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7년 11월, 정조는 의금부에서 취급해야 할 사건 하나를 일반 범죄를 다루는 형조로 이첩했다. 그 사건은 천안에 사는 진사 강이천이 ‘해랑적’(海浪賊)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린 일이다. 해랑적은 얼핏 해적을 가리키는 듯하지만, 실은 <정감록>에 나오는 ‘해도진인’(海島眞人)을 뜻한다. 영조 때부터 유포되기 시작한 <정감록>에 따르면 섬에서 진인이 나타나 조선을 멸망시키고 새 나라를 세운다고 했으니, 강이천은 역모를 선동한 것이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푸른역사, 2011)을 쓴 백승종은 이 사건을 “또 하나의 정감록 역모사건”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미 지은이는 앞서 출간되었던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푸른역사, 2006)에서, 정조 6년(1782)과 정조 9년(1785)에 있었던 황해도 평민 문인방과 충청도 평민 문양해의 역모 사건을 <정감록>과 연관시킨 바 있다. 하므로 두 차례의 정감록 역모사건을 겪었던 정조가 해랑적을 모를 리도 없겠지만, 뒤따른 증거들은 더 심각했다. 비밀결사를 만들어 은밀히 회동하면서, 국가의 변란과 국운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시절에 누릴 수 있는 ‘사상의 자유’가 아니었다. 게다가 강이천을 중심으로 모였던 무리들은 금지된 서학(천주교)을 논하고, 청나라에서 온 주문모 신부와도 접촉했다. 사건을 축소한 것은 정조의 동물적인 자기 보존욕과 정치 감각이다. 강이천과 연루된 김건순이 당대의 실세였던 노론 명가의 종손이라는 점과, 청나라가 허용한 천주교를 탄압함으로써 직면하게 될 외교 문제를 정조는 피하고 싶었다. 대신 정조는 강이천 등을 유배 보낸 직후, 자신의 미진했던 처리를 합리화하고자 1791년부터 시작된 문체반정에 새로 불을 지핀다. 강이천 무리가 해도진인설과 같은 예언서와 천주교에 미혹된 원인이 다 올바른 경전을 익히지 않고, 경전이 가르친 문장을 쓰지 않으며, 삿된 글을 짓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 소설가 장정일
정조는 조선의 문예부흥을 이끈 개혁군주로 평가되지만, 지은이는 “문체의 자유까지 억누를 정도였다면 그가 과연 ‘문예부흥’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라고 묻는다. 일례로 정조가 그토록 질색을 했던 소품문(에세이)은 단순한 신변잡기가 아니라, 분출하는 사회적 상상력이었다. 외국 서적의 수입마저 금지했던 문체반정은 그 싹을 제거하고, 성리학만으로는 더 유지하기가 힘들었던 18세기 조선 사회의 역동성을 ‘살처분’했다. 그 결과 과거를 통해 최상층으로 오른 사대부들일수록 사회적 상상력은 순치되었고, 19세기 이후 조선 사회 근본적인 개혁은 상상력은 있으나 정치력은 부족한 평민들의 몫이 되었다. 지은이는 “19세기 말에 전개된 독립협회운동이나 동학농민운동의 실패”를 그런 맥락에서 재해석한다. 서양 왕실은 이웃나라 왕실과 결혼하면서 왕족들만의 결혼동맹을 맺을 수 있었지만, 조선은 명문 사대부 집안과 결혼을 하면서, 안 그래도 조선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사대부들의 힘을 키워 주었다. 이 때문에 정조가 했던 문체반정은 변화를 원치 않는 사대부들의 이익에 합치했다. “조선의 왕들은 보수 성향을 띨 때만 비로소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구조 속에 있었으니, 정조 혼자 아무리 뛰어났대도 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현재의 청와대 주인은 말할 것도 없고, 고 노무현 대통령이 맞닥뜨렸던 진실이다.
앞서 언급했던 지은이의 전작과 이번 책에는 <정감록>이 나란히 등장한다. 정조 시대에 예언서나 후천개벽 사상이 유행했던 것은 사회 저변의 변화 욕구 때문이지만, 성리학이라는 철통 같은 국가 이념이 예컨대 고증학이나 양명학과 같은 이설을 일절 허용하지 않았던 폐쇄성 탓도 크지 않을까? <정감록>을 따르는 ‘도꾼’들과 초기 천주교 집단의 활발한 인적 교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이번 책은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든다. 소설가
문체를 정통고문(正統古文)으로 되돌리려 한 운동.
연원
조선 후기 박지원을 비롯한 진보적 문인들이 정통적인 문체를 벗어나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를 구사해 글을 쓰자 정조(正祖)를 비롯한 보수파가 이를 바로잡으려 한 것을 말한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熱河日記〉가 당시 문단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읽히자, 이러한 패사소품체가 확산될 것을 염려한 정조는 명청(明淸) 소설의 수입을 금지하고 박지원에게 순정고문(醇正古文)으로 글을 지어 바치게 했다.
당시의 문풍(文風)과 연암체의 성립
조선 후기는 봉건사회가 해체되면서 여러 변화를 겪게 된다. 농촌사회가 분화되고 상공업과 도시가 발달했으며 민중들의 의식도 변화했다. 이때 박지원을 비롯한 당시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고금(古今)의 치세(治世)와 난세(亂世)의 원인, 제도개혁, 농공업의 진흥, 화식(貨殖) 등 사회경제적인 개혁방안을 토론했고, 중국여행 체험을 글로 써서 돌려보기도 했다. 홍대용·이덕무·박제가·유득공·이서구·정철조 등이 박지원의 집에 모여 밤을 새워 당시 현실문제를 논의하고 학문적·문학적 교류를 함께 했다. 그들이 특히 흥미를 가졌던 것은 청나라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읽는 것이었다. 그중 〈열하일기〉는 다채로운 표현양식과 독특한 문체를 구사해 당시의 화제작이었다. 박지원의 문체는 독특해 연암체(燕巖體)라고 불렸다. 연암체의 특징은 소설식 문체와 해학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정통 고문에 구애되지 않고, 소위 패사소품체라고 불리던 소설식의 표현방법을 과감히 도입해 쓰고 현실의 생동하는 모습을 묘사했으며 시어(詩語)의 사용이나 고답적(高踏的)인 용사(用事)는 쓰지 않았다.
정조의 문학관과 문체반정책
정조는 문체의 흥망성쇠는 정치현실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세도(世道)를 반영한 글을 읽으면 당시 정치의 득실(得失)을 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문학은 도(道)를 실어나르는 도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당시의 문체가 위미(萎靡)하여 근심스럽다고 하면서 문체 문제에 크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정조는 육경(六經)을 진짜 고문(古文)이라고 하면서 그 정신을 이어받아 전아(典雅)한 고문으로 글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정조는 연암 일파의 문체를 못마땅히 여기고 문풍을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문화정책을 펼쳤다.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해 각신(閣臣)에게 당시의 문운(文運)을 진작시키는 정책을 시행하도록 했고 주자서(朱子書)를 비롯해 학문과 문학에 본보기가 될 만한 책들을 간행하는 한편 명청의 문집과 잡서(雜書) 그리고 패관소설의 국내 유입을 금했다. 또 문체가 불순한 자는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했고 남공철·이상황·김조순 등을 문체 불순으로 문책했으며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바치도록 했다. 이 문화정책은 당시의 전통적인 순정(純正) 문학의 전통을 계승하고, 치세(治世)의 문학을 꽃피우는 데는 어느 정도 기여를 했지만, 당시의 변화하는 현실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정조의 문체반정책에도 불구하고 패사소품체는 더욱 확산되어, 소설적 문체와 사실주의적 표현기법의 작품이 계속 인기를 끌게 되었다. 문체반정은 당시 사상의 발전과 문인들의 창작활동을 억압하는 보수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시대의 흐름을 되돌리려 한 문화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