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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한국문인협회 주관
‘월간문학’ 신인상 공모 당선작(2005년)
정말 예기치 않은 일로 집 관리인으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캐나다에서 동양인이 집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이미 경험했던 터라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백인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North 밴쿠버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예고 없이 집 관리인이 방문하여 다짜고짜 뒤 정원을 보자고 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던 우리에게"당장 저 민들레를 뿌리 채 제거하고, 정원관리를 주기적으로 하라"는 것이었다. 만약 한 번 더 주위에서 신고를 하면 그 때는 집을 나가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집을 계약할 때 정원도 잘 가꾸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는지 조차 몰랐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고 하는 게 더 옳을 것이다. 우리에게 집을 세 주기로 결정됐다는 소리에 관리인이 싸인 하라는 계약서를 그냥 훑어보곤 서둘러 서명을 하고 말았으니. 영어로 된 계약서를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집을 얻기까지 심사과정이 너무나 까다로웠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땅에 정착하기란 쉽지 않았다. 개학이 지난 며칠 후 갑작스럽게 아이들의 유학비자가 나와 아무런 준비 없이 이곳으로 와 어렵게 방 2칸짜리 지하를 얻었다. 중학생 딸과 아들이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우린 거실 겸 부엌에서 6개월을 살아야 했다. 계약기간이 최소한 6개월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형편이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하루 종일 집을 찾는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렵게 단독주택을 찾아 연락을 하자 지금 살고 있는 주소와 연락처를 주면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며칠 후 집으로 찾아온 관리인은 준비해온 신청서를 내밀며 빠짐없이 작성해 달라고 요구했다. 직업, 월수입, 재산규모, 가족관계, 좋아하는 동물, 부재 시 연락 가능한 친구 등등, 이민절차도 인터뷰 한 번 없이 쉽게 통과하였는데, 집을 얻는데 이런 관문이 필요 한가 라는 생각에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현재 그 집을 얻겠다고 다섯 사람이 신청을 해 둔 상태라는 소리에 금방 주눅이 들고 말았다.
어쨌든, 까다로운 절차를 통과한 우리는 운 좋게도 이사를 했다. 앞 뒤 정원이 넓고, 청설모와 새 소리가 끊이지 않아 전원주택지에 들어선 듯 착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옆집의 아름다운 정원에 입이 딱 벌어진 우린 이삿짐을 정리하기도 전에 동네를 구경하기에 바빴고, 선택을 잘 한 것이라고 스스로 기뻐하며 자축하고 있었다. 좋은 동네일 수록 집 관리를 잘 해야 하고, 정원이나 집 주변에 늘 꽃으로 치장을 해야 하는 공공의 의무임을 알기에는 오래지 않아서였다. 그건 예상 밖이었다. 꽃이 시들기 전에 화분을 집 모퉁이와 현관 등에 심고, 걸어놓기 위해 주기적으로 준비하는 지출금액이 그만큼 늘어남도 그렇지만 일주일이 멀다 하게 깎아야 하는 잔디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우리 옆집에 있었다. 정년을 한 부부는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정원을 가꾸고 있었는데, 그 집이 시청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정원으로 뽑혀 수시로 견학을 오거나 시에서 지정한 날은 수백 명의 관람객들이 투어를 오곤 했다. 우리가 세들은 집은 지금껏 세만 준 탓에 동네에서 가장 낡고 정원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게 옆집에서는 큰 불만이자 신경 쓰이는 문제였음을 이사 온 후에 알 수 있었다. 그런 동네 분위기를 전혀 알지 못한 우린 백인들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일들을 꾸미고 있었으니 그것도 문화적 차이일까 아님 그들에게 바보처럼 비쳐졌을 행위였을까.
“와 민들레다 -만병통치약”
2층에서 이삿짐을 정리하다 말고 딸아이가 소리쳤다. "와 민들레다" 우린 뒤 정원 담벼락에 군락을 이루어 막 꽃망울을 피우고 있는 민들레 무리들을 보며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엄마 이젠 민들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치?" 아들 샘은 지난 시간들의 민들레에 대한 기억을 들춰내며 좋아라했다. 내가 나고 자라는 동안 가장 친숙한 꽃이 민들레기도 하지만 그들은 우리 가정에 없어서는 안 될 만병통치약이었다. 엄마는 심한 가슴앓이와 소화 장애가 있었는데, 칠순이 지나면서 정도가 심했다. 양약으로도 별 효과가 없자 어머니는 옛날 처방을 다시 원했다. 민들레와 함께 감자나 무로 즙을 내 종종 마시곤 했는데, 감쪽같이 효과가 좋았다. 약 효과도 어느 정도 있을 수 있겠지만 당신의 질곡한 삶을 함께 한 그 어떤 샤머니즘적 믿음에서 오는 위안이 더 크게 작용했을지 모른다.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날이었다. 잠자리에서 어머니는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며 심한 통증을 느끼더니 마비가 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작은 형은 텃밭에 심어 놓은 민들레를 캐와 무와 함께 즙을 내 어머니를 마시게 했다. 그리고 등을 때리고 마사지를 해 드리자 한숨을 크게 내신 어머니는 감쪽같이 좋아지셨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형은 약초를 캐러 가자고 서둘렀다. 아직 잔설이 남아 있는 이른 봄 작은 형과 난 약초를 찾으러 들로 산으로 얼마나 뛰어 다녔는지 모른다. 형은 이제 겨우 잎이 올라오는 민들레와 엉겅퀴를 잘도 찾아냈다. 어머니의 지시대로 몇 가지 식물을 혼합해 즙을 내 어머니는 몇 번 마시더니 한동안 별 탈이 없으셨다. 엄마는 어떻게 그런 것들이 약이 되는지 알고 있는 게 참 신기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민들레는 어머니의 특별한 민간요법의 대명사가 되었고 믿음에 대한 애착이 유달랐다. 결국은 아내도 위장장애와 얼굴에 늘어난 검버섯을 제거하는데 특효가 있다는 어머니의 권유에 그 고약한 민들레 즙을 거부하지 않았던 터였으니.
막내 며느리인 아내의 권유로 어머니를 오래 모시고 살았다. 주말이면 민들레를 찾아 온 가족이 길을 나섰다. 미사리 방면이나 소래 포구 염전 근처, 때론 나들이 겸 평택 들녘으로 원정을 가기도 했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린 날은 아이들도 여간 고생이 심하지 않았다. 꽃이 핀 민들레는 그리도 눈에 잘 띄었지만 봉우리를 맺기 전 민들레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제주도 특산 식물인 좀 민들레가 으뜸이다. 땅에 납작하게 붙어 색깔 곱게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은 아직도 빛이 바래지 않은 내 소년의 꿈 그 색채 그대로였다. 우리가족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노란빛 기억들을 떠 올리며 아들 녀석은 민들레를 보자 탄성을 지른 것이다. 뒤 정원 담벼락 주위에 무리 지어 피어나는 민들레는 장관이었다. 키 큰 무리들이 꽃망울을 터트리면 줄지어 키 작은 것들은 차례로 개화한다.
4월이면 튤립을 시작으로 온 동네가 꽃 속에 묻혀 있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정원을 가꾸어 꽃으로 장식한 동네는 화려함의 절정을 이루는 하나의 축제였다. 그 화려함 속에서도 민들레는 그다지 요란하지도 특별히 드러내지 않은 채 묵묵히 그들만의 삶을 엮는다. 생태계가 어쩜 저렇게 우리나라의 민들레와 같을 수 있을까 감탄하며 바라볼 때마다 마음은 어느 듯 내 고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 냄새와 그리움의 대상이 되어 주었다. 한국 음식을 먹고, 우리말을 하고, 이웃들을 그리워하며 철저한 한국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잔디를 깎으면서도 그들의 영역은 손을 대지 않은 채 내버려 두었다. 가끔씩 녹차 찌꺼기를 거름 주었더니 주변은 금시 그들만의 온전한 영토가 되어 있었다. 그 어떤 침입자도 허용치 않겠다는 비장함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마치 하나 둘씩 모여들어 어느 새 한인 타운을 만들어 가는 우리 동포들의 모습처럼. 한 무리가 꽃망울을 터뜨리면 앞서 핀 무리들은 머리에 솜덩이를 가득 인 채 또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서두르고 있는 그들의 질서는 어느 꽃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집 관리인이 다녀간 후에야 알았다. 이 곳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식물이 민들레라는 것을, 잠시만 소홀히 하면 재빠르게 정원 잔디를 침식해 버리는가 하면 제초제를 뿌려도 좀처럼 죽지 않아 민들레만 죽이는 약이 따로 있다는 것도 그 때서야 알았다. 그런 것도 모른 체, 뒤 정원에 민들레 동산을 만들어 놓았으니 그들이 기겁을 하고도 남았으리라.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인조잔디를 깔아 놓은 듯 잡티 하나 없이 잘 정돈 된 정원을 볼 수 있다. 너무 정갈하다 보니 인위적인 느낌이 들어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경쟁하듯 그들을 그렇게 가꾸고 있다. 자연을 무엇보다 사랑하고 아낀다는 이 곳 사람들은 어떤 형식적인 것에 더 취중하고 보여주기 위해 동네를 가꾸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느 꽃무리에 비교해도 뒤 떨어지지 않은 민들레의 순박한 참 모습을 그들은 정녕 알 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민들레 그들은 한적한 곳이나 사람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도로주변이나 언덕배기에 모여 산다.
이곳은 이웃집 정원 잔디가 너무 길거나 더러워지면 시청에 신고를 한다. 그러면 시청에서 일단 정원을 깎고 다음에 청구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함에도 관리인에게만 귀띔을 한 옆집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아침이면 집 앞을 쓸고, 앞 정원관리를 소홀함 없이 한 탓에 우리 가족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나 싶다. 집관리인으로부터 이미 경고를 받은 터라 그것들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고... 우린 금시 우울해 지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쩜, 우리 이민자들의 삶 또한 민들레와 흡사하지 않을까. 캐나다사람들은 친절하고 인종차별이 없다고 하지만 온전한 백인이 아니면 한 단계 내려 보고 있음을 간간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로 늘어나는 동양인들이 그들의 영역에 소리 없이 침범해 깊이 뿌리 내리고, 빠르게 우리들만의 영역을 만들어 버린다. 또한 적잖은 문화적 이질감으로 충돌이 잦다. 지금도 공동주택에서 된장찌개를 끓이다 신고를 당해 곤경에 빠진 일들이 한 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초기 한국 이민자들의 삶은 난민의 처지나 다를 바 없었다. 가난이 똑 같았던 시절 비행기 표만 겨우 준비해 찾아 온 낮 선 땅에서 정착하기란 민들레 그들과 무엇이 다를 수 있었을까. 온갖 견제와 한 단계 낮추어 보는 백인 사회에서 그들 속으로 들어가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아니 그들과 섞일 능력이 없었다. 결국 그들이 찾아 간 곳은 우선 집값이 가장 싸고, 차별이 덜한 변두리 가난한 동네에 둥지를 틀 수 밖에 없었다. 숨죽이며 굳은 일 도맡아 밤낮없이 살아 온 지난날들이었다. 아무리 척박한 땅에서도 좀처럼 시들지 않고 끈질긴 삶을 살아 낸 민들레의 자화상일지 모른다.
민들레는 아홉 가지 덕을 지니고 있다. 특히 그 중 세 가지 덕이 가슴에 와 닿는다. 강덕(堈德)- 아무리 짓밟히거나 뿌리를 다쳐도 다시 살아날 정도로 역경을 이겨낸다. 예덕(禮德)- 한꺼번에 피지 않고 한 꽃대가 피었다가 지기를 기다리면서 다시 피어나 차례를 지킨다. 정덕(情德)- 꽃에 꿀이 많아 여러 곤충들을 위해 오랫동안 개화하여 희생하다 꿀이 다 마른 후 가야 할 길을 떠난다.
내가 무엇보다 민들레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의 뒤 모습이다. 화려한 꽃일수록 그 마지막은 추하기 짝이 없다. 목련이 그렇고, 장미, 양귀비가 그렇다. 그러함에도 민들레의 뒤 모습은 간결하다 못해 초연하다. 눈꽃 송이처럼 하얗게 홀씨를 모아 또 다른 세계를 찾아 그들만의 영토를 만들기 위해 바람을 기다리는 모습은 참 진리가 아닐 수 없다. 영원한 이방인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는 우리 동포들이 이 땅에서 뿌리를 내리는 모습과 흡사하다. 그들이 어디서 자라는지 찾아보면 만날 수 있으리.
-끝-
【당선작 심사평】
'민들레 홀씨같이 떠도는 이민자의 애환 잘 그려'
응모작으로 심사 위원에게 넘어온 수필은 144편이었다. 이중 선에 올라온 작품이 10편에 다시 재심을 거쳐 5편이 남았다. 자명의 "민들레" 고수환의 "보내는 마음" 정춘자의 "마지막 예복" 김대성의 "밥상 앞에서" 이다. 민들레는 이민 간 캐나다 땅에서 한국 정서로 받아들이는 민들레와 민들레를 싫어하는 캐나다 인과의 갈등을 통해 민들레 홀씨와 같이 떠도는 이민자의 애환을 담았고, 정춘자의 "마지막 예복"은 죽은 친구를 염하면서 삶과 죽음을 생각해보는 글이고, 고수환의 "보내는 마음"은 사랑하는 부인을 떠나보내야 하는 남편의 아픔을, 김대성의 "밥상 앞에서"는 우리의 전통 문화가 사라져가는 아픔을 쓰고 있다.
이중 자명의 "민들레"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이의가 없었다.
수필은 체험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아니고, 체험을 소재로 자신의 의도(주제)를 형상화하는 작업이 따라야 한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도 훌륭한 작품들이었다. 앞으로 분발하여 다음 기회에 등단의 기쁨을 누리기 바란다.
●심사위원: 변해명, 오창익
【당선소감】
내 청년이었을 때, 누구나 한번쯤 방황해 보았을 문학에 대한 막연한 열정의 그 객기는 내게도 예외일수 없었다. 몇 번이었던가? 글 솜씨의 기본도 모르던 내가 신춘문예에 원고를 남발했던 시간들이. 다행히도 나의 그 방황은 길지 않았다. 나는 작가가 되기보다는 좋은 독자가 되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깨달을 수 있었으니... 강산이 두 번도 더 변했을 시간 동안 나는 지극히 평범한 독자였었다. 그러함에도 해마다 신춘문예가 발표 되는 새해아침엔 신문을 구하러 다니는 일은 변함없었다. 서슬이 시퍼렇던 군부독재시절 정보형사들의 감시 속에 문학동인 "날개"를 만들어 문학을 공부하던 그 때 문우들의 이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가슴이 따뜻했던 그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남의 나라 땅에 살아가면서 그리움이 더해지는 인연들은 문학이라는 울타리에서 만났던 그 얼굴들이다.
"자신의 글이 활자화 된다는 것은 옷을 벗고 길거리에 서 있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 이라고 말하던 그 때 선배들의 충고가 비로써 내 현실임을 느낀다. 불혹에 들어서서 제자리를 찾은 화두일까? 준비 없이 덜컥 닻을 올린 망망대해의 나침반 없는 항해는 그저 두렵고 적막하기만 하다. 어쨌든, 항해를 멈추지 않으련다. 본향의 길을 열어 준 월간문학, 그리고 심사위원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당선자 프로필: 자명
월간 "순수문학" 신인상
M&A전문가(기업인수 합병 및 기업평가)
국민의 정부 최연소 국정자문위원(금융부문)
한국투자운용주식회사 대표이사(수석펀드매니저)역임
골든브릿지캐피탈 재무담당 CEO
2003년부터 캐나다와 한국을 오가며 생활
첫댓글 감동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관심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그렇듯 글은 활자화 되면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느끼게 됩니다.
그러함에도 고운 시선으로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한 글 올려주셔서 아껴 읽었습니다.
이민 초기, 누구나 겪었음직한 에피소드를 그야말로 맛갈지게(?) 버무리셔서
새로운 땅과 환경에 뿌리내리고
어찌하였든 기필코 생존을 해내야하는 가장의 마음과,
그 가운데 이방인의 애환과,두고온 고향의 그리움과 어머니에 대한 추억까지도...
마지막 홀씨로 퍼져나가는
잡초보다 강인하고 질긴 민들레를 닮은
우리의 모습을 만나게 되면서
참 위안을 느끼게됩니다.
반갑습니다.
글을 통한 소통은 언제나 봐도 반갑고 그 깊이가 남다릅니다.
늘 수고하시고 헌신으로 좋은 모임을 만들어 가시려는 맘을 보게 됩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고맙습니다. 귀한시간에 흔적을 남겨 주셔서요.
우리가 알고 있는 올바름과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이 얼마나 개인적인 가치의 판단이며 또한 문화의 차이로 올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신 자명 선생님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그 차이를 존중해 주는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네
남겨주신 글에 크게 공감합니다. 서로의 차이를 포용하는 이해...
가장 중요한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름을 이해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배려이며
포용이 아닐까 합니다. 좋은 문구들 새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