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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추정강숙려의 풀꽃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추정
<추정강숙려의 시가 있는 수필>
누군가,
향기나는 이 새벽을 여는 이는
서문
문인 인터뷰: 추정강숙려 시인의 그리움에서 피어나는 꽃잎들
제 1 부 수필처럼 살고 싶다
1. 아름다운 보라색
2. 횡재
3. 수필처럼 살고 싶다
4. 소리
5. 아름다운 세월
6. 흰 칼라에의 향수
7. 밤사이 안녕!
8. 서글픈 제비와의 만남
9. 어머니의 섬
10. 어머니의 교훈
11. 행복이란 이름으로 반짝이는 별
12. 봄의 정인
13. 그대 바라기
14. 누군가 향기 나는 이 새벽을 여는 이는
15. 남편이란 이름의 울타리
16. 시인이 시를 쓰지 못하는 이유
제 2 부 금지된 사랑
1. 아름다운 건망증
2. 금지된 사랑
3. 선택의기로
4. 길
5. 손
6. 권중조
7. 벌새
8. 가을의 전설이 되어
9. 자존심 은행
제 3 부 무지개 유정
1. 어머니의 반닫이
2. 생의 노을을 보며
3.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선물
4. 사랑 속의 사랑
5. 아름다운 인연
6. 섣달 그뭄 밤
7. 이 봄을 친구에게
8. 금란지계
9. 가슴에 있는 친구
10. 아름다운 청년의 그 눈빛
11. 가슴에 있는 하늘
12. 모녀간의 대화
13. 꽃잎보다 고운 나의 어머니
14. 지천명의 얼굴인 오늘
제 4 부 가슴에 묻고 사는 그리움의 이름
1. 여행과 숨어있는 숫자
2. 내 마음의 심연
3. 아름다운 밴쿠버에서의 육십일
4. 무소유 속의 유소유
5. 마음의 꽃밭
6. 여명을 여는 소리들
7. 기다리는 마음
8. 일상 속의 이웃들
9. 거라지세일의 만감
10. 그리움은 영원 속에 있다
11. 두고 온 하늘
12. 인생의 빚
13. 이사
14. 긍정적인 삶의 자세로
제 5 부 헤아릴 수 없는 것
1. 헤아릴 수 없는 것
2. 진리 속으로
3. 자연과 인간
4. 무지개 유정
5. 가을서신
6. 인생은 홀로 나는 새이다
7. 자연의 변화 그 신비 속에서
8.
9. Grouse
10. 가꾸어야 할 마음
11. 행복이란 가슴에 있는 것
12. 오월의 채마밭에 서서
강숙려(시인) 약력
아호: 추정
장르: 시, 시조,
한맥문학 신인상 등단 (1993)
한국문인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국제펜클럽회원,
여성문예원 이사, 상황문학, 나래시조, 시조월드회원,
세계한민족작가연합, 캐나다한인문인협회회원
캐나다한인문학가협회 회장 역
가곡작사가협회회원(가곡; 숲 속의 하룻 밤 외 2 편
신앙찬송; 주님의 신부외 5편)
시집.
* 그리움은 안개로 뜨고 (1994)
* 안개의 불 (1996)
* 곁에 있어도 그리운 우리는 (한영시집) (1997)
* 사랑 안에 꽃이 되어 (신앙시집 )(1999)
* 꽃비가 되어 흐르네 (2002)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며 작품활동 중
이메일: loveviolet00@hanmail.net
홈카페: caff.daum.net/loveviolet00
*서 문*
수평선 아득히 넘어가는 내 꿈의 조각들이
갈매기 울음 더불어 출렁이는
여기 미 서 태평양 West Port의 포구에서
조개 껍질에 실려 파도에 흔들거린다.
흰 옥양목 한 필 후루룩 풀어 말리듯 밀려왔다 사라지는
저 흰 포말의 소리들은 못다 부른 나의 노래러니,
한 세상 잃는 슬픔과 다시 얻는 기쁨으로 역어지는 것이 삶이라면
나의 이순의 날엔 꽃만 피었으면 싶으니 이 얼마나 황당한 욕심인가.
아이들 자라 훌쩍 떠나고 빈 자리엔 늘 아지랑이가 인다.
모두들 떠나면 남은 자는 무엇으로 꿈을 꿀까?
봄 가고 여름 가고, 가을 가고 겨울가면 동면에서 깨어난 향기 하나
어여쁜 꽃으로 필까?
나는 꽃이고 싶다. 향기 나는 꽃이고 싶다.
여기 한 권으로 풀기엔 너무나 부족한 나의 삶을 달이고 달여
이미 곰 삭여져 작고 작아진 나의 모습을 거울 앞에 놓는다.
꿈에도 안고픈 내 아이들, 사랑하는 친구, 친지들, 언제나 나의
행복을 빌어주는 조용한 나의 후원자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이 모습 그대로 어여삐 여겨주고 남은 날을 외롭고 슬프지 않게
항상 곁을 지켜주는 자상한 그대에게 많이 고마움을 전한다.
- 2008년 8월 페리칸의 활강을 보며 서태평양 포구에서-
@문인인터뷰@
시인 추정 강숙려의
그리움에서 피어나는 꽃잎들
대담진행,정리: 소운림 (사진작가, 평론가)
시인과의 만남
시인 강숙려와의 만남은 황홀한 타오름의 시였다. 그것은 숨찬 세상이야기도 아니요. 채색된 운명의 넋두리도 아니었다. 추억의 가지를 치고 치솟은 푸른 줄기요 밤하늘을 수 놓는 별빛 같은 만남이었다. 강시인의 조용하고 온화한 미소 속에서 저 모습이 바로 시를 만드는 마음이구나 싶어졌다. 창 밖엔 가을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문학지 한 켠에 조용히 앉은 강숙려 시인의 한 편의 시를 접했다. 시 속엔 아련한 그리움으로 막을 두른 보라빛 같은 서정이 묻어있었다. 추억의 밭에서 그리움과 아픈 파린들을 파내어서 다시 묻고 있는 시. 자아 의식이 뚜렷한 시. 철학이 잠재한 시. 그런 시를 만드는 시인과의 만남은 한 편의 시였다.
시인 추정 강숙려는 경남 진주 출생이다.
진주는 박경리씨의 토지의 본토인 하동과 밀접해 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토지 속에서 나오는 그 시대를 연상하면 되리라 한다. 꽃처럼 귀하게 자랐다고 미소하는 그녀의 모습은 소녀를 연상케 한다. 학맥으로나 문맥으로서의 박경리씨를 대 선배로 모시는 마음이 지극했다.
선배님의 뒤를 잇는 서열에 서고 싶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차 한잔을 앞에 놓고 가을비 내리는 안개 속을 걸어 들어가는 기분으로 우리의 이야기는 깊어 만 갔다.
소운: 안녕하셔요. 강시인님. 벌써 가을이 되어 곧 추석이 오고 있습니다. 포트 코키틀람은 산도 가깝고 또 이렇게 큰 정원을 갖고 계시니 부럽습니다. 요즘 시인님의 근황을 들려 주시겠습니까
강 시인: 어서 오세요. 이런 우중에 오시니 더욱 반갑습니다. 저의 부부는 비를 좋아하여 가끔은 비 내리는 공원으로 가서 차 속에 앉아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듣곤 하지요. 차창에 부딪쳐 떨어지는 빗소리는 하나의 교향곡처럼 들려와 우리 마음에 전율 됨을 본답니다. 특히 남편은 클레식에 도취한 사람입니다. 젊은 시절엔 첫 음절만 들어도 누구, 하며 작곡가를 알아 맞추곤 했다더군요. 사실 저도 이런 면을 보면서 남편과의 사랑에 빠진 것 같기도 하고요.(웃음) 아까 큰 정원이라 하셨는데 맞아요. 모두 그런 말을 하여 웃지요. 저의 앞뜰이 카누스티 골프장이예요. 아름다운 이 골프장이 우리 정원이 되어 남의 것으로 쉽게 즐기는 편이 되었지요. 우리 부부가 이 집을 사면서 느낀 것인데요. 옛 말씀에 집은 주인이 있다고 했거든요. 이 집이 그렇다 여겨요. 저의 집이 제일 로얄 자리인데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그러니 더욱 우연일 진데 필연처럼 여겨져요. 그래서 우리를 기다린 집이라 여기지요.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날을 가능한 즐거운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편이예요.
소운: 시인님의 얘기를 듣고 있으니 함께 즐거운 마음이 되는 듯 합니다. 아직도 젊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계시는데 무슨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으신지요?
강 시인: 이런 즐거운 말도 있군요. 듣기만으로도 기쁩니다. 세월은 유유히 우리 곁을 지나지만 그냥 가는 것이 아니더군요. 아이들을 키우고 열매를 맺게 하지만 생의 노을을 바라보는 나이로 만들었지요. 나름대로 건강을 지키려 노력해요. 아침에는 수영을 하고 저녁에도 한 시간 정도 걷기를 합니다. 막 해가 진 서녘 하늘엔 아직 노을이 걸려 있고 캐나다 기러기의 삼삼오오 하늘을 가르고 날아 가는 모습도 장관이지만 하루의 일과를 끝낸 후 잔디를 밟으며 남편과 나란히 걸으며 나누는 대화는 별 난 맛이기도 하지요. 주말에는 뒷산으로 등산을 하고요. 딸기가 익는 5월경에는 딸기를 먹으러 나온 곰들과도 자주 만나게 되지요. 크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산등성이에 올라가면 눈 앞으로 피터 레이크가 흘러가는 것도 보이고 마음이 탁 트이는 것을 느끼게 되지요. 서로 사랑하며 나누며 늘 마음을 비우고 살아야지 하는 바램을 바람결에 실어 보내 본답니다. 저는 인자(仁者)도 지자(智者)도 아니지만 산도 물도 좋아합니다. 참 또 있군요. 이건 남편의 권장상황인데요. 하루 몇 차례고 웃어 보는 것입니다. 웃을 일이 아니더라도 그냥 힘차게 서로를 바라보며 웃어보면 웃는 모습이 웃으워저서 또 웃게 되고, 그러다 보면 참으로 웃으워저서 한참을 또 웃게 되지요. 아이들 키우던 젊은 날엔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게 배를 잡는 웃음도 많았는데, 이제는 둘만 남아 별로 그렇게 크게 웃을 일이 없어진 것 같아서 실천해 보니 참 재미있더라구요. 선생님도 오늘 당장 한번 집에 가시면 해 보셔요. 건강에도 매우 좋답니다.
소운: 그렇겠군요. 강시인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니 저도 덩달아 즐거워 짐을 느낍니다.
감정은 전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집에 가서 집사람이랑 한번 해 보렵니다. 규칙적인 운동과 자연에 묻혀 마음을 비우고 웃음을 나누는 일이 그 비결이었군요.
요즈음 대외적인 활동상황을 들려 주실 수 있으시겠지요?
강 시인: 활동이랄 것 까지는 없고, 이곳의 문협에서 함께 회원 활동으로 두 곳 신문에 고정 활동하고 독자적으론 각 신문에 여행기나 수필을 발표하기도 하지요. 모 신문엔 제 시를
2년 반 걸쳐 시집 두 권 분을 게재한적도 있고 한국의 문예지에도 글이 나가지요. 한국의 월간문학도 원고 청탁이 와서 보냈지요. 참, 동아라이프 에(밴쿠버) 이번 가을 개편으로 ‘詩人 추정 강숙려의 풀꽃 따는 女子’ 라는 메인타이틀로 수필을 게재하게 되었답니다. 토론토의 한국일보에도 10월부터 필진으로 들어 간다고 연락을 받았지요. 그도 그래요. 글을 써서 오래 두면 꼭 시집 못 간 자식을 곁에 두고 있는 것처럼 답답하고 글도 묵혀 늙어 가지요. 이번에 모두 시집을 보내고 나서 수필집으로 묶을 생각입니다.
소운: 강시인님의 활동범위는 생각보다 더 넓으신 것 같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럼 지금 문협에서도 한참 선배님이 되시겠습니다. 후배들을 보는 마음이 어떠신지 여쭈어도 될까요?
강 시인: 선배라기 보다는 그냥 함께 걷는 글 동무가 되어 서로 격려하며 어깨동무하여 나아가야지요. 참 아름답게 느끼는 것은 이제 등단하고 들어온 회원들의 배우고자 하는 눈빛이며 겸손한 태도들입니다. 더러 문단에서 볼 수 있는 경쟁심 같은 것이 없는 때 묻지 않은 모습들이 그저 이슬 머금은 아침 꽃들 같아 아름답게 여겨 집니다. 아름답게 피어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소운: 후배들을 바라보는 강시인님의 눈길이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지금까지 나온 시집이 다섯 권으로 아는데 시집의 제목과 책이 나오기까지의 마음을 듣고 싶습니다.
강 시인: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 한없이 차오르는 그 열정을 써야만 하는 것이 시인이라는 이름의 사람들이 할 일이라 여깁니다. 첫 시집 <그리움은 안개로 뜨고>나 둘째 시집 <안개의 불>은 ‘94년과 ‘96년 2년 간격으로 나온 시집인데 제목 그대로 제게 남겨진 그리움을 안개 젖은 산골짝을 헤매며 상실의 아픔을 품어 내다 드디어 안개는 불로 승화 되는 반어(反語)가 되겠으나 ‘안개의 불’로 태어나는 과정에서의 시어들로 차 있지요.
첫 시집과 두번째 시집 때는 대단한 매스컴을 타기도 했지요. 그 당시 월간지 퀸이나 주부생활
그리고 네 번째 시집 <사랑 안에 꽃이 되어>는 ‘99년에 나온 신앙시집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의 섭리와 그 크고 놀라우신 능력과 영광을 노래하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한없는 은혜와 진리의 말씀을 기도하며 묵상하는 마음으로 쓴 시지요.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와 역사 속에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 타락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와 영광, 모든 그리스도인이 함께 생활 속에 경험해 가는 주님의 손길 등을 누구나 쉽게 알아 공감하고 감동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넘치는 거듭남의 시 입니다. 그 당시 8천 여권이 나갔지요. 교회에서 단체로 주문한 탓이기도 하였고요. 참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제 생활이 많이 바뀌어 밴쿠버에서의 생활이 시작 되었고요. 비록 몸은 이방인이 되었지만 마음의 풍요로움으로 자연에 안겨 자연인이 되어 제 2의 인생을 펼치게 되었지요.
그리고 ‘02년 태학사에서 다섯 번째 시집 <꽃비가 되어 흐르네> 가 나왔습니다.
그리움은 안개로 뜨다가, 안개의 불로 승화하여, 곁에 있어도 그리운 우리가 되어, 사랑 안에 꽃이 되고, 이제는 꽃비가 되어 흐르게 되는 차츰 안정되어가는 제 시의 세계가 되는 셈입니다. 시인은 시를 씀으로 주관을 담지만 쓰여져 읽혀질 때에는 이미 주관을 떠나 객관화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공감대를 가질 수 있어 함께 숨쉬는 글을 쓸려고 합니다. 이제 잔잔히 흐르는 산문으로 수필집을 만들려고 계획을 세우는 중입니다.
소운: 참 대단하십니다. 상실의 아픔과 그리움, 눈물, 환희, 행복 등, 그런 것 들이 모여 시가 되고 시집으로 묶이는 과정을 새삼 보여주시는 말씀이 또한 한 편의 시가 되는 느낌입니다. 시인님의 시는 독자들의 많은 공감과 사랑을 받는 것으로 압니다. 그 이유는 누구나 한 가지씩은 갖고 있을 수 있는 공감의
처음 시를 쓰시게 된 동기가 있다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강 시인: 저도 가끔 그 시점으로 돌아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 제 영원한 은사이신
소운: 가슴을 적시는 강시인님의 추억에 저도 함께 깜빡 취했습니다. 시인은 그렇게 자라는가 싶어집니다. 강시인님을 서정적인 시인이라고 들었는데 역시 어린 시절 자연에서 맡으시던 향기를 아직 갖고 계신 탓이라 여겨집니다. 시인님도 이민자신데 이민지에서 느끼시는 애환 같은 것이 있으시다면요?
강 시인: 가끔 이민생활이 피난민, 혹은 유배지 등으로 표현 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대체로 저 같은 경우엔 처음 아이 유학에서 시작하여 자연스럽게 즐기면서 시작한 이민지라 이방인의 외로움은 때때로 느끼긴 했지만 즐거웠던 일이 더 많았던 편입니다. 특별히 애환이랄 것은 없으나 사실 영어를 못하는 저로서는 남편의 뒤에 숨어살지요. (웃음)
소운: 참 유머도 있으시고 재치도 있으시어 집안에 사랑이 넘칠 것 같습니다. 강시인님은 시조도 쓰시는 것으로 아는데 시와 시조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들려 주시기 바랍니다.
강시인: 저는 지금 한국의 나래시조와 미주에 있는 시조월드에서도 활동하고 있지요. 간단히 표현해서 시는 자수에 제한을 두지 않는 대체로 자유시와 운문시, 산문시 등으로 나누게 되지만 시조는 보통 알기를 틀에 박힌 듯 자수에 제한을 받는 것으로 아는데, 틀에 박힌 듯 하면서도 박히질 않고, 또 자유분방 하면서도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우리정서만이 가지고 있는 정형시지요. 그렇기 때문에 어느 경우이든 내재율만 잃지 않는 범위 안에서 어느 만큼의 자수의 가감은 자유로워요. 종장의 3,5,4,3 중 첫 자리 3만은 절대 변해서는 안되지요. 시가 압축되어 자연스런 가락을 타면 좋은 시조가 되리라 여깁니다. 시인은 은바늘 하나로 숨통을 찔러 지구의 자전을 멎게 하는 재능이 있어야 한다 했는데 언제나 숙제 입니다.
소운: 시조에 대하여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언제 한번 사사를 부탁드릴께요. 만약에 지금 시인이 아니셨다면 무엇을 하실 것 같으신지요?
강 시인: 아마도 그림을 그리고 있지않을까 싶기도 하고요. 무용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무용은 어린시절에 무용선생님이 가장 아끼는 제자 였거든요. 그래서 시를 가르치려는 문예반선생님과 무용선생님이 저를 두고 말 다툼을 하시는 것을 지켜 본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제가 무용을 택하였다면 지금쯤 무용가가 되어 있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한번도 시인이 된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으니 시인이 제 길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젠가 제 시를 넣어 그린 시화전을 꼭 해 보고 싶은 맘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림을 배우고 있습니다.
소운: 참으로 다양하십니다. 무엇을 하시어도 잘 어울릴 것으로 여겨집니다. 시인님의 시를 읽으면 그리움이 늘 묻어 나는데 특별한 그리움을 보내는 매체라도 있으신지요?
강 시인: 가끔 저를 그리움의 시인이라 말씀하시는 것을 곧잘 듣곤 하는데요. 누구에게나 그리움의 원천이 가슴에 다 있다 여깁니다. 그 대상이 어머니든 연인이든, 혹은 자식이든 친구든, 먼 그리움 아득한 그리움, 애정의 그리움 혹은 애증이 만들어 준 슬픔마저도 그리움이 되어 가슴에서는 눈물처럼 아리어 있다 여깁니다. 그것을 어떻게 퍼내어 시가 되게 하는가가 있을 뿐이라 여깁니다. 추억도 눈물도 기쁨도 행복도 모두 제게는 그리움의 뿌리입니다.
소운: 그렇군요. 시인이 보는 모든 사물이 다 그리움의 대상이겠군요. 다섯 권이나 되는 시집도 내시고 작품활동도 활발하신데 주로 글은 언제 쓰시는지 궁금합니다.
강 시인: 예. 저 같은 경우는 가끔씩 잠을 설치는 새벽녘이 있는데요. 그렇게 깨게 되면 정신도 맑고 정적이라 참 좋아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지요. 밤잠이 들었다가 3시간 정도 자고 깬, 그런 시간 글을 쓰게 될 때가 많은데요. 저는 다작을 하는 편이지요. 주욱 놀다가 하루 저녁에 두 세편을 쓰기도 하지요. 평소에 메모를 많이 해 두는 편이예요. 그러다 보면 동녘이 밝기 전에 새들이 먼저 지저귀더군요. 제 시를 와서 읽는 것 같지요.
소운: 새벽에 새들이 와서 읽는 시를 저도 한편 읽어 보아도 되겠습니까? 강시인님의 시 중에서 가슴 저리게 사무침이 묻어나는 시를 기억합니다.
멀리 있어 더 그리운가/ 이토록 가슴 저미는 세월을 셈하며/
하얗게 세우는 밤으로 새벽을 맞는다//
여명을 깨우는 저 새소리/ 가슴 위로 둥둥 떠 가는 소리로/
봄이었던 그 어느 날도 / 가을 되어 떨어지고
오고 가는 순리 속에 던져두라 하였지만/ 그래도 목 말라 흐려지는 눈시울//
그대 아직도 내 속에 사는가 / 멀리 두어도 멀리 있지 못하는/
내 속의 그대//
ㅡ강숙려 ‘내 속의 그대’ 전문ㅡ
제게도 있을 가슴 안의 소리인 것 같습니다. 역시 서정 어린 그리움의 시인이라 여겨집니다.
강 시인: 새삼 목이 메입니다. 모든 사물이 우리의 채울 수 없는 그리움이라 여깁니다.
소운림선생님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가슴을 잘 들어다 보셔요. 나도 모를 그리움이 앉아 있을 터이니깐요. 그게 바로 시라 여깁니다. 제가 답시 한 편 읽지 않을 수 없군요.
안개 속에 젖은 몸짓/ 그림처럼 눈부시다//
무엇이라 이름할까/ 소리라 그것을,//
모두가 사라져 갈 / 찰라의 순간들//
만물이 웃고 있는 햇살아래 / 부끄럼 타는 이 아름다움마저도/
나는 그냥 바라만 보았던 일// 유유한 것/ 흘러 가는 것/
사라지는 것이 / 아, 눈부셔라.
ㅡ강숙려 ‘사라지는 아름다움’ 전문ㅡ
소운: 자작 시를 직접 읽으시니 더욱 좋군요. 다음에 시 낭송의 밤엔 저도 좀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시인님의 앞으로의 계획과 희망은 어떠하신지 들려 주시겠습니까?
강 시인: 앞으로의 계획이며 희망이라면 수필집 두 권, 시집 두 권, 시조 집 한 권을 더 쓰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살아가는 목표가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불러 주시는 그날까지 시를 쓰고 있을 제 모습이 아름답게 여겨집니다.
이제 저도 이순을 앞에 두고 앉았으니 하늘의 소리를 듣는 귀를 가져야 하리라 여깁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어진 삶을 감사하며 남편의 마음에 귀가 되고 웃음이 되고, 글로벌 가족인 아이들을 자주 볼 수 있길 원해 봅니다.
소운: 오랜 시간 감사합니다. 강시인님의 희망과 계획이 모두 이루어 지길 바랍니다.
강시인: 감사합니다. 이번 문예지가 나오면 제일 먼저 드리겠습니다.
( 2004년 세계한인문학에 게재 인터뷰 )
제 1 부 수필처럼 살고 싶다
1. 아름다운 보라색
2. 횡재
3. 수필처럼 살고 싶다
4. 소리
5. 아름다운 세월
6. 흰 칼라에의 향수
7. 밤사이 안녕!
8. 서글픈 제비와의 만남
9. 어머니의 섬
10. 어머니의 교훈
11. 행복이란 이름으로 반짝이는 별
12. 봄의 정인
13. 그대 바라기
14. 누군가 향기 나는 이 새벽을 여는 이는
15. 남편이란 이름의 울타리
16. 시인이 시를 쓰지 못하는 이유
아름다운 보라색
보라 빛은 정말 아름다운 뉘앙스를 준다.
꿈을 꾸게 하고 사랑을 노래하게 한다.
노을 지는 바다 위에 엷게 깔려 누운 저녁 노을의 보라 빛, 막 터져 나온 도라지 꽃의 은은한 안개보라 빛, 오디 열매의 달콤한 검자주보라 빛, 석류의 유리알 같은 투명체에 감도는 신비스런 연분홍보라 빛, 어느 종류의 보라 빛이든 보라색은 언제나 아름다운 감동을 나에게 준다.
이른 봄 길섶에 앉은뱅이 꽃으로 피어나는 오랑캐꽃의 진보라, 외진 산길 따라 홀연히 피어있는 아련한 청포 꽃의 수줍은 보라 빛, 나비 떼를 부르는 노오란 배추꽃 곁에 가날픈 허리를 간들거리며 봄바람에 나붓기는 열무 꽃의 연보라 빛,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이슬 옷을 입은 가지 꽃의 잘 조화된 청보라 빛, 짙은 색이나 옅은 색의 보라 빛의 감도(感導)는 큰 차이가 나지만 보라색은 언제나 나의 가슴에 향기처럼 감긴다.
사춘기 시절을 나는 시골에서 자랐다.
시냇물이 흐르는 물 줄기를 따라 한 없이 흘러 가보기도 하고 뒷산의 산마루에 피어난 꽃들을 따라 해 지는 줄도 몰랐던 때가 있었다.
그때 마다 나는 솔바람에 간들거리는 연보라 빛의 구절초를 만나곤 했다.
그 이후 오랜 세월이 흘러도 나는 아직도 가을 들녘에서, 시냇가에서, 산마루에서 만났던 그 연보라 빛 구절초를 잊지 못한다.
그 애절한 보라 빛 앞에 서면 예나 지금이나 나는 보랏빛 소녀가 된다.
보라 빛 사연에 쌓이고 싶다. 그리고 가슴에 꽉 품고 싶다.
아직도 보라 빛 파장이 전하여 오면 나는 언제고 소녀가 되어 그 들녘에 서곤 한다.
시집 한 권만 들면 온통 내 세상으로 변하던 열아홉 그 시절로 가 서곤 한다.
행여 흰머리가 돋아나지나 않았나 조바심을 치는 이 나이에도 나는 보라 빛 꿈을 꾼다.
그리고 영원히 나는 오로라처럼 보라 빛 춤을 추리라.
보라 빛 세상에서 보라 빛 꿈을 꾸는 보라공주가 되어 보라 빛 공기를 마시고 싶다.
한 아름 마신 공기는 보라 향을 내며 훨훨 탈 것이다.
이것이 내가 바이올렛으로 불리어진 까닭이기도 하다.
은은한 새벽빛을 머금은 물 보라색 롱드레스를 한 벌 가졌으면 싶다.
그리고 청보라색 스카프도 한 장 가졌으면 싶다. 비 내리는 거리를 청보라 스카프를 매고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고 또박또박 걸어 보고 싶다.
빗방울이 나뭇가지에 앉아 고운 구슬을 꿰고 있다.
꽃 가게에 둘러 능수보라 빛 수선화나 한 아름 사다 꽂아야겠다.
수선화 향기에 묻혀 보라 빛 나르시스에 젖고 싶은 오후다. (‘98. 11.27)
횡재(橫財)
이른 새벽 잠이 깨이면 웬 횡재인가 싶다.
새벽 3시경이면 더욱 맛이 난다. 고요가 적막에 잠겨 나의 영혼을 날게 한다.
요즘 되도록이면 바이오리듬이 활성화 한다는
이순을 넘기고서도 지금까지 버릇되어 온 잠 습관을 고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닌 듯싶다. 그러나 이제 나이도 나인만큼 습관을 고쳐가며 살아야 할 것 같은 위기감 이랄까.
우리 부부는 할 수 있다면 꼭 그렇게 해 보자고 약속을 하고 요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셈이다. 보통 나이가 들면 일직 자고 새벽 잠이 없다고들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우린 아직 창창한 젊은이라는 뜻인 가. 하하하 웃음을 금지 못할 얘기지만 사실이라면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웃에 사는 갑장 내외는 벌써 일어나 수영을 갔다 오는데 이제야 가는 일이 허다하니 아마도 상당히 웃기는 이들이라 속으로 놀림을 하고 있음이 분명할 것이기에 우리도 웃는다.
그런 연고도 있지만 바이오 리듬을 타야 건강에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휄빙 식사를 챙기고 운동을 즐기면서 잠 하나에 노예가 될 수는 없는 일이기에 다짐을 해 보지만 하루 이틀을 넘기지 못한다. 나는 송충이가 된 것 인가. 솔잎이 그리워 잠 자리에 들었다가도 기어 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날들 중 서너 시경에 잠이 깨이면 이건 대단한 횡재가 되어 시詩 두어 수 거뜬히 건지게 되고 나의 미발표 창작 창고는 든든해 진다.
부자가 된 듯 흐뭇한 마음으로 동이 훤히 틈을 보면서 눈을 잠깐 붙이면 개운한 하루가 시작 된다. 간밤에 일운 몰래 내가 만든 부자 티켙 인 셈이다. 그런 날이면 일운은 내 아침 잠이 깰 때를 존중해 주니 감사한 부분 중 하나다.
그러고 보니 내 인생에 있어 횡재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좋은 부모님 밑에서 행복하게 자랐고, 아름다운 열애, 물새 알 같은 사 남매의 아이들, 쓰지 않고는 못 베기는 가슴의 것들을 노래하는 시인의 길하며, 일운을 만난 노년의 행복이 또한 그러하다. 아직도 나를 염려해주시는 건강하신 어머니가 살아계시어 어머니, 하고 부르면 금방 대답할 수 있는 다정한 어머니가 계심은 또 어떠한가. 아 나는 횡재의 여왕인가.
싱그러운 햇살과 살랑대는 바람결 향기로운 장미의 계절 7월이 여기 있다.
고맙고 감사한 날이 오늘도 나에게 주어짐을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새벽,
이 횡재의 시간에 시 한 수 건지리라.
영혼을 담아 쓴 시 한 수 건져 어머니께 바치리라. (’08. 7. 새벽)
수필처럼 살고 싶다.
오늘은 비가 내린다.
잿빛 하늘에 바람 한 점 없이 사그락 거리며 비가 내린다.
금아 선생님의 <그 날> 을 읽으며 두 볼에 흐르는 눈물을 나는 닦지 않았다. 책을 덮으며 오랫동안 쌓여온 뚝 이라도 터진 듯 실컷 울어야 했다. 때론 남의 서러움에 힘 입어 함께 울다 보면 기분이 좀 가라 앉는 때가 있다.
선생님은 <아버님의 병환>이란 노신魯迅의 글을 읽다가 오십 여 년 전의 그 날을 회상하시며 쓰신 글이다. 요양을 떠나계시던 어머님의 위독 전보를 받고 마차에 올라 이 세상에서 제일 느린 말이라 울면서 도착하나 어머님은 어린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선생님의 슬픈 눈물 속에서 나의 여린 가슴은 도리듯 아픔이 다가와 더 크게 내 서러움으로 변하였나 싶다.
선생님은 ‘엄마’를 그리워하며 눈물로 원고를 적시셨고, 나 또한 ‘그 날’을 읽으며 나의 곁에 두지 못한 이것저것의 서러움들이 다가와 글 속의 선생님과 하나가 되어 울고 있었다.
이렇게 감정은 전염이 되어 위로가 되기도 한다.
살아 가는 동안에 크고 작은 일들이 언제나 발 앞에 놓이기 마련이고 그럴 때 우리는 위로를 하기도 하고 때론 위로를 받기도 하면서 살아 간다. 그러나 사람의 위로라는 것은 말 그대로 위로慰勞일 뿐 가슴에 남아있는 그 황량한 뿌리를 어떻게 지울 수가 있겠는가. 세월로 다림질하며 이토록 가슴에 와 닿는 글을 읽으면서 한껏 울어 눈물로 마음을 닦고 보면 덩달아 마음도 한결 가벼워 짐을 느낄 때가 있다. 금아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그 순수함에 감동하고 잔잔함에 마음이 설렌다.
시냇물이 흘러가듯 잔잔하게 감동으로 흘러가게 하는 선생님의 글이야 말로 ‘수필은 청자연적이요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 아닌가 싶다. 수필은 고요한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좋은 수필처럼 살고 싶다. 수필처럼 산만하지 않고 찬란하지 않으면서 우아하고 산듯하며 가을 들녘의 들국화처럼 살았음 싶다. 그리하여 생生을 다 하는 날 샛별이 지듯 그렇게 가고 싶다
밴쿠버는 비가 많아 좋았다.
비 내리는 날이면 차 천장에 부딪히며 떨어지는 빗소리가 좋아 차 속에서 커피 한 잔을 놓고 흐르는 음악과 함께 취하여 보는 날도 있다. 비가 싫어 겨울을 다른 곳으로 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나 내리는 비를 보는 것이 즐거운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내 기준을 벗어보면 때때로 나와 너무나 다른 방법으로 삶의 일면을 즐기는 사람들을 만나게도 된다.
온 겨울을 비로 보내고 비 속에서 봄을 맞이하는 밴쿠버가 나는 참으로 신기하고 멋지게 여겨진다. 떡 가루를 뿌리듯 소올솔 비가 내리고, 또 비가 내리고, 그 속에서 잔디는 여름보다 더 푸르르 늘 푸른 꿈을 꾸게 했다. 열흘이고 스무 날이고 내리던 비가 어느 날 말짱히 개이면 뒷산엔 흰 눈이 햇살에 찬란히 빛나곤 했다. 그 산듯하고 맑음이 화려하기까지 하다.
쨍그랑! 소리라도 날 듯이 투명한 맑음이었다. 밴쿠버의 겨울은 오는 듯이 가는 듯이 비 속에서 그렇게 오고 갔다. 뒷산엔 봉우리마다 흰 눈을 이고 있는 2월, 잔디를 열고 수선화 새싹이 고갤 내민다. 사랑스러운 아가의 젖니가 쏘옥 나오듯이 그렇게 봄은 오곤 했다. 비록 매미가 울어 한 여름을 장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밴쿠버의 싱그러운 여름은 세인世人을 놀라게 하고 우리들 생의 쉼을 가져 다 준다. 이제 이 가을에 나는 새로운 꿈을 꾸고 싶다. 구절초 향기로워 사랑에 젖던 그 가을이고 싶다.
<생략>
초원을 달리는 간지럼으로
안개 속에 젖으면
가을 내음이 서서히 흔들리고
추억처럼 맴도는 그리운 것들
이슬이 되어 맺힌다
떨어지는 진주인양
이슬 속에 발을 담그면
작은 배가 되어
흔들리는 가을을 저어간다
ㅡ ‘추정의 오수’ 중에서 ㅡ
아름다운 내일의 안주를 위하여 마음 한 곁에 조용히 빈 자리 하나 만들어 놓고 싶다.
인생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지혜롭게 이루어 가며,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살아야 하리라. 수필처럼 산뜻하고 아름다운 고요로 남은 생을 수 놓아 가고 싶다. (’97. 9월 )
동아라이프지/풀꽃 따는 여자 2 (
소 리
“풀꾹풀꾹 풀꾹풀꾹,
계집 죽고 자식 죽고 서답 빨래 우찌 할꼬”
피를 토하듯 이른 봄 잎새들이 돋을 즈음 뒤뜰 우물가의 대나무 숲에 와서 슬프게 울던 새. 풀꾹새! 풀꾹새의 슬픈 사연은 아직도 내 가슴속엔 눈물 겨웁다.
언제나 숲 속에서 슬피 울다 훌쩍 날아가 버리므로 한 번도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새이다. 아마도 온 몸이 멍들어 퍼렇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풀꾹새는 어린 시절 할머니께 들은 사연을 전설처럼 간직한 체 내 가슴속에 남은 새이다. 새삼 마음으로 그 소리를 듣는다.
지금쯤 고국의 봄 속엔 그 풀꾹새는 울고 있을까.
조국을 떠나 지구의 반쪽이나 먼 이국 캐나다에선 혹시나 귀를 귀우려 보아도 이름마저 생소한 부루제이, 로빈 새들만이 이국 소리를 내며 지저귈 뿐이다.
내 조국에서 귀에 익은 뻐꾸기, 꾀꼬리, 까치, 휘파람새, 밀하부리의 소리는 들을 수가 없다.
소리도 추억 속의 한 장으로 피어 올라 향수 속에 그리움으로 남는다
꾀꼬리 소리는 귀로 듣고 풀꾹새 소리는 가슴으로 들린다.
소리에 색칠을 한다면 명암이 뚜렷할 것만 같다.
나는 가끔 달빛 소리를 들으며 가슴을 설레기도 한다.
봄 꽃 향에 취하여 춘풍에 실려오는 달빛은 향긋한 소리를 낸다.
가을 달빛은 낙엽 위에서 서걱서걱 소리를 내고 찬 겨울의 달빛은 파랗게 차가우며 별빛에 부딪쳐 크리스탈 소리를 낸다.
땡그랑 땡그랑 풍경 소리도 좋다. 풍경 소리는 겨울 밤이라야 재격이다.
더 더욱 새벽녘에 울리는 풍경소리는 산사가 아니라도 고요로워 좋다.
아이들의 동요소리, 해맑고 천진스런 아가의 웃음소리, 고사리 같은 손을 간들거리며 엄마 품에 안겨 웃는 아가의 찰랑거리는 웃음소리는 별이 되어 떠 간다.
소리에 색칠을 하면 무지개가 된다.
한이 서린 풀꾹새 소리, 정인을 잃은 슬픈 여인의 울음소리, 늦은 밤 엠브란스의 다급한 소리처럼 슬픈 소리도 있다.
애절한 소리, 절규의 소리, 분노의 소리도 있고 달콤한 소리, 사랑의 소리, 환희의 소리도 있으니 우리는 살아오면서 때론 가슴으로 머리로 얼마나 많은 소리를 지르며 살아왔을까.
할 수만 있다면 즐겁고 환희로운 소리만 내며 살았음 싶다.
누가
이렇게 예쁜 이름 지었을까
보기만 하여도
소리를 내는 이름
은방울!
불러 만 봐도
또르르 굴러 가겠네.
<시조/ 예쁜 이름 전문>
많이 욕심 없이, 많이 단순하게 살면 예쁜 소리 고운 소리가 많이 들리고 많이 나누게 되지 않을까 싶다. (
캐나다 중앙일보 7.30.’04 게재
아름다운 세월
맛은 몸소 체험하여야 하는 생리적이고 감각적이라면, 멋은 바라 보기만 하여도 되는 여운적이고 교양적이겠다. 맛스러운 삶을 가꾸며 멋있게 살 수 있다면 행복의 자리에 앉은 것이겠다. 몸과 마음이 건전하며 자상까지 한 남자를 만난다면 더욱 좋겠다. 때 맞추어 긴 여행을 준비할 줄 알고, 돌아오는 길엔 작은 리본을 맨 선물 하나 내밀 줄 아는 남자를 만나는 것은 멋과 맛이 어우러지는 앙상불이겠다. 또한 몸과 마음이 양순하여 상냥한 여인을 만나는 것도 기쁨이겠다. 빈틈 없는 듯 하면서 열어 줄줄 알고 사치한 듯 하나 낭비하지 않고 화려한 듯하나 가난을 두려워 않는 부드럽고 싱그러운 여인을 만나는 것도 맛과 멋이 어우러지는 조화이겠다.
이 아침 조락하는 낙엽을 보면서 새로운 삶의 일면을 엮는 것은 역설적인 일이긴 하지만 빠저 나가는 시간 속에서 아쉬움을 다시 엮어 보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나는 젊은 청년들을 눈 여겨 보고 그들의 모습이 여간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모름지기 과년한 딸 자식을 둔 부모로서 한번쯤은 지나가는 젊은이들을 눈 여겨 보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몸과 마음이 상냥하고 양순한 아름다운 눈을 가진 딸아인 그 당시 배움의 가치에 매달려 뛰어 다니니 어미 된 마음으로 여간 염려스러운 것이 아니라 걱정하면 “엄마, 다 때가 되면 임자가 찾아 오게 되어있어요.” 했다. 그 말에도 일리는 있었지만 딸아이 곁에 머물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청년들을 밀어 내기만 하는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자니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인생관은 누구나 다른 법이니까 어디에 기준을 둘 수는 없지만 기본적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나는 딸아이의 인생 한 모퉁이를 간섭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딸아이가 맛과 멋을 내포한 싱그럽고 근사한 젊은이를 만나서 짝을 지어 나란히 내 앞으로 걸어 오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행복이 될 것 이기게 맘 조렸었다. 이제 맘 조리던 그 시절도 먼 옛날이 되어 아름다운 세월로 수 놓아지는 오늘이다.
어느새 여든의 고개를 훌쩍 넘기신 어머니는 칠십여 년 전, 노비를 거느리고 가마를 타고 시집을 오셨었다. 나이 열 일곱에 신랑 얼굴도 못 본채 혼례를 치루고, 첫 밤을 맞이셨으니 얼마나 두렵고 떨렸을까 싶다. 가끔 짖궂게 여쭙기라도 하면 그래도 늠름한 신랑 이였다고 일축하시며 얼굴 붉히시는 고운 어머니, 언제나 성경 읽으시고 화분 손질로 낙을 삼으시는 단아하신 어머니를 뵈오면 아직도 나는 소녀가 된다. 세대의 바뀜을 눈으로 피부로 느끼며 살아오신 어머니는 “너흰 참 좋은 세상에 산다.” 하시며 지난 세월을 회고 하신다. 어머니의 회고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으면 참 고운 분이심을 느끼게 된다.
사람 한 평생 어찌 좋은 일만 있겠는가 만은 어머니는 좋은 기억들만을 갖고 계시니 행복하신 분이시고 또한 고운 분이시다. 사람들은 잊어도 좋을 만한 때가 되어도 끝까지 어둡고 괴로운 기억에 매달려 스스로를 갉아 먹고 힘들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할 수 있는 한 나쁜 기억은 버리고 좋은 기억만 남기려 하는 긍정적인 자세의 사람도 있는 것을 본다.
선자는 불행한 대열에 선 사람이고 후자는 지혜로운 사람이며 자기 스스로는 물론 주위 사람까지도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일 것이다. 사람 한 평생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지만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많은 것을 잃으며 또한 얻으며 집착과 애착으로 아집이 굳어 간다고 여긴다. 그러나 내게서 가장 큰 것을 잃어 보라. 세상이 하얗게 보이고 나면 모두를 비울 수 있게 되리라. 이 세상에 남길 내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집착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 나를 비우므로 자유로워지는 것을 알게 되리라. 집착에서 해방 되면 두려움이 없게 되고 매사가 긍정적이 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랬을 때에 내 안에 퍼져있는 행복의 향기를 맡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에게서는 늘 이런 향기가 내게로 날아옴을 나는 맡는다. 내 아이들에게도 나는 이런 향기를 주고 싶다.
세상은 날마다 변하고 자유는 너무 남용 되여 방종으로 흐르고 있지만 사랑으로 감싸는 무리가 더 크다면 염려 않아도 되리라 본다.
멋과 맛을 풍길 수 있는 싱그러운 젊은이들이 이 땅에 있는 한 아직은 긍정적인 세상이 아닐까 싶다.
세상은 넓고 자유로우며 세월은 아름다움으로 차 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맺어 지는 젊은이들을 위하여 멋과 맛의 이름으로 행복의 잔을 높이 들어 본다. (’98. 10월 )
’99 좋은만남 (종이상자 11)
흰 칼라에의 향수
중 고등 학생의 두발과 복장이 자율화 되면서 아침마다 콩 튀듯 바쁘던 나의 일이 한가지 줄어 들었다. 세 딸아이 도시락 싸랴, 머리 땋아주랴, 공책에 싸인 해주랴 끝없이 바쁜 나에게 중학교에 들어간 큰 딸아이가 머리를 자르고 나니 일이 한가지 줄어든 셈이지만 왠지 마음은 섭섭한 느낌이다.
흰 칼라의 단정한 교복, 두 가닥으로 땋아 내린 고운 머리 결, 그것은 어쩌면 여학생의 증명 같기도 하고 순결한 모습의 상징 같기도 했다. 또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들 가슴엔 가을날 파아란 하늘가에 산들바람을 맞으며 피어나는 한 송이 들국화를 보는 것 같은 향수를 느끼게도 해 주지 않던 가.
그러나 멋대로 자르고 거기다 울굿불굿한 꽃 핀까지 꽂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면 참 세상은 멋대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한심스럽기 까지 하여진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이제 세대차이라는 말을 들어야 할 땐가 싶다.
이제는 흰 칼라의 단정한 교복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웬일인지 가슴속에 짙은 우수가 깔리듯 쓸쓸한 마음이 든다.
내가 꼭 큰 딸아이만 할적에 주일이면 풀을 빳빳하게 세운 새하얀 칼라를 곱게 다려 걸곤 했다. 때때로 두 가닥으로 곱게 땋아 내린 머리를 나풀 거리며 개구리 울고 메뚜기 뛰는 논길에서 시집 한 권 들고 서 보면, 온 세상이 내 것 인 냥 즐거웁고 설레임으로 꽉 차 버리곤 하던 그 시절이 아직도 눈에 선히 그리워 진다. 엄마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딸아이는 알까. 울굿불굿한 원색의 옷을 좋아하고 찻집이나 영화관 가는 것을 즐거워하는 젊은 아이들을 보노라면 나는 한없는 슬픔의 뿌리에 와 닿는다. 나는 정말 이 세대의 저 쪽에 서 있는 것 일까.
우리 아이들도 이 엄마와 같은 향수를 언젠간 한번쯤 느낄 수 있을는지, 참으로 메마르고 빤질한 시간들만 더욱 더 밀려드니 안타까운 마음 그지없다. <홈닥터
이 글은
원고를 정리하다가 우연히 찾아내고 보니 그 시절의 그리움과 정겨움이 왈칵 차 올라 보석처럼 귀해 보인다. 콩 튀듯 바쁜 세월이었다. 그래도 그 시절이 있어 즐거움도 사무치게 많았지 않았던가. 교복을 입던 나의 시절과 아이들 시절의 그리움과 향수가 어울려 가슴을 저민다. 덩달아 고만고만 하던 세 딸아이와 그 밑으로 7년이란 세월 후 늦게 어렵사리 얻어 다이야몬드라 불리던 어린 아들의 재롱도 눈에 어려 감회가 새롭다. 시간은 세월이 되어 아이들을 키우고 우리 모두를 변하게 한다. 올망졸망 나의 젊은 시절을 바쁘게 만들던 딸아이들은 이제 모두 결혼을 하였다. 큰 딸은 열살 난 아들을 두게 되었고 둘째 역시 별빛 같은 어여쁜 딸을 두었다. 셋째는 동경에서 디자이너로 자기 일에 몰두하고 아들은 아직 수학 중이지만 모두들 그런 시절이 있었던가 싶게 다들 자기 일에 몰입하고 있다.
구관이 명관이라 했다. 새로운 것 만이 다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우리의 옛 것은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것이 많이 있다. 세월이 흘러도 유형이 지났어도 그리운 것은 다시 오게 되고 경험으로 다시 찾게 되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어제는 청계천이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곁을 다시 찾아 왔다고 대대적으로 뉴스를 하고 있었다. 새로운 각도로 변모는 하였으나 그 자리를 다시 찾은 청계천은 그 시절의 향수를 젖게 하였고 새 세대의 청년들에겐 새 기분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는 다시 교복을 입게 될 날도 있지 않을까 싶은 바람도 가져본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라는 말도 옛말인 가 싶다. 이제는 작년 다르고 올 다르고 어제 다르고 오늘이 다름을 느낀다. 쌍둥이 간에도 세대 차이를 느낀다고 하니 세상이 어디로 달음질을 치고 있는지 염려 된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달라지는 세대 앞에 아이들을 나무라기만 할 수가 있을까 싶다. 그래도 아버지의 꾸지람을 네, 네 듣는 아들이 대견스럽기도 하다. 아무렴 꾸지람을 들을 수 있는 부모가 그래도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어젠가 느낄 날이 있겠지만 효도를 하려하니 부모님은 계시질 않았다는 말씀에 가슴이나 찡하였으면 싶다. 아무리 세월은 유수와 같다지만 우리는 이제 유수를 타고 그냥 유유히 흘러 만 갈 일이 아니라 남은 생을 아름답게 가꾸며 인생에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05. 동아라이프지 “풀꽃 따는 여자 14”
밤사이 안녕!
그대, 밤사이 안녕하셨습니까?
이렇게 인사를 나누기 시작한 날이 언제부터 였을까?
아마도 인생이 시작되면서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우리의 한치 앞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운명 앞에서는 저울질이 필요 없다.
하루살이가 집을 나서며 내일 아침 걱정은 말라고 한다 들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인간은 하루살이보다도 더 판단력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우리의 내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가까운 친지 중에 밤사이 변을 당한 일이 있었다. 밤 늦도록 즐거운 모임을 갖고 희희락락 돌아와 부부가 아침에 병원으로 실려가 그 이후 식물인간이 된 상태로 벌써 몇 년을 살고 있다. 졸지에 부모와 함께 할 수 없게 된 자녀들의 슬픔도 또한 알 수 없었던 일이다. 함께 모임을 가졌던 친우들은 아마도 밤사이 안녕에 대하여 가슴을 쓸어 내리는 안도와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어찌 이런 일 뿐이겠는가. 우리의 주위에서는 시시때때로 불의의 사고는 잇따라 일어나고 있다. 아무도 예고할 수도 없고 예고된 사고도 아니다.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사고는 불행이다. 우리를 슬프게 하고 때론 우리의 생활을 파괴 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고라는 운명 앞에서 속수무책일 뿐이다. 물론 평소에 우리의 부주의로 일어나는 사고도 있겠으나 불가항력으로 일어나는 사고를 우리는 운명이라 말하며 가능한 그 좌절에서 벗어나 보려 하지 않는 가.
사고는 사전을 찾아보면 ‘뜻밖에 일어나는 탈’ 이라고 쓰여있고 한자로는 ‘事故’라고 쓴다. 또한 불교에서는 사고를 ‘사람의 한 평생 겪는 생(生) 노(老) 병(病) 사(死)의 네 가지 괴로움(사고四苦) 중 하나를 이르는 말로, 중생으로서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괴로움을 이름’이라고 쓰여있고 한자로는 ‘死苦’라고 쓴다.
물론 한자를 놓고 보면 다른 말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같은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 뜻밖에 일어나는 탈이 우리 인생에 늘 걸려있는 것이 탈이 아니겠는가.
인생은 오는 데는 순서가 있으나 갈 적엔 순서가 없으니 오히려 공평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위에 나이 드신 어른이 계시면 먼저 염려를 하게 된다.
내게는 복이랄 수 있는 일 중에 아직도 엄마! 하고 부르며 찾아 갈 수 있는 어머니가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모른다. 이제 여든 다섯이 되시는 어머니는 아직도 슬하에
애지중지 자식 삼 남매와 그 짝들과 손자들의 안녕을 기도하시며 새벽을 여시고 손에서 성경을 놓지 않으신다. 언제라도 주님 불러주시면 감사히 떠날 수 있다 하신다. 회갑을 넘기시던 윤 유월 어느 날 손수 주검의 옷이라는 수의(壽衣)를 명주와 삼베로 곱게 만들어 놓으시고는, 곁에서 눈물짓는 나를 오히려 위로하시며 아름다운 일이라 하셨다.
이런 떠남을 할 수 있다면 복이리라. 그래서 우리는 죽음 앞에서 호상(好喪)이란 말도 쓴다.
언제나 따스하시고 정숙하시고 현모양처(賢母良妻)시든 어머니는 나의 스승이시고 친구시다.
더 바램이 있다면 어머니는 꼭 일주일만이라도 나를 곁에 두시었다가 내 손을 잡고 평안히 떠나시길 원하신다. 어쩌면 우리 어머니라면 가능하시지 않으실까 설레어 본다.
사람 한 평생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겠으나 좋은 일만 있으면서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남의 가슴에 한이 되는 일이 없어야겠고 주위가 어지러워서는 안 될 것이라 여겨진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감사히 받아 들일 수 있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리라.
인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은 미리 헤아릴 수가 없는 새옹지마(塞翁之馬)란 말도 있으니 너무 염려 말고 오늘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 여겨본다. (
서글픈 만남의 제비
강남 제비가 날아와 하늘을 빙빙 도는 아침나절에 반가움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내 어린 시절엔 처마 안 쪽에 봄이면 연례 행사처럼 제비 한 쌍이 찾아와 집을 짓고, 새끼를 키워 그 해 가을엔 인사라도 하듯 집을 빙빙 돌아보고 떠나가곤 했다.
식구인 냥 우리 가족은 오는 제비를 반겼고, 또한 떠나는 제비 일가에게 내년에 다시 오라고 인사를 나누곤 했다. 어린 내 마음엔 내년 봄까지 어떻게 기다리나 싶게 섭섭했었던 기억이 남아 제비에 대한 연민은 지금도 기다림이다.
그런 어느 날 현관 밖의 일을 까맣게 모른 체 여러 날을 지난 후에야 제비가 집을 지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와 함께 가라지로 드나들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긴 것 같다.
벌써 어린 새끼가 어미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받아 먹느라 재잘거리고 있었다.
타국에서 제비를 만나는 것도 반가움인데 내 집에 집을 짓다니, 그러나 이어 우리는 아연했다. 집을 짓느라 떨어트린 이물질들이 현관을 온통 더럽혀 놓았고, 그 배설물이 현관문이며 바닥을 눈 뜨고 못 볼 지경에 이르러 놓았던 것이다.
참 아이러니다. 반가움은 어디 가고 제비가 어서 새끼를 키워 떠나 주길 바라는 마음이나마
그래도 용하다 싶을 지경이었다. 그 해 가을 우리는 제비 일가족이 떠난 후를 기다린 탓이긴 하지만 부랴부랴 집을 뜯어 내고 대 청소로 마무리 짓고 내년엔 절대 집을 못 짓게 할 참이었다.
인심이 이러했다. 갑자기 놀부가 된 마음이라 편치는 않았지만 격세지감이 들었다.
이곳 집들이 못을 칠 수 없어 받침대를 될 수 없으니 그것도 변명중의 하나로 놓으려 한다.
다음해에 우리는 제비가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여 결국 제비는 여러 차례 답사하던 중 날아가고 말았다. 미안하고 섭섭하고 한편 안도했다. 이것이 현실이고 이기적인 오늘의 우리 마음임에 미안함을 금치 못하겠다.
세상 인심에도 그럴 것이다. 좋은 관계는 서로에게 불편이 없어야 할 것이다.
혼자 마음을 한없이 준다 하더라도 상대가 불편을 느끼고 있다면 돌아 보아야 마땅하리라 여겨진다. 행여라도 누구에게 불편을 주며 내 이기적인 고집을 부리지나 않았을까 새삼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했다.
흥부놀부의 동화는 시대를 거슬러 옛 얘기로 남는 오늘이 슬프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것은 좋은 만남이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순간일 뿐일진대 제비와의 스쳐 지나가는 인연에 내가 자꾸만 마음이 쓰여짐은, 작은 미물이라 하더라도 감정의 교류를 부여한 작가 탓이리라. 나는 순간 흥부에서 놀부로 전락한 것이 서글픈 탓이다. 다시는 흥부의 박은 나의 것이 아닐 것이기에 놀부의 무서운 박을 설겅설겅 탈 수도 없고 한동안 어려운 나와의 싸움이 마음의 그림자가 되어 울적했다.(’08 )
어머니의 섬
어머니
당신의 섬에는
눈물 꽃 보다 더 짙은 /가슴 꽃 향기가/ 언제나 묻어 납니다//
멀리 돌아 돌아/ 이제 와 서더라도/ 항시 그 내음 가슴으로 젖어와/ 당신의 섬에 또 엎드립니다//
언제 돌아 와 안겨도/ 싸매고 덮어 주시는 눈물//
안겨 오는 것으로/ 안도의 가슴이 되는/ 기도의 하루를 건너는 어머니//
당신의 가슴 꽃 피는 어머니의 섬에/ 한 송이 꽃으로도 만족하게 갈 수 있고/ 곁에 계셔 부를 수 있게 하여 주신/ 오늘에 감사합니다//
어머니/ 내 어머니/ 부디 만수무강 하소서.//
< 꽃 비가 되어 흐르네>에서
아직도 고운 내 어머니는 안경 고쳐 쓰시고 성경 읽으시며 그날의 일들을 꼭 기록해 두신다.
언제나 날아 갈 듯이 옥색치마에 연보라 쑥고사 저고리를 바쳐 입으시고 흰 고무신을 닦아 댓돌 위에 반듯이 놓으신다.
어느덧 팔순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는 요즘 화분에 꽃들을 손질하시며 인생의 순리와 자연의 순리는 하나라고 말씀 하신다.
첫째는 생과 사가 있으며 둘째는 어떻게 자리 하는가에 따라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 영광을 받으며 짧게 혹은 길게 여생을 마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꽃만 피울 것인지 탐스러운 열매를 남겨 주위를 기쁘게 할 수 있을지 또는, 언제 그런 자리에 무엇이 살았던가 기억 조차 어려움으로 사라져 갈 것인지는 물론, 후천적인 노력도 있어야 하겠지만 임의로는 아니니 순리에 어긋나게 살지는 말아야 한다 하신다.
‘서로 사랑하라’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보면 길이 보인다 하셨다.
이제 돌아가셔도 주님 곁에 가니 기쁨이요 조금 더 살라 하시면 또 주님 말씀 전할 수 있어 기쁘다 하신다. 달빛 같은 어머니의 모습 영원히 살아 계실 것이다.
어머니는 해주 정씨 가문에서 만석꾼의 맏딸로 태어나셨다. 유년을 곱게 자라 열 일곱의 나이에 가마 타고 시종을 거느리고 진양 강씨 가문으로 시집을 오셨다.
시집 오신지 십 년 만에 첫 딸을 얻고 행여 불면 날아갈까 오매불망 하니 불길한 꿈도 자주 꾸게 되었다 회고 하시며 내 손을 꼭 잡으시곤 하셨다.
그 정이 유별하셔서 아직도 나는 어머니의 우상처럼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 어머니의 사랑에 비하면 나의 마음은 만분지 일도 어머니에 미치지 못하니 불효가 막심하다.
그래도 언제나 세상에서 제일 귀하고 제일 효녀라 여기시니 참으로 부끄럽고 어머니 뵙기가 민망하기 그지 없다.
어머니는 나의 잘못을 한번도 야단을 쳐 보신적이 없다. 때론 야단 감을 눈 앞에 놓고도 오히려 자신의 부주의로 일어난 일이라 여기시며 당신 탓으로 돌리시던 어머니의 사랑. 아, 무엇으로 그 사랑에 따르랴! 세월을 살면서 나의 아이들에게 내가 받은 어머니의 사랑을 심어주며 나도 그런 어머니의 가슴이 되려 노력하고 있다.
들에 핀 들꽃을 보면서,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보면서, 아침 이슬이 이파리 끝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내가 눈물 짓는 것은 절대 슬퍼서가 아니다.
아름다운 것을 더 아름답게 표현하고픈 환희로운 창조자에게 대한 감사와 은혜들의 표현인 것이다. 내 어머니 딸이었다는 것에 대한 감사인 것이다.
어머니는 나의 스승이시고 내 마음의 지표이시다. 그 뜻과 품행 또한 닮아 가야 한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에게 늘 부족한 모습이니 부끄러운 마음이다.
나는 내 사랑의 대가를 은연중에 아이들에게 요구하기도 한다.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고 꼭 지적하고야 마는 포용력도 부족하다. 헌신적인 수고보다는 스스로 처리하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모습도 본다. 얼마나 가증스러운 모습인가. 그러니 어머니 앞에서는 늘 부끄러운 모습이 된다. 세월은 모성도 변하게 하고 있나 보다.
아이들 앞에 결코 부끄럼이 아닌, 어머니가 받으시는 존경과 사랑을 내 아이들의 가슴에서도 우러나오게 해야 할 것이다. 새벽 종처럼 은은히 내게로 퍼져 올 수 있게 기도하는 자세로 오늘을 엮어 가야 할 것이다.
마음에 스미는 공감되는 글이 있기에 다시 새겨 본다.
‘선의 씨를 내 가슴에 심어 준 분은 어머니였고, 자연계의 신비에 내 마음을 열어 준 것도 어머니였다. 그리고 관념 세계의 눈을 뜨게 해 주고 넓혀 준 것도 어머니 였다.”
주님 안에서 이 영광과 사랑을 어머니께 모두 드립니다.(
통신카드(테마가 있는 에세이) ’96. 8. 게재
캐) 중앙일보
나래시조 ’04. 겨울호 게재
어머니의 교훈
뜬물 내음이 나는 뽀오얀 안개 속 기억의 덮개를 열고 천천히 걸어 들어 가 보면 유년의 깃발이 나붓긴다. 내 어린 시절은 마을의 지주셨던 조부님의 덕분으로 신 학문을 공부한 아버지로부터 시작 된다. 아버지는 열 다섯에 색시를 맞았는데 과연 신랑다운 행동을 하셨는지 몹시 궁금하여 어머니께 살금살금 여쭈었더니, “그래도 워낙 조숙하신 어른이 셨는지라 새 신랑답게 행동하셨느니라.” 어머니는 그 때를 회고 하며 분홍빛 볼을 하신다. 아버지는 수학修學 중이셨고 어머니 사랑하기를 “너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 하셨더라.
세월은 흘러 시집 와서 십 년이 지나도 태기가 없었으니 온통 집안이 걱정이었고 어머니는 시 어른 뵙기가 민망하여 몸 둘 바를 모르셨더란다. 지금도 어머니는 그때를 회고하시며 오래 전에 고인이 되신 두 어른들께 죄송해하신다. 할머니는 음 동지 섣달 그 차가운 물을 퍼 올려 목욕 재계하고 며느리에게 태기를 달라고 머리에 고드름을 이고 정성을 드렸다 하신다. 당시 할아버지는 진사어른이시며 용한 한의셨다. 당신 생전에 며느리 태기를 못 보면 눈을 감을 수 없다 하시고 병석에 계시면서 처방을 내리셨다. 아버지가 처방 되로 약을 지었는데 마침 태기가 있으니 “아가야 고맙구나. 이제 손(孫)을 보겠구나.” 하시고 얼마 후에 애석하게도 운명하시었다 한다. 다음해 음력 유월에 어머니는 딸을 순산 하셨고 온 동네가 다 잔치였다 한다. 그렇게 태어난 나는 다섯 살이 되도록 아래로 동생을 보지 못 하였으니 또 할머니는 찬물 목욕 하시고 참기름 불을 밝히고 정성을 드리기 시작하셨다.
그런 어느 날 아버지는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으셔서 고백하기를 씨앗을 보았는데 태기가 있으니 집으로 들어오게 하면 어떨까 한 것이다. 할머니는 노발대발하셨고 아버지는 할머니 허락이 있기를 눈치 살피며 열흘, 어머니는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이지만 자신의 결정이 이 난국을 수습하는 일이라 여겨 할머니께 사죄하며 아버지를 용서하시게 하였다.
결혼 후 십오 년이 지나도록 겨우 딸 하나를 낳았으니 행여 새 사람이 들어와서 아들을 낳을 수만 있다면 다행 아니겠는가 생각하신 것이다. 마침 날을 받아 그 여인을 맞았는데 어머니는 대청 마루를 내려 서서 그 여인의 손을 잡아주며, “이 사람아, 잘 왔네. 사이 좋게 지내보세.” 하셨다니 듣는 내 가슴이 다 저렸었다. 큰 절로 예를 갖추고 그 여인이 들어왔다 한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작은댁의 방에서 주무셨고 어머니의 마음은 고요했다 하셨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대청에 나와보니 사랑채 댓돌 위에 아버지 신발과 작은댁 신발이 나란히 놓였는데 그 순간 하늘이 무너져오는 듯 아득함을 느꼈다 하셨다. 아랫것들이 볼까 봐 가만히 방으로 들어와 눈물을 닦으시고 정숙한 분위기를 만드신 어머니는 할머니께 아침 문안을 드리고 위로를 받았다 하셨다. 이 얘기를 듣던 때가 내 나이 열여덟이었는데 어머니 가슴에 안겨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 아버지가 몹시 미웁기까지 하였다.
그 당시 아버지는 진주 관공서로 통근을 하시었다. 아버지는 기차에 내려 집으로 오는 도중 한 선술집에 들렸다가 마침 그곳에 노래를 잘 하는 기녀의 노래 소리에 그만 빠졌던 것이다. 태기가 있다는 말은 말짱 거짓말이었고 육 개월쯤 지난 후 도저히 착한 형님 앞에 더 죄를 지를 수 없다 하며 “형님은 하늘이 도와 꼭 아들을 낳으실 거예요.” 하고는 큰 절을 한 후 스스로 물러갔다 한다. 후에 아버지 말씀이, 어머니는 작은댁이 당신 하나 보고 이 집에 들어왔는데 그 방을 비우지 말라 하고, 작은댁은 형님 마음 상하게 해 드리면 안 된다고 아버지 오는 것을 거절하니 베개를 들고 이 방도 저 방도 못 가고 괴로웠다 참회하며 서로 웃었다 하셨다. 어쩜 그럴 수가 있었느냐고 어머니께 여쭈었더니 “남자 대장부가 태어나서 이 좋은 세상에서 한 번쯤 그래 봄 직도 하지 않겠느냐.” 하신다. 이제 멋쟁이 활량이시던 아버지도 저 세상으로 가시고 어머니는 두 아들네를 오가며 고운 노년을 엮고 계신다.
어느 날 어머니 곁에서 하룻밤을 자고 싶어서 갔더니 내 손목을 꼭 잡으시며 “얘야, 섭섭하게 생각 말거라. 언제 하나님이 부르실지 모르는데 갈 준비를 하고 살아야지. 그래서 말인데, 여기 이 가방에는 내가 입고 갈 수의(囚衣)가 들어 있다. 기억 해 두었다가 서둘지 말거라.” 하시며 열어 보여 주신 가방 안에는 노오란 삼베와 명주로 만든 주검 옷이 곱게 접어진 채 들어 있었다. 젊은 우리들이 혹시 당황할 가 보아 언제 이런 옷을 만들어 두셨나 보다. “이것은 틈틈이 내가 생각나는 데로 써 모아 둔 글이다. 내가 가고 나면 이 상자는 네가 가져 가도록 하여라.” 목이 매여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괜찮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져 있는 것이지 않니. 하나님 부르시면 기쁘게 갈 천국의 소망도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하시며 오히려 나를 위로 하신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나도 당신을 닮을 수 있을까요. 분홍빛 고운 상자 속에 어머니의 일흔다섯 해의 꿈과 소망의 모습들이 들어 있을 것이다. 싸고 또 싸 두신 어머니의 작은 상자는 마음의 노래일 것이다. 아직도 고운 어머니는 ‘예쁜 한복 할머니’로 불리시며 늘 찬송하시고 날마다 성경을 쓰신다. 나도 내 아이들에게 이런 모습으로 남았으면 싶다.
사랑이며 기쁨의 곱고 정갈한 모습으로 살아 갈 수 있도록 어머니께 날마다 배워가고 있다.
이런 모든 모습들이 내겐 교훈으로 남는다.
어머니! 하고 가만히 불러 보면 가슴 골짜기에서 메아리 치듯 어머니의 조용한 미소가 울려오는 듯 하다. (’98. 4월 )
좋은만남 ‘98. 5월호 칼럼 (종이상자 2)
풀꽃 따는 여자 11 동아라이프 ’05. 9 게재
**2008년 5월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옛 전에(십년전) 쓴 글이지만 부모님 생각이 나 펼쳐 본다. 아직도 정정히 성경 읽으시며 자애로우신 어머니 부디 만수무강 하옵소서!
행복이란 이름으로 반짝이는 별
단풍이 너무 고와서 눈물이 나고 푸른 하늘이 시리도록 맑아 눈물이 나고 아이들이 보내오는 찰랑찰랑하는 행복의 목소리에 나는 눈물을 흘린다.
그것은 기쁨과 환희로움의 소리일 것이다.
책갈피에 눌러서 말린 예쁜 꽃들이랑 풀잎들이 그 계절이 지났는데도 본래의 색깔을 그대로 유지한 채 몸 매무새 하나 흐트리지 않고 단장하고 있다.
마침 빈 액자를 구하였기에 마른 꽃으로 작은 정원을 꾸미고 있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아이들에게서 번갈아 전화가 왔다.
“엄마, 행복하셔요? 많이 행복하셔야 해요.”
나는 안다. 아이들이 왜 이토록 엄마가 행복해 하고 있는지를 듣고 싶어하고 꼭 행복하길 바라는 그 마음을 ……
선자는 엄마가 행복한지 알고 싶고 후자는 꼭 행복하길 바라는 아이들의 마음이라 여긴다.
나는 눈을 감으며 생각을 먼 시절로 보내본다.
한창 아이들이 예쁘게 자라던 꽃 시절, 오매불망하는 우리 모습이 시 어른의 염려로까지 끼쳐 ‘신이 셈 낼라’ 하시었다. 그래도 마냥 좋기만 했던 시절이었다.
정말 신까지도 셈을 내었을까?
그런 내가 불혹의 중턱에서 덜컹 혼자가 되었으니 온 집안에서는 물론 아이들까지도 엄마가 염려스러웠던 모양이다. 염려하는 모두를 뒤에 두고 나는 그가 누워있는 천안공원 대붕 21단에 쫓아가서 멍하니 앉아있기 일수였다. 그렇게 이승과 저승의 공간에서 허탈하게 자신을 놓고 있던 어느 날 그를 만나러 또 산으로 갔다 오면서 교통사고를 내고 말았다. 그 때 비로소 무서운 세상을 보았고 사람이 그토록 무 경우 하고 악하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 어디에도 연약한 이 마음으로는 설 자리가 없음을 더욱 슬프게 느껴왔다. 더욱 더 이미 가고 없는 그 사람만이 그리움으로 남아 나를 몰아 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그리움에 사무쳐 울다가 지쳐 그리움을 퍼 내는 시인이 되었다.
내 마르지 않는 그리움의 우물은 더욱 깊어 만 갔다.
연가를 부르는 두 권의 시집을 내고도 터이지 않는 막막한 가슴은 달래지지 않았다.
새벽 안개를 가르며 길을 떠나고 별을 이고 돌아오는 멀고 긴 여로의 여정을 되돌며 눈물처럼 외로워 했다.
그런 숨막히는 내면의 고독과 싸우는 나날 가운데 빛으로 내게 오시는 이가 있었다.
내 꺼질 줄 모르는 그리움의 눈물은 드디어 하나님으로 승화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잔잔한 기쁨이 되어 평강을 주었다.
겸손으로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사랑 가운데 서로 용서하고 감싸주며, 말씀으로 서로 권면하며, 허락하시는 삶을 통하여 살아가는 지혜가 보여지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나는 참으로 이기적이고 감상적이며 철없는 삶을 살아 왔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내 모순투성이 모습을 내 놓고 보니 부끄럽고 턱 없는 인생이었다.
아이들 앞에서의 어미 모습으로도 가당찮음이었다.
지나친 독선으로 강한 말을 쏟아 놓기도 하고 감당 못할 눈물을 보이기도 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착한 내 아이들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남편을 잃은 상실감이 스스로 모든 것으로부터 방어하며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나를 몰아 갔던 것이다.
‘이 세상에는 나 혼자다. 너희들도 머잖아 너희 짝을 찾아 다 갈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이 터무니 없이 내 가슴에 꽉 차 왔던 것이다.
오매불망 사랑하더니 이렇게 혼자 두고 훌쩍 가버린 것에 대한 원망과 분노와 좌절로 뭉친 덩어리를 풀기엔 이 시간으론 역 부족이었던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내게 오시지 않았다면 얼마나 오래도록 슬픈 마음으로 살지 않았겠나 싶으니 오늘의 이 자리에서 감사한 것 밖엔 없다.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모든 것을 사랑으로 풀고 보니 분노할 것도 원망할 것도 아무 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내 마음에서 만들어진 악이었다.
내 마음에서 풀고 보면 아무것도 문제로 남을 이유가 없었다.
그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이기적인 자아로부터 발생하는 것이었다.
세월은 쏜 살 같이 흘러갔다.
그렇게 칠 년이란 세월은 바람처럼 갔고 죽을 같았던 시간은 서서히 새로움으로 변하여갔다.
스스로 적응하며 평강으로 다스려지는 마음으로 되어갔다.
딸아이들은 그림처럼 예쁜 신부가 되어 늠름한 신랑 품으로 떠나 들 갔다.
새 천 년을 앞에 두고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도 왔다.
더 이상 외롭지 않게 새로운 인생을 역어보라 사랑의 짝을 주시어 정묘 년 섣달을 춥지 않게 해 주셨다.
어느새 장승처럼 크다란 막내인 아들 녀석이 넌지시 우리 부부의 손을 꼭 쥐어 온다.
새 천 년이 열리는 시간을 카운터 하면서 행복이란 이름으로 반짝이는 별을 하나 둘 세어 본다. (
봄의 정인
내 인생의 봄날 아침 희디흰 마가렡이 줄비하게 피었습니다.
밤사이 내린 비로 촉촉히 젖은 마가렡은 청초한 새 색시 모양으로 곱고 어여쁩니다.
오늘은 어디 멀리 그리운 곳으로부터 다정한 편지라도 왔으면 싶습니다.
청포도 줄기에는 포도멍울이 소담스럽게 달렸고 토마토 둥치엔 아기토마토들이 다정히 달렸습니다. 텃밭엔 상추가 싱싱하고 부추 치나물들이 더불어 자라는 작은 요람에 벌새마저 붕붕거리니 꽃들도 덩달아 활짝 피었습니다.
이런 날엔 아침부터 마음이 한 자리에 못 있어 글도 쓸 수가 없고 누군가의 방문이 기다려집니다.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있다 하더라도 서로의 일체감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그립습니다. 마음의 그림자처럼 함께할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누군가를 맞고 싶습니다.
밴쿠버에 와서 숲 속을 거닐며 만났던 우람찬 나무들의 치솟은 전경에서 나는 가슴 뛰는 연정을 느꼈고 언젠가 저 강건한 모습의 사람을 만나면 내 정인으로 두리라 남 몰래 가슴을 두근거렸었습니다.
내게도 있었던 그런 날도 지나 이제 안주한 자리에서 작은 것 하나도 다 행복이라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가슴에 꽉 채워진 것이 안도의 힘이 됩니다. 너그러울 수 있다는 것이 그런 힘이지 싶습니다. 긍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에도 그런 힘이 작용하는 것이지 싶습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을 알고 살면 푸근해 집니다.
나를 조금은 내려 놓을 때, 나를 조금은 비워 줄 때 따뜻한 공간은 나를 포용하게 된다 여깁니다. 나는 나의 작은 공간을 사랑으로 채우려 노력합니다. 사랑은 인내와 겸손이 따릅니다. 그리하여 행복한 마음으로 이웃을 돌아보고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내 가슴을 안아주는 내 평생의 정인 된 그를 바라보며 그의 눈부처가 되어
환히 웃고만 살고 싶습니다.
청포도가 익는 날, 방울토마토가 익는 날, 활짝 꽃들이 지기 전에 우리의 행복으로 누군가를 초대하여 함께 웃고 싶어짐은 아직도 늙지 못하는 내 가슴의 웃음입니다.
친구여,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던 친구여,
이 아침 나는 그대를 그리워하며 내 행복한 안주를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네 그려.
내 영원한 봄날의 정인이여, 앞에 두고도 나는 그대를 그리워하네. 안녕 안녕. (’08.)
그대 바라기
소 똥만 굴러가도 간지럼타게 웃음이 많던 내게도 있었던 지학지년(志學之年)의 날이며,
꿈 많던 이립(而立)하며, 운명을 거슬리지 못하던 불혹(不惑)이나 지천명(知天命)의 그 날들이 바람처럼 지나 이순(耳順)의 언덕에 덜렁 앉고 보니 감회가 을시년스럽기만 합니다.
비 내리는 밴쿠버의 하늘가엔 아직도 동심(童心)이 걸려있는데 예전에 내가 본 할머니의 가을이 내게 와 흔들다니, 믿기지 않는 오늘에 마냥 손사래 치고 싶음은 아직도 내게 남은 희망일까요, 망상일까요.
사진첩 속의 방글거리는 얼굴도 옛일인 냥 새삼스럽기만 하니 찍는 것 보담 이제 서서히 정리할 시기도 되었지 싶으니 덩그러니 큰 사진첩들이 한없이 부담스럽기만 하고요.
저들 키가 엄마의 앉은 키 보다 더 작던 날들엔 품 안에 자식이더니 어느새 자라 모두 바람처럼 떠나고 이제 둘만 남아 그대 바라기를 하며 추억을 먹으며 새삼 꺼꾸로 꺼꾸로 자라고 있습니다. 발 닿는 데까지 여행도 하고 운동도 하고요.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는 나는 육순 그대는 칠순의 언덕에 우쭐 올랐으니요. 부끄러워라.
주님이 불러 주시는 그 날까지 건강하게 행복을 만들며 웃을 수 있길 바라는 기도합니다.
나는 내가 시인이라는 것이 행복합니다.
시인이기에 내어놓고 꿈을 꿀 수 있고 그 꿈을 언제나 풀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동심에서 아이가 되고 내일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진리를 찾아 헤매는 고뇌에 찬 철학도도 되고 그리고 그리고, 꿈꾸는 보랏빛 공주도, 천사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기, 잠들었던 내 골방의 수필들을 골라 정리하여 바깥 구경을 시켜보려 통풍작업을 시작하며 감회에 젖기도 하고 이 순간 나는 너무나 행복한 마음입니다.
이제는 잊어도 좋을 ‘93년 5월 열 이틀!
하늘이 무너지는 상실의 아픔을 맞던 해. 이 세상 누가 있어 그 아픔과 서러움을 이해하랴마는 그래도 살아 남아 웃으며 그 말을 하는 것이 사람이더이다. 산 자는 살아 살 날을 궁리하여야 하는 것이 세상 일이더이다.
나는 그리움과 아픔을 글로 풀어내다 시인이 되고, 산천을 방황하며 시를 만들고 그 난중에도 감사하게 아이들은 자라 어여쁘게 제 길을 갔습니다.
내 마음에 자리하는 우리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둘 정신이 들고, 나는 잘도 버티는 바람 앞의 거목처럼 튼튼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때때로 철철 흐르는 아픔은 외롭고 고독한 가을 바람이 되어 차갑고 아렸습니다.
사랑했던 마음들이 갈 곳이 없어서 울었습니다. 한없이 방황하는 저 모습을 안타까히 여기신 우리 하나님의 은혜로 그대를 보내주시고 사랑의 짝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방 저 방 열어보다 텅 빈 방에 홀로 서 보았습니까?
우수수 고독이 몰려올 땐 부부싸움도 안타깝게 그립더라 면 웃으렵니까?
어느 날 / 외로운 들꽃이 되어/ 홀로 넓고도 넓은 들판에 서 보았는가//
어느 것 하나 / 두렵지 않고 서럽지 않은 것 있던가//
그 들판을 지나 / 이제 외롭지 않아도 좋을/ 그대 와서 내 곁에 섰노니/
천 년을 향기롭게 아끼며 살아야 하리라//
따스한 숨소리 곁에 있어/ 문득 잠든 그대 얼굴 보노니/
내 천 년을 함께 업고 누운 그대여/ 이 한 세상 마지막을 불태우려 우린 만났는가//
그대 볼에 뜨거운 눈물 섞어 부비노니/ 우리 서로 이 세상 작은 허물일랑
덮어주고 안아주며// 하늘의 서신 오는 그 날까지/
한 그림자 되어 살 부비며 살아야 하리라//
밝아오는 동녘에/ 향기로와 기쁨이 되는 날이 되라/ 기도하는 오늘 입니다//
_사랑하는 당신 그리고 나_ 전문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아끼고 귀하게 여겨야 귀하게 된다 여깁니다.
나는 그가 왕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는 여왕이고 싶습니다.
행복의 소리가 방울처럼 흔들리게 하고 싶습니다. 사철 꽃도 피게 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살면 얼마를 더 살 것이며 남은 날을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서로 그대 바라기를 하며 해바라기가 되어 감사하며 살려 합니다.
행복이 무언지를 알기에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08년 봄날에)
누군가, 향기 나는 이 새벽을 여는 이는.
잠을 설치고 창을 여니 열 이례 밝은 달이 비스듬히 누워있습니다.
저녁나절에 망설이다 먹은 커피 한 잔이 기여히 달빛과 함께 놀라 하나 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올 가을엔 묵혀있는 수필을 출판하려 준비 중에 있던 참이라 어쩌면 잘 된 일이기도 하고 안성맞춤이기도 하다 여겨져 컴퓨터를 열고 좌판을 두들기고 있습니다.
밴쿠버의 7월은 가을 날씨 같아 옷 매무새를 고쳐 입었답니다.
고즈넉한 이런 시간을 사랑하는 나에겐 저 풀벌레소리도 마냥 설렙니다.
내가 휘파람을 불 수 있었다면 풀벌레소리 더불어 아마도 흔들리는 현을 켰을 것입니다.
달빛도 조는 시간 먼 생각의 나래를 펴고 나는 지금 한 편의 수필 같았던 내 인생의 작은 면을 돌아보며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시인이 되어 시를 쓰고 나는 많이도 외로워했고 천리만리를 차를 몰고 방황하며 떠돌기도 했었습니다. 소리쳐 불러도 다시는 돌아와 주지 못하는 이승과 저승의 깊은 강물 곁을 휘돌며 끝없이 울고 울었습니다. 기막히는 좌절은 서럽고 외로움으로 시가 되어 울었고 붙들 수 없는 통곡은 메아리 되어 날았습니다.
그대 돌아와 다오. 한번 만이라도 다시 보고 싶음이여!
자식은 자식으로 내 곁에 남았지만 상실의 아픔은 채울 수 없는 서러움으로 메말라 갔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시간은 세월이 되어, 7년이란 서러움도 아픈 내 종기도 아물게 했습니다.
그 아픈 7년 세월 속엔, 방황도 있었고 죽을 만치 서러운 아픔도 있는 3년을 거쳐, 진이(막내 아들)가 캐나다 유학을 실현하고 내 삶의 끈을 붙들어 주었습니다.
염려 속에 옮겨온 캐나다의 아름다움은 나를 격려하였습니다.
낯선 곳에서의 정착은 유리알 같았으나 조금씩 꽃을 피워 올리는 나를 만나게 되어 기뻤습니다. 맑고 고운 구름 하늘, 록음 짙은 신록, 빛나는 햇살이 주는 자연 속에서 시를 쓰고 마음의 산책을 할 수 있음이 즐거웠던 4년의 세월도 있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인연은 필연이 되어 우리 곁에 머물었고 나는 다시 시작하여도 늦지 않은 좋은 시간에 사랑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나는 망설였습니다. 과연 나를 주어도 후회 않을지에 대하여 생각과 생각으로 고뇌하는 밤이 여러 날 가고도 정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월과 함께 늘어나는 나이는 값이 있다 했습니다. 값을 지불하여야 옳습니다.
그렇다면 내 훗날을 자식 곁에 두어 서로에게 짐이 될 것인지, 남편이란 울타리를 만들어 그 속에 안주할 것인지에 대하여 풀리지 않는 정답 없는 문제를 나는 기도 속에 올렸습니다.
내게도 분명 있는 대쪽 같은 자존심을 살리고 싶었습니다.
내 자존심을 살리고 내 인격도 살리고 내 노년을 보장 받고 싶어졌습니다. 그것이 정답임을 기도는 알려 주었습니다.
많이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최선을 다 하여 사랑하리라. 그래서 행복을 다시 찾으리라.
우린 그렇게 만났습니다. 한없이 사랑 받으며 사랑하며 그렇게 영원히 뗄 수 없는 고리로 엮고자 했습니다. 이제 봄 가고 여름 가고, 가을 가고 겨울 가, 8년이란 꽃 피고지는 세월이 흘렀고 우리 보금자리엔 손때 묻어가는 시간이 우리를 뜨겁게 휘감고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름다운 시를 만들고 그가 맛있게 먹을 음식을 챙기는 일입니다.
그는 아내를 위하여 삶을 짜고 건강하게 살아주는 일이 그의 몫일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이 여기에 있고 사랑은 언제 시작하여도 늦지 않음을 감지하며
감사함으로 늘 기도합니다.
자고 깨는 가운데 나의 기도는 글로벌(한국, 미국, 일본) 가족인 우리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행복하고 기도 속에서 은혜 받기를 원하는 것이 나의 희망입니다.
연로하시나 주님의 은총 가운데 행복이 무언지 알고 계시는 어머니가 주님이 불러주시는 그 날까지 강건하시길 바라는 것도 나의 희망입니다.
사랑합니다 모두를.
잠을 좀 설친들 대수겠습니까. 행복한 시간이 여기에 있는데요.
꿈 속에 빠진 달이 달무리를 지고 있습니다. 비가 오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 밤 비를 기다리는 텃밭의 나무새들이 아마도 웃음짓고 있을 것입니다. 행복의 웃음을.
아, 이 향기 나는 새벽을 여는 이는 누구신가요. (’08. 7 )
남편이란 이름의 울타리
어느새 봄 꽃들이 다투어 피고 있다.
산봉우리 마다 눈부시게 백설이 아름다운데 벌써 봄바람이 날아와 봄 꽃들을 다 깨워 놓았나 보다. 수선화의 예쁜 꽃망울이 벙그는가 했더니 벚꽃마저 활짝 피어 덩달아 목련까지 피고 보니 어느새 봄이 소리쳐 웃고 있다. 이 봄을 감사한 마음으로 맞고 싶다.
오늘 내 곁에 울타리를 쳐 감싸주고 힘이 되어 함께 웃는 남편이란 이름으로 서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남편의 그 자리가 당연한 것으로 살았던 지난 이십사 년의 세월은 그냥 흘렀지만 상실 후의 칠 년 세월은 아픈 상처로 남았었다. 그 아픔을 딛고 이제 봄을 맞는 수줍은 맘으로 서고 싶다. 혼자 걷던 지난날을 생각해 보면 스스로의 자격지심이 더 크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모든 일들이 힘들고 아픈 여정이었다.
혼자라는 말은 얼마나 아픈 이름이던 가. 가끔 혼자 살면 얼마나 자유로울까 하는 여인들의 말을 듣게 될 때 나는 아픈 웃음을 웃어야 했다. 그 얼마나 사치스러운 말인가. 내 손 안에 있으니 사치스러운 그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은근한 구속 속의 자유가 참 자유인 것을 여인들이여 알아가기 바라고 싶다.
혼자라는 것이 얼마나 슬프고 아프고 힘든 일인지를 안다면 그냥 감사하며 살기 바란다.
아웅다웅 싸우기도 하고 오손도손 의논하며 소근소근 사랑도 하고 부부란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사이인 것이다. 혼자가 되면 아웅다웅 싸울 상대도 없지만 또한 아웅다웅 싸우고도 하룻밤으로 풀 수 있는 그 아름다운 모습도 찾을 수도 없지 않은가.
오손도손 집안의 애경사를 의논하고 의지할 벽이 없다면 얼마나 외롭겠는가.
소근소근 사랑하고 싶어도 이제 내 곁에 없는 그를 만질 수도 맡을 수도 없다면 그 얼마나 고적한 서러움인가. 아내들이여 부디 곁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감사하며 살기 바란다.
아내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때 그것이 행복인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내라는 이름은
얼마나 신의로운가
집 사람이란 이름은
그 이름으로 불리워 지는 그대 들이여
오만 하지 말라. 겸손 하라. 사랑하라
내 그 이름으로 불리워 살다가
그대 위해 죽으리라
그리하여 살리라.
– ‘아내라는 이름은’ 전문-
나는 요즘 이것이 행복이리라 여긴다. 남편이란 울타리가 얼마나 든든한지 귀하게 여기며 감사함으로 살아야 하리라 여긴다. 좀은 느슨하게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며, 좀은 단순하게 살고 싶다. 작은 일에 아웅거리고 싶지 않다. 서로 감싸 안으며 살아야 할 것이다.
살아가면서 옛 말이 하나도 거르지 않은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렇다면 효자 열 자식 보다 차라리 악처가 낫다는 말을 상고해 보면 더 늙어 우리 곁에 누가 있어 따듯할지를 가슴 서늘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런 생각에 미침은 아마도 나이 탓이라 여겨도 보지만 참으로 맞는 말이 아니겠나 싶어지기도 한다.
자식 돈은 서서 받고 남편 돈은 앉아서 받는다는 속담이 그냥 생긴 말은 아니라 여겨진다. 내 속으로 나아 애지중지 다 바쳐 키웠지만 품 안의 자식 이였지 어느 날 품을 떠난 새는 자기의 인격으로 살기를 원한다. 우리가 그러했듯이 내 자식들도 마찬 가지임을 인정해야 옳다. 그러고 보면 투정도 푸념도 악의 없이 받아주는 부부보다 더 편안한 사이는 없을 것이다. 아이들이 들으면 좀은 섭섭하다 하겠으나 지네들도 머잖아 그 말 하며 살 것이고 인생은 쳇바퀴 돌 듯 돌며 살아지는 것이니 어쩌랴.
작은 것으로도 만족할 수 있고 때때로 인내할 수 있는 오늘이 되어 살려 한다.
아팠던 지난 날의 외로움도 고독도 잊지 않고 간간히 꺼내어 보며 오늘에 감사하는 바탕이 되고자 하련다.
남편이란 이름으로 서 있는 나의 울타리며 나의 방패며, 나의 기쁨인 그에게 감사하며 지켜주시는 은혜 앞에 두 손 모은다. (
시인이 시를 쓰지 못하는 이유
시인은 억세 풀 흔들거리는 가을 밤 낙엽을 밟으며 청명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별들을
모아야 한다.
시인은 세상이 흘린 눈물을 모두 꿰어 은구슬 목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시인은 슬픔도 기쁨처럼 노래할 줄 알아야 한다.
오랜만에 시인의 창문을 두들기는 가을 귀뚜라미 소리에 놀라 깨어 보니 참 많이도 깊은 잠에 취해 있었던 나를 본다.
밴쿠버 한국일보 문화부의 초대 시 초청을 받고 잠시 침묵하여 나를 돌아 보게 된다.
아직 시인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내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다.
시어 하나 담아 낼 생각도 잊은 체 계절을 모두 한 남자에게 심은 탓이다.
새삼 한 남자의 아내로 만족하여 있다 보니 내가 시인 이였나 싶게 보름달이 둥실 떠 창문을 훔쳐 본다.
내 곁에 곤히 잠들어 있는 남편의 팔을 내려 놓고 빠져 나온다는 것이 이토록 어렵다니 그것이 혼자였을 때와의 다른 점인가 싶다.
남편은 외로움이 무엇인가를 너무 잘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들을 하나도 예사로 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잠시도 아내 곁에서 멀리 있어 혼자 있는 순간을 다시 갖고 싶지 않은 그이다.
결혼 이후 우린 스물 네 시간을 오로지 함께 보내며 느끼며 지내고 있는 편이다.
함께 놀고 자고 깨는, 남편의 살뜰함은 내가 어떤 변을 보는가 까지 자기 몫 인줄 안다.
이제는 그런 남편의 행복해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나는 남편이 원하는 일이라면 우습고 해괴한 모습도 잘도 해 보인다. 그리고 가끔 나를 보면서 느낀다.
남편이 행복해 하고 내가 행복할 일이라면 아무러면 어떠냐 싶다.
자존심과 교만한 마음은 절대 행복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우린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항상 서로에게 지는 듯이 살아가면 서로가 높아지고 서로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내가 그를 제왕으로 섬기면 그가 나를 여왕으로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부부간의 행복은 지혜로 만들어 가야 한다.
얼마나 지혜롭게 순간들을 읽으며 말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서로에게 덕이 되어 사랑으로 남는다. 아낌없이 사랑하되 상경여빈으로 남아야 한다.
우리처럼 중년을 넘어 지천명의 중반을 이고 또한 넘기고 만난 사람이라면 산전수전 모두 알고 나름대로의 아집이 가득한 나이 아니겠는가. 누구 하나가 먼저 낮아지지 않으면 행복한 가정이 만들어 지기 전에 흔들리게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운이 좋은 여인이다.
서로를 바라보는 강이 유유하다. 포용과 자상이 넘친다고 할 까. 한 가지 흠이라면 자기 것에 너무 지나친 애착을 갖는 듯 하다. 그러나 때때로 지나친 애착에 내가 까탈을 부리느라 눈물이라도 쏟는 날엔 자기 것을 고치려 노력한다.
이런 남편에게 마음이 언찮아지는 일은 가능한 피하여 매사를 긍정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산듯한 마음으로 새 날을 맞게 된다.
남편은 스포츠를 즐기는 편이다.
나이와 상관 없이 젊음은 스포츠 정신의 건전함에 있는 듯 하다.
지난 겨울 용평의 눈밭에서 아득해 하는 나에게 기여히 스키를 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설경 만으로도 좋은데 그 눈길을 내가 바람처럼 비탈길을 스쳐 내려 오다니 내가 용한 것이 아니라 남편이 어찌나 용하게 보였는지 모른다.
하늘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밴쿠버의 필드에서 물새 알처럼 새하얀 공을 날릴 수 있도록 코치하고 푸른 잔디 위를 함께 걷는다.
이제는 중심도 못 잡는 나를 자전거에 앉히고 핸들을 잡고 땀을 뻘뻘 흘리며 함께 뛰더니 혼자서 페달을 밟으며 탈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번 주말엔 자전거 길이 아름다운 스텐리 팍의 바다 길로 나가야겠다.
태평양의 한 모퉁이에서 바다와 하늘이 닿는 길을 따라 비록 서툰 모양새 이긴 하지만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으며 달려 보고 싶다.
이렇게 시간을 쪼개고 보니 시가 생활이 되어 남편만 남아 있고 시는 하하하 웃음만 있다.
조금은 슬프고 조금은 외로워야 시가 익는데 지금은 사랑의 계절이라 풋 능금처럼 뽀드득뽀드득 싱그러운 한 편의 시는 잠시 접어 두어야겠다. (
제 2 부 금지된 사랑
1. 아름다운 건망증
2. 금지된 사랑
3. 선택의 기로
4. 길
5. 손
6. 권중조
7. 벌새
8. 가을의 전설이 되어
9. 자존심 은행
아름다운 건망증
“양지바른 언덕 아래 필 듯 말 듯한 민들레 노란 꽃잎 일곱 닢, 노랑나비 코 수염 두 개, 쪽빛 오랑캐꽃 말린 가루 한 티스푼, 귀뚜라미 눈물 한 종지를 은은한 불에 사흘 낮 사흘 밤을 다려서 새벽 별이 지는 시간에 아무도 몰래 동쪽 하늘을 향하여 세 번 절하고 단숨에 들이켜야 하느니라.”
이것은 건망증이 하도 심하여 물건을 손에 들고 종일 찾는다고 하소연 하는 친구가 있어서 내가 고생 끝에 처방 하여 준 건망증 치료 특효 처방전이다.
어서 먹여야겠기에 등기 속달로 보내준 내 처방전을 마침 퇴근해 들어 온 남편이랑 함께 읽고는 요절복통하여 웃고 났더니 건망증 증세가 거짓말처럼 없어졌다고 친구 모임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그 이후 나는 건망증 처방전을 몇 차례 더 쓴 적이 있고 덕분에 용한 처방전의로 불리곤 하였다.
말이 났으니 하는 말이지만 남자 보다 여자가 건망증이 더 심한 것은 억울하다면 억울하겠으나 그리하여 또 모성이란 값진 진주도 얻지 않았나 싶다. 이브가 뱀의 꾐만 받지 않았어도 상황은 좀 달라졌겠지만.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성은, 열 달 동안 사랑으로 얻은 결실을 몸으로 받아 괴로움도 사랑으로 승화시키며 아름다운 생각,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깨끗하고 맑은 것만 먹기를 고집하며 태교에 들어가 아기를 지켜 간다. 그리고 열 달을 아기와 한 몸이 되어 죽기를 마다 않고 그 태고의 울음을 듣고서야 안도하는 분만의 순간을 맞는다. 그리하여 심한 풍랑과 고통으로 울부짖던 시간의 강을 지나 잔잔한 수면 위에 닻을 내린 후의 평온 속에서 아기를 팔에 안으면 엄마는 찢겨 나가던 그 고통은 이미 잊고 있는 것이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니라.”(요16:21)
하나님은 자기가 만드신 인간의 속성을 이미 아시는지라 성경에 기록해 두신 것이다.
여자가 분만할 적에 온 몸의 뼈가 물러나 정상으로 회복 되는 기간이 3 주간이라 한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는 도를 넘는다. 삼 칠이라 하여 21일간을 부정한 사람은 아기와 산모 곁에 올 수 없도록 금줄을 쳐서 환기 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산모의 몸 조리에 신경을 쓰신 것이다. 또한 어른들은 말씀하셨다. 아기를 낳을 적에 하늘이 엽전만 하여져야 아기가 나온다고. 또 어떤 어른은 이 신발을 내가 다시 신을 수 있을까 하셨다 한다.
그 말씀은 해산의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뜻 하는 간접 표현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여자는 위대한 존재라는 뜻이다. 아무렴.
때로 영화에서 산고의 한 장면을 대할 때 우리는 새삼 신통하게 제 아비를 쏙 빼 닮은 아들 녀석을 떠 올리며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머금지 않았던가. 여자의 배를 빌리되 산고의 아픔은 남자가 대신할 수 있다면 아마도 자식 없어도 좋으니 그냥 살자고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도 그 고통을 잊어가며 잘도 아이들을 낳으니 그거야 말로 건망증이고 팔자 탓인가 싶다. 그래서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한 것이다.
세상이 좋아지고 좋은 세대에 새댁이 된 지금의 딸들은 부끄럼 없이 보름달 같은 배를 내밀고 뒤뚱거리며 남편에 매달리어 거리를 활보하며 먹고 싶은 것을 찾아 다닌다. 우리 때만 하여도 임신 사실이 그렇게 부끄럽고 먹고 싶은 것은 좀 많았으나 어쩌다 사 들고 들어 온 남편 속 주머니 사랑도 시 어른 눈치 보랴 오죽 힘들었던가.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말씀하신다. “별반 먹을 것도 없던 시절인데 어찌 거리 먹고 싶은 것도 많던고.” 시 부모 몰래 밭고랑에서 이제 막 실 뿌리 내리는 고구마 몇 뿌리라도 파는 날엔 가마솥 밥 귓전에 감추듯이 삶아 먹기도 하였지만 언 듯, 보신 듯 하나 지나가 주시는 시어머님 앞에 고갤 들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때는 밭 메다가 기어들어가 아일 낳고 또 밭 메러 나가야 하는 사람도 더러는 있었다니 그 몸이 오죽하였으랴. 그래서 옛날 할머니 하면 꼬부랑을 먼저 연상하지 않는 가. 그렇게 우리는 살아 온 것이다. 기껏해야 50년 전도 아닌 일이건만 우리 아이들은 얘기 속에서나 있음 직한 것으로 알리라.
세상 좋아졌다 하시며 옛 얘기 하시던 할머니도 저 세상으로 가시고 딸아이는 제왕절개로 깎아 놓은 밤톨 같은 아들을 낳아 자랑스럽게 살고 있다.
건망증이 심한 내 친구들은 새댁 시절엔 평생 젊어만 있을소 냥 시어머니 흉만 보더니 지들이 시 어미 될 때가 되었는지 건망증 탓인지 이제 앉으면 젊은 며느리들 잘못만 들 추긴다. 그리곤 뒤가 간지러운지 까르르들 웃으며 건망증이 어느새 또 도져 자식 자랑 영감 자랑으로 변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늙어 간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나는 이런 내 친구들이 한없이 자랑스럽다. 건망증쯤 심하면 대수겠는가. 냉장고 속에 지갑쯤이야 넣은들 어떠랴.
30년 씩이나 아들 딸 잘 길러 내 놓았겠다 새 신랑이 늙은 영감 되도록 잘 섬겨 왔겠다 세월 만큼이나 돋아나는 흰머리 뽑아주며 오손도손 내 가정 잊지 않고 챙겨 살아 온 내 친구들이 나는 한없이 자랑스럽다. 잔일 궂은 일 다 새기며 살아 온 세월, 건망증이 없었다면 또 어찌 가슴 속 맺히던 한들을 풀어가리. 때 맞추어 잊었다가 찾았다가 하면서 울고 웃으며 사는 것이 인생 아니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은 망각이란 처방 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오늘을 감사하며 서로 사랑하며 덮어주며 남은 날을 살아야 하리라 여겨 본다.(’98.5월 )
’98 좋은 만남 (종이상자 10)
풀꽃 따는 여자 17 동아라이프 게재
금지 된 사랑
친구의 눈물 같은 얘기를 들으며 함께 눈물 속에 회한의 미소를 본다.
친구는 일곱 살 연하의 열정적인 사나이의 구애를 받고 아득히 쌓인 가슴을 털어 놓았다. 후두둑 찻잔에 비라도 내릴 듯 쏴아한 바람이 돌아나간다.
내 친구를 곤란에 처하게 하고도 모자라 뻔뻔하기까지 한 그 열정의 사나이는 친구를 울리고 웃기며 떠나려 하지 않으니 아득한 마음의 친구는 나를 찾아 하소연하고 있었다.
혼자인 것도 서러운데 죽자 살 자 사랑하자고 덤비니 뻔히 이룰 수 없는 사랑이고 보면 서글퍼져 더욱 외로워진 친구의 하소연은 그냥 눈물이었다.
한번 둑이 터진 그 사람은 저둘적인 자세로 이것저것 작은 것에서부터 챙겨 보내고 염려하며 보호자처럼 서고 싶어했단다. 수 차례 거절도 하고 싫은 내색도 확실히 하였지만 거절할 수 없었던 상태의 도움도 받게 되고 보니 점점 휘말리는 느낌으로 조여 왔단다.
그런 상태로 변화 되는 자신의 모습에 화도 나고, 이런 약해지는 자신이 두렵기도 하여 한 동안 전화를 받지 않으려 피했다 한다. 그러다 보니 전화를 받게 되면 점점 감정싸움이 되기까지 했다 한다. 그리고 친구가 진정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잘못하게 되면 그의 숨겨진 여자로 떳떳지 못한 삶을 살게 될 수도 있기에 그를 밀어 내었다.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남자들의 이기적인 생각은 내 가정은 여전히 잘 지키며 너와의 사랑도 잘 해 나가고 싶은 것일 것이다. 물론 맞장구를 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친구의 자존심과 인격이 그런 일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옛날처럼 마음을 돌리고 고마운 사람으로 남아주길 간청하였지만 불이 붙은 그의 열정은 태우고 싶은 갈망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냉정을 찾은 친구의 마음은 닫아졌고 오히려 더 외로움과 슬픔으로 몸을 떨어야 했다. 왜 하필 나여야 하는가 하는 마음이 들수록 슬픈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꼭 이 일이 친구의 일만은 아닌 듯싶다. 내게도 있어 본 일이 아니든가. 멀정히 처 자식이 있으면서 죽자 살자 엉겨 들던 일방적인 도전자가 몇 있지 않았던가.
물론 어설픈 사랑으로 가정을 흔들게 해서도 안될 일이지만 그늘 속 사랑으로 자존심을 구길 수는 더 더구나 추호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의 눈 마주침은 계산된 것이 아니므로 언제 어떻게 생겨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시절 나는 가능한 사람을 가려 만나는 편이었고 언제나 낯설어 했다.
여자의 위치 중 제 일로 친다면 단연히 아내의 자리일 것이다.
아내의 자리란 대단한 것이다. 남편에게 사랑을 받던 못 받던 딱 버티고 서도 좋은 자리, 그 엄청난 자리가 아내의 자리인 것이다. 남편의 애지중지 숨겨진 여자의 머리채를 휘감아 흔들어도 당당한 자리, 그것이 아내라는 자리인 것이다.
남자의 목숨 같은 열정을 받는다 하더라도 떳떳지 못한 비운의 슬픈 사랑이 되고 마는 임자 있는 몸과의 사랑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불륜이요 간음인 것이다.
질서를 무너뜨리는 질타의 대상이 되고 세상 아내들의 적으로 순식간에 발 밑에 깔리게 되는 것이다. 모든 질시에서 현해탄의 파고로 사라져간 윤심덕과
아웅다웅 결국 다 도토리 키 재기인데 한 평생 사는 모습이 이토록 눈물 나도록 희비가 엇갈리니 말이다. 친구도 위로할 겸 단풍도 다 지고 서산스런 겨울 산이나마 보면서 동해 바다나 한 번 돌아올 가 싶다. 이제 회심의 웃음 속에서 친구의 눈물을 본다.
혼자란 역시 외로운 존재다. 둘이 하나 되는 것이 완벽한 하나 되는 것이다.
아담이 독처 하는 것이 안타까워 짝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에 감격해 본다.
질서 있는 사랑, 보기 좋은 사랑이 건강한 사랑인 것이다.
별이 빛나고 있다. 어딘가에서 찬 밤공기에 메아리를 보내듯 풍경이 떨리고 있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은 역시 희망이다. (‘99년 11월 )
’99. 좋은 만남 (종이상자 17)
선택의 기로岐路
인생은 늘 선택의 기로에서부터 시작하게 된다.
매일매일의 사소한 선택에서부터 고뇌하며 승부수를 놓게 된다. 인류의 맨 처음 사람 아담도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놓고,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을 것이다. 그 동산에는 먹으면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과도 있었고 먹으면 죽는 선악과도 있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으므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셨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불순종을 택하였고 그 결과의 대가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비운으로 인간 역사를 바꾸어 놓는다. 또한 가인은 하나님이 아우 아벨의 제사만 받으신 것을 불만하여 선과 악의 기로에서 아우를 돌로 쳐 죽이는 인간 최초의 살인자가 된다.
인간의 속성이 강한지라 선택의 기로에서 항상 자아 쪽으로 너무 기울이다 보면 나도 다치고 때론 상대도 다치는 일이 허다하게 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찬성이냐 반대냐, 맞다 틀리다,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악이냐 선이냐, 좁은 문이냐 찬란한 대로냐 참 아득한 갈림길에서 밤을 하얗게 지새우면서도 선택의 길을 찾아내지 못할 때도 있다.
나라의 운명이, 회사의 운명이, 내 가족의 운명이, 혹은 나의 인생이 또는 내 사랑하는 자식의 인생이 걸려 있다면 뜨거운 고뇌의 시간을 하루가 천년 같이 보내게 될 것이다.
또한 길게 그리고 깊게 고뇌하면서 정답의 길을 찾을 수만 있다면 하루를 천년 같이 하얗게 지새워도 보람이 되리라 생각된다.
나는 몇 년 전(1995) 아들 녀석이 유학 길에 오르겠다고 졸랐을 때 참으로 선택의 기로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아들을 위하는 길인지를 두고 고심한 적이 있었다. 유학을 택할 순간부터 격어야 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고통과 인내의 감당을, 후회 없이 잘 해나갈 수 있게 될지 순서대로 짚어가며 아이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고 다짐하면서 밤을 세웠다. 그리고 현지 답사를 갔다. 두루 살펴보고 ‘그래 도전해 보자’ 하고 아들을 보냈다.
때때로 아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처음 불태웠던 의기심을 불러 일으켜 힘을 내게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서도 12 학년 과정을 마치고 현지에서 대학을 갈 것인지 서울로 갈 것인지 몹시 혼란스러운 결정 가운데서 자문도 구하여 보고 하였지만 인생의 중요한 결정이라 정답을 찾을 수가 없어 몹시 난감하였다. 일단 대한민국 국민이니 제 나이에 맞게 군대에 가야하고 사회활동 하는데 남자에게 꼭 필요한 인간관계인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기타 등등이. ‘조국으로 가자’ 라는 결정을 보게 하였다.
전공 맞추어 대학원을 다시 유학하여도 좋겠다는 결정과 함께 긴 고통의 산고를 치르고 환한 마음이 되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그간 선택의 결과에서 오는 시행착오와 어려운 여러 가지 언덕도 있었지만 부딪치면서 생각이 더 깊어지고 눈의 폭도 더 넓어 질 터이니 그때 다시 자기 인생은 자기가 결정하여도 늦지 않으리라 믿는다. 또 다른 선택의 길이 젊은 만큼 다양하게 있으리라 여긴다.
젊음을 고뇌하며 인생의 길을 걸어 나가는 것도 멋진 일이라 여긴다. 나는 가능한 아들이 많은 것을 선택도 해 보고 버릴 줄도 알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낮아지고 약해지는 데서 높아지고 강해지는 삶의 자세를 배워가기 바란다. 그래서 밤이 없다면 아침도 없듯이 오늘이 있어야 내일이 있고 어제가 있어서 오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만약 네가 헛되이 보내는 오늘이 있다면 신은 너에게 내일을 감추실까 두려워하기 바란다.
이제 대망의 21세기를 꿈꾸는 지구촌의 첫 걸음이 시작되었고 모든 일이 강건하길 바란다.
늘 도전과 도약으로 온 지구촌은 들끓고 젊음도 함께 들끓어 생기 박동하는 부산스러운 세상이다. 그러나 이제 나에겐 생의 추수기도 지나 안주하고픈 계절인가!
허락하시는 삶을 통하여 지혜를 따라 살고 싶다. 사소한 일에서부터 선택의 가부를 놓고 살아온 인생 길, 더 나은 것을 향하여 때로는 고통하며 기뻐하며 달려 온 여기, 이 자리에 행복이란 이름으로 이제 조용히 안주하고 싶다.
내가 선택한 이 자리, 가꾸고 닦으며 행복이란 무엇이더라고 나누며 웃고 싶다.
마음을 조용히 여미고 언제나 내 기도에 귀 기울여 주시는 사랑하는 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열어 간다. (’01. 10월 )
동아라이프
길
국어 사전을 찾으면 @ 사람, 기차 등이 왕래 하는 곳 @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 @ 여정, 행정 @ 방법, 수단 이라고 길을 말하고 있다.
인생을 놓고 길을 말해 보고 싶다.
우선 길 하면 큰 길 작은 길 혹은 동네 어귀 길 등 많은 인도를 떠 올리게 된다. 인생은 결국 세월을 따라 방법과 수단에 맞추어 길게 또는 짧게 쳇바퀴 돌 듯 돌면서 가고 있다. 마땅히 지켜야 할 자기 도리 속에서 오솔길이던 아스팔트던 여정의 행로를 떠나는 것이다. 한 가정의 자녀로 태어나서 아들이면 아들의 길로 딸이면 딸의 길로서 운명의 긴 여정의 길을 떠난다.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그 사람을 길을 잘못 들었다고 말한다. 자식들이 아직 부모 슬하에 있을 적에 망나니 짓을 하게 되면 부모에게 책임이 돌아가 자식 길을 잘못 가르쳤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른 길을 가도록 노심초사한다. 인생의 길은 각자 다르며 자기 몫이 된다.
석가모니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길에서 인생의 허무에 대하여 해탈의 경지를 찾고자 하는 길을 걸었으며 공자 맹자 노자 그리고 기라성 같은 많은 선진들이 인생의 길을 논 하였지만 정답을 찾지 못한 체 죽어야 했다. 세상 어떤 철학도 개인의 인생에 답을 줄 수는 없다. 각자 생각이 다르듯이 각자 인생 길도 다른 것이다. 각 집안에 가풍이 있고 가훈이 주는 교훈으로 부모님의 선한 행동을 보면서 학교와 사회가 주는 교육으로 나를 단련해 가게 된다. 그리하여 비로소 내 인격이 형성 되어 가는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남다른 애정으로 사셨다. 부모님 슬하에 삼 남매를 두셨다. 우리 삼 남매는 다섯 살 터울을 두고 있다. 내겐 다섯 살, 열 살 아래로 두 남동생이 있는 셈이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동생들 이였고 누이였지만 이제 각자 가정을 갖고 자기 길에 서고 보니 일년에 한번 만나기도 힘들다. 그리고 ‘제일 사랑한다’는 말의 순서도 바뀌게 된다. 각자 자기 가정 자기 가족으로 자연스레 바뀌게 된다. 탓 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것이 순리고 길인 것이다. 내 나이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의 중반에 서고 보니 매사가 예사롭지 않고 뜻이 어디에 있나를 생각하게 된다. 아이들도 자라 마냥 품속의 자식이 아니니 각자 인격 되로 자기 길을 가기 마련이다. 단지 내 울타리로 남아있을 뿐 내 것이 아닌 자기들 인생의 길에 서게 되는 것이다.
간간히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머니의 인생 길이다. 어머니의 인생 길에서 여자의 일생 길을 보게 된다. 사대부 집안의 아녀자로 태어나서 부모에 존속 되어 결혼하게 되고 낯도 물도 선 집안에 시집와서 시부모를 모시며 남편을 섬기고 오로지 복종을 미덕으로 살아오셨다. 오직 내 것으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모든 사랑과 인생을 주었다. 그 아이들 자라 부모의 곁을 떠나고 하늘처럼 믿어왔던 남편도 어느 날 그녀의 곁을 홀연히 떠나 버렸다. 자식도 남편도 자기 것이 아니란 슬픔을 보시며 이제 자식의 인격에 자신을 맡기며 오로지 기도하며 사시는 어머니. 그것이 인생의 길이였고 여자의 도리였으니 누구도 탓 할 수 없는 인생역경人生逆境 인 것이다.
이제 나 또한 어머니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바뀌고 우리의 견해에서 나의 견해가 앞서가는 시절이 되어 나를 돌아 보게 된다. 자식에 의존하여 산다는 정신세계에서 벗으나 자식도 해방 되고 나도 해방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려면 우선 자기 손에 물질이 있어야 하고 어떤 경우에도 비굴해 지지 않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변해 가는 이 시대는 물질만능주의가 되어 부모 보다는 돈이 더 앞서 가는 시대가 되었다. 슬픈 일이지만 시대에 맞추어 살아가려면 부모도 돈이 있어야 존경도 받고 대우도 받는 시대인 것이다.
어떤 얘기에 귀를 기우려 보았더니 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셨는데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한다. 내면적인 집안 갈등은 두 며느리가 모두 시어머니를 안 모시겠다는 것이다.
갈 곳이 없어진 시모님이 어느 날 큼직한 베개를 하나 안고 큰 아들네로 찾아왔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시모님은 그 베개를 꼭 안고 다니시고 아무도 만지지도 못하게 하셨다. 그 이후부터 두 며느리는 서로 시모님을 모시겠다고 하였단다.
얼마 후 시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베개를 서로 차지 하겠다고 다투다가 베개는 찢어지고 메밀 겨 만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노모님의 갸륵한 지혜로 자기를 지켜 오신 것이다. 애지중지 베게만 안고 다니시니 그 속에 보물이라도 있으리라 여긴 두 며느리들은 부끄러운 모습이 되었다. 아무튼 씁쓸한 얘기지만 우리에겐 이모저모 교훈을 주는 일화가 아닌가 싶다.
마냥 젊을 수도 없고 슬픈 인생 항로이다. 머잖아 우리에게도 오고야 말 그 인생의 황혼 길을 어디에 세워야 할 지 많이 고민해 보아야겠다. (‘99년 10월 )
’99.좋은 만남 (종이상자 16)
캐, 중앙일보
손(手)
“세상에 눈(目)보다 게으른 것이 없고 손(手) 보다 부지런 한 것이 없단다. 내 손이 내 딸이로다” 하시며 매사 일을 미루지 않으시고 해 나가시던 어머니가 그리운 이 아침이다.
눈도 맵지만 따가운 마늘 즙이 손가락에 닿는 것이 싫어 깔 마늘을 한 소쿠리 앞에 놓고 앉았다가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나 고소를 금지 못한다.
눈은 늘 염려를 하지만 손은 부지런히 험하고 궂은 일까지 마다 않고 마무리 해 준다.
일상이 손으로부터 시작하여 끝을 내어주니 행동대원인 셈인 가.
내 몸 일부 중 어느 것 하나 안 귀하고 안 소중한 것이 있을까 마는 새삼 그러함을 느낀다.
우리 삼 남매를 손수 다 키우시고 이제는 꽃 손질로 소일하시는 어머니의 손은 장한 손이라 여겨진다. 어머니의 그 따뜻한 손길 하나하나 다가와 그리운 오늘이다.
사람은 태어날 적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태어난다. 아기를 목욕 시키려고 그 고사리 손을
아무리 펴려도 두 손을 꼭 쥔 체 좀처럼 펴려 들지 않는다. 본능적으로 두 손을 꼭 쥐고 있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 일까. 세상을 다 움켜쥐겠다는 인간 본연의 욕심인가. 세상 것 아무 것도 쥐고 싶지 않다는 거부의 순수 본능일까.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또 내가 좋아하는 손 중 하나인 기도하는 손을 떠 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것은 어머니의 기도 손이라 나는 말한다. 과묵하신 아버지의 기도하는 손이래도 좋을 것이다. 천금 내 자식들의 건강과 희망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빌고 또 비시는 어머니의 손이 더 어울릴 것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자신의 손금이 다 닳아도 자식들의 행복을 비시는 어머니의 손이 귀하고 귀하여 나는 하얀 벽에 걸어 놓고 기도한다. 주님의 나라로 불러주시는 그날까지 어머니가 즐거운 마음으로 건강하게 사실 수 있는 여건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 여건이라면 어머니의 평생 소원이신 우리 삼 남매의 가정의 무병무탈 일 것이다.
기도의 응답을 어머니는 듣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늘 행복해 하시고 우리 또한 감사히 살고 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이 일어나면 남편의 손을 살며시 잡는다. 말없이 맞잡아 주는 남편의 손이 세상에서 제일 믿음의 뜨뜻한 손임을 나는 안다.
내 아이들이 나의 손을 필요로 하던 날도 지나고 이제 나는 남편의 손 안에서 행복에 젖어야 한다. 어머니 세대까진 그래도 삼종지의(三從之義)로 살았지만 우리 세대는 격변의 과도기 세대라 위로는 어른을 당연히 모셨지만 아래로는 시대 변한 자식들로부터 정작 대우를 받지 못하는, 오히려 받들어야 하는 세대의 과도기를 치르는 아픈 세대라 한다.
그러니 더욱 더 부부가 건강하게 백 년을 잘 해로(偕老)하여야 복이 되는 날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서로에게 약이 되는 일만 하여야 할 것이라 여겨진다.
세상은 날로 변하고 사랑의 한계도 점점 의기적으로 변하니 그저 그리운 것은 추억이다.
오늘 새삼 손(手)에 대한 그리움이 솟는 것엔 또 하나의 손이 떠 올라서 이다.
언제 누구의 손이 아니다. 나의 연인도 오라버니도 아닌 누구의 손 이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내 가슴을 두근거리기에 족했던 손이 있었다.
손가락이 길고 하얀 손은 피아노 건반 위에서 조용히 그리고 날렵하게 선율에 따라 날고 있었다. 달무리 진 겨울 나목 사이로 숨어 뛰듯 혹은 날렵한 춤 사위를 걷어 올리듯 사뿐사뿐 날고 있었다. 그때 내 영혼은 나를 벗어나 그 손에게 온통 바쳐져 있었다.
숨을 쉴 수 없었던 나는 그 아름다운 손에게 아득히 반해 버린 것이었다. 내 영혼을 꿀꺽 삼켜버린 그 손으로 하여 한동안 나는 앓고 또 앓았다.
그 하얀 손이 내 어깨에 얹혀 주길 바랬던 것은 결코 아닌데 나는 한동안 가슴을 도리는 아픔과 설레임으로 눈 앞에 어른거리는 손과의 사랑에 시달렸었다.
아직도 나는 길고 가느다란 하얀 손을 만나면 그 시절이 떠 올라 가슴이 설레곤 한다.
그 손은 결코 나이 들어 늙어버린 손이 아니다. 언제나 싱싱하고 젊어 핏줄이 일어서는 손이다. 영혼이 늙지 못하듯 내 가슴에 있는 그 손은 내 기억이 있는 한 영원히 늙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가슴 뛰던 그 추억을 잃고 싶지 않음은 아릿하게 퍼져오던 그 달콤쌉쌀 함 때문일 것이다. (
권중조拳中鳥
어떻게 사는 것이 영육간에 평강을 이루며 잘 사는 일일까?
주먹 속의 새처럼 권중조를 잘 지키며 매사를 살아야 잘 살았다고 할 것이니,
주먹을 꽉 쥐면 숨을 못 쉬어 죽을 것이고 느슨히 주먹을 펴면 날아가 버릴 것이다.
모름지기 사람으로 태어나 자식으로서, 부부로서, 부모로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한 세상 매끄럽게 잘 살아야 할 것이다. 크리스천이라면 더구나 하늘의 뜻에 잘 맞게 살아야 할 것이기에 이 엄청난 숙제를 잘 풀고 가야 하늘에서도 상급이 있을 것이라 했다.
용서는 용서를 해 줄 자의 마음에서 온다.
용서라는 그 자체가 한없이 이기적이나 또한 한없이 넓은 이해이며 사랑일 것이다.
아무리 용서를 받고자 해도 닫힌 자의 마음이 풀어지지 않으면 용서는 되지 않는다.
땅에서 풀려야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했다. 생각할수록 의미 깊은 무서운 말이라 여겨진다.
얼마 전 나는 어려운 마음이 되어 사람에게서 위로를 받으려 했다가 엄청난 대가를 치르며
단단히 속을 끓인 적이 있었다. 상상 밖의 본의 아닌 일을 당하면 사람들은 어딘가 에라도 위로를 받고 싶을 때가 생기기 십상이다. 그것이 사람의 연약한 부분이라 여겨진다.
‘사람에게 위로를 받고자 하면 올무에 씌운다’ 새삼 성경말씀이 생각나 한없이 부끄러워졌었다. 그게 나 임을 발견하고 더 없이 부끄러워짐을 고백하는 기도를 한 적이 있었었다.
분명 나에게 위로와 격려로 다독임을 주어 편안해 졌었는데 때 아닌 홍두깨가 내 앞에 떨어지며, 이제 삼자가 되어버린 위로를 주던 사람에 의하여서 오히려 내가 죄인이 되어있었다. 그때 무엇이 최선의 해결책이었을까?
나는 침묵이라고 여겼고 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사람 세상이 참으로 무섭고 악랄했다. 반성은커녕 자기를 지키려고 발버둥을 치는 모습이 가련했으나 역시 시간만이 해결하여 주었다. 그 기다리는 시간이 나를 성숙시키는 잣대가 되긴 했지만 그 모습들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마음이 그렇게 우울할 수가 없었다. 그 소드레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침묵 속에서 권중조를 지키는 일뿐이었다. 일이 해결되어 사과의 전문이 날아오기까지 무언 속 시간만이 살아 움직이게 한 일은 잘한 일이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되게 만든 그는 스스로 받는 유익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했는지를 생각하며 이해가 되고 마음이 풀려야 비로소 자기를 스스로 바로 볼 수가 있게 되고, 그래야 자신으로부터 용서가 되는 일이다. 그것은 이제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는 뜻이고 그 동안의 분망했던 자신을 스스로 용서할 때가 된 것이라 본다.
자기 자존심을 버리고 잘못을 시인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용기라 본다. 훌륭한 행동이라 본다. 나는 그런 사람을 존중해 주고 싶다. 하늘에서도 분명히 상급이 저축되었을 것이다.
그 고통가운데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낸 사람에게 축복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을 풀어 준 그에게 감사하고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사람을 의지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음인가를 느끼며 삶의 지표 하나 더 붙인다. (‘08년 이월)
벌새(Humming Bird)
겨우내 하늘이 비로 넘치나 싶도록 내리던 비가 계절을 바꾸느라 뜸해 지고 있다.
예전엔 5월도 말에나 가서야 개이던 비가 올해는 3월에 햇살을 보게 되어 올 봄은 따사한 햇빛 속에서 만나게 되었다. 수선화 꽃 대궁이 쏘욱 고갤 내밀더니 날마다 자라 올라 꽃이 만개하고, 이어 개나리, 벚꽃, 목련, 튜립 까지 피었다 지고 보니 어느새 봄도 가고 여름의 문턱에 앉은 것 같다.
작은 꽃밭이 있어 평소에 심고 싶던 꽃들을 하나 둘 심었더니 계절 맞추어 꽃이 피어나고 있다. 채마 밭도 하나 있었으면 하던 터라 아예 잔디를 덮고 텃밭도 일구었다.
상추도 심고 쑥갓도 심고 부추도 심어 제법 채마밭의 냄새가 난다. 어제는 친구가 들깨랑 방아 모종을 들고 와서 심고 보니 고국 냄새도 나는 듯 하여 감회가 새롭다.
부추랑 깻잎이 자라면 방아 몇 잎이랑 넣어 부쳐서 먹어야겠다 싶으니 벌써부터 신이 난다. 방아는 깻잎과로서 독특한 향이 있어 때론 싫어하는 사람들도 더러는 있지만 경상도 음식으로 추어탕엔 필이 들어가는 특이한 맛을 내는 허브 식물이다.
흙을 만지며 흙 속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요즘의 일과가 사뭇 즐겁다.
개나리 진달래 할미꽃 개망초 등 줄줄이 입에 익은 꽃들이 아닌, 늘 이름이 생소하여 외우기를 몇 차례고 하여야 하는 이 나라 꽃들을 심어 놓고 눈이 아프도록 들어다 보고 있다.
어느 날인가 꿈을 꾸나 싶은 황홀한 일이 눈 앞에서 보았는가 싶게 사라졌다. 늘 한번 보고 싶었던 그 벌새가 왔다 간 것이다.
사진으로서나 보았던 엄지 손가락 만 한 새를 정말 본 것이다. 얼마나 순간적으로 왔다가 날아가 버렸는지 아쉬움에 가슴이 다 설레었다.
그 후 다시 올 벌새를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지고 정말 벌새는 다시 오고 또 왔다. 꽃밭에 그가 좋아하는 초롱 모양의 꽃인 허니써클이 피어 있었던 것이다. 입이 길어 초롱꽃 모양의 긴 초롱에서 꿀을 뽑아 먹는 모양이다. 그 작은 날개로 점처럼 한자리에서 바람개비처럼 날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전진과 후퇴를 수 없이 하면서 꽃대궁 속을 하나하나 드나들며 꿀을 먹곤 핑 날아 갔다가 돌아와 있곤 하는 짓을 하루에도 수 차례 한다. 요즘은 벌새를 기다리고 보는 즐거움이 대단하다.
벌새는 칼새목 벌새과에 속하며 이 과는 대강 116속 350종을 포함한다. 새 중에 가장 작은 새로 금속광택의 아름다운 깃털을 가지고 독특한 비상 법으로 공중에 한 점으로 멈추어 호버링(정체비행)으로 날기도 하고 전 후진 비행을 자유자재로 한다. 쿠바산의 콩벌새 Melisuga helenae는 부리와 꼬리를 제외한 몸 길이가 2.5cm밖에 안 되어 전체 조류 중 가장 작은 새다. 그러나 큰 벌새 Patagonia gigas를 비롯한 몇 종은 전체 길이가 20cm를 넘는 것도 있다. 역시 수컷이 더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벌새류는 날개 치는 속도가 소형종은 매초 70 – 80 회, 대형종은 매초 8 – 10회 날개를 친다고 한다. 입은 가늘고 길며 먹이는 꽃꿀 외에 꽃에 모인 곤충이나 거미이며 때론 수액을 빨아 먹는다.
둥지는 보통 지름 5 –6cm의 그릇 모양으로 가지 위에 만든다. 한 배에 2개의 알을 낳으며 포란 기간은 14 – 19일이다. 장시간 사육은 어렵다 한다. 북쪽의 알라스카에서 남쪽의 푸에고 섬까지 분포하며 꽃꿀이 많은 공원이나 인가의 정원에서 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종은 열대·아열대의 삼림에도 서식하고 있다. 특히 남아메리카의 콜롬비아·에콰도르·페루에 분포하는 것이 많다. 벌새라는 이름이 참 예쁘다. 정원에서 벌들이 콧노래를 부르듯 붕붕거리며 날고 있는 듯 하다고 하여 벌새(Humming Bird)라는 이름을 얻었다.
멕시코의 아즈텍 족은 자기들의 선조가 벌새로 변신한 멕시토라(주신)의 길 안내를 받아 이 땅에 왔다고 믿는 전설도 있다 한다. 지금도 그들은 사랑을 얻는 주술에 효과가 있다고 믿어 벌새를 귀중히 여긴다고 한다.
하루에도 수 차례 오는 벌새 덕분에 즐거움이 하나 더 는 셈이다.
처음에 내가 벌새를 보았을 때의 감격이란 말하기 힘든 황홀이었다. ‘나 왔어요’ 라는 신호라도 하듯 ‘짹’ 소리를 낸다. 날개를 부웅 떨면서 엄지 손가락 만 한 것이 어쩜 그렇게 앙징맞게 점처럼 떠 있는지 그냥 감격이다. 이젠 제법 한소끔 씩 꽃나무의 그 얇은 가지에 앉아 쉬기도 하고 친구를 데려 오기도 한다. 지금도 내 눈 앞에서 예쁜 짓을 하고 있다. 저 작은 날개로 날아 알라스카에서 록키산맥을 넘어 이곳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기특하여 더욱 사랑스러운 마음이 된다. 우리 집에 오는 벌새가 2.5cm라면 새의 종엔 하물며 키가 2.5m가 넘는 타조도 있지 않은가. 각각 종류 대로 씨를 만드신 하나님의 솜씨에 감동함이 더욱 새롭고도 새롭다. 캐나다에 살아서 느끼고 볼 수 있는 감동중의 하나라고 여겨진다.
이제 저 꽃이 지고 나면 올해는 오지 않을 벌새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저리다.
내년에라야 다시 볼 벌새를 나는 기다리며 그리워하겠으나 벌새는 그러할 수 없을진데 아쉬움이 슬프다. 한번 스쳐가는 인연이 어찌 사람에게서만 있으랴. 만물이 다 그러한데 하물며 한 계절을 두고 어여뻐한 벌샌데 어쩌랴.
허전함을 달래느라 애꿎은 그대에게로 화살을 보낸다.
변치 않고 곁에 있는 따뜻한 그대에게 이 마음을 전하며 오래오래 사랑하자 주술을 걸어 본다. (
한국일보 ’04. 8.7 게재
가을의 전설이 되어
< Thousand Islands의 볼트 성 >
가을 하면 불타듯 타오르던 설악산만이 아니더라도 시월 중순이면 온 산야가 불 바다가 되는 내 조국이 보인다. 먼 발치에서 가을이 오는가 하면 어느 사이 내 가슴엔 불 붙는 고국의 가을을 본다. 마침 ‘아가와캐년 열차단풍관광’ 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어 조국의 가을을 그리며 일운과 나는 부지런히 길을 떠났다.
캐나다에서 단풍이 제일 아름답다는 동부의 아가와 캐년을 가기 위하여 시간도 아낄 겸 밤 비행기를 탔다. 수학여행을 떠나던 날처럼 설레는 마음은 밤인데도 잠이 들지 않아 캄캄한 하늘뿐인 창 밖을 열두 번도 더 내다 보았다. 행여나 비라도 내리면 고운 단풍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토론토 공항에 내리니 으스름 새벽이 열리고 있었다. 우리는 이왕 토론토에 온 김에 나이야가라 폭포를 한번 더 볼 양으로 여행사와의 약속 하루 전날 도착한 셈 이였다. 랜트카를 몰고 지도를 펴고 짚어가며 폭포에 도착하니 점심 때쯤이었다. 거대한 물줄기를 품어 내며 나이야가라는 젊음을 여전히 과시하고 있었다. 그 옛날 이 계곡을 우렁찬 물줄기가 휩쓸며 지났을 흔적도 유연했다. 나이야가라는 인디언 말로 ‘천둥소리’라 한다. 인디언들이 이 땅의 주인으로 있을 적에 그들은 천둥소리처럼 들리는 이 폭포의 장엄한 물소리를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이제 보호구역으로 몰려 사는 그들은 이렇게 관광지로 변하여 있는 이곳을 무어라 느끼고 있을까 싶으니 숙연한 마음이 된다. 지난번에 왔을 때에 폭포 안으로 들어가 보았기에 이번에는 겉으로만 감상을 하기로 하고 이곳 저곳 기웃거리며 추억을 되새김질 하였다.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세계 7대 불가사이에 속하는 나이야가라 폭포는 미국 쪽에서와 캐나다 쪽에서 볼 수가 있는데 아마도 캐나다 쪽에서 보는 경치가 더 아름다울 것이라 여겨진다. 나이야가라 강이 유유히 흘러 내려오다가 작은 아일랜드를 만나면서 양쪽으로 나누어져 흐르게 되고 말굽 모양의 큰 폭포와 작은 폭포를 이루게 된다. 그 물결이 여간 거센 것이 아니라 물보라가 계절 없이 치솟고 무지개가 일어 아름답기 장관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밤 폭포의 전경은 예술이라 부르고 싶다.
내려 쏟는 폭포 뒤 켠으로 비 옷을 입고 걸어 들어가 나오는 코스가 있는가 하면 폭포 아랜 물보라를 맞으며 관광하는 유람선도 있어 흥미를 느끼게 한다. 이름 모를 물새들이 하루 종일 물구비 속으로 날아 오르고 있다.
물소리를 뒤로하고 줄지어 선 상품가계를 기웃거리며 관광객의 풍미를 즐길 수도 있다.
또한 CN타워를 올라 시내를 한 눈으로 내려다봄은 물론 멀리 미국까지도 볼 수 있다.
늦게 토론토 시내로 돌아와 캐나다 한국문인협회의 회장과 총무와의 미리 예정된 약속으로 한국음식으로 저녁을 나누었다. 어디를 가나 여행지에서 한국음식을 만나면 그냥 반가움부터 더니 떨칠 수 없는 코리안 김치 탓이라 여긴다. 여행지에서 문우들을 만나는 것은 기쁨이다. 다음날 아침 여행사에서 보내 온 대형 버스를 타고 간간히 펼쳐지는 단풍을 보며 알곤퀸 주립 공원을 거슬러 호반의 도시 수생마리에서 하루를 유했다. 다음날 관광 열차를 바꾸어 타고 아가와캐년의 단풍의 절경을 감상할 만반의 준비를 하였지만 아깝게도 때를 놓치고 말았다. 아름답게 물드는 단풍의 씨즌이 일주일 정도로 짧아 때를 잘 맞추어야 볼 수 있다 한다. 마침 우리가 가는 날은 이틀 전에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떨어진 단풍만을 아쉬움으로 바라보는 수 밖엔 별 도리가 없었다. 앙상한 나무들이 쓸쓸히 우리를 반겼다. 그러기에 단풍을 제대로 볼 양으로 한 달을 아예 그곳에서 RV나 모텔에 머물며 지내는 사람도 더러는 있다 한다. 가을을 놓친듯하여 큰 아쉬움을 남기고 내 고국의 단풍을 그리면서 또 다른 볼 거리를 찾아서 자리를 옮겼다.
천 섬 (Thousand Islands )의 진 풍경에 우주를 안은 듯 했다.
바다라 느껴지는 쎙로렌스 강은 북미의 5대호 줄기가 모여 만들어졌다. 호수라고는 도저히 믿어 지지 않는 거대한 물 밭은 천 개의 섬을 담고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섬들은 모두 나라가 다른 개인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크고 작은 섬들은 주인의 취향대로 설계 되어 자기나라 국기를 휘날리고 있었다. 아쉽게도 아직 우리 국기를 꽂은 섬은 없다. 대한민국의 누군가 우리의 국기를 휘날리며 우리의 눈길을 즐겁게 할 날도 있으리라 여겨 본다. 천 개의 섬과 유람선들이 어우러져 한바탕 올림픽을 하는 듯 하다. 햇살이 눈 부시다.
섬의 개념은 3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어야 섬으로 인정이 된다고 한다. 아무리 크더라도 3 그루의 나무가 없으면 섬이 될 수 없다는 이론이다. 그러고 보니 아주 작아 겨우 집 한 채가 달랑 들어있는 섬도 있지만 규모는 크나 바위로만 되어있어 섬이 아닌 섬도 있어 아이러니 서럽다. 아이러니는 여기 또 있다. 강물 가운데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이 있다. 미 대사관과 캐나다 대사관 역할의 섬이 마주 서 있고 두 섬을 연결하는 다리가 놓여 있다. 국경이 되는 다리는 자동차 한 대 길이 만 하다니 어림잡아 3 미터나 될까 싶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수중 국경의 다리가 되는 셈이다. 두 나라 국기만 바람에 펄럭이고 패스포드가 필요 없는 유일한 국경이다. 물을 가운데 두고 이쪽과 저쪽이 미국과 캐나다 영이 되는 샘이다. 천 섬은 각국의 개인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있으니 세계를 하루에 다 보는 셈도 된다. 출렁이는 물결 위에 신기한 마음으로 수 놓여지는 흰 물살을 헤치고 가다 보면 우뚝 솟은 한 성을 발견 하게 된다. 여느 집과는 다르게 거대한 고성으로 서 있는 이 집의 전설 같은 얘기에 나는 그만 슬픔에 목이 메인다. 죠지 볼트씨의 순애보이다.
그는 호텔의 주방장 이었는데 그 호텔 주인의 외동딸을 흠모하게 되었단다. 오랜 연모 끝에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볼트씨는 신부를 위하여 천 섬 중 하나를 하트 섬이라 이름하고 아름다운 성을 짓기 시작했다. 사랑이 한 없이 꽃 피는 어느 날 시새움 많은 불행이 찾아와 아름다운 신부는 백혈병에 걸리게 된다. 입 맛을 잃어가는 신부를 위하여 애가 타는 볼트씨는 사랑의 드레싱을 만들어 바친다. 그것이 지금까지 남아 미식가의 입맛을 내는 ‘싸우젼아일랜드’ 라는 이름의 드레싱이다. 슬프게도 볼트씨의 애타는 사랑을 남겨 놓고 성이 완성 되기도 전에 신부는 세상을 뜨고 만다. 슬픔에 젖은 그는 바람이 되어 정처 없이 떠나가고 성은 폐허가 된 체 슬픔에 잠겨 있었다. 이제 미 정부의 국립공원에서 관리한다고 한다. 죠지 볼트씨는 1904년 부인이 죽자 그 섬을 떠나 바람이 되어 떠돌다가 1920년에 사망 하였다니 그의 기막히는 인생 행로에 마음을 조아려 조의를 표한다.
가을의 전설 같은 쎙로렌스 강의 볼트성이 눈 앞에 어린다. 아름다운 부인의 웃음소리 볼트씨의 귓전엔 언제나 들리리라. 이제 가을이 오면 내 가슴에 먼저 오는 볼트씨의 순애보다. 세상에는 가슴 저리는 순애보가 더러 있기 마련이지만 가을의 전설로 들리는 볼트씨의 순애보는 내 가슴을 저리게 한다. 사우젼아일랜드에 익어 가는 가을의 전설을 위하여 보라 빛 구절초 한 아름 바치는 마음으로 시 한 수 놓는다.
_ 생략_
전설 같은 아름답고 가슴 여미는 이야기가 있었으니
죠지 볼트의 순애보라네
_생략_
미완의 성을 남겨 놓고 부인은 훨훨 하늘로 가고
슬픔에 젖은 그는 바람이 되었으니
성은 폐허가 되어 울었다네
전설 같은 전설 속 이야기 있는 쎙로렌스 강에
유유히 떠 있는 아름다운 하트 섬의
볼트성에 고운 노래가 흐르고
꿈인가 싶은 아름다운 부인의 웃음 소리
볼트씨 귓전에 지금도 들리리
가을의 전설이 되어. (’04. 10 )
-시, 가을의 전설이 되어. 전문 _
한국일보 ’04. 10. 게재
자존심 은행
세상에는 인생의 미래를 위하여 적립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한푼 두 푼 모아 늘려나가는 가계 적금으로부터 정기적금 등 여러 이름으로 은행구좌를 늘려가고 있는 것으로 안다. 때때로 안 먹고 안 쓰고 잠을 설쳐가며 오로지 돈 모으는 것으로 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때론 지친 육신이 병들고 마는 경우를 더러 보게 되는데 여러모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이 진정 인생일까?
이슬 방울에 반사되어 찬란한 아침 햇살을 보며 지난 세월과 또 내게 남은 시간을 생각하며 기쁨이 되는 영감이 나의 가슴에 스며든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나는 어떤 배려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일은 늘 우리에게 아드레날린을 생성하게 된다. 부딪치고 찢기고 피나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일에 지쳐서 돌아오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나는 앤돌핀 공장을 차려볼까 싶다. 사랑하는 나의 사람이 아드레날린의 독소에 넘어질 때 나는 앤돌핀의 탱크를 들어올려 그의 피를 맑게 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나는 그에게 사랑의 은행을 개설하고 그의 세상과 삶에 구겨지는 자존심을 위하여 자존심은행이라 이름하는 앤돌핀 계좌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사랑의 앤돌핀을 그의 계좌에 적립시키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상대를 인정하고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하고 수용하는 자세는 상대를 기쁨과 용기와 희망을 줄 것이다. 그러면 그의 자존심은행의 잔고가 올라가게 되어 그는 힘차게 도전하여 맑은 눈빛으로 걸어갈 것이다.
삶에 힘이 나고 이해 관계가 넓어지고 사회활동은 물론 사랑의 측도도 더욱 깊어지리라 여겨진다. 소슬한 바람이 일 듯 그의 눈빛을 보면서 그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느껴질 때 적절하게 그의 자존심은행 계좌에 사랑의 적립금을 넣어주는 것이다. 물론 그를 어떤 경우에도 비난하지 말 것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우릴 것이며 그를 포용하며 그의 계좌를 항상 기억하는 것이다. 그것이 결국 두 사람의 공동 사랑계좌에 ‘사랑’이란 뜨거운 적립금을 쌓는 것이다.
서로를 인정하고 감사하며 수용해 갈 때 사랑은 저축될 것이다. 서로의 단점을 보며 결점을 찾아내고 눈 흘기는 행위는 자기들의 공동 사랑계좌를 축내는 어리석은 짓이다. 결코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딸아이들에게도 오늘부터 사랑의 공동계좌를 설치하도록 일러야겠다.
~~~~그리하여, 그대와 나의 넘치는 잔에 영혼의 일렁이는 바다를 두라. 하늘 바람이 둘러 나가게 하라. 그대와 나의 잔은 영원히 넘치고 기쁨의 샘이 솟아 나리니~~~
해가 뜨면 밤은 사라지고, 향기로운 백합꽃이 피면 그 터질 듯 곱던 꽃봉오리는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것의 재 창조인 것이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창조를 위하여 눈을 떠야 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내 앞에 어떤 운명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결코 실망하지 않고 그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여겨보면 전혀 새로운 모습의 길이 열려있는 것을 보게 되리라.
꽃봉오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고로, 존재한다’는 이론이 내게 박히는 날이 있었다.
힘든 날이 왔던 것이다.
믿었던 친구의 몰락으로 나의 생활도 흔들려야 하는 현실 앞에서 나보다도 유학중인 아들의 장래 염려로 나는 밤을 새워야 했다. 아이에게 닥친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할 지 몰라 긍긍하던 나는 아들을 위하여 자존심 구좌 넣기를 생각하게 하였다.
4년간의 유학생활에서 소년기를 보낸 아이를 새삼 고국으로 데려가 한국에서 학교생활이 잘 적응이 될지 난감하여 아들이 받을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아득하여 눈물이 되었다.
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꽃봉오리 또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재 창조의 길을 위한 예비의 단계라는 것을 아들과 나는 믿고 있다.
이제 칼릴지브란의 ‘파도’ 한 귀 절을 읊고 싶음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삶을 보기 때문이다. (’99. 5. )
’99. 좋은만남 <종이상자 12>
제 3 부 무지개 유정
1. 어머니의 반닫이
2. 생의 노을을 보며
3.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선물
4. 사랑 속의 사랑
5. 아름다운 인연
6. 섣달 그뭄 밤
7. 이 봄을 친구에게
8. 금란지계
9. 가슴에 있는 친구
10. 아름다운 청년의 그 눈빛
11. 가슴에 있는 하늘
12. 모녀간의 대화
13. 꽃잎보다 고운 나의 어머니
14. 지천명의 얼굴인 오늘
어머니의 반닫이
세전지물世傳之物이 새삼 하나쯤 있었으면 싶다.
어머니의 손 때가 묻은, 할머니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가 아끼며 만져 오시던 반지고리 하나라도 지금 내 곁에 있었으면 싶다. 그래서인지 요즘 부쩍 골동품 가게에 들어서면 괜히 눈이 번쩍거려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나름대로의 역사를 간직한 채 누군가를 기다리는 몸짓으로 크고 작은 물건들은 줄지어 앉고 서 있었다.
어릴 적에 나는 어머니의 반닫이 장롱을 좋아했었다.
열 일곱에 노비를 거느리고 시집을 오신 어머니의 혼수로 들여온 반닫이 장롱은 두 바리로(두 짝) 짝이 지어져 있었다. 노오란 색깔에 물결 무늬의 나무 결이 고운 반닫이는 합동 장식을 달고 있었다. 가끔 어머니는 반닫이 속 바닥에 깊이 넣어 두셨던 예장藝場을 꺼내어 보여 주시고는 하셨다. 오색 실로 묶어진 예장은 창호지로 형식에 맞추어 몇 겹으로 접혀 있었고 또 한 창호지로 띠를 두르고 있었다. 그 안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신랑과 신부)의 생년월일과 사주가 적혀 있었던 것으로 안다. 신랑 신부가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되도록 사랑하며 오래오래 살다가 죽음과 함께 저승까지 가져 간다고 한다. 어머니는 오래 전에 먼저 가신 아버지를 그리며 가끔 그 예장을 꺼내 보시며 60년도 더 먼 옛 이야기를 들려 주시곤 하셨다.
얼마 전엔 이제 네 아버지 곁으로 갈 때가 된 것 같다 하시며 손수 수의囚衣를 지어 놓으시곤 그 옷 속에 예장을 넣으시는 것을 보고 내가 눈물을 흘리니 ‘하나님이 예비하여 놓으신 나라에 불리어 가는데 얼마나 기쁜 일이냐’ 하시며 오히려 나를 위로 하셨다. 사람의 운명은 오는 순서는 있어도 가는 순서는 없다고 하였지만 연세가 드신 부모님을 곁에서 지켜 보는 것은 가슴 아리는 일인 것 같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반닫이에서 꺼내 입혀 주시던 설빔 이라든지 더 깊숙이 간직 하였다가 꺼내 보시던 어머니의 예장은 지금도 가슴 저리게 그리운 것 들이다. 어머니의 반닫이는 어린 나에게 어서 어른이 되어 나도 저런 예쁜 반닫이를 가져야지 하는 꿈으로 자랐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나는 책 읽기 사색하기 등으로 반닫이의 꿈은 잊어버린 채 고운 신형장롱을 사서 시집을 갔었다. 그리고 세월을 바꾸며 장롱도 바꾸기도 하였다.
어느 날 나는 무늬가 곱던 어머니의 노오란 반닫이가 불현듯 생각나며 그리움이 사무쳤다. 나이가 들면서 그 반닫이가 얼마나 곱고 귀한 것인지를 안 까닭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리워 찾아간 반닫이는 이미 남의 손으로 넘어간 후였다. 한참 고가구가 유행할 때 어머니의 반닫이를 눈 여겨 본 장사치의 등살에 못 이겨 오십 여 년 손때가 묻어 자기 분신 같은 장롱을 내 주고 마신 것이었다. 세류歲流에 잠깐 한 번 바꾸어 보고 싶은 호기심에 어머니의 곁을 그 반닫이는 영원히 떠나고 만 것이었다. 어머니도 두고두고 애석해 하시고 맘 아파하시니 신식 세상에서 신식 장을 가져 보는 것도 근사한 일이지 않겠느냐고 위로하고 돌아왔지만 돌아오는 발길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혈육을 잃은 듯 하였다. 지금쯤 그 반닫이도 옛 주인을 그리워 눈물 흘리고 있지나 않을지 그리움이 솟는다.
필연적인 사건으로 아들이 캐나다로 유학하는 탓으로 나는 남에게 집을 맡겨야 하는 일이 일어 났었다. 지금 떠나면 언제 돌아 올지 알 수 없는 일이였고 세간들을 묵혀 놓을 수도 없고 하여, 이십 여 년 참으로 내 젊은 꿈과 애착으로 만들어졌던 하나하나의 세간을 놓고 고뇌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었다. 꼭 필요한 몇 가지의 옷과 필수품과 책을 골라 내고 나머지는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고 말았다. 벽에 걸린 애지중지 먼지를 닦아내던 화사하게 진달래 가득 핀 화폭하며, 장인匠人이 만든 통영 자계장 하며, 그 속에 든 가득한 옷하며, 침대 쇼파 카페트 그리고, 부엌 살림들과 베란다 가득한 문주란, 동백, 관엽수, 줄지어 선 란 들을 실어 내 보내며 나는 돌아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돌아오면 꼭 필요한 몇 가지만 들여 놓고 홀가분하게 살리라 뇌이며 나를 달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도 때가 되면 가고 어느 날 나도 갈 것인데, 애착은 아무 소용도 도움도 안 되는 일이라 여겨보면 서운할 일도 아니건만, 가슴이 허전한 것이 세상이 모두 비워지는 것 같기도 했었다. 마음을 비우고 태평양을 건너 온 지 벌써 여러 해가 되고 있다. 사람 사는 것은 잡동사니 만드는 것 인가. 이것저것 또 세간이 늘고 있으니 살아가는 것은 잡동사니를 만드는 일인가 싶다. 이제 어머니의 반닫이를 닮은 고가구 몇 점을 들여 놓고 아침 저녁 닦고 싶다.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 엄마가 사랑했던 흔적을 몇 가지 남겨볼 가 싶다. (’98. 12월 )
주간씨티 10.1.’98
“동아라이프지 ’05. “풀꽃 따는 여자 15”
생의 노을을 보며
석양의 바다는 고요와 침묵으로 물들고 있었다.
저녁 안개에 쌓여 벨카라의 바다는 달 같은 해, 해 같은 달이 해무리 져 지고 있었다.
지는 해를 보고 있으면 두 가지 생각으로 때때로 마음을 정돈하게 된다.
전자는 오늘 일은 오늘로 접어두라. 내일의 해는 또 다시 새롭게 떠 오를 것이다.
희망이고 기쁨이다.
후자의 생각은 속절없이 또 하루가 가는구나. 무엇으로 나는 남을 것 인가.
절망스럽고 슬프다.
너무 많이 생각하고 앞질러 가면 고독해 진다.
인간은 스스로 복잡해 지고 자기 올가미에 씌워서 허둥대는 생을 사는 것 같다.
그것은 욕심과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일 것이다.
공수레공수거 인생, 그날 쓸 양식으로 족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언가를 남기기를 원한다.
무언가를 남겨 두어 기억하게 하고 추억 받기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재산을 명성을 자식을 모두 나의 것으로 남기 바란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기라성 같은 먼저 간 선진들도 죽음으로 그 끝을 맺었으며 간간히 반추된들 그가 살아 올 수는 없었다. 살아있는 날 서로 사랑하며 나누며 웃음을 볼 일이다.
내일 일을 알 수 없는 인생이 내일을 위하여 노력한다 한다. 눈 감으면 것뿐일 이 세상에 평생을 아웅다웅 거리며 그렇게도 긴 여운을 남기려 애를 쓴다. 다 부질 없는 한 줌 흙이고 말 인생이면서도 우리는 내일을 꿈꾼다.
때때로 메스컴을 장식하는 재산 싸움에 부자(父子)가 얽혀있는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는 고소를 금지 못한다. 어쩌자는 것인지? 무엇을 위한 싸움인지?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지?
남에게 꾸러 가지 않아도 될 만큼, 도움을 주어야 할 이웃이 있다면 도울 수 있을 만큼의 필요할 때 쓸 수 있을 만큼이면 족하지 않을까?
넘치도록 왜 필요해야 하는지 그래도 욕심이 남아 남의 밥그릇을 훔쳐본다면 도덕적이지도 못할 것이라 본다. 즐거운 아웅다웅 말고는 아웅다웅 거리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일본의 어느 선승은 “우리는 아무 것도 뒤에 남지 않도록 뜨거운 불처럼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 모든 것이 하얀 재로 타 버리도록.” 멋진 말이다
오늘을 최선으로 살아야 한다. 뜨거운 불처럼 최선으로 오늘을 살고 내일은 하얀 재로 남아도 좋을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부부는 어느 날 사후에 대하여 논한 일이 있었다. 마침 열엿세 달빛이 창을 넘어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손을 꼭 잡고 달빛에 앉아 남은 인생에 대하여 담담히 얘길 나누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의(義)를 힘 입어 은혜 속에 있다는 것이 우릴 이렇게 편안하게 하며 소망 있는 날을 가졌으니 더 바랄 것이 무엇인 가.
어느 날 죽음이 오기 전에 장기 기증을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의견으로 오랜 시간을 논하였다. 꼭 필요했던 누군가가 재생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알아가길 기원하며 장기의 일부를 주는 일이 어떨까에 대하여 많은 의견을 나누며 삶의 지난날을 되돌려 얘길 나누고 보니 한 마음으로 숨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 그루 나무를 심어 키우다가 그 나무 밑에 남은 몫은 재로 뿌리자. 간단했다.
죽음은 간단한 것이다.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다.
죽음! 그것은 그것으로 이 세상하고는 아무런 연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각자 몫일 뿐이다.
일운과 내가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은 소망의 기쁨을 알기 때문이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한 날의 기쁨으로 족하게 살자.
두둥실 달이 서편으로 가고 있다.
기도 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꼭 잡아 본다. (
캐. 중앙일보 2월 12일자 게재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선물
받아서 기쁘고 줄 수 있어 기쁘다면 그 기쁨은 즐길 만 하리라 여겨진다.
선물하면 비싼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선물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부담스럽지 않아 또 주고 싶고 또 받고 싶은 것으로 고른다면 좋을 것 같다.
이른 아침 이슬처럼 싱그러운 한 묶음의 꽃을 받을 수 있다면 그 싱그러움으로 인하여 며칠을 즐거움의 향기로 살게 되리라 여겨진다.
몇 년 전 그 해 여름과 가을로 이어 흰 눈꽃송이가 내리는 겨울이 되도록 내내 나의 거실엔 향기로운 꽃이 번갈아 꽂히기 시작하였다. 우연히 나의 시를 읽고 가슴으로 받아 나를 찾게 되었다는 고운 여인이 백합 세 송이를 들고 왔다. 그때 나의 눈엔 수줍은 듯 미소하는 네 송이의 백합이 들어오나 했다. 그 이후 우리의 인연은 진한 향기를 내며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그녀는 보름이나 한달 쯤으로 새로운 향기의 꽃을 들고 와 나와 담소하며 기쁨과 즐거움을 풀어 놓았다. 좋아하는 사람을 위하여 꽃을 고르고 향기를 맡으며 찾아 온다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라고 볼우물을 예쁘게 지으며 그녀는 수줍게 웃었다. 그래서 즐거움의 엔돌핀을 가질 수 있다면 그녀의 행복한 순간을 뺏을 수는 없는 것이라 본다. 나 또한 그녀의 맑은 태도에 기쁨을 느끼고 있으니 고마운 일이기도 했다.
작은 한 송이 꽃이지만 주고 받으면서 기쁨이 피어날 수 있다면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는가. 누군가를 위하여 꽃을 선물할 수 있는 마음은 스스로 행복을 만드는 일이므로 행복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그녀는 나에게 복권 두 장을 선물해 왔다. 그리고 나에게 물어왔다. 만약에 행운이 온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고. 우리는 석양이 내리는 배란다의 티 테이블에서 그 이야기로 한참을 즐거울 수 있었다. 돈이 많아지면 그 만큼 여유가 있게 되는 것이니 필요한 만큼 이웃에게 베풀 수 있는 일이기에 우린 어디에 주고 어떻게 주고 다 퍼 주고는 두 손을 털고는 한참을 즐거울 수 있었다. 오래토록 즐거움이 기억에 남을 좋은 추억을 그녀는 선물하고 있는 것이었다. 참 지혜로운 여인이라 여겨진다. 나는 그녀에게 아름다운 세월이 지나기 전에 좋은 배필을 선물하고 싶다. 그녀의 향기에 꼭 맞는 배필을 그녀가 나를 위하여 꽃을 고르듯 나도 눈 여겨 고르고 싶다.
흰 눈이 소복히 내린 크리스마스 전 날에 동경에 있는 막내 딸아이에게서 가벼운 상자의 소포가 왔다. 나는 딸아이가 곁에 있기라도 한 듯 중얼거리며 자리도 옮기지 못한 채 복도에 쪼그리고 앉아서 급하게 딸아이를 보듯 속에 것을 뽑아 내고는 환성을 질렀다. 그 속에는 크리스마스 츄리와 여러 가지의 소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날 하루 나는 손에 잡히지도 않는 루돌프의 방울이며 요술공주의 빗자루며 천사들의 나팔과 별들을 매달아 놓느라고 완전히 동심의 소녀가 되어 엔돌핀을 생산하고 있었다. 곁에서 아들이 우리 엄마의 기쁨은 아무도 못 말린다고 웃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츄리는 내 거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그 겨우내 기쁨을 주었었다. 마침 간밤에 내린 눈으로 온 천지가 캐나다 특유의 츄리로 변해 있었다. 어딘가에서 루들프의 방울소리라도 들릴 것 같은 아침이었다.
때 맞추어 알맞은 선물은 서로에게 기쁨이 된다.
선물이란 꼭 물건이 아니어도 좋다. 지나가는 아름다운 말의 선물도 때론 물결이 일 듯 큰 기쁨이 될 수가 있는 것이고, 편지의 다정한 글귀 한 구절도 마음에 훌륭한 무늬를 놓을 수 있는 선물일 것이다. 서로에게 기쁨이 되면 나는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저녁 늦은 이 시간에 나는 한 통의 팩스를 받았고 원고 정리에 머리를 들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던 가슴에 출렁이는 물결 같은 연정을 퍼 내어야 했다. 누구인지 기억해 낼 수가 없어도 좋다. 받아서 기쁘고 보내는 쪽에서도 기쁨이었으리니 우리는 서로 성공하고 있는 것이라 여긴다.
“그대를 생각하고 있으면 향기 같은 것이 날아 오지요. 그대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황홀한 향기를 내는 존재입니다. 나는 그 향기에 늘 취해 있습니다.”
더 바랄 것 없는 향기로운 선물로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인다. (’97. 12월 )
’98.좋은만남 (종이상자 10)
풀꽃 따는 여자 22/
사랑 속의 사랑
“엄마 눈 속에 내가 있고, 내 눈 속에 엄마 있지?”
새까만 눈동자를 굴리며 세 살 박이 딸아이가 말했다. 얼마나 사랑스럽고 앙증맞은지 아직도 그 소리가 귀에 선하다. 어려서 토끼로 불리며 사랑을 받든 딸아이는 지금 동경에서 텍스타일 디자인 수업에 몰두하고 있다.
아이들이 자라 각자 자기일 때문에 흩어져 있게 되니 이런 날이면 공연히 그리움에 젖게 된다. 나는 잠시 깊숙이 넣어둔 종이 상자를 열고 아이들의 웃고 있는 사진들을 꺼내 보았다. 웃고 있는 아이들 얼굴 위에 또 내 어린 시절이 따라 웃고 있는 것을 느끼며 내 어머니의 모습이 떠 올랐다.
내가 어려 딸아이만 할 때 어머니는 팔월 한가위 저녁에 내게 ‘별 삼형제’의 노래와 함께 유희를 가르쳐주시기도 했다. 그 후 내가 어른이 되고 아이들의 어미가 되어도 그 밤에 어머니가 불러 주시던 노래와 유희 모습은 지울 수가 없다.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형제 반짝반짝 정답게 비추이더니 웬 일인지 별 하나 보이지 않고 남은 별만 둘이서 눈물 흘리네.”
어린 나에겐 어머니의 모습이 하늘의 천사처럼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 이후 가끔씩 엄마가 천사가 되어 하늘로 가 버리면 어쩌나 하고 ‘별 삼형제’를 부르며 혼자 슬픈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건 아주 비밀처럼 어린 시절 혼자만 간직했던 일이다.
자라면서 때때로 혹은 잘못도 하였으리라 만은 어머니는 회고 하시기를 “너는 내 속을 한 번도 안 썩였단다.” 하시며 대견해 하신다.
이제 네 아이들의 어미가 되어 나를 돌아 본다.
“너는 내 속을 한 번도 안 썩였단다.” 나는 과연 내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은 다 같은데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미운 짓 하고 욕심 내고 떼 쓰고 말 안 듣는 것이 크는 과정 중의 일이 아닌 가. 이렇게 말 할 수 있다는 것은 가슴이 참으로 하늘 같고 바다 같이 넓지 않고는 안 되는 일일 것이다. 지금도 간간히 안부 전화를 늦게 드려 죄송해 하면 오히려 목소리 들려주어 고맙다고 하시니 나는 늘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 앞에 언제나 무릎을 꿇는다.
아이들을 나무라면서 손바닥을 회초리로 치면서, 아이들의 눈물을 보면서, 나는 내 어머니셨으면 이런 때 어떻게 하셨을 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아이들의 매 맞은 손바닥을 쓸어 주면서 나는 함께 눈물을 흘리고 우리 다시는 이렇게 하지 말자고 격려하며 아이들의 반성을 듣기도 한다.
내 평생에 어머니는 나의 스승이시고 사랑의 길잡이 셨다.
어머니의 어지시고 고우신 성품은 환경에서 올 수도 있었으리라 믿어진다. 일찍이 어머니는 대가 댁의 고운 따님으로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라셨고, 시집 오시어는 시 어른들의 사랑을 받으시고, 또한 아버지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으신 연고라 여겨진다. 나 또한 어머니를 본 받고자 한다. 그리고 나의 아이들에게도 사랑으로 키우려 노력하고 있다. 내 노력이 얼마나 크냐에 따라서 내 아이들도 이 어미를 사랑하고 주위를 사랑하며 제 아이들에게도 사랑의 어머니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내 나이 벌써 지천명이 되었다. 그러니 어머니 연세 또한 웬일인가. 그러나 아직도 정정하시고 고운 어머니는 자식에게 폐가되지 않고 조용히 가실 수 있도록 기도하신다.
딸아이에 대한 그리움이 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졌다.
늘 그리운 어머니이고 아이들이지만 조그만 일이 계기가 되어 이 아침 가슴 뭉쿨한 그리움으로 커진다. 사진을 채곡채곡 상자 속에 넣고 보니 종이 상자 속엔 세월의 부피만큼 쌓여 가는 모정 또한 늘어 가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조그만 상자를 가슴에 묻고 살리라 여긴다. 그것은 자기만의 삶의 몫일 것이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마음과 마음을 붙드는 것은 사랑의 이름임을 분명히 느끼며 내 마음의 상자에 곱게 접어 넣어 본다. (’98. 3월 )
(’98.4월 좋은만남 월간지에 고정칼럼”종이상자”를 시작하며)
아름다운 인연
한세상 살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연을 맺으며 살아 갈 까.
아름다운 꽃을 만난 듯 아름다운 인연을 맺어 꽃의 향기처럼 향기 나는 관계를 유지하며 탐스런 열매를 맺어가듯 아름다운 인연도 있을 것이고, 다시 만날까 두려운 악인연도 있을 것이다. 내게는 상반되는 전후 인연의 경험이 몇 있다.
그 중 아름다운 인연을 생각해 보면 거슬러 초등학교 시절로 내려가야겠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나이에 무슨 생각이 있었을까 싶을 나는 열 두 살의 단발머리 어린 학생이었다. 선생님은 무용부에서 춤을 추고 있는 나를 찾아 내시고 시(詩)가 무언지도 몰랐던 가슴에 시심(詩心)을 넣어 주신 것이다.
채 겨울이 가시지도 않은 이른 봄의 4월의 연못가에 나를 불러 앉히시고 겨우내 잠자던 수양버들의 푸른 싹에서 시의 눈을 보여주시고 시의 색깔을 읽게 해 주셨다.
나는 4월의 그 수양버들 푸른 싹 눈에서 시를 찾았고 시의 색깔을 배웠다. 그것이 시와의 인연이 되었다. 또한 선생님과의 인연이 시와의 인연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문학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문학소녀로 밤을 하얗게 새우면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고 글을 썼다. 잡히지 않는 그리움의 형상을 찾아 헤매기도 하였었다.
잠깐 동안 생활을 배우느라 글 쓰는 것을 잊은 적도 있었지만, 내면에 잠재했던 용트림이 결국 다시 글을 쓰게 되었었고 이제 시인이란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의 선생이란 위치가 얼마나 막중하고 책임감이 절실해야 하는 가를 알 수가 있다. 그 시절이 인격의 형성기가 될 것이다. 고등학교나 대학에선 학문의 길을 가르치지만 초등학교에선 인격형성의 시절에 크다란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매사가 정말 스승이어야 하겠다.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가 아이들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 체벌 하나에도 마음의 닻을 내릴 수도 올릴 수도 혹은 멀리 떠밀려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때 그 선생님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그래도 나는 지금 시를 만드는 시인이 되어있을까 싶다. 시를 쓰는 마음은 아름답고 고운 것이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아름다움이다.
지난 겨울의 아름다운 인연도 말하고 싶다.
우리 집 건너 길가에 빌딩이 솟더니 산듯한 분위기의 치과가 개업을 했다.
치과에 가는 것은 어린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힘들고 무섭다. 칼슘 부족인지 유전적 영향인지는 몰라도 아이들의 치아를 모두 점검해봐야 했다. 평소에 다니던 치과는 너무 멀어 그렇지 않아도 치과를 옮겨야겠다 싶던 차라 다행이기도 했다. 새 빌딩의 원장선생님은 차분하고 단아하여 우선 믿음이 갔다. 어느 병원보다도 미소가 맑은 간호사들의 인상도 좋았지만 창가에 줄지어 놓여있는 난(蘭)의 숨소리가 원장선생님의 인격 같아서 치과에 왔다는 두려움 보다는 정적인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여 년 간 잘 간수하여 온 나의 어금니가 탈이 났다. 원래 금니였으니 다시 금니로 해 넣어야 하겠으나, 그럴 무렵 아들이 유학을 떠나기 전에 치아를 점검하고 몇 개를 치료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경제적인 부담도 크고 하여 “아들아, 엄마 재산 축 내지 말고 나중에 너 재산으로 금니를 해 넣어라.” 라고 말했던 일이 생각나서 나는 선 듯 금니 해 넣는 것을 망설였더니 “아, 이번에는 제 재산으로 선생님 치아를 해 드리겠습니다.” 기분 좋게 웃으시는 원장선생님은 그 말의 책임을 정말 지신 것이다. “가끔 저도 기쁨을 갖고 싶습니다.” 정말 멋진 꽁뜨 한편 읽는 기분이었다. 의사에 대한 종전의 선입관도 사라지고 참 멋진 향기가 나는 듯 했다. 그날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이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눈꽃 한아름 보내고 돌아 나오는 발걸음이 나비 같았다.
우리는 길던 짧던 한평생 살아가면서 아름다운 인연을 엮으며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4월이 가기 전에 또 아름다운 인연이 꽃처럼 피어 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96. 3. )
전화번호부 에세이 초대석 ’96. 4月호 게재
섣달 그뭄 밤
오랜 얘기처럼 기억 속을 여행하여 오십 년도 더 전으로 떠나 본다.
그 해 송년의 밤은 눈이 하얗게 내렸었다. 어둠 속에 잠긴 사랑채나 뒷곁 우물가의 석류나무나 감나무 가지들이 온통 흰 눈으로 새하얀 눈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집안엔 고소한 음식 냄새로 가득 찼고 우리들의 마음은 기쁨으로 출렁거리고 있었다. 오늘 밤만 자면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기쁨도 만만치가 않았고 설빔으로 만들어 놓은 예쁜 옷을 입을 수 있기도 한 때문이었다. 열 두 번도 더 입어보고 걸어두고 쓰다듬던 설빔을 내일이면 실큰 입을 수 있다는 기쁨이 얼마나 설레는 마음인지 지금 아이들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아쉬울 것 없는 지금의 세상에 사는 우리 아이들은 그때는 밥도 귀했다고 하면 고개를 갸웃둥 거리며 그러면 라면 먹으면 되잖아 한다고 했다. 군것질 거리라고는 나무에 열리는 감이나 대추 포도 복숭아 배 등이나 밭에서 나는 감자나 고구마였으니, 그러고 보니 자연 그대로의 천연 먹거리가 아니든가. 휄빙을 부르짖는 이 시대가 아이러니하다. 세월은 이렇게 돌아 다시 찾게 되는 것이다. 세상 인심도 그랬음 싶다.
모 방송국의 송년시 청탁을 받고 보니 벌써 한 해가 또 이렇게 갔구나 싶어져 새삼 깊은 감회에 젖는다. 이 어둠이 걷히고 새벽이 오면 새로운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되는 기쁨으로 밤을 새우던 날이 나에게도 있었건만, 이순의 문턱을 바라보고 앉은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송년의 밤도 두려워 진다. 그 시절 섣달 그뭄 밤엔 잠을 자면 안 된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가는 밤을 잘 지켜보아야 한다고 하셨다. 만약에 잠이 들면 내일 아침에 눈섶이 하얗게 변하고 엉덩이엔 꼬리가 돋아 난다고 하셨다. 너무나 무서워 우린 잠을 안 자려고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잠 속으로 떨어지곤 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상념은 다르나 송년의 밤은 두렵기는 마찬가진가 보다.
그렇게 다정했던 시간 속의 아버지도 가신지 오래고 형제들도 모두 제 가정을 이루어 겨우 일년에 한 번도 만나기가 싶지 않다. 자랄 적엔 세상 누구 보다도 귀하고 아껴주던 형제들도 자기 가정을 갖고는 촌수가 달라진 것 같다. 우선 자기 가정이 더 중해 지기 마련이니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이제 나도 예쁜 외손주들에게 세배도 받고 세배 돈도 주어 보고 싶다만 먼 이국에서 전화통만 붙들고 아쉬운 사랑을 전하고 있다. 나이가 들수록 자식들을 곁에 두어야 하는데 우리는 홀홀 단신 떠나있으니 둘이서 부지런히 운동이나 여행을 하면서 그리움을 달랜다. 겨울 비로 잠잠히 온화한 겨울을 나는 것이 밴쿠버다운데 올해는 눈이 많이 내릴 모양이다. 신천지로 만든 눈의 세계가 고요하다. 시 한 수 절로 읊어지는 날이다.
돌이켜 보면 언제나 꽃띠에 머물지만 / 금방 쉰 되고 예순 되는 것을
그래도 붉은 장미라 외치는 것은 / 아직도 가슴에 불타는 열정이 남은 탓일세//
세월은 길고도 긴 기차길 같지 만 / 또랑물 하나 텀벙 건너 온 것만 같으니
내게도 있었던 은구슬 같은 추억들 / 그리워 잠잠히 가슴에 어린다
발자국이 짧던 그 시절엔 / 높게만 보이던 고향 언덕이나
앵두빛 꿈이 익던 사춘思春의 가슴이나 / 첫사랑 꽃잎 같던 부끄러움도
내게도 있었던 그림 같은 일//
안개 속에 젖은 나는 불이 되어 / 세월도 꿈도 태워가는 오늘
등 뜨거운 햇살이 마냥 곱기만 하다.
ㅡ ‘돌이켜 보면’ 전문 ㅡ
누가 나를 닮은 눈사람 하나 만들어 주었음 싶다. 그러면 내 아홉 살 설빔에 달던 예쁜 세배 돈 주머니를 달아 보고 싶다. 파아랗게 젊으신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릴 것 같다.
(’04. 갑신 송년에).
풀꽃 따는 여자 13 동아라이프
이 봄을 친구에게
친구야!
봄빛이 내리는 뜰을 보고 있었다. 민들레 잎을 비집고 노오란 꽃 대궁이 올랐더구나.
우리 동심의 시절엔 늘 나비처럼 자유롭고 온 대지로 숨쉬는 대지의 딸들이었지.
단발 머리에 흰 칼라 교복을 입던 그 시절엔 자운영 꽃밭에 시집 한 권 들고 서면
세상은 온통 우리의 것 이였지.
소월을 얘기하고
그런 우리의 날들은 우정으로 날마다 꽃들을 피우고 나비 떼를 날렸었지.
우리의 아름다웠던 꿈을 이제 우리 아이들이 꾸어 주었으면 싶다만 가슴 아픈 현실 앞에 노오랗게 지쳐있는 아이들의 입시 경쟁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야 하겠니.
꿈이 없는 사춘기를 보내는 아이들을 보면서 안스러워지는 마음 따로 오히려 그 대열에서 낙오 될까 재촉하는 내 모습이 참으로 한스럽구나. 그 아이들의 조여든 회색 빛 가슴에 무슨 색깔도 그려 넣지 못하고 그냥 초조하게 바라 보아야 하는 오늘의 내 모습이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구나. 이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논하랴. 또 입시 요강이나 바뀌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로구나. 안타까운 마음을 글로 옮기다 보니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친구야!
세상이 무엇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단발머리 죽마고우라는 것을 잊지 말자구나
참된 친구란 자유롭게 흉금을 털어 놓을 수 있고, 정당하게 충고하고, 때 맞추어 돕고, 끈기 있게 참고 용감하게 막아주고, 변함 없이 우정을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고 들었다.
“길이 멀면 말(馬)의 힘을 알게 되고 날(日)이 오래면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된다.”이 말은 명심보감에 있는 내가 좋아하는 글귀이기도 하단다. 옛 어른들은 이렇게 꿀처럼 단 말씀들을 남겨 놓으시고 우리의 가슴에 손을 얹게 하시는구나.
친구야! 우리의 우정은 아름다운 꽃으로만 지지말고 열매 맺는 과실수가 되자구나.
아름다운 이 봄과 함께 시 한편을 네게 보내마.
건강한 심신으로 행복 하라 기도하련다. 안녕!
발자국이 짧던 그 시절엔/그렇게도 크게 보이던 뒷산 언덕
꿈꾸던 포풀라 나무엔/까치 빈 둥지가 달려 있었지/
물안개 자욱한 산 자락엔/열여덟 꿈이 걸려 있고
보리 물결 고운 밭 이랑엔/그 때 그 웃음소리 들려 오누나/
머리에 인 세월의 조각들이/눈가에 주름 몇 개 얹어 주었기로
푸른 책가방 던져 두고 뒹굴던 그 숲 속/
재잘대던 새소리 네 소리를 /어찌 잊을 수 있다더냐/
엉겨 잡는 따스한 손마디/말이 없어도 그냥 알 수 있는/
네 마음의 소리 나는 듣는다/
네 눈가에 비치는 눈물마저도/
네 입술에 묻어나는 미소마저도/떠나 보낸 세월 속에서/
찾아져 오는 시간들/네 설음 내 설음/내 기쁨 네 기쁨 모두 함께 엮자/
어제도 그제도 아닌 먼 그날부터/한 꿈 먹으며 키워온 그 향기/
*비봉산 푸른 잎새처럼/너의 싹 나의 싹 얼루며 키워/
그 보람 함께 나누며/또 한번 그날까지 손 잡고 뛰자구나. (’98.3 )
*비봉산; 경남 진주 진주여고의 뒷산으로 봉이 날아 올랐다는 전설이 있음.
****까마득히 아득한 옛날이 되고만 그 시절이 새삼스럽다.
출판을 위하여 원고를 정리하면서 감회에 젖는다.(’08.8.)
금란지계(金蘭之契)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또는 흘러가며 더러는 잊혀지고 더러는 오래오래 더불어 우정을 나누며 살게 된다. 그 중에서도 가슴을 맞대고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고 정당하게 충고할 수 있으며, 때 맞추어 도우며 함께 걸어갈 친구를 얻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봄비처럼 촉촉히 만물의 소생을 도웁 듯 가슴을 열어 맞을 수 있는 친구 한 두 명 있다면 인생은 풍성한 가을을 맞은 듯 행복하리라 본다.
누구나 그러하겠으나 나 또한 친구가 많은 편이다. 어린 시절 소꿉친구나 선후배의 학교친구, 아이들 엄마친구 동네이웃친구 문우들, 살아오면서 정을 나눈 친구가 어디 한 두 명이겠는가 마는 그 중에서도 가슴을 묻는 친구가 몇 있다.
사리를 알게 되어 남의 말에 현혹되지 않는다는 불혹을 중반에 이고 이제 인생 길벗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아껴가는 아름다운 친구이다. 날마다 안부를 묻지 않아도 늘 그 자리에 있어 주고, 언제나 그림자처럼 마음 곁에서 느낄 수 있는 친구, 가슴이 저린 날엔 따뜻이 손 잡아 주는 그런 친구다.
몇 해 전에 나는 내 삶의 반쪽을 잃어버리고 몹시 힘들어 한 적이 있었다. 시간은 세월이 되어 속절없이 흘러 그 날을 덮어 가고 있지만 내 가슴에 남은 친구의 아름다운 우정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이후 인생 길에 친구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며 살고 있다. 친구는 나를 위하여 함께 울었고 위로했고 힘이 되었으며, 지금도 함께 밀어주며 당겨주며 인생 길을 걷고 있다.
어느 날 턱에 닿도록 세상 피곤이 덮쳐왔을 때 나는 그냥 그 친구의 가슴에 쓰러져서야 숨을 쉴 수가 있었다. 그때 친구는 나를 안아서 덮어주고 평안을 주었다. 참된 친구란, 줄 수 없는 것을 주고, 할 수 없는 일을 해 주며, 괴로움을 당할 때 외면하지 않으며, 비밀을 간직해 주는 이런 덕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언제나 고마운 내 친구는 이러하다. 서로의 눈빛만 보고도 피곤의 중증을 알아 처방을 내려주는 친구가 있어 나는 행복하다.
명심보감에 “길이 멀면 말馬의 힘을 알게 되고 날日이 오래면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나는 날이 갈수록 친구의 우정에 평안을 느낀다. 좋은 친구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아서 인생을 함께 바라보는 잔잔한 호수와도 같다.
아내를 고를 때는 층계에서 한발 내려서고, 친구를 고를 때는 한발 올라 서라고 했던 탈무드의 말이 아니더라도 역시 나의 친구는 나 보다 한발 위에 있는 것이 사실이기에 나는 그저 감사할 뿐이다. 그 어떤 조건 없이 포용하며 감싸줄 수 있는 우정은 정精이 아닌 의義에 불타는 고백하지 않는 정열일 것이라 여긴다. 춘추시대 제 나라 사람 관중과 포숙아가 나눈 관포지교管鮑之交는 우리에게 참으로 교훈이 되는 아름다운 우정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관중은 “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 준 사람은 포숙아다” 라고 했다. 나를 알아주는 벗이 있다는 것은 살아갈 가치가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정이 메말라 가는 이 시대이고 보면 의義는 더욱 찾기 힘든 일이 되고 있다. 이 세대에 관포지교 같은 우정을 내게 주는 친구에게 감사하며 나 또한 친구의 부탁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 덕성으로 살고자 한다.
향기가 풍기는 방에 들어감 같이 친구의 우정엔 가감加減이 없기에 오늘의 나를 행복하게 한다. 금과 같이 변하지 않고 난초와 같이 향기로운 금란지계金蘭之契 의 우정이 내게 있는 한 나는 영원히 행복할 것이다.
나를 잊어버리지 않는 벗, 미워하지 않는 벗, 그리하여 사랑하는 막역지우莫逆之友 하나쯤 있다면 가슴에 휘파람이 도는 삶의 위안이 되는 일일 것이다.
이 가을에 가슴에 있는 친구와 더불어 단풍 진 가을 산을 올라 힘껏 소리쳐 우정의 메아리를 날려 보는 것도 인생 길의 즐거운 한때가 되리라 여겨본다. (’96. 3월에)
’96. 3. 한국통신기술 권두 에세이
‘
가슴에 있는 친구
세상에는 세 종류의 벗이 있다고 했다.
그대를 사랑하는 벗, 잊어 버리는 벗, 미워하는 벗이라 했다.
다람쥐 형제가 놀다간 나뭇가지에 밤 사이 눈이 와서 소복이 쌓여있다.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놓고 새삼 유년 시절의 애틋한 그리움이 솟구치다 보니 이런저런 모습들이 떠 오르는 아침이다. 벗이란 무엇으로 남는가! 애틋히도 못 잊어 사랑으로 말하던 친구가 있었다. 우린 어린 시절 아래 윗 동네에서 자랐었다. 철 없던 시절 개울에서 물장구도 치고 가재도 잡으면서 푸른 여름을 보냈으며 가을 햇살에 잘 익은 사과처럼 싱싱한 유년과 더불어 사춘기를 맞았다. 언제부턴가 우리들은 어디에서 나온 심사였는지 서로를 보면 쑥스럽고 부끄러워져 숨고 슬슬 피해 다니곤 했다. 사춘기의 미묘한 감정이 만들어 내는 숨바꼭질이었을 것이다. 숨으면 찾아 내고자 하는 술래처럼 먼 발치에서 가슴을 설레기도 하면서 끝내 찾아낼 수 없도록 꼭꼭 숨곤 했다. 그렇게 사춘기를 보내면서 우리들은 고향을 떠나 진학하게 되었었다. 부산으로 진주로 흩어지면서 하나 둘 잊어가고 있었다. 늘 새로운 곳에서는 또 새로운 만남이 시작 되기 마련이다. 오뉴월 햇살처럼 젊은 날의 세월은 참 길기도 하였다. 나는 긴 터널을 빠져 나온 후의 새처럼 참으로 새로운 하늘을 본 듯 사랑에 빠졌고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이 사랑을 위하여 존재한 것으로 여겨졌다.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존재를 변화시키고 이제는 추억만 남긴다.
그토록 애절히 사랑을 호소하던 K, 한 마디 말도 못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내 창가에 편지를 밀어 넣던 J, 언제 어디서나 내가 가는 곳에는 눈물 가득한 크다란 눈으로 바라보고 섰던 S, 종이 학을 접어서 내가 다니는 길목에 뿌려두던 M은 민방위 훈련 중 깜박 내 생각에 총알을 맞을 뻔 하였다면서 대학 노트 두 권을 내밀었었다. 깨알처럼 일 주일간 훈련 중 자기 연정을 담은 마음이라 하였다. 결국 그 연서마저도 받지 않아 그를 슬프게 했지만 사랑을 위하여 젊음은 눈물겹도록 집착하고 자기 표현과 감정을 전하려 하였었다. 누구나 그러했듯이 나 또한 젊은 날의 자존심을 대쪽 같이 새우며 푸른 초원에서 바람처럼 날아올 것 같은 아름다운 왕자를 꿈꾸며 결백하게 마음을 가꾸고자 했다. 그 날에 펼칠 예쁜 마음을 위하여 이슬처럼 맑아 있고 싶었던 것이다. 드디어 나는 기다리던 왕자를 만났고 행복한 젊은 날을 꿈처럼 살았었다. 세상은 공평한 것인 가. 신은 질투가 많다고 하였던 가. 이제는 신이 책임져야 할 부분만 남은 것이다. 나는 홀로 나비가 되어 외로히 날다가 시인이 되었다.
어느 날 나를 찾아 낸 M, 눈물처럼 다가왔다. 내 두 손을 꼭 잡아 쥐고 연민의 가슴을 흐느끼는 반 백의 철민. 잔설을 머리에 이고 저명 인사가 되어 있는 철민. 그러나 내 앞에서 울고 있는 철민은 물장구 치고 돌맹이 들치며 가재 잡던 오십 여 년 전의 그 개구쟁이 사내아이 철민이었고 중학교 입학하던 날 영어 알파벳을 적어서 내 손에 쥐어주고 달아나던 까까머리 소년 철민이었다. 가을 들녘에서 보라 빛 구절초 한 아름을 안겨주며 멀리 이사가게 되었다고 눈물처럼 말하던 소년 철민이었다. 다시 찾은 친구는 그토록 아름다운 우정으로 나를 대우해 주었다. 그는 내게 힘이 되려 노력하고 있었다. 행여라도 나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으려 최선의 배려를 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모르는 척 그러나 속 마음이야 어찌 고맙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봄은 가고 여름도 가고 또 가을도 어김없이 순리대로 오고 갔다.
세월이 약이라고 아무도 치료해 줄 수 없는 것들은 세월이 알아서 감싸 주었다.
내 가슴을 보낸 후 내가 세월을 계산하는 데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그래서 가끔 내 자신에게 되 묻곤 한다. “아직도 그것 밖에 안 되었어?” 혹은 “벌써 그렇게나 되었어?”
나는 이 두 의문사에 대한 시간 계산으로 기분을 나누고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선자의 마음일 때와 후자의 마음일 때 기분이 달라져 있고 내가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가를 혼돈하지 않아야 하기에 생각을 정리하기 위하여 길을 떠나곤 했다. 혼자 길을 떠나다 보면 홀가분하여 좋기도 했지만 때론 돌아오는 길목에서 눈물이 될 때가 허다했기에 그런 날이면 곁에 와 앉아주던 말 없던 자리여도 친구란 좋은 것이구나 여겨지던 날이 있었다.
한 잔 술도 못하고 부루스 한 곡도 못 춘다고 질책도 받았지만 조용한 물가 찻집에서 애잔한 그 눈물의 시간을 넘길 수 있게 지켜보아 주기만 하여도 위안이 되던 날이 아름다웠다.
나를 잊어버리지 않는 벗, 미워하지 않는 벗, 그리하여 사랑하는 벗이 하나쯤 있다면 가슴에 휘파람을 일으키는 허허한 삶에서 위안이 되는 일일 것이다. (’98. 2월 )
’98 좋은 만남(종이상자 9)
아름다운 청년의 그 눈빛
‘호박꽃도 꽃인가’라는 말이 있다면’ 호박꽃도 꽃이지’라는 말도 말이 되는 것 같다.
꽃 같은 시절도 지나고 낙엽 같은 우수를 가끔씩 느끼게 되는 날이 오가는 어느 날,
가을 구절초 같은 연보라 빛 연서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을을 보내고 흰 눈이 내리는 십이월의 끝에 어느 커피 라운지에서 비로소 구절초 연서를 보내오던 청년의 뜨거운 손과 악수를 하게 되었다.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라 그러한지 가끔씩 호감을 갖는 사람들이 더러는 있지만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청년으로부터 구애를 받고 보니 약간은 황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해 여름 물가에서 문학 쎄미나가 있었다. 모두들 오랜만에 동심으로 돌아가 물 수제비도 뜨고 물속에 발을 담그고 좋아 들 했다. 그런 가운데 짖궂은 어느 선배 한 분이 나를 물속에 끌어 넣어 물에 잠기게 된 헤프닝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냥 일어서기도 민망하고 하여 이왕 빠진 김에 박수소리와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물길을 가로질러 강 저쪽으로 헤엄쳐 건너가 버렸다. 그리고 바위 위에서 옷을 다 말리고 건너 온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 모두들 놀라기도 하고 신기해 했던 것 같다. 그것이 화건이 되어 화제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이 청년 시인의 가슴에 아마 그때 연정의 씨앗을 가졌던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랑하는 마음은 아름다운 것이다.
어떤 사물이든 사랑하고 좋아할 수 있다는 자체가 순수하고 거짓 없는 자기 표현이라 본다.
사랑하는 마음은 기쁨이며 활기인 것이다.
지천명의 고개를 넘어 아름다운 청년의 불타는 눈빛을 받는다는 것은 기쁨이기도 하지만 곤혹스러운 난처함 역시 나의 몫이었다. 좌우지간 힘든 게임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를 다치게 해서도 아니 될 것이고 그렇다고 여유를 주어 희망이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니 말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으로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그의 자리로 돌려 보내야 했다. 그러나 젊은 사자는 오래도록 그 기백을 누그러뜨리지를 않은 체 나에게 기쁨이 되려 애쓰곤 하였다. 그렇게 뜨거운 계절은 가고 나는 먼 나라로 떠나오게 되었다.
지금쯤 내 거처가 묘연하여져 엄청난 화가 났겠지만 십오 년이란 세월을 먼저 살아간 길을 차차 알아 간다면 이제 귀여운 고양이라도 되지 않았겠나 여겨진다.
연정이란 임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싶다. 내 가슴에서 일어나는 불꽃이긴 하지만 내 사고와 상관 없이도 일어나지 않던 가. 사고와 의지가 아무리 강하여 자존심이 대쪽 같아도 가슴에서 울어대는 사랑의 향기에 걸 맞는 상대와 결합이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 또한 운명이라고 해야 할 까. 때때로 불편 서러운 커풀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연민을 느끼게 된다. 허기사 사람 사는 모양이 다 다르니 모두가 아름다웁기 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데 질서가 주어진다면 슬픔 보다는 기쁨이 훨씬 더 자리하리라 여겨진다. 잠시 왔다간 연정의 자리지만 아름다웠었다. 그러나 자기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더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나도 이제 서서히 나에게 맞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난초처럼 청초하고 백합처럼 우아하게 사는 것이 행복의 모습도 아니요 너무 부해도 너무 가난해도 사람의 감정이 사각거리게 되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오늘이다. 그러나 혼자는 너무 외롭다는 것을, 가을 들녘에서 눈물이 된다.
아이들이 자라 각각 사랑을 하게 되니 모두들 자기 즐거움으로 어미의 빈 가슴을 더욱 비게 만든다. 그리고 머잖아 모두 떠나가겠지. 내 기쁨으로 지냈던 지난 젊은 시절이 새삼 어머니께 무심하지 않았었나 죄송함이 가슴을 저리게 한다. 이제 사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리게 되니 나도 나이가 들기는 들었나 싶다. 그때는 내 기쁨이 앞서 있어 내가 기쁘면 엄마도 당연히 기뻐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자식도 품 안의 자식이란 말이 새삼스러워 진다.
모든 것이 내 것이라 여기므로 애착과 집착이 나를 슬프게 하고 상대적으로 더욱 외롭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벗어나 ‘나’ 이고 싶다. 그래서 나는 나를 위하여 내 사랑에 도전하려 하는 것이다. 비록 호박꽃이라 하더라도 꽃인 것 만은 사실 아니겠는가.
열매까지 맺는 야무진 꽃이 호박꽃이거늘.
가을 햇살에 잘 영글은 호박처럼 이제 나도 사랑의 열매를 거두고 싶다. (’98. )
98’좋은 만남 (종이상자 8)
가슴에 있는 하늘
하늘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늘은 숲 속 웅덩이에도 가득 들어 있었고 오늘 내 가슴에도 뿌듯이 들어있다.
아침 일과를 마치고 비가 내리는 베란다에서 잿빛 하늘을 보고 있었다.
찰랑찰랑하는 막내 딸아이의 음성이 동경을 떠나 태평양을 건너 내 귓가에 앉는다.
반가움에 금방 내 목소리도 찰랑거린다.
세월이 유수와 같다던 말씀이 새롭다. 저희들 선 키가 엄마의 앉은 키 보다 더 작던 그 시절은 멀리 떠 가고 이제 다들 성인이 되어 안주하고 있다.
그 시절 “엄마 눈 속에 내가 있잖아. 이것 봐”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엄마 얼굴을 감싸 쥐고 들어다 보며 신기해 하던 막내는 아직도 가끔 엄마 눈 속에서 자기를 보고 싶어 한다.
사랑스런 딸아이들을 보면서 이제 사랑스런 여자가 되길 엄마는 기도했었다.
그리고 잘난 남자 말고 멋진 남자를 만났으면 싶었다.
포용력이 있고 건전한 정신의 근사한 남자를 만났으면 했다.
사람의 인연은 어디에서든지 시작 될 수 있는 것이기에 스쳐 지나가는 눈길 속에서도 얄밉다 무시하던 그 사람과도 우연한 반짝임을 보면서 인연은 시작되는 것이란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이 흘러 지나간 어느 날 새삼 그 눈빛을 만나면서도 인연은 또한 시작되기도 한단다. 엄마는 그랬지. 내가 좋아할 사람은 청마를 타고 구름 저 편에서 싱그러운 햇살을 가르고 머리칼을 휘날리며 오지 않을까 하고 꿈꾸었단다.
그러나 그는 청마도 타지 않고 머리칼도 휘날리지 않은 체 가만히 내 곁에 다가 오더구나. 꿈꾸는 스물세 살의 내게 다가왔던 목이 긴 멋진 그 청년, 그 후 나는 그 멋진 이를 뿌리쳐 본 적이 없이 사랑할 수 있었단다. 왜냐하면 그는 멋진 남자였기 때문이었단다.
가끔 아들의 모습에서 그 청년을 보게 될 때 나는 가만히 아들의 손을 잡아 본다.
여자의 행복이란 사랑 받는 것에 있다고 본다.
내가 사랑하는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모습으로 살아줄 때 그것이 행복이라 본다.
너희들은 너무 강하게 자라지 않길 바랬다. 여자가 강하다는 것은 불행해 질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다고 엄마는 여기고 싶구나. 여자는 부드러워야 예쁘단다. 좀 모자라는 듯 넘길 줄도 알고, 잘난 말 보다 조용한 침묵의 지혜를 배워가는 것도 사랑스러운 여자의 모습이 될 것이다.
딸아이들이 꽃처럼 피어날 때 나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청년도 그냥 보낼 수가 없어 휠긋휠긋 훔쳐보며 미소 짓곤 했다. 그것은 내게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었다.
큰 딸애가 남자 친구를 소개 했을 때이다. 건강하고 순박한 청년은 정씨 가문의 자랑스런 삼형제 중 막내였다. 우리 부부는 내 딸의 소중함 때문에 남의 집 귀한 아들을 한동안 저울대 위에 올려 놓고 이리저리 재고 달아보면서 가능한 저울 눈을 내려 놓으려 하였었다.
평소에 나긋나긋 부드럽던 딸애는 자기가 고른 신랑감을 포기 않으려 우리와 팽팽히 맞섰다. 그 때는 딸애가 괘씸하기까지 하였으나 지금 오손도손 그림처럼 아들 하나를 두고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아름답기 그지 없다.
행복이란 작은 씨앗에서 발아하는 것이다. 묵묵하고 건강한 가장이 되어 아내와 아들을 푸근히 안고 살아가는 사위를 보면서 대견하기 또한 그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다.
딸이 셋이나 된 나는 염려보다는 오히려 딸아이들이 어떤 청년을 만나 최종 결정을 하고 내게 데려올 것인지 몹시 궁금하고 기대에 차서 두건거리는 가슴이 되곤 했었다.
큰 딸애가 자기 개성에 맞는 잘 생기고 멋진 청년을 찾아 왔듯이 둘째도 셋째도 어느날 “엄마 짠!” 하고 훌륭한 청년을 데리고 오리라 여기며 행복한 기대로 차곤 했었다.
그런 날들이 있었어 아름다운 오늘이 있다 여긴다.
딸아이들은 서로 합당한 사귐을 원하고 예의 바른 것을 원했다.
그렇다. 부부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어려워야 한다고 본다.
서로 입 속의 것을 나누어 먹을지라도 지켜야 할 부부의 도리에서는 한치의 어긋남도 용납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 본다.
서로 사랑하되 존경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결합체여야 한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것만큼 존경할 수 있는 어려움도 가져야 오래 사랑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딸아이들은 이미 엄마의 메시지를 가슴에 넣고 있는 줄 안다.
하늘을 닮은 큰 포용력으로 세상을 안고 도전해 오는 사랑에 환히 불 밝혀 보자구나.
딸아이들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떠 올리며 내 추억까지 함께 어울려 기쁨이 되는 하루였다.
(’98. 6월에 )
좋은만남 ’98. 7월호 / 종이 상자 4
동알라이프
모녀간의 대화
어머니! 하고 불러보면 언제나 목이 메이고 아련한 추억으로 들어서게 된다.
단발머리 중학교 3학년 삼월이었다. 보리 꽃 향기 가득한 어느 날 어머니는 내게 조그만 보따리를 하나 주시며 열어보게 하셨다. 무심코 열어보다가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엄마 품속에 엎드렸다가 그만 울고 말았다. 그 속엔 곱게 접은 서답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얘야, 여자에겐 나이가 들면 없어서는 안 되는 몸의 꽃이란다. 너도 이제 몸의 변화를 맞게 될 터이니 당황하지 말고 그 때 이것을 쓰도록 하여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딸이 어느새 자라 여자가 되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는 짐작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 해 오월 나는 당황하지 않고 어머니의 기가 막히는 선견지명에 감사하며 그 일을 대처할 수 있었다. 만약 어머니의 지혜로운 배려가 없었다면 어쩔 번 하였을까 생각하면 저절로 감사하며 또한 아찔해 진다.
요즘은 일회용 생리대가 광고치는 세상이니 지금 신세대의 딸들은 감히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리라 본다. 모녀간의 사랑은 그런 날이 있어 더욱 그리운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때부터 도시로 나가면서 어머니와 떨어져 생활하게 되었다.
어머니와 나는 한 달에 한번씩 아무도 몰래 주고 받는 보따리가 있었다. 삶고 씻어 햇볕에 바싹 말려서 손질하여 곱게 접어 싸 주시는 서답 보따리는 어머니의 사랑 이였고 생명의 연결이었다. 자식의 것이 아니면 어떻게 그 뒷바라지를 할 수 있었겠는 가.
세월이 가고 이제 어미가 되어 서고 보니 새삼 어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컸던 가를 느끼게 된다. 세월의 바뀜은 산천만 변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이제 부모관도 바꾸어 놓은 것 같다. 어머니는 내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시는 주는 사랑이셨는데 지금 나는 어떤가. 준다고 여겼으나 돌아서서 섭섭해 하고 나무라기까지 않는 가. 점점 이기적인 사랑으로 서 있는 내가 가끔은 부끄러워 진다.
일회용이 나오지 않았다면 딸이 셋이나 되는 나는 어쩔 번 했을까 생각하면 일회용이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 여겨진다. 돌이켜,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지냈던 그 시절이 어머니 앞에 한없이 죄송해 진다.
언젠가 한번 어머니께 현대판 서답을 보여 드렸더니 오히려 당신 딸 생각하시고 ‘참 좋은 세상이구나. 다행이다.’ 하시며 위로의 얼굴을 하신다.
한해가 시작되기 전에 달력이 나오면 어머니는 달력을 걸기 전에 꼭 기억해야 될 집안의 애경사의 날짜 위에 메모를 하시곤 했다. 그 첫 번째가 시댁과 친정, 그리고 이웃 친지의 생일과 제사와 기억해 오던 날들을 색연필로 구별하여 표시 하셨다. 그리고는 부엌과 화장실에서 눈 여겨 볼 수 있도록 실수 없이 정리하시고 새해를 맞으시곤 하셨다. 흉보면서 닮아간다고 했던가! 어느새 내 몸에서는 어머니의 냄새가 배여 하나하나 닮아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딸아이가 시집을 가게 되고 그 아이들에게 하나하나 이런 모습들이 닮아 갔으면 싶다.
시댁 어른들의 생신을 잘 기억하고 시누이 동서간에 생일 등을 기억하여 작은 선물이라도 정성스럽게 보낼 수 있는 여인이 되었으면 싶다.
생전에 친할머니께선 어린 나에게 곧잘 말씀하시기를 “네 어미만 닮거라.” 하시며 당신의 며느리를 예쁘하셨다. 나는 철 없이 결혼을 하고 때때로 시댁과의 어려운 일을 넘기면서 때론 감사하며 때론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니를 상기하며 인내했었다.
“하루를 참으면 백날이 편하다.” 는 어머니의 말씀 붙들고 젊은 시절을 보낸 것 같다. 참아야 한다는 말씀에 매사를 참으며 살아가니 때론 그렇게 가르치신 어머니가 원망스러운 날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꼭 그 말씀에 감사하게 되곤 했다. 시집살이는 살고 나면 끝이 있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처럼 칭찮이 따라오게 마련이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이 나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나의 딸들에게 내 사랑이 온전히 전해지도록 나는 빛으로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나의 딸들이 또한 그녀들의 딸들에게도 어머니의 모습이 전해졌으면 싶다.
오늘은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찰밥에 팥을 송송 넣어서 맛있게 지어 찾아 뵈어야겠다.
지금쯤 고운 한복에 안경 고쳐 쓰시며 성경 읽으실 어머니 모습 눈에 선하다. (’98. 8월에)
‘98년 좋은만남 8월호 (종이상자 5)
꽃잎보다 고운 나의 어머니
세상에 태어난 생명은 누구든 어머니가 있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부자든 가난하든 누구나 한 분의 어머니를 모시고 또한 가슴에 살고 계실 것이다.
그 많은 세상의 어머니들 중에서도 내 어머니처럼 고운 성품의 여성은 또한 드물 것이라 믿는다. 벌써 일흔 넷이 되신 나의 어머니는 지금도 일기를 쓰시고 작문을 지으신다. 아들 내외와 손자들과 함께 생활 하시는 어머니는 새벽 잠에서 깨어나시면 기도하시고 행여 당신 며느리가 깰세라 고양이 걸음 하시며 살며시 산책을 나가신다. 돌아오는 손 끝엔 풀잎 몇 닢이 들려있고 풀잎들은 책갈피 속에서 예쁜 꿈을 꾸게 된다. 노인정에라도 가시길 권유하면 담배 연기와 화투 놀이가 맘에 드시질 않으신 모양이시다. 틈틈히 화분 손질을 하시며 성경을 읽으시고 이젠 노트에 성경을 곱게 쓰고 계신다. 창세기부터 시작하여 이제 시편을 쓰고 계시는데 요한 계시록을 다 쓰고 나면 주님이 오셨으면 좋겠다고 웃으시며 말씀 하신다. 그런 어머니를 뵈올 때 마다 나도 저 나이에 저렇게 고운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일 수 있을는지 사뭇 의심스럽다.
어머니는 나가시는 교회의 모임에서나 어디에서나 ‘고운 한복 할머니’로 불려지시는데 그것은 늘 상 고운 자태로 한복을 입고 계시기 때문이다. 평생 며느리 손에 자신의 피복을 씻게 하시는 일이 없으시다. 작은 일에도 항상 감사하며 당신의 자식들에게도 늘 미안해 하시고 또 감사해 하신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께 늘 상 들어 온 말씀 중에서 사무치게 남아있는 것은 “하루를 참으면 백날이 편하느니라 항상 참고 견디거라.” 이 말씀에 시집살이도 무난히 넘기지 않았나 싶다. 때론 이 말씀이 족쇄가 되어 답답한 날도 더러는 있었지만 참고 견딘 결과는 항상 밝은 날이었고 그때마다 어머니께 감사하며 지낸 것 같다.
‘꽃잎 보다 더 고운 나의 어머니’ 이것은 언젠가 내가 쓴 시제(詩題)이기도 하다. 난 이런 어머니가 항상 마음에서 떠나질 않는다.
십 년을 애간장을 태워 나를 낳으셨다고 회고 하시며, 귀하게 키운 당신의 딸 자식을 아직도 분에 넘치는 사랑으로 바라 보시곤 하신다.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감사에 젖는다.
아직도 부끄럼 타시는 어머니는, 옛 전에 먼저 가신 아버지의 생전 이야기를 하시며 얼굴을 붉히신다. 소 시절 아버지는 하도 노래를 잘 하는 선술집 기녀가 있어 잠깐 외도를 하시고 씨앗을 보셨는데, 아이를 가졌다는 핑계로 집으로 들어 오게 되었다 한다. 그때 어머니는 당신이 아들을 아직 못 낳고 있던 탓으로 작은댁을 잘 거두었다 하신다. 그러나 작은댁이 양심이 부끄러워 아버지 오시는 것을 마다하고 어머니 또한 “저 사람이 당신보고 이 집에 왔는데 저 사람 곁에 있어야 합니다.” 하고 밀어 내시니 아버지는 밤이면 베개를 들고 이 방도 저 방도 못 가시고 괴로운 사랑 타령을 하셨다고 한다. 결국 작은댁이 제 발로 “형님, 용서 하십시오. 형님은 복 받고 아들을 얻어 실 것입니다.” 하고는 큰 절을 하고는 물러 갔다 한다.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는 “이 좋은 세상에 태어나서 남자 대장부가 한번은 해 봄 직한 일이 아니더냐.” 하시며 오히려 덮어주시니 아버지 사랑이 더욱 깊어질 수 밖에 없었으리라 본다. 두 분의 금슬은 유달랐고 어머니는 그 후 5 년 터울로 두 아들을 얻어 셨다. 어머니의 지혜와 슬기의 폭이 내게도 넘치게 비친다.
우리 여성이 여성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대문 밖으로 소리를 지를 때 과연 대문 안에선 여성의 행복이 자라고 있는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이브에게 주신 여성으로서의 자리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여성으로서의 권리를 참으로 찾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본분을 지키며 조용함이 아름답게 여겨진다. 세상이 하도 급 변하여 요란함이 두렵다.
출필고반필면(出必告反必面)이라 했는데 자식 된 도리로 아침에 나갈 적에 부모님께 고하고 저녁에 돌아와서 부모님과 얼굴을 대하여 인사를 나누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과연 우리는 서로 바쁘다는 이유로 어떻게 하고 있는가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전화 한 통화도 제때 맞추어 못 드리고 있으니 불효가 크다. 그러나 어머니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길 바랍니다. ‘태양이 있는 곳은 언제나 따뜻하고, 어머니가 있는 곳에서 자식은 행복하다.’ 비록 러시아의 속담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늘 어머니의 그늘에서 따뜻함을 느낀다. 내게도 어머니가 계시는 한 외롭지 않고 어머니의 향기가 있는 한 난 행복할 것이다.
언제 들어도 따뜻한 어머니의 목소리를 오늘은 꼭 들어야 할 가 보다. (’95. 10월에)
한국통신기술 사보 ’95.11-12월호 게재
지천명(知天命)의 얼굴인 오늘
언제나 꽃이고 싶겠지만 어느 날 문득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서 자신을 보면, 그 좋던 청춘의 날도 다 가고 저무는 햇살처럼 황혼의 여운에 걸려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오월의 신록처럼 싱그럽고 라이락 향기처럼 아름답던 그 시절도 가고 꿈이었나 싶은 그 날들이 이제 추억이란 이름으로 매달려 한 폭의 그림처럼 걸려있다.
그 시절엔, 사진 찍기를 즐겼고 사진 정리하는 것도 큰 기쁨이었다.
꽃이 예쁘다고 찍고 경치가 좋다고 찍고 날씨가 좋으면 좋아서 찍었다. 그냥 하하거리며 많이도 찍었는데 이제 언제 그런 날이 또 오냐 싶다. 사진첩 속엔 그리움만 가득 쌓였다.
이제 이 나이가 되니 사진 속의 얼굴도 멋 적고 저 많은 사진들도 짐이구나 싶어 진다.
그래도 내 살아있는 동안은 때때로 돋보기 쓰고라도 보련마는 나 떠난 후엔 모두가 부질없는 세월이 되고 말 것이기에 그러하다.
어느 날 친구 몇 명이 모였기에, 모처럼 강물도 볼 겸, 경춘가도를 달려 화천댐으로 간 적이 있었다. 늘 상 지지고 볶던 집을 떠나 아내도 아니고, 어미도 아닌, 자연인 나로 돌아간 그녀들은 묵은 스트레스를 강바람에 날려 보내기라도 하듯 앵무새처럼 재잘거렸다. 그냥 열 여덟 소녀시절의 모습이라도 된 듯 퐁퐁거렸다. 가정이란 인생의 안식처지만 때론 여자들에겐 스트레스의 움집이기도 하다. 인생이란 살아가는 그 모두가 이율배반의 행위 속인 것 같다. 남편 흉 자식 흉들을 실컷 보더니, 어느새 다들 흉들이 자랑으로 변하여 늘어지게 들 웃어 제킨다. 산전수전을 겪으며 반백을 넘어 살아온 나름대로 행복한 얼굴들이다.
개나리가 만발한 언덕에 오르니 모두들 사진 찍자고 이구동성이다. 여고 시절로 돌아간 그녀들은 예쁜 짓들을 연출하며 모두 소녀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나 찍는 기분도 좋지만 어디 찾을 때의 기분도 지금 같을까, 속으로 고소를 금치 못하였지만 즐거운 한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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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움은 분명히 자신의 것이다. 기분이 좋다는 것은 몸 속에 산소가 가득 넘쳐 혈액순환이 잘 된다는 증거니, 그날 우리는 분명히 서너 살은 젊어졌을 것이다. ‘봄의 교향곡’을 부르며 돌아오는 발길은 날고 있었다.
다음 모임에서 사진들을 받아 던 그녀들은, 서글픈 세월 앞에 모두들 다시는 사진 찍지 말자고 했다. 아예 카메라를 갖고 오면 벌금을 메기겠다니 하하하 웃을 수 밖에. 마음 같지 않은 세월 앞에 우리는 무릎을 굵어야 했다. 돌이켜 보면, 언제나 꽃 띠에 머물지만, 금방 마흔 되고 쉰 되는 것을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세월 앞에선 마땅히 숙연해 져야 한다.
비록 겉은 할미꽃으로 변하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직은 붉은 장미라고 외치고 싶어 함을 누구 좀 알아 주었음 싶은 것이다. 세월은 길고도 긴 기차길 같지만, 때론 잠깐 또랑물 하나 펌벙 건너온 것만 같으니 아침 이슬 같은 세월 앞에서 남은 날을 계산하면 서글픔에 닿는다. 그러나 아름다운 추억은 늘 우리를 즐겁게 한다.
나에게도 있었던 은구슬 같은 추억들, 그리워 잠잠히 가슴에 어린다. 발자국이 짧던 그 시절엔 모두가 크게 높게 보이던 고향의 그 언덕도 낮고 작은 동산이 되어 있었다. 그 시절엔, 웬 웃음도 그렇게도 헤프게 많았는지 염소 똥만 굴러가도 웃는다고 했었던가.
시집 한 권 들고 동산에 올라 저녁 연기 모락모락 오르는 동네를 내려다 보고 앉아 <파울체란/의 ‘죽음의부가’> 를 읽으며 고독에 젖기도 하고, <
참 아름다운 꿈을 이루고 싶었다. 그리고 무지개 빛 꿈을 꾸며 살았었다. 이제 그 꿈은 시가 되어 가을 햇살에 불타고 있다. 항상 나의 그리움은 안개에서 시작하여 안개 속으로 숨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첫 시집은< 그리움은 안개로 뜨고>이고 두 번째 시집은 <안개의 불>로 승화 되어 물과 불의 반어反語로 강한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유년시절 새벽 강 뚝을 오르면 강에서 뽀오얗게 피어 오르던 그 안개 속에서, 나는 그리움을 배웠었다. 이제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는 지천명의 중반을 이고 안개 속에서 나는, 불로 서서 세월도 꿈도 훨훨 태워가고 있다. (’96. 4월 )
전화번호부(에세이 초대석) ’96. 5 -6月호 게재
풀꽃 따는 여자 21/
라디오서울 세 번째 아침방송낭송
제 4 부 가슴에 묻고 사는 그리움의 이름
1. 여행과 숨어있는 숫자
2. 내 마음의 심연
3. 아름다운 밴쿠버에서의 육십일
4. 무소유 속의 유소유
5. 마음의 꽃밭
6. 여명을 여는 소리들
7. 기다리는 마음
8. 일상 속의 이웃들
9. 거라지세일의 만감
10. 그리움은 영원 속에 있다
11. 두고 온 하늘
12. 인생의 빚
13. 이사
14. 긍정적인 삶의 자세로
여행과 숨어있는 숫자
나는 짧은 여행으로 이곳 저곳을 잘 다니곤 한다.
부담스러운 짐을 꾸리지 않아도 되는 가벼운 손가방 하나면 족한 여행을 좋아한다.
1박 2일이나 2박 3일정도의 짧은듯한 여행길에 자연을 돌아 세상을 보고 글도 쓰고 마음을 식히는 것이 좋다.
홀가분한 손가방 속에 차 키와 노트 한 권, 볼펜 한 자루면 내 짧은 여행길의 준비물은 완료된다. 그런데 어느 날 인가부터 전화 카드가 하나의 필수품으로 첨가 되었다.
“엄마, 공중전화 카드 가져가는 것 잊지 않았겠죠?” 아이들이 종종 길 떠나는 내게 챙긴다.
“없으면 길 가다가 사지.” 하고 느슨하게 대답하면 딸아이가 어느새 자기 것을 내민다.
전화카드를 건네며 덧붙이는 말이 가슴을 찡하게 한다.
“이건 우리들의 탯줄이잖아요.”
내가 여행길에서 공중전화를 이용해 자주 집으로 전화를 못해서가 아니다. 비교적 자주 하는 편이다. 무선호출기를 소지하고 다닐 정도로 집과의 연결을 터 놓고 있다.
아이의 말을 듣고 보니 집과 떨어져서 가족과 연결하는 유일한 수단은 전화 밖에 없다.
아이가 공중전화 카드는 탯줄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것이 수궁이 갔다.
세 해전, 일신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더 많은 시간을 여행에 할애했다. 그것이 탈출의 비상구와도 같이 내 앞에서 길을 터고 있었던 것이다.
문명의 이기들이 쉽게 나의 몸을 여행의 도정에 맡길 수 있게 했고, 또 시 창작의 산실을 여행이 톡톡히 해 주었기 때문이다.
내 첫 번 째 시집의 90여 편이 대개가 여행의 길 위에서 (차 속 혹은 숙박지)탄생했을 정도니까. 그 해 가을, 나는 여행지에서 전화카드가 한편의 시처럼 은밀한 소리로 속삭이는 걸 들은 일이 있다. 때마침 조락하는 낙엽이 공중전화 부스 주변에 널려 있었던 때문일까?
카드 식 공중전화기 판넬에 입력액수의 검붉은 아라비아 숫자가 떠오르자 전에 없이 나는 꽂았던 카드를 얼른 되 뽑았다.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을 암호 같은 숫자를 눈으로 보고 싶은 충동이 그 순간 일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드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다시 투입구에 찔러 넣었다. 판넬에 다시 잔액숫자가 떠올랐다. 난해한 시 한편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시가 은유와 상징으로 창작되듯 전화카드는 자기테이프 속에 암호로 의미가 입력되어 있음을 받아 들여야 했다.
“요즘 어때? 그 검은 터널에서 빠져 나오려면 꽤나 걸릴 거야.”
나는 판넬의 숫자를 바라보며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친구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얼마 전에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낸 진주근교에 사는 여고동창 K이다. 판넬 속 숫자가 십 단위에서 줄어 들었다. DDD의 사용 전화료만큼 자기테이프에 입력된 잔액이 지워지고 있는 것이다.
죽음은 암호가 아닐까 하고 생각을 했다.
인생에 입력되어 있는 운명의 숫자가 제로(O)화 되는 숨겨진 숫자를 지우듯, 내 삶도 하나씩 지워나가는 것일 것이다. 나 혼자가 아니라 그들과의 곱고 미운 관계 속에서 한 자리씩 삶의 숫자가 소멸 되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 내 삶의 시가 아니겠는가.
오월의 스산한 바람이 지나간다.
분명한 것은 전화카드 한 장으로 전국 어디서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또 길을 떠나는 나에게 아이들이 전화카드를 챙기길래 “얘들아, 엄마는 숨어있는 숫자를 지우러 간다.” 라고 말을 할 뻔 하다가 말았다.
그 말의 뜻의 깊이가 아이들에게 난해한 수수께끼처럼 비춰질 것 같아서였다.
내게는 여행의 길이 첩첩 쌓이면 쌓일수록 그만큼 전화카드도 쌓여진다.
숨어있는 숫자를 다 써버린 빈 카드지만 다 모아 한 권의 시집으로 묶는다면 프라스틱 전화카드에 내 여정의 기쁨과 눈물, 빛과 그림자를 낱낱이 암호로 기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낯선 여행지에서 공중전화만큼은 낯설지가 않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 가…
한 장의 전화카드에 입력되어 숨어있는 숫자를 소진하고 있는 동안 나의 여행은 다시 다음 길로 떠나고 있는 것이다. (’95. 9.)
한국통신 카드 사 (K. T. C.엣세이) “95. 9-10월호 게재
@@@ 새삼스럽다. 날마다 발전하는 신형 핸드폰이 난무하는 이 변화된 세월 앞에서는…..
10년도 더 전에 쓴 글을 정리하며 세월의 무상을 본다.
2008년 8월 오늘로 또 다시 10년 후면 어떤 변화가 있으려나.
내 마음의 심연 (深淵)
서귀포로 가는 길은 호젓한 오솔길이었다
어린 시절 고향 뒷개에서 소꿉 동무들과 걸었던 다정하고 애틋한 정감을 지어주는 솔깃한 길이었다. 여기저기에 보이는 검은 돌담은 삼다 제주도에 와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 준다. 노오랗고 탐스럽게 다투어 열린 귤나무 가지는 자기의 몸 무게를 가누지 못하여 휘청거리며 땅에 드리우고 있었다.
10월 달의 늦은 가을을 막내 딸 토끼랑 제주 공항에 도착하니 바다는 하늘빛을 닮아 맑고 투명하며 푸르름이 한층 더 진한 느낌이다.
집안의 애경사를 한꺼번에 치르고 심신이 지친 어미를 위로하느라 막내 동생을 딸려 호텔 예약까지 하여 제주 여행길에 올려 놓은 둘째 딸아이에게 고마움을 보낸다.
내 나이에 걸맞지 않게 벌써 효도를 받은 격이 되었으니 연로하신 친정 어머니께 죄송한 생각이 든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그 동안 움추렸던 심신을 풀고 아이에게 고마움을 보내며 제주의 정취에 젖어 볼까 한다.
호텔 프론트에서 이곳에 보고 갈만한 곳을 소개 받고 약도를 한 장 얻었다.
짐을 풀고 렌터카를 빌려 호텔을 떠났다.
딸아이는 태평양에서 불어 오는 바다 냄새부터 맡자고 했다. 우선 서귀포 쪽으로 돌기로 하고 시내를 빠져 나갔다. 도로의 양쪽에는 유도화가 가로수를 이루고 있었다. 남국의 정취가 뭉클하고 느껴왔다.
‘유도화’ 하면 서울에선 기껏 화분에 관상용으로나 키울 뿐인데 이렇게 정자나무처럼 자랄 수도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선인장의 모습이 또한 그렇고 야자수들이 잎새가 또한 이국에 와 있는 느낌을 갖게 했다.
남북이 고작 삼천리 밖에 안 되는 나라 안에서도 이토록 이질적인 풍경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생각된다.
한적한 길을 접어들어 얼만큼 가다 보니 민숭민숭한 둔 턱이 있는 들판 가득히 억새풀이 새하얀 솜틀을 부풀려 놓은 듯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마침 내일부터 억새풀 축제가 열린다는 포스터가 호텔 입구에 붙은 것을 언뜻 보았는데 앞질러 우리가 먼저 온 것 같다. 억새풀은 비스듬이 내리는 햇살에 걸려 늦은 가을 바람에 사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딸아이는 여기저기 풍경을 스넵 하느라 여념이 없는 듯 하다.
억새풀의 사그락거림은 하늘에 있는 그를 불러오고 있었다. 억새풀은 그냥 그 자리에서 사그락 사그락 소리를 낼 뿐인데 왜 나는 아직도 작은 소리 하나 연한 흔들림 하나에도 그를 붙들고 못 견뎌 하고 있는 것 일까. 얼마나 더 긴 날을 보내야 숙연한 자세로 버티고 설 수가 있을 까. 고개를 저으며 하늘을 향하여 눈물을 뿌린다. 노을 지는 하늘엔 갈매기가 날으고 있었다. 아마도 포구가 가까이에 있나 보다. 서둘러 차를 몰아 내려서니 갈매기가 날아간 서쪽 하늘이 바다와 닿아 수평선이 찬란한 물 비늘을 이루고 있었다.
“야, 바다다.” 딸아이의 환호와 함께 바다 냄새가 쏴 밀려오는 듯 했다. 물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온화하게 다스린다. 그래서 늘 물은 사람으로 찾게 만들고 또한 안식을 준다.
동양에선 하나 밖에 없다는 바다로 내리는 정방폭포 앞에서 딸아이의 사진을 찍어주고 내 곁에 그를 세우고 사진을 찍어 본다.
“토끼야, 아빠 얼굴 잘 나오게 찍어야 한다.”
“응, 엄마, 아빠 팔장을 꼭 끼고 더 활짝 웃어 봐.” 딸아이가 응수 한다.
그와의 젊었던 그 날엔 폭포 중간에 무지개가 두 개씩이나 걸려 쌍무지개가 떴다고 기뻐하기도 하였는데 오늘은 너무 늦은 탓도 있겠지만 햇빛 방향을 놓치고 보니 그 아름다운 풍경도 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그 날만한 것이 없다.
석양이 지는 바다는 애잔하리만큼 황홀했다. 태양 아래 모든 생명은 한 번은 순서 없이 가야 한다. 다시는 아픔이 없는 영원한 안식을 하고 있을 그에게 축복을 보내어야 할까. 아무래도 억울하고 안타까운 것은 풀 수 없는 내 마음이다. 참을 수 없는 원통함이 가슴을 치구나. 용서할 수 없는 내 마음을 세상이여 용서하라. 나에게 시간을 다오. 용서할 수 있는 시간을 다오.
시간은 세월이 되어 나의 아픈 종기는 새 살을 만들 것으로 믿는다. 그 날을 살기 위하여 나는 시인이 된 것이리라. 아픔도 쓰고 웃음도 쓰는.
어느 듯 해는 바다에 잠기고 노을 만 아쉬운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서둘러 호텔로 돌아오는 길은 벌써 어둠 속에 잠기고 있었다.
어렵게 생각 말자.
너무 닫고 살지 말자.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고 아이들이 편안히 살 수 있는 길이리라.
내 재산은 아이들이고 아이들은 나를 지키리라. 남국의 밤 바다는 불혹중반의 나를 성숙 시킨다. 하늘엔 우수수 쏟아져 내릴 듯 별들이 눈물처럼 반짝거렸다. (’93. 10월 중순에)
(‘92년 10월 큰 딸을 시집 보내고 다음해 봄 ’93. 5월 그를 하늘로 보내고 내 생애 아득했던 날들의 고독이 여기 퍼어렇게 남아 있었다) >
아름다운 밴쿠버에서의 육십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 캐나다에서도 밴쿠버라고 했다. 내 인생 길에 약속되어 있었을 필연의 인연으로 이곳에 온 지도 벌써 두 달을 넘긴다. 아름답다고 감탄해 볼 겨를도 없이 밴쿠버에서의 육십일은 빗 속의 침묵이었다. 우기에 온 탓도 있긴 하지만 어쩌다가 만나게 된 햇볕 좋은 날 West Ven.의 언덕에서 본 하늘은 청아한 푸르름으로 빛났다. 태평양과 만나고 있는 하늘은 어디가 수평선의 선인지 알 수가 없게 그냥 바다에서 하늘로 올라 하나의 원이 아닌가 싶었다. 쎄컨네르 브릿지에서 바라 본 하늘은 과연 지구는 둥글구나! 바로 그 느낌이었다. 서울에서 조각 난 하늘만 보다가 이 거대한 땅의 나라 확 터인 공간에서 하늘은 그냥 자기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을엔 겨우내 맞아도 좋을 안개비가 솔솔 내리고 뒷산엔 눈부시게 흰 눈이 쌓이고 있는 것이 밴쿠버의 또한 매력이었다.
이런 날에 나는 99번 도로를 타고 하염없이 설경에 취한 채 휘슬러까지 달려가곤 했는데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짧은 겨울시간이 어둠에 잠겨있기 일수였다.
비록 말이 통하진 않아도 Hi! 하고 미소하는 이곳 저곳에서 꽁뜨 아닌 꽁뜨의 헤프닝을 벌여도 절박하게 힘들지 않음은, 변화무쌍한 저 파스텔톤의 하늘 벽화나 원시림에 가까운 파괴되지 않은 자연과 호흡할 수 있는 탓이리라 여긴다.
물건을 사고 동전의 셈이 어려워 한 움쿰 손바닥에 내어 놓으면 파아란 눈의 미소가 맑은 아가씨가 웃으며 ‘new Here ?” 하고는 알겠다는 듯이 골라 간다.
10쎈트가 5쎈트보다 적은 것이 왜 그렇게 이해가 어렵던지 방바닥 가득 동전을 쏟아 놓고 하루 종일 엎드려 셈을 하였더니 제법 이제는 계산에도 밝아 졌다. 포인세치아 화분 하나에 3불75센트인데 쇠꼬리 하나가 2불95쎈터 라니 묘한 일이다. (*우리나라 오늘 환율은 $1:640원) 그래서 한국 생각하고 자꾸자꾸 소 꼬리를 삶아 먹다가 엉덩이 어딘가에 꼬리라도 돋아 나면 어쩌나 싶다.
가공식품 천지에 다양한 먹거리가 있는데도 언제나 심히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웬일인지 모르겠다. 채울 수 없는 마음의 공간엔 그리운 조국이 들어 있는 탓인가.
감히 말하건데 나는 지독한 애국자라고 소리치고 싶어진 것이다. 나는 역시 “내 나라 대한민국이 좋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외국에 나가 보아야 비로소 애국자가 된다는 얘기가 옳은 것 같다. 한국에 있을 적엔 적잖게 불만스러운 모습의 내 나라였지만 이렇게 나와보니 새삼 내 나라에 긍지를 갖게 됨을 본다. 만약 조국이 없다면 얼마나 서럽겠는가. 이제 우리 조국도 외국에 나가 있는 내 국민들에게 힘이 되는 국력의 나라로 성장 되길 기대해 본다.
아들이 여기 West Van.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고등학교 일학년 초 자기 꿈을 펼쳐 보겠다고 식구들을 설득하여 오게 되었다.
당시 케세이퍼시픽 항공에 스튜디스로 근무하던 둘째 딸아이가 캐나다 밴쿠버로 ‘94년에 연수를 오게 되고 이어 ‘95년 10月 아들이 오고 ‘96년 10월 말에 내가 따라 들어 오게 되어 필연처럼 이곳에 앉게 된 셈이다. 막상 와서 보니 유학 온 우리 아이들이(우리나라 아이들) 여간 염려스러운 것이 아님을 알았다.
물론 개중에는 건전한 자세로 훌륭히 자기 자리에서 자신은 물론 국가를 빛내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어진 환경이 공부에만 열중하지 못하게 하는 요건들이 많아 여간 염려되는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님을 느꼈다. 고국의 부모님들의 노심초사와는 달리 아이들은 자유와 개방된 사회 구조에 절제되지 못한 채,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자유 함이 자칫 방종으로 흐르고 있는 듯 하여 여간 걱정스럽지가 않은 것이다.
조국의 우리 부모들의 각성이 있지 않는 한 유학 현실은 바로 잡기 힘들 것 같아 먼저 온 한 사람으로서 무어라 조언을 하여야 할지 난감하여 진다.
‘귀한 자식 매 한대 더 주라’는 우리 속담이 귀에 맴맴 거린다. 지금의 젊은 부모들은 자신들의 몸으로 매를 막고 있으니 이 아이들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이다. 이왕 온 유학이니 원하는 것을 얻어야 할 것인데 부모들이 함께 참여하여 고려해야 할 것이라 여겨진다. 그래도 세계 명문인 하버드대학에서 한국학생 수석자가 나오고 있으니 대한의 자손 됨을 가슴에 손을 얹고 자만도 해 보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곳에 올 적엔 행여 김치 구경도 못할세라 총각김치, 배추김치 두루두루 싸고 또 싸서 들고 왔더니 한국 가게에선 멸치 젓국에서 파 마늘까지 있어 놀랐다. 거리마다 한국 간판이 줄비하여 가슴이 따뜻해 지기도 했다.
며칠 전엔 정 서러운 형님 댁에서 꽁보리밥과 나물 반찬에 청국장까지 곁들여 먹게 되어 한국인가 싶었다. 타국에서 내 나라 음식을 먹으며 내 나라 말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다. 조국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Tax의 나라. 그러나 그것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권리가 보장 된 멋진 나라. 아름다운 자연의 나라. 결코 바빠하지 않는 차분한 나라. 합리적인 사고의 나라. 눈빛과 미소가 밝은 나라 캐나다에 온 것에 감사한다.
겨울 비를 보내고 어서 하늘 빛을 닮은 물빛이 아름다운 낙조 지는 수평선의 그 눈부신 경관을 보고 싶다. 앞 베란다에 키다리 나무 가지를 타고 블랙 다람쥐 두 마리가 내려와서 귀여운 눈망울을 굴리며 내게 말한다.
“사는 것은 꽃망울을 벙글게 하는 인내와 슬기”라고. (’97. 2.)
캐) 코리아나 신문 <여성 갈럼>
무소유속의 유소유
캐나다는 자연이 너무나 아름다운 나라다. 밴쿠버는 더욱 그러하다.
웨스트 밴쿠버를 지나 바다 건너 산봉우리 마다 흰 눈을 쓰고 있는 풍경에 취하여 Sea to Sky를 달려보면 더 더욱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하늘 아래 마지막 동네가 아닐까 싶어 진다. 안개 자욱한 처녀림(處女林)을 몰래 훔쳐보는 듯한 아슬아슬하고 짜릿한 흥분이 기쁨과 함께 발 끝으로 흐른다.
수평선 넘어 멀리 비에 젖은 파스텔 톤의 하늘은 노(老) 화가의 불 붙는 눈빛과 붓 끝에서 그려 나온 한 폭의 그림이다. 유유히 침묵하는 정박중인 우람한 선박을 눈빛으로 흔들어 본다. 바다는 나를 포용하며 힘차게 살라 하고 갈매기의 날개 짓은 나를 일깨운다.
참으로 자연은 무한한 아름다움이다. 이 무한(無限)을 유한(有限)으로 옮겨 놓으시는 이는 참으로 위대하시다. 우리의 시계(視界)를 위하여 그러하셨으리라 여겨진다.
바다가 잘 보이는 언덕에 차를 세우고 끓어 오르는 마음을 나는 글로 쏟아야 했다. 그 속엔 나의 눈물 같은 그리움과 사랑과 찬양이 있고 회한의 슬픔까지도 들어 있다.
길을 천천히 돌아 나오며 야성적인 웅장함으로 건축된 목조 건물하며 금방이라도 파티가 열릴 듯 화려하고 거대한 저택들의 생나무 울타리들이 나를 휘어 잡는다. 어느것 하나하나도 자연에 잘 적응하여 이방인의 눈엔 먼 이국의 정취에 흠뻑 젖게 하기에 딱 알맞은 모습이다.
비록 내 것은 아닐지라도 감상은 자유 아니겠는가. 무소유가 이렇게 자유롭다는 것을 새삼 느껴보는 시간이다. 만약 저것들 중 하나가 지금 나의 것이라면 소유자의 책임으로 가꾸어야지 세금 내어야지 시새움도 좀 해야지 그 얼마나 힘든 일이랴. 지금 나는 비록 밴쿠버의 나그네지만 저 모든 것이 내 것일 수 있는 선택의 자유와 감상의 자유가 또 한 내 권리로 남아 있으니 얼마나 기쁨이겠는가. 무소유가 유소유인 것을 새삼 절감하는 시간이다. 아 얼마나 자유롭고 건강한가 택하여진 것이 없기에 모두 택할 수 있는 자유, 모두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자유 함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앞서 썼던 <유와 무> 시 한 편이 이 아침 새롭다.
있고 없음은
마음 문을 열고 닫음에 있더구나
붙들고 놓지 못하는 마음은
늘 가난하였더니
열어 놓고 보니
모두가 내 것인 것을
<아래 3연 생략>
ㅡ제 2 詩집<안개의불>에서ㅡ
사람은 자연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한다. 그 속에 묻히고 싶어 한다. 신이 주신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 속엔 명예도 물욕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욕심 때문에 스스로 자멸하는 하루살이가 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사물을 욕심으로 보지 말고 정신으로 보게 되면 우리는 장자처럼 나비의 꿈을 꾸게 될 것이다. 살아 있는 날까지 창조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영적인 소리에 가슴을 채워 가야 하겠다. (
Sea to Sky ’97. 10. 주간씨티
동아라이프지 “풀꽃 따는 여자 18” 게재
마음의 꽃밭
햇살이 찰랑찰랑 마루 끝에 들어와 걸터앉는 오월의 아침 나절이다.
을씨년스러운 집안의 모두를 열고 봄의 향기로 적시고 싶다. 테라스 앞 자작나무의 잎이 피는가 했더니 어느새 새하얀 작은 꽃들이 벌들을 모아 들이고 있다.
작년 봄에 뉴웨스트민스터에 사는 동향의 글 쓰는 친구가 있어 그녀의 집에 갔었다.
마침 화분에 옹기종기 씨앗들이 돋고 있기에 물었더니 한국에서 가져다 심은 울 콩과 깻잎이라 한다. 내 나라 흙이 아니라도 잘 적응하며 싹을 틔운 것이다. 신기하고 울컥하는 고국 생각도 나고 하여 몇 그루를 얻어오게 되었다. 고국을 떠나 보아야 애국자가 된다더니 그 말이 일리가 있는 듯 하다. 고향의 흙을 담아 놓고 눈물지는 어른들도 계시던 것이 언뜻 생각 내여 지기에 숙연한 자세가 된다. 더러는 알타리 씨앗을 뿌렸더니 긴 무우로 변하였다고도 하고 쑥이나 미나리를 심었더니 향이 없다고도 한다. 여기선 쪽 파도 안 된다고 한다.
흙은 흙인데 고향의 흙이 아니라 뿌리 내리기가 낯설어 그런가 싶다. 하물며 피붙이를 떠나 와 있는 심정들이야 늘 고국이 짠 한 것이 당연지사라 울 콩도 심고 깻잎도 심는 게 아니겠는가.
화분을 몇 개 구하여 깻잎과 울 콩을 심고 나는 고국의 그리운 얼굴들을 대하듯 아침 저녁 인사도 하고 말동무 삼아 지냈다. 싹들은 무럭무럭 자라서 울콩은 콩깍지를 세 개나 매달았고 깻잎 다섯 포기는 그 해 여름 우리 집 손님들의 향긋한 입맛을 돋구며 고국의 정취에 젖게 하기에 알맞았다. 그리하여 우리 집에 오게 된 싹들이 다음 해에도 씨앗을 내고 또 다시 여름을 함께하며 자라고 있다.
기쁨 뒤에 잔잔히 퍼져오는 노스탈쟈의 노오란 손수건을 접었다 펼쳤다 하면서 나른한 마음이 된다. 어디에 앉아도 아직은 낯 설은 곳이기에 설익은 마음이다.
쓸고 닦아 빛나던 내 집도 아, 소리만 내어도 염려하여 달려오던 이웃과 친구들 모두 떠나와 손때 묻은 가구 하나 곁에 두지 못한 채 낯 설은 거울 속의 외로운 모습이다.
IMF에 허둥거리는 고국 소식을 들으며 더욱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은 오늘 나는 하루 종일 글을 쓰기도 한다.
가지고 온 간장 된장도 텅 빈 그릇 속에서 모두모두 비어가는 마음에 어머니가 빻아 주신 고추 가루로 김치를 담그며 향수를 달랜다.
햇살이 나뭇닢에 앉아 반짝거리는
“네가 보고 싶어 가슴이 저리구나.” 그냥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왜 그토록 서러움이 바쳤는지 그렇다고 지금 이 생활이 서러울 것도 없는데 인간의 회귀본능인가 싶다.
어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길 갈망하는 것처럼 언젠가는 내 나라에 돌아가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노년을 보내야 할 것이다.
무한히 큰 하늘이 옥을 구르듯 푸르고 맑다. 눈 앞의 높고 큰 산들의 봉우리마다 눈부시게 흰 눈이 쌓여 있고 목화송이 같은 구름이 떠 다닌다. 바다 같은 호수들이 곳곳에 앉아 있고
달력 속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정원 속엔 예쁜 집들이 들어있다.
사 계절 푸른 잔디밭엔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반나체로 잠들기도 하고 엎드려 책을 읽기도 한다. 고양이 다람쥐들이 사람들 사이로 들락거리고 그것이 일상이다. 해풍을 맞으며 바다 길을 걷다가 물개와 만나며 고기도 잡고 게도 잡으며 미역도 딴다. 가는 곳 마다 태고의 전설 속에 들어와 나무들의 전령들과 이야기 하게 될 것 같은 착각에 잠시잠시 빠져야 하는 공원들이 줄비하다.
캐나다는 법(法)이 확실한 나라다.
국민들 모두가 법을 준수하며 법을 믿으며 또한 확실한 법의 보호를 받으며 사는 것을 보게 된다. 법 위도 없고 법 아래도 없는 확실한 법이 준수되는 법치국가 인 것이다.
권력의 남용도 권력의 폭행도 있을 수 없고 한탕주위도 급행료도 물론 없다.
오로지 법이 관리이며 법에 의하여 자기 권리를 보호 받으며 열심히 사는 모습이다.
이런 나라에 왔으면 우리도 옛 부끄러운 습관은 좀 버리고 존경하며 존경 받으며 서로 돕고 서로 힘을 합하여 이민사회에 금자탑을 세워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 우리 2세들의 자리가 굳건해 질 것이다.
조국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 때 우리는 절약하며 한 푼의 외화라도 조국으로 들여 보내야 옳으리라. 대한의 긍지를 아름다운 이 나라에 심고 꽃 피워 결실을 고국에 바칠 수 있게 2세들을 키워가야 할 것이다.
가끔씩 모국어를 몰라 부모들과의 대화도 안 되는 1.5세들을 보면서 비참함을 느낄 때가 있다. 누구의 잘못이라 말하기 전에 이민자 각자가 각성하여야 할 일인 것이다.
오월은 희망의 달이다.
새로움으로 움 터고 활짝 피는 달이다.
마음에 한 그루 꽃들을 심자.
내 마음이 꽃밭이 되어야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새 싹의 깻잎이 자라고 울 콩도 올해는 더 많은 꼬투리를 맺을 것이기에 또 희망은 넘치게 하늘을 나른다. (’98. 5.)
여명을 여는 소리들
뎅그랑 뎅그랑 풍경소리가 새벽 잠 속에서 노곤하게 들려 온다.
좀처럼 듣기 쉽지 않든 소리다. 엘리노 현상으로 우기의 계절인 12월이 변화되기라도 한 듯 맑은 날이 계속 되드니 오늘은 바람이 일고 있나 보다.
귀를 기울이니 지나가는 차 바퀴에 빗물 소리가 흩어지고 있는가 싶다. 보슬비가 내리고 바람이 살랑거려 풍경을 울리며 새벽을 가르고 여명이 일고 있으리라. 나는 눈을 뜨지 않은 체 그냥 그대로 묵상 기도를 한다.
“저의 모두를 아시는 주님 오늘은 비가 옵니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고마운 하루 주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열어 가게 하소서.” 멀리서 기적이 울린다. 가깝게 다가오는 듯이 멀어져 가는 은은한 기차소리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
눈이 오면 어느 날 기차를 타야겠다. 그리고 설경이 아름다운 Sea to Sky의 긴 여정을 따라 Squamish(쎈 바람의 어머니)를 지나 Whistler까지 거슬러 가야겠다. 지금도 들릴지도 모르는 인디안들의 말굽소리를 음미하면 휘날리는 깃털 모자를 쓰고 내달아 달려 나올 추장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 까.
기차 속에서 나는 따뜻한 차 한 잔이 그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짐 속에 묻어 온 두어 잔쯤 들어가는 보온병도 찾아 두어야 할 가보다.
앞 파킹랏에서 시동 거는 소리가 난다. 일찍 출근하는 식구가 있나 보다. Bye! Bye! 하는 나직한 인사 소리가 들리고 곧 출발하는 차 소리가 여명을 가른다.
나직이 풍경소리가 빗소리와 어우러져 함께 소근거린다.
그날도 이렇게 빗소리가 나직이 들려오는 날이었지. 가만히 내게 다가왔던 그 사람. 참 아름다운 날을 내게 주었고 내게 여자의 행복을 키워주었으며 아이들의 고운 엄마가 되게 해 주었지. 항상 내게 부족하지 않으려 노력하던 그 사람은 무엇을 더 줄 수 없어 그것을 찾으려 그는 지금 떠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다리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냄새를 찾으며 또 하루의 새벽을 맡는 것이다. 멀리서 기차소리가 부드러운 기적을 붕! 울리며 스쳐간다. 어머니의 다정한 얼굴, 아이들의 웃는 소리 그리고 모습들 하나하나 스치며 가슴에서 기도로 변해간다.
‘자식도 품 안의 자식이라’ 하시든 어른들 말씀이 가슴에서 뛴다. 바쁘다 바쁘다 하던 그 시절, 아이들 키가 엄마의 앉은 키 만 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은 이제 나도 인생의 언덕에 서고 있다는 말이겠다.
각자 자기 발전을 위하여 흩어져 있는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모두들 어떤 모습으로 성장된 결과를 갖게 될지는 그들의 기도 속에 있게 되리라 본다.
보고 싶다 모두들. 풍경소리가 곱다. 아이들 웃음처럼..
창문 아래서 고양이가 야옹거리는 것이 예쁜 짝을 찾았나 보다. 작은 새도 날아 왔나 보다.
키다리 아저씨(테라스 앞에 서 있는 키가 큰 자작나무)어깨나 손등에 앉았으리라 본다.
이리 날고 저리 나는 작은 새들의 소리들이 곱게 들리고 까마귀도 함께 까악까악 울기 시작한다. 한국에서는 까마귀가 울면 재수 없다고 허위! 허위! 쫓으시던 어른들의 모습도 함께 어울린다. 까치는 한국의 텃새로서 기쁜 소식을 가져온다 하여 길조라 여겨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캐나다엔 까치가 없다.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져 있는 곳곳에서도 여름 내내 기다려도 매미도 울지 않는다. 기후와 풍토 탓인가 싶다.
주택가 여기저기 사람 속으로 걸어 다니는 까마귀를 만나면서 처음에는 공연히 선입감으로 언잖아 지기도 했지만 워낙 많아 함께 살아야 하니 이 만남을 피할 수 없어 자신에게 세뇌 시키기 시작했다.
‘까마귀를 만나면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어느새 나는 캐나다의 까마귀는 까치로 보여지게 되었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에 달린 것 같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고 느껴야 한다.
오늘 일은 오늘로 생각하자. 내일은 내일의 해가 또 다시 뜨지 않는 가. 마음 먹기에 따라 삶의 가치가 달라지기도 한다. 거미줄처럼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고독이란 우물 속으로 나를 잠겨 때론 자신의 본질을 재 발견하여 보는 것도 좋은 것이다.
다람쥐가 왔나 보다. 이제 눈을 떠야겠다. 그리고 힘차게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새 아침을 맞게 해 주신 우리 주님께 감사하며 세상일에 젖지 않고 하나님의 의((義)에 맞게 사는 하루 되길 기도하며 여명을 여는 소리와 더불어 또 하루를 열어 본다. (
기다리는 마음
풍경이 울리고 있다. 오십 번의 오십 번도 더 오래도록 풍경이 울리고 짝 짓던 고양이도 돌아 간지 오랜 비 내리는 밤이다. 도서관에 간 아들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새벽 한시 반. 아들은 지금 어디쯤 오고 있는 것일 까. 앞 팟킹랏에서 빗물을 털어내며 늦은 귀가의 누군가가 돌아오나 보다. 행여 빗길에 가속하여 사고나 안 나는지 눈 앞에 스쳐가는 염려들로 가슴이 저리다.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의 염려는 타고 나는 것 인가.
여학교 때 어쩌다 늦은 귀가가 있었다.
집에까지의 거리는 십 리쯤 되었다. 신작로를 5리쯤 걸어가서 작은 교각이 여섯 개쯤 되는 다리를 건너고 또 산모롱이를 지나야 한다. 그리고도 산등성이가 누워있는 성황당을 지나야 했다. 여기저기서 귀신이 나올 것 같아 온 몸의 솜털이 귀를 세우는 시간이었다. 내 책가방에서 연필 흔들리는 소리에도 놀라고 내 발자국 소리에도 귀가 곤두서서 이제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어 주저 앉아지는 찰라, 저 멀리서 등불이 흔들리며 어머니의 간절한 목소리가 나를 부르고 계셨다. 아, 어머니 당신이 셨습니다. 늦어진 딸아이 걱정에 애간장을 태우시며 나와 계신 것이다. 반가움이 서러움으로 변하여 어머니 품 속에서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무서움에 지친 것은 나였지만 기다리는 어머니의 애간장은 그날 저녁에 다 무너져 내렸다 하셨다. 그 때만 하여도 전화도 없었고 버스도 하루에 두어 번 지날 뿐이었다. 평생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어머니의 몫이라 여겨진다.
평소에 낚시를 좋아하시던 아버지는 여가만 나면 고기 낚는 것이 취미셨다.
어느 비 오는 여름날 새벽에 비안개를 가르고 아버지는 낚시를 떠나셨다. 오후가 지나고 어둠이 깔린 밤이 되어 비는 장대 같이 퍼 붙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으신 아버지 걱정에 밤을 하얗게 새우신 어머니는 새벽녘에 나를 앞세우고 호롱불 하나로 칠흑 어둠을 뚫고 개울을 더듬어 건넜다. 깊은 한골(어린 시절에 살던 동네이름)의 큰 산밑에 있는 저수지를 향하여 빗속에 미끄러지며 뛰고 있었다. 30여 년이나 물이 마르지 않았던 저수지고 보면 승천 못한 용이 이무기가 되어 살고 있다는 전설도 있음 직한 곳이었다. 아버지는 이 저수지 어느 쪽에 선가 비 냄새를 맡고 나온 팔뚝만한 붕어를 올리느라 아마 정신이 없으실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지금 이 양반이 행여 물귀신에게 잡혀가지나 않았나 만가지 걱정으로 정신이 반 나가신 것이다. 허둥지둥 겨우 길을 더덤어 저수지의 뚝방에 올라서니 천둥번개까지 시퍼른 칼날을 휘두르며 치기 시작하였다.
‘여보, 숙려 아버지요!” 어머니의 목소리는 차라리 절규하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나도 덩달아 엉엉 울며 소리쳤다. 번개 불이 지나간 저 쪽 산 밑에서 아버지의 “어이 숙려야” 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그 순간 어머니와 나는 호롱불을 던져두고 부둥켜 안고 소리 내어 울었다. 칠흑 어둠 속에서 모녀가 하나가 되어 안도의 눈물을 서럽게 울었던 것이다. 그 날 이후 아버지는 식구가 염려하는 위험한 낚시는 않으셨다. 엄마를 혼절하게 만든 그날 저녁에 올린 붕어는 아버지의 자랑스런 월척으로 탁본을 뜨고도 모자라 표구 되어 거실에 걸렸다. 가끔씩 아버지는 친구 분들을 불으시고 한 잔 술을 하시면서 자랑하시고 또 부러워들 하셨다. 때때로 표구 되어 걸려있는 그 밤의 붕어를 보면서 가족의 진한 사랑을 확인해 보게 된다. 가족이란 이런 것이구나 우리의 피와 살이구나 하나로구나 진하게 느껴진다.
애간장을 녹이는 초조로운 기다림이나 가족이란 이름아래 밤을 꼴딱 새우면서 간호하는 모습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외손주까지 보아 할머니가 되어있는 나에게 오늘도 어머니는 “얘야, 차 조심 하거라. 밥은 제 때에 잘 챙겨 먹거라.” 염려시다. 아마 어머니의 염려는 하늘로 가시는 그날까지 계속 되리라. 그리고 틀림없이 상속세도 내지 않고 내게 물려 주시고 가실 것이다.
생각이 나래를 펴고 있는 시간 차 한잔을 놓고 나는 글을 쓴다.
아들이 돌아오나 보다. 파킹랏에 차 들어 오는 소리가 난다. 오크 나무 계단을 두 칸씩 성큼성큼 오르는 놈은 아들이다. 발자국소리 만으로도 나는 아들의 냄새를 맡는다.
시집간 큰딸아이가 오손도손 잘 살기를 염려하고, 하늘에 떠있는 둘째 딸아이가 무사히 지상에 내리기를 기도하고, 일본에서 디자인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막내 딸아이가 자기의 길에 성공하기를 염려하고, 아들녀석이 불량 소년들에게 시비 걸리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길 기도하며, 평생을 기다리며 염려하며 살아오신 어머니의 가슴을 열고 가만히 나를 비추어 본다. (’98. 6월 캐나다 유학생엄마 시절 )
’98년 좋은 만남 6월 호 칼럼 (종이상자 3)
일상 속의 이웃들
“당신 또 호박 밭에 가서 내 생각만 하였구나 이렇게 날 닮은 호박만 열렸으니 어떻게 팔거야.” 얼마나 사랑스런 아내인가!
신문을 가지러 H상회에 갔다가 복스럽게 생긴 가게 집 아내가 수염이 우수수 난 남편에게 투정처럼 애교스런 농담을 하고 있었다. 비록 힘든 가게 일이지만 이토록 재치 있게 하루의 일상을 시작하고 보면 분명히 이 가게는 오늘 좋은 매상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힘든 세상 일 물이 흐르듯 살아야 할 것이다. 아웅다웅 한다고 달라질 것이 아니라면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며 의논하며 풀어나가다 보면 엉켰던 실의 매듭이 풀어짐 같이 매사는 풀어질 것이다.
사랑스런 이런 이웃을 보는 것은 행복이다.
간 밤에 내린 비가 잎사귀 마다 이슬로 맺혀 있다.
굴러 떨어지는 이슬을 보면서 서울에 있는 둘째 딸, 뉴질랜드에 날아가 있는 첫째 딸, 열심히 의상 디자인에 매달려 있는 일본에 있는 셋째 딸 토끼, 곧 호주로 떠날 수학중인 막내둥이 아들로 모두 흩어져 글로벌 가족이 되었지만 각자 자기 발전에 젖어 있는 혈육을 되돌아 보며, 그래도 한 넝쿨에 달려 있는 열매거니 생각하면 마음이 저리지만 하나님께 감사한다.
생각해 보면 산다는 것은 세월을 줄여 가는 것인데 우리는 꿈을 키워 가는 것이라 착각하는 것 일까. 각자 인생의 골인 지점을 앞에 두고 뛰고 걷고 땀 흘리며 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희망이고 그 길은 좁고 험하다 하더라도 가야만 하는 것이 인생 길인가 싶다. 조금 덜 생각하고 조금 덜 욕심 부리면 평안한 삶이 될 것이고, 너무 욕망이 강하면 심신이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나의 아이들이 너무 악착스럽지 않기 바란다.
사람 한 평생 길다면 길고 짧다면 한없이 짧기만 한 것인데 영육이 쉼을 얻고 생활에 웃음이 있다면 행복이라 여기고 싶다. 이런 날엔 꽃병을 찾아 씻어 두고 싶다.
한참 전 어느 날 아침에 한 친구가 급하게 전화가 왔었다. 간 밤에 영국의 황태자 비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몹시도 애석하고 흥분에 찬 것으로 보아 눈물을 머금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러했다. 다이애나는 비운의 황녀였다. 적어도 객관적인 우리는(여성들) 대부분이 그렇게 보려 했다. 그녀가 황녀가 되었을 때 우리 모두 다 황녀가 되었고 그녀가 타의에 의하여 그 행복을 빼앗길 때 우리는 상대적으로 나의 행복을 빼앗기고 있다고 여겨진 것이다. 그녀의 삶을 통하여 여리고 어여쁜 빛깔 속에 나를 동참 시키므로 간접적인 행복에 젖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가련 청순형의 그녀가 곱지 못한 다른 여인에게 남편의 사랑을 빼앗기는 눈물을 보면서, 방황하는 불안정을 보면서 우린 함께 눈물 지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슬픔을 머금고 사랑을 시작할 때 우린 가엾게 지켜 보았고 이제 죽음으로 끝나게 되었으니 얼마나 애석한 가. 그녀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하는 분명한 불륜 이였으나 세인들의 가슴을 울린 연인이다. 이렇게 아직도 가슴에 남아 애석한 눈물이게 하는 여인 다이애나, 그것이 그녀의 매력이었던가 싶다.
산다는 것은 다 그런 것인데 한치 앞을 모르는 인간은 그래도 육신의 꿈을 꾼다. 태어나는 대는 순서가 있지만 가는 길은 순서가 없는 것이다. 그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하신 일과 원하시는 일을 알고 깨우쳐 살아가야 할 책임이 마땅히 있다는 것을 알아가야 하는 것이리라.
햇살이 화분에 열린 토마토를 익히고 있다. 날마다 나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토마토를 살폈더니 오늘 아침 붉게 영글어 가고 있는 토마토 열매가 모두 아이들이 되어 팔을 벌려 나에게 안겨 오는 듯 하다.
생김새는 없었으나 먹음 직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던 H상회의 호박이나 서너 개 사다가 부쳐 먹을까 싶은 비 내리는 오후의 그늘이다. (‘
주간씨티(캘거리) ’97. 12게재
Garage Sale(거라지 쎄일)의 만감(萬感)
진 풍경이다/ 버리는 쪽에선/ 하찮은 것들이
참으로 아쉬웠던/ 내 것이 된다
어제 소중했던 것들도/ 오늘 한 낱 잡동사니로
내게서 떠나 보내면/ 내일 너에겐/ 소중한 가슴이 되구나
인생은 쳇바퀴 돌 듯/ 돌아가며 나누어 살아지니
크다 작다 아웅다웅도 / 도토리 키 재듯/ 그게 그거로 구나.
- <거라지 세일의 만감> 전문-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몇 가지 중 참으로 신기하고 멋진 일을 꼽으라면 나는 거라지 쎄일을 들고 싶다. 온통 큰 하늘이라 놀라고 일년의 반을 결이 고운 비(Fine Rain)가 끊임없이 내리는 날에 또한 놀라게 된다. 그러나 자연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마는 밴쿠버의 생활이다.
거라지 쎄일은 종류가 다양하다. 내가 아는 정도로는 자기 집 앞 뜰에서 하는 야드쎄일(yard sale)과 자기 차고나 집 앞에서 하는 거라지 쎄일과 이사 가기 전에 짐 정리를 위하여 집안에 그냥 두고 파는 무빙 쎄일(moving sale)등을 들 수 있겠다. 이 행사는 꼭 주말에만 하고 시간이 엄격하다. 나는 주말이면 집을 나서 쎄일이 있다는 주소의 화살표 방향으로 미로의 여행 길에 나선다. 작은 즐거움이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다.
그때 구입한 몇 종류 중에 내가 아끼는 것은 1974년 미국 Spokane엑스포에서 기념으로 각국 국기와 함께 그림을 넣어 만든 유리잔이다. 맥주 통 모양의 유리잔은 검은 브라운 색으로 나무 손잡이가 더욱 이색적인 멋쟁이 맥주잔이다. 나는 가끔 그 잔에 뜨거운 커피를 부어 마시기도 한다. 이 잔이 만들어 진 후 삼십 일년 전 처음 누군가가 이 잔을 들어 건배라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감회가 새로워 지는 것이다.
처음 거라지 쎄일의 참 뜻을 몰랐을 때는 어떤 것을 파는지 몹시 궁금도 하고 기대에 차서 갔었다. 그러나 황당하고 실소를 금지 못할 물건들에 오히려 놀림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고나 할까. 물어 볼 것도 없이 그냥 쓰레기 통에 옛날에 들어가고도 남았을 물건들이라면 고국의 내 친구들은 아마 믿지 못할 것이다. 양철 과자 통, 귀가 떨어진 장난감, 철이 벗겨진 상자 곽, 녹슬고 오래된 구식 전자제품, 손 때 묻은 묵은 책들, 각 종 쨈 병들, 후줄 거래한 옷가지들, 무엇 하나 집을 것이 없는 것들 이지만 그들은 열심히 팔고 사는 풍경이다. 어이도 없어 그냥 히죽히죽 웃고 있는 나에게 함께 동행한 이곳의 친구가 나 보기가 민망하였던지 이것이 캐네디언의 검소한 실생활이라고 일러 준다. 호기심으로 다니다가 몇 가지 필요한 것도 찾아내고 이제 그들의 참으로 검소하고 작은 것 하나도 아낄 줄 아는 생활 태도를 배워 가고 있다. 아이들 교육도 자유로운 듯 하나 개인의 독립심을 확실히 길러주며 키운다. 어릴 적부터 아이들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얻기 위하여선 어떤 대가를 치루게 한 후에 갖게 하는 교육은 바람 직 하다고 본다. 우리의 아이들은 필요한 것을 당연히 채워 주는 것이 부모의 의무고 자기들의 권리로 알고 있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도 당연히 부모에게 받기를 원하니 의타적으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자식을 위하여 나아가서 국가의 대로를 위하여 우리는 각성할 일이 많은 것으로 본다.
돌이켜 내 조국 한국의 모양을 열어 보면 때때로 부끄러움을 숨길 수 없다. 나라는 가난하고 흔들거리지만 개인은 모두 부자 아닌가. 너무 풍족하여 버리는 것이 너무 많다. 우리가 버리는 것 모두가 이곳에서 서로 주고 받으며 사는 거라지 쎄일에서는 어쩌면 제일 좋은 물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버리기 아까워 누굴 주고 싶어도 받을 사람이 없는 텅 빈 강정 같은 한국의 실정이고 보면 정말 우리 개개인이 각성하고 검소한 생활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캐네디언의 자기 나라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은근히 셈이 나고 보니 내 조국에 새삼 애착을 느끼게 된다. 이번 귀국에는 태극기 한 장을 꼭 챙겨 올 생각이다. 음(청색) 양(진홍색)의 태극이 뚜렷하고 건, 곤, 감, 이, 네 쾌가 반듯이 잘 그려진 대한민국의 태극기를 보며 아들에게도 대한의 피를 잊지 않도록 일러야겠다. 우리 차에도 국기를 붙이고 가슴을 펴고 다니고 싶다. 외국에 나가 보아야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나라가 강하고 잘 살아야 국력이 있게 되고 그래야 외국에 나와있는 동포들은 자부심으로 기를 펼 수 있을 것이다.
각성하여 모두 새로운 마음으로 작은 한가지 물건도 아낄 줄 알고 내게 필요치 않으면 서로 바꾸어 써도 부끄러워 않는 당당한 태도의 국민이 되고자 한다. 선(線) 하나 저쪽 땅에선 부족함으로 우는 내 동포가 지척에 있다는 것을 우린 가슴에 새겨야 한다.
자연의 나라 캐나다에서 자연의 모습을 배우며 순리에 맞추어 살아가는 법을 나는 날마다 배워 간다. (
주간씨티 11.15.’97 게재
밴쿠버 조선 1.29.’98 게재
풀꽃 따는 여자 16 동아라이프 게재
그리움은 영원 속에 있다.
아득히 멀리 소음도 없이 비행기가 날아간다.
황홀하도록 고운 풍경으로 날마다 밴쿠버의 매력은 열려 오는데 가슴 바닥 저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는 아직도 목이 쉬어 있다. 구름 밑으로 찬란한 호수가 열리고 녹음 계곡엔 언제나 끌어당기듯 마음을 붙드는 청옥색 물소리,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놓여 있다. 그러나 가슴에서 흐르는 서늘한 바람을 무어라 표현하면 될 까.
소음도 없이 멀리 비행기 날아 오르고
구름 밑으로 잔잔한 호수가 열렸다
녹음 계곡엔 마음을 붙들고 흐르는 개울물소리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이 아늑한 오후
나는 너를 곁에 두지 못했다
그리움만으로 채울 수 없는 것을
나는 아픔이라 이름하련다
우리 그 아픔을 무엇으로 채우랴
너와 나의 가슴엔 애절한 울음으로 목련이 피구나
새소리 바람소리 모두 보내고
썰렁한 지구의 뒷편에서
먼 이국의 시계 침을 자꾸만
자꾸만 뒤로 돌린다.
ㅡ 그리움은 영원 속에 있다. 전문 ㅡ
아무리 자연이 아름다워 서정적이라 하더라도 기본 마음의 그리움은 고향에 있기 마련인가 싶다.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희망하는 살기 좋은 곳이 캐나다의 밴쿠버라 한다 들었다. 그러나 가슴의 소리는 자연으로도 채울 수가 없는 것이다. ‘내 마음에 남 모를 허공 있네’ 가요의 한 구절이 새로운 날들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에 따라 그 마음 속의 허공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될 것이다. 돈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명예 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돈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고 명예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고 또 한 사랑 때문에 이 한 목숨을 버린 사람도 허다하지 않은 가. 그렇다면 나는 무엇으로 이 시간 가슴에 찬 바람을 맞고 있을 까. 두고 온 가족들 두고 온 우정들 두고 온 사랑들 그리고 그 여운의 그리움들인가. 애틋이 못 잊어 밟히는 이 가슴의 아픔은 그림자도 없다. 그리나 대신 채울 수 있는 일은 더 더욱 아니다.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은 마음에 채워지지 않은 부족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리라. 때때로 기쁨과 즐거움의 시간이 내 곁에 다가와 함께하는 여유를 갖기도 하게 된다. 하지만 돌아서 나를 곁눈질 하여 보면 무언가 아쉬운 듯 부족함의 여운이 서성대는 것은 마음 속 깊은, 내게 익숙해 있는 그리움의 그림자가 사라진 것이 아니요 잠시 고요히 내 곁에 잠들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런 날의 그리움은 잠시 잊은 것에 배가 되어 나를 휘몰아 가기도 한다. 익숙해 있다는 것은 참 편안을 준다. 익숙해 있다는 것은 참 아름다움이다. 오매불망 하지 않아도 오래 살아온 부부는 발자국 소리 하나에도 내 님의 심기를 읽을 수 있고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조심함을 내 님 또 한 알기에 사랑으로 화평이 오지 않는가. 익숙한 것이 그립다.
밴쿠버의 아침은 비가 내리고 있다. 창문 앞 자작나무 잔가지에 나의 가슴의 아픈 기포만큼 빗방울의 열매가 달려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언제나 갈망하는 씨앗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한 차원을 뛰어 넘어 그 그리움을 잘 승화시켜보면 영원을 사모하게 만드신 하나님이 주신 씨앗임을 알게 된다. 당신의 영을 담은 그릇인 나를 알아질 때 참 나를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비가 개이고 태양이 비치면 가지 끝에 열렸던 빗방울도 증발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으며 더욱 성숙 되어지는 나를 만나고 싶다.
하늘이 밝아 오는 것이 곧 비가 개 일 듯 하다. (‘97. 11월에 )
풀꽃 따는 여자 9 동아라이프
두고 온 하늘
쓸어지는 풀잎처럼 눈물 속에 두고 온 / 사랑이란 이름의 아픔은
붙들 수 없어 놓지 못하던 / 그 눈 가으로 흐르던/ 핏빛 노을
왔다고 아주 온 것도 아닌데 / 천만리 하늘 넘어/ 귀를 세우는 것
정녕 시간이 세월 되면 / 아픈 종기는 살이 될까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은 / 모두 세월이 알아서 한다고
오오 붙들고 놓지 못하는/ 아롱드리 가슴아
그대 아직 목말라 불붙는 눈시울이여
안개는 바다로 바다로 흘러 가구나.
-두고 온 하늘- 전문
지금쯤 고국엔 산 모롱이를 돌아 나가면 연 보라 빛 들국화가 모여 피는 언덕이 있었다. 안개 자욱한 이른 아침 길에 이슬 묻은 풀잎들은 언제나 수줍은 소녀 같아 아름다웠다. 양수리 쪽의 남한강을 건너 북한강변에 이르면 작은 찻집들이 있다. 마음이 울적해지는 날엔 그 곳을 찾아 토속적인 정감으로 장식된 찻집에 둘러 장작 타는 그으름 내음이 담긴 대추차 한 잔으로 그냥 가슴이 뜨거워 지곤 했다. 이 모든 모습들은 이제 나의 가슴에서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고국의 모습이다
지금쯤 가을 단풍이 불타듯 설악산을 건너 중부 지방으로 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단풍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붉게 물들어 내려가고, 봄이 오면 꽃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피어 올라온다. 자연 이치가 어쩌면 이렇게 다 공평한지 숙연한 마음이다.
두고 온 하늘 아래 못 잊어 가슴 저리는 그리운 얼굴들 하나 둘 손짓하며 눈앞에 아롱거린다. 훌훌 털고 비행기만 타면 보고 싶은 얼굴들, 함께 웃고 싶은 모습들 모두 볼 수 있으련만 떠나지 못함은, 아직 때가 이른 사람도 있어 그러할 것이다. 또한 금의환향을 위하여 때를 기다리는 사람도 더러는 있을 것이라 본다. 그 때라는 것이 참 의미가 깊은 것이 아닌가 싶다. 생각 건데 그 때를 위하여 때를 기다리다 보면 적절하던 때를 놓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아쉬움도 든다. 서로 보고 싶을 때 보고 웃어야지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맵새가 깊은 숲 속에다 둥지를 턴다 한들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고, 두더지가 강물을 마신다 한들 그 작은 배를 채우는데 불과하다.” 이것은 내가 즐겨 마음에 새기고 있는 장자의 소요유의 한 귀 절이다. 언제나 나의 가슴에서 나를 달래는 노래로 남아 있다. 겸허한 마음으로 욕심 없이 지혜롭게 살아야 할 것이다. 작은 지혜는 큰 지혜를 모른다고 장자는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작은 지혜를 타일러 큰 지혜를 살펴 보게 하는 것 같다. 큰 지혜는 한가하고 너그럽다 했다. 작은 지혜는 항상 따지려고 든다. 너그럽고 유유한 사람의 소리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자기의 의를 잊고 사는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일 것이라 여겨진다. 너무 타산적이 아닌 한치 물러남 속에서 더 잘 보이는 나를 찾아야 하리라 본다.
그리울 적엔 그냥 그리웁다고 말할 수 있는 진실한 삶을 살고 싶다. 보고 싶으면 그냥 찾아가서 문을 두들기고 싶다. 그것이 진실이고 참 나일 것이다.
올 가을엔, 정말 많이 사랑하고, 많이 행복한 우리가 되길 원해 본다. (’97. 5월 )
밴쿠버 조선 ’97 . 7. 4 게재
라디오서울 아침방송 두번째“04/10. 12
풀꽃 따는 여자 4 동아라이프
인생의 빚
단아한 탤런트 ‘
평소에 행동거지(行動擧止)가 아름답고 깨끗하여 예뻐 하는 배우가 나온 것도 눈에 띄었지만, 왕초를 한두 번보다 보니 오십 년 전의 기억으로 돌아가, 추억의 덮개를 열고 향수에 젖고 있었다.
나의 유년 시절에는 아침 저녁 밥 때가 되면 거지들이 귀퉁이가 떨어지고 땟국이 줄줄 흐르는 바가지에 숟가락 하나를 걸치고 찾아 오곤 했다. 그때는 모두들 힘들게 들 살았지만 특히 보릿고개가 되면 끼니를 거르며 살아가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겨울 동안 양식은 떨어지고 아직 보리는 익지 않은 그 힘든 기간을 넘기면서 ‘보릿고개’ 라 이름 하였다. 그런 때는 이제 막 싹이 돋는 쑥을 뜯어다가 밀 겨와 버무려 쪄서 개떡을 만들어 허기진 끼니를 때우기도 하였다. 그런 시절이라 다리 밑에는 움막이 곳곳에 있었고 우리들은 거지들의 모습을 보며 자랐다. 정권이 바뀌고 새마을 운동이 전개 되면서 모두들 ‘잘 살아보자’는 슬로건을 걸고 근로에 참가하면서 서서히 그 아득한 추억 속의 얘기처럼 움막과 함께 거지들은 사라져 갔다.
때때로 거지들이 떼를 지어 각설이 타령을 하며 동네를 돌기도 하였는데 그 땐 구경이 대단하였다. 작년에 갔던 각설이가 그 추운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죽지도 않고 또 온 것에 고맙기도 하고 신기하게 여기는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한바탕 동네는 씨글벅적 해 지곤 했다.
각설이 타령에 흥겨워 동네 아이들이 그 뒤를 따르고 아이들 뒤를 동네 개가 짖으며 따르면 조용하던 동네가 한바탕 잔치가 되곤 했다. 그들의 겨울이 늘 걱정 되신 할머니는 이불 대신 덮을 수 있게 꼴 머슴을 시켜 짚 동을 헐어 보내시기도 하고 한 소쿠리의 고구마를 쪄서 내 보내시기도 하셨었다. 거지들은 언제나 한가했다. 햇볕 따뜻한 봄날 오후에는 이가 득실거리는 옷가지들을 강변 조약돌 위에 펴 늘어 놓고 도람통에 물을 끓여 가끔은 삶기도 하는 듯했다. 그리곤 모두들 언제나 왁작지끌 웃고 살았다. ‘왕초’를 보면서 새삼 거지들의 모습에 향수를 느끼게 되어 비디오가 나오는 일주일을 기다리게 되곤 했다.
‘왕초’ 극 중 어느 날 거지들은 얼마간의 돈을 정당하게 얻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돈 보따리를 만져 보고 안아 보고 그들은 그 돈을 어떻게 쓰고 싶은 지를 얘기 한다. 그러나 그들의 시야가 좁은 것만큼 소원 역시 그 시야 속에 있기 마련이었다. 얼마나 순전한지 보고 있는 나도 그 시간만큼은 그들만큼 순전해져 웃을 수 있어 좋았다. 기껏 그들의 소원은 옷 한 벌 모자 하나 그리고 찐 빵이나 짜장면을 실큰 먹어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때 묻고 더러운 모습이지만 더 이상의 욕심도 꾸밈도 없었다. 그들의 순전한 마음을 보며 내 마음의 고운 눈물도 보았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문득문득 조급해 지곤 했었다.
그날 나는 식스포리나인(649) 복권을 한 장 샀었다. 요행을 바라는 욕심이었는지 빈 마음의 위안이었는지 모르겠다. 몇 차례 임자를 못 만난 복권은 그 주에 식스밀리언이 된 것이었다. 내 머리로는 환산이 안 되는 천문학적인 숫자인 것이었다. 복권 파는 케시가 조크로 물었었다. ‘그것이 당첨 되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나는 서슴없이 ‘너가 원하는 만큼은 너의 것이 될 것이다’ 라고 하였더니 뛸 듯이 기뻐하여 우리 다 같이 웃었었다. 그렇다. 왕초 식구들의 소원이 그곳에 머물 듯, 나 역시 생각해 보니 그렇게 돈이 많아져도 오히려 불편할 것 같다. 돈이란 없어서도 안되고 너무 많아도 그로 인한 걱정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꼭 필요한 만큼은 있어야 또한 불편하지 않는 것이 돈이다. 그래야 이 세상에선 사람 구실을 하게 된다. 부모 자식 간에도 부부 사이도 친구 간에도 더러울 만큼 돈이 정을 붙이고 떼고 하니 어쩌랴! 이 세상에 살아있는 한 그것이 또한 죄의 씨앗이 된다.
살아 가는 동안 첫째 남에게 신세를 안 져야 할 것이다. 둘째는 베풀어야 할 곳엔 꼭 베풀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나는 온통 신세만 지고 살고 있는 듯 했다. 신세 질 곳이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겠지만 내 개성을 잃고 있는 듯 하여 몹시 우울해 지기도 한 날이었다. 그 당시 IMF 가 그 원인 이겠으나 아니, 세상을 너무 몰랐던 내 어리석음의 대가 였겠지만 나를 궁지에 몰아 넣고 만 그 가엾은 친구는 지금쯤 어디에서 무얼 하며 그래도 나에게 미안해 하고는 있을지 궁금하다. 어디에 있던지 건강하게나 있었으면 싶다. 그때 나는 많은 것을 잃었었다. 재산을 잃고 그 친구를 잃었다. 자기 것 아깝지 않을 사람 있겠는가. 작은 돌맹이 하나라도 자기 것엔 손이 오므라드는 법이다. 내가 그녀의 부탁을 모질게 거절하였더라면 지금쯤 나도 그녀도 아무 것도 잃지 않았을까. 정말 알 수 없는 이율배반利率背反 이다. 이 어려움을 딛고 가게 하는 고마운 사람들이 더러 있기에 아직 세상은 살만한 희망이기도 하다. 잃으면서 얻고 얻으면서 잃어가는 것이 인생 사 인가 싶다.
시간은 세월을 속절없이 안고 간다. 초로(草露)의 시간대에 들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살아 온 세월의 무게만큼 향기도 내어야 하지 않겠는가 싶다. 그러려면 어디에다 나를 세워야 할지 몹시 두려운 싸움을 요즘 나는 계속 하고 있다. 베풀지는 못하더라도 빚지며 살아서는 안될 것이다. 사랑의 빚 외는 아무에게도 빚지지 말라 하신 말씀 상고하며 내가 지고 있는 이 빚은 과연 어떤 빚인지 기도하며 풀어가야 하겠다. (’99. 2월 )
’99 좋은 만남 (종이상자 15)
“풀꽃 따는 여자 23” 동아라이프지 ’06. 3. 게재
이 사 (移徙)
사람 한평생 살아가면서 한곳에 자리잡고 앉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엄동설한(嚴冬雪寒)
세월이 변하여 사람 사는 방식도 차츰 달라지고 있다 본다.
세월을 거슬러 내겐 이사 하면 가슴 저며지는 아득한 기억이 있다.
진사 어른이 시던 할아버지의 만석 재산을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사업과 풍류로 다 날리신 한량(閑良)이셨던 아버지의 덕분으로 여섯 칸 반 겹집의 대궐 같은 큰 집과 박화 향기 자욱하던 정든 우물과 내 이름과 키를 새겨 넣던 대나무 밭과 아름다운 정원을 떠나야 했었다. 철철이 벌 나비를 불러 모우던 정원의 꽃들과 오디, 앵두, 석류, 포도, 허리가 휘도록 열리던 단감 나무들을 두고 떠나기 앞서 어린 나는 일일이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었다.
마을 앞 길을 옛 우리 소작인 이였던 동네 분들이 줄줄이 나와서 전송을 할 적엔 할머니가 눈물을 감추시며 재촉하여 도락구(추럭)를 떠나게 하셨던 것이다.
진사 어른 댁 손녀 지나 간다고 하던 일손을 놓고 일어서던 그들의 사랑을 뒤로하고 떠나온 나의 추억은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낳을 때 까지도 언제나 나는 유년의 그 동네에서부터 시작하는 꿈을 꾸곤 했다. 그런 후 이사 간 곳에서 한 동안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뒷동산에 올라가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두 번 이사를 하고 집을 짓게 되었었다. 그때 시 어른 말씀이 “평생 사는 집은 없단다. 어지간히 정성을 쏟아라.” 하셨다. 그때는 그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역시 그 집에서 오래 살지 못하고 한참 아파트 바람이 일적에 우리도 아파트를 사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달팽이처럼 집을 들고 이사할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다. 좀더 편한 곳 좀더 나은 곳으로 때론 형편상 이사를 하기 마련이다
한 평생 살면서 네다섯 번씩은 족히 이사 경험이 누구나 있으리라 본다. 때론 기쁨으로 때론 슬픈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온 무게만큼의 짐을 꾸리면서 희비의 심정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또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이 화창하다.
캐나다의 아름다운 풍류를 삼 년이나 즐겼으니 감사하며 이제 김치냄새 된장냄새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가려 한다. 아들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은 한국으로 가려 마음 하였기 때문이다. 캐나다로 공부 간 아이가 엄마가 곁에 있어주길 원하니 어떻게 하여야 좋을지 몰라 일주일을 산속에 머물며 마음과 씨름하며 나름대로 정리가 안 되어 앓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래, 가자. 결정하고 보름 만에 이사 짐을 꾸렸었다. 아니 꾸렸다 기 보다는 정리했다는 것이 맞겠다. 아이들 아버지 떠나고 얼마 안된 후의 일이라 심히 힘든 결정이기도 하였다.
사람도 보냈는데 무엇이 내게 중하랴 싶으니 삼십 여 년간 닦고 간수했던 세간 어느 것 하나도 애착이 없었다. 많이 시름에 겨워 마음을 비우고 있었던 탓이기도 하였다.
옷가지 몇, 해묵은 사진 첩 등 꼭 버릴 수 없는 것 들만 챙기고 장롱 속에 옷이 든 체, 침대, 쇼파 부엌 살림 등 세간을 모두 나누어 주고 미련을 털었었다. 아침 저녁 들여 다 보며 사랑을 쏟았던 베란다의 동백꽃, 문주란, 천리향, 연산홍 그리고 난(蘭) 분을 실어 내 갈 때는 나는 돌아서 눈물을 닦아야 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오기까지는 족히 삼사 년은 걸리리라 믿어 누군가가 필요하게 쓰는 것도 좋으리라 여겨 내린 결정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나는 아주 간단한 이사를 하였다. 트렁크 네 개로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3년, 사람 사는 것이 잡동사니 만드는 것인가. 벌써 또 짐이 생겼다. 이제 국제 이사 짐이 되어 콘테이너에 실려 태평양의 푸른 파도를 넘어 다시 한국으로 한 달을 달려가게 될 것이다.
사십 여 년 전 내 유년의 조약돌 같은 이삿짐은 도락구를 타고 자갈밭 신작로를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더니 이제 눈가에 주름을 이고 내 이삿짐은 국제선을 타고 가게 된 것이다.
세월은 물질 세계를 쏜 살같이 변화 시킨다.
빠득빠득 자존심이 칼날 같던 그 시절도 지나고 세상을 그저 둥글게만 보아야 한다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저 노력하고 있다.
스스로 체면을 걸어 가며 한 발 물러서서 세상을 보려 한다. 그래야 우선 내가 편하고 주위가 편하게 된다고 역설(逆說) 같은 인생 길을 가려 한다.
사람 한 평생 고작 백 년도 못 살면서 무슨 계획들을 저토록 세우며 살아가야 하는지 한 치 앞도 분별 못 하면서 아웅다웅 이라니 부끄러운 일인 것이다.
그러나 내 인생의 마지막 이사는 하늘 문이 열리는 화려한 꽃 잔치인 것을 알기에 기쁨으로 오늘을 열어 간다. (’99. 5.)
’99. 좋은 만남 (종이상자 14)
긍정적인 삶의 자세로
“시인은 하늘이 내린다는데 내 친구가 드디어 시인이 되었구나.” 보름 달처럼 환히 웃으며 기뻐해 주던 친구들, 등단하고 5개월 후에 시집을 내겠다고 하였더니 시집 낼 분량이 있냐고 놀라시던 여성문예원의 장원장님 표정이 눈에 선하여 온다.
그 사람을 애절하게 보낸 후 며칠씩 산천을 헤매다 돌아오면 또 며칠씩 미친 듯이 글을 써대던 그 땐 오직 눈물 같은 그리움을 글로 푸는 수 밖엔 도리가 없었다. 행여 나쁜 마음이나 먹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시던 시 어른 들은 오히려 교회 가는 것과 글 쓰기에 빠져 있는 모습을 감사해 하며 격려해 주시기도 하였다.
한 사람은 가고 한 사람은 차마 따라가지 못하고 남아 그 그리는 정을 풀어내다 시인이 되었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싶다. 그때 끼니를 그의 그러고 있었던 탓에 가끔씩 위장이 쓰려오는 위험 신호를 받기도 하지만 첫 시집<그리움은 안개로 뜨고>를 내고 동창 친지 그리고 사랑하는 아이들의 환호와 사랑을 온 몸으로 받으며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은 즐거움과의 동참이구나 하는 것을 많이 느꼈다. 열심히 가능한 즐겁게 그들 곁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또 내게 주어진 삶의 연속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정은 부정을 낳게 되고 긍정의 날개가 길수록 세상은 아름답게 엮어지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 같다. 그렇다. 모든 것은 내 마음에서부터 시작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내 마음에서 이해하지 않고 용서 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으며 아무리 큰 일이라도 내 마음에서 용서하면 그것은 그렇게 풀어지는 것이다. 그 시절에 썼던 시 한 편을 적어 본다.
우물가에서 검은 물통과 흰 물통이 말한다 / 난 아무리 채워가도 늘 비어오니 슬픔이란다
난 이렇게 비워와도 또 채울 수 있어 기쁨이지 / 부정과 기쁨은 백지 한 장의 슬픔과 기쁨이다.
마음 자리 하나 바꿈에 흑과 백의 행과 불이 오간다 / 네 것도 내 것처럼 움켜 쥐다 보면
어느새 빈 대궁엔 꺾어진 허리만 남지 그러나 / 세상은 나를 위하여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단다
나 스스로 변해 가고 / 부정보다는 긍정적인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니
우물가의 대화는 나에게 교훈을 주고 / 꽹가리처럼 울지 말고 다소곳이 살라 한다.
<제 2 시집 안개의 불 중에서 (‘부정과 긍정의 고독’ 전문) >
그 후 그의 3주기에 맞추어 두 번째 시집 <안개의 불>이 나왔다.
비 온 후의 다져진 땅처럼 혼자이기에 슬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혼자인 것이다.
나란히 누워 사랑을 나누었던 말던 동상이몽이 될 수 있는 것이 사람이기에 마음 먹기에 따라 삶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린드버그는 ‘자신의 본질을 재 발견하기 위하여는 고독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것은 거미줄처럼 복잡한 인간관계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인 것으로 믿는다. 수레 바퀴는 굴러도 그 축은 가만히 있듯이 심신이 분주하게 활동하는 가운데서 영혼의 평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독 속에서 바로 이 마음의 평정을 찾게 되는 진리를 이제 알게 되었으니 사는 날까지 매사 긍정적으로 사물을 아름답게 그리며 이웃을 사랑하며 포용하는 자세로 살고자 한다.
(’97. 3월 )
코리아나신문 여성 칼럼 2번째
제 5 부 헤아릴 수 없는 것
13. 헤아릴 수 없는 것
14. 진리 속으로
15. 자연과 인간
16. 무지개 유정
17. 가을서신
18. 인생은 홀로 나는 새이다
19. 자연의 변화 그 신비 속에서
20.
21. Grouse
22. 가꾸어야 할 마음
23. 행복이란 가슴에 있는 것
24. 오월의 채마밭에 서서
헤아릴 수 없는 것
이 세상에는 수 많은 값진 것이나 귀한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는 수학적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 어떤 천문학적 숫자까지도 읽어내는 컴퓨터라는 괴물도 있고 미세한 세균까지도 밝혀내는 초 현미경도 있다. 쥐도 새도 모르는 자기 만이 아는 죄도 끄집어 내게 하는 거짓말 탐지기라는 것도 있다. 세계 어디에 숨어있어도 찾아 내어지는 모든 시스템이 만들어 지고 있는 세상이고 보면 어쩐지 개운치가 않은 것이다.
개인의 재산이나 행동까지 개인 것이 아닌 통제시대로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치하는 단일국가로 만들기 위하여, 세계는 하나라는 구호 아래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과연 내가 설 자리는 어디인가를 한번쯤 살피며 살아야 옳지 않을까 싶다. 참으로 살기 좋은 세상에서, 너무 편리한 세상으로, 과학 문명에 감사하던 시절도 지나면 두려움으로 변하는 세상이 분명히 올 것이기 때문이다.
별빛이 총총히 쏟아지던 밤 하늘을 보면서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헤아리던 날도 아득히 지나고, 이제 그 밤 하늘의 별들도 나이를 먹어 제 갈 곳으로 갔나 보다. 요즘 밤 하늘엔 그 많던 별들이 별로 보이지가 않는다. 긴 꼬리를 흔들며 흘러가던 유성도 이제는 좀처럼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찬란하던 밤 하늘의 별들을 시방 볼 수가 없다 하더라도 내 꿈 속에 있고 내 추억 속에는 있다.
유년의 여름 날 저녁 모깃불을 피워 놓고 으스럼이 내리는 평상에 누워 보면, 서녘 하늘에 아스라히 별이 빛났다. 어느새 다섯, 여섯, 일곱 더 이상 헤아릴 수 없는 별 가족의 파티가 찬란히 열리는 것을 보게 된다. 별들은 하나, 둘, 셋, 넷 일곱까지는 홀로 참석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단체로 항상 참석하므로 나는 언제나 그들의 파티엔 참석자의 숫자를 알 수가 없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웃음으로 반짝이는 별들은 방울을 흔들며 웃지 않을까 싶었다.
세상에는 현미경으로 컴퓨터로도 거짓말 탐지기로도 찾아 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우주만물에 비추이는 눈부신 햇빛이 그러하고 겨울 밤에 건드리면 쨍그랑 소리를 낼 것 같은 청명한 달빛이 그러하고 반짝이는 별빛이 그러하며 아름다운 꽃들의 향기가 그러하다. 싱그러운 새벽녘 어김없이 그 시간에 재잘거리는 작은 새소리가 그러하며 깊은 바다 속 물고기들의 선회하는 모습과 신비로운 색깔이 그러하며, 징그럽던 애벌레가 호랑나비가 되어 그 황홀한 자태로 하늘을 날아 오르는 형용할 수 없는 감격이 그러하다. 누가 말 하랴. 어찌 헤아림으로 엮으랴.
느닷없이 먹장 구름이 몰려와 뇌성벽력과 함께 세상을 다 무너뜨릴 기세던 소낙비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맑아 있는 감격도 감격이지만, 파아랗게 씻겨진 하늘 끝에 오색 찬란한 쌍무지개를 보는 순간의 그 감격적인 느낌을 숫자로 어찌 셀 수 있으랴. 천둥 번개가 칠 때 질소가 쏟아져 나와 식물이 풍성히 자라게 된다는 사실을, 태풍이 거칠게 한 두 차례 쓸고 가야 지구가 정화 된다는 사실을, 태풍의 위력을 잠재우기 위하여 바닷가에 모래를 두셨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놀라운 순간을 나는 헤아릴 수 없는 감격으로 본다. 북편 하늘에 허공(블랙 홀)을 펴셨으며 별들을 떨기 되게 두셨다는 사실이 과학으로 증명 되어 신문에 활자 되어 나올 때에 아, 나는 헤아릴 수 없는 감격에 젖는다. 그것이 감격이며 헤아릴 수 없는 가치 밖의 세계다. 첫 아이를 낳고 햇고사리 같은 꼬무락거리는 손가락 발가락을 만져 보던 그 감격을, 당신을 한 남자로서 당당한 아빠로 만들어 놓던 그 순간의 빛나던 당신의 눈물을, 그것들을 나는 헤아릴 수 없는 감격으로 본다. 온갖 기쁨을 주며 그 아이가 자라 시집 가던 날 화사한 딸 아이의 웃음 속에서, 사위의 믿음직한 등 짝을 두들기면서 나는 헤아릴 수 없는 감격을 본다.
인간적인 감격도 감격이지만 우주만물이 인간을 위하여 만들어졌고 순환한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운 또 하나의 감격이다. 이 모든 것을 알아 갈 때에 절대자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지는 것이 마땅한 아름다움일 것이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등불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 되어 대문 앞에 서고 싶다. 그는 언제 오시는가 기다림의 마음으로 가슴에 불을 켜고 싶다.
사랑은 헤아릴 수 없는 가치의 것이다.
우주만물을 주신 절대자의 사랑, 끝없는 부모의 사랑은 현미경으로도 컴퓨터로도 찾아낼 수 없는 무궁한 진리요 헤아릴 수 없는 가치 밖의 것이다. (’99. 1월 )
’99. 좋은 만남 /종이 상자13 게재
진리 속으로
세상에는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고 3천 5백 년 전에 이미 성경은 우리의 뇌리를 일깨워 주고 있다. 그 후에 노자의 도덕경에서는 형체 있고 소리 있는 것은 모두 형체 없고 소리 없는 것에서 나왔다고도 했다.
이슬 맺혀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을 보면서 모든 세상 이치가 새삼 감개무량해짐을 느낀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시고 밤과 낮을 주관하시며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 속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하다. 그 우주 속에 작은 점보다 더 작은 나라는 존재가 있게 하심을 감사하며 내게 주어진 삶은 내 것이 아닌 절대자의 손길에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주관하시고 자기의 사랑 안에 있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인격)로 인하여 우리는 자만에 빠지고 목이 곧아져 부모를 떠나 혼자 서겠다고 날뛰는 철없는 자식으로 폐륜아가 되고 있지 않은가.
문 열어 놓고 기다리는 집 떠난 탕자의 부모처럼 하나님 아버지 그 분은 우리가 돌아오길 천 년을 하루 같이 기다리신다 하셨다.
오늘 아침 “좁은 문으로 들어가길 힘써라.” 하신 애타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본다.
살아가는 것은 역시 자신의 욕심이고 집착이고 애착인 자기애에서 오는 것이었다.
성경은 헛되고 헛되니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일이 헛됨을 깨닫게 하시고 빈 손으로 왔으니 빈 손으로 가는 인생이라 하였다. 그런데도 인간은 애착과 집착의 마음을 버리지 못함은 순화되지 못한 욕심과 자기 사랑인 것 같다.
자기 것을 놓지 못하여 양 손으로 붙들고 엉금엉금 기면서도 가증한 입으로는 주여 주여를 부르기만 하면 되는 줄 아는 인간은 스스로 마음 문을 열지 못한 체 답답한 가슴을 눈물로만 통회한다. 하나님의 의(義)를 모른 체 자기 의만 세워 하나님 앞에 서려는 것이다. 사람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고 하신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이율배반 적인 일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하신 일을 알기 전에 자기의 한 일을 먼저 내 보이기를 원한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롬11:35)
사람이 무엇을 주께 먼저 드릴 것이 있겠는가. 이미 주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햇빛처럼 와 계시는 것을.
우리는 사람의 말이 아닌 성경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만나야 한다. 이제 성경 속으로 새싹처럼 자라가는 마음을 열어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함으로 젖을 사모하듯 기쁨과 설레임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나는 그 동안 알아왔던 세상 지식과 부딪치며 부서지고 있는 나를 보았다. 지식적으로 과학적으로 알아왔던 세상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미 성경 속에 기록 되어 있었다는 것에 새삼 눈을 뜨게 되었다.
세상 지식은 한정 되어 있고 오직 그것을 발견하는데 그칠 뿐 이였음을 알게 되었다.
모든 일들이 자기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닌 오직 그 분의 손 안에 있는 것 이였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 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 시니라” (잠16:9)
이제 믿으려는 믿음이 아닌 믿어지는 믿음으로 율법에서 벗으나 은혜 속에서 참 하나님의 하신 일에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된 것에 감사한다.
세상 인생 철학은 항상 답이 없는 것을 본다. 어떤 유명한 철학자도 인생의 답을 주고 간 사람은 없다. 그러나 성경은 답을 알려 주고 있다. 대낮에 등불을 들고 진리를 찾으려 애타게 다닌 어떤 철학자도 있었지만 결코 찾지 못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우리는 성경 속에서 진리와 만나고 길을 찾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분의 사랑인 것이다.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아무 조건 없이 내 안에 들어 온 이 큰 사랑 안에 나는 무릎 꿇고 감사하며 기도하게 된다. 햇살이 가득 방 안에 들어왔다.
기쁨과 감사로 눈물이 반짝거린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나니 이미 있던 것이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다시 할지라”
새삼 이 아침 안경 고쳐 쓰고 다시 읽게 된다. 과학도 이미 있는 우주 만물의 원소를 이용하고 찾아 낼 뿐이다. 그래서 과학자들도 하나님 앞에서 놀라움을 금지 못한다 했다.
낮과 밤을 주시고 공기와 물을 주시고 짝을 주시어 모든 일에 선(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길 원하신다. 그러나 인간은 도전한다. 말로 글로 머리로 끝없이 하나님께 도전하며 과학을 발달 시킴으로 바벨탑을 쌓고 질서를 파괴 시키며 지구를 멸망 직전으로 끌어 오게 된 것이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 고 하셨다. 인간의 욕망은 도전으로 끓고 있는 것이다.
어떤 종교학자는 드디어 성경을 부정하고 나섰기에 성경의 한 구절을 상고해 보았다.
“너의 생명을 주신이가 너를 심판 하시리라”
하나님은 안 보시는 듯 하나 다 보고 계신다 하셨다. 악한 자도 악한 날에 적당히 쓰시기 위하여 두신다고 도 하셨다. 그는 사랑이시기에 하루를 천년 같이 오래 참으시며 다 회개하고 그의 하신 일을 깨닫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고 살아가는 크리스찬은 “다 이루었다” 하신 말씀 붙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 되어 등불을 들고 기다리는 일만 남은 것이다. 하나님 만이 아시는 그 때가 차 성령을 거두어 가시기 전에 거듭남의 비밀을 알아야 하는 일이다.
주님이 주신 재림의 약속을 상고하며 항상 깨어있어 문 열어 놓고 기다리시는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귀 있는 자는 들을지니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아멘. (’98. 11.)
자연과 인간
또 한 해의 가을을 맞고 보니 뒹구는 낙엽 하나에도 그냥 스쳐 지나고 싶지가 않다.
온 산천이 단풍으로 물드는가 했더니 어느새 아름답다 찬사 속의 단풍들은 떨어져 낙엽이 되었다. 여름날의 그 영화롭던 록음도 싸늘한 가을 바람에 흩어지고 가을 비 속에서 차갑다. 나뭇잎은 겨울을 나기 위하여 무성했던 잎들은 떨어져 땅으로 돌아가 거름이 된다.
생각하면 참으로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며 질서를 이어가는 자연의 순리다.
그 앞에 우리는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름을 달고도 얼마나 부끄러운가!
우리가 다스릴 수 있는 자연은 없다. 모든 자연은 묵묵히 우리를 지켜보며 하나도 이탈 없이 순리대로만 살아간다. 인간은 자연을 다스리며 산다고 착각하고 살겠지만 자연은 결국 인간에게 지배될 수도 지배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순리를 거역하고 인간의 머리로 살고자 우주도 지배하고 싶고 세상도 모두 과학 아래 눕혀 보고자 한다. 고도의 과학을 발달 시키고 있지만 결국 자연은 인간에게 지배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 앞에 무릎 끓고 통곡할 날이 오고 있는 것이다. 봄이면 새싹이 돋고 꽃이 피고 벌과 나비들이 날고 청아한 하늘엔 새들이 지저귄다.
여름이면 녹음이 지고 뜨거운 태양은 열매를 익히고 키운다.
가을이면 풍성한 결실로 서로 인정을 나누며 한 겨울 동안 평안히 지내며 사랑하며 살라 인간에게 지구를 주셨다. 그러나 순리를 거슬러 머리로 살고자 노력한 인간은 도리 킬 수 없는 일을 만들고 만다.
머잖아 봄이 와도 꽃이 피지 않는다고 하니 얼마나 슬프고 기가 막히는 얘기인가!
가끔 철에 맞지 않게 개나리나 진달래가 겨울에 피어난 것을 보게 되는데 신기하다기 보다 오히려 지구의 온난화 현상이라 심히 염려스럽기까지 하여진다.
남극상공에 오존층의 반경이 점점 넓어지고 있어 남극 쪽 고산지대의 목동들이 시력을 잃고 있다고 하니 어쩜인가 싶다. 아프리카 지역엔 헝그벨트가 점점 커지고 있고 사막화 되어 가는 지역이 점점 늘어 간다고 하니 사뭇 걱정스럽다. 아마존의 밀림이 파괴되고 머잖아 산소가 결핍되고 물도 고갈 할 것이라니 어쩔 것인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때 늦게 자연보호를 외치지만 이미 극도로 오염되고 파괴된 지구가 잘 땜질이 될지 참으로 염려가 된다. 더 이상 자연을 파괴시키는 요지를 갖는 것은 곧 인간 자신을 파괴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제 전쟁까지도 잦게 일고 있으니 인간은 스스로 자멸하는 하루살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런 날이면 성경 속의 말씀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어쩌랴. 일은 이미 시작되었고 화살은 과녁을 떠난 일인 것을.
우리의 선인들은 화조월석(花朝月夕)을 노래하며 즐기셨는데 이제 우리는 스스로 만든 문명의 이기 앞에서 죽어가게 되었으니 한치 앞이 어두운 모습이다. 우리는 매연과 대기 오염으로 아침 일찍 산책을 즐기며 꽃을 볼 수도 없을 것이다. 이른 아침 산뜻한 마음으로 강변이라도 나가보면 아침 안개에 매연이 녹아 목이 아리고 숨쉬기가 어려운 것을 벌써 느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자연이 맑아야 건강하게 살 것인데 요즘은 이름도 새로운 병들로 사랑스런 어린이부터 앓고 있음을 보게 된다.
서사시인 단테는 “자연은 신의 예술이다”라고 노래 했는가 하면, 시인 롱펠로우는 “자연은 하나님의 묵시이다.” 라고 하며 자연을 아끼며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자연은 거기 아름답게 있고 우리는 여기 경건함으로 서로 사랑하며 공생하며 살아야 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였으며 아름답다 하실 일이였었다.
자연은 자기를 사랑하는 상대를 절대 속이지 않는다. 한없이 늦은 일이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 풍월인(風月人)이 되어 맑고 밝게 숨쉬며 살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할 일이다. (’95)
전화정보통신 ’96.1月호 게재
무지개 유정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누나 /내 삶이 시작 됐을 때도 그랬거니 /어른 된 지금도 그렇구나.
<워즈워드>의 싯귀가 그냥 입 속에서 흘러나오는 오후다. 빨리 일어나서 동쪽 하늘을 바라 보라는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가 왔다. 쌍무지개가 떴다는 것이다. 부리나케 일어나 창문을 여니 색상도 선명한 쌍무지개가 Lynn Valley산 줄기를 타고 두둥실 떠 있었다.
무지개를 보니 소녀처럼 가슴이 뛴다. 혼자 보기가 너무 아까워 평소에 안면이 있는 내가 아는 전화 번호는 다 돌려 무지개 보라고 소리를 쳤으니 지금쯤 무지개가 다 달아 없어지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무지개는 어린 그 시절이나 나이든 오늘이나 소리치며 흥분되는 마음은 여전한 것 같다.
내 나라 한국에서 본 무지개를 오늘 태평양을 넘어와 캐나다에서도 똑 같은 무지개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어리석은 표현이라 하더라도 난 그냥 신기하기만 하다.
어느 해 한국의 청평 호수에서 소낙비를 피하여 원두막에 잠시 머물었는데 비가 개이면서 호수와 산 언저리를 가로질러 쌍무지개가 찬란하게 뜬 적이 있었다. 그때 불혹의 중반에서 무지개를 만나 소녀처럼 흥분했었는데 지금 지천명에 앉았어도 그 마음은 여전하니 열아홉 그 시절은 언제나 가슴에 있나 보다.
여학교 시절에 “쌍무지개 뜨는 언덕”을 울어가며 읽었지만 쌍무지개 뜨는 언덕엔 무슨 아름다운 꿈이라도 찾아질 것 같은 야릇한 그리움이 늘 상 가슴을 흔들기도 했다.
더 어린 시절엔 무지개의 뿌리를 캐겠다고 무지개가 사라지기 전에 친구들이랑 무지개를 바라보며 뛰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무지개와 우리의 거리는 아무리 달려도 좁혀지지 않은 채 여전히 같은 거리를 유지하였다. 쪼무래기 친구였던 우리는 숨을 허덕이며 주저 앉고 말았던 기억이 지금도 흐믓한 미소를 갖게 한다.
무지개는 비가 온 뒤 대기 중의 물방울에 햇빛이 굴절 반사 되어 태양의 반대 방향에 반원형으로 길게 뻗쳐 나타나는 일곱 가지 태양빛이고 하나님의 약속의 증표다.
햇빛 속에다 하나님은 이렇게 아름다운 색깔을 넣어 주시고 빛의 굴절에 따라 붉고 푸른 색을 구분하게 하시고 아름다움에 젖을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는 만고의 진리를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 주위에는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많이 두신 것이다.
이것도 하나님의 비밀 중 하나이다.
그 분은 우리가 당신을 알아가기를 원하시며 당신의 하신 일을 알아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 오길 천 년을 하루 같이 기다리신다.
하나님은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시면서 우리가 무지개를 볼 적 마다 당신의 약속을 기억하라 명령하고 계신 것이다.
노아의 홍수가 왜 있어야 했는지를 기억하고, 이제는 물로는 심판치 않으시되 경건치 않은 날에 불로 심판하실 것의 약속 또한 주시고 “다 이루었다” 하신 당신의 하신 일을 알아가라 애타게 기억 시키시고 계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우주만물의 변화 속에서 그 분의 능력과 위엄을 본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별이 빛나고 그 징그러운 송충이가 호랑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 하늘을 오르는 것을 보면서 약속의 날에 나도 홀연히 변화되는 모습 눈에 선해지니 감사하다.
무지개의 비밀을 생각하면 가슴 뛰는 일이다.
무지개를 보면 내가 가슴이 뛰듯이 모두다 그랬으면 싶다.
무지개가 사라진 하늘에 흰 구름이 둥실 떠 가고 있다. (
주간씨티 (캘거리)
가을서신
하늘을 담은 강물이 / 제 혼자 흐르다가 / 이리도 고운 단풍 물들었다
산 삐알마다 비쳐대는 그리움 / 그저 불 붙는 사랑에 젖고 마네 //
구절초 향기로워 가을을 노래하던 / 억새풀마저 하얗게 가슴이 저는
시월 상달 보름 밤 // 사위어 가는 풀벌레소리 / 우리 그리움 하나
보듬어 비벼대는 억새 사이로// 모락모락 흔들리다 피어 오르는
황금 노을 빛 사랑 같은 것 //
제 혼자 서러움에 겨운 세월 / 떠 간다 둥둥 / 가을 서신 하나 들고.
-가을서신 전문-
유난히 단풍에 마음이 젖는다.
새삼 느끼는 마음은 아닐 진데 괜 시리 가슴 저리도록 황홀함에 눈이 부시다.
한 잎 줍고 보니 애틋함이 눈물이 된다.
샛노랗고 새빨간 단풍을 만나면서 첫사랑을 만난 듯 뛸 듯 반갑고 속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수줍어 진다. 먼 그리움이 몰려와 가을 함께 흘러간다.
해 마다 가을이 오면 내 책 갈피 속으로 들어와 꿈꾸던 단풍잎들은 다 어디에서 지금 잠들어 있을까. 우정의 편지 속에나 사랑의 편지 속에 끼워 보냈던 그 날의 꿈들은 무엇으로 피었을까. 지천명이 된 오늘에 나는 노오랗고 바알갛게 잘 배색 된 단풍 한 잎을 놓고 추억에 젖는다.
이제 세상 사는 일도 단풍을 보듯 아름답고 편한 마음으로 흘려 보내며 보고 싶다.
세상만사 내 계획대로 되는 일이 아니지 않던 가. 순리대로 되어 가는 일이지 않던가.
매듭을 풀 듯 순리대로 풀어 나가야 순조로운 것을 알기까지 억세게 계획 세우고 그 계획에 한치도 틀리지 않게 놓고 싶어 안달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그 때는 젊은 패기로 칼날을 잡았지만 이제 조용한 그늘에서 풍경이나 옮겨 그리고 싶은 마음이다. 폭풍후의 고요 같이 잔잔한 수면으로 가을 햇살에 눕고 싶다.
마침 마음 맞는 친구가 있어 밤 바다의 달 지는 것을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어 왔다.
가을 달이 아직 영글지 않은 채 서쪽으로 가고 있었다.
만월이 되려면 일주일은 걸리겠구나 속으로 여기며 그 말에 응하기로 하였다.
바닷가 모래는 아직도 낮의 열기에 베여 맨 발로 서 보니 발가락 사이로 따뜻한 간지럼이 전해 왔다. 통나무에 걸터앉아 휘영청 밝은 달을 보노라니 만감이 교차했다. 이 자리에 앉는 순간까지 내 곁을 스쳐간 수 많은 시간 속에서 나를 슬프게 또는 기쁘게 했던 일들이 실
타레 풀리듯 일어섰다.
기억해도 좋을 일들과 또는 기억에 담고 싶지 조차 않은 일들이 더러는 있어 힘들어 했던 모든 일들이 일 순간 참 부질 없는 일 이였구나 여겨지며 나는 고개를 젖는다. 내 마음이라도 읽은 듯이 친구의 뜨거운 손이 가만히 내 손을 꼭 쥔다.
달이 있고 내 손을 잡아 주는 친구가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자 생각을 끊어 본다.
연인인가 싶은 젊은 쌍들이 걷기도 하고 달빛이 드리운 밤 바다에 물 비늘을 뜨면서 즐거워 하며 지나간다.
달이 점점 서쪽으로 옮겨 가는 것이 시간이 계속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흘러 가는 시간 속에서 남은 날을 위하여 무엇을 건져 올릴 수 있겠는가.
시간은 다만 흘러가는 강물처럼 무심히 나를 지나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어제는 오늘의 나에게 추억으로 남을 것이고 내일을 위하여 나는 꿈을 꾸게 되리라.
어느 날 흘러가던 내 꿈의 조각이 삼각주 어딘가에서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다면 나는 그것으로 노래하는 새가 되리라.
결이 고운 아름다운 새이든 눈에 곱지 않아 깊은 숲 속에만 사는 새이든, 고요히 내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그로 족하리라. (
***낙엽 한 잎에도 눈물이든 그 시절, 늘 채울 수 없는 허전함이 안개처럼 나를 감싸고 있었다. 즐거운 하루였어도 충만한 하루였어도 늘 나는 빈 자리의 채울 수 없는 아픔으로 그리움에 떨었고, 그것은 지독한 고독의 아픔이었다. 오늘 나는 그 날을 기억하며 내 안에 안주한 행복에 감사한다. 버릴 수 없는 글이라 챙겨 옮기고 있다.(‘08년 8월)
인생은 홀로 나는 새이다.
여름 날의 영화로움도/ 영광스러운 가을 날의 찬미도
순리 앞엔/ 한 갓 부질 없는 꿈이었다
초연한 자세로 훌훌 벗어 던진 채
황홀히 서 있는/ 너의 겸손한 자태
비울 수 있었기에/ 다시 채울 수 있는 영광
또한 너의 것이다
갖고 싶지 않은 것 까지도/ 붙들고 놓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너의 여린 가지 앞에서 차마 / 고갤 들 수가 없구나.
-겨울 나목- 전문
어둠이 내리고 가로등불 사이로 가을 비가 흩어지고 있다.
미련 없이 벗어 던질 수 있는 결단력으로 나무들은 세월을 사는 것일 까.
빠알갛게 노오랗게 물든 단풍은 견딜 수 없는 한숨으로 토해버린 슬픈 고백일 까.
그토록 수려하던 녹음도 앙상한 가지로 남아 모두를 털어내듯 벗어 버렸다.
비가 오면 비가 와서 그립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그립고, 나무 흔들리는 그림자에도 나는 옷깃을 여미며 곁에 두지 못한 그리움에 몸을 떤다.
달 밝은 밤이 오면 또한 유성 따라 한없이 훌훌 떠 가고 싶다.
별이 빛나는 밤에 뜰에 내려서 보라. 이 밤을 어떻게 잠으로 매울 수가 있는가.
유성 하나 길게 꼬리를 늘이고 지나가면 내 마음은 벌써 유성과 함께 떠나고 있음을 본다.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네 잎 크로바를 찾고 책갈피에 끼우던 그 시절, 아직도 내 마음은 그 설레던 열일곱 인데 어느새 아이들 자라 이젠 그 자리는 내 것이 아니고 하얗게 서리 낀 돌처럼 차갑고 멀기만 하다.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고 했다. 쏜 살과 같다고 했다. 그렇다. 그 유수와 같은 세월이 아이들을 키웠고 쏜 살 같은 세월이 나를 이 자리에 세웠다.
산다는 것은 미련 없이 벗어 던질 수 있는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이더라.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물처럼 모두를 감싸고도 그냥 흘러갈 줄 아는 내가 되어야 하겠더라. 이제 나를 비워 자유로워 지고 싶다.
붙들고 놓지 못하던 것들 모두 훨훨 던지고 싶다. 멀리 더 멀리 버리고 싶다.
오매불망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부모든 형제든 그 어떤 이유의 조건이라도 결국은 혼자인 것이다. 내 품 안의 금지옥엽이었던 자식마저도 내 것이 아니지 않는가. 또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 서보면, 그 죽음 앞에서 우리는 철저히 홀로라는 것을 눈물 없이도 뜨겁게 알게 된다. 가는 자도 혼자요 남은 자도 혼자인 것이다.
그리움이 안개처럼 젖어 이렇게 쓸쓸한 인생이고 보면 비울 수 있는 넉넉함을 배울 일이다. 가슴은 하나인데 마음이 열 둘이었든 나의 죄를 고백한다. 듣는 자여 용서해 다오. 여기 버리고 지우고 홀로 서서 먼 태고에 귀 기울이는 내가 여기 있다. 오오, 그리운 나의 사람아. 영영 그대 나를 놓지 못하고, 홀로 나 여기 목 놓아 울게 하는 미운 사람아. 버려도 다가와 더욱 혼자이게 하는 슬픈 시간이 흘러간다.
어둠이 내리고 밤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창문을 열고 멀리 어둠 속에서 뚜벅뚜벅 내 가슴으로 걸어 들어오는 빗소리를 들어보라. 나는 이 세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오직 홀로라는 것을 알게 되리라. 인생은 홀로 나는 새인 것이다. 그리움이 안개처럼 젖어오면 더 더욱 홀로 임을 그림자 없이도 더 잘 보인다. (
풀꽃 따는 여자 7 동아라이프
자연의 변화 그 신비 속에서
하늘이 잠잠하고 울적한 날엔 마음도 울적하게 가라 앉는다.
그런 날이면 버릇처럼 올림픽 대교를 타고 미사리를 거쳐 강물을 보러 떠나곤 했다.
미사리 길은 4킬로가 넘는 긴 길이다. 카누 경기장을 끼고 길게 뻗은 아주 매력적인 길이기도 하다. 얼마 전 팔당 대교가 개통 되기 전 까지만 하여도 연인들의 데이트 차들이나 연수하는 차들이나 가끔 드나들던 한적한 길이였다. 그러나 이제는 청평이나 양평 또는 춘천이나 설악산 까지도 이 길을 통과하여 대교를 타게 된다. 그러다 보니 평일 날 이른 새벽이나 겨우 한적할 뿐이라 나 같이 이 길을 사랑하던 이들은 매우 애석한 일일 것이다.
새벽 같이 차를 몰아서 물을 따라 올라가 보면 강으로 가득 안개가 피어 오른다. 가끔 너무나 아름다운 동양화 한 폭에 가던 길을 멈추고 넋을 잃고 있을 때도 더러 있게 된다. 겨울 산의 작은 나뭇가지들이 품어내는 운무의 색조가 산봉우리의 선과 어우러져 강에서 피어 오르는 물 안개와의 조화는 한 폭의 잘 그려진 수묵화가 된다. 코 끝에 스치는 안개 내음을 맡으며 한 달이면 일곱 여덟 번은 족히 오갔는데 그래도 항상 신비로운 것은 나는 인자(仁者)도 지자(智者)도 아니지만 물이 있고 산이 있어서 그러하리라 여긴다..
어느 날 운무 속에 쌓여있던 안개 빛 산이 진달래를 피우면서 연분홍으로 물들면 봄이 왔다는 소식이다. 진달래 빛이 연하여 지면서 연록색의 잎파리들이 나오고 산은 연두 빛으로 변한다. 연두 빛 잎파리들 사이사이로 피어나는 개벚꽃의 새하얀 빛은 희망처럼 기쁨이다. 산은 어느새 록색으로 치마를 두르고 아까시아 꽃잎을 열어 온 통 오월의 하늘엔 향기를 날린다. 봄이 익는 숲 속에선 뻐꾸기가 울고 경치 좋은 길 어깨엔 나 같은 감성적인 차들이 몇 대씩 서 있기 마련이다.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때론 좋은 친구가 되어 자연 속에 하루를 동행하기도 한다. 아까시아 향기가 꽃잎과 함께 지는가 싶으면 유월이 오고 특이한 냄새를 풍기면서 밤꽃이 피어난다. 벌들이 웅웅 거리며 꿀을 모으고 양봉 꾼들이 벌통을 들고 모여든다.
록음은 더욱 짙푸러지고 하늘이 점점 내려오면 물빛도 하얗게 달라진다. 칠월이 매미 소리와 함께 작열하고 팔월이 더불어 불탄다. 맴맴 매미는 스르람스르람 늙어 가고 고추잠자리가 바지랑대 위에서 곤히 잠들면, 여름도 한풀 꺾어져 조석으로 찬 바람이 구월을 알린다. 어디에선가 메밀잠자리가 날아와 낮게 날아 다닌다.
이렇게 계절은 한 치의 어김없이 자연의 순리대로 가을을 맞는다. 이글거리던 태양 아래서 이삭을 익히던 벼들은 고요히 고개를 숙여 영걸은 모습을 보여 겸손의 미를 가르친다. 고추 밭에서 고추가 익어가는 시간 대추 나무에선 대추도 볼이 빠알갛게 익어 간다. 하늘이 높아지고 거울처럼 청아한 푸르름이 담기면 강물 또한 하얀 손수건을 적시면 푸른 물이 단번에 들 것 같이 파아랗게 하늘을 닮아간다. 이렇게 가을이 푹푹 익어 간다.
꽃은 남쪽에서 피어 오르고 단풍은 북쪽에서부터 들어 내려간다. 서산스런 바람이 몇 차례 불고 나면 록음도 어느새 색색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한다. 남한강을 끼고 석양에 비치는 산들은 황홀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환상적인 노을로 변한다. 자연의 순리 앞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한번 감격하며 숙연한 자세가 된다.
겨울 나무는 겨울을 나기 위하여 잎을 떨구고 묵묵히 자연에 순응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하고 자기 이익을 위하여 남을 다치면서까지 부끄러운 삶을 살아가지 않는가.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누리며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 마땅히 우리는 귀 기우려야 한다. 나는 자연의 변화 속에서 사랑도 쓰고 그리움도 쓰고 눈물도 쓰고 희망도 쓴다. 주님이 불러 주시는 그날까지 건강하게 풍월주인 (風月主人)이 되어 훌쩍 떠나고 싶을 때 항시 떠날 수 있는 날들이 주어지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이제 나는 여기 밴쿠버의 언덕에서 태평양의 푸른 물결과 눈 덮인 산봉우리의 설경을 보며 이방인의 회한으로 서기도 하고 신비의 눈빛이 되기도 하며 대 자연의 신비에 감격하고 있다. 내 나라 한국의 정서와 너무나 다른 이국의 정서에서도 자연의 숨쉬는 모습은 한결 같음에 편안하다. 철 맞추어 피어나는 꽃들과 피고지는 초목들의 질서 속에서 더욱 절대자를 발견하게 된다. 되어 지는 모든 일과 살아가는 모든 순리를 그 분에게 감사하며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려 한다. (‘98년 10월에 )
’98. 좋은만남 10월호 (종이상자 6)
풀꽃 따는 여자 5 동아라이프
토요일이면 동네 지인 몇 분과 늘 찾는 산이다.
사철 찾아도 싫증나지 않고 철 마다 아름다움을 주는 산이다.
집에서 10 분 거리에 있어 가까워서 좋고 너무 가파르지 않고 오르락 내리락 작은 오르내림이 마음에 들어 더욱 좋다. 때론 공원을 조용히 걷듯 낮은 평지를 연상하게도 하니 또한 그러하다. 조그만 호수를 끼고 둥글게 쌓여 있는 미네카타는 밀림을 연상하게 하는 캐나다 특유의 웅장함을 갖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동네 가까이 이런 산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느끼는 일이긴 하지만 캐나다의 매력이다.
마을과 공원이 이렇게 공존하고 있음은 마을 형성의 기초를 여기에 두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법치주의에 입각한 사고가 좋다. 어디를 가도 공원 가운데 들어와 있는듯한 이 자연이 눈부시다. 언젠가 우리는 처음 가보는 어떤 목적지를 찾을 수가 없어서 그냥 멈춘 자리에서 하루를 보냈는데 그래도 좋은 것은 그곳 또한 아름다운 까닭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자연의 숨결 때문이었다.
스콰무쉬가 ‘쎈 바람의 어머니’이듯이 미네카타도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인디언들이 주는 이름이 있을 것이다. 내가 인디언 음악에 취하고 그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그들의 생활에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가라지세일에서 인디언 젊은 남녀가 포옹하고 있는 작은 액자를 구하게 되어 늘 곁에 두고 그 아름다운 장면을 보면서 많은 상상의 날개를 펴기도 한다. 그들의 따뜻한 포옹은 어쩌면 애저린 안도의 해후일 수도 혹은 슬픈 이별의 격정을 나누는 모습일 수도 있는 것이라 더 절절히 내 가슴에까지 기쁨과 슬픔이 전해오기 때문이다.
미네카타 산은 등산 코스가 서너 곳으로 정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날엔 3시간 코스를 택하여 피티 레이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정자가 있는 코스를 택하곤 한다. 고국의 정자를 연상하게 하는 통나무 집을 잘 지어 놓아 우리의 휴식을 돕는 곳이 있어 또한 좋다. 가져간 간식거리를 나누어 먹으며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유유히 흘러가는 피티 레이크나 장관인 구름 쇼를 간간히 볼 수도 있어 좋다. 여기저기 물줄기가 흐르고 아주 간혹 이지만 곰들이 물장난치는 것을 덤으로 볼 수도 있어 설레는 기쁨도 있다.
미네카타 산엔 곰들이 몇 가족 살고 있다. BC주의 곰들은 동면을 하지 않는다. 날씨가 온화하여 겨울 잠을 잘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모든 생물은 기후에 적응하여 살기 마련이기 때문일 것이다. 곰을 만난다는 설레임도 있지만 급하게 앞에서 만난다던가 새끼를 거느리고 있을 적에 곰이 위협을 느끼게 되면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큰 위험도 있다. 곰을 누가 미련하다고 했을까 싶다. 아마도 덩치가 크다 보니 그런 생각을 한 것일 것이다. 곰의 빠르기는 그리질리 같은 경우 100미터에 8초를 뛴다니 놀랄 일이다. 흑곰은 나무도 잘 오른다. 곰의 습격을 받았다면 살아 날 확률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나마 죽은 척 엎드려 있으면 살 확률은 25%가 가능 하단다. 뛰어 피할 수도 나무에 오를 수도 없으니 살려달라고 엎드려 있을 수 밖에 없는 일이 된다. 엎드려 있으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딩굴어 보고 손바닥으로 툭툭칠 것이니 상처가 많이 나겠지만 그래도 죽었다 하고 있기만 하면 살 확률은 있다는 것이다. 그 위험이 있는데도 우리가 산을 오르는 것은 미련하고 호기심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북쪽에 많이 서식하는 그리질리는 육식을 주로 하기 때문에 아주 위험하다 한다. 흑곰은 잡식이지만 주로 딸기나 송이나 풀 뿌리 연어 등을 먹는다.
미네카다 산의 5월이면 딸기가 익는다. 붉은색의 라즈베리와 노란색의 쎌먼베리가 익으면 곰들은 딸기를 먹으러 나온다. 이어 허클베리와 불루베리가 덩달아 익으면 곰들은 겨우내 자란 새끼들을 데리고 딸기 밭을 누빈다. 때론 우리는 딸기를 따며 들어가고 곰들은 딸기를 따 먹으며 나오다가 만나 서로 놀라는데 곰들이 먼저 달아나는 것이 보통이다. 호루라기를 불며 모퉁이를 돌아 올라가다 보면 어떤 날은 곰이 급하게 숲 속을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아주 가끔 곰을 만나고 놀라운 즐거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는 야릇한 흥분을 맛보지만 곰은 수시로 우리를 보고 있을 수도 있다고 느껴보면 조금은 오싹해 진다. 내려오는 길은 호수와 접해있다. 잔잔한 호수 가득 수련 꽃이 한창인 날의 오리 가족들도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난 아기오리를 엄호하며 마냥 행복해 깍깍거린다.
먼 태고의 전설처럼 밀림으로 우거진 숲 하며 금방이라도 인디언들의 휘파람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정적이라던가, 서산스런 나뭇잎 소리라던가, 작은 새의 맑은 지저귐이 하루를 상쾌하게 한다. ‘거기 산이 있어 오른다’ 라고 했듯이 가까이 미네카타 산이 있어 나는 행복하다.
(
Grouse
‘Beautiful
차 넘버 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글이다.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다운타운에서 북쪽으로 태평양을 안고 단아하게 앉은 스탠리팍과 바다 건너 병풍처럼 록색의 산으로 둘러쳐진 노스밴쿠버와 웨스트밴쿠버의 전경은 한 폭의 그림이다. 또한 밴쿠버 웨스트의 롱 비취 또한 그림처럼 아름답다. 연 시간 초록빛 바다 물결을 가르고 뜨고 내리는 수상비행기의 날 찬 모습도 그림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푸른 반원의 하늘이 흰구름 쇼를 연일 보여준다.
밴쿠버가 세계 4대 미항에 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다운타운의 건물 숲을 지나 펼쳐지는 Stanley Park은 비록 시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한 수의 시를 읊게 한다. 여름의 울창한 숲과 꽃들도 아름다우나 겨울 비에 젖은 이끼 낀 아름드리 나무들의 그 자태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뭇 미혹에 빠지게 한다.
스탠리팍의 숲 속 길은 오묘하게 나 있어 이리저리 미로의 숲길이 이어지고 하늘을 찌르는 태고의 울음을 들을 수 있다. 비켜 누운 고목들의 몸통에서 솟아 난 버섯들이 그러하고 그 너른 허리 둘레가 그러하며 하늘 향해 치솟아 있는 나무들의 모습이 그러하다.
숲 사이를 헤집고 돌아보면 각종 이름 모를 새들과 백조가 유유자적하며 물위를 노는 연꽃이 핀 연못도 만나게 되고 그냥 풀꽃이라 말하는 수줍은 모습의 작은 들꽃들도 만나게 된다.
바다에 나가있는 어선의 귀향을 알리던 대포가 지금도
라이온스케이트를 지나 케필라노로 들어 오게 되면 관광지인 케필라노 협곡을 만날 수 있다. 높이 70m 의 흔들거리는 스릴만점의 흔들 다리를 동심의 마음으로 걸어 볼 수도 있게 된다. 아람드리 원시림 사이로 오솔길을 걸으면 밴쿠버의 식수원인 아늑한 호수를 만나게 된다. 여름이면 이 호수에서 내리 쏟는 폭포수의 물안개에 쌓여 오색무지개를 감상하게 되며 그 기쁨이 상상을 초월하게도 한다.
그 아래로 학생들의 학습장이기도 한 연어 부화장이 있다. 회귀성 연어는 이곳에서 어린 연어로 부화 되어 방류 되었다가 산란기에 먼 바다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찾아와 산란을 하고 일생을 마감하는 곳이기도 하다. 밴쿠버엔 연어 부화장이 서너 곳이나 있어 연어의 나라이기도 하다. 10월경엔 우리 부부는 또 연어 낚시 삼매경에 빠지기도 한다.
다운타운에서 이렇게 거슬러 올라오게 되면 마지막 닿는 곳이 Grouse Mt. 이 된다.
우리 부부가 그라우스 산을 사랑하는 특별한 이유 중 하나라면 한 겨울을 이곳에서 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루 걸러 이 산에서 즐기며 웃음을 온 산 가득 채우기도 한다. 그라우스 산은 원래 Grouse(산닭)가 많이 살아 이름 지어졌다고도 한다.
다운타운 근교로 20분 거리의 Grouse 스키장과 30분 거리의 Cypress 스키장과 Seymour 스키장을 들 수 있는데 모두 스키어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기도 하다.
그라우스 산은 다른 산과 달리 스키를 타려면 Sky Ride 로 올라 가야만 한다. 등산객들은 여러 코스의 비탈길을 오르지만 워낙 가파른 산이라 숨을 몰아 쉬기도 한다.
스카이라이드는 10분 혹은 15분 간격으로 오르내리며 약 7~8분 정도 소요 된다. 스카이라이드를 타고 정상으로 올라가는 도중 아래로, 캐필라노 골짜기의 식수원인 호수와 아름답게 펼쳐진 록음 속의 스탠리 팍과 다운타운 시내와, 먼 태평양을 바라보며 때때로 흰구름 쇼를 보며 오르게 된다. 늦게 하산하는 경우엔 온통 별 바다가 되어있는 시내를 보며 잠잠히 작은 나의 존재를 기억하게도 된다. 키가 닿을 듯 아래로 삼나무와 전나무들이 줄지어 하늘 향해 팔을 뻗고 있음을 감지하며 발끝이 간지러움을 느낀다. 스카이라이드로 3분의 2의 산으로 올라올 때쯤엔 벌써 눈이 쌓였음을 보게 된다. 구름 아래 저 멀리 다운타운과 스탠리 팍의 아름다운 경관과는 달리 눈이 쌓이는 다른 계절의 기후를 만나게 됨에 경의를 느끼게 된다. 겨울비가 내리는 밴쿠버가 겨울이 비 속에 쌓여있을 때에 그라우스는 눈이 내리고 있다. 11월부터 내리기 시작하는 눈은 후 년 4월 중순까지 내리니 스키어들의 천국인 셈이다. 우리 부부가 스키에서 스노우보드로 옮긴 것은 참 잘 한 것 중 하나라 여겨진다.
신천지의 설경 속에서 바람처럼 비탈 길을 미끄러져 내려가는 스릴 속에서 잠시나마 우리는세상 것을 잊었다. 으하하, 소리쳐 웃어보면 온통 세상을 탈출한 산 사람이 되어 더 너그럽고 슬기롭게 살아야 함을 새기게 된다. 눈 속에 풀석 누워 하늘을 보면 작은 점이 되어 가물가물 숨쉬고 있는 나를 만나게 되고 더 작아지라 일러주시는 소리가 들린다.
그라우스는 나의 영혼을 맑게 정화해 주는 곳이다.
산 닭의 날개 치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고 뒤이어 산 삐알을 휘돌아 달렸을 인디언들의 말 발굽소리도 바람처럼 들리어 온다.
인디언은 독수리를 연모하며 사후 세계에선 독수리가 되는 것이 소원이라 한다.
그들의 토템엔 늘 독수리가 높이 새겨져 있음을 보게 된다. 깃털 모자를 눌러 쓴 인디언 추장의 주름진 얼굴엔 깊은 철학이 숨어 있음을 느끼며 연민으로 나는 늘 앓았다. 내가 인디언 영화를 찾는 이유 중 하나 이기도 하다. 그것이 그라우스를 사랑하는 나의 마음이기도 하다. 늦게 하산하는 날엔 흰 눈이 더욱 푸르게 보여짐은 휘황한 불빛을 받아서다.
멀리 태평양 바다에서 귀향을 서두르는 어선들이나 시내 어디에서도 방향을 찾게 해 주는 불빛이 그라우스 스키장의 이 불빛이다. 이러고 보면 내가 그라우스를 예찬하는 일은 모두가 통감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온통 눈 아래가 찬란한 별 바다가 되면 서서히 하산하라는 명령이다. 산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산 사랑도 깊어 진다.
소락소락 봄비에 저어 꽃이 피는 4월의 밴쿠버, Grouse Mt. 정상엔 지금도 흰 눈이 사그락사그락 내리고 있을 것이다. (
가꾸어야 할 마음
흰 물통과 검은 물통이 우물가에서 만나 서로 주고 받는 얘기가 있다.
흰 물통이 매우 우울한 표정으로 “나는 이렇게 가득 채워가도 늘 빈 통으로 오게 되니 가득 채워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니” “저런, 그건 잘못 생각한 것 같구나. 나도 우물에 올 적엔 언제나 빈 통으로 오지만 돌아갈 때엔 가득 찰 것을 생각하면 너무 즐겁거든. 너도 나처럼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렴. 그러면 기뻐질 거야.” 세계 예화집에서 읽었던 이야기를 각색해 보았다. 사람의 마음은 항상 흑과 백, 혹은 부정과 긍정, 두 개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얼마 전에 나는 내 마음을 들어다 보며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알고 보니/ 내 속엔 / 언제부턴가 두 사람이 살고 있었네/
나는 홑이 아니라 겹이었다네”//
- ‘홑이 아니라 겹이었다네’ 중에서-
일상 우리의 마음은 이중성을 띄고 살아가고 있다고 여긴다. 항상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서서, 흰 깃발을 들기도 하고 또 검은 깃발을 휘두르기도 한다.
인격이란 의로운 옷을 한 벌 더 껴 입고 있을 뿐 그 근본엔 다름이 없는 것이다.
한 자리에 앉아서 오손도손 술잔을 기울이던 다정했던 형제도, 한 이불 속에서 사랑을 나누던 부부도, 자기 의사와 맞지 않는다고 자존심의 깃발 쪽으로 돌아 앉는 것이 사람이고 보면 한심한 일이다.
생각을 조금만 긍정적인 쪽으로 돌려보면 서로가 편안해 질 수도 있는 일들을 우린 하지 못하고 산다. “또, 채워야 하나”와 “또 채울 수 있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로 마음을 바꾸어 나가는 자세를 우리는 가져야 되리라 여겨진다. 바쁜 세상이다 보니 일상이 모두 곤두선 신경전이라 이런 방법도 나 자신이 스트레스를 풀어나가는 한 방편이지 싶다.
사람들은 종종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한다. 결국 나는 마음의 주인이 아니고 주인이 따로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건 맞는 말이다.
사실 주인은 우주의 지능을 가진 인간을 만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분은 우리의 머리칼 한 올까지도 헤아리시며 우리의 앉고 섬을 다 아신다 하셨으나, 우리는 그분이 주시는 선한 마음을 벗어나 내 욕심대로 살려고 하다 보니 늘 자신과 싸우는 것이라 본다.
사람의 마음속에 욕심이란 얼굴 두터운 치한이 있어 모든 일에 검은 속을 내밀다 보니 나를 괴롭히고 나아가서 사회를 어지럽히게 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사랑과 겸손으로 사물을 대하고 가슴에 숨어있는 강한 자아를 눌러서 평안을 찾아야 할 것이라 본다. 그래서 인지 요즘 들어 부쩍 자기 마음을 수련해 보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그것도 좋은 일이라 여긴다. 우리는 스스로 마음을 가꾸어 자신을 돌보는 지혜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을 겸손의 미덕으로 가꾸어 갈 때 자연적으로 본인의 인격은 높아져 있게 된다고 본다.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천이 어려운 것은 아직도 마음의 수양이 덜 된 탓이리라 여겨본다. 자기 마음자리 하나 바꾸는 것도 못하면서 우주를 한 손에 넣고자 뛰는 인간이고 보면 과연 만물의 영장이긴 한가 싶지만 우린 작은 일을 소흘히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작은 일 하나에도 나 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며 항상 상대의 입장이 되어 일을 해결하여 나가는 자세로 나날을 살아가야 할 것이라 여긴다.
우리의 편협스러운 마음엔 남이 일을 잘 하기 위하여 시간을 끌면 게으르다 생각하고 나의 경우엔 조심성이 많다고 여기게 된다. 남이 나의 잘못을 지적하면 까다롭고 비판적이라 여기지만 나의 경우엔 창조적이며 날카로운 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부드러움은 허약한 태도라 말하고 나의 경우엔 우아하다고 느끼게 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일 것이다.
이제 이 허울을 벗고 진실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자기의 내면으로 들어가 무너져있는 마음의 반쪽을 위하여 뜨거운 자기 사랑을 시작해 보아야 할 것이라 여긴다. 결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베푸는 사랑을 할 수 있어야 참 나를 사랑하는 일이 되리라 여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남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리엔 벌써 가로수들이 하나 둘 단풍이 들기 시작하고 있다.
올 가을엔 결실하는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또 한 발 물러서서 마음을 가꾸어 나아가야겠다 여겨 본다. (’95. 10월에 )
통신카드사 ’95. 11~12 월호 게재
라디오서울
동아라이프 “풀꽃 따는 여자 10”
행복이란 가슴에 있는 것
“산 너머 저 쪽 하늘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은 하지만//
아, 남 따라 /행복을 찾아 갔지만/ 눈물만 흘리고 돌아왔네.”
칼 풋세는 노래 했었다. 찌루찌루와 미찌루는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산 넘고 바다 건너 그 어딘가에 있을 행복의 파랑새를 꿈꾸며 길을 떠났다. 애쓰고 힘 써서 찾았는가 하면 언제나 검고 흰색으로 변하는 다른 새였다. 지치고 지쳐 어느 날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집안에는 향기롭고 따뜻한 스프 냄새가 코 끝에 스미며 어머니의 잔잔한 미소와 가족들의 다정한 향기가 온 몸에 넘쳐왔다. 창가에는 작은 새가 노래하고 있었다.
아, 행복의 파랑새는 내 가까이 눈 앞에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행복이란 저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것을 동경하고 잡기 위하여 허덕이면서 평생을 바치며 좌절하고 고뇌하며 밤을 새우기도 한다. 내 가장 가까운 것부터 둘러 보면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알게 되어 새로움으로 눈을 뜨게 되리라 본다. 한발만 물러서서 둘러보면 더 잘 보이게 된다. 부부든 자식이든 친구든 혹은 욕망이든 질투든, 내 욕심과 자만에서 한치만 물러나서 바라보면 이해도 되고 용서도 된다. 모두가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알게 된다. 내 안의 나를 낮출 수만 있으면 우리는 행복의 열쇠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제일 가까운 곳에서부터 이해를 시작해 볼 일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 긴 겨울 밤 하롯불에 인두를 꽂으시고 바느질 하시는 어머니 곁에서 들은 얘기다. 대궐 같은 큰 집에 사는 부자가 있었는데 그 부잣집 부부는 언제나 좋은 옷과 좋은 음식이 가득하였으나 늘 얼굴에 근심이 있었고 웃는 모습을 아무도 못 보았다고 한다. 꽃이 가득한 정원엔 늘 정돈된 그대로 고요하기만 하고 남 보기에는 좋았지만 정작 그 부부에게는 행복한 웃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을에 밥을 얻어다 먹고 사는 초라한 움막 속의 거지 식구가 있었다. 밤마다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하루를 살아가는 거지 부부는 어린 아들의 재롱을 보며 즐거운 웃음을 겨울 밤 하늘에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가난하고 남 보기에는 불쌍하게 여겨질지라도 더 높일 것도 더 낮출 것도 없는 무욕(無慾)그대로의 삶이 행복이 아니겠는가 여겨진다. 어린 내 마음에 부모님을 더 사랑하고 어른이 되어도 부모님과 형제를 떠나지 않고 살리라 다짐하곤 했었다.
자식은 부모의 꽃이다. 꽃이 피기까지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 살아야 하며 꽃이 활짝 피면 부모님껜 영광의 웃음이요 자신에겐 성공의 길이 되리라. 부모님의 행복한 웃음은 내게도 행복한 웃음이라 여겨진다. 작은 보람으로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지나친 욕심은 우리의 마음을 메마르게 하고 부모 형제간의 정도 마르게 하며 행복이란 무지개는 이슬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다.
저 멀리서 들려와 내 가슴에 적셔지는 기적 소리처럼 행복이 피어나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내 마음의 키를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행복은 내 가슴에 있는 것이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이해가 충분하다는 것이라 본다.
서로 충분한 이해가 있기까지는 서로의 가슴을 열어 진지함을 나눔으로 영혼을 울려주고 진정한 하나임을 느껴 알아야 한다. 그래서 맺어진 부부라면 그들의 열매는 달고 오묘하며 행복한 가정이 되리라 본다.
살아있는 꽃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이 지닌 빛깔과 향기와 형태를 맘껏 발산하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고 서로에게 맞는 빛깔과 향기를 발산하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하겠는가. 사랑은 소유가 아니고 사랑은 질투도 아니고 집착도 아닌 것이다. 행복한 관계란 진정한 대화를 나눔으로 서로의 존재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부부 관계든 친구 관계든 자식 관계든 우리는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 참 행복의 함수를 얻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일에 ‘나’ 라는 자아가 강하게 개입하므로 실망도 크고 화도 일게 마련이다. ‘나’를 빼고 바라보면 조용히 앉은 사랑을 보게 될 것이다. 항상 화(火)의 말 전에 한발 물러서서 ‘나’ 앞에 ‘너’를 먼저 세워보면 ‘내’가 더 잘 보이게 되리라 여겨진다.
행복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머릿돌을 놓고 하나하나 쌓아 올려 건축하듯이, 행복도 사랑이란 이름을 놓고 하나하나 쌓아 올라갈 때에 참으로 우리 것이 되는 것이다.
멀리 있는 행복의 그림자를 찾지 말고 내 안에 있는 행복의 소리를 끌어내어 따뜻하고 구수한 숭늉처럼 이 봄을 만나고 싶다. (’98. 3월 )
’98. 좋은 만남 (종이상자 7)
오월의 채마밭에 서서
오월의 신록이 너무 푸르러 눈이 부시는 오후다.
간밤에 내린 비로 나무새들이 소롯히 자라 올라 기쁨을 더 한다.
상추는 상추끼리, 쑥갓은 쑥갓끼리 모여 안부를 묻는 아침에서 오후가 되도록 나는 채마 밭을 떠나지 못한다. 호박도 몇 마디가 더 자라올라 꽃망울을 달고 무엇 붙잡을 것이 없나 더덤이를 흔들고 있다. 부추도 부지런을 떨며 자라고 깻잎도 고추도 질세라 다투어 자라 오르고 있다. 꽃밭이 어느 사이 채마밭으로 변하고 있다.
호박이 열리면 풋고추랑 덤석덤석 썰어 넣고 된장을 보글보글 끓여야겠다.
꽁보리밥 한 솥 하여 상추랑 쑥갓도 뜯어 놓고 지인들을 불러 나누어야지 싶으니 벌써부터 신이 난다. 곁에서 방울토마토가, 난간에 줄지어 오른 청포도가 나도 있다고 어깨를 간들거린다.
Heritage Meadows, 우리 동네는 러시아, 차이니스, 캐네디언 등, 각각 다른 민족들이 모여 동네를 이루고 있다. 꽃 심는 것 하나에서부터 각각 자기나라 취향이 묻어 있음을 본다.
나는 한국인이라 우리 상추를 심고 고추를 심고 조선 호박을 울에 올린다.
무궁화를 심고 봉숭아를 심고 코스모스를 심는다.
무궁화를 보며 민족의 긍지를 느끼고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이며 키 큰 코스모스 아래서 향수에 젖는다. 늘 가슴에서 마늘 냄새가 나고 된장 냄새가 난다. 친구가 그립고 산천이 그립고 피붙이들이 마냥 그립다. 어느 곳 하나 나무랄 때 없는 아름다운 밴쿠버라, 좋다 좋다 하면서도 이율배반의 가슴으로 산다.
베란다에 나와 앉아 보면 록음진 나무들이 오월 훈풍에 반짝거린다.
내다보이는 앞 산의 이마엔 아직도 잔설이 유유한데 가을 하늘처럼 뭉게구름이 허다히 떠 가고, 코 끝에 감기는 아카시아 내음이 감미롭다.
지금쯤 고국의 어느 저수지에선 팔뚝만한 붕어들이 산란하느라 물가로 나와 퍼덕거리겠다.
아카시아가 만발하여 온통 아카시아 내음으로 하늘이 노오랗게 되면 붕어들이 산란 철이 되던 내 조국. 산란을 위한 붕어들이 금방이라도 잡힐 듯이 물가로 나와 퍼덕거리면 강태공들의 발길이 바빠진다. 붕어들은 입덧을 하고 낚시의 먹이를 잘 먹지 않아 강태공들의 가슴을 태우기도 한다. 힘차게 퍼덕대는 붕어를 앞에 놓고 씨름을 하는 태공들의 숨막히는 시간이 눈에 보이듯 훤하다. 손 끝이 간질거린다. 그 희한하던 짜릿한 희열의 손 맛 딱, 한번만 더 느껴보고 싶다.
아카시아 그늘 밑에서 머리칼을 나붓기며 한숨 자 보고도 싶다. 달콤한 향기가 스민다.
그 시절에 맡던 그 향기가 앞 필드에서 향수처럼 흔들려 오고 있다. 집 앞뜰 필드에 키 큰 아카시아 나무가 내 염원을 알기라도 한 듯이 서너 그루 서 있어 얼마나 감사한지.
석양빛을 받은 필드에 온통 아카시아 향기가 진동을 하며 차 한 잔을 놓고 감상에 젖은 나의 베란다로 밀려 온다.
고국 냄새다. 가슴이 찡한 그리운 냄새다.
이제 내게선 풋배추처럼 풋풋함도 멀고 싱그러운 풀잎 같음도 멀다.
그러나 속에 내제한 것들, 오래 두어도 진정 변하지 않는 묵은 것이 좋다.
곰삭여진 오랜 것이 좋다. 고향의 오솔길처럼 그리움을 주는 것이 좋다. 그래서 그리움을 달래느라 나는 이렇게 흙을 만지고 푸성귀를 심는 건지도 모른다.
상추 한 포기에 그리움 하나, 쑥갓 한 포기에 그리움 둘, 아침 저녁 내려가 들여다보고 얘길 하는 것도 전할 수 없는 그리움의 증후군일 게다. 나눌 수 없는 그리움의 증후군일 게다.
잔디를 덮어 텃밭을 일구고 무엇이던 심어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심한 그리움 중독일 게다.
언제나 고마운 그대. 그래라, 직성대로 풀어 주는 그대에게 나는 또 감사를 보낸다.
상추야, 고추야, 어서 자라라. 채마밭 가득 자라 올라 그리운 님들 모두 한 자리에 불러모아 푸성귀 잔치를 벌리련다.
이슬 맺혀 싱그러운 모습들, 간밤의 꿈처럼 반짝거린다. (08. 오월의 채마밭에서)
’.
<시가 있는 수필편집을 마치며>
내가 사는 한 세상의 꿈
샛강 따라 내려가면
숨은 섬 삼각주가 하나 있어
그 섬엔 들풀들이 나풀나풀 풀꽃들을 피우고 있지요.
간간이 지나가다 들려주는 작은 새소리엔
풀피리 같은 흔들림으로 춤사위를 내려놓는데요,
한 세상 아름다워 꽃이고픈 마음이 들꽃 함께 춤 한 바퀴 빙글 돌아 나오면
은방울 꽃잎들의 소근거림이 옛 얘기처럼 다정한
누구를 닮아야 하는 이유 없이 그저 한가로운 그 곳
낮은 낮이라 풍요하고 밤은 밤이라 더 없이 고요로운 작은 섬 나라 거기
한낮을 햇빛으로 풍요했던 마을에 고요가 내리면
간지러운 이슬이 찾아와 별빛 더불어 영롱한 구슬을 엮는 달빛
그 때쯤 지구의 자전소리 스르르 들려오지요.
잠을 잃은 그믜의 미간 속에 그려지는 수채화 한 폭.
가슴에 사는 이것들 내려 놓을 수 없는 한 세상
늘 나는 또 다른 한 세상에서 빠알갛고 파아란 보랏빛 꿈을 꾸어요.
계절은 세월 앞에 노을처럼 지고 여기 늙지 못하는
내 젊은 가슴은 붉게붉게 꽃으로 피어요.
아이들은 빨리 자라서 어른이 되고 싶고
우리들 서산의 해를 붙들고 싶은 것
시간은 세월이 되어 우리 곁을 유유히 가지만
지난 세월 꼭 또랑물 하나 텀벙, 건너 온 것만 같으니
어쩌나 깨지 못하는 꿈인가요
빠알갛게 타 올라 두근두근한 나의 계절
향기로워라 꽃물 들 것 네요
내 나이 열 살만 내려 준다면 한번쯤 해 보고 싶은
사랑놀이 그 짓은 언제나 아름다운 일
내 나이 스무 살만 내려 준다면
꼭 한번 다시 시작하고픈 일도 있는데
오메, 죽것네. 꽃잎 앞에서도 부끄럼 타던 시절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기도 아깝 것 네요. (‘8. 8월의 노을아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