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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록 상권. 상당 대기 2-12. 무엇이 근본 뜻입니까?
[한 스님이 운문선사에게 물었다.
"무엇이 근본 뜻입니까?"]라고 물었다.
여기서 한 스님이 물은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이 설한 팔만사천의 법문의 근본 뜻을 물은 것이니 그럼 부처님의 상승 12분경의 근본 뜻을 물었습니다.
우리 불보살님들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을 한다고 한다며 진리(眞理)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는 무엇인가? 참다운 이치(理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 뜻은 삼법인으로 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삼 법인이 무엇인지 논리적으로 조금 설해 보겠습니다.
첫째가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다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삼법인에 대하여 충북대 명예교수 배길관교수는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보는 세계관은 종교나 사상에 따라 다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불교는 괴로운 욕망의 세계로 보고,
기독교는 고통스러운 죄의 세계로 보는 반면,
유교는 즐거운 蒼生(창생)의 세계로 본다.
불교는 괴로움을 滅(멸)하고 절대 행복의 세계인 극락으로 가고자 하고, 기독교는 죄를 赦(사)하고 영원한 행복의 세계인 천당으로 가고자 하고, 유교는 사후 세계보다 현세에 치중하면서 윤리적으로 선하게 살고 편안한 죽음에 임하고자 한다.
기독교는 고통의 원인을 인간의 자유의지에서 찾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정의를 배반하는 죄를 범했고, 그 자유의지를 상속받은 인간은 하늘나라에서 쫓겨나 영원히 고통받고 있다고 설교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無常(무상)에서 찾는다.
석가모니는 모든 존재는 무상하기 때문에 괴롭다는 것을 깨치고 나서 ‘一切皆苦(일체개고), 모든 것은 괴로운 것이다’라고 설법한 후 이를 불교의 근본 교리인 삼법인의 하나로 삼았다.
무상은 항상하지 않다 영원하지 않다 변화한다는 뜻으로, 현상세계의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천하는 존재의 실상을 뜻하는 개념이다. 즉 무상은 生滅(생멸)이요 생멸은 나고 죽는 것이다.
중생들은 이러한 무상의 이치를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늙고 병들어 죽는 자기를 바로 보지 못하고 오직 내 삶의 욕망에 집착하는 망상에 빠져 괴로워한다.
무상을 의식하지 못하는 어리석음(無明)에서 탐욕이 생기고, 탐욕에서 번뇌 망념이 생기고, 번뇌 망념이 평온한 본래심을 혼란스럽게 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생무상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탐내고 성내고 다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생노병사(生老病死) 이 네 가지 괴로움(四苦)은 인생 그 자체, 즉 존재의 실체적 바탕이 괴로움이라는 의미이다. 어머니 배 속에서 태어나는 고통 때문에 최초의 호흡과 동시에 울음을 터뜨린다.
몸의 고통을 느끼며 태어나 욕망의 괴로움 속에서 살다가 늙고 병들어 죽는 고통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다. 특히 죽음은 내 가족과 이웃 그리고 재물 권력 명예 같은 내가 사랑하고 소유하는 모든 것을 잃는 결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그 괴로움이 극한에 이른다.
생노병사(生老病死) 네 가지 괴로움에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 원증회고(怨憎會苦) 원망하고 증오하는 사람을 만나는 괴로움, 구부득고(求不得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오온성고(五蘊盛苦) 몸과 마음에서 생기는 괴로움을 더해서 여덟 가지 괴로움을 인생팔고(八苦)이라고 한다.
불심의 목적지는 괴로움을 없애고 즐거움을 얻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세계이다.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은 온통 괴로움의 바다(苦海)라고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은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괴로움이 없으면 즐거움도 없다는 평범한 이치를 간과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더한 것이다. 인생은 일고일락(一苦一樂)이요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하지 않았던가. 성철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삶이란 구름이 한 점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구름이 한 점 흩어짐이니 있거나 없거나 즐거이 사세. 웃지 않고 사는 이는 바보라네.’ 법정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다.라고 했습니다.
일체가 유심조입니다. 괴로움다 하며 고통이요 행복이다라고 하면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두 번째로 제법무아(諸法無我)
우리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는 우리가 믿고 싶은 존재로서의 영원불변한 자아(自我)란 없다는 이야기다. 모든 존재는 오온(五蘊)인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 조건에 따라 결합된 형상일 뿐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생명이 존재하고 그 생명체가 살아가는 삶의 과정을 살펴보면 대체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흐름대로 살다가 사라진다. 또한 생의 곳곳에서 고통을 느끼며 살아간다. 생에는 기쁨과 슬픔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그안에 담겨있지만, 부처님께서는 그중에서도 현실적으로 느끼는 괴로움에 대하여 의문을 품고 집중했다. 우리는 왜 괴로운 것일까? 삶이 한결같지 않고 무상(無常)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항상(恒常)한 것, 변함없는 것이란 없다는 것이 무상(無常)이다.
우리는 청춘에 속아 젊은 날엔 건강한 몸이 영원할 것처럼 믿는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은 없다. 불교에서 “고해(苦海)” 즉 고통의 바다라고 하는건 영원하지 않은 것에 집착하여 생겨난다. 늘 변화하는 무상의이치를 현실 속에서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힘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변화의 이치로 조건에 의한 결합의 원리로 흘러가 왔다가 머물고 사라지는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즉 모든 물질은 “무아(無我)”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인도에는 바라문교가 성행하고 있었다. 바라문교에는 “아트만(âtman)”이라는 사상이 있다. 브라흐만이라는 절대자인 창조자가 모든 존재와 물질에 부여한 신성 같은 것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는 신이 자신의 의지로 부여한 영원불변한 존재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트만(âtman)”이다.
석가모니 부처께서는 영원불변한 아트만 사상을 부정한다. 인간은 변화하는 존재다. 이렇게 무상한 세상에 어떻게 아트만이라는 절대적인 불변의 자아라는 것이 있겠는가 말이다.
창조신의 의지로 만들어진 어떠한 영원한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가르침이 “모든 법에는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보통 종교는 대부분 창조주를 이야기하는데 부처님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인연에 의해 생겼다가 인연에 의해 사라지는 것이다. 누가 만들어준 것도 아니고 독자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어떤 것도 인연에 의하지 않고 우리 삶에 들어와 존재할 수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변화하는 요소들로 이루어졌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무아(無我)”라고 하는 것은 결국 “조건이 만들어낸 관계”를 말한다. 지금 현재 상태로 존재하기 까지 수많은 관계들의 변화가 있었다. 그 시간적 변화를 “무상(無常)”이라 한다. 그 무상한 변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모든 것이 조건 형성의 관계로 엮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모두가 조건의 결합인 것이지, 따로 하나만 떼어내서 고유한 특성을 가진 독립된 개체라고는 할수 없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행위 주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의해 형성된 어떤 것도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그 변화와 관계성을 말하는 불교적 특성이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인 것이다.
최후의 진리는 적정열반(寂靜涅槃)인 것입니다.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세계(世界)를 좀 살펴보면은
열반적정(涅槃寂靜)의 세계(世界)는 정(定)의 세계입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에 고요한 정(定)에 머물러 있을 수 있게 되면, 수행(修行)이 완성(完成)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도(道)는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요, 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입니다.
정(定)이 없으면 혜(慧)가 없고, 혜(慧)가 없으면 정(定)이 없습니다. 정(定)과 혜(慧)는 새의 두 날개와 같습니다. 불교(佛敎)의 수행(修行)은 정혜(定慧)가 하나되는 수행(修行)입니다. 그래서 정혜쌍수(定慧雙修)에서 정혜쌍운(定慧雙運)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참된 도인(道人)은 모든 것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것입니다. 불교(佛敎)의 수행(修行)은 확실(確實)한 세계(世界)를 여실(如實)하게 증득(證得)하고, 그대로 살아가는 수행(修行)입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움직이는 자가 바로 일체만유(一體萬有)의 주인(主人)이 되는 것입니다.
보조국사(普照國師)의 수심결(修心訣)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경계에 대하여 생각이 근본으로 돌아가고, 반연을 만나더라도 마음이 도에 계합하여, 마음대로 지혜와 선정을 닦아 나가야 비로소 일이 없는 자유인이 되리라.
질직무위(質直無僞) 시청심상(視聽尋常) 칙절일진이작대(則絶一塵而作對) 하로견탕지공무(何勞遣蕩之功無) 일념이생정(一念而生情) 불가망연지력(不假忘緣之力)라고 적고 있습니다.
솔직하여 거짓이 없고, 보고 들음에 항상하나니, 한 티끌이라도 상대하는 것이 끊어졌나니, 어찌하여 번뇌를 버리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한 생각이라도 망령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반연을 잊기 위하여 힘쓸 필요가 없도다.
여운육근섭경(如云六根攝境) 심불수령(心不隨緣) 위지정(謂之定) 심경구공 조감무혹 위지혜(心境俱空 照鑑無惑 謂之慧)라.
육근이 경계를 대하여 마음이 반연을 따르지 않는 것을 선정(禪定)이라 하고, 마음과 경계가 함께 공해서 미혹됨이 없음을 비추어 아는 것을 지혜라 하는 도다.라고 하여습니다,
부처님의 근본 뜻을 물은 한 스님에게 운문선사는 이렇게 답합니다.
["묻지 않으니 답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운문선사는 왜 이른 말을 했을 것 같습니까?
부처님의 근본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위에서 말했듯이 뜻이 있다면 관념이지요, 그리고 여래장의 화현입니다. 이것이 바로 번뇌인 것이며 양변으로 갈라지는 분별심인 것입니다. 무상(無想)인 무심처에 계신 부처님이 어떻게 뜻이 있으며 사량 분별심이 있을수 있겠습니까?
오직 무심처에 상주불변하게 주하고 계신 부처님이 말하는 근본 뜻은 진리의 당체입니다.
그럼 이 진리를 어떻게 말이나 글로 나타낼 수 있습니까?
적정열반에 주하고 계신 운문선사역시 그 스님에 묻는 말에 어떻게 분별심을 거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근본 뜻을 물으니 대답도 할 수 없고 말을 했다하면 분별심이 되는 것인 선사께서 물으도 물음이 없는 것이 선문답입니다
그래서 “묻지 않으니 답하지 앟는다”라고 말씀하시어 본래공으로 돌려 버렸습니다.
굳이 말을 하려면 너 스스로 수행하여 스스로 알아야 하는 것이지 나는 모든 것을 벗어난 적정열반의 경지에 있는 나에게서 찾으려 하느냐 오직 자작작수(自作自修)하라는 뜻으로 이렇게 한 마디로 주객을 다 빼앗아 버렸습니다.
성불인연 맺으소서 옴 바아라 믹~~~!!!!!!!!!
조사선(祖師禪) 운문록(雲門錄)을 들어시어
인연성불(因緣成佛) 하시어서 붓다(佛陀) 같이 살아가소!
일승법문을 시절인연삼아 인연성불 하옵시고 대원성취 하옵소서 !
원오선원 명상쉼터 천안시 두정동 611_1번지 5층(041)551 8546
무명 납승 원오선사 010 8748 6006 옴~바아라 믹!!!_()_
탁발성원 보시구좌 농협 351 1042 1598 93 대한불교 정토회

첫댓글 운문록을 통하여 인연성불 요인성불하시어서 본불본락 하옵소서 옴~바아라 믹!!!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