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6일 우리 십오야는 강진으로 문화기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일행은 김 량 김영부 김영백 김오석 김종국 노승남 노양환 노윤택 문기정 박남용 백종팔 송하문 신철남 양수랑 이승정 이원형 임철호 정재남 제두봉 조 학 최기동 최성연 등 22명이었습니다. 그 중에 강진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친구들을 만나 정을 나누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역시 자네들은 멋진 사내들이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9시 10분쯤 광주를 출발하여 무안공항고속도로를 따라 가다가 나주에서 국도로 빠져 나갔는데 영산포 5일 시장이 있는 영산동사무소 앞에서 차가 멈추어서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클러치에 이상이 생겨서 다른 차가 올 때까지 1시간을 길에 멈추어 서 있었습니다. 그 동안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엄청난 폭우로 변하였습니다. 약 1시간 후 다른 차가 와서 우리를 태우고 강진 백련사 주차장에 도착하였습니다.
비는 그치고 하얀 안개가 눈이 시릴 만큼 짙은 녹음으로 우거진 만덕산을 감돌며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동백숲길을 따라 백련사로 올라갔습니다. 만일 정시에 우리가 여기에 도착하였더라면 비를 쫄딱 맞고 구경을 하였을 것인데 차 고장이 오히려 잘 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에 와 보았던 백련사는 얼핏 스쳐 지나가기만 하였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였는데 이번에는 전과 달리 관심 있게 자세히 살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강진만이 내려다보이는 만덕산의 품 안에 자리 잡은 백련사(白蓮寺)는 아주 좁은 자리에 오밀조밀하게 배치되었지만 절로서의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절 서쪽에 있는 동백나무 숲은 천연기념물(제131호)로 지정되어 있었는데 그 속에 옛 선사들의 무덤인 부도 4기가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절 서쪽에서 다산초당으로 난 800m의 ‘만덕산 둘렛길’(내가 붙인 이름)은 2009년 ‘제10회 아름다운 숲 경연대회’ ‘숲길’부문에서 ‘아름다운 어울림상(장려상)’을 받은 길이었습니다. 그 ‘만덕산 둘렛길’을 따라 오르막길을 가다가 백련사의 우청룡이면서 만덕산에서 뻗어 내려온 능선 마루턱에 있는 해월루(海月樓)에 올라 청록색의 강진반도 사이로 하얀 비닐을 깔아 놓은 것 같은 강진만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가슴이 확 터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만덕산 둘렛길’의 내리막길을 조금 더 갔을 때 다산의 문화유적인 다산초당(茶山草堂)이 나왔습니다.
맨 먼저 보이는 것은 천일각(天一閣)이었습니다. 다산이 흑산도에 부처된 가형 정약전을 그리며 심화를 달래면서 강진만 건너 서해 바다를 바라보았던 동쪽 언덕에 후세 사람들이 천일각(天一閣)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천일각(天一閣)이란 ‘하늘 끝 한 모퉁이, 즉 천애일각(天涯一閣)’이란 뜻입니다.
다산초당 역시 동백과 대숲 속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동암(東菴)과 서암(西菴) 사이에 있는 다산초당(茶山草堂)은 본래 다산의 외가인 해남인 윤단(尹慱)의 산정(山亭)이었는데, 서로 교분을 나누면서 강진읍 동문밖에 있는 주막을 거쳐 고성사, 목리, 백련사, 동성리 등에 부처된 다산을 이곳 초당으로 옮기게 하고 지방의 문하생들을 가르치게 하였던 곳입니다. 다산초당의 주변에는 다산이 직접 조성하여 잉어를 길렀던 연못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손수 수맥을 잡아 만든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 약천(藥泉), 마당에서 솔방울로 자생 찻잎을 따다가 차를 끓여 마셨던 다조(茶竈, 차 끓이는 부뚜막), 다산의 귀양이 풀려 고향 마현(경기 남양주시)으로 떠나면서 자기 삶의 흔적을 남기고자 직접 새겼다는 정석(丁石) 등을 돌아보고 잠시나마 200여 년 전 다산이 강진 유배생활 18년 중 가장 긴 10년 동안 거처하며 수많은 서적을 저술하였던 근대 조선의 실학의 산실이었던 이곳을 경배(敬拜)하고 다시 적송과 대숲이 우거진 ‘만덕산 둘렛길’을 따라 내려왔습니다. 다산의 면모를 살피기 위해 아래에 참고로 다산 연보를 간략히 정리해 기록합니다.
다산 연보
1762~1789 인생 준비기(27년, 修己)
1762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지금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진주목사 丁載遠(羅州人, 어머니는 공제 윤두서의 손녀 해남윤씨)의 4남으로 출생
1783(22세) 진사시에 장원급제. 성균관 유생으로 정조(32세)와 대면하고 평생의 동지요 정신적 동반자가 됨, 정조로부터 수많은 서책을 상으로 받음)
1789~1801 관직 활동기(12년, 治人)
1789(28세) 문과 장원급제. 등용되어 관직에 나감(정조의 총애를 받음). 정조의 능행 길(한강 배다리 제작). 화성을 설계하고 축조에 참여(거중기 제작활용). 경기도 암행어사. 형조참의. 실학파의 한 사람으로써 선구적 전위대적 역할을 함. 천주교에 관심
1801~1818 강진 유배기(18년, 愛人)
1801(40세) 정조 붕어. 2월 신유사옥(천주교 박해사건)으로 관직에서 쫓겨나 사상범으로 장기(경상도)로 유배, 황사영백서사건으로 11월 강진으로 이배(동문 밖)
1806(45세) 강진 목리 이학래의 집으로 이거
1808(47세) 윤단의 山亭(만덕산 아래) <다산초당>으로 이거. 제자를 가르치며 학문을 연구하여 각종 서적을 저술함.
1818(57세) 봄에 <목민심서> 완성. 8월 이태순의 상소로 유배에서 석방됨.
1818~1836 고향 마현 정착기(18년, 愛人)
1818(57세) 9월 고향(마제) 본가(與猶堂)로 돌아 감. 선산에 성묘.
1819(58세) <흠흠신서> 완성. 유배생활로 허약해진 몸을 추스르고 북한강을 유람.
1820(59세)~1836(75세) 지금까지의 모든 저작물을 정리 완성
1836(75세) 4월 4일 回婚日에 병으로 서거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修己治人으로 나라에 봉사하였습니다. 위의 연보에서처럼 다산은 修己治人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修己愛人(愛民)까지 한 보기 드문 다방면(토목공학자, 경제학자, 행정학자, 법률가, 의사, 군사 전문가, 도덕철학자, 미래학자, 종교학자, 음악가, 미술가 등)에 걸친, 애민(愛民)을 접두사로 한 思想家요 政治家요 行政家이면서 또한 著述家(5백 여 권의 저술)였습니다.
이 나라에 군왕으로서 세종대왕이 있다면 지도자로서 다산이 있어 이 강퍅(剛愎)한 세상에서도 나는 외롭지 않습니다.
다산초당에서 내려와 점심을 예약해 놓았던 식당으로 갔습니다. 전에 민선 강진군수를 하였던 윤동한씨가 운영하는 ‘다산명가’라는 식당으로 가서 예약 주문해 놓았던 메뉴대로 식사를 하였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친구들이 술을 맘껏 주문하여 술값이 많이 나왔다합니다.
배도 부르고 기분도 좋아진 우리는 계속 이어진 ‘만덕산 둘렛길’을 따라 서쪽으로 조금 더 산책하여 다산의 유물이 전시된 강진군 ‘다산기념관’으로 갔습니다. 그곳은 강진군이 운영하는 다산 홍보관 이었습니다. 영상자료를 시청하였는데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부적시의(不嫡時宜, 절대적인 것은 없다. 시대의 변화에 맞아야 한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버스에 다시 올라 남도의 소금강이라는 석문(石門)으로 갔습니다.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불어난 개울을 건너 급한 경사면의 석문산으로 올라가다가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석문정(石門亭)에서 잠시 머물렀습니다. 석문 협곡 아래 전개되는 도암면 평야가 남으로 남으로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강진읍으로 들어가서 영랑생가를 돌아보고 강진 문화기행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첫댓글 아석, 그날의 행적과 다산의 일생을 한 눈에 다 볼 수 있네그려. 영상 편집도 어려운데 모든 사적을 빠뜨림 없이 기록해 주셔서 다산을 보려면 이 글만 읽어도 족할 것 같네.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