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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일시: 2021. 5. 31.~6. 1.(일,월) - 음력(4. 20.~21.), 일출 05:07~일몰 19:37
●산행지: 문수지맥 1구간(주실령-예고개)
●산행코스: 주실령-옥돌봉-문수지맥분기봉-예천바위-옥돌바위-937m봉-주실령-983.8m봉-예배령(628m)-925m봉-1051m봉-두내약수갈림길-축서사갈림길-문수산-1157.8m봉-칼날바위-성불산(1003.8m)-가부재(우곡성지)-바지산(987.1m)-870m봉-솔당재-삼면봉-흙목이재-붓든고개-갈방산-583m봉-다덕현/다덕육교-불미산(509.3m)-485m봉-엣고개-삼면봉-봉성산(480.8m)-미륵고개-경찰호국공원/918지방도/질고개-대백고개/점골재-599m봉-긴재-564m봉-갈골길안부-응봉산(516.6m)-588m봉-신라재-성황당고개-만리산-삼면봉(720m)-월오현-임당고개-용두산-593.9m봉-굴고개/굴티-복두산-490.1m봉-사기막고개-요성산갈림길-방아재-산불감시초소(480m)-녹전고개-박달산-용암지맥분기점/봉수산-예고개
●먹거리: 생수2.5리터, 빵3(단팥빵, 단팥크림빵, 따베패스츄리), 왕만쥬1, 제주감귤타르트4, 홀스3, 사탕5, 알마겔3, 홍삼스틱2
●준비물: 고아텍스, 스틱, 헤드랜턴, 구급약, 피부연고, 부직반창고, 마스크3, 충전지2, 충전짹, 반장갑, 손수건, 면수건, 휴지, 물티슈, 스패츠, 팔토시, 말방울, 망토우의, 비닐우의, 매트, 안대, 귀마개, 머리띠, 긴팔, 양말, 여분의류, 띠지20
●거리: 약 63.27km
●소요시간: 28.29h
●누구랑: 나홀로
●경비: 시외버스26,300, 저녁7,000, 동아모텔35,000, 택시25,000, 휴게소뒤풀이22,000, 무궁화13,200
●날씨: 10~26, 첫날은 흐리고 둘쨋날도 구름 많음
●산행경과:
* 5. 31.
- 05:35~07:20 : 주실령
- 06:11 : 옥돌봉
- 06:20 : 예천바위
- 06:23 : 문수지맥분기점(1211.5m)
- 06:29 : 옥석산
- 07:20~35 : 주실령(750m)
- 09:06 : 예배령(870m)
- 09:43 : 축서사갈림길
- 11:02~14 : 문수산(1207.4m)/ 삼면봉(춘양면, 물야면 → 봉성면)
- 11:25 : 성불산(1003.8m)
- 11:39~45 : 가부재/ 우곡성지(6km)
- 12:07 : 바지산(989.4m)
- 13:10 : 솔당재
- 13:25 : 삼면봉(684m, 봉선면, 춘양면 → 법전면)
- 13:50 : 흙목이재
- 14:04 : 붓든고개
- 14:41 : 갈방산(771.5m)
- 15:22 : 다덕현/다덕육교
- 16:30~52 : 엣고개, 식수 보충
- 17:10 : 엉고개
- 17:25 : 삼면봉(478m, 봉성면, 법전면 → 명호면)
- 18:?? : 봉성산(482.4m)
- 18:11 : 미륵고개
- 18:43~19:07 : 918지방도/ 경찰전적비
- 19:28 : 질고개
- 19:40 : 점골재/대백고개
- 19:54 : 긴재
- 21:12 : 응봉산(617m)
- 23:10 : 성황당고개
* 6. 1.
- 00:25 : 만리산(791.6m)
- 01:29 : 만리산 늘못
- 01:47 : 삼면봉(735m, 봉화군 상운면, 명호면 → 안동시 도산면)
- 02:50 : 월오현(16번도로)
- 03:30~05:37 : 노박
- 05:44 : 임당고개
- 06:26 : 삼면봉(636.4m, 안동시 도산면, 봉화군 상운면 → 안동시 녹전면)/ 봉화군 → 안동시
- 06:54~07:09 : 용두산(664.6m)
- 07:40 : 용수재
- 08:34 : 굴티고개/굴곡재
- 09:06 : 복두산(503m)
- 09:36 : 사기막고개
- 10:19 : 서요성산(486.9m)
- 10:24~52 : 요성산분기점
- 10:39 : 요성산중봉(492m)
- 11:10 : 방아재
- 11:33 : 산불감시초소
- 12:11 : 녹전고개
- 12:40 : 박달산(579.5m)
- 13:36 : 봉수산(570m)/ 용암지맥분기점
- 13:47~14:06 : 일출사
- 14:53 : 예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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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간 세부거리
옥돌봉-0.3km-문수지맥분기봉-1.6km-주실령-3.5km-예배령-1.9km-문수산-4.2km-가부재-0.7km-989.4m봉-3.7km-붓든고개-1.7km-갈방산-1.5km-다덕현-2.4km-엣고개-0.7km-482.4m봉-미륵고개-3km-918지방도/경찰비-1.8km-고감고개-3km-응봉산(0.3km왕복)-3.8km-만리산-3km-월오현(16번도로)-3.6km-용두산-3.8km-굴고개/굴티-0.7km-복두산-1.3km-사기막고개-1.1km-요성산(489.6m)갈림길-0.9km-방아재-0.6km-산불감시초소-1.5km-녹전고개-0.6km-박달산-1.3km-헬기장-0.5km-봉수산-1.3km-예고개
* 구간거리
- 도래기재~예고개 63.2km
- 주실령~옥석산: 1.95km
- 주실령~옥돌봉: 1.17km
-. 주실령~다덕현 22.7km(3.9km포함)
-. 주실령~문수산 10.8km
-. 축서사갈림길~다덕육교 12.2km
- 다덕현/다덕육교~월호현 21.4km
-. 다덕현~에고개 2.74km
-. 다덕현~918지방도 7.3km
-. 918지방도~월오현 14.1km
- 다덕현/다덕육교~굴고개/굴티 27.3km
-. 다덕육교~사기막고개/갈골길안부 13.2km
-. 사기막고개~굴티 14.1km
- 918지방도~선황재 34.64km
-. 918지방도~월오현 15.5km
-. 918지방도~굴티/굴고개 20.7km
- 월오현~큰두무재 25.6km
-. 월오현~예고개 16.8km
-. 예고개~큰두무재 8.8km
- 굴티/굴고개~새터고개 27.4km
-. 예고개~무시골재 18.3km
-. 굴티/굴고개~큰두무재 17.9km
* 사전 정보 및 식수 공급처
- 춘양택시: 010-3530-9998
- 주실령~옥석산: 1.95km
- 주실령~옥돌봉: 1.17km
- 에고개: 좌측 100m 인가 수도, 약 25km 지점
- 굴티고개: 인가, 수도는 확인 못함.
- 봉수산: 일출사 0.5km 식수
- 옛고개: 휴게소 매점, 기사식당, 63km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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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에서 주실령 내려가는길
- 동서울~춘양 13:50, 16:10, 18:20, 3h, 26,300
- 춘양~봉화 20:10
- 춘양~주실령 택시25,000
* 예고개에서 서울 올라오는길
- 예고개~영주시내버스터미널, 30번버스, 07:40~, 0.30h, 2시간30분 간격
* 새터고개에서 서울 오는길
- 새터고개 신진리~안동: 농어촌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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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슬지맥 이후로 보현과 팔공을 염두에 두고 자료정리와 공부를 마쳤습니다만 문수지맥과 덕산지맥을 두고 순서를 다시 정리해야 했습니다. 저는 보현에서 시작해 석심산에서 팔공으로 방향을 틀어 진행하고자 했으나 준희 선생님께서 "그게 아니다."고 한 마디로 말씀하시네요. 중간에 홀대모 봄 모임도 겹치고, 그래서 갑작스레 진행하는 문수지맥이라 자료정리와 관련정보 모음에 시간이 촉박했습니다. '설사가또'격으로 거사를 앞두고 멀쩡하던 날씨한질라 비가 쑴쑴 새어들기 시작하네요.
몇 분의 선답자 후기를 둘러보고 자료를 정리하여 두 부를 프린트 했습니다.
후기의 85% 이상을 미리 자료정리로 작성하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읽어보면서 진행하거든요. 하나는 배낭안에 넣어두고 하나는 주머니에 넣고 쉴 때마다 수시로 꺼내서 읽어봅니다.
다녀와서 잘 못 알았다거나 추가해야 될 부분을 보충을 해서 산행기를 작성한답니다.
어쨌거나 일단 휴가까지 내어 놓았으니 억지로라도 춘양으로 가보자고 출발하였습니다.
처음 계획은 다음 날에 일찍 출발하도록 밤에 도착하여 야간산행으로 옥석산에 다녀오고, 주실령 원두막에서 비박을 치르기로 했는데,, 밤사이 4mm까지 비가 내린다는 예보에 호랑이 울음소리가 곧 들릴 듯한 춘양에 도착하여 식사를 하고, 억지춘양 시장을 돌며 주변 지리를 살펴보았습니다. 모텔을 잡고, 시장에 세워둔 개인택시에 전활하여 아침 일찍 주실령에 갈 수 있느냐 물으니 아저씨 문수와 백두도 알고 언제든 전화주시라며 친절하게 받아주시네요. 비가 그치면 네시에 전화를 주기로 약속하고 다음날 아침 창문을 열어보니 날은 벌써 밝고, 후둑후둑 비 그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디 식사할 곳도 없고, 터미널앞 슈퍼도 문을 닫았네요. 기사아저씨 춘양시장 끄트머리에 편의점이 있긴하다고 가보자구 했지만 그냥 주실령으로 향합니다.
항상 현장에 답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무시골까지 진행하여 신전리마을로 내려갈 계획으로 출발했지만 예고개에서 멈췄습니다. 요성산에서부터 고민들어갑니다. 지도를 꺼내들고 예고개에서 무시골까지 거리와 시간을 살펴봅니다. 중간에 대중교통으로 수월하게 접속할 지점이 없습니다. 큰두무재까지 진행할까도 생각했지만 그 곳의 교통사정을 알지 못하는 상태라 이것저것 감안하여 예고개에서 멈추고, 다음 2구간에 추가로 하루를 더 잇대서 3일로 계획하니 마지막 날에 여유가 있어 회룡포와 삼강나루까지 다 둘러볼 수 있겠습니다.
봉수산에서 마음을 확실하게 정하고 다음 여정까지 밑그림을 그려놓았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거 일출사 구경이나 해보자고 일출사에서 보살님에게 커피 한잔 얻어 마시고, 동해쪽으로 숨막히게 펼쳐진 산해를 조망하고 예고개로 내려섰습니다. 일출사에서 예고개로 내려서는 임도가 있습니다만 다시 올라가 봉수대 옆 묘지에서 지맥길을 타고 내립니다. 송이움막이 보이는 삼거리에서 방향을 틀어놓았더군요. 송이 움막에 누가 있나 확인도 할겸 직진해서 내렸고요. 예고개 주유소가 보이는 사과과수원에서 손등 만한 산을 하나 넘어서고 묘지를 통해 예고개 마당에 도착합니다. 휴게소와 기사식당이 보이고, 저 닭발집을 기준으로 과수원으로 들어가 앞에 작은 봉에서 좌틀하는 경우도 있고, 편하게 닭발집에서 임도를 따르다 지맥길에 합류하는 방법도 있구나 하고 다음에 진행할 들머리도 머리로 눈으로 미리 이해해 둡니다.
1인분은 안 된다길래 겨자먹기로 닭발 2인분을 시켜두고 본전을 빼느라 비누로 머리도 감습니다. 2인분에 막걸리 한병 시키니 공기와 된장은 덤으로 나오네요. 그래 이걸로 뒤풀이 삼으면 되겠다 포식을 하고, 영주로 나와 청량리행 기차를 타고 상경했습니다.
봉수산 용암지맥분기점에 이르니 이름도 생소한 송암지맥이란 명패도 걸려있네요. 송암? 이건 또 먼노무 시추에이션~
제가 암벽을 조금 배웠습니다만 암벽길을 최초 개척한 분이 직접 개척한 루트의 이름을 작성할 명명권을 갖는게 불문율입니다. 박성태선생님께서 신산경표를 출간하신 이후 많은 아류들이 나타나 희안한 이름을 만들어 내며 분탕질을 일삼는군요. 마치 새로운 이름을 작성하면 유명세를 얻을 수 있겠단 조바심 인것 같습니다만 박성태선생님은 전향적으로 청출어람 청어람만 생각했지 선배를 능멸하는 버리장머리 없는 배은망덕한 경우는 미처 생각지 못한듯 합니다. 자식에게 효도를 바랄려면 자기가 먼저 부모에게 효도하는 모습을 보이는게 맞지 않나요. 어느 누가 아류들을 똑똑하다고 인정해 줄까요. 제가 보기엔 산꾼들의 망신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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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지맥(文殊枝脈)이란
낙동강의 서북쪽과 내성천(乃城川)의 동쪽을 흐르는 산줄기로, 백두대간 박달령과 도래기재 사이에 솟은 옥돌봉(1,244m)에서 남으로 갈래친 산줄기는 문수산(文殊山, 1207.6m)으로 내려와 봉화군을 북에서 남으로 가로질러, 명호면의 만리산(791.6m), 안동시 도산면의 용두산(665m)을 거쳐 녹전면의 봉수산(569.6m), 북후면의 불로봉(482m)으로 이어진 뒤 안동의 조운산(朝雲山, 635m)을 지나 학가산(鶴駕山, 874m)에 이른다. 학가산으로 향하는 문수지맥은 조운산에 이르기 전에 다시 한갈래를 나누어 봉정사가 있는 명산 천등산(天燈山, 575.4)를 만들어 놓는다. 그러나 문수지맥의 원 흐름은 학가산에서 보문산(641.7m)으로 이어진 뒤 풍천면의 검무산(331.6m)을 거쳐 예천군 지보면의 나부산(334m)을 지나, 내성천이 금천을 만나는 무아리 건너 향석리에서 낙동강과 만나는 삼강리(三江里)를 돌아, 예천의 명물로 알려진 의성포(義城浦)의 맞은편 절벽인 회룡대(回龍臺)에서 삼강나루 부근까지 이어가는 약 114.5km(실거리 135km)의 산줄기다.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의 길이는 106.3km이다.
*옥돌봉은 경북 봉화군 춘양면이다. 문수산까지 물야면과 춘양면 경계로 가다가 문수산에서 봉성면을 만나고 이어 동쪽은 법전면을 잠시 스치다가 명호면이 된다. 긴재에서 상운면과 명호면의 경계로 가다가 만리산을 지나 월오현에 이르면 왼쪽(남)은 안동시가 된다. 안동시 녹전면으로 들었다가 박달산에 오르면 영주시와 접한다. 영주시 평은면에 잠시 들었다가 다시 안동으로 빠져나오고, 학가산에 오르면 예천을 만난다. 이후 예천과 안동시계를 따르다가 지보면에 들면 온전히 예천이다. 마지막 회룡포는 예천군 용궁면이고 삼강다리 아래 내성천 건너마을은 문경시 영순면이 된다.
* 문수지맥분기점 접속 방법
문수지맥분기점에 접속하는 등로는 통상 88번국도가 지나는 백두대간 상의 도래기재(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와 서벽리를 연결하는 고개)에서 남쪽으로 대간길을 따라 2.9km를 접속하는 방법과, 다소 긴 거리(약 5km)지만 오전약수탕에서 백두대간상의 박달령에 오른 뒤 대간길 따라 옥돌봉으로 접속하는 방법, 가장 짧은 방법으로 문수지맥 상 915번 도로가 지나는 주실령에서 약 1.8km를 지맥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 분기봉에 접속하였다가 되돌아 내려서는 방법 등이 있다.
* 문수지맥 지도
* 문수지맥 X-ray
* 봉화가 품은 산(봉화는 알고보면 모두가 십승지지의 요건을 갖춘 곳입니다. 다르게 보면 그만큼 산간 벽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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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수지맥을 지나는 동네
* 영월군
강원도 남부에 있는 읍으로 강원도에서도 산세가 수려하고 삼림이 울창하기로 이름나 있으며, 지하자원의 매장량이 많다. 2개읍 7개면 57개리가 있다. 군청소재지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하송로이다. 삼한시대에는 진한의 일부였고 4세기 초부터 한산성(漢山城: 지금의 광주)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백제의 세력이 커져 한강 하류지역 일대를 차지함에 따라 이때부터 백제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 이 고장은 100가구가 넘는다는 뜻으로 백제의 백월(百越) 땅이라 불렸다. 그러나 북쪽의 고구려 세력이 낙랑군을 정복하면서 남하하게 되고 또한 반도 동남부에서 일어난 신라의 세력이 팽창하여 북상해 오면서 한강 이남의 중부 지방은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사이에 치열한 경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장수왕 때에 고구려는 국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그 세력을 남으로 뻗쳐 백제의 도읍지인 한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한강 유역은 고구려가 점령하게 되어 백월은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고 내생현(奈生縣)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 뒤 신라가 통일을 이루고 통치제도를 정비하면서 내생현을 내성군(奈城郡)으로 개칭하였으며, 9주 5소경 중 명주(溟州)에 속하게 되었다. 후삼국기에 이 지역은 고려에 영속되었고 940년(태조 23) 영월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주천현(酒泉縣)을 폐하면서 원주(原州)에 이속시켰다. 995년(성종 14) 전국을 10도로 나눌 때 원주와 같이 중원도에 속하였고, 5도양계 이후에는 양광도(楊廣道)에 편입되었다가 1372년(공민왕 21)에 영월 출신 환자(宦者) 연달마실리(延達麻實里)가 명나라에 있으면서 국가에 공이 있다고 하여 영월을 군으로 승격시켰다. 1401년(태종 1)에 이 지역은 강원도에 귀속되면서 지군사(知郡事)가 다스렸다. 1457년(세종 3)에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어 왔다. 1698년(숙종 24)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895년(고종 32) 을미개편 때 군이 되었으며, 원주·평창·정선 등과 함께 충주부에 편입되었다가 1896년 전국을 13도로 나눌 때에 다시 강원도로 복귀하게 되었다. 1914년 원주에 속해 있던 수주면(水周面)과 좌변면(左邊面)이 이 지역으로 귀속되었으며, 1915년에는 정선군 신동면 석항리가 편입되었다. 1931년 천상면(川上面)이 군내면(郡內面)으로 개칭되었으며, 1937년 7월 군내면이 영월면으로 개칭되었다. 1960년 1월 1일 영월면이 상동면 연하리를 편입하여 읍으로 승격되었다. 1963년 1월 1일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의 천평리·덕구리가 상동면에 편입되고, 수주면 강림리·부곡리·월현리가 횡성군 안흥면으로 편입되었다. 1973년 7월 1일에는 상동면이 정선군 신동면 천포리 일부의 편입을 받아 읍으로 승격되었고, 하동면(지금의 김삿갓면) 정양리와 남면 흥월리가 영월읍에, 서면(지금의 한반도면)의 북쌍리가 남면에 편입되었다. 1986년 상동읍의 녹전(碌田)·석항(石項) 2개 출장소를 통합, 중동면을 설치하였다. 2009년에는 하동면이 김삿갓면으로, 서면이 한반도면으로 각각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6년 11월에는 수주면이 무릉도원면으로 변경되었다. 북쪽으로 정성군, 평창군, 서쪽으로 횡성군, 원주시, 남쪽으로 충북 제천시, 단양군 및 경북 영주시, 봉화군, 동쪽으로 강원도 태백시에 접한다. 북동부에서 남동부로 영월지맥이 남북으로 뻗어있고, 남동부에는 백두대간 동서로 뻗어 그 산맥의 여파가 군내 각지에 미쳐 산악이 중첩하며, 북서부에 백덕산(1350m), 북동부에 백운산(1426m), 두위봉(1466m), 망경대산(1088m) 남부에 태화산(1027m), 옥석산(1232m) 등이 솟아있다. 중앙부를 한강 지류인 평창강과 주천강이 한반도면 신천리 부근에서 합류하여 동류하다가, 영월읍 하송리에서 한강 본류와 합류하고, 다시 각동리 부근에서 옥동천이 합류하며, 평지는 주천리와 영월분지 외에는 별로 없다. 군내에 석회암층이 곳곳에 있어 쌍룡,옹정,연당,영월 부근에 카르스트 지형이 발달해 있고, 진별리에는 고씨동굴 등 석회동굴도 여러 개 발달해 있다.내륙산간지대에 있기 때문에 기온의 연교차가 큰 내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지하자원의 개발을 목적으로 한 제천-태백을 잇는 산업철도인 태백선이 군의 중앙을 동서방향으로 지난다. 평창-태백, 제천-정선을 잇는 국도가 영월읍을 지나며, 군내 각 지역은 지방도로 연결된다. 도로총길이 453.03km, 도로포장률 77.3%이다(2013). [포탈에서 발췌정리]
* 봉화군
경북 북부에 있는 군으로 진한12개국 중의 하나인 기저국(己柢國)이 있던 지역이며 삼국시대에는 지금의 봉성면 일대가 고구려의 고사마현(古斯馬縣)이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편 때 봉화군(奉化郡)으로 개칭되었다. 경관이 빼어난 고산준령으로 이루어져 있어 하천연안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험준한 산지이다. 행정구역은 1개읍 9개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군청소재지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봉화로 1111이다. 삼국시대에 신라의 고사마현이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옥마현으로 고쳐 내령군(지금의 영주시) 영현이 되었다.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봉화현으로 고침으로써 현재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조선초의 군현제 개편으로 1413년(태종 13)에 현이 되었다. 1457년(세조 3)에 단종복위운동으로 순흥부가 혁파되어 문수산 이동지역을 나누어 받았다가 1683년(숙종 9) 순흥이 복구되면서 이양했다. 임진왜란 후 선조대에 오지인 이 고을 태백산 각화사 근처에 선원각과 실록 등을 보관하는 사고가 설치되어 태백산 사고로 불리웠다. 별호는 봉성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고종 32)에 안동부 봉화군, 1896년에 경상북도 봉화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소천면·재산면은 그대로, 춘양면·상동면은 춘양면으로, 와단면·중춘양면은 법전면으로, 동면·상남면·하남면은 명호면으로, 서면·임지면은 상운면으로, 군내면·북면은 봉성면으로, 물야면·수식면은 물야면으로, 내성면·화천면은 내성면으로 통합되었다. 1956년에 내성면이 봉화면으로 개칭되고, 1979년에 봉화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에 소천면과 울진군의 일부지역을 분할하여 석포면을 설치했다.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에서 낙동정맥이 갈라져 군의 동쪽으로 남하하고, 백두대간이 태백산을 통해 군의 북쪽과 서쪽을 따라 이어져 있으며, 남서쪽으로는 비교적 평탄한 분지가 전개되어 있다. 북부지역은 구룡산(九龍山, 1,346m)·선달산(先達山, 1,236m)·옥돌봉(1,242m)·청옥산(靑玉山, 1,277m)·연화봉(蓮花峯, 1,053m) 등 1,000m 이상의 높은 산들이 이어져 있으며, 문수산(文殊山, 1,206m)·각화산(覺華山, 1,177m)·청량산(淸凉山, 870m) 등의 높은 봉우리들이 군내 곳곳에 솟아 경북 제1의 산악지대를 이루고 있다. 낙동강이 봉화군에 이르러 석포리천(石浦里川)·회룡천(回龍川)·현동천(縣洞川) 등과 합류하여 명호면을 거쳐 안동으로 흘러가며, 군의 서부지역을 남서류하는 내성천(乃城川)은 봉화읍을 감싸돌아 범드리들 등의 평야를 이루어 놓은 뒤 예천군에 이르러 낙동강에 합류된다. 기후는 내륙 산악지대인 관계로 대륙성기후를 나타내어 연교차와 일교차가 크고, 같은 위도상의 다른 지역에 비해 기온이 낮다. 연평균기온 11.2℃ 내외, 1월 평균기온 -4.8℃ 내외, 8월 평균기온 26.1℃ 내외, 연평균강수량 988㎜ 정도이다. 군내에서도 북쪽 산간지방은 봉화읍을 중심으로 한 남쪽 분지지방에 비해 약 3℃ 낮으며, 일조량이 적어 그루갈이가 불가능한 지역도 있다. 식생은 풍부하여 젓나무·자작나무·참나무 등의 숲이 울창하며, 예로부터 궁궐을 짓는 데 사용되었던 적송(赤松) 춘양목(春陽木)이 유명하다. 산간지대로서 교통이 매우 불편했으나 영동선이 군의 중앙을 동서로 가로질러 영주·태백·영동 지방을 연결하고 있으며, 제천-울진을 잇는 국도는 간선 산업도로로서 이용가치가 높다. 또한 태백과 안동을 잇는 국도가 동부를 남북으로 지나가고 있어 영남-영동, 내륙-동해안을 연결하는 교통상 요지가 되고 있다. 도로총길이 483.78km, 도로포장률 74.1%이다(2013). [포탈에서 발췌정리]
* 영주시
경북 중북쪽에 있는 시이다. 조선 중기의 예언서 <정감록(鄭鑑錄)>에서, 전쟁이나 천재지변을 피해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열 곳의 지역인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첫 번째로 꼽히기도 했다. 현재는 경북 북부 지방의 교육·문화의 중심지이며, 강원도와 영남지방을 연결해주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특산물로 인삼·사과·직물이 유명하다. 행정구역은 1개읍 9개면 9개 행정동 13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소재지는 경상북도 영주시 시청로 1이다. 삼한시대에 날이국이었던 이 지역은 신라의 파사왕이 점령하고 군(郡)을 설치함으로써 신라의 세력권에 들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인 757년(경덕왕 16) 내령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선곡현(지금의 예안)·옥마현(지금의 봉화)을 영현으로 관할했다.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강주로 개칭했다가 995년(성종 14)에 단련사를 두었다. 1018년(현종 9)에 안동의 속현으로 병합되었으나, 1143년(인종 21)에 순안현으로 승격되어 독립했으며, 1259년(고종 46)에 영주로 승격했다. 조선초인 1413년(태종 13)에 영천군이 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영천의 별호는 구성이었다.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1895년(고종 31)에 안동부 영천군, 1896년에 경상북도 영천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풍기군과 순흥군이 영천군에 합병하여 영주군을 이루었다. 이때 면의 폐합도 이루어져 영천군의 봉향면·망궐면·가흥면이 영주면으로, 두전면·호문면이 장수면으로, 적포면·권선면·진혈면(일부)이 문수면으로, 천상면·진혈면(일부)이 평은면으로, 산이면·어화면·말암면이 이산면으로 통합되었으며, 풍기군의 10개면이 5개면으로, 순흥군의 6개면이 3개면으로 폐합되었다. 1923년에 상리면·하리면이 예천군으로 이관되었다. 1940년에 영주면, 1973년에 풍기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0년에 영주읍이 시로 승격, 분리되면서 영풍군으로 개칭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던 영풍군과 중심도시 기능을 담당해왔던 영주시가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영주시가 되었다. 시의 대체적인 지세는 북서부 시계를 따라 뻗어 있는 백두대간과 그 지맥의 영향으로 북쪽과 서쪽이 높고 남쪽과 동쪽이 낮은 지형을 보이고 있다. 북서부에는 봉황산(819m)·선달산(1,236m)·어래산(1,064m)·형제봉(1,178m)·국망봉(1,421m)·소백산(1,440m)·제1연화봉(1394m)·제2연화봉(1,357m)·도솔봉(1,314m)·묘적봉(1,148m)·자구산(784m) 등이 솟아 있다. 도솔봉으로 넘어가기 전 산세가 낮은 곳에 있는 죽령(689m)은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남부에는 박달산(577m)·봉수산(570m)·불로봉(482m)·대마산(375m) 등의 비교적 낮은 산들이 솟아 있다. 하천은 이 지역의 북서부에서 발원해 동남쪽으로 흐르는 남원천과 국망봉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흐르는 죽계천이 합류해 남류하면서 서천을 이룬다. 또한 북동부에서 발원한 낙화암천은 봉화군 봉화읍에서 내성천에 합해져 동남부를 흐르다가 평은면에서 유로를 바꿔 문수면 승문리 일대에서 서천에 유입한다. 이들 하천 유역에는 비교적 넓은 침식분지가 발달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내륙분지이기 때문에 기온의 연교차가 큰 대륙성기후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북부지역에는 낙엽송이 울창하며, 산지에는 몇 백 년 동안 자생한 철쭉이 많다. 소백산의 정상에는 대초원이 펼쳐져 있으며 곳곳에 원추리가 무리지어 서식하고 있다. 중앙선이 시의 중앙을 북서-남동 방향으로 지나고, 경북선이 시의 남서부를 지나 영주역에 이르며, 영주역에서 영동선이 시작되어 북동 방향으로 지난다. 제천-안동을 잇는 국도가 중앙선과 나란히 달리고, 음성-울진, 영주-영천 방면을 연결하는 국도가 영동선·경북선과 나란히 달린다. 앞으로 중앙선의 복선화가 이루어진다면 영주시는 경상북도의 지하자원과 임산물·농산물의 집산지 및 유통지로서의 역할이 더욱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중심시가지 중앙에 철도가 위치하고 있어 시가지 발달에 문제점을 안고 있다. 도로총길이 527.36km, 도로포장률 75%이다(2014). [포탈에서 발췌정리]
* 안동시
경북 중북부에 있는 시로 유교문화의 본고장이며 전통문화의 유산이 풍부한 역사와 문화의 고장이다. 풍천면 마애리의 구석기시대 유적을 비롯하여 국내 최고(最古) 목조건물 봉정사 등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찰들이 곳곳에 있다. 한국의 전통마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하회마을은 경주시 양동마을과 함께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행정구역은 1개읍 13개면 10개동이 있다. 시청소재지는 경상북도 안동시 퇴계로 115이다. 삼국시대 이전에 창녕국 등 소국(小國)이 있었던 것으로 〈대동지지 大東地志〉 등에 기록되어 있으나, 신라가 이곳에 진출하여 고타야군을 설치했다. 757년(경덕왕 16)에 고창군으로 개칭하고, 직령현·일계현·고구현을 영현으로 관할했다. 후삼국시대에 고려와 후백제의 각축지가 되었던 이 일대는 이 고을 호족인 김선평·김행·장길 등이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승리한 공으로 940년(태조 23)에 안동부로 승격되었다. 후에 영가군으로 강등되고, 995년(성종 14) 행정구역 개편 때 길주로 승격되었다. 그 뒤에도 몇 차례의 변화를 거쳐 1030년(현종 21)에 안동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1197년(명종 27)에 도호부로, 1202년에 대도호부로, 1308년에 복주목으로 계속 승격되었으나, 1310년(충선왕 2)에 복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승격되었으며, 홍건적의 침입으로 1361년에 왕이 이곳에 피난해 머물렀던 공으로 이듬해에 안동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안동대도호부로서 경주와 함께 경상좌도의 대읍으로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1576~81, 1776~85년에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안동의 별호는 석릉·고령·화산·능라·지평·일계·고장 등이었다. 고종대의 지방제도 개정으로 1895년에 안동부 안동군, 1896년에 경북 안동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정리로 감천면을 예천군에, 재산면·소천면·춘양면·내성면을 봉화군에 이관하게 되어 면적이 많이 줄었다. 그러나 1914년에 군면 폐합에 의해 예안군이 폐지되어 안동군에 편입됨으로써 면적이 다시 확대되었다. 1931년 읍면제를 실시함에 따라 안동군 부내면이 안동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63년에 안동읍이 신안동시로 승격되었다가 곧 안동시로 개칭했다. 1983년에는 안동군의 남후면 일부와 와룡면 일부가 편입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실시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던 안동군과 중심도시기능을 담당해왔던 안동시가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형태의 도농통합시인 안동시를 이루었다. 백두대간의 지맥이 시의 동·서에 걸치면서 북동쪽에는 산지를, 남서쪽에는 비교적 평탄한 침식분지를 이루어 놓았다. 시계를 따라 파리봉(497m)·산성산(845m)·두름산(485m)·사일산(649m)·계명산(537m)·화부산(626m)·산지봉(890m) 등이 동쪽에, 불로봉(482m)·갈미봉(548m)·천등산(574m)·보문산(643m)·검무산(332m)·봉화산(401m)·삼표당(444m)·향로봉(327m)·기룡산(508m)·황학산(782m) 등이 서쪽에 솟아 있다. 낙동강이 시의 중앙부를 남류하면서 안동호를 이룬 후 중심시가지를 가로질러 서류하면서 미천(眉川)·송야천(松夜川) 등을 합류하고 서부일대로 흐른다. 반변천·안기천·안막천 등도 낙동강에 흘러든다. 시를 흐르는 낙동강은 하상이 높아 평탄한 곳의 대부분은 모래사장을 이루며, 주변에 넓은 평야를 이루었다. 풍산읍과 풍천면에 이 지역의 최대 평야지대인 풍산평야가 있다. 풍산평야는 낙동강의 소지류인 상리천과 매곡천에 의해 이루어진 충적평야이다. 중심시가지는 대체로 높이 200~400m의 산지로 둘러싸인 침식분지이다. 기후는 내륙분지인 지형적 요인과 대륙성기후의 영향으로 한서의 차가 심하다. 유교문화재로는 도산서원전교당(陶山書院典敎堂, 보물 제210호)·병산서원(屛山書院)·호계서원(虎溪書院), 유성룡을 모신 충효당(忠孝堂, 보물 제414호) 등이 있으며, 건축물로는 안동양진당(安東養眞堂, 보물 제306호)·안동의성김씨종택(보물 제450호)·안동소호헌(安東蘇湖軒, 보물 제475호)·안동김씨종택·하회원지정사(河回遠志精舍) 등이 있다.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은 2019년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다른 지역의 7개 서원과 함께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포탈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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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돌봉/ 옥석산(玉石山, 1244.0m)
옥석산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우구치리에 위치한 산으로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능선부에 있다. 서사면 계곡의 물야면 오전리에는 오전약수가 있다. 산꼭대기에는 옥돌봉이라는 암각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지명은 『조선지형도』에서 처음 볼 수 있다. 산의 정상부에 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의 '빛이 예천까지 비친다'고 해서 예천봉 또는 예천바위라고도 한다. 이곳은 6.25사변시 공산게릴라와의 치열한 격전지로도 유명하다. 운곡천이 발원하는 동쪽은 하곡을 이루어 낙동강 상류가 되고 북쪽에서 발원하는 내리천(內里川) 물은 남한강의 상류를 이룬다. 남쪽의 주실령(776m)과 서쪽의 박달령(1,017m)은 각각 영주시와 충청북도 단양군으로 통하는 길목이며, 동북쪽의 도래기재[道驛嶺]에 있는 금정터널은 춘양면과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을 연결하는 주요교통로로 이용된다. 우측 헬기장 끝에 옥석산표지판이 있다. 헬기장 끝의 안내판에 의하면, 옥석산과 옥돌봉을 약간 구분하여 표기하여 놓았고, 옥석산의 유래를 '단군신화에 의하면 환인이 머물다 간 곳이라 하여 옥석산이라 한다'라고 표기하였다. 즉, 전설에 의하면 단군인 환인께서 천지순회를 하다가 이른 곳은 옥이 안난 곳이 없고 선경(仙景)이 아닌 곳이 없었다 하는데 환인이 순회한 곳이라 하여 이름을 옥돌봉이라 하였다 한다.
- 옥돌봉에는 (옥돌봉, ←박달령 3.0km, 도래기재 2.76km→)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 문수지맥분기봉(1211.5m)
백두대간 옥돌봉(옥석산, 1244.0m)에서 선달산 방향으로 0.24km 내려선 분기점, 박달령과 주실령, 옥돌봉이 갈리는 삼거리 갈림봉이 문수지맥 출발점이다. 문수지맥분기봉에서 좌측(동쪽)이 봉화군 춘양면, 우측(서쪽)이 봉화군 물야면을 가르며 대체로 남향과 남동향한다.
- 이정표(↓옥돌봉 0.24km, ↑주실령 1.85km, 박달령 2.74km→)가 있다.
소백산 방향으로 백두대간을 가늠해 보기 좋습니다. 소백산~태백산 구간 중에 태백산 쪽에 가까우며 백두대간을 마구령-선달산-박달령-옥돌봉-도래기재-구룡산-신선봉-부쇠봉으로 진행하였죠.
♤ 예천바위
옥돌봉에서 0.35km 내려선 예천바위 갈림길에서 예천바위는 우측 30m 벗어나 있다. 옥돌봉은 『조선지형도』에서 “산의 정상부에 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의 '빛이 예천까지 비친다'고 해서 예천봉 또는 예천바위라고도 한다”라는 유래에서 그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예천바위에서 주실령으로 올라오는 구불구불한 915번 지방도로 너머로 멀리 봉화읍내가 조망된다. 가야할 문수지맥 능선으로 옥돌바위와 지맥의 맹주 문수산이 우람하게 조망되고, 오전리와 물야저수지로 이어지는 계곡과 그 우측으로 박달령과 선달산-늦은목이-소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이 조망된다.
옥돌바위에 옥돌봉이라는 표지석과 함께 춘양을 내려다 보는 전망테크가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예천바위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 옥돌바위/ 조망데크
예천바위에서 5분여 내려서서 이정표(↓옥돌봉 0.8km, 주실령 1.08km→)에서 지맥길은 우측으로 내려서지만, 직진하여 암봉 위로 올라서면 고래등 같은 암릉으로 이루어진 전망바위에 올라서는데, 개념도에 '옥돌바위'로 이름이 붙어있다.
- 국립백두대간식물원 뒤로 문수산 가는 지맥 능선이 바라보이며 문수산 우측 뒤편 마루금은 문수산에서 남서향으로 뻗어내리는 봉화단맥 능선이다.
- 태백산은 보이지 않으며 각화지맥 마루금을 살펴볼 수 있다.
♤ 국립백두대간수목원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백두대간의 중심인 경상북도 봉화군 서벽리일대에 조성된 아시아 최대 규모의 수목원으로 2018년 5월3일 개원식을 갖고 본격 운영에 들어갔다. 총5,179ha 규모로 생태탐방지역(4,973ha)과 중점조성지역(206ha)로 구분되며 방문객들이 주로 이용하게 될 중점조성지역은 진입 및 커뮤니티지구, 주제정원 전시지구, 산림보전 및 복원지구, 생물자원연구 및 교육지구 총 4개지구로 나눠져있으며 현재 가장 주목받는 시설은 종자영구보존시설인 “Seed Vault”와 “호랑이숲”이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 따르면 과거 백두대간을 호령하던 백두산 호랑이는 1900년 무렵까지 한반도에서 쉽게 볼 수 있었지만 1920년대 이후 자취를 감췄다. 이에 멸종 위기 야생생물 1급 보호 동물로 지정된 백두산 호랑이를 자연생태에 가까운 넓은 방사장에서 관찰할 수 있도록 ‘호랑이숲’을 조성했다. 현재 3마리의 백두산 호랑이가 ‘호랑이숲’을 지키고 있으며 향후 백두산 호랑이의 유전적 다양성 확보를 위해 추가 도입을 계획하고 있다. 시드볼트(Seed Vault) 시설은 세계 최초의 야생식물 종자 영구 보존시설로 지구상에서 사라져가는 야생식물 종자를 확보·보존하기 위해 특별히 건설됐다. 지하 46m, 길이 130m 지하터널에 설치된 종자저장 시설은 영하 20도에서 최대 200만점까지 저장이 가능하도록 조성됐다. 현재 21개 기관에서 4만7000여 점의 종자를 기탁해 보관 중이다. 시드볼트는 앞으로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그리고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국가 재난에 대비해 야생식물 종자를 중복 저장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기후변화지표식물원, 고산식물 연구동, 고산습원, 야생화 언덕 등이 조성되어 있으며 백두대간 능선에 자리하고 있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다양한 고산식물을 관람할 수 있다.
♤ 주실령(780m)
외씨버선길과 겹치는 주실령은 해발 780m의 고개로 옥돌봉과 문수산 사이에 위치한 고개이다.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와 춘양면 서벽리를 이어주는 915번 지방도로가 지난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곳까지 물이 차 있어 배가 다니는 고개라 하여 배주(주)자를 써서 주실령이라 부른다. 일부 지도에는 주보령으로 표기되어 있기도 하지만 이는 한자 표기상 실(實)을 보(寶)로 오기한 듯하다. 주실령 서쪽으로 자리한 물야면 오전리에는 탄산수로 이름 높은 오전약수가 있고, 동쪽 춘양면 서벽리에도 두내약수가 있다. 주실령은 해발 780m가 되는 높은 고개이지만 봉화군 자체의 해발높이가 높은 관계로 높이에 비하여 도로는 완만하다.
- 우측편에 '외씨버선길 위치표시목(봉화구간 / 10길 / 약수탕길, 10-3 주실령'과 사각 원두막 쉼터가 있다.
♤ 외씨버선길
외씨버선길은 우리나라 대표 청정지역인 청송, 영양, 봉화, 영월 4개군이 함께 만든 4색(色) 매력 둘레길로, 이 4色길이 합쳐지면 조지훈 시인의 승무에 나오는 외씨버선과 모양이 비슷하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십승지지란,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뺏고 빼앗기고 죽이고 죽어야 했던 혼미한 세상이 만든 '터잡기' 개념일진데, 십승지지란 한마디로 말해서 괜찮은 '산간 분지' 를 일컫는 말에 다름아니다. 높은 산줄기가 삥 둘러서서 외부의 침입을 막아 주는 곳 안쪽에 움푹파이다시피 한 분지로서, 농사지어 먹을 만한 들판이 있는 곳이 이른바 십승지지의 전형이다. 언젠간 오랑캐의 침입으로 병화에 휩쓸린다고 보았을까 이북에는 십승지지가 하나도 없다. 도선비결, 정감록의 십승지지, 남사고의 십승지지... 도선대사, 무학대사, 남사고, 이지함, 이중환으로 계보가 이어진다.
♤ 춘양은 『정감록(鄭鑑錄)』의 십승지지(十勝之地)
정감록의 십승지지는 조선시대에 사회의 난리를 피하여 몸을 보전할 수 있고 거주 환경이 좋은 10여 곳의 장소를 말하는데, 조선후기의 정치․사회적 혼란과 민간인들의 경제적 피폐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생겨났다. 십승지의 입지조건은 자연환경이 좋고, 외침이나 정치적인 침해가 없으며, 자족적인 경제생활이 충족되는 곳이었다. 십승지의 위치에 관해 『정감록』의 「감결(鑑訣)」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몸을 보전할 땅이 열 있으니, 풍기 금계촌, 안동 화곡, 개령 용궁, 가야, 단춘, 공주 정산 마곡 진천, 목천, 봉화, 운봉 두류산, 태백으로 길이 살 수 있는 땅이다.” 이어서 열 곳 승지의 구체적인 지리적 위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첫째는 풍기 차암 금계촌(金鷄村)으로 소백산 두 물골 사이에 있다. 둘째는 화산 소령 고기(召嶺古基)로 청양현[현 춘양면]에 있는데, 봉화 동쪽 마을로 넘어 들어갔다. 셋째는 보은 속리산 증항(蒸項) 근처로, 난리를 만나 몸을 숨기면 만에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넷째는 운봉 행촌이다. 다섯째는 예천 금당실로 이 땅에는 난의 해가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임금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다. 여섯째는 공주 계룡산으로 유구 마곡의 두 물골의 둘레가 2백리나 되므로 난을 피할 수 있다. 일곱째는 영월 정동쪽 상류로 난을 피해 종적을 감출만 하다. 여덟째는 무주 무봉산 동쪽 동방 상동으로 피난 못할 곳이 없다. 아홉째는 부안 호암 아래가 가장 기이하다. 열째는 합천 가야산 만수봉으로 그 둘레가 2백리나 되어 영원히 몸을 보전할 수 있다. 정선현 상원산 계룡봉 역시 난을 피할 만하다.” 십승지지는 『정감록』의 문헌에 따라 위치와 장소가 조금씩 달리 나타나며 추가되기도 하였다.「남격암 산수 십승 보길지지」에는 감결에서 말한 열 곳 외에도 여러 장소가 더해졌다. 그 지역은 모두 태백산과 소백산의 남쪽으로서, 풍기와 영주, 서쪽으로 단양과 영춘, 동쪽으로 봉화와 안동이 보신처라고 하였고, 내포의 비인과 남포, 금오산, 덕유산, 두류산, 조계산, 가야산, 조령, 변산, 월출산, 내장산, 계룡산, 수산, 보미산, 오대산, 상원산, 팔령산, 유량산, 온산 등도 해당 장소로 들었다. 한편 『정감록』의 「서계이선생가장결」에는 “황간 영동 사이에는 가히 만 가호가 살아나고 청주 남쪽과 문의 북쪽 역시 모습을 숨길 수 있다.”고 다시 몇 군데가 추가되었다. 『정감록』을 살펴보면 한 가지 의아한 것이 있는데, 십승지지에 북한에 관해 언급된 것은 없다는 점이다. “임진(臨津) 이북은 다시 오랑캐의 땅이 될 터이니 몸을 보전하는 것을 논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곳 외에 경북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의 우복동도 난리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졌다.
♤ 약수탕길
약수탕길은 국립백두대간수목원 후문 부근 시점에서 출발하여 주실령을 지나 박달령, 오전약수관광단지, 봉화객주, 물야저수지를 거쳐 상운사까지 이어지는 13km 구간이다.
♤ 오전약수(吾田藥水)
오전약수탕이 있는 마을은 예전에 쑥밭이란 뜻으로 애전(艾田)으로 불리던 곳인데 이 쑥밭이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이 지역이 물이 합수되는 지역이라 하천이 범람하여 항상 늪지대였기에 그런 뜻으로 수전(水田)이라 하였는데, 다른말로 쑤뱅이라 불리던 것이 쑥밭으로 변경되었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이곳 약수물이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문둥병 환자들이 약수를 먹고 몸을 씻고 이 지역에 있는 쑥으로 피부에 뜸을 뜨고 달여먹고 하여 병을 고쳤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어 쑥밭이라 불리웠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오전 약수터는 물야면 오전리 후평장과 춘양 서벽장을 드나들며 장사를 하던 봇짐장수(褓負商) 곽개천이라는 사람이 서벽장을 보고 주실령을 넘어 후평장으로 가던 어느날 쑥밭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와 이르기를 "네 옆에 만병을 통치할 수 있는 약수가 있다"고 하였다. 잠에서 깨어 옆을 보니 과연 약물이 솟고 있었고, 조선 제9대 성종(1469~1494)때 발견된 이 약수는 이듬해 가장 물맛이 좋은 약수를 뽑는 대회에서 전국 최고의 약수로 뽑혔다고 한다. 이 약수는 탄산성분이 많아 톡쏘는 맛이 일품이며 주요성분은 유리탄산, 망간, 마그네슘이온, 염소, 중탄산, 칼슘이온, 철분으로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한편, 오전약수탕 주변 등산로는 백두대간 구간으로 최근에는 등산객들이 많이 찾고 있고 맥반석 찜질방이 있어 약수샤워도 즐길 수 있다.
주실령에서 약 20분 올라서서 군 참호가 있는 갈림길에 올라 배낭 놓고 삼각점봉에 다녀옵니다.
♤ 삼각점봉(983.7m)
헬기장 한쪽 귀퉁이에 3등삼각점 (춘양 301)이 있으며 부뜰이운영자부부님이 수고해 주신 산패도 확인한다.
- 조망은 꽝!
예배령은 임도를 넓히는 공사중입니다. 고개가 절개지로 뚝 잘라져 있는데 다행히 옆으로 계단이 있네요.
♤ 예배령(禮拜嶺, 919m)
예배령은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와 춘양면 서벽리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물야면의 오록장과 봉화읍의 봉화장을 보기 위해 춘양, 강원도의 영월•상동 등지의 사람들이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이 고개는 물야면과 춘양면을 이어주는 매우 짧은 지름길이기는 하지만 산이 높고 경사가 매우 가파른 고개이다. 그래서인지 이 재를 넘기 위해서는 하룻밤을 묵고 넘어야 했다고 한다. 『조선지형도』에는 예비령(禮飛嶺)으로,『조선지지자료』에는 예비령(禮備嶺)으로 기재되어 ‘비’자의 한문이 상이하다. 『봉화군지』에는 예부령(禮夫嶺)으로 표기되어 있다.
예배령은 애기를 업고 가던 아버지가 아이가 죽자 이곳에 묻고 혼자 갔다고 하는 전설이 있기도 하고, 조선시대 이퇴계 선생이 이 고개를 넘어다니며 문수산을 향하여 절을 하였다 하여 예배령이라 하였다는 설도 전해온다.
물 한잔 먹고가기엔 너무 먼 당신입니다.
♤ 축서사갈림길
축서사갈림길에서 축서사까지는 약 1.2km 거리이고, 축서사 입구 쪽 보살 입상 앞 음수대에서 시원한 생수로 목을 축일 수 있다하나 내려가서 물한잔 마시기에는 너무 멀다. 축서사갈림길에서 문수산까지 0.8km, 170고지를 약 30분 쳐올려야 한다. 여기서 축서사로 1구간을 끊는 경우도 많다.
♤ 축서사(鷲棲寺)
축서사(鷲棲寺)는 독수리 축(鷲), 깃들서(棲), 즉 「독수리가 사는 절」이라는 뜻으로, 독수리는 지혜를 뜻하며 지혜는 바로 큰 지혜를 가진 문수보살을 뜻한다. 축(鷲)은 사전에는 ‘취’로 표기되나,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시던 영축산을 본 따 ‘축’으로도 읽는다. 또 다른 가설로 축서사가 자리잡은 험준한 뒤쪽 산세가 풍수지리학상으로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는 형국이라 하여 축서사로 명명하였다는 설도 있다. 축서사는 신라 제 30대 문무왕 13년(서기673년) 의상조사가 창건한 절로, 창건 설화에 의하면, 문수산 아래 지림사(智林寺) 스님이 어느 날 밤 지금의 개단초등학교 앞산을 바라보니 광체가 발산되고 있어 그 곳으로 가 보니 한 동자가 불상 앞에서 절을 하고 있다가, 청량산 문수보살이라고 한 뒤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리고 불상만 남았다. 훗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의상대사가 현 대웅전 터에 법당을 짓고 불상을 모시니 이 절이 축서사이다. 이때 산 이름도 문수보살이 출현하였다 해서 문수산이라 하였다. 3년 뒤 의상대사는 축서사에서 40여리 떨어진 봉황산 중턱에 대찰을 세웠으니 동국화엄제일도량인 부석사(浮石寺)다. 흔히 축서사를 부석사의 큰집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867년(경문왕 7)에 부처 사리 10과를 가져와 사리탑을 조성하였으며, 이후 참선 수행 도량으로 유명해졌다. 이후 1705년(조선 숙종 31)에 중건하였는데, 대웅전 본존불에 기도하면 영험이 있다하여 기도처로 유명한 사찰이기도 하였으나, 조선 말 을사보호조약(서기1905년)과 정미7조약(서기1907년)에 분개한 전국의 의병이 이 절에서 무장봉기하여 항일투쟁하자 일본군이 의병 토벌 작전의 일환으로 대웅전만 남기고 전소시켰다. 유물로 보물 제 995호인 봉화축서사석불좌상부광배가 유명하다.
♤ 문수산(文殊山, 1205m)/ 삼면봉(춘양면, 물야면 → 봉성면)/ 봉화의 진산, 1등삼각점(춘양 11)
문수산은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 춘양면 서벽리, 봉성면 우곡리에 걸쳐있다. 백두대간 옥돌봉에서 남동쪽으로 안동 학가산까지 뻗어가는 문수지맥의 산으로 봉화의 진산(鎭山)이다. 신라시대에 강원도 수다사(水多寺)에서 도를 닦던 자장율사가 태백산을 찾아 헤매던 문수보살이 이 산에 화현(化現: 불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려고 여러 모습으로 변하여 세상에 나타남)했다하여 문수산이라 했다고 전한다. 또 독수리가 웅크리고 앉아있는 생김새라 하여, 불법(佛法)에서 ‘날카로운 지혜’는 독수리의 부리와 같다는 이치에서 대승보살 중에 지혜가 날카롭고 뛰어난 문수보살의 이름을 따 문수산이라는 지명을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산중에는 673년(신라 문무왕 13년) 의상(義湘)이 창건한 축서사(鷲棲寺)가 현존하며, 중대사(中隊寺), 서벽사(棲碧寺), 공벽암(控碧庵) 등 많은 절터가 있다. 예로부터 약수가 나는 명산이라고 부르는데 이 곳 문수산에는 오전약수를 비롯하여 다덕약수, 두내약수 등 3개의 천연탄산약수터가 있다.
- 축서사갈림길에서 지맥길에 접속하여 좌 춘양면, 우 물야면을 가르며 문수산까지 이어지고, 문수산에서 우측이 물야면에서 봉성면으로 바뀌어 남동향한다.
- 지맥길은 문수산 정상에서 되돌아 내려와서 우향하여, 헬기장(1195m)을 지나 산불감시카메라봉 우측으로 이어간다. 문수산 정상 올라선 반대 방향에 시그날이 많이 걸려있는데, 이 방향은 지맥길이 아니라 내성봉화단맥이 뻗어나가는 능선이다. 정상에는 까만 비석 정상석(문수산 / 1205m)과 1등삼각점(△춘양11, 1995복구)이 있다.
♤ 내성봉화단맥
내성봉화단맥은 내성기맥 봉화군 물야면, 춘양면, 봉성면의 삼면봉인 문수산에서 남쪽으로 분기하여 거칠은 임도-누은들 도로(410m)-336.2m봉-궁고개-문두래쟁이[물푸레쟁이]-높은배리[높은벨]를 지나 봉화읍 삼계리 가계천이 내성천을 만나는 삼계교에서 맥을 다하는 13.1km의 산줄기를 말한다.
♤ 성불산(1003.8m)
암릉 직벽 위험구간을 다 내려선 곳에 있는 봉우리이다. 그냥 지나기 쉽고 올라서도 볼것 없는 봉우리에 불과하다. 조망한번 살피고 출발하면 좋다.
- 올라가보니 산패도 없어요. 세르파님 띠지가 반겨주더군요.^^
♤ 가부재(830m, 847m)
가부재는 우측으로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와 좌측으로 춘양면 도심리 사이의 고개이다. 이름 유래로 옛날 어느 장수의 갑옷이 이 고개에 있었다고 하여 갑의치(甲衣峙)라고 불렸는데, 일제 때 가부치(加富峙)로 개칭하였다고도 하고, 130여년 전에 강씨의 묘가 있었는데 이 묘는 갑옷을 입었던 장군의 묘라 하여 「갑옷재」라 하였는데 그후 발음이 변하여 가부재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강씨 성을 가진 장군의 묘가 있었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 가부재에서 내려서서 우곡성지까지 임도를 따라 6km인데 여기서 구간을 끊는 경우도 많이 있다. 직진 방향 앞쪽에 차량 차단봉 있는 임도 우측 숲길이 들머리다.
♤ 운곡천환종주길/ 봉화 석현리 일대
십승지(十勝地) 봉화춘양 둘레산길은 춘양 세주막교에서 출발하여 문수산을 거쳐 축서사까지 제1구간, 축서사에서 예배령, 주실령을 거쳐 도래기재까지 제2구간, 도래기재에서 백두대간 구룡산을 거쳐 각화사까지 제3구간, 각화사에서 세주막교까지를 제4구간으로 하는 약 55.5km 거리의 둘레길을 말하는데, 「운곡천 환종주길」이란 이름으로 산꾼들 사이에서 종주되고 있는 트레킹길이다.
♤ 삼각점봉/ 바지산(989.4m)/ 무인산불감시카메라
가부재에서 약 30분 올라서서 갈림능선에서 우향하여 100여m 진행하면 989.4m봉으로 바지산이라고 하나 정식 명칭은 아니다.
- 폐헬기장으로 잡목과 잡풀이 뒤덮고 있다. 3등삼각점(춘양303 / 2004재설)이 있다.
♤ 솔당재
솔당재는 우측으로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와 좌측으로 춘양면 학산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국가정보원 온맵 25,000 지도상에는 솔당재가 707.8m봉 직전에 표기되어 있지만, 실제 진행해 보면 재라고 할만한 곳이 없고, 707.8m봉을 넘어서 5분여 내려선 지점에 뚜렷한 재의 흔적이 있는데, 솔당재로 보인다.
- 보통은 팽나무, 느티나무로 당산나무를 삼는데 소나무가 당산나무였나? 성황당터는 돌흔적이 특징이다.
묘지에서 우틀, 직전에 우회길 있네요.
♤ 삼면봉(684m)/ 삼면봉(봉성면, 춘양면 → 법전면)
솔당재에서 잠시 올라서면 소나무 고목이 자태를 뽐내고 있는 삼면봉이다. 지금까지 좌 춘양면, 우 봉성면을 가르며 이어오던 지맥길은, 이 봉에서 좌측이 법전면으로 바뀌어 이어진다.
- 솔당재와 흙목이재 사이 삼면봉에서 좌측이 춘양면에서 법전면으로 바뀌어 좌 법전면, 우 봉성면을 가르며 이어진다.
♤ 감의단맥(感衣短脈)
삼면봉에서 좌측(동쪽)으로 춘양면과 법전면을 가르며 이어지는 능선은 운곡천의 감의산(感衣山, 540.1m)까지 길게 이어지는 감의단맥(感衣短脈)이다.
♤ 흙목이재
25000 지도상의 흙목이재는 고개가 아니고 평지능선인데, 지리원은 "고개 정상에 있는 곳으로 흙모래라 불리기도 하고 흙목이재라고도 부른다"로 적고 있다.
♤ 붓든고개(575m)
고개 동쪽의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붓든마을에서 그 이름이 붙었다. 붓든은 붓둔, 북둔(北屯), 부둔(浮屯)에서 왔다. 마을의 양쪽에 베틀 같은 산이 있고 가운데 북처럼 생긴 산이 있어서 유래된 마을 이름이며, 마을에 둔덕이 많아 교통이 불편한 오지부락이다.
- 임도 한쪽에 송이채취꾼 움막이 있습니다. 저같이 노박하는 경우는 장성급 호텔로 보이더군요.^^
♤ 갈방산(葛芳山, 771.5m)
붓든고개에서 세번째 봉우리이다. 691m 전위봉을 오르고 함몰지 동굴을 여러번 지나 오르면 갈방산이다.
- 전망이 좋은 곳에 묘지가 있는 갈방산의 정상 산패는 고목에 낀 상태로 특이하게 부착되어 있네요.
♤ 법전면 풍정리 갈방(葛芳)마을
갈방마을은 「갈뱅이」라고도 하는데, 산줄기에 칡꽃이 많이 핀다는 갈방산 중턱 해발 600m지점에 있는 마을이며, 법전면 풍정리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다. 1940년 대에 다덕광산이 번창할 때 외지서 이주해온 주민들이 마을을 형성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다덕고개/ 육교
다덕현(다덕현)은 우곡리에 있는 다덕마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와 법전리 사이에 있는 고개로 구36번 도로로 내려서서 좌측으로 조금 나가면 육교가 있으며 다덕육교 아래로는 봉화와 춘양을 잇는 36번 국도가 신나게 내달리고 있다.
- 좌측 육교로 올라가 도로를 건너고, 36번 구도로가 좌측으로 돌아가는 위치에서 우측 임도를 따른다.
♤ 봉성면 우곡리 다덕(多德)마을
다덕은 다대기로도 불리며 봉화의 3대 약수탕(오전, 두내, 다덕)인 다덕 약수탕이 있는데 봉화의 3대 청정 탄산약수 중에 하나이다. 일제시대에 다덕광업소가 있었다. 이 광산에서는 금, 은, 동, 철, 아연 등 7가지 광물이 많이 생산되었고 성할 때는 종업원이 3,000명이 넘어서 시장이 들어설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폐광되어 매몰되었고, 이 약수탕은 예로부터 피부병과 위장병에 많은 사람들이 효험을 보았다 하고, 지금도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 다덕약수
다덕약수는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에 있는 약수탕으로, 봉화의 3대 청정 탄산약수 중의 하나이다. 옛날 스무나무 아래 약수가 있어 이를 마시고 많은 사람이 덕을 보았다 하여 다덕(多德)약수라 불리워지는 이곳은, 탄산과 철분 등이 함유되어 있어 톡 쏘는 맛이 그만이다. 예로부터 피부병과 위장병에 많은 사람들이 효험을 보았다 하고, 지금도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약수탕 주변 음식점은 봉화지정 토속음식단지로 약수로 고아 만든 약수닭백숙, 오리한방백숙을 비롯해서 봉화산송이돌솥밥, 봉화한약우구이 등 토속음식을 맛볼 수 있다.
♤ 삼각점봉/ 불미산(509.6m봉)
글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2등삼각점(22 재설/ 1978.8 건설부)이 있으며, 그린피아 산패가 달려있다.
♤ 490m갈림봉/ 내성옥녀단맥
내성옥녀단맥이란 앳고개 서측 490m봉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활개미도로-봉성제1굴-918번지방도로-잣고개-배골도로-325.2m봉-915번지방도로-덧재도로-옥녀봉(357.3m)-무름골임도-골매재-원들재-935번지방도로-303.3m봉을 지나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 토일천이 내성천에 합류하는 합수점에서 끝나는 21.7km의 산줄기를 말한다.
♤ 앳고개(423m)
고개 좌측은 불미골· 명창골 방향이며, 우측(남서향으로) 아래에는 옛골과 역전마을, 봉성역이 위치하고 있다. 앳골은 봉화군 봉성면 봉성1리에 있는 앳골, 애골, 아곡, 역전이라 불리는 마을로 옛날에 이 골에는 집이 없었는데, 행인들이 법전면 갈방으로 넘어 가는데 재가 험하고 도둑이 많아서 애를 먹었다하여 ‘애골(앳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영암선이 개통된 후 봉성역이 이곳에 설치되어 요즘은 역전이라 부르고 있다. 영암선은 영주에서 철암까지 이어진 철도인데 후에 철암선과 통합되어 영동선이 되었다.
- 도로에 내려서서 시끄러운 골재공장 반대편으로 100m 내려서면 인가 수도에서 물을 구할 수 있다.
- 도로에 내려서서 우측 골재공장 방향으로 건너편 골재공장 울타리 볼록거울과 전신주 옆으로 들어선다.
♤ 엉고개/ 奄峴(엄현)/ 아현(牙峴)
엉고개는 봉화군 법전면 풍정2리에 있는 고개로, 500여년 전 봉화금씨(奉化琴氏)가 와서 살면서 '奄峴(엄현)'이라 불렀으나 어린아이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자주 죽게되자 '牙峴(아현)'으로 고쳐 불렀다 한다. 현재 봉성면과 재를 하나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며 아랫마을, 웃마을로 나눠 불리운다. 국가정보원 온라인 지도상 '엉고개'는 이 곳에서 동쪽으로 영동선을 따라 약간 떨어져 있는 곳에 표시되어 있다.
- 좌측으로 밭이 가깝게 보이고 옛날 고개 흔적을 뚜렷하게 찾아 볼 수 있다.
♤ 삼면봉(478m, 봉성면, 법전면 → 명호면)
지금까지 좌 법전면, 우 봉성면으로 갈리며 이어지던 기맥길이, 좌측이 명호면으로 바뀌어 남서향으로 이어진다.
- 정상부가 움푹 파인 듯한 삼면봉에서 우틀한다. 물론 우회하는 사면길이 있다.
♤ 삼각점봉/ 봉성산(482.4m봉)
문수지맥 / ▲480.8m / 그린피아' 표지판이 붙어있다.
- 4등삼각점(442 재설/ 1978.6 건설부)이 있다. 우틀한다.
♤ 미륵고개(365m)
포장도로가 지난다. 정면 좌측에 있는 들머리에 시그날이 보이지만, 우측 도로 아래쪽으로 약 150m 벗어나 있는 미륵불(석조여래입상)을 다녀온다. 이 석불은 할미석불이라는 것, 주변에 기와 파편이 많이 흩어져 있었으므로 절이 있었거나 이 석불을 비바람에서 보호하는 전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는 것, 가슴 앞쪽 'U자' 모양의 둥근 옷자락에 동전이나 기와 파편을 던져 옷주름에 걸쳐지면 소원을 이룬다고 전한다. 또한 좌측 광배가 많이 손상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임진란 때 왜병 장수가 이 곳 앞을 지날 때 말이 움직이지를 않아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이 석불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사병들은 말에서 내려 걸어가니 통과되었는데 왜병 장수는 체면 때문에 말에서 내릴 수가 없어서 칼로 광배를 내려쳐 자르니 석불에서 붉은 피가 솟아났고 장수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품중생인의 손가락 방향이 한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이유도 밝혀져야 할 의문이고, 입상 우측의 주춧돌 모양의 돌은 묘지석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그 외 묘지석 옆에는 남근석이 자리하고 있다.
- 미륵고개 들머리는 거의 없다시피 거칠다. 보이지도 않는 간벌된 나무가 바닥에 묻혀져 있는 딸기밭 가시를 밀어내며 길이 없는 곳으로 올른다.
♤ 봉화 봉성리 석조여래입상(奉化鳳城里石造如來立像)
봉화 봉성리 석조여래입상(奉化鳳城里石造如來立像)은 경북 봉화군 봉성면 봉성리 13-1에 있는, 높이 378㎝, 어깨 너비 195㎝의 고려시대 불상으로, 거대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마애 기법으로 불신(佛身)을 표현하고 그 위에 별석(別石)으로 불두(佛頭)와 두광(頭光 : 부처나 보살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빛)을 만들어 올려 놓았다. 자연 암벽을 선각하여 불신을 표현하고 불두를 별석으로 조성하는 예는 11세기 고려 전기의 불상들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이다. 바위 자체의 테두리가 자연스레 광배(光背)를 이루고 있지만, 현재는 상당 부분이 파손되었다. 머리 높이가 127cm나 되는 우람한 모습이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무척 토속적이다. 굵은 눈썹이 좁은 이마에 붙어 있고, 눈 역시 재미나게 웃는 모양이며, 코는 턱 가까이 내려와서 입이 간신히 들어날 정도이지만 뺨이 유난히 부풀려져 있는 등 표현이 매우 과장적인데, 하회탈의 '중탈'과 흡사하다. 약간 움츠린 듯한 거구(巨軀)의 상체는 우람스럽고, 가슴에 들어올려 엄지와 장지를 대고 있는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 중에 중품중생인(中品中生印)과 유사한 수인은 비교적 세련된 조각기법으로 처리되었지만, 아미타불인지는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한다.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선조(線條)로 U자 모양의 둥근 옷주름을 크게 새긴 것이고, 하체는 땅속에 묻혀 옷무늬가 판별되지 않는 미완성 작품이다
18:43경 918지방도로에 내려서니 3분사이로 색깔이 다른 버스 두대가 지나갑니다. 손을 들면 세워줄 것 같은 그 버스에 마음만 실어보내고....
♤ 경찰호국공원/ 지용호호국공원/ 918번 지방도로
건국초기의 사회혼란을 틈타 전국각지에서 무장공비들이 관공서를 습격하고 살인과 약탈, 파괴와 방화 등 만행을 자행하여 국민의 생존을 위협하자 이 지역에서도 경찰은 물론 주민과 애국청년들이 불타는 호국정신으로 치안유지에 앞장서고 있었다. 1949년 6월 17일 고 지용호 봉화경찰서장은 재산면사무소와 경찰지서가 무장공비들에게 점거되었다는 급보를 받고 경찰관 20명과 군청직원, 대한청년단원 30명의 토벌대를 인솔 현지로 출동하던 중 이곳 미륵재에서 공비 200여명으로부터 기습적인 포위 공격을 받아 7명이 전사를 하는 등 전멸당할 위기에 처하였다. 이때 지용호서장은 “내가 봉화경찰서장이다”라고 당당히 외치면서 모든 책임과 희생을 자청하고, 부하들은 돌려보낼 것을 주장하며 완강히 저항하여 동지들의 생명을 구하고 공비들의 흉탄에 희생되어 36세의 젊음을 조국에 바쳤다. 지휘관의 투철한 사명감으로 부하들을 사지에서 구출한 살신성인의 기개와 조국에 대한 충용정신을 일깨워 주신 님을 추모하고 그 뜻을 기리는 우리 군민의 정성을 여기에 새긴다.
- 1994년 세운 전 봉화경찰서장 지용호(池龍浩, 1913 ~ 1949)총경 입상과 그 옆에 사망한 7명의 경찰과 대한청년단 부조상과 설명판이 새겨져 있다. 봉화경찰서장 순직비가 있다.
- 호국공원 주차장에서 좌측으로 약간 진행하여, 경광등이 있는 뒤편으로 오른다.
♤ 면계갈림봉(391m)
가골재 직전 갈림길(391m봉)에서 면계는 서쪽(우측)으로 보내고 좌틀하여 온전히 명호면 안으로 들어서서, 대부분 임도로 진행하다 긴재 직전 갈림봉에서 우측으로 봉성면을 다시 만나고 곧 이어 상운면을 만나 우 상운면 좌 명호면을 가르며 날머리인 갈골재 이후까지 이어진다.
♤ 가골재
잘 관리된 묘지인 봉화금공과 배 선성김씨 쌍분묘를 내려서서 기독교인 선성김씨 묘지 옆으로 내려서면 좌측으로 인삼밭이 있는 '가골재' 양회임도에 내려선다. 좌측으로 나가면 명호면 양곡리 918번 지방도로와 연결되고, 우측으로 나가면 봉성면 봉양리 가골마을이다.
- 직진방향 우측 수레길로 올라서 391.5m봉에서 앞쪽 능선길로 맥길이 이어지나, 보틍은 우측 사면 묵은 임도(수레길)를 따라 이어간다.
태양열집열판이 설치된 긴재에 내려서서 좌측으로 80m 지점에 인가가 보여 급할 떈 물을 구할 수 있겠더군요.
♤ 점골재(355m)/ 대백고개/ 장고개
양회임도를 5분여 따라 내려서면 아스팔트 도로인 지도상 대백재에 내려선다. 대백재는 좌측으로 봉화군 명호면 고감리와 우측으로 봉화군 상운면 봉양리를 잇는 고개로 대백이란 지명은 우측 아래에 있는 대백마을에서 따온 이름이고 장고개라고도 부른다. 점골은 한자로 점곡(店谷)인데, 110여년 전에 고령토로 옹기와 사기그릇을 구워내는 옹기굴과 대장간이 있었고 또 그것을 팔기 위한 옹기점이 있었다고 점골 (店谷) 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영해박씨 4가구가 살고있고 고추가 주산물인 동시에 주 소득원이 되고있다. 또한 다른 설로는 南陽洪氏 (남양홍씨) 가 옛날 이곳에서 주화를 만들어낸 곳이라 하여 점골이라 불렀다고 전하고 있다. 성뚜들[성두들]은 한자로 성구동(城邱洞)인데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으로 피난길에 풍악산 밑을 지나다가 이곳에 이르러 피난처를 정하고 성을 쌓다가 적을 방어하기에는 지형지세가 적합하지 못하다 하여 그만두고 청량산 산성으로 갔다고 한다. 그때 성을 쌓던 성 언덕에 마을이 있었기 때문에 城邱洞 (성구동) 이라 했다.
- 이곳 점골재/대백고개부터 긴재까지 비포장임도를 거짐 양회임도로 교체하였다. 임도 좌측의 마루금은 이미 잡목과 가시나무로 뒤덮혀 산꾼들이 지나지 않은지 오래라고 한다.
♤ 고감리마을
대백재는 고감리의 한 마을에서 유래된듯 하며 백재뿐만 아니라 고감리의 많은 마을들을 만나며 많은 과수원을 만나게 된다. 이곳 백재임도삼거리는 장고개라고도 불려진다. 고감리는 풍악산 자락에 위치한 전형적인 산촌 마을이며 자연마을로는 고가무(고감), 각ㄹ, 고리안(고리내,괴촌,조만), 골마, 대백, 매태(매대), 새마(신기,신기리), 성뚜들(성구), 앙지마 등이 있다. 고가무는 풍락산 아래가 되므로 노래하고 춤춘다는 뜻이고, 이를 줄여 고감이라고 하였는데 후에 고감리가 되었다. 고리안은 지형이 고래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괴목이 많아 괴촌이라고도 부른다. 매태는 매봉산 밑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성뚜들은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하여 상을 쌓았던 곳이라고 한다.
♤ 통정대부(通政大夫) 순흥안공 묘지
조선시대 후기 조상을 받들고 높이는 방법 가운데, 나라에서 부여하는 제도 중 하나로 추증(追贈)이 있었는데, 자식이 2품 이상의 고위 관직에 임용되거나 국가에 큰 공을 세운 경우,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경우에 돌아가신 부, 조부, 증조부 등 3대의 품계와 관직을 올려주는 제도가 있었고, 흉년에 부자 중에서 나라에 쌀을 바친 경우에도 통정대부(通政大夫) 등의 첩지를 내렸으며, 조선 후기에 와서는 장수 노인들에 대한 효 사상 고취를 위해 통정대부(通政大夫) 등의 공명첩(空名帖)을 내렸는데, 공명첩은 말 그대로 헛된 이름뿐인 첩지라는 뜻으로 영조 이후 조선후기에 특히 남발되었다. 통정대부(通政大夫)는 정3품 당상관에 해당하는 고위 직급(직위)인데, 실제 별다른 보직(직책)이 없으면 대부분 공명첩(空名帖)인 경우다. 당시 80세를 넘어 장수하면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 90세를 넘으면 가선대부(嘉善大夫), 100세를 넘으면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를 하사하였다.
대백지에서 긴재까지 계속 임도를 따라 올를 수도 있습니만 중간에 임도를 버리고 우측 산마루금으로 달라 붙어 긴재로 내려서야 합니다. 의식하며 갔는데 트랭글 볼륨이 제로라 그만 놓쳐버리고 말았네요.
♤ 긴재
송이 움막 좌측 등로를 따라 내려서서, 임도로 내려서면 긴재다. 긴재는 봉화군 명호면 고감리와 상운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우측으로는 문촌리(文村里)로 내려가는 임도가 있다. 문촌리는 학문을 숭상하여 많은 선비가 배출되었으며 글 읽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긴재에 내려섰다가, 임도에서 맞은편 위쪽 임도로도 많이 이어간다. 능선 맥길 우측 사면으로 우회하는 임도길이 계속 따라온다. 좌측(동쪽) 방향으로 응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있다.
♤ 응봉산(617m)
지맥길에서 400m 벗어나 있으며 풍락산이 건너다보이나 정상은 울창한 숲으로 조망은 없다. 계속 직진하면 풍락산으로 이어진다. 전국에 응봉과 응봉산이 참 많기도 하다. 응봉(경남 창원,함안), 응봉(경기 가평 1436.3m),강원춘천, 응봉(236m)경기용인, 응봉(323m)서울은평, 응봉(334m)경기양주, 응봉(368m)경기(과천,의왕), 응봉(759m)강원춘천, 응봉(성수지맥)(608.8m)전북임실, 응봉(천황지맥)(579m)전북(순창,남원), 응봉산(1267.3m)강원삼척, 응봉산(252.1m)부산강서, 응봉산(284m)경남김해, 응봉산(320m)대전대덕, 응봉산(331m)경북(구미,군위), 응봉산(472.7m)경남남해, 응봉산(868m)강원홍천, 응봉산(998.5m)강원삼척,경북울진, 응봉산(두위지맥)(1013m)강원영월, 응봉산(문수지맥)경북봉화, 응봉산(춘천지맥)(1103m)강원홍천....
- 임도를 따라서도 응봉산에 갈 수도 있으나 굽이굽이 돌아돌아 한나절 거리랍니다.^^
♤ 풍락산(豊樂山, 762.1m)
풍락산은 봉화군 명호면 고감리에 있는 산으로 엣날부터 선약(仙藥)이 난다고 전해온다. 조선 제16대 임금인 인조 때 명호면 관창리 비진동(飛津洞)에 임석돌(林石乭)이라는 이상한 장수가 살았다고 한다. 그는 소년시절 신라 때 쌓았다는 풍락산 속 산성(山城)에서 전쟁놀이를 즐겼는데. 어느 날 용마(龍馬) 한마리가 마을에 나타났는데. 마을 사람들 누구의 말에도 움직일 줄 모르고 서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임석도 장군이 급히 용마(龍馬)에게 달려가서 달래자 훈련된 말처럼 임 장군을 따랐다. 임 장군은 그후 매일 말을 말을 탄채 가래로 비진동에서 풍락산성까지 길을 닦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 청량산(淸凉山, 869.7m)
청량산(淸凉山)은 경북 봉화군 명호면과 재산면, 안동시 도산면과 예안면의 낙동강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어 예로부터 소금강으로 불려진 명산이다. 1982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황은 도산서원을 근거로 하여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을 연구하다 수시로 청량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였다고 한다. 그는 청량산인이라 불릴 정도로 이 산을 매우 사랑하여 이 산에 관한 51편의 시를 남겼고, 창량산록밭이라는 글도 썼으며 또 청량산을 오가산이라고도 하였다. 청량산 뒤편으로 흐르는 물을 퇴계라 한다. 기록에 의하면, 청량산은 고대에는 수산(水山)으로 불려지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청량산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에 백두대간의 8개 명산 외에 대간을 벗어난 4대 명산 중 하나로 평가되어 온 한국의 대표적 명산이다. 해발 800m 내외에 12개 암봉(六六峰: 장인봉·선학봉·자란봉·자소봉·탁필봉·연적봉·연화봉·향로봉·경일봉·탁립봉·금탑봉·축융봉)과 청량산 12대(어풍대·밀성대·풍혈대·학소대·금강대·원효대·반야대·만월대·자비대·청풍대·송풍대·의상대), 청량산 8굴(김생굴·금강굴·원효굴·의상굴·반야굴·방장굴·고운굴·감생굴) 및 청량산 4우물(총명수·청량약수·감로수·김생폭)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 준다. 정상 남쪽 안동과의 경계인 축융봉(845m)에서 바라보는 청량산의 전경 또한 일품이다.
♤ 신라재/ 갈골안부
상운면 신라마을과 명호면 관창리 독집골을 잇는 비포장 임도 갈골길이다. 신라재는 경북 봉화군의 상운면 신라리에 위치한 고개이다. 상운면 문촌리와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를 잇는 길목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봉화)과 『여지도서』(봉화)에 "신라의 왕 태자가 내령군(奈靈郡)에서 놀다가 고을 아전의 딸을 사랑하게 되어 오랫동안 머물렀다. 고을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들어서 살며시 돌아와 여기에 머문 적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라는 기사가 있다. 『해동지도』(봉화) 등 대부분의 군현지도에 태자산 북쪽에 신라현(新羅峴)이 기재되어 있는데, 신라현이 조선시대에는 안동이나 예안을 연결하는 간선 도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신라리• 신라폭포는 관련 지명이다.
♤ 신라리
임도 아래쪽에 있는 신라리마을은 신라시대 어는 왕인지는 알 수 없으나 태자와 함께 피난을 와서 임시 서울로 정하여 살고 있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안동시 도산면과 봉화군 명호면과 인접해 있으며 거느미, 웃거느미, 아랫거느미, 모찌골, 산재, 새터의 마을로 형성되어 있다. 1983년 2월15일 행정구역 개편 때 명호면에서 상운면으로 편입되었다고 한다.
- 임도를 가로질러 잘 정비된 길을 10여 분 오르면 기다란 전파송신소 안테나가 있다.
♤ 갈골재(488m)/ 성황당
갈골재는 좌측의 명호면 갈골, 관창리 독집골 마을과 우측 상운면 신라리 웃거느미 마을을 넘나들었던 고개이다. 갈골은 옛날 만리산에 못이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비가 많이 와 못 둑이 터지고 이무기가 떠나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못 둑까지 칡이 늘어져 있어서 갈골이란 이름이 붙었다고도 한다. 이 갈골 안부는 산꾼들이 편의상 '신라재'라 이름 붙인 곳으로, 실제 신라재는 이 곳에서 서남쪽으로 약 1.4km 떨어진 곳이다.
- 성황당 흔적의 돌무더기가 쌓여 있는 갈골재 이후 만리산까지 300고지 이상을 1시간 가량 쳐 올려야 한다.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듯 문수에서 제일 힘들다는 만리산을 한밤중에 올랐습니다. 만리산을 휘감는 신설 임도를 만드느라 만리산 오르는 정상부와 만리산 늘못에 거대한 포크레인이 작업을 하고 있네요.
♤ 만리산(萬里山: 791.6m)/ 외청량산과 경관을 마주한다.
봉화군 명호면 관창리에 자리잡고 있는 만리산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청량산과 문명산(文明山, 894m)을 마주하고 있다. 만리산은 화전민 이주 지역으로 개간했으나 지금은 고랭지 채소단지로 더 유명하다. 만리산 중턱에는 이무기가 살았다고 전하는 자연 연못 늘못이 있고 만리산 아래에는 관창폭포와 갈골계곡의 맑고 깨끗한 물과 청석바위와 자연석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상 가까이에 향적사가 있는데, 요란하지 않게 부처님을 전하는 사찰이라는 뜻으로 법당을 창건하기 위해 기둥을 세우고 상량을 하려는데 부처님이 나타나 ‘천년을 보아야하는데 그 기둥으로 지탱하겠느냐’는 말씀으로 공사를 중단했던 사찰로 유명하다. 현재는 대웅전 건립이 완공되었으며, 청량산을 마주하고 있는 향적사는 보는 이마다 주변의 수려한 경관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 정상에는 동판으로된 국립건설연구소 대삼각점이 있다.
- 만리산에서 내려서서 좌측 향적사방향에서 올라오는 양회임도를 만나 우측으로 올라서면 늘못이다.
늘못 정자에 누워 조금 쉬어갈까 했지만 개구리들 떼창에 시끄러워서 쉴 수가 없었습니다.
♤ 만리산 늘못(常池)
늘못 안내판에는 경북 봉화군 명호면 관창리 산 60-3번지 일대, 만리산 정상부 늘못 주변은 신생대 화산체가 폭발한 후 화산의 중심부가 함몰 2차적으로 큰 와지가 된 뒤 물이 고인 분화구일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는 곳이다. 이 못은 고라니, 토끼, 산새 등 수 많은 산짐승과 수생식물의 생명수였고 큰 암벽과 흰 구름이 맞 닿을 듯한 절경, 낙동강변 수달래의 요염한 자태와 기암괴석과 절벽 등 산세가 수려하고 풍광이 아름다운 곳으로 인근 청량산의 무수한 문화유적과 자연자원, 문화적 생태적 가치가 상당히 높은 곳이라 할 수 있다. 라고 쓰여 있다.
- 늘못 안내판 좌측 앞쪽으로 사각정자 두개와 그 앞에 갈대와 억새에 둘러쌓여 제법 많은 물이 고여 있는 늘못 수변에 나무데크가 설치되어 있다.
늘못에서 남쪽 임도를 따라 만리촌 방향이 지맥길이다. 임도를 따라 올라가다 좌측으로 휘어져 내려서는 지점에서 농막이 보이고 사유지라며 입구를 막아놓은 철문으로 들어서서 그물망을 따라 15분 정도 사면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 삼면봉(735m, 봉화군 상운면, 명호면 → 안동시 도산면)/ 건지단맥 분기봉, 우틀하여 내림길로~
지금까지 봉화군 명호면과 상운면을 가르며 이어오던 지맥길은 이 봉에서 안동시계를 만나 90도 우틀하여 북 상운면, 남 도산면을 가르며 이어지고, 좌측(남쪽)으로는 투구봉과 축융산으로 연결되는 명호면과 도산면을 가르며 이어지는 능선인 내성건지단맥을 분기한다.
- 빽빽한 숲으로 주변에 삼면봉임을 나타내는 아무런 표식도 없습니다.
♤ 내성건지단맥(乃城搴芝短脈)
내성건지단맥은 만리산 남측 봉화군 상운면· 명호면· 안동시 도산면의 삼면봉에서 남쪽으로 분기하여 투구봉(611.8m)-35번국도-건지산(557.0m)-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하계마을 토계천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곳에서 끝나는 약15.4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월오현으로 내려서는데 좌측에 마을 불빛이 보이고 과수원이 있는지 한밤중인데도 라디오 떠드는 소리에 귀가 얼얼합니다.
♤ 월오현(月午峴, 463m)
월오현은 경북 안동시(安東市)의 도산면(陶山面) 태자리에 있는 고개이다. 고개 북쪽은 봉화군 상운면 신라리로, 예전에 예안에서 봉화로 갈 때 이용하였던 고개이다. 『해동지도』(봉화)를 비롯한 옛 지도들에서 '월현(月峴)'으로 표기되어 있다. 또 월현 바로 위에 신라현(지금의 봉화군 상운면 신라리 신라재)도 함께 표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지금의 월오현은 『조선지지자료』에서 나온다. 즉 봉화군 하남면(下南面) 태자산리 월오현(月午峴)과 그 한글 명칭 '달애재'로 기록되어 있다. 원래 높은 재란 뜻으로 우리말 달애재 혹은 다랫재라고 부르다가,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월현(月峴), 월오현(月午峴)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월오현 대신에 다랫재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난다. 도로 옆 축대가 끝나는 곳과 고추밭 사이 능선으로 올라선다.
월오현에 버스승강장이라도 있으면 한숨 때릴려고 했는데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일단 숲으로 산에 달라붙어 정상 즈음에서 이번에는 하루종일 걸은 발에게는 미안하지만 쥐를 안 잡으려고 신발을 벗지 않고, 고아텍스를 입고 은박돗자리를 한바퀴 감고 한자리 깔고 눕습니다. 바람이 없고 기온도 11도 정도라 노박하기에 한결 부드러워졌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조금 내려가니 양회임도가 나오고 조금 내려가니 임당고개에 이르네요.
♤ 임당고개(林塘峴, 479m)/ 양회임도사거리
우측 봉화군 상운면 매정리 임당마을과 좌측 안동시 도산면 태자리 태자마을을 잇는 고개인 양회임도이다.
- 임당고개에서 직진 방향으로 조금 진행하여 좌측 양회임도로 올라서면 봉분없이 비석이 여럿 세워진 울타리가 둘러쳐진 묘지 뒤편으로 맥길이 이어진다.
♤ 도산면 태자리
태자리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왔을 때 태자가 머물러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신라의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갈 때 이곳에 머물러서 태자리라 하였다는 설과, 왕이 불공을 드려 태자를 낳고 태자사(太子寺)라는 절을 지었으므로 태자•자산이라 하였다는 설도 전해 온다.
드뎌 안동시에 닿았습니다.
♤ 삼면봉(636.4m, 안동시 도산면, 봉화군 상운면 → 안동시 녹전면)/ 봉화군 → 안동시
지금까지 우측 상운면, 좌측 도산면(陶山面)을 가르며 남서향으로 이어 온 맥길은 이 삼면봉에서 우측이 녹전면(祿轉面)으로 바뀌어 온전히 안동시 안으로 들어서서 우 녹전면, 좌 도산면을 가르며 남향하게 된다.
- 임당고개 철조망이 둘러쳐진 묘지에서 50분 가량 오른다.
목재계단으로 깔끔하게 단장된 용두산 정상은 어수선한 잡풀과 칡넝굴지대입니다. 그나마 벤치가 설치되어 있어 낙동강 건너로 청량산을 편하게 조망하며 잠시 쉬어갈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습니다. 벤치주변으로 누군가 잡풀을 정리해 두었네요.
♤ 용두산(龍頭山, 664.6m)
용두산은 경북 안동시 도산면과 녹전면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의 모양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용두산(龍頭山) 혹은 용수산(龍首山)이라고 한다. 정상에 기우제를 지내던 기우단이 있으며, 운곡리 쪽 기슭에는 유학의 대가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와 퇴계(退溪) 이황(李滉) 가문의 학문 탐구의 장이었던 고려시대에 창건된 용수사가 자리 잡고 있다. 용두산 남쪽 봉우리인 국망봉 정상에는 ‘국망봉’이라고 새겨진 자연석 바위가 세워져 있는데, 이곳은 이황의 조부인 이계양(李繼陽)이 단종을 애도하던 곳이라 한다.
- 정상석 뒤편에 지리산 천왕봉을 따라한 걸까...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하다" 라는 글귀와 비슷해 보인다.
♤ 안동선비순례길
2017년 10월 말에 개방된 안동 선비순례길은, 9개 코스 총 91.3km로, ‘가장 한국적인 길’을 모토로 안동의 전통과 문화, 정취를 잘 느낄 수 있는 길이다. 오천군자마을을 시작으로 도산서원· 퇴계종택· 수졸당· 이육사문학관· 청량산· 건지산· 농암종택· 칼선대· 수운정· 가송참살이마을 등 안동의 속살을 만날 수 있다. 기존 퇴계예던길, 마의태자길과 함께 고고한 선비정신을 지키며 살았던 군자의 흔적이 남아있는 선성현길, 공민왕의 어머니가 피난했던 왕모산성길 등을 새로 추가해 각각의 테마가 있는 9개 코스로 조성했다. 그 중 1코스 선성현길에 있는 선성수상길은 안동호 수면 위에 길이 1㎞, 폭 2.75m 규모로 수상 데크를 설치하였는데, 수위 변화에도 물에 잠기지 않도록 부교 형식으로 만들어졌고, 데크 중간에는 포토존과 쉼터가 함께 조성돼 안동호 절경과 함께 추억을 남기기에 좋은 장소이다. 이 곳을 지나는 코스는 8코스 10.6km 코스로, 도산온천을 출발하여 용수사입구→용두산정상→수운정으로 이어지는 코스다.
용수재이정표는 용수사까지 거리 표시가 없는 장님 이정표입니다. 가깝다면 물을 얻어갈 수 있건마는 세심한 배려가 아쉽네요.
♤ 용수재(龍首峴)
안동시 도산면 매정리와 운곡리 갈현리로 이여지는 고개이다. 삼각점봉(593.8m)에서 10분여 내려서면 넓은 임도가 지나는 용수재다. 좌측으로 내려서면 용수사로 이어지고, 우측으로 약간 나가면 'T자' 갈림길인데, 좌측은 지맥 능선 사면으로 505.1m봉을 지나 황정마을로 이어지고, 우측은 용두산 아래 용운사 방향으로 이어지는 임도다.
임도를 따른 트랙을 다운받아 바삐 서두르느라 트랙을 다시 고쳐받지 못하고 길게 임도를 따라야 했습니다.. 신뢰를 주는 트랙을 사전에 선정해 두어야 하는데 그것도 일입니다. 산패도 찾아보지 못하고 굴티고개를 향해 제법 긴 내림길을 내려섰습니다.
♤ 505.1m봉 면계/ 내성영지단맥(乃城靈芝短脈) 분기봉/ 온전히 녹전면으로 진입
지금까지 안동시 도산면과 녹전면을 가르며 이어오던 지맥길이 이 봉에서 온전히 녹전면으로 들어서서 북서향하여 굴티 방향으로 이어지는데, 남쪽으로는 면계가 계속 되며 안동호까지 이어진다.
♤ 내성영지단맥(乃城靈芝短脈)
내성영지단맥은 문수지맥 용두산과 복두산 사이 505.1m봉에서 남쪽으로 분기하여 국망봉(480.5m)–928도로-덕산골 도로–영지산(443.4)–괴남댕이임도-35번도로 삼거리 지나 안동호 예안교에서 끝이나는 약12km의 산줄기를 말한다.
문수지맥은 오로지 안동시 녹전면 안을 흐르고 있습니다.
굴티에 커다란 느티나무와 번듯한 인가 한채가 있습니다. 잘 가꿔진 정원이 있어 둘러보았지만 정작 필요한 수도가 보이지 않네요. 인기척이 없으니 밥값하느라 열심히 짖어대는 개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 굴티고개(屈峙, 330m)/ 굴곡재/ 신매로 2차선포장도로
굴티는 안동시 녹전면 갈현리에 있는 고개로, 북쪽 갈현리 굴티마을에서 남쪽 신평리를 잇는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며, 이 도로는 행정도로명 ‘신매로’이다. 고갯마루에 외딴집 한채가 자리하고 있다.
♤ 녹전면 갈현리(葛峴里)
갈현리는 경북 안동시 녹전면에 있는 법정리로, 점마ㆍ상등골ㆍ굴현ㆍ갈골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 말기 예안군 북면에 속했다가 1914년 갈골ㆍ굴현(屈峴, 일명 굴티)ㆍ상등골을 병합하면서 갈골의 ‘갈(葛)’자와 굴현의 ‘현(峴)’자를 따서 갈현이라 하였다. 복두산 자락에 있어 고도가 높고 골짜기가 많은 산촌 마을로 마을 아래로 용강천이 흐르고, 옛날에는 봉화현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자연마을인 굴현(굴티)은 마을 남쪽에 구부러진 고개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점마는 굴현 아래에 있어 하굴(下屈)ㆍ하굴현ㆍ아랫굴티라고 불렀고, 일제강점기 말엽에는 옹기점이 많이 있어서 점마 또는 굴점이라고도 하였다. 갈골은 굴현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옛날부터 골이 길고 칡이 많아서 갈골ㆍ갈동이라 불러 왔으며, 갈화낙지(葛花落地) 형국의 명당이라고 전한다. 6•25전쟁 때 임씨(林氏)들이 피난하여 정착한 이래 지금까지 살고 있다. 상등골은 굴현 동쪽 높은 지대에 형성된 마을로, 등화낙지(燈火落地) 형국의 명당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이외 굴현에서 오르막길로 올라와서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정상석은 없고, 묘 한기가 덩그러니 지키고 있습니다.
♤ 복두산(福頭山, 509.1m)
복두산은 경북 안동시 녹전면 갈현리에 있는 산이다. 『해동지도』(예안)에는 복두산(幞頭山), 『안동도회좌통지도』(예안)에는 폭두산(幅頭山), 그리고 『대동여지도』에는 '복두산(福頭山)'으로 각각 표기되어 있다. 『해동지도』를 보면, 남쪽에 요성산(邀聖山), 동쪽에 굴현(屈峴, 지금의 갈현리 굴티), 그리고 서쪽에 방하현(方下峴, 지금의 신평리 방아재)이 각각 표시되어 있다.
- 3등삼각점(춘양 301) 있는 복두산 정상 직전 폐헬기장이 전위봉인 502.4m봉이다. 2분여 진행하면 정상이다.
♤ 사갈길 포장도로
복두산에서 어수선한 길을 이리저리 내려서면 북쪽 갈골마을에서 남쪽 사기막마을과 안흥마을을 연결하는 사기막고개로 내려서는 사갈길 도로이다.
- 포장도로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우측 숲길로 올라야하지만 곧 도로를 다시 내려오니 도로로 진행해도 무방하다. 도로따라 5분 진행하면 사기막고개이다.
농막이 있는 곳에서 저보다 조금 젊은 분이 나와 한참 얘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삿갓봉은 자기 소유이고, 건너편 산(요성산)은 아재 소유 사유지인데 산꾼들이 지나다닌다며 못마땅하다는 푸념을 늘어놓아 지맥길을 설명하고 막을 순 없을 것이라고 이해를 구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내가 보는 한은 들어가지 마시라고 하여, 알았다고 글찮아도 배고파서 요기할 참이었는데 어서 볼일 보시라고 받았더니 자릴 피해주네요.
♤ 사기막고개
좌측 내리막길에 [←갈골] 표지석이 있는 사기막고개는 북쪽 갈골마을에서 남향하여 내려와 서쪽(우측) 사기막마을과 동쪽(좌측) 안흥마을과 갈리는 삼거리고개다.
♤ 서효성산(西曉聖山, 492.6m)
사기막고개에서 10분여 꾸준한 오르막을 올라 403.4m봉에 오르고, 다시 급경사 오르막 100고지를 쳐 올리면 삼각점이 있는 481.1m봉이다. 5분 가량 진행하면 동쪽 방향으로 떨어져 있는 효성산(曉聖山, 486.9m)이란 이름있는 산의 서쪽에 위치한다 하여 '서효성산' 혹은 '효성산서봉'으로 잠정 불려지고 있는 봉에 닿는다.
♤ 요성산 중봉(490m)
송이채취 금지표시로 노끈이 쳐져있는 길을 따라 조금 지행하면, 내림이 시작되는 곳에 좌측으로 요성산(堯聖山) 갈림길이 나온다. 효성산, 요순산, 요성산 산 한문을 모르는 까먹눈이 많아서일까 이름이 제멋대로다. 요성산갈림길에서 요성산 중봉에 다녀와보니 송이 텐트가 한동 있고, 요성산중봉(490.0m라는 서레야님 표지가 바닥에 뒹굴고 있더군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물탱트 급수시설과 사과 과수원이 마주보고 있습니다.
♤ 방아재(364m)
방아재는 경북 안동시 녹전면 사천리에 있는 고개로 935번 2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지나는데, 왼편으로 진행하면 녹전면사무소를 거쳐 안동호 상류로 이어지고, 우측으로는 영주 방향이다. 『해동지도』(예안)에 '방하현(方下峴)'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를 보면 예안에서 영주로 가는 길은 방하현을 넘어 영주시 평은면으로 가는 길과, 녹전면 신평리 굴티와 매정리 도마치재를 거쳐 가는 길 등 2개의 길이 있었던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옛 예안현 지도들 대부분이 '방하현'을 표시하고 있다. 그만큼 중요한 고개였다. 『조선지지자료』에도 한자로 '방하현(方下峴)'과 우리말로 '방하재'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이름은 '방하재'에서 변음된 것이다.
- 요성산갈림길에서 길게 20분 내려서면 방아재이다.
산불초소 문에 아래에서 보니 큰 자물쇠가 보이긴 하는데 잠겨져 있지 않네요. 송이 움막과 더불어 대피용으로 적당해 보입니다.^^
♤ 산불초소봉(486m)
방아재에서 내려선 만큼 또 다시 급경사 오르막을 약 15분 오르면 조망이 두루 좋은 곳에 산불초소봉이 있다.
거대한 느티나무 당산목이 고개를 지키고 서있습니다.
♤ 녹전고개(459m)
녹전고개는 안동시 녹전면 사천리에서 녹전 면소재지가 있는 녹래리로 내려가는 비포장 임도이다. 좌측(남쪽) 아래에 녹전면 녹래리 녹전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녹전면소재지 윗쪽에 있는 고개라 녹전고개라 부른다.
♤ 녹전면 녹래리(綠來里)
녹래리는 놋그릇을 만드는 유기점이 있었다고 하여 녹전이라 하였다. 또한 토질이 좋고, 수원(水源)이 깊어 가뭄이 들지 않아 결실이 잘되는 곳이라 하여 녹전(綠田)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녹전리의 ‘녹(綠)’자와 내동의 ‘내(來)'자를 합하여 녹래리라 하였다.
문수지맥은 박달산 직전 559m봉(개인호 봉)에서 영주시 평은면을 만나 좌 녹전면, 우 평은면을 가르며 남향합니다.
박달산 전위봉으로 비교적 잘 관리되는 블록으로 만든 개인호가 있습니다.
♤ 559m봉/ 시계이자 면계
지금까지 안동시 녹전면 안을 진행해 오던 지맥길은 이 봉에서 영주시 평은면을 만나 좌 안동시 녹전면, 우 영주시 평은면을 가르며 남서향하여 잠시 내려서다 박달산으로 오르며, 이후 봉수산까지 시계이자 면계를 따르게 된다.
박달산에서 아무 생각없이 잘 생긴 길을 따라 직진하면 알바입니다. 봉우리에서 90도 급좌틀하여 개인호를 보면서 내려서야 합니다.
♤ 박달산(博達山, 579.5m)
박달산은 경북 안동시 녹전면 녹래리에 있는 산이다. 봉수산의 북쪽에 위치한다. 현대 지형도에서는 사천리에 있는 산을 박달산으로 표시하고 있는데, 이는 또 다른 박달산이다. 『해동지도』(예안)와 『조선지도』 등에 박달산이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들은 박달산과 함께 녹전산 및 봉수산도 나란히 표시하고 있다. 이 세 개의 산에 대한 정확한 위치 비정에 대해서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다. 박달산이란 명칭은 단순히 산에 박달나무가 많았던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해석이 있다.
♤ 멧돼지 사육장
봉수산 오름길에 멧돼지 사육장을 만납니다. 철망안에 있던 멧돼지가 종소릴 들었는지 저와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본능적으로 새끼 두마리를 데리고 반대쪽 멀리 안 보이는 곳까지 줄행랑을 놓더군요.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 용암지맥(龍岩枝脈)이란
용암지맥은 백두대간 옥돌봉을 지난 1211.5m봉에서 예천군 용궁면 대은리로 이어지는 문수지맥이 봉수산에서 남동쪽과 남서쪽으로 영주와 안동시계를 따라 가지를 쳐 경북 안동시 천리동으로 이어지는 도상거리 약 34.9km의 산줄기로, 분기점에서 시작하여 안동역 뒤쪽 낙동강과 반변천이 만나는 천리동 합수점에서 그 맥을 낙동강에 넘겨주고 있다. 이 산줄기를 따라가면 봉수산(569.6m), 일출봉(515m), 용암산(529.6m), 금학봉(364.5m), 오로봉(342.9m), 지리산(枝里山), 옥달봉(263.6m), 목성산 등을 만날 수가 있고 이 산줄기의 서쪽에는 송야천이 낙동강으로 흐르며 이 산줄기의 동쪽과 남쪽에는 낙동강이 흐른다.
봉수산(△570m)에서 남쪽으로 용암지맥을 분기시키고, 문수지맥은 서향과 남서향하면서 온전히 영주시 평은면 안으로 이어갑니다.
♤ 봉수산(烽燧山, 570m)/ 용암지맥분기점
봉수산은 경북 안동시 녹전면 녹래리와 영주시 평은면 경계에 걸쳐 있는 산으로, 박달산· 일출봉으로 더 널리 불리고 있다. 봉수산은 조선시대 서후면 개목산에서 봉화를 받아서 봉화군 용점산으로 전해주던 봉수대가 산정에 있었던 것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지금은 봉수대의 흔적만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이름으로 녹전산이라고 불리는데, 녹전산은 복[祿]이 굴러 들어오고 토질이 비옥하다 하여 녹전이라 부르게 된데서 유래한다. 구룡골 서편 의상조사가 창건한 암자인 일출암(日出庵)이 자리 잡은 일출봉에서는 강원도 정동진보다 더 빨리 일출을 볼 수 있다고 해서 해마다 1월 1일에는 점등식을 비롯하여 33번의 새해맞이 타종, 불꽃놀이, 폭죽, 풍물놀이 등의 다채로운 해맞이 행사가 열린다.
- 봉수대 자리는 자료 부족일까 예산부족일까 관심부족일까 아직은 복원할 계획이 없는가보다. 마모되어 판독 불가한 삼각점이 있다.
문수를 하며 물이 충분하더라도 일출사 잠깐 들를 것을 권해 드립니다. 봉수대 전망은 별로인데 일출사에서 보는 툭 트인 전면은 누가봐도 일출이 장관이겠단 생각이 들게 만들었습니다. 넉넉잡고 왕복 30분 소요됩니다.
♤ 일출사(日出寺)
안동과 영주의 경계에 자리한 봉수산의 8부 능선에 있는 일출사는 경북지역에서도 해가 가장 먼저 뜨는 곳이며, 강원도 정동진 보다 일찍 해가 뜨는 일출사는 의상대사가 태백산에서 수행정진하다 발견하여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 일출이 장관을 이루어 일출암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일출사는 신라 법흥왕(514∼540)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암자로 전해지나 기록이 없어 확인은 어렵다. 의상대사가 일출사를 창건할 때에는 5명의 스님들이 있었다고 하나, 그 이후 점차 불사가 늘어 사세가 커지면서 스님들도 100여 명이 되는 도량이 되었다고 한다. 스님들이 많이 모이자 생활하기 불편하고 물도 부족해 의상대사가 신통력을 발휘하여 물을 끌어 올려 우물을 만들었다고 하며 이 우물은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 사찰의 주지가 잘못하면 우물의 수위가 내려간다고 하는 전설도 전하여 지고 있다. 조선시대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중창불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이름난 사찰이 되었고, 귀중한 문화재와 성보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많이 소실되어 사찰도 없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최학수 스님이 6.25 전쟁 때 임시로 대웅전을 중건하여 거처하게 되었고, 이어 본원스님이 주지로 7년간 있으면서 사찰명을 일출암에서 일출사로 바꾸었다. 대웅전과 범종루는 1950년 경에 중건되었으며 삼성각은 2002년에 중건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예고개에서 교통 편의와 경제성을 따져봤을 때 당근 영주시로 나와야 서울 올라오기가 편합니다. 영주 나오는 30번 버스는 내성천을 건너 약 30분 소요되며 2시간만에 한대 꼴입니다.
♤ 예고개/ 고치(古峴)
옛고개는 안동시 녹전면 녹내리와 영주시 평은면 오운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구 5번 국도와 915번 지방도로가 만나는 지점으로 서쪽으로는 안동과 대구방향으로 가는 길이고, 동쪽/북쪽으로는 봉화. 태백 방향으로 남쪽으로는 영주와 예천으로 가는 길이다. 옛고개라 불리게된 유래를 보면 과거 영주.안동.봉화 방면으로 갈라지는 고개라 하여 옛 고(古)자에 고개 현(峴)자를 써서 옛고개(古峴)라 불러왔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예고개로 변음되어 불리고 있다. 옛고개는 평은면 소재지까지 15리,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까지 15리, 안동시 녹전면 원천리까지 15리로 이 고개를 넘어 다니던 소금장수와 등짐장사꾼들이 쉬어가는 길목이었다고 전해진다.
- 예고개 삼거리 도로로 내려서서 보면 맞은편에 예고개 표지석과 버스정류장이 있고, 그 우측편에 일신쉼터 식당과 매점 건물이 있고 좌측에 닭발 음식점이 있다. 예전에는 교통량이 많았던 곳이지만 지금은 예고개 아래로 오운터널이 뚫리면서 교통량이 현저히 줄면서 거의 폐허가 되었다.
- 다음 구간은 도로를 건너 버스정류소 옆 임도로 들어선다. 예고개 닭발구이(에전 막창구이) 음식점 뒤로 사과밭을 우측에 두고 카메라 무시하고 직진으로 올라서서 끝지점(노란 물통)에서 좌틀로 이어간다.
첫댓글 오지산행 길게 수고하셨습니다. 산패정리가 제되로 되어 있어 보기 좋습니다.
엡!^^ 부뜰이부부운영자님 노고가 크셨습니다.
지나신지 오래되어 옛날 생각이 낫겠어요. 선배님 산행기 읽어보았습니다. 내주 운영진회의에서 뵙겠습니다.^^
우리가 갔을 때 한창 정비중이라 곳곳에 자재가 쌓여있던데.
길은 좋아졌던가요.
그리고 갈방산 산패가 왜 고목에 끼워저 있을까요.
이렇게 잘해두엇는데.
네~ 부뜰운영자님!
요소요소 낭떠러지 위험지역에 가이드 말뚝을 설치했고, 암벽을 타고내리는 위험지역도 우회길을 마련했더군요.
갈방산 산패는 땅에 떨어진걸 주워서 누군가 고목에 끼웠을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해봅니다.^^
적재된 자재는 모두 계단으로 설치되어 운영자님 지나실 때보다 길이 한결 편했습니다. 내주에 방가이 뵙겠습니다.^^
운영자님 수고하셨습니다~
17년도 한여름에 종주한 추억이 아련히 떠오릅니다~
학가산 오르다 2번째 철조망을 탈출하려다 턱및에 크게 상처가나고
보문산 그리고 중대바위 오치고개까지
불난 곳이라 바닦에는 쓰러진나무와 주위에는 싸릿나무 그리고 갈대때문에
길이 보이지않고 길을막아 오치고개까지 오치 내려왔느지!...
이제야 추억으로 떠 오릅니다~
감사 합니다~
항상 안,줄산을 발원드립니다~
법광대선배님!
힉가산 철조망은 부대 이전으로 남겨졌나보죠.
가급적 개구멍보다는 임도를 따르는 것도 고려하겠습니다.
중대바위 전망이 좋다문서요.
지금은 산불난 곳이 그리 복잡하지는 않는가 보더군요.
저는 물 구할 장소가 항상 관심 대상입니다.^^
학가산 약수와 수박골마을은 알고 있고요.
검무산 도청소재지 부근 지나면서 슈퍼가 있겠죠?^^
드뎌 이틀에 걸친 문수지맥 산행기가 올라왔네요.
바쁜일상에서도 철저한 일정계획에 맞추어 진행된 산물입니다.
백두대간 옥돌봉에서 보는 운해의 장관만으로 충분한 보상은 받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봉수산 오르면서 용암지맥 분기점 무렵에서 멧선생을 떠올리시니
저도 문득 낙남정맥상 용암산에서 멧선생과 대치하던 기억이 문득 떠올라서요. ㅎ
이틀동안 만만치 않은 고도를 오르내리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
네~ 방장님!
비가 그친 새벽 옥돌봉에서의 조망이 최고였습니다.
이후로 문수산까지는 안개 자욱한 구름속을 거닐었습니다.
봉수산 들머리에 멧돼지 사육농장이 있더군요.
멧돼지는 말처럼 빠르게 달린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인기척이 나면 본능적으로 달아나는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퐁라라 운영자님 문수지맥 옥돌봉과 선달산 방향
조망은 압권입니다 문수산 오름이 조금 빡세고
대체로 무난한 지맥길 용암지맥 분기점과 예고개
휴게소 지맥꾼들에게는 정말 소중한 휴게소입니다
문수지맥 1구간 완성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항상 응원합니다 화이팅입니다~~~~
세르파선배님!
문수산은 축서사분기점에서 금새 오르던걸요.
만리산이 악명 만큼이나 가도가도 끝이 안보이더군요.
임도를 만들면서 지맥길에 통나무로 장벽을 만들어 이를 밟고 넘어서야 했습니다.
그 다음으론 요성산 오름이 살짝 빡셌구요.
봉수산 일출사 수도나 예고개 음식점은 지맥꾼들에게는 긴요한 조달지입니다.
일출사 우물물은 깨끗하게 보이지 않았구요. 물이 펑펑 나오는 수도꼭지가 있더군요. 감사합니다.^^
백오십리가 넘는 엄청난 거리를 밤새워 한번에 걷다니 상상이 안됩니다.
종주 후기도 감히 따라 할 수가 없네요.
퐁라라님의 자세한 후기와 지도를 맞춰보며 백지같은 지역을 머릿속에 채워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꾸벅♥
봉화동천선배님!
정신 없어서 자료 정리한 문수를 지나는 동네도 첨부시키지 못 했네요.^^
우곡성지에 대해서도 포스팅 못한게 맘에 걸립니다. 아무래도 조금 더 내용을 보충해야 할까봅니다.
발바닥이 따가우면 부직포로 땜방하며 걸었습니다.^^
혹시 닉네임이 이곳 봉화와 연관 있으신지요.
과한 칭찬을 주시니 앞으로 더 잘하라는 격려로 감사히 받겠습니다. 꾸벅~^^
지난 일요일 드디어 금남호남+호남정맥의 끝을 보았습니다. (존제산 구간만 올 겨울로 미루었기에 아직 완주라고 못함) 홀대모에 가입해서 회원님들의 산행기를 보며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정신력을 키웁니다. 덕분에 호남정맥을 마치고 다른 산줄기를 계획하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봉화는 95년에 백두대간 40일단독종주하는 후배에게 보급품 지원하러 상동에서 우구치 넘어 금정으로 가는 지방도를 넘다가 험로에 르망 바닥이 튀어 오르고 연료통이 금가서 비누를 짖이겨 때우며 배추밭 고개를 넘었던 아찔한 기억이 나네요. ㅋ
닉네임 봉화동천은 제가 살고있는 순천의 지명입니다. 구시가에 있는 봉화산과 동천 사이에 살고 있어 '봉화동천'이라 했습니다. ㅎㅎ
95년 상동에서 우구치 넘어 금정가는 지방도가 도리기재 아니었을까요?^^
95년도에 저도 르망살롱을 끌고 다녔습니다.^^
차체가 좀 컸고, 후진기어를 잡아 뽑아 넣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하! 여수지맥 봉화산에서 분기하는 순천의 뒷산 봉화산을 말하는 거구,
호남정맥 미사치 아래 심원에서 시작해 순천만으로 흐르는 동천을 말하는 거군요.^^ 감사합니다.
상동ㅈ에서 우구치 넘어오는 88지방도로
옛날에는 노선 뻐스도 다녔대요
저도대간할때 자차로 상동서 도리기재 가는데 그 도로를넘다가
벌목꾼들이 산길로 나무를 자빠트리놔서
치울때까지 기다리는데 2시간소요
ㅎ
시작도하기전 맥이 다 빠졌죠
산행기 도처에서 발견되는 보석 같은 장면들과 표현들이
산행기를 감상하는 독자의 마음을 아주 시원하게 씻겨 줍니다.
손을 들면 세워줄 것 같은, 버스에 마음만 실어보내고....
밥값 하느라 열심히 짖어대는 개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이 하나하나의 표현이 독백의 정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산행기에서도 퐁라라님이 언급했듯이,
예천바위에서 바라보는 조망풍경에 '일순 숨이 넘어갈 듯' 합니다.
물 한 잔 먹고 가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었던 축서사.
너무 먼 당신이지만 한번쯤 들러볼 만한 충분한 의미는 있는 것 같습니다.
절 마당에서 내려다보는 세상풍경이 그렇고, 절이 앉아있는 지형도 그렇고, 죽여줍니다.
힘들게 오른 만리산, 늘못.
한밤중이라 그 오묘한 지형을 감상할 수 없음이 아쉽네요.
개구리 떼창 때문에 노박의 명당을 놓친 것도 아쉽고....
기막힌 풍경은 밤중에 지나가지 마시길 간절히, 간절히, 호소 드립니다. ㅋㅋ .
예를 든다면, 학가산, 검무산, 나부산 .
산행의 압권은 월오현 근처에서의 노박 장면.
고아텍스 입고 은박돗자리 한 바퀴 감고 한자리 깔고 누워....
산과 한 몸 된 퐁라라님의 정신세계가 존경스럽네요. 고생하셨습니다.
범산선배님!
선배님 산행기에 비한다면 문학적 표현이라는게 미천하와 부끄럽기 그지없네요.
저는 그냥 간결한 건조체형식입니다.^^
글찮아도 가급적 전망좋은 지점은 낮에 통과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시골이라 야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야간산행은 주변과 정보를 맞춰볼 수 없는 단점이 있음은 사실이라서요.
2구간은 가급적 학가산을 오전에 통과토록 준비하고, 비박으로 4~5시간 잡고 3일 낮을 할애할 계획입니다.
학가산이 주변 원경 여러 군데서 확인 가능한 명산이라서요.
조언 주신 대로 최대한 거리를 참고해서 검무산도 직전에 쉬고 낮에 오르도록 진행하겠습니다.^^
다만 온도가 높거나 비가내리지 않고 날씨가 도와줬음 좋겠네요. 도움 주셔서 매우 감사드립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홍알홍알입니다. 오후에 밀린 산행기 읽어볼려고요.^^
이건 산행기가 아니라
박사과정 논문입니다.
[문수지맥 종주 ]논문
저자
교수~퐁라라
ㅎ
도깨비선배님! 부끄럽습니다,
논문 표절인지라 저는 정치판 근처는 얼씬도 하면 안되겠는걸요.^^
시간이 없어 많이 주워모으지 못했어요.
이만오천이나 일만오천 지도를 보고 삼면봉을 더 자세히 살폈어야했는데 그 과정이 없었습니다.
출발점인 문수분기점이 영월 김삿갓면과 도계가 어찌되는지도 자세히 살피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미완의 작품인데, 그리 말씀 주시면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할것 같아서요.^^
박성태선생님이나 조진대고문님 경우는 연로하신 나인데도 컴퓨터로 여러 정보를 검색하는데 선수이시더군요.
좀 더 전문적인 부분으로 파고들어야 하는데 제가 공부를 좋아하는 성격은 못되고 놀자고 산을 찾았는데 스스로 우리 속에 갇히는 우스꽝스런 꼴이 되고말았어요.^^
아마도 긍금증과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 그런가봅니다.^^
저도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1대간 9정맥 6기맥 162지맥에
접근 했더라면 퐁라라님 처럼 이렇게 했을 겁니다.
대간은 십수년전에 첫 발을 디뎌 구간 산행으로 끝을 냈었구
새롭게 무한에 와서 정맥을 하다가 대간을 또 하게 되었고
기맥도 시작을 안하고 지맥을 중간중간 하게 되었더랬죠.
그러다 보니 아직 기맥도 마무리가 안되고 기럭지가 긴
지맥들이 즐비하게 남아 있네요..
퐁라라님 처럼 산줄기에 대한 이해도가 남달랐다면
아마도 체계적으로 산행을 이어 가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네요 ^^
문수지맥 산행 하기만도 쉽지 않았을 텐데 방대한
자료 모아서 산행기 작성하시는 정성이 참 대단 하십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류대장님!
아무래도 꼼꼼한 성격탓으로 보입니다.^^
무도는 처음부터 속도와 거리를 특화한 익스트림 산방이므로
일반산악회에서 경험키 어려운 강력한 추진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서로 장단점을 비교하고 허실을 보완하는 상생관계가 충분히 될 수 있습니다.
다양성 측면에서 그리고 서로가 자기 분야에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에서 충분히 공존이 가능하게 보고 있습니다.
즉슨, 무도의 추진력을 보고 홀대모는 지치지 않는 힘을 얻고 있으며,
무도는 속도전에서 놓치기 쉬운 디테일을 홀대모를 통해 보강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한줌의 재가 되기까지 젊음을 꼬실러보는거죠 뭐~ 항상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