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구분법에 의하면 역사서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교의 구분법에 따르면 성문서에 포함된 책입니다. 성문서는 율법서와 예언서보다 늦게 쓰여졌고 정경으로 인정받은 시기도 늦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마태복음 몇 군데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5장 17절입니다.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다음은 7장 12절을 보겠습니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마지막으로 22장 37~40절을 보겠습니다.
3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40 이 두 계명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뜻이 달려 있다."
모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인데, 이 본문들에서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자’ 라는 말씀을 반복해서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성서의 가르침을 부정한다는 항간의 소문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 나는 성서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성서의 참 뜻을 모르고, 그 의미를 모르고, 문자 자체에 매여 있기에, 내가 그 참뜻, 그 속뜻을 드러내는 것이지, 성서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성서의 중심 가르침이 바로 경천애인,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성서라면 당연히 구약성서겠지요. 그런데 유대교의 구분법에 의하면, 구약성서는 율법서와 예언서, 성문서,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에 율법서와 예언서는 이미 성서로,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성문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성문서가 구약성서 안에 완전히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성서로서의 권위를 확고하게 인정받은 것은 서기 90년입니다. 그해에 유대교 랍비들이 얌니야라는 곳에 모여서 회의를 열고 오늘날의 구약성서 39권을 정경으로 결정했습니다. 기독교는 서기 397년에 열린 카르타고 회의에서, 이 구약성서 39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신약성서 27권을 채택해서 66권을 정경으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기독교의 구분법과 유대교 랍비들의 구분법은 어떻게 다른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우선 모세오경을 율법서로 구분하는 건 기독교와 유대교가 같고, 그 다음부터는 달라집니다.
기독교는 여호수아부터 역대기까지 12권을 역사서로 봅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이 12권 중에서, 룻기와 역대기 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는 모두 성문서로 구분합니다. 그러면 여호수아와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 이렇게 여섯권이 남는데, 유대교는 상하를 구분하지 않고 한 권으로 보기 때문에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 이렇게 네 권을 전기예언서로 구분합니다.
전기예언서가 있으니까 후기예언서도 있겠지요. 후기예언서도 크게 네 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12소선지서, 이렇게 네 권입니다. 12소선지서에는,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이렇게 기독교에서는 각 권으로 분류된 12권이 유대교의 구분법에서는 한 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문서로 구분된 책들은, 시편, 잠언, 욥기, 전도서, 아가, 룻기, 예레미야 애가,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 상하, 다니엘, 이렇게 우리 기독교성서의 13권이 포함됩니다. 그런데 성문서가 우리 기독교의 구분법으로는 13권이지만 이것도 유대교의 구분법으로는 11권이 됩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한 권으로 되어 있고, 역대기도 상하로 나누지 않고 한 권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율법서, 그러니까 모세오경은 유대교와 기독교가 모두 5권으로 똑같지만, 기독교는 역사서 12권, 시가서 5권, 예언서 17권으로 모두 39권이 되고, 유대교는 율법서 5권, 예언서 8권, 성문서 11권으로 24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분법이 다르니까 편성도 달라져서, 유대교에서는 성문서인 룻기와 역대기, 그리고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가, 기독교의 역사서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왜 기독교는 유대교 랍비들이 정한 구약성서를 그대로 받아들였으면서 구분법은 달리 했을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좀 복잡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유대교 랍비들이 얌니야 회의에서 구약성서를 24권으로 결정한 것이 서기 90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300년 전, 그러니까 서기전 2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살던 유대 지식인들이, 흩어져 있던 구약의 문서들을 헬라어로 번역해서 구약성서 전집을 만들었습니다. 그 구약성서 번역본을 70인역이라고 합니다.
유대 지식인들은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갔다가 페르시아의 원주민 우호정책으로 그 일부가 고향인 가나안땅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은 이후 새로운 강대국들에 의해 계속 유린당하면서 근처의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특히 알렉산더 대제의 정복전쟁 이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이스라엘 이주민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를 모르고 헬라어만 아는 이민자들의 후손, 디아스포라라고 하는데요. 그들 디아스포라에게 유대교의 정신을 가르치기 위해 구약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미국으로 이민을 간 한국인 후손들, 그러니까 영어는 잘하는데 한국어를 모르는 한인 후손들을 위해서 우리말로 된 중요한 책을 영어로 번역한 것과 같은 상황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70인역의 번역작업에 참여한 사람은 원래는 12지파의 대표 6명씩을 뽑아 72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숫자철학을 중시하는 민족답게 완전수인 7에 강조의 수인 10을 곱한 70이라는 숫자를 채택해서 70인역, 라틴어로 ‘셉투아진타’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그 70인역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구분법과 같이 율법서, 역사서, 시가서, 예언서, 이렇게 넷으로 구분했기 때문에 기독교도 그 구분법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로서는 유대교가 구분한 구분법보다 70인역의 구분법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복음서의 저자들이 인용한 구약성서가 70인역이었습니다. 한 권으로 집대성된 구약성서본이 당시에는 70인역밖에 없었으니까요. 본토에 사는 정통 유대인들, 그러니까 유대교 랍비들은 아직 성문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율법과 선지자들이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약성서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삶을 예언한 구절들을 열심히 찾아내서 인용했습니다. 율법서와 예언서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아직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한 성문서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예언적인 말씀을 열심히 찾아내서 예수님을 구약의 예언을 성취한 분으로 기록에 남겼습니다. 그래서 아직 하나로 통합되어 정리되지 못한 히브리 원본보다 하나의 통합 경전으로 집대성되었을 뿐 아니라 쉬운 헬라어로 되었기에 이미 널리 읽혀지고 있었던 70인역을 인용하는 것은 이래저래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성문서인 룻기가 역사서 안에 들어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다가 구약성서의 구성에 대한 문제까지 길게 설명을 드렸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알고 계시면 좋을 내용이기에 자세히 말씀드렸고, 룻기를 이해하는 데도 꼭 알아야 될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룻기는 성격상 성문서라는 것, 즉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문학작품이라는 것입니다.
룻기의 시대적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그래서 사사기 다음에 넣었습니다. 하지만 룻기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이 책은 포로기 이후, 그러니까 모세오경의 최종 편집이 이미 완성된 후에 쓰여졌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