 윤정기(尹珽崎,1814∼1879)가 《동환록東寰錄,1859년刊》의 강역편 진도조에서, “고석성(古石成)이 진도에서 시작하여 강진군 대구면의 바닷가를 지나 장흥군 대흥면에 거치고 바다를 건너 흥양(興陽, 현 고흥군)의 바닷가까지 뻗치며 경상도 바닷가까지 연결된다. 지금도 성의 형태가 완만하게 남아 있으나 어느 때 쌓았는지 알 수 없다고 기록 되어 있다”고 소개한 사실도 소개하였다. 그러나 “왜구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한 성이라면 마땅히 바다 쪽을 향해 쌓아졌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내륙을 향해 쌓았다는 점이 의혹이다”며 이 만리장성 사료들에 의문점을 제기했다. 이어 양기수가 제기한 점은, 만리장성과 장보고와 관련성이었다. 이에 대한 그 근거로 ①장보고가 신라 조정과 대치하면서 내륙 침공을 방비하고 그들 세력을 보호할 수 있는 성을 1차적으로 육지부에 구축했고 그것이 만리장성 일 수 있다 ②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장보고 휘하 장졸과 백성들이 거주했던 촌락일 것으로 짐작되는, 지금 대덕읍 부곡산(富谷山) 일대에 많은 가구가 있었다는 이른바 ‘만가촌(萬家村)’의 설화를 예로 들었다. 이어, 또한 대덕읍 연지리 연동마을에 있는 왕비사당(王妃祠堂)이라는 사당의 그 ‘왕비’가 장보고의 딸로, 왕비로 내정되었던 장보고의 딸일 수 있을 수도 있다고 추측했다. 한편, 강진 대구면에서 장흥 대덕읍 계치(戒峙)구간의 석성(石城)(만리장성)에 대해 박형상 씨는 ‘장흥馬史(馬事), 마류(馬留)성, 회령진목장, 古장성’이라는 주제의 글에서 “… 정약용 제자로 대구면 항동에 살았던 황상(1788~1870)이 ‘마류성(馬留城) 목장 설(說)’ 주장했는데 나도 그 주장을 지지한다. 석성의 지형적 지세가 전술적 요충지도 아니고, 군사시설의 유적도 없고, 청해진 군대도 그 지역을 차지할 그 어떤 전략적 필요가 없었을 터이므로, 장보고의 진지설 등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석성은 북에서 외부세력에 대한 침입방지용 석벽이 아니다. 석성 형세에서 성안에서 바깥으로의 도주방지용 석벽이 설치되어 있다. 즉 석성 안쪽을 바라보고 막는 ‘향내(向內) 석벽이어서 말 관리 용도에 부합하다. ‘만리장성’이란 구전(口傳) 자체도 ‘마류장성’의 와전(訛傳)일 것이다.”고 주장했다.
♤ 295m봉
선답자 띠지가 지키고 있다. 기잿재에서 약 1분 올라선 연해산성의 흔적을 지난 첫번째 봉우리이다. 좌틀로 올라선다.
♤ 283m봉
기잿지에서 25분쯤 지나면 파란 철망울타리가 있는 283m봉이다. 내려서며 오른쪽으로 녹색 철조망 울타리가 나와 한동안 같이 간다. 나무 사이로 올라야할 부곡산이 바라보이고, 오른쪽 뒤로는 정상이 바위로 된 관찰봉이 조망되고 왼쪽으로는 천관산이 바라보인다.
♤ 부곡산(富谷山, 424.8m)/ 어등산(魚登山)/ 2등삼각점(신지 21/ 1993 재설)/ 삼리봉(대덕읍 분토리, 신월리 → 도청리)
백두사랑산악회산패가 참나무 가지에 매어 있다. 기잿재에서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장흥군 대덕읍 도청리, 신월리, 분토리에 걸쳐 있으며 대덕읍을 소개하는 곳에 대덕읍 서부지역에 있는 산으로 표시되어 있다. 여기도 높다란 전파송신탑 덕을 본다. 도엽명 신지는 완도군 신지면에 있는 신지도인 것으로 보인다. 분토리 마을 앞산이다. 바닷가인지라 어등산(魚登山)으로 불릴 수도 있지만 어등산(御登山)이라면 그 주체가 되는 왕이 장보고인지 궁금하다.
♤ 만가촌(萬家村)/ 또는 망가촌(亡家村)
장보고 대사의 휘하에 있던 장졸과 백성들이 거주했던 촌락으로 지금의 대덕읍 부곡산(富谷山; 御登山이라고도 한다) 동쪽의 신월리 초당마을과 ‘한국말산업고등학교’에서부터 도청리 도서마을 뒤뜰까지이다. 이곳 뜰의 이름이 만가촌(萬家村) 또는 망가촌(亡家村)으로 불리는데 전하는 바로는 만가(萬家)는 많은 가구가 있어 만가촌이라 했다하고, 망가(亡家)는 왜구의 침입으로 하루아침에 폐허가 된 마을이라 하여 망가촌이라 했다 한다. 《대덕읍지》 ‘전설과 설화’ 편에 ‘만가촌(萬家村)’의 설화가 나온다. “대덕읍 도청리 어등산(魚登山) 아래 해안선을 끼고 만여 호의 큰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그곳에는 주춧돌이며 기와장, 석기(石器) 등이 발견되고 있으며 그 땅의 넓이가 약 5만여 평에 이른다. 이곳의 여러 가지 조건으로 보아 만가촌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작은 건천이 있는데 이 하천을 경계로 하여 북쪽은 장사(將士)가 나고 남쪽에는 재사(才士)가 많이 배출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이 만가촌이 없어진 것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또 ‘도청리 도동마을’편 문화유적에서도, 만가촌에 대한 설화가 소개되고 도동마을의 옛터로 만가촌의 고허(古墟)가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도청리 도동마을이나 도서마을 모두 성촌의 시작을 고려 때부터 만여 호가 성촌되어 5만여 평의 광활한 대지에서 대촌을 일구며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설화를 바탕으로 일부 향토학자들(대덕읍지 편집자, 양기수‧위의환 씨)은 도청 마을의 만여 호의 대촌을 장보고와 그 추종세력이 살았을 것으로 유추하면서 만리장성 또한 장보고와 관련이 있는 장성으로 추측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409.8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다. 지맥은 급좌틀이다. 전망바위에서 가야할 지맥 줄기를 가늠해 본다. 남서방향으로 강진군 마량면과 고금도를 연결하는 붉은 아치의 고금대교가 보인다. 진행하며 왼쪽으로 대덕읍 도청리와 잠두리 마을이 보이고 그 앞으로 남해바다가 보인다. 기다란 안테나 철탑이 있는 곳을 지나 바위 능선을 오른다.
♤ 392.8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특징없이 지나는 봉우리로 등로는 잡목이 우거져 좋은 편은 아니다. 정상의 조망보다는 정상을 오르내리며 천관산과 대덕읍을 조망한다. 우틀로 휘어져 안부로 내려선다.
어쩐지 직전에 변산지맥을 다녀왔기에 도청리란 마을 이름이 낯설지만은 않군요.^^
♤ 322m봉/ 삼리봉(대덕읍 분토리, 도청리 → 잠두리)
392.8m봉을 내려서며 322m봉에서 지맥의 왼쪽이 대덕읍 도청리에서 잠두리로 바뀐다. 북동쪽으로는 천관산이 보이고, 왼쪽으로 대덕읍 너른 들과 회진면 바닷가로 득량만이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한동안 안부로 내려섰다가 공성산으로 오른다.
♤ 공성산(孔聖山, 367.2m)/ 삼리봉(대덕읍 분토리, 잠두리 → 신리)
백두사랑산악회 산패가 나무에 매달려 있다. 지맥의 왼쪽이 대덕읍 잠두리에서 신리로 바뀌는 삼리봉 지점이다. 정상에 용처불명의 돌축대가 있고 잡목에 막혀 조망은 없다. 장흥군 대덕읍 잠두리 마을 뒷산으로 형태가 성인 같고 준수하여 신성하게 여겨 영험스런 산으로 여겨 왔다. 주민들은 산 밑에 모성래(慕聖來)라는 서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마음을 닦으면 공자와 같은 성인이 날 것이라 기대하여 공성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 신리(新里) 마을/ 장흥군 대덕읍 신리
장흥군 대덕읍에 있는 구릉성 평지로 이루어진 마을이고 논농사가 주로 행해지는 곳이며 새로 된 마을이라 하여 신리라 하였다. 현재의 동신, 서신, 이신 마을에 해당하는 예전의 신리(新里)는 누워 있는 여성의 형국을 하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대삿골, 서나무골, 새물, 동신, 서신, 비석거리, 오성금마을 등이 있는데 대삿골은 대삽(대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며 서나뭇골은 서나무가 있었다하여 불린 이름이며 새몰마을은 본 리가 시작된 마을이다. 동신마을과 서신마을은 각각 새몰의 동쪽과 서쪽에 자리한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고 비석거리마을은 비석이 서있었다하여 불린 이름이고 오성금마을은 오성산 밑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다.
♤ 309.1m봉/ 대덕읍 분토리 - 신리
왼쪽에 커다란 방구돌이 있고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내려서며 등로 왼쪽으로는 대덕읍 신리와 오른쪽으로 사자지맥 끝지점이 보인다. 송담군락지를 지나기도 하고 정면으로 고금도와 그 오른쪽으로 붉은색의 아치형 고금대교가 시야에 들어온다.
♤ 232.7m봉
선답자 띠지가 걸려 있는 바위 암릉인 232.7m봉에서 조금 진행하면 등로 왼편인 남쪽으로 잠시 후 내려서야할 신리마을과 그 뒤로 오성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시원하게 보인다.
♤ 150m봉/ 리계(대덕읍 분토리 → 신리)
대덕읍 분토리와 신리의 경계를 따르던 지맥이 신리 내로 들어서며, 오성산에 올라서기까지 신리 내안을 통과한다.
♤ 91.3m봉
편백나무 군락지를 지나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가면 봉우리도 아닌 비포장 임도상 소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높이 매어 있다. 오성산 옆으로 신리방조제와 172.2m봉을 바라보며 묵밭을 지나 신리마을로 내려선다. 방조제 뒤로 바다가 보인다.
골목길을 따라 내려서면 23번도로(장흥대로)변에 있는 서신 마을 표지석을 만납니다. 버스 한대가 옹암리에서 나와 분토리로 가네요. 시간을 따져보니 옹암리에서 17:20분 막차를 탈 수 있을지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사력을 다해보자고 맘을 다잡으며 당당하게 교회로 들어서서 올랐는데 갑자기 개가 짖는 바람에 깜짝 놀랐네요. ㅋ
♤ 신리삼거리(23번도로)/ 장흥대로/ 풍년식당, 슈퍼, 샘터
가정집 마당을 통해 신리삼거리 서신마을로 떨어진다. 이곳 도로는 T자형으로 23번과 77번 국도가 지나고 2번도로가 분기되어 내저선착장으로 이어진다. 지맥은 33번 도로를 건너 오른쪽의 신리옹암로를 따른다. 2번도로 방향으로 ‘개매기시험장’이란 표지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그물망을 밀물 때 쳐서 썰물 때 고기를 잡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7월부터 9월중 2회 체험행사도 운영된다. 이때 참숭어, 참돔, 갯장어, 낙지, 조개 등 많은 바닷고기들이 잡힌다고 한다. 신리삼거리에서 2번도로/신리옹암로를 따라 용암마을 방향으로 100m 가량 진행하면 오른쪽에 신리교회가 자리한다. 신리교회 뒤로 마루금이 진행한다. 교회 사택 앞으로 길이 없는 산을 헤치고 36.1m봉에 올라서면 밭이 나오고 밭을 가로질러 양회임도로 내려서는데 교회 건물 왼쪽 묘지가 있는 곳으로 올라 점잖게 돌아와도 될 성 싶다.
♤ 78.2m봉
농로 왼쪽으로 커다란 염소농장을 지나고 농로삼거리에서 왼쪽 보리밭 끝에 보이는 묘지 뒤로 마루금이 이어진다. 잡목 능선을 완만하게 올라서면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는데 산패가 우회 등로에 있어 고지곧대로 봉우리를 밟고 가면 볼 수가 없다. 봉우리를 넘어 우틀하면 지독한 가시나무 잡목숲, 키는 넘를 억새밭이 차례로 기다린다. 이제 오성산이 멀지 않다.
♤ 이신(二新) 고개
염소농장을 지나 작은 능선인 78.2m봉에 올랐다가 평장묘로 내려서면 양회임도가 지난다. 임도를 건너 묘지 왼쪽의 산길로 진입하여 잡목이 무성한 능선을 약 20분 동안 가파르게 오르면 옹암리와 경계인 오성산 갈림봉에 닿는다.
마지막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속도를 붙이기 시작합니다. 시간을 단축할 방법이 여기 뿐이 없네요.
♤ 오성산 갈림길/ 리계(대덕읍 신리 - 옹암리)
이신고개에서 약 20분쯤 힘들게 올라서면 발 아래로 오성금펜션, 그리고 옹암 내저마을과 남해바다 양식장과 그뒤로 초완도, 뒤에 조약도 그리고 왼쪽에 길게 뻗어나간 지맥 끝지점이 바라다 보이는 삼거리이다. 오른쪽으로 완만한 능선을 5분여 진행하면 닿는 약 170m 거리의 오성산 다녀오는 길에 조망바위에서 지맥의 끝, 완도의 섬들을 바라보는 조망이 좋다. 고금도 뒤 남쪽으로 신지면 신지도와 청산면 청산도는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다.
♤ 고금도(古今島)/ 이순신장군 초장지(初葬地)
완도군 고금면 고금도는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통제영이 있던 곳이다.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 묘당도(廟堂島)는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와 조선 수군의 본영이 있던 고금도에 딸린 섬으로 그 거리는 20리 안팎이었으나 간척으로 고금도와 하나가 됐다. 장군이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54세를 일기로 순국하자 유해가 처음 간 곳은 이락사라 불리는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지이며 이후 남해 충렬사로 모셔진 유해는 본영이었던 충무사가 있는 이곳에 80여 일간 안장한 후 이듬해 충남 아산(현충사 근처)으로 옮겼다. 강진 마량에서 고금대교를 지나거나 완도에서 신지대교와 장보고대교를 건너 고금도로 들어갈 수 있다. 충무사는 약산도 입구 약산대교 가기 전에 위치한다. 이처럼 장례가 84일만에 치러진 것은 사후 선조로부터 우의정 벼슬을 받아 당상관에 오르면서 당시 법도에 따라 3개월 후에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다. 사후 1604년 좌의정, 선무공신 1등에 오르자 후손들의 상소로 16년 후인 1614년 일등공신 격에 맞는 절차로 지금의 묘역인 어라산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어 정조(1793)대에 이르러 영의정에 추증되며, 정조가 친히 지은 글로 어제 신도비가 세워지고 충무라는 시호가 내려지며 격이 한껏 높아졌다.
♤ 오성산(五聖山, 215.5m)/ 신리 - 옹암리
백두사랑산패가 참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다. 신리 앞산으로 잡목과 나무가지 등에 막혀 조망은 없다. 다시 갈림삼거리로 되돌아 나온다. 오성산 아래 오성금이라는 마을 이름이 지닌 두 가지 유래가 있다. 이 중 하나는 옛날에 머슴이 풀밭에서 금덩어리 다섯 개(五星金)를 발견해서 주인에게 가져간 것에서 비롯되었고, 다른 하나는 오성금이 성인 다섯 명을 배출한다는 뜻에서 전해져 내려 왔다는 것인데, 지금은 두 번째 의미(五聖今)로 굳어졌다고 한다.
내저고개로 내려서는 길이 어지럽습니다. 약간 오른쪽 묘지로 내려서서 내저고개로 내려섭니다. 다 쓰러져가는 전각에 비석이 모셔져 있는데 자세한 소개가 아쉽습니다.
♤ 내저고개
내저마을이 발아래 보이는 전망바위에서 가야할 지맥 능선을 감상하고, 잡목 능선으로 내려서서 선답자 띠지가 걸려있는 무명의 140m봉에서 우틀로 휘어져 진행하여 옹암리 내저마을 위 임도에 닿는다. 비포장 임도를 만나 진행하니 묘지지대를 지나 사당이 나오고 그 앞 1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왼쪽으로 걸어가니 다시 내저마을 표석이 서있는 2차선 포장도로에 닿는다. 내저 마을 표석이 있는 곳에서 30m정도 오른쪽 신리방향으로 양회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무성한 풀로 뒤덮인 묘지길 들머리가 나온다.
♤ 내저(內楮) 마을/ 장흥군 대덕읍 옹암리(甕岩里)
내저마을은 행정구역은 옹암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곳이지만 실질적인 정서는 신리와 맞닿아 있다. 내저마을은 실크매생이가 유명한 곳이다. 원래 마량면 하분마을에서 시작했지만 장사가 잘 되자 신리와, 내저, 옹암에서도 양식하면서 연간 1천여톤을 생산한다. 신리삼거리에서 좌틀하여 옹암방향으로 2km를 더 가면 내저마을에 도착한다. 이신삼거리에서 좌틀하면 옹암으로 가고 직진해서 오성산 자락의 작은 골을 넘어가면 내저마을이다. 김은 줄을 엮어 그물망으로 양식하지만 매생이는 대나무를 잘라 엮은 발대로 양식한다.
사자지맥 마지막 남은 시련의 잡목구간을 통과합니다.
♤ 172.2m봉/ 신리 → 옹암리
오성산삼거리부터 줄곧 신리와 옹암리의 경계를 따르다가 옹암리 내안으로 들어선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달려 있다. 앞쪽으로는 가야할 172.5m봉이 보이고 능선 오른편으로는 옹암리의 내저마을이 보인다. 진행하는 등로 왼쪽인 동쪽으로 조망이 열리는데 회진면 진목리 방향의 나즈막한 산줄기가 바다에 빠지는 풍경이 바라보인다.
♤ 옹암(瓮巖) 마을/ 장흥군 대덕읍 옹암리
마량항과 대덕읍을 잇는 23번지방도를 벗어나 이신마을을 가로질러 들어가야 나오는 옹암은 외진 마을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곶으로 형성되어 있고, 마을은 곳이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평지는 거의 없고, 마을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 전형적인 어촌마을 형태이다. 자연 마을로는 당거리, 싹골, 띠끼, 안띠끼 마을이 있다. 당거리마을에는 어부들이 풍어제를 지내는 당이 있었다고 한다. 싹골 마을은 삵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띠끼마을은 딱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고, 안띠끼 마을은 띠끼마을 안쪽에 자리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주변의 내저나 신마 등은 농업과 어업을 겸하지만 옹암은 입구에 자리한 작은 밭을 제외하면 거의 평지가 없어서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한다. 또한 마을에 땅이 없어 언덕을 깎아 마을을 만들었다. 옹암에서 옹(甕)은 항아리 옹자이고 암(巖)은 바위 암이다. 바위가 항아리처럼 눌러앉아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옹암마을에 가면 입구부터 커다란 바위를 만난다. 마을 전체가 큰 바위 위에 얹혀 있다. 옹암뿐 아니라 앞서 본 내저마을도 바위가 많다. 하지만 내저의 경우는 옹암에 비해 간척지를 매립하여 농토를 만들었고, 산이 가파르지 않아 경사가 많지 않다. 하지만 옹암은 앞바다가 수심이 깊어 매립할 수도 없고 입구에 드넓은 뻘밭이 자리하고 있어서 많은 수산물을 얻는 잇점이 있다. 최근에는 개매기축제를 해마다 이곳에서 열고 있다.
♤ 172.5m봉/ 깃대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172.2m봉에서 176m봉을 지나 172.5m봉에 오는데 약 40분이 소요된다. 왼쪽으로 옹암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다시 고도를 낮추며 내려선다. 172.5m봉에서 몇 걸음 걸어 내려가면 깃대봉까지 0.4km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서있는, 왼쪽으로는 신리 개매기와 옹암어촌체험학습장으로 내려갈 수 있는 갈림삼거리가 나온다.
드디어 사자지맥의 끝이 보입니다.^^
♤ 157.3m봉/ 이정표
참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다. 지맥은 157.3m봉에 서있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옹암마을 0.7km방향으로 향한다. 이정표를 지나 계속 내려가니 등로 오른쪽인 서쪽으로 조망이 열리는데 고금대교와 완도 상왕봉이 보이고, 그 너머 땅끝기맥의 두륜산 줄기가 보인다.
♤ 84.6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굵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옹암마을 0.4km를 알리는 갈림길 이정표에서 약 30분 쉼없이 직진하여 훌륭한 조망처도 지나고, 내려서면 사자지맥의 마지막 봉우리이다. 묘비가 없는 묘지 여섯기가 오밀조밀 모여 있다. 마량과 고금도를 잇는 고금대교가 보인다.
배낭을 던져 놓고, 스틱 하나는 가지고... 헉헉 헉헉!!!
♤ 옹암마을 갈림길/ 비석없는 무명묘지 6기
84.6m봉에서 내려서면 왼쪽으로 옹암마을로 갈라지는 갈림길이다. 남해바다 끝지점을 찍고 다시 여기로 되돌아와야 한다. 배낭을 내려놓고 지맥 끝지점을 향한다.
세종 홀산아님이 사자지맥의 끝자락에 멋진 사자곶이란 이름을 명명해 주셨네요.^^
♤ 사자곶/ 지맥끝자락/ 장흥군 대덕면 옹암리
왼쪽으로 송전탑-광산김공묘지-폐초소 순으로 지나는데 오래된 콘크리트 폐초소는 2021년 봄에 철거되었다. 남해 바닷가에 내려서서 초완도와 정면으로 조약도의 삼문산(399m)을 바라보며 지맥을 끝맺는다. 다시 철탑으로 되돌아 올라와 갈림삼거리에서 오른쪽 잡목 능선으로 진행하고 바닷가로 내려선다. 전에는 옹암방조제를 지나고 다시 산으로 올랐다가 양회임도로 내려섰는데 옹암방조제에서 도로가 생겨 해안도로를 따라 옹암리로 편하게 도착한다. 코너를 돌아서자 북동쪽으로 천관산이 둥그스룸하게 바라다 보인다. 옹암마을회관 옆에는 해양경찰파출소와 할머니경로당과 사각정자가 있다. 옹암버스정류장 옆에는 벽이 밀창문으로 설치된 기와지붕의 야외무더위쉼터가 있다. 내 눈에는 호텔로 보이는데....
사자지맥 끝에 서면 남해 바다 앞쪽으로 조약도가 막고 있는 바다 풍경이 보입니다.
♤ 조약도(助藥島)/ 약산도(藥山島)
조약도는 전남 완도군 동부에 있는 섬으로 약산도(藥山島)라고도 하며 면적은 23.84㎢, 해안선 길이는 45㎞이다. 동쪽에 평일도(平日島), 서쪽에 고금도(古今島), 남서쪽에 신지도(薪智島)가 있으며 완도항에서 15.2㎞ 떨어져 있다. 해안선 굴곡이 심한 편이며, 섬 중앙에 삼문산(三門山, 399m)이 솟아 있다. 1월 평균기온 0.1℃, 8월 평균기온 25℃, 연강우량 1217.9㎜, 연강설량 2.0㎜이다. 경지 면적은 2.82㎢로 비교적 넓으며 쌀·보리·콩·감자 등을 생산한다. 앞바다에서는 김과 미역을 양식하고 멸치·농어·약산돔 등이 많이 잡힌다. 완도군에서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해태를 제일 먼저 양식하기 시작해 해태가 김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하며, 섬 곳곳에 나는 삼지구엽초(三枝九葉草)는 이곳의 특산물이다. 또 삼지구엽초를 먹고 자란 약산흑염소는 예로부터 임금님께 진상하였다는 보양식품으로 유명하다. 예전에는 완도항과 강진군 마량항에서 정기여객선이 운항하였으나, 2007년 6월 강진군 마량면과 완도군 고금면을 연결하는 고금대교가 개통되면서 차량을 이용하여 통행할 수 있게 되었다. 고금도와는 연륙교로 연결된다.

첫댓글 잡목이 심한 사자지맥 연일 마무리 하셨네요
우리는 일욜날 자울재에서 마무리 했서 남은 구간이 걱정이 됩니다
3구간으로 종주 할려고 했는데 풍라라님 산행기를 보니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대원들이 탈출 접속을 줄일려고 하니 마땅하게 끊을때가 없네요
그래서 두번째 자울재~가지재까지 우측 탈출하고 다음구간 이어서 마무리 할려고 합니다
앞서 간 풍라라님 덕분에 많은 정보에 부듯쳐 볼께요
사지지맥 완주 축하 드립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네 와룡산선배님!
키보다 더 높은 산죽밭이 자주 나타납니다.
그 산죽밭을 헤치고 나가는 통로가 좁기도하거니와 가시가 섞여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초당연수원으로 내리막이 자갈길이고 가팔라 한밤중에 긴장을 조금 했습니다.
신리삼거리 이후로
마지막에 얼마나 서빠지게 달렸는지 졸업하고 한동안 무얼 먹어도 맛이 느껴지지 않더군요.^^
가지재에서 탈출하셔도 되고,
시간이 여유가 있으심 천태산까지 올라가서 정수사로 빠지심 어떨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정수사에서 천태산 가는 등산로가 길이 좋다고도 하고요.
가리재에서 삼읍면봉을 지나 천태산까지 가며 바위 암봉마다 조망이 좋습니다.
그리고 요즘 딸기 싸고 맛있습니다.
졸업하시고 뒤풀이 입맛 돋우는데 시장에서 딸기 추천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준희선생님이 사자지맥 분기점 산패를 손수 보내주셔서 후기 전면에 배치하였습니다. 수고해주신 동밖에대장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gpx파일 올려주실수있는지요
구글어스 궤적영상 만들어볼려고합니다
퐁라라운영자님의 이틀간에 걸친 사자지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악명높은 지맥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말씀이 실감나게 느껴지네요.
조망이며 멋진 산세를 자랑하는 산줄기이지만 어느곳 하나 수월한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진 고난을 겪으며 도착한 날머리 사자곶에서 바라보는 천관산이 멋집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화이팅~~
네, 방장님!
사자지맥 힘들다기에 부담이 좀 되었는데, 졸업하고 보니 넘 멋졌습니다.^^
선배님들 산행기를 많이 찾아보고, 준비를 열심히 잘해서 그나마 수월하게 마친듯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