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가슴 울새
셀마 라게를뢰프
아주 오랜 옛날,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하늘과 땅을 지으셨을 뿐 아니라, 모든 짐승과 풀과 나무까지도 만드시고 이름들을 지어 주신 그 무렵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랑 어린 모습으로 하루 종일 만물을 만들고, 만든 것을 늘어놓고 하시다가 해가 질 무렵에 갑자기 생각난 듯이 조그만 잿빛 나는 새를 만드셨습니다.
"네 이름은 붉은 가슴 울새다!"
새가 완성되자 하나님은 새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손에 놓인 새를 하늘에 날리셨습니다.
새는 하늘을 한 바퀴 날고 난 뒤 자기가 사는 아름다운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자기 몸뚱이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몸뚱이는 전부 잿빛뿐이어서 가슴 쪽 역시 다른 데나 마찬가지로 잿빛이었습니다.
붉은 가슴 울새는 이리저리 몸을 돌리며 맑은 호수에 자기 모습을 비춰보다 실망하였습니다. 몸뚱이에 빨간 것은 하나도 없고 전부 잿빛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는 하나님에게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인자하셨습니다. 손에서는 나비가 날아다니며 춤추고 있었고, 어깨에는 비둘기가 앉아 있었으며, 그 주위 땅에는 장미와 백합과 국화꽃이 피고 있었습니다.
새는 무서움으로 가슴이 덜덜 떨렸습니다. 그러나 천천히 날아 점점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서 마침내 그 손위에 앉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원이 무엇인지 물으셨습니다.
"제 모양은 입부리에서 꼬리까지 전부 잿빛입니다. 그런데 제 이름이 왜 '붉은 가슴'인가요? 붉은 터럭이란 한 개도 없는데 왜 '붉은 가슴'이라는 이름을 주셨나요?"
작은 새는 호소하듯이 크고 검은 눈동자를 하나님 쪽으로 돌리면서 주위를 살펴보았습니다. 주위에는 온 몸이 새빨간데다 멋지게 금가루를 칠한 금 꿩, 푹신한 빨간 목도리를 두른 앵무새, 새빨간 깃을 가진 금 닭 등이 있었습니다. 나비나 금붕어나 장미 따위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것을 본 '붉은 가슴'이 굳이 소원을 말했다고 해서, 그것이 어찌 무례한 일이라 하겠어요? 오직 단 한 개라도 붉은 털이 가슴에 나 있다면, 자기도 예쁜 새가 되어 이름에 어울릴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작은 새는 다시 한번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제 몸은 잿빛 투성이인데 왜 이름이 '붉은 가슴'인가요?"
작은 새는, 하나님께서 "정말 그랬었구나, 내가 깜빡 잊었는데 네 가슴을 이름 그대로 붉게 해 주마!"하고 말씀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계속 미소만 지으시며, "내가 '붉은 가슴'이라 정했으니 네 이름은 '붉은 가슴'이다. 그렇지만 네 마음가짐 하나로 너도 붉은 털을 가질 수 있게 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손을 높이 들어 다시 한번 그 작은 새를 세상에 날려 보내셨습니다.
작은 새는 깊이 생각하며 낙원을 날았습니다. 나처럼 보잘 것 없는 새가 어떻게 하면 붉은 털을 얻을 수 있을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찔레꽃이 핀 가시덤불 사이에 둥지를 짓는 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야만 꽃잎이라도 떨어져 가슴을 붉게 물들여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붉은 가슴 울새는 예루살렘 성벽 밖 조그만 거친 산에서 우거진 풀 떨기 속에 지은 둥지 속에 있는 새끼 새에게 노래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멋진 창조의 날에 관한 이야기에서부터 이름이 생긴 까닭을, 또한 세계가 창조된 날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렀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알에서 새끼를 깠는데도, 붉은 가슴 울새는 아직도 잿빛 새 그대로 있으며, 가슴에 붉은 깃 하나 나지 않는다고 노래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붉은 가슴 울새는 하던 이야기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한 성문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붉은 가슴 울새의 둥지가 있는 곳으로 몰려오기 때문이었습니다. 말 탄 장교, 창을 든 군인, 망치와 큰못을 든 관리, 으스대며 걸음을 옮기는 제사장, 흐느껴 우는 여인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 것도 모르고 괜히 뒤따라오는 불량배들,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뒤따르는 한심한 무리들. 붉은 가슴 울새는 둥지에 앉아 잿빛 몸을 바들바들 떨고있었습니다. 이제 금방이라도 들 찔레 덩굴이 사람들에게 밟혀 새끼가 죽을까봐 걱정스러웠던 것입니다.
"주의 해, 가만있어! 몸을 웅크리고 가만있는 거야! 말이 왔다. 머리 위로 지나가! 군인과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어!"
엄마 새는 새끼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소리를 뚝 그치고 말았습니다. 마치 몸에 다가오고 있는 위험도 잊은 듯이 말입니다. 뒤이어 엄마 새는 둥지 속에 들어가 작은 날개를 활짝 펴 새끼의 눈을 가렸습니다.
"이건 정말 너무하다. 너희들에게 저런 광경을 보여줄 수는 없지. 나쁜 사람 세 명이 십자가에 달리고 있어."
엄마 새의 날개 때문에 새끼들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새끼들에게 들려 오는 것은 오직 망치로 못을 박는 소리와 괴로운 신음 소리, 그리고 무자비한 사람들의 떠들썩한 소리뿐이었습니다.
붉은 가슴 울새는 무서움에 질려 눈을 크게 뜨고, 계속되는 장면을 좇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불쌍한 그 세 사람에게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잔인하구나! 저 불쌍한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만으로는 모자라는지, 한 사람 머리에는 가시관까지 씌웠구나!"하고 엄마 새는 말했습니다. 뒤이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습니다.
"저것 봐, 이마에 가시가 찔려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얼마나 의젓하고, 또 둘러보는 눈도 얼마나 부드러운지 모르겠어. 누구나 할 것 없이 저 사람이 좋아질 수밖에 없을 거야. 저 사람이 당하고 있는 괴로움을 보고 있노라니까 어쩐지 내 심장이 찢어지는 듯하구나."
엄마 새는 그 가시관을 쓴 사람에게 더욱 더 동정심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만약에 독수리 형님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 사람의 양손에 박힌 못을 뽑아 줄텐데, 그리고 저 사람을 괴롭히고 있는 나쁜 사람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쫓아버리고 말텐데."
엄마 새는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이마에서 피가 맺혀 떨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니 더 이상 둥지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약하고 작은 새이기는 하지만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저 불쌍한 사람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하고 엄마 새는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대로 가만있을 수 없었습니다. 둥지에서 날개를 펴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새는 여러 차례 십자가 주위를 돌면서도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겁이 많은 작은 새여서 한번도 사람들 옆에 가 본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자 점점 용기가 생겨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곁에 가까이 날아가서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이마에 박힌 가시를 그 부리로 뽑아 드렸습니다. 가시를 뽑는 순간,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피가 한 방울 엄마 새의 가슴에 떨어졌습니다. 핏방울은 점점 넓게 번지더니, 짧고 부드러운 가슴 털을 흠뻑 물들이고 말았습니다.
그때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입술을 움직여 엄마 새에게 속삭이는 것이었습니다.
"네 친절한 마음씨 때문에 너의 동족이 세상 첫날부터 구해 오던 것을 이제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우선 너부터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작은 엄마 새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얼른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슬픈 마음만 한 아름 안고 새끼들이 기다리는 자기 둥지로 돌아갔습니다. 엄마 새가 둥지로 돌아가자 새끼 새들은 이렇게 종알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가슴이 빨갛게 되었어요. 가슴의 털이 들장미 꽃보다 더 새빨갛게 되었어요!"
엄마 새는 자기의 가슴에 떨어진 빗방울 자국을 보았습니다. 세상에서 보았던 어떤 빨간색보다 진한 빨간 털이 되었습니다.
"그 불쌍한 사람의 이마에서 떨어진 핏방울이란다. 시냇물이던가 맑은 샘물에 닦으면 깨끗이 지워지겠지."
엄마 새는 곧 샘으로 가 맑은 물로 핏방울을 닦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물을 끼얹어도 가슴의 붉은 색깔은 영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새끼들이 자라니까 그 가슴의 털도 역시 피처럼 빨갛게 빛났습니다. 그 빨간 색깔은 오늘날까지 붉은 가슴 울새의 목이나 가슴에도 물들어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