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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한국 선종사禪宗史
1. 한국 선종사禪宗史
한국 불교사를 시대적으로 구분하면, 삼국시대 수용보급기, 통일신라시대 교학발전기, 고려시대 선교양종흥융기, 조선시대 쇠퇴기, 그리고 근현대의 개화확산기로 나눈다. (노권용,「석전영호 대종사의 불교사상과 그 유신운동」) 이 시대 구분은 한국 선종사와도 대부분 일치한다. 다만 선종의 전래는 불교의 전래와는 달리 신라 승이 직접 중국에 가서 수선 전등해 왔다는 것이다. 한국 불교역사에 대해서는 잘 정리된 저서나 논문이 많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한국 선종의 특징적인 부분만을 몇 가지 이야기 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1) 선종禪宗의 전래傳來
신라에 최초로 선법禪法을 전한 이는 신라승려 법랑法朗이다. 28대 진덕여왕(647~654)때 당나라에 가서 중국 선종 4조인 도신(四祖道信, 580~651)의 법을 받고 귀국한다. 그의 자세한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제자 신행(信行, 704~779)에게 선법을 전했다는 사실이「희양산지선대사비명曦陽山智詵大師碑銘」에 전한다.
신행 역시 36대 혜공왕惠恭王대인 765년에 중국에 가서 지공志空에게서 신수의 북종선北宗禪을 배우고 귀국한다. 신행은 지리산 단속사斷俗寺에 머물며 선법을 펼쳤으나 크게 전파되지는 못하였다. 신행은 혜공왕 15년(779)에 입적하였다. 지공은 신수의 법을 이은 보적普寂(651~739)의 제자다.
그 이전에도 중국 선종과의 교류는 있었는데, 원효(元曉, 617~686)의『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에 달마의『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신라 왕자인 정중무상(淨衆無相, 684~762)도 입당하여 중국 선종 부흥에 기여하였다. 다만 무상이 귀국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신라는 아직 선종을 받아들일 토양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무상 외에 조안照安, 혜청慧淸, 진각眞覺, 현눌玄訥 등이 입당 귀화한 선승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당시 신라는 정치적으로 호국불교의 성격을 뛰고 있어 수행 여건이 신라보다 당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법랑의 선법과 신행의 북종선 역시 널리 보급되지 못하고 끊어졌으나, 신행의 문하에서 준범遵範이 나오고, 준범은 혜은惠隱에게 법을 전해, 이들을 거쳐 지증智證에 이르러 희양산문曦陽山門을 일으킨다. 이로써 혜공왕 대 선풍이 일기 시작하여 56대 경순왕에 이르는 약 200년간을 한국 선의 황금시대라 할 만하다. 신라 하대는 선종의 시대였던 것이다. (이희익,『선禪과 한국문화재韓國文化財』 p. 130 &『선禪과 과학科學』 pp. 84~85.)
선 도입후 한국 선풍을 대략 산문선山門禪으로 대표되는 신라선풍新羅禪風, 선교화회선禪敎和會禪의 고려선풍高麗禪風, 그리고 조사선祖師禪을 강조한 조선선풍朝鮮禪風 등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2) 구산선문九山禪門
신라의 선을 통상 ‘산문선山門禪’이라고 한다. 중국으로부터 같은 계열의 선법을 받아왔음에도 각기 다른 다양한 산문이 독자적으로 개산입종開山立宗하였기 때문이다.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중국 달마의 선법을 이어받아 산문을 열었으나 그중 그 문풍을 지켜 온 아홉 산문이 있었다. 이들을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고 하는데, 가지산문迦智山門, 실상산문實相山門, 사굴산문闍崛山門, 동리산문桐里山門, 사자산문獅子山門, 성주산문聖住山門, 희양산문曦陽山門, 봉림산문鳳林山門, 수미산문須彌山門 등이다.
신라 출신의 유학승들은 남종선의 거두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들인, 서당지장西堂智藏, 마곡보철麻谷寶徹, 남전보원南泉普願, 장경회휘章敬懷暉, 염관제안鹽官齊安, 대매법상大梅法常 등 선사들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돌아와 구산선문을 열었다. 즉, 가지산문의 개조 도의(道義元寂, ? ~825)와 실상산문의 개조 홍척(洪陟證覺, ?~?)은 서당에게, 성주산문의 무염(無染, 801~888)은 마곡에게, 사굴산문의 개조 범일(梵日, 810~889)은 염관에게, 사자산문의 개조 철감도윤(澈鑒道允, 797~868) 선사는 남전에게, 봉림산문의 개조 현욱(玄昱, 787~868)은 장경에게서 공부하였다.『조당집祖堂集』에는 마조가 신라 수행승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라 말 道義의 迦智山門(821년)에서부터 고려 초 兢讓의 曦陽山門(935년)에 이르기까지 115년에 거쳐 세워진 九山禪門은, 이 땅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선문이자, 현재 우리나라 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원류이다. 신라 후기에 선법을 개산한 각 산문의 개조들은 거의 모두가 다 曹溪 慧能의 법을 이은 南宗禪[祖師禪] 계열의 洪州宗 馬祖 道一(709~788)의 손제자이다. 고려 초에 개산된 須彌山門과 曦陽山門도 이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一指 지음,『100문100답 선불교 강좌편 上』 p. 151.)
그러나 실재 ‘구산선문九山禪門’이란 용어는 고려 시대에나 등장하는데, 신라시대에는 ‘구산九山’이란 용어조차 없었다. 구산선문에 포함되지 않은 많은 선문禪門들이 존재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산선문은 고려 중기까지 살아남은 선문을 말할 뿐으로, 신라가 아닌 고려시대에 개산된 수미산문과 희양산문도 구산선문에 포함되어 있다.(한기두韓基斗,『한국선사상연구韓國禪思想硏究』 pp. 14~15 & 77~78.)
나말여초羅末麗初의 九山門을 우리나라 선종의 기원으로 하는 주장은 학계의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으며, 풍부한 金石文과『景德傳燈錄』,『祖堂集』, 禪宗의『高僧傳』등이 이 이론을 뒷받침하고 있다. 선종이 나말여초에 기원한다는 것에 대하여서는 異論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九山門만이 성립되었다거나 구산문만이 존재하였다고 한다면 많은 불합리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초기 禪宗史에서는 九山이란 용어조차 찾아 볼 수 없으며, 구산이 성립되었다거나 九山門만이 개산되었다는 그 어떤 전거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재일(적멸), 동국대 강사,「曺溪宗名의 淵源에 대한 考察」.)
구산선문의 선사들이 한때는 화엄학의 대가들이었기 때문에, 구산선문의 선종 수용은 화엄불교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다. 중국 선종을 전등해 오기는 하였지만 ‘한국불교의 독특한 가풍 속에서 중국 조사선을 창조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교학불교의 모순과 한계를 자각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겪기는 했지만, 주체적으로 새로운 사조인 중국의 조사선 사상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말여초의 선풍은 조사선을 중심으로 선과 교를 아우르는, 심지어는 선의 여러 가지 다른 가풍들마저도 수용하는, 융화融和 발전한 독특한 특징을 가진다.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조계종사』(서울: 조계종출판사, 2006) pp.131~133.)
초조: 달마;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 도신 ⇒ 법랑 ⇒ 신행 ⇒ 준범 ⇒ 혜은 ⇒ 진감 ⇒ 도헌 지선(지증)(문경 희양산문, 봉암사)
6조 : 혜능(영가 · 청원 · 남악 · 남양 · 하택 등);
7조 : 남악 회양 남대사
청원 행사 ⇒ 석두 ⇒ 약산 ⇒ 운암 ⇒ 동산 ⇒ 운거 도응⇒ 이엄 진철 (수미산문, 해주 광조사)
8조 : 마조 도일 우민사
9조 : 서당 지장 ⇒ (곡성 동리산문, 태안사. 남원 실상산문, 실상사. 장흥 가지산문, 보림사.)
백장 회해
염관 제안 ⇒ 범일 여휘 (강릉 사굴산문, 굴산사)
남전 보원 ⇒ 도윤 철감 (영월 사자산문, 쌍봉사)
장경 회휘 ⇒ 현욱 원감 (창원 봉림산문, 봉림사)
마곡 보철 ⇒ 무염 대낭혜 (보령 성주산문, 성주사)
3) 북산의北山義 남악척南岳陟
신라의 선문은 크게 북산계北山系와 남악계南岳系로 나눈다. 이는「희양산지선대사비명」의 ‘북산의北山義 남악척南岳陟’이란 기록에서 기인하는데,1 북산계를 말하는 ‘북산의’는 설악산 진전사의 도의원적道義元寂 선사를 말하고, 남악계를 말하는 ‘남악척’은 남원 실상사 홍척증각洪陟證覺 국사를 말한다.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조이기도한 도의 선사는, 784년에 당나라에 건너가 강서江西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에서 마조의 제자 서당지장西堂智藏의 법을 받는다. 도의는 무려 35년만인 신라 제41대 헌덕왕憲德王 13년(821)에 귀국하지만, 당시 신라는 왕즉불王卽佛이라는 왕권불교가 성행하고 있어 선을 펼칠 수는 없었다.
배척받는 입장이 되자 장흥 가지산에서 멀리 떨어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쫓겨 가 15년간 나오지 않고 은둔한다. 그의 사상은 세속에서 초탈한 순선純禪 선풍으로 사굴산闍崛山의 범일(梵日, 810~889)과 성주산聖住山의 무염(無染, 799~888) 등으로 이어져 북산계를 형성하였다.
반면 남악계 홍척은 도의와 같이 서당지장의 법을 받고, 신라 제42대 흥덕왕興德王 3년(828)에 돌아온다. 도의보다 5년 늦게 귀국한 홍척은 도의와는 다르게 흥덕왕興德王과 의강宜康태자의 귀의를 받는 등 지배적인 권위를 유지하며 도시 불교적인 성격을 띄었다. 그는 선禪과 교敎의 조화를 추구하였으며, 선을 현실 속에 토착화하려고 노력하여, 그의 사상을 ‘융선融禪’이라고 한다. 홍척은 국사의 호를 받았으며, 신라 최초의 산문인 실상산문을 개창한다. 동리산桐裏山의 도선(道詵, 827~898)과 쌍계산雙溪山의 혜소(慧昭, 774~850) 등으로 이어져 남악계를 형성하였다.
순선과 융선의 두 사상은 후에 우리나라 불교계에 있어 두 개의 큰 흐름으로 발전, 융선 사상은 고려사회에 영향을 끼쳐 선교 쌍립시대를 열었고, 순선 사상은 조선시대 조사선풍으로 이어져 한국 선종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산문을 중심으로 발전한 신라의 산악불교는 고려에 오면 점차 도시불교화 한다. 초기에는 호국신앙이 계승되어 국가의 안녕과 복을 비는 법회가 빈번하게 개최되었고, 외적의 침입을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도 판각되었다.
4) 오교양종五敎兩宗과 조계종曹溪宗
신라와 고려[918-1392]의 초기 선과 교를 통틀어 5교9산五敎九山이라고 한다. 고려 중기에서 조선[1392-1897] 초기에 걸친 중세, 근세 초기 불교 교파를 총칭하여 ‘오교양종五敎兩宗’이라고 부른다. 오교양종 중에 양종은 조계종曹溪宗과 천태종天台宗을 이른다. 오교양종 중에서 양종은 조계종曹溪宗과 천태종天台宗을 이른다.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오교는 고려시대「대각국사묘지명大覺國師墓誌銘」에 보이는 법상종法相宗, 계율종戒律宗, 열반종涅槃宗, 법성종法性宗, 원융종圓融宗으로, 조선시대는『태종실록太宗實錄』에 따라 자은종慈恩宗, 총남종摠南宗, 시흥종始興宗, 중도종中道宗, 화엄종華嚴宗으로 구분하고 있다.
한편 종조宗祖는 법상종과 자은종은 진표(眞表, 8세기), 계율종과 총남종은 자장(慈藏, 7세기), 열반종과 시흥종은 보덕(普德, 7세기), 법상종과 중도종은 원효(元曉, 617~686), 원융종과 화엄종은 의상(義湘, 625~702)이라고 한다.
고려 숙종[1095-1105] 5년(1101) 대각大覺국사 의천(義天, 1055~1101)의 행적을 기록한 개성開城 흥왕사興王寺「대각국사묘지명」에는, 중국의 종파나 고려의 산문을 거론하지 않고 모든 선종을 통틀어 ‘선적종禪寂宗’이라고 칭한다. 당시는 구산선문 역시 선적종으로 같이 총칭하여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의천이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주장하면서 천태종을 개창함에 따라, 선적종이 조계종曹溪宗으로 개칭되면서 ‘천태종’과 ‘조계종’의 두 선종 종파가 생기게 되었다.
고려 초기에는 禪宗의 각 山門派를 보편적으로 禪宗이라고 칭한 것을 볼 수 있고, 선종의 각 산문파를 禪寂宗으로 통칭하였다가 曺溪宗으로 부르게 된 것에 관하여서는 碑를 건립할 당시의 상황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상황이란 혜조담진慧照曇眞, 원응학일圓應學一, 대감탄연大鑑坦然 등으로 이어지는 僧伽와, 이자현李資玄, 권적權適, 윤언이尹彦頤, 문공유文公裕 등 재가거사에 의한 새로운 선불교 운동을 지적할 수 있다. (정재일(적멸), 동국대 강사,「曺溪宗名의 淵源에 대한 考察」. )
종전의 오교와 조계, 천태 두 종을 합하여 오교양종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것인데, 사실 조계종명曺溪宗名은 먼저 승가의 실정을 잘 모르던 재가자在家者와 사대부士大夫들에 의하여 넓게 호칭되다가, 나중에 승정僧政에 의해 일방적으로 승가僧伽의 모든 산문을 총칭總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산문이나 교단이 공식적으로 조계종이라고 칭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오교양종은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 억불정책抑佛政策 또는 배불정책排佛政策에 의해 세종 때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합 정리된다.
5) 의천과 지눌의 선교화회禪敎和會
고려선풍高麗禪風을 한 마디로 ‘선교화회선禪敎和會禪’이라고 하는데, 선과 교가 화회하는 과정은 후삼국을 정신적으로 통일하는 작업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념통일에 부심했던 의천은 송으로부터 천태종을 들여와 송도松都에 국청사國淸寺를 창건하고, 구산선문 중 오산문五山門을 천태종으로 통합한다. 이어 독자적으로 승과를 실시하는 등 산문선의 승려들을 천태종으로 흡수하려 한 것이다. (김영수金映遂,「오교양종에 대하여」『震檀學報』第36號 (『고달사지 발굴 그리고 전시』(여주군 향토사료관 발행) 각주에서 인용).
大覺國師 義天은 天台山의 法燈을 우리나라에 처음 전하여 天台宗을 제창하셨다. 그러므로 거돈사, 신(광)사, 영암사, 고달사, 지곡사 등 다섯 본산의 유명한 學徒들이 王命에 의해 大覺國師 門下에 모여들었고, 그 밖에 곧바로 여러 종파의 유명한 학도들이 3백여 명이나 모였으니 앞의 다섯 문파의 학도들과 합하면 무려 1천 명에 이르렀다……그리하여 앞서 국가의 초창기부터 크게 유행하던 조계종 ․ 화엄종 ․ 유가종과 함께 법식을 나란히 하여 세상에서 四大業이라 일컬었다. 大覺國師 義天이 입적하니, 앞의 다섯 문파는 각각 의지할 본산 절이 있었으나, 오직 義天 門下 제자만이 의지할 곳이 없었다.(「선봉사비음기仙鳳寺碑陰記」) (이영자李永子, 東國大 名譽敎授,「大覺國師 義天 이후의 國淸寺와 法眷考」,)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義天, 1055~1101) 문하에 참여한 7백여 명의 학도學徒들이 오산문의 선승들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초기에는 천태종 개립開立에 대거 참여하였다가, 의천이 입적하자 상당수가 본산으로 되돌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선승들을 무리하게 대거 영입한 천태종의 교세는 의천 입적 후 약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오히려 당시 선승에게 영향을 주어 이번에는 선의 입장에서 선·교 화회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보조국사 지눌(普照知訥, 1158~1210)의 정혜쌍수定慧雙修 사상이 대표적인데,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지금의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은 고려 후기의 선을 크게 부흥시킨다. 특히 지눌의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경절문徑截門 등 삼문三門의 독창적인 선사상은 당시 서로 대립해 있던 선과 교를 서로 융화融和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사람들에게 誦持를 勸할 때는『金剛經』으로 하고, 立法演義는『六祖壇經』을 本意로 하였으며, 李通玄의『華嚴論』과『大慧語錄』을 새의 두 날개처럼 여겼다. 開門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惺寂等持門이요, 圓頓信解門이며, 徑截門이다. 이에 의하여 修行하고 新入하는 者가 많아 禪學의 隆盛함이 近古에 比할 바가 없었다. (최성렬, 조선대「牧牛子 知訥의 看話禪 受容과 그 態度」(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106. 지눌, 1989,『보조전서普照全書』보조사상연구원 얶음.)
보조지눌은 25세인 1182년『법보단경法寶壇經』에 의하여 뜻을 체득하였고, 31세인 1182년 이통현(李通玄, 635~730)의『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에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리고 40세인 1197년에는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의『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고 안목이 열렸다고 한다. 부연하자면 멀리는『육조단경』을 스승으로 삼고 가까이는『대혜어록』으로 벗을 삼아, 조계와 대혜의 심법을 스스로 체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화엄경론』으로부터는 화엄적 깨달음을 얻고 선교일치의 원리를 터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이능화李能和,『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이종익李鐘益,『조계중흥론曹溪中興論』)
지눌이 대혜의 어록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고, 생애 후반부에『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와『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등 강의와 저술을 통하여 간화선을 선양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와『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을 저술하여 화엄적 돈오의 길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선종의 돈오가 화엄의 원돈圓頓과 같다는 것이고, 돈오가 결코 禪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선과 교가 서로 보완하며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선의 관점에서 화엄을 해석하고 또는 화엄의 관점에서 선을 해석함으로써, 교를 선 안으로 포섭’하며 선·교의 갈등을 해소하려 하였던 것이다.(이덕진, 창원대,「간화선의 ‘한국적’ 이해 - 보조 지눌과 진각 혜심을 중심으로 On the Understanding of ‘Korean-style’ Ganhwa Seon: Focussing on Bojo Jinul and Jingak Hyesim」(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p. 266~268.)
그러나 문제는 지눌의 자각의 체험은 모두 교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중국에 가서 선종을 직접 체험하고 수선 전등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예컨대『대혜어록』의 한 구절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에, 화두를 직접 받아 참구하는 간화선 수행을 직접 경험해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지눌의 사상체계가 서로 모순되어 보이기도 하고, 지눌에 대한 평가 또한 제각각인 측면이 있다.
지눌이 간화선을 최초로 국내에 소개하긴 하였지만 그에게 있어서 간화선은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에 들어가는 삼문三門 중의 하나에 속하는 것이었다. 또한 중국에 들어가 명안종사明眼宗師를 만나 화두를 직접 받아 간화선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대혜어록』의 한 구절을 열람하는 기연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간화선사로서의 지눌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상반相反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탈중국적인 한국 간화선을 정착시켰다는 평가와 하택신회荷澤神會와 규봉 종밀의 선禪을 계승한 지해종도知解宗徒라는 평가가 그것이다. (김방룡, 충남대,「한국 근·현대 看話禪師들의 普照禪에 대한 인식 On the Recognition of Bojo’ Seon by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Ganhwa Seon Masters」(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 306.)
그런 측면에서 아예 지눌을 간화선을 처음 소개한 선사라고 보지 말고, 그의 선적 사유체계를 ‘보조선普照禪’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떼어보자는 견해도 있다. 그의 사상체계가 종합적이고 독창적이어서, 중국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은 독자적인 선사상을 가진 선사로 보자는 것이다.
사실 지눌의 제자 혜심이 지눌의 선법을 이었다고는 하지만, 혜심과 지눌의 관계가 수년에 불과해 혜심의 선풍이 지눌의 선풍과 같다고 보기에는 다소 어색한 측면이 있다. 혜심의 도력을 알아본 지눌이 두 차례의 선문답을 통해 그를 인가하였을 뿐, 통상적인 의미의 사법관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눌과 혜심의 선사상을 따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그것은 진각국사 혜심(眞覺慧諶, 1178∼1234)의 선풍이 오히려 중국 간화선에 가깝기 때문이다.
지눌과 혜심의 선적 사유체계나 선풍을 서로 독립시켜 봄으로서, 대내외적으로 ‘보조선’과 ‘간화선’을 한국을 대표하는 두 개의 선법으로 정립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중국 간화선에 가까운 혜심의 선풍은 지눌과 다른 독자적인 선풍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지눌 선법의 독자성을 인정하여 보조선과 간화선을 상호 분리시키는 것으로 하나의 간화선에 두 개의 선맥禪脈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지눌의 선법이 조사선과는 상대적으로 거리가 먼 것에 비하여, 혜심의 선풍은 조사선의 정신에 아주 부합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간화선의 맥락은 지눌보다는 오히려 혜심에게로 이어진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그 진원지가 표방하는 바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놓고 볼 때 우리나라 간화선의 실질적인 창시자는 혜심이 된다. (이덕진, 창원대,「간화선의 ‘한국적’ 이해 - 보조 지눌과 진각 혜심을 중심으로 On the Understanding of ‘Korean-style’ Ganhwa Seon: Focussing on Bojo Jinul and Jingak Hyesim」(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p. 277~278.)
많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지눌의『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수심결修心結』『간화결의론』등이 일본의『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에 수록될 정도로 그의 사상은 우리 불교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의 선풍은 이후 16명의 훌륭한 국사를 배출하여 오늘날 송광사가 승보사찰로서 승가 교육과 수행의 전당이 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제자 진각국사 혜심은 화두話頭 1,125칙과 조사들의 염拈 · 송頌 등 어록語錄을 수집하여, 1226년 30권에 달하는 선문공안집『선문염송禪門拈頌』을 펴냈다. 그 뒤 제자인 각운覺雲이 347칙의 화두를 첨가하여 1,472칙으로 늘어나는데,『선문염송』은 현재 조계종 공식 선공안집이다.
한편 지눌의 선은 그 제자 혜심에 이르러 기본사상이었던 화회사상보다는 지눌사상의 일부였던 경절사상만이 강조되어, 간화일변도看話一邊倒의 전통으로 변하는 경향도 보였다. 그렇게 된 정치적인 상황도 있었지만 이 영향으로 조선시대의 선풍은 경전이나 문자를 경시하는 경향을 띄게 된다. 물론 조선시대에 교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조사선풍이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보조국사 지눌과 진각국사 혜심으로부터 시작된 한국의 간화선풍은, 800여 년의 시간을 관통하며 오늘날 한국불교를 대변하고 있다.
6) 고려 말 여말삼사麗末三師
12세기 후반 지눌이 대혜의 간화선을 소개한 이래, 13세기 들어서는 몽산덕이(蒙山德異, 1231∼1308)나『선요禪要』를 쓴 고봉원묘(高峯原妙, 1238~1295) 등 원나라 간화선사들의 간화선법이 들어온다. 그러나 14세기 후반인 고려 말에는 ‘여말삼사麗末三師’로 일컬어지는 걸출한 유학승들의 출현으로 간화선은 이른바 한국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14세기 공민왕대 이후 간화선이 불교계에 주류를 이루게 된 데에는 정치적 동향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원나라에 유학하여 인가를 받고 돌아온 승려들이 갑자기 불교계의 주도적 인물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될 수는 없지만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일로, 단순히 불교계 내부의 흐름이 아닌 공민와의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다.
14세기 이후 왕사나 국사를 역임했던 대표적 선승들은 대부분 기존에 불교계에서 왕사나 국사를 역임했던 인물들의 후계자였고, 많은 경우 유력가문 출신이었다.
(중략)
가문이나 산문의 배경을 가지지 못한 인물이 입원 유학과 간화선사의 인가만으로 고승에 반열에 올라 왕사나 국사로 책봉되는 사례는 (이전에는) 없었다. (최연식, 목포대,「고려말 간화선 전통의 확립과정에 대한 검토」(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142.)
공민왕은 원나라 공주의 소생이 아니었던 관계로, 애초부터 원나라의 지원도 없었고, 고려 조정朝廷에 강력한 정치 기반도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기존의 정치세력에 의지하지 않고 측근을 기반으로 새로운 세력을 끌어들여 왕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불교계도 마찬가지여서 이전의 산문세력이나 유력가문 출신이 아닌, 원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나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 등 유학파들을 등용하여 불교계를 장악하려 하였다.
공민왕은 즉위 직후인 1352년에 원나라에 유학하여 石屋淸珙(1272~1352)의 印可를 받고 원나라 황실의 귀의를 받아 간화선사로 명성이 높았던 태고보우를 황실로 초빙하여 설법을 들었고, 1356년에는 그를 王師로 책봉하여 불교계의 최고 지위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1361년에는 역시 원나라에 유학하여 平山處林 등 쟁쟁한 간화선사들로부터 전법과 인가를 받고 원나라 조정의 후원을 받았던 나옹혜근을 왕궁으로 초빙하여 설법하게 하고 곧바로 왕실의 원찰인 神光寺 주지를 맡게 하였다. 또 1365년에는 태고보우와 마찬가지로 원나라에 유학하여 석옥청공의 가르침을 계승한 백운경한을 나옹에 뒤이어 신광사의 주지로 임명하였다. (최연식, 목포대,「고려말 간화선 전통의 확립과정에 대한 검토」(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p. 141~142.)
태고보우는 가지산문에 속하기는 하였지만 주류는 아니었고, 나옹혜근 또한 사굴산문 출신이었지만 산문의 주류는 아니었다.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으나 백운경한(白雲景閑, 1299~1374) 역시 대표적 산문의 주류적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존 산문에서는 간화선 수행과 함께 전통적인 선수행도 병행하였던 반면, 이들은 기존 산문 전통에서 자유로워 간화선 우월성 선양에 보다 적극적일 수 있었다.
여말삼사 이후 간화선이 각광을 받으면서 태고보우의 법은 환암幻庵 → 구곡龜谷 → 벽계碧溪 → 벽송碧松 → 부용浮蓉으로 이어진다. 부용은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과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 등 걸출한 두 제자를 두었고, 이어 서산대사 청허는 사명四溟과 편양鞭羊 등 뛰어난 제자들을 두었다. 그러므로 현 한국의 승려들은 이들 스님들과, 나아가서는 태고보우의 법손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말 정치적인 이유와 맞물려 간화선이 흥성하였지만, 조선시대 간화선은 다시 정치적인 이유로 몰락의 길로 들어선다. 16~17세기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승병들의 활약으로 잠시 부활하기도 하였지만, 내내 몰락하였다가 20세기 들어서서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1912)의 등장으로 다시 간화선 전통이 부활한다. 이후 간화선 전통의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정리하자면 보조지눌이 선풍을 일으켜 조계종의 기초를 세웠지만, 태고보우, 백운경한, 나옹혜근 등 중국유학승이 돌아와 임제종 간화선 수행을 실제로 전한다. 그리고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그 명맥이 희미해진 것을 근세 경허에 이르러 다시 일으켜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임제종은 양기방회의 양기파와 황룡해남의 황룡파 중 양기파의 법맥을 이어 받았다. 양기파는 대혜종고의 대혜파와 호구소룡의 호구파로 갈라지는데, 그 중 호구파의 법맥을 받아온 고려 말 나옹을 거쳐 청허를 주류로 내려오다가 한동안 암흑기를 보낸 뒤, 근세 경허鏡虛에 이르러 다시 문풍을 진작시키게 된다. (불교영상『현대 고승열전 평전』에서 인용 요약. 여기서는 나옹이라고 하였지만 태고보우나 백운경한도 해당될 것이다.)
경허 선사가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추앙받고는 있지만, 깨닫고 나서 스스로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따지면 중국 임제종 간화선법에 의한 직접적인 깨달음은 아니다. 성철 스님이『한국불교의 법맥法脈』에서 밝힌 한국 조계종의 법맥은 역사적으로 따져보면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그 심법이 전해졌는지는 의문이다. 중국 임제종 법맥을 이은 태고보우를 종조로 내세우고 있지만, 조선시대 암흑기동안 임제종 간화선 수행체계가 면면히 전해져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문제는 근 · 현대의 간화선사에게 나타나는 ‘법맥에 의한 한국선의 정통성 찾기’는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박해당이 지적한 바와 같이 입실면수入室面授의 사자상승법에 따르면 모든 법통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당장 근대선의 중흥조인 경허의 경우만 보더라도 스스로 깨달았지 스승으로부터 인가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의 조계종이 선종이 아닌 선교를 통합하는 회통적 성격의 종단이라 한다면 이 같은 법통설에 대한 논란보다는 보다 근본적으로 조계종의 종지 종풍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김방룡, 충남대,「한국 근·현대 看話禪師들의 普照禪에 대한 인식 On the Recognition of Bojo’ Seon by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Ganhwa Seon Masters」(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 310.)
7)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
고려 말에 오면 선의 우위성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실천적 이론을 모색하게 되었고,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天頙 1206~?)은『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에 다른 나라에는 유래가 없는 ‘진귀조사眞歸祖師’를 등장시켜 조사선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이 소위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선과 교의 뜻을 밝히면서 말씀하셨다는 ‘진귀조사설’이다. 범일은 마조도일의 제자 염관제안鹽官齋安의 제자로,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문闍崛山門의 개조開祖다. 진성여왕이 범일국사에게 선·교의 뜻을 물었을 때 대답한 말 중에 나온다.
우리 본사인 석가모니께서 태어나서 사방으로 각기 일곱 걸음을 걷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설법을 하였다. 그 뒤에 성을 넘어 출가하여 설산 중에서 공부를 하다 샛별을 보고 도를 깨달았는데 이미 깨달은 이 법은 지극한 깨달음이 못되었다. 그래서 수십 개월 동안 다시 유행을 하여 진귀眞歸 조사를 심방尋訪하고서 현묘하고 극진한 사무친 도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교외별전이다.
我本師釋迦 出胎說法 各行七步云 唯我獨尊 後踰城住雪山中 因星悟道 旣知是法 猶未臻極遊行數十月 尋訪祖師眞歸大師 始傳得玄極之旨 是 乃敎外別傳也 (『선문보장록』은 진정국사 천책이 1293年에 저술)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친 것은 진실한 것이 아니었고, 뒤에 진귀조사를 만나 얻은 조사선의 경지가 참된 깨달음이라는 내용이다. 진귀조사가 석가를 대오철저大悟徹底하게 만들었다는 것인데, 지금 보면 다소 허황된 이야기다. 천책의『선문보장록』에는 이 이야기를『달마밀록達摩密錄』에서 인용하였다고 밝히고 있고, 조선 중기 청허는『선교석禪敎釋』에서『범일국사집梵日國師集』에서 인용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석가가 조사와 다르지 않다는 조사선의 입장을 주장하기 위해 꾸며진 이야기인 듯하다. 부처와 조사를 동일한 위치에 두었다는 데에는 의의가 있지만, 이 사상의 영향으로 조선시대 선풍은 경전이나 문자를 경시하는 경향을 띄게 된다. 또한 청허의『선교석』에서 강조되면서, 조선 후기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의『선문수경禪文手鏡』에도 이어져 150년간의 선문논쟁으로까지 비화飛火하였다. (한기두韓基斗,『한국선사상연구韓國禪思想硏究』 pp. 546~547.)
8) 탑의 시대에서 부도의 시대로
일반적으로 인도 불교를 원시불교, 부파불교, 대승 불교로 나눈다. 그중 원시불교, 부파불교시기에 형성된 경전을 원시불전이라고 하고, 대승불교시기에 형성된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등을 대승경전이라고 한다. 표면적으로 아함경전과 대승경전 모두 석가모니의 설법을 기술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내용과 성질은 서로 너무 달라 전혀 다른 불교 사상을 전개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대승경전은 모두 대승불교도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위경이라고 되어 학자들 사이에서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3 이 제기된 바 있다.
원시불전은 실로 그 내용이 소박하고 진리를 구하는 수행자들의 진지한 자세, 그리고 그에 대한 붓다의 교화와 가르침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중략) 확실히 대승경전은 아함경전에 비해 사상이 깊고 넓음을 느낄 수 있다. 대승경전은 붓다의 언행록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대승비불설(대승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다)이라는 논의가 일찍부터 있었다. (구모이 쇼겐 지음, 이필원 옮김,『초기불경 숫타니파타로 읽다, 붓다와의 대화』 p. 35.)
대승경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깨달음을 직접 체험한 무수히 많은 무명의 부처들에 의해 만들어진 위의경전僞疑經典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불타의 설법인양 포장하여 발표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승경전은 권위를 높이기 위해 부처님 이름으로 간행된 수많은 부처와 보살들의 수행담이자 이론서인 셈이다.
소위 僞疑經典이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불타佛陀의 說法으로 가탁假託하여 표현한 僞造經典을 말한 것인데, 그것은 아직도 인간이 인간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다름 아닌 권위주의시대의 부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鄭性本 著,『中國禪宗의 成立史硏究』 p. 24.)
이러한 시각으로 볼 때 대승불교의 성립과 그 발전의 역사는 단순히 인간이 ‘부처님을 신봉한 역사’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부처가 된 역사’를 말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대승불교는 종래의 원시불교나 부파불교에서 오직 석가모니불 한 분만을 부처님으로 신봉하던 입장과는 달리 ‘무수히 많은 부처님’이 출현되고 있는 특성을 보인다. (鄭性本 著,『선의 역사와 사상』 p. 86.)
대승경전이 부처님의 말씀을 표방한 위조경전이라면, 선종은 각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실명의 ‘어록語錄’이다. 남종계의 하택신회荷澤神會의 노력과 마조계의 선불교 운동으로 전개된 조사선은, 조사들을 부처보다도 우위에 두면서 부처로 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조사들의 언행을 모은 어록이라는 장르가 생기고 실명의 어록들이 등장하자, 수·당대에 걸쳐서 무수히 만들어지던 위의경전의 제작은 갑자기 중단되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얼마동안은 우상숭배를 금지하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지켰으나, 이후 불상이 만들어지고 우상화되면서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선종은 부처님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도 본래가 부처님이라고 선언하고 나아가 부처님을 능가할 것까지 요구하고 있다. 이는 보통명사였던 부처님이 언제부턴가 고유명사가 되어 떠받들어지다가, 다시 보통 명사화되고 복수화되는 과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과정은 불교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충본극기沖本克己(오키모토 가쓰미) 지음, 좌등번수佐藤繁樹(사토 시게키) 옮김,『새롭게 쓴 선종사』 p. 43에서 인용요약.)
종래의 전통적인 천태종, 화엄종 등 대승불교 교단의 입장에서 볼 때 선불교는 이단이다. 그러나 이단으로 출발하였지만 결국 부처님이 원했던 진짜 불교로 되돌아 온 셈이 되었다. 불교계의 르네상스라고 부를 정도의 일종의 종교혁명이자 인간성 해방을 위한 문화 혁신 운동이다. 새로운 형태의 불교, 이를테면 리모델링된 대승불교인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여서 신라는 당나라로부터 선종이 들어온 9세기 이후, 각 산문별로 사자상승師資相承의 법맥이 이어진다. 결과적으로 기존 불교에서 행하던 불상이나 탑의 숭배보다는, 조사들의 사리와 유골을 담은 묘탑이 중요한 예배대상이 되어 많은 '부도'가 세워지기 시작한다.
부처의 사리를 모시던 탑과 같이, 조사들의 사리를 모시는 부도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문헌상으로 보면『삼국유사三國遺事』권4「원광서학조圓光西學條」에 7세기 전반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 때 원광법사의 부도가, 권5「혜현구정조惠現求靜條」에 백제 혜현의 부도가 세워졌다고 기록하고 있어, 늦어도 삼국시대 말에는 부도가 건립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원광법사 부도처럼 탑의 형식을 빌려 조성되다가 이후 부도의 형식이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최초의 부도 형태는 선종을 처음 소개한 도의선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439호 진전사터 부도에서 찾을 수 있다. 현존하는 부도 중 가장 오래된 진전사터 부도는, 기단부와 중대석은 탑의 형식을 그대로 하고 상대석의 연꽃받침, 몸돌 그리고 지붕돌은 팔각으로 구성한 부도의 초기형태를 보여준다. 깨달으면 부처라고는 하였지만 그래도 탑과는 구별한 초기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도에서 발전한 형식이 통일신라 말 성행하였던 전체가 팔각인 팔각원당형이다. 흥법사터 염거화상부도가 그 팔각원당형의 완성품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국보 제57호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부도, 국보 제53, 54호 지리산 연곡사 동부도, 북부도는 그 모양이나 섬세함, 화려함에 있어 팔각원당형의 극치를 이룬다.
고려로 접어들면 부도는 정교함은 다소 떨어지지만 규모는 커지는데, 장중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담백한 형태를 보인다. 흥법사터 진공대사 부도, 고달사터 부도와 원종대사 부도가 대표적인데, 기단은 방형으로 바뀌고 중대석은 원형으로 두터워지면서 그 위에 귀부에서 따온 용과 거북을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그 후 여러 가지 새로운 형식의 부도가 등장하는데, 고려 후대 법천사터 지광국사 부도에 이르면, 팔각원당형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 평면 방형으로 바뀌면서 그 화려함은 가히 극을 달린다.
이후 그때까지 국사나 이름난 고승들만 조성되던 부도가 일반 스님들까지 유행처럼 번지면서 그 화려함과 장대함은 줄어들었고 인도의 원탑 양식으로 변해 석종형 부도로 자리 잡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석종형 부도가 많이 건립되었으나 드물게 통일신라시대의 8각원당형 부도 형식의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1394)’과 ‘회암사지부도(1407)’ 등도 건립되었다. 부도는 대부분 탑비에 의해서 그 건립연대를 알 수 있어 당시의 사회상이나 문화뿐만 아니라 목조 건축양식이나 석조미술의 흐름 등 미술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9) 근대 한국 불교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많았던 불교 종파들이 타의에 의해서 통합되다 보니 종파뿐 아니라 선교 양종의 구분도 없어져 한국불교를 그냥 “통불교”라고 한다. 그 이면에는 초토화된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고 하겠는데, 안타깝게도 조선시대 불교는 ‘승과의 폐지’, ‘승니의 도성출입금지’ 등등으로 지속적인 이데올로기적 탄압을 받았다.
이런 사회적 억압과 천시는 출가자 수의 급감으로 나타났고, 자연히 승려의 수준 또한 저하되는 결과를 낳았다. 교학敎學의 부진, 교단의 쇠퇴 등으로 말미암아 상층사회에 대한 포교의 기반을 잃어버렸고, 그 대신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한 의례불교만이 남아 성행하였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교단자체가 해체되는 상황에 이르러, 여말선초 10만 명에 달하던 승려 수가 1909년에 이르면 6천명이 채 안 될 정도로 급감하게 된다. (서재영,「승려의 입성금지 해제와 근대불교의 전개」『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엮음, p. 60.)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추사 김정희에게서 비롯된 거사불교의 흐름이 개화사상가에게 이어졌고, 개화사상과 더불어 유교를 대신하여 불교가 부각되면서 종단조차 없이 명맥만을 유지하던 불교계는 은둔에서 벗어나 개혁과 개화를 고민하게 된다. (한상길,「개화사상의 형성과 근대불교」『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엮음, p. 53.)
출가 수행자에게는 봉건왕조를 청산하고 나라를 근대화하는 길이 바로 불교의 혁신이자 도약이었고, 결정적으로 1895년 시행된 도성출입 금지의 해금은 한국 불교의 부활을 의미하기도 하였다.4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역사적 특수성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을 도리어 불교 중흥의 계기로 받아들이게 되는 아이러니를 낳았고, 식민지 시기 한국 불교는 급격히 친일 화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류승주,「일제의 불교정책과 친일 불교」『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엮음. pp. 98~119.)
일본은 본격적인 조선 침략에 앞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무마시키고자 일본 불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 정책에 호응하여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진종 대곡파와 일련종을 필두로 일본불교의 주요 종파들이 경쟁적으로 조선 포교에 나서게 된다. 이후 정토종, 조동종, 임제종 등이 가세하였고, 1910년 한일 합방 시에는 이미 각 종파의 포교소와 출장소가 68개소에 이를 정도로 다양한 종파가 활동하고 있었다.
일본 원종과 조동종 등은 한국불교를 그들과 통합하려는 시도도 있었는데, 이에 자극 받아 석전 스님과 만해 스님이 한국 불교는 임제종 정통이라 통합 할 수 없다는 “임제종 운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본불교의 진출은 우리 불교계를 깨우고 자각하게 하는 계기를 준 면도 없지 않았다.
당시 동북아의 지식인들 사이에는 서구열강에 대항하여, 아시아의 독립을 보존하고 동양의 평화와 질서를 아시아인 스스로 확립하자는 ‘아시아 연대론’이 대두 되고 있었다. 조선과 청 그리고 일본 삼국 중 한 나라가 망하면 다른 나라의 존립도 위태롭기 때문이었다.
종교적으로도 불교라는 종교적 공통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 국가가 힘을 합쳐 서구열강과 그들의 기독교에 맞서야 한다는 연대론이 더욱 고조되고 있었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서구 열강을 등에 업고 급속도로 퍼져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아 연대론은 일본의 침략 야욕으로 꽃을 피우지는 못했지만, 일본불교계의 조선포교는 정치적 목적뿐 만 아니라 조선 불교의 발전을 도모한 인도적인 측면도 있었고, 또 서구세력과 기독교에 맞서기위한 종교적 연대감 때문인 측면도 있었다. (서재영,「한국 근대 불교의 개막과 자주화의 모색」『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엮음. pp. 76~86.)
해방 후 불교계는 제국주의 일본에 동조하여 민족의식을 저버렸다는 반성과 함께, 왜색 불교를 청산해야 한다고 하면서 일본 것이라면 무조건 배척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로 인해 대처·비구의 싸움 등 혼란이 야기되었고, 많은 학승들이 쫓겨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본에서 출가하고 배운 승려들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어야 했다.
기존 종단을 정화한다는 미명美名 아래 종조로 모시던 태고 보우를 보조 지눌로 바꾸고 태고사를 조계사로 명칭 변경하였다. 만암 스님 같은 분은 환부역조換父易祖라고 하시면서 반대하시다 종정 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다. 만해 한용운 선생도 독립운동가로만 알려져 있지, 1905년 백담사에서 득도한 뒤 수년간 불교활동에 전념한 스님으로서의 업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만해는『조선불교 유신론』이나 재래식 경전을 현대식으로 바꾼『불교대전』을 써서 조선 불교를 개혁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가 일본에 다녀 온 후 말년에「승니의 가취嫁娶」라는 글을 쓰고 대처하였다는 이유로 그의 업적은 조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승려들도 사취詐取와 동냥질을 그만두고 생산 활동에 참여할 것과 승려의 취처聚妻를 주장하였다.
한 일본 학자는 한국불교의 특징을 유학승에 의해 전해져 뿌리내린 구산선문의 다양한 불교 형태가, 비교적 큰 변화 없이 유지 보존되어 현대에 이르고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서 한국의 선종을 관찰함으로써 당나라 시대의 선의 양상을 추측할 수 있다고도 하였다.( 충본극기沖本克己(오키모토 가쓰미) 지음, 좌등번수佐藤繁樹(사토 시게키) 옮김,『새롭게 쓴 선종사』 p. 279.)
실제로 우리나라 불교는 구산선문의 선풍도 보조지눌의 선풍도 희미해져 수행의 구심점을 잃고, 인도 티베트 불교 등이 유행하는 등 좀 심하게 얘기하면 중국 선종형성기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단편적인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오랜 동안 정체되어 있는 우리나라 불교의 단면을 말해 주고 있어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일제 말기, 나라 전체에 남아 있던 비구승의 숫자는 30명 내외에 불과했다. 해방 후 비구와 대처의 대립이 격화되었을 당시 역사가들은 비구와 대처의 세력 분포를 1대 10, 즉 비구승 7백여 명에 대처승 7천여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해방되고 나서 한참 후인 1차 정화 불사가 일어났을 때, 즉 1950년대 중반의 이야기이고, 일제 말기의 가장 어려웠던 시절, 이 땅에 남은 한국 불교의 보루는 많아야 3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서암 스님 회고록,『道가 본시 없는데 내가 무엇을 깨쳤겠나』 p. 61.)
1.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 후 구도승求道僧의 뱃길 왕래가 이어지고, 나타낸 바의 방편이 진도眞道에 융합하였으니, 그 조상들을 생각하지 않으랴. 진실로 무리가 번성하였도다. 혹 중원에서 득도하고 돌아오지 않거나, 혹 득법得法한 뒤 돌아왔는데, 거두巨頭가 된 사람을 손꼽아 셀만하다. 중국에 귀화한 사람으로는 정중사靜衆寺의 무상과 상산常山의 혜각慧覺이니, 곧 선보禪譜에서 익주김益州金 진주김鎭州金이라 한 사람이며, 고국에 돌아온 사람은 앞에서 말한 북산北山의 도의道義와 남악南岳의 홍척洪陟, 그리고 조금 내려와서 대안사大安寺의 혜철국사慧徹國師, 혜목산慧目山의 현욱玄昱, 지력문智力聞, 쌍계사雙谿寺의 혜소慧昭, 신흥언新興彦, 용□체涌□體 진무휴珍無休,쌍봉사雙峰寺의 도윤道允, 굴산사崛山寺의 범일梵日, 양조국사兩朝國師인 성주사聖住寺의 무염無染 등인데, 보리菩提의 종사宗師로서 덕이 두터워 중생의 아버지가 되고, 도가 높아 왕자의 스승이 되었으니, 옛날에 이른바 “세상의 명예를 구하지 않아도 명예가 나를 따르며, 명성을 피해 달아나도 명성이 나를 좇는다는 것이었다.”…” (남동신, 「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역주한국고대금석문 Ⅲ,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pp. 174~211.)
2. 曺溪宗의 성립에 대해서는 대략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로는 구산문이 총합하여 조계종이 되었다는 설과, 둘째로 보조지눌에 의한 조계종 성립 설, 셋째로 통시대적 조계종 설이다. 그런데 승가내부에서 스스로의 교단이나 산문을 조계종이라고 칭한 경우는 1172년(明宗2)이후부터이고, 고려 중후기를 통하여 수회 정도만 확인할 수 있다. 1172년(명종2)에 건립된 大鑑坦然의 비와, 1295년(충렬21)에 건립된 普覺一然의 비와 1313년(충숙원년)이후에 건립된 寶鑑混丘의 비에서 나타나고, 조계산 수선사의 중창기의 曺溪도 조계종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탄연의 비에 나타나는 조계종은 조계종 하에 굴산을 두고 있으므로, 9산문이나 오산문 등 모든 산문을 조계종 하에 두고자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 문손門孫들에게 지속적으로 사용되지 못하고 사칭私稱으로 끝나고 있다. 일연의 비와 혼구의 비에서도 조계종명을 사용하고 있으나 체계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즉 “華山曺溪宗麟角寺迦智山下”라고 한 것은 “曺溪宗迦智山下華山麟角寺”라고 했어야 옳을 것이고, “曺溪宗慈氏山瑩源寺”라고 한 것은 “曺溪宗迦智山下慈氏山瑩源寺”라고 했어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용한 종명도 公的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私的으로 칭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으며, 또한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지도 않다. 조계종은 승가의 산문이나 종파를 나타내는 명칭이 아니라, 승가의 실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재가자와 사대부들에 의하여 호칭되다가, 승정에 도입되어 일방적으로 승가의 모든 산문을 총칭하는 용어로 잘못 적용된 것이라는 것이다. (정재일(적멸), 동국대 강사,「曺溪宗名의 淵源에 대한 考察」에서 요약)
3. 그 대표적인 것이 18세기 일본, 도미나가 나카모토(富永仲基)의 대승비불설이다. 나카모토는 대장경을 간행하는 사찰에 들어가서 업무를 돕게 되는데, 대장경의 판목인쇄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글자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불경이 처음에는 단순한 것에서 점차로 복잡한 것으로 변해갔다는 이른바 ‘가상설加上說’을 발견하고 이를 정리하여『슛쵸오고고(出定後語)』라는 책으로 써냈다. 대승경전은 부처님 입적 후 500년경부터 차례로 만들어진 것으로 인위적인 위경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대승경전은 부처님이 친히 설하신 경전이 아니다.’라는 대승비불설론의 시발점이다. 그는 아함경 단 1개만이 부처님의 불경이라고 하였다. 이 시기에 대승비불설론에 대해 일본 내에서 치열한 종교적 논쟁이 벌여졌고, 나카모토는 마구니이고 미친 자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현재 일본 불교학계는 나카모토의 대승비불설이 정론임을 인정하고 있다.
4. ‘승니 도성출입 해금’에 대해 일본 승려 사노의 활약이라는 설과 내무 대신 박영효 등 개화파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리고 해제 된 후에도 완전히 철폐된 것은 몇 년 후로 이능화는 단발이 보편화되면서 승려와 일반인들의 구별이 모호해진 이후라고 밝히고 있다. 결국, 불교계의 자주적인 노력의 산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해금은 사노의 건의와 개화파의 결정으로 단행 된 것이 아니라 당시 역사적 상황의 변화, 개화파와 연결된 불교계의 자각, 기독교의 팽창에 대한 한일 불교계의 위기의식, 유교적 정치이념의 쇠퇴, 외세에 맞서 불교를 신장시키고자 했던 조정의 의지, 민권의식의 향상 등과 같은 복잡한 인과관계와 맞물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서재영,「승려의 입성금지 해제와 근대불교의 전개」「한국 근대 불교의 개막과 자주화의 모색」『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엮음. pp. 63~94. & 강석주 외,『불교 근세 백년』, 민족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