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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한국 불교사佛敎史
1. 한국 선종사禪宗史
9) 조선시대 불교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불교가 전해진 이래 한국 불교는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이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며 융성하였다. 신라와 고려 초기에는 ‘오교구산五敎九山’이, 고려 중기에서 조선 초기에는 ‘오교양종五敎兩宗’이 존재하였다. 조선은 건국 이데올로기인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내세웠지만, 조선 초까지 민중에는 아직 불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그렇게 크게 배척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성리학性理學의 신흥사대부와 불교를 기반으로 한 문벌귀족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정치적, 사회적인 입장차가 커지자 제4대 세종(世宗, 1397~1450, 즉위 1418)은 즉위 초기 불교를 억압하기 시작한다. 세종 6년(1424), 선禪과 교敎의 일곱 개 종파[七宗]들을 선교禪敎 양종兩宗으로 통합한다. 각각 18본산을 두어 관할케 하고, 나머지 사찰은 철폐하거나 활동을 제한했다.
즉, 선교 칠종七宗 중 조계종曹溪宗, 천태종天台宗, 총남종摠南宗은 선종禪宗으로, 화엄종華嚴宗, 자은종慈恩宗, 시흥종始興宗, 중신종中神宗은 교종敎宗으로 통합되었다. 선종의 본산本山은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흥천사興天寺에 都會所라는 이름으로 두고, 교종의 본산은 태조가 한양 동부 연희방延禧坊에 세운 흥덕사興德寺에 둔다. 사상적 통합 없이 본의 아니게 강제로 이루어진 불교계 종파 통합은 불교 탄압의 시작이었다.
부처의 가르침은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한 수행자가 그 중 어느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닦아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하면-이러한 사람을 종조(宗祖)라 한다-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이 생기고 이로부터 불교의 종파가 생기는 것이다. 각 종파는 종조의 가르침에 따라 종지(宗旨)와 종풍(宗風)을 형성하고 은사와 제자 사이의 뚜렷한 법맥을 전승해 천 년 이상 끊이지 않고 이어온 것이다.
이러한 종파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면 어떤 사상적 합일점이 있어야 한다. 합일점 없이 통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는 불교 교단을 탄압하면서 십수 개의 종단을 강제로 선교 양종으로 통폐합했다. 이 과정에서 각 종파의 전통과 법맥은 상당히 훼손되거나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 17.)
세종은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짓게 한다. 한문으로 된『석가보釋迦譜』를 기초로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당시 창제된 훈민정음으로 서술한 최초의 한글로 된 책이었다. 1447년 7월『석보상절』이 완성되자, 세종은 스스로 이를 시의 형식으로 엮은『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짓는데, 이를 보면 건국초기 조선이 불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세종은 말년에 왕자와 왕비의 죽음을 겪고는 발심(發心)해 경복궁 문소전 옆에 내불당을 재건하고 불상을 봉안했으며, 특히 자신의 치적이었던 한글 창제를 통해 어려운 한문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역경불사도 추진하는 등 불교를 옹호했다. 뿐만 아니라 아들 수양대군에게 한글로 왕비의 명복을 비는 부처님의 일대기를 짓게 하니 이것이 『석보상절』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로 씌어진 책이다(1449년). 세종대왕 스스로도 이 책을 보고 한글로『월인천강지곡』을 짓는 등 적극적인 불교 장려책을 폈다. 세종대왕이 붕어하자 장례식도 불교 의식에 따라 거행되었다. (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p. 18~19.)
그리나 불교의 탄압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조선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재위 1494~1506) 대에 이르면 이들 도회소都會所와 고려 때 조계종의 본산이었던 원각사圓覺寺(고려 흥복사興福寺) 등이 기생이 거처하는 기생방妓生房으로 바뀐다(연산군 10년). 도회소는 경기도 청계사淸溪寺로 옮겨지지만, 제11대 중종(中宗, 1488~1544, 즉위 1506) 대인 1512년에는 선교 양종과 도회소는 결국 폐지되었다. 지속적인 인력 충원 방법이었던 승과僧科 또한 완전히 폐지되었다.
조선조에서 가장 불교를 탄압한 이가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일반적인 역사에서도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불교사에서도 지울 수 없는 법난의 기록을 남겼다. 그는 세조가 창건한 도성 안의 원각사를 유흥장으로 만들고 승려들을 강제로 환속시키는 극악무도한 법난을 저질렀다. 또한 고려 광종 이후 시행하던 승과를 중단함으로써 교단을 승려 충원의 맥이 끊기는 위기로 몰아갔다.
선교 양종은 불교 교단이면서 동시에 국가의 시험으로 스님을 선발 하고 도첩(度牒)을 줌으로써 운영되는 국가기구였다. 따라서 승과는 교단을 유지하는 국가 차원의 인력 충원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런 승과를 중종 때에 완전히 폐지하고 말았으니 강제로 통폐합되어 명맥을 유지하던 선교 양종도 맥이 끊기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로 한국불교 1,600년 역사에서 연산군 같은 훼불자는 없었다. (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p. 20~21.)
조선 제13대 명종(明宗, 1534~1567, 즉위 1545) 대에는 관료 집단인 훈구파勳舊派에 의한 척신정치戚臣政治가 기세를 올리던 시기였다. 그리고 제13대 선조(宣祖, 1552~1608, 즉위 1567) 대에는 마침내 유림儒林 사림파士林派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때는 조선을 대표하는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와 같은 유학자들이 대거 등장하여 성리학이 왕성하게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16세기 후반 성리학이 득세하면서 숭유억불 정책은 더욱 확고하게 정착되었다.
이들과 때를 같이하여 활동한 이가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 1515~1565) 대사이다. 그는 명종이 즉위하자 불심이 깊었던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도움을 받아 도첩제度牒制를 부활하고, 오래전 폐지되었던 승과僧科 또한 다시 실시한다. 이때 선발된 인물이 훗날 임진왜란의 영웅 서산대사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과 사명당 유정(四溟堂 惟政, 1544~1610)이다. 청허는 1회 (명종 7年, 1552)에 유정은 4회에 승과에 합격(명종 16년, 1561)하였다. 보우는 활발하게 불교부흥운동을 전개, 이러한 암울한 불교계 상황을 극복하려 노력하였다.
연산군에서 중종으로 이어지던 강력한 폐불정치로 인해 조선의 불교계는 초토화되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보우는 선교양종을 복구했고, 5번의 승과를 통해 150여명의 승려들을 선발했으며, 약 5,000명의 승려들에게 도첩을 주는 일을 관장하였다. 이러한 제도 정비와 인재 선발로 인해 지리멸렬했던 불교계는 소생할 수 있는 기반을 갖게 되었고, 승과에서 급제한 서산西山, 사명四溟 등과 같은 우수한 승려들이 차세대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강석근, 동국대학교 강의전담 교수,「유불. 종파 뛰어넘어 포용의 ‘不二思想’ 구현」불교신문 2377호, (2007.11.17).)
조선시대 걸출한 선사로 휴정休靜과 사명당 유정惟政을 꼽는다. 이들이 등장은 승과僧科의 부활과 서로 맞물리는데, 문정왕후의 죽음과 더불어 승과는 다시 폐지되었고, 휴정과 유정 같은 인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불교부흥을 위해 온 몸을 불살랐던 보우의 삶은, 한 승려가 전체 유림儒林을 상대로 싸운, 말 그대로 한 판의 처절한 사투死鬪였다. 보우는 결국 승직을 삭탈削奪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제주 목사에게 죽임을 당한다. 당시 유가儒家의 강력한 반대 속에 차별 받던 불교의 처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서산대사, 휴정스님과 더불어 또 한 분의 당대 고승이 있었으니 부휴선수스님(1543~1615)이다. 스님은 휴정스님과 마찬가지로 영관스님의 법을 계승했으며, 수행 정진에만 전념해 문하에 700여 명의 제자가 있었다.
교단이 해체되고 산승 생활을 해야 했던 조선불교계에 휴정과 선수 스님은 암흑 속에 등불 같은 존재였다. 특히 두 분의 문하에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조선 후기 승가의 법맥을 이어갔다. 오늘날 한국불교의 스님들은 대부분이 두 스님의 문손들이다.(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 29.)
불교사적으로 조선시대 불교는 암흑기暗黑期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조선 불교는 지속적인 탄압을 받으며 몰락의 길을 지나 종말을 예고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보우 이후 선종의 핵심인 사자전승師資傳承의 이야기는 시詩나 송頌의 형식으로 문집을 통해 드물게 보이거나 간간이 회자膾炙될 뿐이었다. 불교는 변방邊方을 떠돌면서 그 명맥命脈을 유지하기에 급급하였다.
조선시대 불교는 ‘승과僧科 및 도첩제度牒制의 폐지’, ‘승니僧尼의 도성출입금지都城出入禁止’ 등 지속적인 이데올로기적 탄압을 받으면서 몰락해갔다. 그 차별은 차치하더라도 500년이라는 그 오랜 탄압 기간만으로도 세계 종교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혹독한 시련과 고난을 겪으며 조선시대 불교는 그 명맥命脈을 유지하기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였다.
많았던 불교 종파들이 타의에 의해서 통합되었을 뿐 아니라 선교 양종의 구분도 없어졌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교단자체가 해체되는 상황에 이르러 무교단無敎團의 와해상태에 빠진다. 이 시기를 불교사에서는 종단도 없이 산사에서만 머물렀다는 뜻으로 ‘무종산승無宗山僧’의 시대라고 한다. 나아가 한국불교를 그냥 “통불교通佛敎”라고 부르는데, 그 이면에는 초토화된 한국불교의 현주소를 말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한국에서도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왕국이 억불숭유정책을 펴자 불교는 사실상 무종지(無宗旨), 무종명(無宗名), 무교단(無敎團)의 와해상태에 빠져들었으나 그 속에서도 끈질기게 불법의 명맥을 이어 유지한 것은 선종이었다. 청허, 부휴와 같은 위대한 선사가 나왔고, 그 뒤를 이어 편양(鞭羊), 백곡(白谷), 백파(白坡), 초의(草衣) 등의 선지식이 임제선의 법맥을 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선맥의 계승은 그야말로 겨우 ‘끊이지 않고 명맥을 이었다’는 정도이지 종교가 지닌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전파와 활력은 찾아볼 수 없었다.
중들의 도성 출입조차 허용치 않았던 암흑의 시대가 여러 세기에 걸쳐 계속되자 마침내 조선불교는 청허, 부휴의 기백마저 흐릿하게 사라지고 형해(形骸)만 남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안으로는 정체된 봉건사회의 질곡이 만연하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 및 사회 체제가 뿌리째 흔들리는 위기 앞에서 감연히 머리를 들고 일어나는 것은 역시 선이었다. 경허라는 현대 한국불교의 중흥조가 태어나는 시점은 이처럼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고난에 찬 시기였다. (李淸 지음, 현대 한국불교 선의 세계탐험 『이뭣고』 pp. 218~219.)
이런 사회적 억압과 천시는 출가자 수의 급감으로 나타났고, 자연히 승려의 수준 또한 저하되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억불정책의 입안자이기도 했던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삼봉집三峰集』에 의하면 고려 말 조선 초 승려 수는 10만을 상회하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조선 후기인 1909년에 이르면 6천명이 안 될 정도로 급감하게 된다. 조선 왕조 500년 간 거의 20분의 1로 줄어든 셈이다. 사찰 수에서도 급격히 줄어 1,400년대 말『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된 사찰의 수가 1,650여 개소였음에 비해 1909년에는 950여 개로 줄어든다. 그나마 암자의 수가 절반을 차지하였다.
최근 조선시대 사찰 수의 변화를 연구한 논문에 의하면, 15세기 말 1,650여 개, 18세기 중엽 1,530여 개, 20세기 초(1910) 1,280 여 개로 집계되었다. 더구나 20세기 초의 사찰 수 1,200여 개 중 절반 이상이 암자 규모로 나타나 사찰의 어려움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스님의 수도 고려 말 조선 초에 10만 명이 넘는 엄청난 규모에서 18세기 중엽에는 2만 8천여 명, 그리고 1910년대에는 8천여 명 정도로 조선 왕조 500년 동안 10분의 1도 안 되는 수로 줄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불교계가 겪었을 고통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p. 38~39.)
한국불교 1,600여 년의 기나긴 역사에서 조선시대는 그야말로 암흑의 시대였다. 삼국과 통일신라, 고려를 거치며 국교의 위치에서 융성을 자랑하던 불교는 고려 후기에 접어들며 사찰의 세속화와 승풍의 타락으로 인해 성리학을 신봉하던 신흥사대부들에 의해 철저히 배척당했던 것이다. 교학敎學의 부진, 교단敎團의 쇠퇴 등으로 인해 상층사회上層社會에 대한 포교의 기반을 잃게 되었고,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한 구복신앙만 추구하게 되어 의례儀禮 불교만이 남아 성행하게 되었다.
10) 거사불교居士佛敎의 등장
19세기 조선 불교는 숭유억불의 나락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중기 이후 불교계는 지식수준이 낮고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기층민중基層民衆의 기복신앙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억불정책을 시행하면서도 사찰의 불사를 지원하는 등의 왕과 왕비를 중심으로 한 왕실불교가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서민불교와 왕실불교의 두 상반된 계층의 신앙은 조선 불교를 규정하는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서민불교는 어렵고 난해한 교리와 사상 체계를 멀리하고, 현실 구제의 기복신앙을 추구하였다. 조선후기에 다양하게 간행된 다라니와 진언집 등의 유행은 이러한 서민불교의 양상을 잘 말해준다. 왕실불교는 국가적으로 억불정책을 시행하면서도 국왕과 왕실이 개인적 차원에서 사찰의 불사를 지원하기도 하고, 사경과 경전을 간행하는 등의 이중적 모습을 지녔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엮음,『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2008, 동국대학교 출판부, p. 15.)
조선 후기인 19세기를 맞이한 불교계는 다양한 사찰의 중건과 불사가 이루어지면서 이전과는 다른 활기를 되찾는다. 무엇보다도 근대사의 중심에 서 있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철종(哲宗, 1831~1864, 즉위 1849) 때 영종도소재 백운산 구담사瞿曇寺(백운사白雲寺)를 중창重創하여 용궁사龍宮寺로 하고 원찰願刹로 삼는 등 불교에 대해 시종일관 호의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관음신앙觀音信仰에 심취해 유발승有髮僧을 자처하였고, 많은 불사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불교를 후원하였다. 반면에 조선 성종(成宗, 1457~1495, 즉위 1470) 이후 붕당朋黨의 본거지이자 요인要因이었던 서원書院을 대거 철폐하였고, 병인박해丙寅迫害 등 천주교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박해를 가한다.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도 불교에 우호적이었고 많은 불사를 단행하였다. 비록 동대문 밖이지만 1901년 원흥사元興寺를 창건하여 국가적으로 불교계를 관리하고 정비하려 하였고, 국가 법령으로 사부대중의 법회와 포교를 통한 확장을 적극 권장하였다. 억불정책으로 무너진 조선불교를 복원하여 일본불교의 확산에 대항하려 한 것이다. 고종 즉위 초 3년간 수렴청정을 했던 조대비(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 효명세자(孝明世子 익종翼宗, 1809~1830)의 비) 역시 불교에 신앙심이 깊었다.
흥선대원군은 개인적으로 불교에 호감을 가진데 그치지 않고, 불교를 정치적으로도 이용하였다. 흥선대원군의 불교 후원은 몇 가지 주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사찰을 창건하거나 중창할 경우 직접 개명(改名)하고 사액(賜額)하여 해당 사찰의 권위와 위상을 높여주었다. 둘째, 사찰을 중창할 경우 반드시 복을 비는 염불을 위한 대방(大房)을 만들어서 불교 신자들의 결집을 도모하였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조성된 대방을 중심으로 대왕대비(大王大妃) 조씨(趙氏)와 왕대비(王大妃) 홍씨(洪氏) 및 다수의 상궁(尙宮)과 같이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여성 불자와 돈독한 유대관계를 형성하였고, 이를 통해 빈약한 정치적 입지를 극복하고 아들 고종의 즉위라는 필생의 염원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정주/leejungjoo, 단국대학교「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불교 후원과 그 정치적 의미」[역사와 담론 학술저널, 2015.1 285 - 316 (32page)] 초록.)
사찰의 중건은 단지 불교 위상의 회복과 외형적 성장을 보여주는 일이었지만, 내면적으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당대의 관료나 유학자들이 사찰 중수에 시주자로 참여하거나 각종 중창기重創記나 사적기寺蹟記 등을 남긴다. 이는 평생 유학을 배우고 익히며 유학적 가치를 추구하던 양반사회가 적극적으로 불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징조徵兆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불교가 부각되면서 엄격한 유교사회에 새로운 조류潮流가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이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등 유학자들이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 1584)가 죽은 후에도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려다가 환속한 사람’이라고 비난받던 때와는 달라진 세태世態를 보여주고 있다. 성호 이익은 집안이 당쟁에 휘말려 화를 입고 농촌에 은거하면서 실학에 눈뜨게 되는데, 불교와 세유世儒의 실용적이지 못한 학풍을 모두 배격하였지만 불교의 생활방식에 대해 알게 되면서 당시 유교 양반 체제에 신랄辛辣한 비판을 가한다.
실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이익은 여러 차례 산사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어 승가의 청규와 생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실사구시 정신으로 당시 유교 양반 체제를 비판하면서도 산사에서 불경을 공부하는 학인이나 참선 수련하는 선승들이 부처님을 극진히 봉양하고 참마음 참뜻으로 정진하는 모습을 보고 진실로 가상한 일이라 탄복했다. 또 한 그는 당시의 속유(俗儒)들이 승려를 따를 수 없는 이유로 네 가지를 들었다. 첫째, 스승을 섬기고 진리에 정진하는 것, 둘째, 훔치는 마음이 없는 것, 셋째, 음식과 여색에 탐하지 않는 것, 넷째, 모두를 사랑하는 것 등이다. (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 58.)
추사秋史는 한때 출가를 꿈꿀 정도로 불교 교리에 밝아 ‘해동海東의 유마거사維摩居士’라고 불릴 정도였다. 당대 대선사인 백파긍선(白坡亘璇, 1767~1852)과 불교 논쟁을 벌이는가 하면,『동다송東茶頌』으로 유명한 초의 의순(艸衣 意恂, 1786~1866) 선사와도 가까웠는데, 초의와는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6개월간 같이 지내기도 하였고, 유배에서 돌아온 후에도 2년을 함께 지낸다. 논쟁 후 백파와도 교류하며 가까워져 그의 비문을 써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들에 대한 일화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강연「초의선사와 다산 정약용 그리고 추사 김정희와의 인연」에 잘 묘사되어 있다. 여하튼 유학자들이 불도를 수행하는 거사불교居士佛敎(혹은 재가불교在家佛敎)라는 새로운 흐름으로 나타나게 것이다.
추사는 승련(勝蓮)거사, 나산거사라고도 불리는 독실한 불제자였다. 그는 뛰어난 총명과 재능으로 주역, 사학, 문학, 금석, 고고학, 서화 등 다방면에서 최고의 경지를 이룬 대가다. 어려서부터 고향의 원당 사찰인 예산 화엄사에서 불경을 열람했고, 나라 안의 고승대덕을 두루 예방해 법거량을 했으며, 말년에는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어 만 8년간이나 칩거하며 백파 · 초의선사와 더불어 서신으로 불법을 논했다. 그는 지인들로부터 ‘해동의 유마거사’라 불릴 정도로 수행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추사의 수행 가풍은 그의 제자인 역매 오경석과 대치 유홍기 거사에게 이어졌다. 역매와 대치는 중인 신분의 개화사상가들로 모두 대대로 독실한 불제자였다. 두 거사는 개화당의 산파역이 된 인물들이다. 특히 대치거사는 선 수행을 좋아해 많은 제자들에게 참선을 가르쳐 1880년 무렵에 경성에는 일시 선풍이 성행했다고『조선불교통사』는 기록한다. (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p. 58~59.)
추사의 수행 가풍은 그의 제자인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1831~1879)과 대치大致(또는 大癡) 유홍기(劉鴻基, 1831~ ?) 등 개화사상가開化思想家로도 이어진다. 불교의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직관적 선사상과 수행 전통은, 조선 말기 유교사상의 한계를 절감한 진보적 개혁가들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유교 지배이념의 와해와 실패는 전국적인 민란으로 나타났고, 이를 돌파할 새로운 혁신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19세기 중반 이후 거사들의 신행은 매우 활발했다. 추사 김정희, 이건창, 월창 김대현으로 대표되는 거사들의 신행은 당대의 고승 백파스님과 서신으로 선 논쟁을 할 정도의 수준이었고, 특히 월창거사는 『선학입문』이라는 저술을 통해 참선 입문의 방도를 자세히 안내하고 있을 정도다. 조선조 500년간의 억불정책으로 승가의 수행이 상대적으로 침체되었음에 비해 거사들의 신행은 그 사회적 지위와 함께 활성화되고 있었다. 1872년 묘련사의 관음결사와 같은 결사는 재가신행의 또 다른 발전이었다. 불교사에서 결사는 일반적으로 고승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런데 이 관음결사는 거사들이 주도했으며, 참여의 열기 또 한 대단했던 것 같다.
이렇게 활성화된 거사신행의 분위기 속에서 유대치, 오경석, 김옥균, 박영효로 대표되는 1880년 전후의 개화당 거사들은 불교의 이치로 조선을 개혁하려는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희승 지음, 시련과 도전의 한국불교근세사『이제 승려의 입성을 허함이 어떨는지요』들녘 p. 62.)
오경석, 유대치, 강위(姜瑋, 1820~1884),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 1851~1894) 박영효(朴泳孝, 1861~1939) 그리고 서광범(徐光範, 1859~1897) 등 개화파開化派 거사들과 교류하면서 개화사상에 눈을 뜬 이동인(李東仁, 1849~1881), 무불無不 탁정식(卓挺埴, 1850~1884), 이윤고李允果, 차홍식車弘植 등 개화승 들은 일련의 불교혁신운동을 꿈꾸게 된다. 종단조차 없이 명맥만을 유지하던 불교계는 이들 거사들과 교류하면서 은둔에서 벗어나 개혁을 고민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개화의 실현이 곧 불교의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개화사상의 형성과 실천 과정에서 불교는 막중한 역할을 하였다. 초기 개화사상가의 신앙과 사상으로서 개화사상의 이론적 뒷받침이 되었고, 마침내 개화운동에 헌신하는 승려들이 출현하기까지 이르렀다. 개화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불교사상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선사상이었다. 선학들은 개화사상에 내포된 불교사상을 ‘사민평등사상’ 혹은 ‘불성사상’이라고 지적한다. 모든 중생은 불법 앞에 평등하다는 ‘일체중생실유불성’의 정신은 불교의 기본이고 핵심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민 평등사상, 불성사상이란 표현을 달리하였을 뿐, 불교의 선사상이라는 대표적 개념으로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엮음,『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8, pp. 50~51.)
조선의 몰락은 동시에 정치이념인 유교의 몰락을 의미하였고, 불교계는 숭유억불 정책의 긴 터널을 지나 다시 조명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 1895년 시행된 ‘도성출입 금지의 해금’은 한국 불교의 부활을 의미하였고, 불교 중흥의 신호탄이 되었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일본의 조선 침략은 조선불교를 개혁改革하려 했던 출가 수행자들에게 기회가 되었고 오랜 동안 이어진 사회적 억압과 천시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1895년(고종 32) 3월 29일 승려들이 도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단속하는 금령(禁令)을 해제하였다.〈고종실록〉에 의하면 이때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1842~1896)과 내무대신 박영효(朴泳孝, 1861~1939)가 “승도(僧徒)들이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던 금령(禁令)을 해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아뢰자 고종이 윤허(允許)했다는 것이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 의하면 일본 일련종(日蓮宗)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의 건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날 고종의 윤허는 그 후 한 두 차례 금지와 해제를 반복하는 해프닝이 벌어졌지만, 한국근대불교사의 본격적인 서막을 알리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동인(李東仁) 스님을 중심으로 불교계의 개화운동 등을 사례로 들면서 근대불교의 시작을 좀 더 이른 시기로 끌어올리려는 학자의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일본불교나 불교개혁론과의 관계 등 일련의 상황들을 생각한다면 이전 시기의 불교양상과 확연히 다른 본격적인 근대불교의 시작은 승려의 도성출입금지 해제로부터 상정해야 할 것 같다. (오경후(한국불교선리연구원 선임연구원),「민족불교 성지 선학원 역사를 되짚다, ② 승려 도성출입금지 해제」.)
승려 도성 출입 금지 해제는 일본 일련종 승려 사노 젠레이[佐野前勵]의 건의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1895년 4월 22일 일련종관장대리日蓮宗管長代理 사노는 갑오개혁 ‘제2차 김홍집 - 박영효 연립 내각’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1842~1896)에게 ‘한승입성해금건백서韓僧入城解禁建白書’를 보냈고, 내부대신 박영효(朴泳孝, 1861~1939)가 이 승니입성금지 해제안건을 국왕에게 직접 건의하여 성사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대로 개화사상의 형성과 실천에 불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주지周知의 사실이다.
선학들은 대체로 근대불교의 기점을 19세기 후반 일본불교의 활동 또는 1895년 도성출입 금지의 해금에서 찾는다. 근대화의 이념을 체득한 일본 불교는 한국 침략의 한 방편으로 포교에 힘을 기울였고, 그 연장선상에서 도성출입 해금을 건의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들이 불교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19세기 중엽부터 태동 한 불교계의 새로운 변화에 주목한다면, 근대불교의 시점은 달라질 수 있다. 즉 한국의 근대화를 앞당겼던 개화사상의 형성과 실천에 불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엮음,『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2008, 동국대학교 출판부, p. 14.)
봉건왕조를 청산하고 나라를 근대화하는 길이 바로 불교의 혁신운동이자 도약이었고, 이 과정에서 조선불교의 자체 노력이 뒷받침되었다는 것이다. 개화기 조선불교계 전체를 너무 친일 편향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다만 불교의 부활이 불교계의 자주적인 노력의 산물만은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다. 불교의 근대화는 다양한 시대적 상황들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이다.
‘승니 도성출입 해금’에 대해 일본 승려 사노의 활약이라는 설과 내무대신 박영효 등 개화파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리고 해제 된 후에도 완전히 철폐된 것은 몇 년 후로 이능화는 단발이 보편화되면서 승려와 일반인들의 구별이 모호해진 이후라고 밝히고 있다. 결국, 불교계의 자주적인 노력의 산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해금은 사노의 건의와 개화파의 결정으로 단행된 것이 아니라 당시 역사적 상황의 변화, 개화파와 연결된 불교계의 자각, 기독교의 팽창에 대한 한일 불교계의 위기의식, 유교적 정치이념의 쇠퇴, 외세에 맞서 불교를 신장시키고자 했던 조정의 의지, 민권의식의 향상 등과 같은 복잡한 인과관계와 맞물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엮음,『동아시아 불교, 근대와의 만남』2008, 동국대학교 출판부, pp. 63~94. & 강석주 외,『불교 근세 백년』, 민족사 (2002).)
승려입성금지 해제는 이미 1년 전인 1894년 국정 개혁 차원에서 추진된 사안이었고, 1895년의 입성금지 해제조치 조차 지속적으로 번복되다가 1905년 7월에야 비로소 온전한 출입의 자유를 얻는다. 조선에 온 지 한 달도 안 된 일본 승려가 해제시켰다고 보는 것은 이러한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부정하는 것이다.다만 불행하게도 이런 역사적 특수성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을 불교 중흥의 계기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식민지 시기 한국 불교는 급격히 친일화親日化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 건국 이래, 불교계는 세종 말년부터 세조가 불교를 지원했던 몇 년, 명종 때 문정왕후가 섭정하던 몇 년, 그리고 임진왜란 몇 년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핍박만 받았던 승려들에게 도성출입의 해금은 개벽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추진했던 일본 승려 사노야말로 정말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었다.(강석주 · 박경훈 공저,『불교근세백년』 민족사, p. 18.)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 해제와 이후 불교계의 이와 같은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은 엇갈려 있다. 박경훈은 “한국 불교계 안에 친일의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라고 했으며, 최병헌 역시 “결과적으로 한국불교계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환영받았던 해제 조치가 한국 불교발전의 계기가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친일적인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일본불교로의 예속화의 단서를 열었다는 점에서 불행한 사건이었다”라고 하였다. 정광호와 김광식 역시 “해금의 계기를 제공한 것이 일본승이었기 때문에 불행한 불교 역사가 시작되었다”라고 규정지었다.
반면 다른 시각도 있었다. 조계종 교육원에서 편찬한 〈조계종사〉 근현대편은 고종의 해금에 관한 윤허가 있기 이전인 1894년 6월 이미 갑오경장(甲午更張)의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던 군국기무처가 개혁안으로 승려의 도성출입금지 해제를 포함시켰음을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의 내용을 근거로 전제하였다. 이 책은 “해금(解禁)은 19세기 말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일련의 개혁과정에서 주도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오경후(한국불교선리연구원 선임연구원),「민족불교 성지 선학원 역사를 되짚다, ② 승려 도성출입금지 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