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살구꽃이 피면
강 인 수

정욱은 읍의 중학교를 졸업하고 전업사에 취직을 했다. 주로 현장으로 나가 신축건물의 전기배선 공사와 LED 전등을 다는 일을 해 왔다. 건강하고 성실해서 사장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월세 30만원의 고시텔에 살았다.
고시텔은 4평 정도의 룸 하나에 겨우 화장실만 딸린 방으로 잠만 자고, 식사와 목욕 세탁 등은 공동시설을 이용해야 하므로 매우 불편했다. 몇 해 간 착실히 저금하여 원룸이나 연립주택으로 이사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욱은 전업사에 근무한 지 5년째 되는 봄 서른 살 때 변두리지만 공기가 좋고 조용한 산 아래 새로 지은 연립주택 <무지개>를 찾아갔다. 무지개는 5층 건물인데 1층은 주차장 2,3층은 일반 연립주택으로 4,5층은 독신자를 위한 원룸형태로 지어졌다. 너더댓 평 되는 화단에는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분홍 살구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정욱은 잠시나마 고향마을 행촌(杏村)을 떠올리며, 주인아저씨에게 목례로 인사를 하면서 “살구꽃이 만발했습니다.” 하자, “올핸 유난히 꽃이 많이 피었습니다.” 하고 빙긋이 웃었다.
주인은 초로의 남자로 인상이 후덕해 보였다. 마치 고향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주인은 공실인 503호를 보여 주었다.
“503호엔 직장인이 거주했는데,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이사를 간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어요. 새 건물이라서 그런지 방이 비었다 하면 일주일도 되지 않아 입주자가 생겨요.” 했다.
정욱이 주인을 따라 복도에서 도어를 통해 들어가니 현관이 있고 중문도 있었다. 방 하나는 작았지만 방이 둘이고 15평은 될 것 같았다. 주방과 화장실이 모두 분리되어 있었고, 거기다가 기본 옵션 제품인 침대 서랍장 옷장 세탁기 냉장고까지 모두 깔끔한 새것이었다.
주인 김씨는 변두리여서 비교적 월세기 싼 편이라고 했다. 계약을 하려 하자, 보증금 1천에 월세 30이라고 하면서 혼자냐고 물었다. 혼자라고 하자 주인은 “그래요?” 하면서 정욱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인상이 참 좋습니다. 계약서의 주민등록번호를 보니 39세이네요.”
정욱에겐 주인이 39세인데 어찌 혼자인가고 묻는 것 같이 들렸다.
정욱은 혼자서 짐을 날랐다. 다친 다리 때문에 제법 절룩거렸다.
자신의 절룩거리는 다리를 주인 김씨가 곁눈으로 유심히 보는 것 같았다.
정욱은 나이 서른다섯 되던 해, 고향친구 용수로부터 초등학교 동기생인 분숙이가 이 근처에 산다는 말을 들었다. 어릴 때 무척 마음속으로 좋아했던 분숙이가 보고 싶었다.
그 다음날 정욱은 전봇대에 올라가 작업을 하던 중 분숙이 생각을 하다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면서 전선에 감전되어 시멘트바닥으로 떨어져 왼쪽 다리를 크게 다쳤다. 여섯 달 치료 후 다시 그 전업사에 나갔지만 일을 감당할 수가 없어 사장의 소개로 봉급은 적지만 일이 수월한 가까운 다른 전업사에서 일을 하게 됐다.
정욱은 그래도 일을 계속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월급이 30만원이나 줄어 저축할 여유가 별로 없었다.
연립주택이나 아파트에 전셋집 얻어 장가가고 아기 낳아 남들처럼 오순도순 살려는 소박한 꿈마저 접어야 했다. 다행히 아픈 다리는 절룩거릴 뿐 걷는 데도 작업하는 데도 별 지장이 없게 되었다.
연립주택 무지개로 이사 온 지 2년째 되는 늦봄 토요일 저녁, 정욱은 슈퍼에 반찬꺼리를 사러갔다. 식품 코너에서 나오다가 분숙이를 만나게 되었다.
정욱은 깜짝 놀라 분숙이가 아니냐고 물었다. 분숙이도 놀랐다. 이거 이십년 만인가? 아래각단 최정욱! 맞지? 하며 반겼다. 너 어디 사니? 강서구 이 근처냐? 정욱이 고개를 끄떡이자, 분숙은 자기도 근처에 산다고 했다. 정욱은 저녁을 함께 하자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 쌕에 무엇이 들었어? 콩나물 시금치 쌀 한 봉지. 그럼 혼자 사냐? 그래 혼자야.
분숙은 처녀 때처럼 블라우스에 치마 차림이었다.
언제 만나고 안 만났었지? 스무 살 첫 동기회 때이던가? 그래, 맞아 맞았어.
분숙은 고향마을 행촌(杏村)에 살구나무는 줄어들고 몇 해 전부터 매화나무를 심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소식도 전하면서, 아래각단 산기슭 강변 쪽에 있던 매실 농원은 아주 크게 확장되어 산기슭 전체가 매실나무로 꽉 찼다는 말도 전했다. 덧붙여 마을 이름을 행촌이 아니라 매촌(梅村)으로 바꿔야 한다는 말도 있다고 했다.
분숙이 정욱을 쳐다보면서 혼자 산다 했는데 그럼 싱글이냐고 물었다. 다리를 다쳐서 아직 장가도 못 갔다고 씁쓸하게 답했다.
분숙은 그제야 전에 고향 갔을 때 읍에 사는 언니가 정욱이 작업을 하다가 병신이 됐다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넌? 하고 물었지만 분숙은 나 대답 안 할래, 하고 고개를 모로 흔들었다.
밥을 먹고 나서 분숙은 차를 마시며, 사실은 나 결혼은 했는데 남편이 사고로 죽었고 혼자서 원룸에 산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여 회사에 나가 일한 지 5년이 된다고 했다. 그리곤 지난달부터는 주말 저녁엔 이 슈퍼에서 알바를 한다고 했다.
그 날 밤 정욱은 고향 마을을 떠올렸다.
고향 마을엔 집집마다 살구나무 한두 그루, 밭 언덕이나 산기슭에는 여러 그루가 무리지어 봄이면 분홍 꽃을 피웠다. 모심기 즈음이면 나무마다 살구가 조롱조롱 탐스럽게 매달렸다.
정욱이 학교에 가려면 큰말 분숙의 집 앞을 지나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거의 매일이다시피 만나게 되었다.
뒷동산 아래 살구나무가 많았던 고향 마을, 마을 앞으로 작은 들판이 있고 들판 곁에는 큰 내가 흐르고 있었다. 남쪽 외따로 떨어진 산기슭 과원의 매화나무가 이른 봄 찬바람 속에 하얀 꽃이 피면 봄을 알렸고 곧 분홍색 살구꽃이 피면 따뜻한 봄바람이 불었다. 정욱은 아래각단 양철지붕 집에 살았고 분숙은 마을 한가운데 큼직한 기와집에 살았다.
정욱이 옆집 용수와 함께 가방을 메고 산비탈 과원을 지나 큰말로 들어서서 골목길을 거쳐 학교에 다녔다. 큰말 앞 들판에 있었던 단층 행촌초등학교.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웃으며 골목길을 거쳐 학교로 가던 모습. 분숙이 꽃무늬 치마를 나풀거리며 또래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자치기놀이를 하던 모습. 분숙의 얼굴은 분홍색 살구꽃 같았고 성질은 단단하고 차분한 매실 같았다. 정욱의 집은 너무 가난하여 아버지가 분숙의 집 농사일을 해주는 반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다. 정욱은 마음속으로만 분숙을 좋아했지 부잣집 딸 분숙이를 사귀어 볼 생각도 말을 걸어볼 생각도 못했다. 그야말로 그림 속의 떡이었다. 그러나 단 한 번 용기를 내어 마음을 전한 일이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반이었던 봄, 좀 잘 사는 애들은 좋은 중학교에 가기 위해 학교에 남아 과외수업을 받았다. 모심기가 끝난 6월 중순 정욱은 알맞게 잘 익은 살구 스무 개를 종이봉투에 넣어 분숙이가 과외수업을 하고 올 때쯤 길모퉁이에 있다가 뒤를 따르기로 했다. 해가 지고 어둑해지자 분숙이가 종종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이거 살구다. 먹어봐라.” 하고 건넸다. “살구! 우리 집에도 있다. 도로 가져가거라.” 정욱은 “새콤달콤한 게 맛있다. 먹어봐라.” 하고는 봉투를 건넸다. 분숙은 살구봉투를 땅바닥에 놓아버리고는 집으로 달려가 버렸다. 살구는 반쯤 길바닥에 굴렀다. 정욱은 화가 나서 살구봉투를 발길로 차버렸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용수가 다가와, “야! 정욱이, 니 이 맛좋은 살구를 와 발로 차노?” 하면서 주워 먹었다. “내 다 봤다. 니가 분숙이 아주 좋아하는 거, 이제 알았다.” “야, 임마 어데 숨어 봤더노!?” 정욱은 눈을 흘기며 퉁명스럽게 고함쳤다.
둘이 아래각단으로 오면서 정욱은 비밀을 지켜줄 것을 당부했다.
그런데, 그런 분숙을 직접 일대일로 만나 식사를 같이하게 된 것이 꿈만 같아 그날 밤 정욱은 잠을 설쳤다.
그 다음 토요일에도 정욱은 분숙을 만났다.
분숙은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결혼하고 불과 이태 만에 당한 일이라며 마음의 상처 때문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몇 해를 보냈고, 마음을 잡을 수 없어 입에 대지도 못했던 술도 한두 잔 하게 되었고, 제법 많이 탄 보험금도 다 까먹고, 4,5년이 지나서야 정신이 들어 회사에 나가게 되었다고 했다.
그 후 둘은 토요일마다 만났다.
정욱이 분숙의 언니 옥숙의 소식을 묻자, 공무원 신랑 만나 고향 읍에서 잘 살고 있으며 아들이 고등학생이라고 했다.
분숙은 그 다음 해 살구꽃이 필 무렵 정욱의 연립주택 무지개로 이사하여 동거하게 되었다.
둘은 사랑의 꽃을 피우면서 새로운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었다. 둘은 언제나 미소를 짓는 얼굴이었고 때로는 서로 손을 잡고 큰 소리로 웃으며 사랑의 기쁨을 구가하고 있었다. 둘은 아기자기한 이야기로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손뼉을 치기도 했고 팔을 허리에 감아 걸어가기도 했다.
분숙은 주말이면 세간을 이것저것 사다 날랐다.
정욱은 분숙이 임신을 해야 평생의 반려자가 되리란 생각에 노력을 했지만 분숙은 늘 배란기를 피했다.
어느 일요일 늦잠을 자고 일어난 아침, 분숙은 연립주택의 2,3층처럼 큰 방이 둘인 곳으로 아니면 아파트로 전세를 얻어 가야 임신을 하고 애기를 낳을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정욱은 자기 수입으로는 도저히 이보다 더 큰 연립주택이나 아파트로 이사갈 수 없다며 통장 둘을 내 보였다. 하나는 만기 3년의 2천만 원 적금 통장이었고 또 하나는 2백 몇 십만 원이 든 자유저축통장이었다.
분숙은 마음이 잡히지 않아 한 5년 동안 방황할 때 돈을 다 써버려 겨우 원룸 보증금만 마련했고 몇 해 전부터 저축하기 시작해서 겨우 1,500만 원밖에 모으지 못했다고 했다.
고향마을의 살구가 익을 무렵에, 분숙은 애기를 갖게 되면 돈이 더 들고 자기는 아이를 키울 동안 회사에 나가지 못해 월급을 받을 수 없다고 슬픈 얼굴로 말했다.
정욱은 한 해 동안 서로가 열심히 돈을 모아 다음해에는 좀 더 나은 집으로 전세를 얻어 가자고 했다. 몇 번 둘이서 주말에 전셋집을 알아보았는데 연립주택이나 아파트로 가려면 보증금 7천은 주어야 할 것 같아 전세금 마련도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정욱은 그 즈음 분숙이가 회사일이 많다며 토요일도 늦게 들어오고 일요일 밤에도 외출을 하는 게 마음에 끼었다. 전세금을 마련하려고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누구를 만나지 않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다.
분숙은, 정욱이 몸이 저래 가지고는 더 나은 직장으로 옮길 수도 없고 현상 유지밖에 안 되니 어쩔까 하고 고민하던 중 고향에 가서 어머니와 언니를 만났다.
분숙이 정욱 얘기를 끄집어내자, 어머니와 언니는 심성이 참 좋은 청년이라며 회사에 나간다니 다행한 일이라 했다.
분숙이 정욱이와 같이 살고 싶다고 하자, 언니는 중학교 밖에 안 나온 불구자가 어떻게 가정을 꾸려 나가겠느냐? 차라리 나이 좀 많아도 먹고 살 수 있는 남자와 재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언니는 좋은 사람을 소개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분숙은 번민에 빠졌다.
정욱 총각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성실한 사람, 비록 다리병신이지만 덕성스럽고 인정이 많은 사람. 벌이가 조금만 더 좋아도 같이 살겠는데. 월수 200도 안 되는데 어떻게 애 낳고 살겠는가? 나중 월급도 더 오르겠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월급 오르면 물가도 오르기 마련인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앞길이 고향 뒷동산 숲속 그늘처럼 어둑해 보였다.
한편 정욱은 분숙이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나긋나긋 정다운 미소를 지을 때는 꼭 깨물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마음속으로 얼마나 그리워했던 분숙이 아닌가? 살구꽃 같이 향기롭고 예쁜 여자를 어디에서 또 만나랴? 내 나이 마흔인데, 월수입이 조금만 더 많아도 내가 평생 같이 살자고 밀어붙이겠는데….
정욱은 고민하다가 사장에게 더 열심히 일할 것이니 월수 200정도를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사장은 한 번 생각해 보겠다 하더니, 다음날은 정욱을 불러 잔업을 매일 두 시간 더 하면 230은 줄 수 있다고 했다. 정욱은 기뻤다. 집에 와서 그 얘길 했더니 분숙이 참 잘 되었다며 반기다가 그 다음날은 찌푸린 얼굴로 지금도 11시간 작업 때문에 밤 9시에 들어오는데 그렇게 되면 밤 11시나 12시에 들어오고 아침엔 지금처럼 8시에 나가야 되니 몸이 감당하겠느냐고 반문했다. 정욱은 분숙이가 애 낳고 자기와 산다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분숙이 한 번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230만원 봉급 받은 날 정욱은 너무 기분이 좋아 소주 한잔 하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들어와 분숙이와 소주잔을 나눈 후 정욱이 분숙을 덮치다시피 하여 달려들었다. 분숙은 그날 배란기여서 한사코 방어해도 되지 않아 정욱을 기분 좋게 해주면서도 완강하게 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다음 날 정욱은 퇴근길에 고향친구 용수를 만났다. 포장집에 들어가 고향 애기를 하다가 용수는 분숙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50대의 괜찮은 남자와 재혼할 거라는 말이 있더라고 했다.
“그 말 확실하냐?”
“너, 표정이 왜 그래? 왜 그렇게 놀라?!”
“아니 그게 정말이냐?”
“떠도는 소문인가 모르지만 그런 말을 들었어. 나도 잘은 몰라 그냥 들었어.”
정욱은 친구의 말을 들은 후 분숙이를 놓칠 것만 같아 잠이 오지 않았다.
분숙이를 놓지면, 맛 좋은 음식도 먹을 수 없고, 그 보다 분숙이와 결혼하여 애 낳으면 살구꽃이 피면 고향 마을 행촌에 가서 부모님 무덤을 찾아 성묘도 하려 했는데…. 그보다 분숙이가 없으면 내가 무슨 재미로 산단 말인가? 분숙이를 놓쳐서는 안 돼 인 돼….
여름이 되자 둘은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고, 분숙은 집을 나가버렸다.
한편 그 해 가을, <무지개>의 주인 김씨가 가만히 보니 503호 입주자가 전보다 풀이 죽은 것 같고 함께 동거하던 참한 여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 며칠 후 일요일 이른 아침 주인 김씨가 주차장 청소를 한 후 계단 청소를 하다가 503호에서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최정욱이 흐느껴 우는 울음은 너무 슬퍼 누구가 들어도 가슴을 찡하게 할 정도였다. 연인과 헤어져 비탄에 빠져버린 한 사나이의 처절한 비명 같은 흐느낌.
김씨는 청소를 하다 멍하게 잠시 서 있었다.
-둘이 부부가 되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여자가 가버린 모양이구만. 무슨 사연으로 헤어졌을까?”
최정욱은 연립주택에 만 일 년을 있다가 재계약하여 일 년 더 있기로 했는데 6개월을 남겨놓은 초겨울에 주인에게 불쑥 이사를 가겠다고 했다. 주인 김씨는 계약상 입주자를 구해 놓고 나가든지 아니면 우리가 그 동안 입주자를 구하겠다고 했지만 세입자 최정욱은 바로 나가겠다며 일주일 이내에 보증금에서 일활 정도를 제하고 방을 미리 빼겠다고 했다.
그 이틀 후 503호 바로 아래 방 403호 입주자인 직장여성이 집 주인을 찾아왔다. 주방의 전등에 불이 깜박거리며 주방 벽에 습기가 많아 전기가 합선된 것 같다며 좀 보아 달라고 했다. 주인 김씨가 가서 전구를 새것으로 갈아 끼워도 불은 제대로 오지 않았다. 벽에 물기가 있고 천정 귀퉁이에 파르스름하게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바로 위층 503호에 가서 확인을 해야만 했다.
주인 김씨가 503호로 올라가 복도에서 벨을 여러 번 눌렀지만 응답이 없었다. 분명 방에서 인적기가 나는데 다섯 번 눌러도 응답이 없었다. 조금 후 다시 누르자 입주자 최정욱이 반쯤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얼굴이 무척 침울해 보였다.
김씨가 아래층 주방 전등에 불이 오지 않고 천정에 물기가 있어 주방을 한 번 점검해 보러 왔다고 하자, 마지못해 문을 열어주었다. 참하게 생긴 여자도 없었다. 주방 바닥을 한 번 보자고 했다. 주방에 깔린 비닐 장판을 들어 올리자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개수대 아래 수도 연결 장치에 이상이 있나 하고 살펴보았지만 이상이 없어 보일러 통에 딸린 파이프 네 개를 자상히 살펴보고 손으로 만져보니 세 번째 파이프에서 물이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어허, 보일러에서 물이 제법 많이 떨어지고 있는데 이걸 그대로 두었군. 언제부터 물이 샜는가요?”
김씨가 조금 불퉁한 음성으로 물었다.
정욱은 아무 말 없이 보일러 파이프에서 떨어지는 물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주인이 한 번 더 묻자, 잘 모르겠다며 방금 처음 보았다고 했다.
“아랫집 주방에 전기가 오지 않는 것이 이 물 때문인 것 같아요.”
그는 아무 말도 않고 서 있다가 공구함을 들더니 아랫방에 가보자고 했다.
정욱은 아랫방에 들어가 전구를 뺀 후 작은 기계를 연결하여 테스트를 한 후 당분간 전선을 새로 빼내어 전등에 불이 오게 하고 며칠 후에 다시 접선을 시키면 된다고 했다. 그는 벽의 콘센트에서 전선을 연결하여 불이 오게 했다. 그리곤 다시 자기 방으로 올라왔다.
정욱은 공구함에서 프렌치를 꺼내어 숙련공처럼 아주 익숙한 솜씨로 보일러 파이프의 밸브 소켓을 모두 조였다. 물이 멈췄다.
어떻게 그렇게 작업을 잘 하느냐고 묻자, 자기의 하는 일이 전기수리와 자잘한 기계수리라고 했다.
“그럼 미리 좀 조여주시지요? 며칠이나 된 것 같은데 어떻게 이대로 가만 두었어요? 바로 아래 403호에 전등이 깜박거린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요?”
“모든 게 귀찮아서….” 처연한 음성으로 답했다.
“예?"
“인생살이가 너무 서러워서….”
주인 김씨가 비탄에 빠진 입주자 최정욱의 얼굴을 보며,
“너무 서럽다고요” 하자, 최정욱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인생살이가 너무 서러워요.” 울먹이는 음성으로 말했다.
주인 김씨가 고맙다고 하자 그는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 미안하다며, 이사는 내일 당장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곤 덧붙여 내일 계산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다음날 김씨가 통화를 했더니 최정욱은 부동산에서 알아보았다며 보증금에서 일할 정도 제하고 보증금을 돌려주면 될 것 같다며 계산을 하자고 했다. 전기 가스비 수도료는 이미 지불했다고 했다.
김씨가 방으로 올라가자, 여기 있는 이불과 세간은 모두 두고 간다고 했다. 김씨가 아주 새것들인데? 하고 놀라자, 다 버리고 간다고 했다. 정욱은 사무적인 말을 다하고는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가만 앉아 있었다.
김씨는 새 입주자를 넣으려면 복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복비만 제하고 보증금은 다 돌려주었다. 정욱은 눈이 둥그레져서, 아니 세입자가 들어오려면 복비도 복비지만 한 달은 걸릴 텐데 그래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주인 김씨는 우린 먹고 사는 것은 괜찮으니 걱정 말라며 최정욱 씨의 슬픈 얼굴이 걱정된다고 했다.
“인생살이가 너무 서러워서 그래요.”
정욱은 입을 다시며 더듬거리는 말투로 들릴 듯 말듯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김씨는 ‘너무 서러워서’란 말을 입속으로 되뇌면서 가슴이 찡함을 느꼈다.
한낮 최정욱이 낡은 승용차에 짐을 싣고 있는데 김씨는 악수를 청하면서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좀 먼 곳에 갑니다.”
주인 김씨는 갑자기 최정욱을 똑 바로 바라보았다.
“내 보기엔 둘이 잘 어울리는데, 바로 그 여자 집에 들어가는 게 어떨까요?”
정욱이가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짓더니
“사장님! 방금 뭐라 하셨지요?” 하고 물었다.
“다른 곳에 갈 게 아니라 그 여자 집에 바로 쳐들어가라고 했소.”
잠시 후 정욱은 엔진을 걸고는 목례를 하고 차를 몰고 나갔다.
주인 김씨가 정욱을 보내놓고, 자기가 왜 남의 일에 그렇게 적극적인 말을 했었나 생각해 보았다.
-지금의 아내를 친구의 소개로 몇 번 만나게 되었을 때 여자 쪽에서 자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몇 번이나 만나자고 해도 거절당했다. 딱 한 번만 만나 달라고 간청하여 겨우 만나게 되었는데 사생결단의 마음으로 여자를 모텔로 데려가 하루 밤을 자버린 후 결혼한 옛 추억이 잠재해 있었던 탓이라 여겨졌다.
“당신! 왜 그런 바보짓을 해요? 세입자가 들어오려면 한두 달은 걸리는데 관례대로 최소한 100만원은 제하고 주어야지요.”
김씨 부인이 남편을 보고 톡 쏘듯이 말했다.
“당신 말이 맞다만 그 사람이 너무 불쌍해서.”
“불쌍해서? 동정심 많으면 장사 못 해요.”
김씨 부부는 점검과 청소를 하기 위해 503호실로 들어갔다. 부인은
“세상에 이렇게 예쁜 꽃 이불하며 베개하며 깨끗한 그릇을 다 두고 가다니?” 하고 놀랐다.
한참 후 “여기 말짱한 세간들은 여자가 마련한 것들인 것 같네요. 꽃 이불하고 예쁜 그릇하고 주방 기구하고…. 여자가 싫다하여 도망가 버린 모양이네요. 지난 가을에는 출근할 때 서로 손을 흔들어주고 주말이면 늘 붙어 다니더니…. 혼인신고를 하고 애를 낳아야 진정한 부부가 되는 거요.” 하고 남편을 바라봤다.
김씨는 그 날 황혼녘 꽃 이불과 그릇을 챙겨 옥상 창고에다 보관했다. 세입자 최정욱이 절룩거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눈앞에 선연했다.
-착실한 청년, 제발 행복하기를.
일층으로 내려와 아내에게 이불과 그릇을 옥상 창고에 챙겨두었다고 하자 “당신은 정말 순정파이네요.” 했다. “그것 버리려니 내 마음이 아파요. 그건 나중 버려도 되니까.” 김씨가 말했다.
그 다음날 아침을 먹으면서 김씨는 부인에게 최정욱 그 사람 벌이가 신통찮아 여자가 가버린 것 같다고 했다.
“남자보다 여자는 영악해요. 같이 살면 평생 고생일 것 같아 여자가 도망간 거예요. 세상이 온통 돈 세상인데 돈 앞에는 인정도 정의도 없어요.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돈 앞에는 맥을 못 쓰지 않아요? 요즈음 젊은이들 결혼하지 않고 결혼해도 아이 안 낳으려는 것은 모두가 돈 때문이에요. 돈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세상이 아닌가요? 당신 제발 쓸데없는 동정심 그것 좀 버리세요.”
주인 김씨는, 혼자서 옥상으로 올라가면서 503호에 일 년 반을 살다가 떠난 최정욱의 울적하고 넋 빠진 얼굴을 떠올렸다. 돈 때문에 가난 때문에 마음에 드는 여인을 놓쳐 버린 한 남자의 허망과 허탈. 그가 말하던 “인생살이가 너무 서러워서”란 말을 다시 생각하자 가슴이 멍해졌다.
최정욱이 떠난 지 3년 되는 봄, 화단의 살구꽃이 피기 시작한 날 승용차 한 대가 <무지개> 연립주택의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차에서 내려 주인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저 503호에 거주했던 최정욱입니다.”
“아, 최정욱 씨!”
김씨는 최정욱의 손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정말 반갑네요. 전보다 얼굴이 훤하시고. 그저께 2,3층에 빈방이 있느냐고 전화한 분이 바로 최정욱 씨였네요. 좀 들었던 음성 같았어요.” 하고 반겼다.
“옛정을 잊지 못해 다시 왔습니다.”
“그런데 그간 어디서 지냈어요?”
최정욱은 분숙이와 다른 도시로 가서 전업사를 차려 이태동안 돈을 좀 모았다고 했다. 그리곤 마침 이 근처에 전업사를 하나 인수하게 되었다고 했다.
“어쨌든 반갑습니다. 305호가 어제 방을 비웠습니다.”
조금 후 여자가 아이를 안고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린 여자는 바로 참하게 생긴 그 여자였다. 아이는 생글생글 웃었다. 돌이 갓 지난 것 같았다. 최정욱은 아이를 보듬어 안았다.
“내 아내에요. 우리 아들 진수이고요.” 밝은 음성으로 말하며 웃었다.
김씨는 흐뭇했다. 잠시나마 자기가 손주를 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김씨는 정욱이 입주할 방 305호에 들어가 청소를 한 번 더 해주었다.
그 이튿날 최정욱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시장을 가려고 나오자 주인 김씨가 박스를 들고 나타났다.
“외출 하는가 봐요?”
“예, 시장에 가서 세간을 몇 개 사려고 나가는 길입니다.”
“이거 맡겨 두었던 겁니다.”
“예! 무엇인데요? 그릇이네요.”
“이건 3년 전 것입니다.”
곧 뒤를 이어 주인 김씨의 부인이 이불보퉁이를 들고 다가왔다.
“이건 이불이고요.”
“세상에 그걸 보관해 두셨습니까?!”
최정욱 부부는 허리 숙여, “정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최정욱 부부는 살구꽃처럼 밝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
첫댓글 이 작품은 kbs 라디오 문학관에 선정되어 2020년 4월 19일 부터 방영되었습니다.
나의 고향은 살구꽃이 많은 마을로 알려져 일명 행촌이라고도 합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1978년 오영수 선생을 (울산 웅상 곡천)에서 뵈었을 때 "그 마을엔 살구꽃이 많이 피었지." "무거운 배를 왜 사왔어? 언양 미나리나 한 단 안 사오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