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지성 손기은 기자가 쓴 백석 인물탐구
흰 바람벽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이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라고 읊는 재북시인 백석. 한동안 잊혀졌었지만 80년대 이후 월북시인들의 해금과 함께 그는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짙은 향토성과 고향상실의 외로움을 고스란히 담아낸 백석의 시. 그 속에는 백석의 생애가 있다.
모던한 향토성
그의 데뷔작인 <정주성>은 백석의 작품세계의 근원이 되는 고향 정주를 배경으로 한다. 평안북도 정주는 백석에게 중요한 시적 소재가 됨과 동시에 고향이라는 주제를 이끌어낸 곳이기도하다. 1936년 25세에 시집 『사슴』을 통해 발표한 33편의 초기시에서는 고향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과 향토적 소재, 향토음식이 자주 등장한다. 달밤에 목매어 죽은 수절과부, 신장님 달련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 찰쌀탁주,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 콩가루차떡 등이다. <여우난골族> <모닥불> 등과 같은 작품을 보면 고향의 정겨움을 느낄 수 있다. 백석은 산문으로 시를 풀어내고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시가 어린시절 고향에서의 추억을 꺼내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토속어와 방언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도 특징이다. 백석의 시는 한국인의 삶의 방식을 표출하고 전통적 세계를 시를 통해 보여주는 역할을 하며 시어 확대에 기여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백석이 활발히 활동하던 1930년대 중반은 모더니즘 문학활동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였다. 백석의 시는 당대 시적흐름과는 거리가 있다. 시인 임화는 『사슴』을 통해 발표한 백석의 시를 시골뜨기의 문학이라고 혹평한 바 있다. 1930년대 모더니즘 시인들은 서구적인 것을 동경하고 시인들은 그들의 작품속에서 서구세계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반면 백석은 시단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았다. 토속적인 시적 대상의 객관화와 감정의 절제를 통해 모더니즘의 기법적 특징을 독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전통성과 현대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백석의 시를 시인 김기림은 주책없는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다고 평가했다.
고향을 떠나 떠도는 생활의 시작
백석의 아버지는 조선일보 사진부에서 일했었고 조선일보의 초기 운영자 방응모와 인연이 깊었다. 백석 또한 이런 인연으로 조선일보의 후원을 받아 일본의 청산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며 유학생활을 했다. 졸업 후 시집 조선일보에서 2년동안 기자로 활동하고 시집 『사슴』을 발간한 백석은 1936년, 함흥영생고보에서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는다. 이 무렵 백석의 시는 기존의 시와 차이를 보인다. 고향을 추억하며 대상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던 초기시와는 달리 주관적이며 낭만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자신를 작품 속에 포함시킨다. 변모하게 된 주된 이유는 연인 자야와의 만남이다. 1936년 가을, 우연한 자리에서 만나게 된 백석과 자야는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자야라는 애칭은 백석이 당시 자야가 읽던 <당시선집>에 나오는 이백의 시<자야오가>에서 따와 지어준 것이다.
자야와 만난지 일 년여가 넘은 1937년, 백석은 부모가 정해준 신부와 결혼을 한다. 봉건적 중매결혼을 한 백석은 신부와 초례만 치르고 자야 곁으로 돌아오지만 자야는 백석을 떠나 서울로 내려간다. 이후 백석은 자야를 보기 위해 서울을 찾는다. 교사직을 관두고 서울에서 <여성>지의 편집일을 맡기도 한다. 부모님의 성화에 못이겨 다시 한번 다른 여인과 결혼을 하지만 백석은 또다시 자야 곁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백석에게 큰 고통이 되었고 자야를 떠나 만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된 계기가 된다. 백석이 자야와 연을 맺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은 1938년 발표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시를 포함해 백석의 중기시는 외롭고 슬픈 , 때로는 식민지 지식인의 고통이 배여있는 작품으로 변모하게 된다.
차가운 북방의 생활
만주에서 백석은 여러 번 직업을 옮긴다. 측량 보조원, 측량 서기, 세관원, 심지어 소작인 생활까지 한다. 만주와 신의주를 거치며 안정적이지 못한 생활을 한 백석은 번뇌와 괴로움을 시를 통해 표현했다. <고향>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의 시에서는 고향 상실감을 근원으로 하여 백석 자신이 느끼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흰 바람벽이 있어>의 백석은 서늘한 북방에서 어머니와 연인을 생각하는 모습이다. 흰 벽에 스크린처럼 투영된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을 본다. 고향을 떠나 적막한 생활을 이어나가는 시인의 우울한 내면세계가 잘 드러나있다. 함흥영생고보에서 백석에게 수업을 들었던 제자가 이무렵 백석을 찾아갔을 때 그의 모습은 매우 초라했다고 전해진다. 백석은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으로, 조국과 고향을 떠난 유랑객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사람으로 북방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
분단이 기록한 백석
백석은 일제 치하에서도 자유로운 시 창작 활동을 했고, 카프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계열이나 어떤 시단의 흐름에도 휩쓸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반면 분단 이후의 창작활동을 살펴보면 당과 조국의 이념에 지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단 이후 백석의 행적과 작품 활동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조선문학>을 통해 발표된 창작시와 번역시, 아동문학평론을 통해 유추할 뿐이다. 백석은 당에 소속된 준공무원 시인으로서의 전형적인 활동을 한 듯하다.
고향을 향하는 백석의 시선
어린시절 서울을 처음 다녀온 백석은 "건건쩝쩔음한 내음새 나고 저녁 때 같이 서글픈거리"라고 서울을 표현했다. 정주보다 번화하고 신 문명이 유입된 서울을 서글픈 거리라고 느낀 백석의 내면세계는 1930년대, 서구문명을 좇는 당대 모더니즘 시와는 다른 모습의 시를 창작하면서 표현되었다. 백석의 이러한 정신은 새로운 문명의 홍수 속에서도 고향의 내음이 나는 시를 쓸 수 있었던 밑바탕이 되기도 했다. 그의 작품에서는 항상 고향을 향하는 따뜻한, 하지만 쓸쓸한 시선이 느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