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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6월 15일 토요일
[(녹)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엘리야 예언자가 밭을 갈던 엘리사에게 자기 겉옷을 걸쳐 주자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나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며,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엘리사는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섰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9,19-21
그 무렵 엘리야는 산에서 내려와 19 길을 가다가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
열두 번째 겨릿소는 그 자신이 부리고 있었다.
그때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20 그러자 엘리사는 소를 그냥 두고 엘리야에게 달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하였다.
“다녀오너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
21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5,33-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라는 율법을 “맹세하지 마라.”라는 가르침으로 확장하십니다. 맹세 자체를 금지하시면서 거짓 맹세를 못하게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맹세는 자신이 진실함을 보증하려고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부족한지 안다면, 맹세 행위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느님을 욕되게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누구도 어떤 진리에 대해서 하느님을 걸고 맹세할 만큼 확신할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한 말에 오류가 있다면, 내가 한 맹세는 내 의도와 상관없이 하느님을 욕되게 합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에 대해서도 맹세해서는 안 됩니다. 약속을 지키겠다는 다짐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나약하고 간사한지 기억한다면, 내일의 일에 대해서 그렇게 쉽게 맹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26,34-35)라고 맹세합니다.
이 무책임한 맹세는 거짓 맹세로 바뀝니다.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마르 14,71). 맹세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입니다. 반대로 맹세를 하지 않는 것은 인간이 세상에 어떤 것도, 자기 자신까지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없음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달려 있음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맹세 대신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단순하게 대답하며 모든 것을 주님 손에 맡겨야 하겠습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불신 사회에서 성행하는 어법, 맹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맹세 비슷한 용어가 있습니다. 공약입니다.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이 어떤 사업이나 일에 대해 백성들 앞에 실행할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선거 때만 되면, 유권자들은 ‘혹시나?’ 하고 후보자들의 공약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당선이 되고 나면 ‘역시나!’하고 실망합니다.
맹세는 대체로 불신 사회에서 성행하는 어법입니다. 누군가가 말을 하면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의 말을 제발 믿어달라는 의도에서 맹세를 내세웠습니다.
유다인들은 맹세를 즐겼는데, 맹세를 할 때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구속력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대신 성전의 금촛대, 금속판, 금화나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유효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신들이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많은 사이비 지도자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한 신앙인,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맹세’라는 극단적인 도구의 통용보다는, 상호 간에 오고 가는 신뢰와 우애, 나눔과 소통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돌아보니 지키지도 못할 실없는 약속들을 참 많이 남발했습니다. 차라리 아무 말 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습관처럼 빈말을 되풀이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실수 없을 것입니다.” “언제 식사 한번 하시죠!” “조만간 전화 한번 할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맹세합니다. 다시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주님,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을 것입니다.”
선거 때만 되면 남발하는 정치인들의 선심 공약, 빈말, 거짓 맹세, 탓할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도 말과 관련해서 오늘날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었던가 봅니다. 무엇보다도 당시 말들이 많았던가 봅니다. 기도할 때도 깊은 침묵 기도보다는 주저리주저리, 횡설수설, 이것저것 다 갖다 붙였던가 봅니다.
뿐만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강하게 금지되어 있었기에, 하늘이나 땅, 예루살렘, 심지어 괜히 아무 잘못도 없는 자신의 머리를 두고까지 맹세하곤 했나 봅니다. 허언(虛言)을 남발하는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쌍날칼보다 더 날카롭습니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맹세와 관련해서 정확한 한 가지 지침을 내려주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말을 할때는 복잡하게 늘어놓지 말고 간단하고 단순하게 말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잔머리를 굴리지마라고 당부하십니다. 언어 사용에 있어서 솔직해지라고 하십니다. 덧붙이지도 빼지도 말고 마음속에 있는 언어, 그대로를 표현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사실 내면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누군가에게 표현하기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이 좋은 느낌, 사랑의 감정이라면 모르겠지만, 부정적인 내용이라든지, 상대방이 들었을 때, 기분 상할 것이라면, 얼마나 또 망설여지는지요?
정직하고 진솔한 언어 사용이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무한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말하는 대상을 향한 기도와 정중한 마음가짐도 중요합니다. 그를 아예 무시한다거나, 깔보는 상태에서는, 그 어떤 조언도 무용지물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상대방을 향한 솔직한 언어 사용이지만, 상대방의 성장과 선익을 간절히 위한다면, 상대방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면,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그 어려운 직언(直言), 고언(苦言), 충언(忠言)도 가능하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사제서품을 받으면 성사적으로 사제는 미사를 집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적으로는 교구로부터 권한을 위임 받아야 합니다. 저는 1991년 사제서품을 받은 후에 교구장님으로부터 ‘전국공용 교구사제 특별권한’을 받았습니다. 교회법 규정에 따라 교구장이 아닌 사제는 신자사목에 있어 교구장으로부터 위임 또는 허락을 받아야만 유효하고 합법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사항들이 있는데 교구사제 특별권한이란 교구장이 특정 사항에 관한 자기의 직권 중 일부를 자기 소속사제들에게 관례적으로 위임하거나 허락할 수도 있는 권한입니다. 한국과 같은 1일 생활권에서는 비록 소속 교구가 다를지라도 해당 교구의 교구장에게 권한을 위임받지 않고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2005년 캐나다 토론토에 연수 갔을 때입니다. 저는 토론토 교구로부터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허락(Faculty)을 받았습니다. 교구로부터 허락을 받은 후에 저는 토론토 예수성심 성당에서 주일 미사를 집전할 수 있었습니다.
2019년 뉴욕 브루클린 교구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브루클린 교구로부터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 뒤로 브루클린 한인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할 수 있었습니다. 2024년 텍사스 댈러스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제가 신청하지 않았지만 서울 대교구와 댈러스 교구의 협의에 따라서 댈러스 교구로부터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지난 4월 26일에 저는 포트워스 교구에 속한 성당에서 혼배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저는 미사를 집전하기 전에 먼저 포트워스 교구로부터 혼인미사를 집전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사제가 성사를 집전 할 수 있는 것은 사제 본인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소속된 교구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운전면허증도 비슷합니다. 저는 뉴욕의 운전면허증이 있지만 댈러스로 주소를 옮기면서 텍사스 운전면허증으로 바꾸었습니다. 텍사스 주는 주소를 옮기면 반드시 운전면허증을 바꾸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복음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특별교육을 하십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율법과 계명의 근본정신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눈이 잘못하면 눈을 뽑아 버리고, 손이 잘못하면 손을 잘라 버리고, 발이 잘못하면 발을 잘라 버릴 정도로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만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율법과 계명은 행위로 인해서 지키는지, 지키지 못하는지 판별되지만, 예수님께서는 행위 이전에 생각과 마음만으로도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못하는지 판별된다고 하십니다. 율법을 어기겠다는 생각만으로도 이미 율법을 어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강론자는 자신이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께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언제나 그분의 사랑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마주하면서 강론자는 자신의 삶이 그 아름다움에 대한 충분한 찬미가 되지 못한다고 자주 느껴서 그토록 위대한 사랑에 더욱 충실하게 응답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열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에 와 닿지 못하게 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반성하도록 이끌지 못한다면, 그 말씀이 자신에게 권고가 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자신을 흔들어 놓지 않는다면, 그 말씀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히 거짓 예언자, 사기꾼, 협잡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151항)”
교황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오늘 복음 묵상을 하니 명확하게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것이 제자의 길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자기 뜻을 먼저 찾으려는 것은 사기꾼의 행위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삶의 엉킨 실타래가 조금씩 풀려나기를 기원합니다.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예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
나는
이렇습니다
굳이
말할 까닭 없는
이런 나
나는
하겠습니다
굳이
말할 까닭 없는
하는 나
나는
되겠습니다
굳이
말할 까닭 없는
되는 나
오늘의 성인
성녀 제르마나 쿠쟁(Germaine Cousin)
신분 : 동정녀, 목동
활동지역 : 피브락(Pibrac)
활동연도 : 1579-1601년
같은이름 : 게르마나, 게르마네, 제르마네
성녀 게르마나 쿠쟁(Germana Cousin, 또는 제르마나)은 프랑스 툴루즈(Toulouse) 교외 어느 마을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병약한데다가 연주창(連珠瘡)까지 걸렸으며 손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래서 집안에서만 지냈고 계모의 구박이 심한 처지에서 자라났다. 그녀는 음식 찌꺼기나 얻어먹으며 벽장이나 외양간에서 잠을 잤으며 아홉 살부터는 매일같이 양을 치러 다녔다.
이웃 사람들은 모두 그녀의 열심을 비웃으며 ‘완고한 미신장이’로 불렀다. 게르마나는 이 모든 것을 선의로 받아 들였고, 누구에게나 항상 도움을 베풀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 착한 소녀였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그녀를 다르게 보기 시작한 것은 어느 추운 겨울날 그녀가 빵 하나를 걸인에게 주었다고 계모로부터 심한 꾸중을 받을 때부터였다. 그때 게르마나가 자기 앞치마를 펼치자 봄꽃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 얼마 후 그녀는 계단 아래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1644년부터 그녀의 무덤에서는 수많은 치유 기적이 일어났고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그녀는 1867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모데스토 (Modestus)
활동년도 : +300년경
신분 : 순교자
지역
같은 이름 : 모데스또, 모데스뚜스, 모데스투스
어떤 전승에 의하면 성 비투스(Vitus)는 시칠리아(Sicilia)의 어느 원로원 의원의 외아들로서 12세 때에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였다. 그의 개종과 기적들이 시칠리아의 총독 발레리아누스에게까지 알려지자, 총독은 그를 불러 신앙을 포기하도록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성 비투스와 그의 가정교사이던 성 모데스투스(또는 모데스토) 그리고 종이던 성녀 크레스켄티아(Crescentia)가 루카니아로, 그 다음에는 로마(Roma)로 끌려갔다. 성 비투스는 로마에서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아들을 악령에서 구해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우상에게 희생 바치기를 거절한 비투스에 대하여 마술로 속인다는 죄명으로 갖가지 고문을 하였다. 그러던 중 알지 못하는 어떤 힘에 의하여 신전이 무너졌을 때, 한 천사가 그들을 구하여 루카니아로 데려갔고 그들은 여기서 운명하였다.
성 비투스에 대한 공경은 특히 독일에서 활발하고, 그의 유해는 작센(Sachsen)으로 이장되었다. 또한 그는 간질병자의 수호성인인데, 성 비투스의 춤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한다. 성 비투스는 폭풍우의 수호성인이다.
성 비토 (Vitus)
활동년도 : +300년경
신분 :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비또, 비뚜스, 비투스
어떤 전승에 의하면 성 비투스(또는 비토)는 시칠리아(Sicilia)의 어느 원로원의 외아들로서 12세 때에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였다. 그의 개종과 기적들이 시칠리아의 총독 발레리아누스에게까지 알려지자, 총독은 그를 불러 신앙을 포기토록 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성 비투스와 그의 가정교사이던 성 모데스투스(Modestus) 그리고 종이던 성녀 크레스켄티아(Crescentia)가 루카니아로, 그 다음에는 로마(Roma)로 끌려갔다. 성 비투스는 로마에서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아들을 악령에서 구해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우상에게 희생 바치기를 거절한 비투스에 대하여 마술로 속인다는 죄명으로 갖가지 고문을 하였다. 그러던 중 알지 못하는 어떤 힘에 의하여 신전이 무너졌을 때, 한 천사가 그들을 구하여 루카니아로 데려갔고 그들은 여기서 운명하였다.
성 비투스 공경은 특히 독일에서 활발하고, 그의 유해는 작센(Sachsen)으로 이장되었다. 또한 그는 간질병자의 수호성인인데, 성 비투스의 춤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한다. 성 비투스는 폭풍우의 수호성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