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윤 장로님을 추모하며
일생이 봉사의 삶이었고 찬양의 삶이셨던 장로님!
담장마다 붉은 넝쿨장미 너울거리는 실록의 오월
평생을 푸른 꿈 안고 천국을 사모하다 주님 품에 안긴
장로님께서 걸어오신 길
그리고 잔디밭에서 함께 했던 시간
삶의 여정을 회고하며 추모합니다.
장로님께서는 연세대학을 졸업 후
평생을 존경받는 교사로 교육자의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은퇴 후엔 봉사를 천직으로 양로원 이사로 헌신하시고
강직하고 정결한 신앙인으로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삶을 사셨습니다.
잔디밭 모범 회원으로
늘 발전을 염두에 두고, 적극적인 활동을 하셨습니다.
골절상을 당하여 참석하지 못할 때에도
안부는 늘 잔디밭의 평안과 부흥이었습니다.
장로님의 마음엔 잔디밭 회원들을 향한 특별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김연기 목사님은 정신적인 아버지처럼 섬기고
천국 가신지 몇 년이 되었지만 늘 옆에 계신 듯 대하시던 장대현 목사님,
친형제처럼 사랑을 나누던 하수웅 회원님
일일이 이름을 호명하지는 않아도
용유도를 오가며 나눈 세월의 시간 속에 새겨진 추억은
회원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장로님의 생전은 찬양하는 삶이었습니다.
2013년 잔디밭 창립 55주년 기념, 기념예배를 드리던 날엔
<찬송가 42장> 거룩한 주님께 찬양으로
이곳 용유교회에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장로님께서는 <이 백성은 나를 위하여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라 하신
이사야 43장 21절의 말씀> 증인이 되어 사셨습니다.
2019년 10월 6일 (주일)오후3시 코랄카리스 팀원으로 공항신성교회에 오셔서
하얀 양복 입으시고, 별빛처럼 맑은 눈동자 반짝이며
“그의 빛 안에 살면” “여호와는 나의 목사시니” 찬양을 통해
성도의 삶이란 이런 것이라며
신자들에게 도전의 꿈을 심어 주셨습니다.
한 달 후 2019년 11월 9일(토) 오후 2시 KBS홀에서 장로님을 뵈었습니다.
장로중창단 코랄카리스 제15회 정기연주회 날이었습니다.
미얀마우물파기 및 고아원 후원 연주 후
자녀들의 축하 속에 꽃다발 안고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헬라어 ‘은혜의 찬양’을 뜻하는 코랄카리스 단원으로 평생을 찬양과 동행하며 사신
장로님 천국에서 만날 것을 기대하며 추모합니다.
하나님의 부름 받으셨다는 메시지를 받고
불가 며칠 전인 12일 보내 주신 귀한 글
“놀라운 선교 비사”를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우광복 선교사 일생이었습니다.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내 나라와 내 민족이 깨어서
다시 한 번 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민족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어쩌면 이 글은 지독한 애국자이신 장로님의 마음이라 생각됩니다
장로님은 나라사랑도 남다르셨습니다
밤낮으로 국가의 어려움을 위해 염려하며
하나님의 광명의 빛이 비추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시간으로 보아 하관 무렵이었을 겁니다
오전 우렁차게 내리던 비 그치고,
하늘 열어 기이한 풍경을 보여주셨습니다.
청명한 하늘 가득 무지개 구름 가득 펼쳐 놓으신 주님
하관자리에 참석 못한 아쉬움
감동의 물결로 가슴가득 채워 주셨습니다.
온전히 믿음으로 사는 자녀 천국 입성을
하나님께서도 큰 잔치 베풀어 반기신 것으로 깨달았습니다
푸르고 맑고 웅장하늘빛은 한 시간 지난 후
다시 회색빛 세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땅에 남기고 가신 믿음의 유산
걸음마다 흔적이 된 믿음과 봉사
뒤 따르는 걸음걸음
섬김의 자양분으로 삼겠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참으로 깨끗한 믿음의 삶을 보여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그 정신 받들어 잔디밭이 더 부흥하도록
겸손히 걷겠습니다.
2020. 5. 25일
신재미 권사
제목 : 잔디밭 (故) 장석윤 장로 추모예배
일시 : 2020년 5월 25일 오전 11시
장소 : 용유교회
참석자 : 홍창재 목사 , 김연기 목사, 최성배 목사,
백경남 목사 , 김선임 사모, 이정선 목사, 길옥희 사모
장석원 장로, 차금실 권사, 전지희 목사 , 정진성 장로
한남수 집사, 신재미 권사
고 장석윤 장로님 추모예배
사회 : 전지희 목사
묵 도 ............................................................... 다 같 이
신앙고백 ........................................................... 다 같 이
찬 송 .......................438 장................................ 다 같 이
기 도 ............................................................최성배 목사
성 경 ............................................................... 사 회 자
권면과위로 .....................................................백경남 목사
추모의 시 .......................................................신재미 권사
추 모 사 .........................................................홍창재 목사
찬 송 ........................606 장............................... 다 같 이
광 고 ............................................................... 다 같 이
축 도 ............................................................김연기 목사
1. 잔디밭이 4개월 만에 모이게 됨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2. 지난 1월 모임에 함께 했던 고 장석윤 장로님의 추모예배로 드리게 됨을
뜻깊게 여기며
유가족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기원합니다.
3. 오늘 추모예배에 순서를 맡아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4. 예배 후에 마당에서 삽겹살 구이 식사를 하겠습니다.
5. 식사 후에 커피 농원 관람을 다 같이 하겠습니다
2부 - 천국입성 추모예배 케잌 절단식
기도- 장석원 장로
3부 - 삼겹살 점심식사
4부 - 커피농원 방문
5부 - 용유교회 마당 차담
2020.5. 12 장로님이 보내주신 글
*놀라운 선교 비사*
지금부터 100년 전 한 젊은 선교사 부부가 미국 선교부에서 한국으로 파송을 받았습니다.
이 젊은 선교사 부부는 충남 공주를 선교 기반으로 하여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공주에서 첫 아들을 낳았는데 첫 아들의 이름을 한국의 광복을 기원하면서 한국식 이름을
우광복이라고 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올리브와 로저라는 두 딸을 낳았습니다.
1906년 2월 논산지방 부흥회를 인도하고 돌아오다가 비를 피해 상여간에서 잠시 쉬었는데
바로 전날 장티푸스로 죽은 사람을 장례하고 그 장례용품을 보관해 두었기 때문에
선교사님이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졸지에 선교사님 부인은 과부가 되어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놀라운 사실은 2년 후 선교사님의 부인이 자녀를 데리고 다시 한국 공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공주에 큰 교회들을 세우는데 기여를 하고 47년간 선교사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두 딸이 풍토병에 걸려 죽었는데 우광복의 여동생 올리브는 11살에 죽어서
공주땅 영면동산에 묻힙니다.
우광복은 공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나오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때가 바로 일제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되어 하지 장군이 군정관으로 한국을 신탁통치 하던 때였습니다.
그때 영어와 한국말을 능통하게 구사할 사람이 필요 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선교사 아들 우광복입니다 우광복이 하지의 참모가 되어 한국 정부수립에 관여 합니다.
그때 하지가 우광복에게 자네가 한국 실정을 잘 아니 앞으로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
50명을 추천해 달라고 합니다.
우광복은 어머니와 상의한 후 어머니가 추천해 주는 50명을 하지 장군에게 소개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중 48명 거의 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정부 수립될 때 요소요소에 기독교인들이 들어가서 나라를 세웁니다.
특별히 문교부 장관에 기독교인이 임명되어 미신 타파를 시작했습니다
국방부장관이 기독교인이 되어 군대 안에 군목제도의 토대를 마련하여
한국군을 하나님의 군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헌 국회 국회의원 거의 모두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제헌국회
속기록 첫 장을 열면 기도로 국회를 개원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48년 5월 30일 이승만은 이윤영 목사에게 기도로 국회를 열 것을 주문합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기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성시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伸寃)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이때 기독교인이 전 국민의 5프로 안 되는 때 였습니다
그런데 윌리엄 사모님이 추천해준 50명의 기독교인들이 각 분야에 들어가서
영향을 미친 결과 10년 만에 500만이 되고, 20년 만에 1000만 성도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이 기적이 어떻게 가능 했습니까?
미 군정 시절 우광복이 추천한 50명부터 시작했습니다.
우광복에게 누가 50명을 추천했습니까? 바로 우광복의 어머니, 이역만리 타국에서
남편을 잃어버리고 두 딸을 잃어 버렸는데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한 알의 밀알이 되신 사모님 때문입니다.
우광복은 1994년 87세 일기로 소천 했는데, "11살에 죽은 내 동생 올리브가 묻혀있는
공주 영면동산 내 동생 곁에 나를 묻어 달라"고 유언했습니다.
아마도 한평생 동안 한국에서 풍토병으로 죽은 동생이 가슴에 살아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지금 우광복의 묘가 동생 옆에 나란히 있습니다.
이러한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내 나라와 내 민족이 깨어서
다시 한 번 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민족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글이 도움이 되었다면 다른 분들에게도 널리 전하시기 바랍니다.
카페 게시글
축시,추모시
장석윤 장로님을 추모하며
신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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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6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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