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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일러두기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1권 - 인문·자연
머리말
Ⅰ. 지혜가 이끄는 삶
Ⅱ. 이성과 자유의 이중주
Ⅲ. 해방된 감성, 웰빙을 이끌다
Ⅳ. 시간과 문명의 파노라마
Ⅴ. 문명의 가면을 벗기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2권 - 정치·사회
머리말
Ⅰ. 정의와 권력, 정치 변증법
Ⅱ. 자유를 넘어 평등으로
Ⅲ. 좌절된 욕망, 혁명의 꿈
Ⅳ. 인간을 넘어, 인간 뒤에서 인간을 보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3권 - 문학 上
머리말
Ⅰ. 운명과 성찰
Ⅱ. 영혼과 성장
Ⅲ. 절망과 구원 가능성
Ⅳ. 사랑과 죄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4권 - 문학 下
머리말
Ⅰ. 현실과 욕망
01 맥베스
02 적과 흑
03 잃어버린 환상
04 위대한 유산
05 위대한 개츠비
Ⅱ. 낮은 땅, 높은 이야기
01 약혼자
02 목로주점
03 검은 피부, 하얀 가면
04 모두의 노래
Ⅲ. 여성성으로, 여성성을 넘어
01 제인 에어
02 등대로
03 채털리 부인의 연인
Ⅳ. 가능세계, 혹은 허구적 실험
01 데카메론
02 걸리버 여행기
03 픽션들과 알렙
04 백년 동안의 고독
05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저자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해설자 박성환(부산외국어대학교 영어과 교수)
목차
셰익스피어의 현대성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맥베스』
비극 『맥베스』
악의 부추김과 질서의 회복
맺는 말
더 생각해볼 문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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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현대성
일반적으로 셰익스피어의 대표적 비극작품이라면 『햄릿(Hamlet)』, 『오셀로(Othello)』, 『리어 왕(King Lear)』, 『맥베스(Macbeth)』의 4대 비극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들 중 그 어느 것도 위대한 고전에 들지 않는 것이 없지만, 필자는 특히 『맥베스』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비교적 짧은 비극이지만 이 작품에 셰익스피어의 고전적 특성과 현대성이 가장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세계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와 모든 세계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요소와 그 가치 그리고 셰익스피어적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인 것이다.
중세 기독교 시대에 몰락했던 영국의 연극은 엘리자베스 시대1)에 와서 다시 크게 융성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혼란스런 국정을 안정시키고 국력을 비축하여, 1588년 당시 유럽의 해상을 지배했던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쳐부숨으로써 제해권을 장악하는 등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또한 유럽 대륙의 르네상스 기운이 유입되어 문화의 꽃을 활짝 피우게 됨으로써 대륙과 떨어진 섬나라로서 침체되어 있던 영국이 단연 일등 국가로 부상한 시기이기도 했다. 셰익스피어 같은 위대한 극작가가 태어나게 되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천재성뿐 아니라, 당시 영국 사회가 위대한 극작가를 배출할 수 있는 충분히 좋은 사회적 토양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고전의 반열에 드는 이유는 '현대성'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현대성이라 함은 현대적 사고방식, 즉 르네상스 이후의 사고방식을 일컫는다. 종래의 하느님 중심의 교권주의 사상에서 오는 인간성 말살과, 그로 인하여 암흑천지가 된 중세에서 탈피하여 인간 자신을 본위로 삼고 인간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휴머니즘(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을 말한다. 인간의 자유의지와 인간의 상상력을 강조한 셰익스피어의 연극은 당대의 영국이라는 시간과 공간, 즉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인간의 사고양식 내지 인간의 감수성과 정서에 세련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는 작중인물의 성격을 창조하는 힘이 가히 천재적이어서 그의 작품들은 왕에서부터 하인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당시 연극 공연은 상류 계층과 평민들이 한 극장 안에서 같이 관람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곧 당시 영국의 연극은 소수의 특권층뿐만 아니라 사회 전 계층이 모두 참여하는 시민 사회적 엔터테인먼트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이유로 한 가지 더 꼽을 수 있는 것은 그가 구사한 언어의 수효와 그 효능 및 묘미에 있다. 그가 구사한 언어는 역대 어느 시인, 작가보다도 많아 약 1만 5천어에 달한다. 그는 극작가가 되기 전에 이미 154편의 소네트와 2편의 장편 서사시를 썼으며 그의 비극 작품 대부분의 대사도 시로 되어있다.
유려한 언어로 모든 것을 손쉽게 형상화하는, 담담하고도 찬란한 언어로 표현한 상상력은 경탄을 자아내며 시어(詩語) 속에 담긴 음악적 리듬과 소리는 고도의 정서적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 효능과 묘미는 특히 'pun2)'이라는 일종의 말 재롱에서 잘 드러난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우리로서는 그의 시어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맛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맥베스』
셰익스피어 연구가 브래들리(A. C. Bradley)3)는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죽음으로 이끄는 특별한 불행 내지 '격변(convulsion)'의 이야기"라고 정의한다. 주인공에게 '격변'을 일으키는 원인은 도덕적 '악(惡)'이라 단정할 수 있다. 악이 주인공의 의식질서를 파괴함으로써 일어나는 혼돈과 격동이 불행을 자아내는 '격변'이다. 그 격변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 주인공들의 투쟁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내면적인 동시에 외면적인 투쟁이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들은 맥베스 외에는 모두 선인(善人)이라 할 수 있다. 맥베스도 악행을 저지르기는 하지만 그 본연의 인간성은 선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이렇게 선한 주인공들이 비참한 죽음을 맞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는 데 그 본질이 있다. 브래들리는 이와 같이 악인과 선인을 불문하고 비극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궁극적인 힘을 '도덕적 질서'라 규정하였다.
악의 성질은 오만, 탐욕, 시기, 분노 등 부정적·비생명적이며 파괴적인 반면에 선(善)은 관용, 사려분별, 정의, 자비 등의 속성을 가진다. 그런데 이와 같은 악의 속성을 가진 인간이 선한 사람을 억누르게 되면, 그때는 악인(惡人) 자신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주변의 선한 다른 사람도 파멸시키게 된다. 이렇듯 악인이 필연적으로 자멸하게 되는 것은 복수 또는 응징을 당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음모에 걸려서이다. 맥베스의 경우에도 겉보기에는 응징을 당한 것 같지만,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에 이미 내면적으로 수없이 많은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응징의 칼을 받을 때는 오히려 구원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셰익스피어 비극들에서 선인이 악인과 관련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선한 인간이 어떤 성격적 결함 때문에 악의 유혹을 받아 악을 행하게 되는 경우인데, 맥베스와 오셀로가 여기에 해당한다. 오셀로는 질투와 분노, 맥베스는 야망과 탐욕이라는 악의 속성 때문에 악을 행하게 된다. 둘째는 햄릿, 오필리어(Ophelia), 데스데모나(Desdemona), 코딜리어(Cordelia) 등4)의 경우처럼 순정하고 순결하며 선한 성격을 가졌지만, 우연히 악인과 밀접한 관계에 처하게 되는 경우이다. 그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불행에 휩쓸려 들어가며, 마치 종양의 곪은 부위를 도려낼 때 성한 살도 도려내지는 것과 같다.
모든 사회는 질서에 대한 관념이 있기 마련인데, 셰익스피어의 비극 역시도 당대 영국 사회의 질서의 개념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질서를 어지럽히는 어떤 힘이 다가올 때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위협을 느낀다. 그리고 질서가 일단 깨어지면 자연의 섭리는 변화를 일으키고 인간은 생리적 변조5)를 맞게 되며, 그 붕괴의 양상이 급박하고 강렬할수록 사회의 변혁 또한 크게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맥베스』역시 바로 이와 같은 질서의 파괴로 인해 일어나는 사회적 격변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 질서 체계에 대한 이러한 관념은 우주의 큰 세계(macrocosm)와 인간의 작은 세계(microcosm)6)가 상호 조응한다는 관념에 따른 것이었다. 따라서 살인은 대자연의 섭리와 질서에 반하는 죄이고 특히 왕을 시해하는 짓은 하느님이 지명한 지도자를 살해하는 것이라 여겼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는 반역음모의 유언비어가 횡행했는데, 『맥베스』에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들이 담겨 있다. 질서가 무너질 때 거기서 일어나는 일체의 부조화가 곧 비극적 사태를 유발시키는 것이요, 비극적 파멸은 무너진 질서를 다시 정상으로 돌리는 대가로 생기는 진통이라는 생각이 셰익스피어의 비극의 기본 사상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비극에서 질서의 파괴와 회복이라는 명제는 매우 뚜렷하게 드러난다. 『맥베스』에서는 바로 주인공이 악을 행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질서를 파괴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에는 스스로 파탄에 빠지는 동시에 질서가 회복된다. 여기서 질서회복이란 외면적인 것이나 단순히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대립구도에서 선이 악을 이긴다는 것이 아니라, 고차원적 의미의 도덕의 회복 또는 질서의 재정립을 말한다.
맹목적인 운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질서는 파괴되더라도 반드시 회복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필연적인 가정 때문에 관객은 비극의 결말에 대해서 의아해 하거나 반감을 가지는 일이 없다. 즉 셰익스피어의 비극들은 감정의 질서화 - 정화(淨化) - 를 실현할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덕의 재무장을 모색하고 있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질서에 순종하는 과정을 극화한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선과 악의 이항대립을 초극하여 인간완성이라는, 보다 차원 높은 경지를 제시한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위대성 가운데 또 하나는 비극적 종말이 어김없이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비극의 작용이란 낮은 도덕적 가치의 차원에서 높은 도덕적 가치의 세계로 승화해가는 데 있다. 그와 같은 비극적 종말은 악의 존재를 관객의 의식에 훨씬 더 리얼하게 각인시킨다. 인간은 크나큰 불행에 직면하게 될 때, 자기의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행복의 근원적 조건을 확신한다면 어떤 고난에 처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이것이 곧 비극을 보고 나서 느끼는 감정의 정화(淨化),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Catharsis)의 작용이다.
비극 『맥베스』
르네상스 시기에 대륙으로부터 새로운 문물과 사상이 영국에 물밀 듯이 유입되는데, 그에 따라 새로운 어휘도 많이 수입되고 또 만들어진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극은 말을 중시하는 풍조가 있었다. 그리고 르네상스의 시대적 경향 때문에 중세부터 있어온 선과 악의 개념 및 그 투쟁의 양상을 더욱 생생하게 전개시킬 수 있었는데, 『맥베스』는 당시의 영국인들이 공유했던 이런 경험을 바탕에 둔 것이라 하겠다.
『맥베스』는 스코틀랜드의 역사에서 취재한 작품이다. 주인공 맥베스는 국왕 덩컨(Duncan)의 사촌으로 귀족이며, 반란군을 진압하는 등 많은 전투에서 공적을 쌓은 훌륭한 장군이다. 인간성이 풍부하지만 연약한 성격에다 강렬한 시적 감수성을 지닌 그는 어느 날, 장차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리라는 마녀들의 예언을 듣고 엉뚱한 야망을 품는다. 그의 아내 역시 그에게 왕이 되라고 부추긴다.
그는 덩컨 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지만, 점점 많은 사람을 죽이는 폭군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맥베스 부부는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으로 공포와 불면의 나날을 보낸다. 마침내 부인은 몽유병의 발작으로 절벽에서 떨어져 죽고, 맥베스도 왕자 맬컴(Malcolm)과 함께 잉글랜드 지원군의 도움을 받아 쳐들어 온 맥더프(Macduff)의 칼을 맞고 죽는다. 권력의 욕망이 비극적 종말을 불러온 것이다. 이제 정당한 왕위계승자인 왕자 맬컴이 왕위에 오르고 스코틀랜드는 질서가 회복되어 안정을 되찾는 등 모든 비정상적인 것들이 바로 잡혀 제자리를 찾게 된다.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 비교적 짧은 작품이며, 사건이 신속하게 집약적으로 전개되는 특성이 있다. 작품의 구성을 보면 부차적 사건(sub-plot)이 없고 플롯은 오로지 주인공 맥베스에게 집중되고 있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의 주의는 맥베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극은 주인공 한 사람에 대한 분석 이상의 그 무엇을 제공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것은 셰익스피어가 오늘날의 클로즈업과 원거리 촬영에서 볼 수 있는 영화적 기법을 써서 주인공 맥베스의 행동에 폭넓은 시점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맥베스의 왕위 찬탈 과정에서 보는 것처럼 마녀들의 예언이 곧장 현실로 이루어지는 등 사건이 속도감 있게 집약적으로 전개되어 관객에게 강렬하고 즉각적인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셰익스피어 비극의 구조는 3부로 되어 있다. 제1부는 극의 갈등을 일으킬 사건을 설명하는 부분인데, 제시부분(Exposition)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짧은 소동과 혼잡이 일어나고 주인공은 화제에만 올라 관객을 긴장시킨다. 제2부는 갈등의 시초·전개·기복을 취급하는데 이것을 갈등부분(Conflict)이라 한다. 여기에서는 사건이 생장하고 절정(Climax)을 지나 전환점에 달한다. 제3부는 갈등의 결말이다. 여기에 이르면 흔히 전쟁이 벌어지고 사건이 자연스런 파국적 결말을 맞게 된다. 이것을 대단원(Catastrophe)이라 한다. 『맥베스』는 이러한 전형적인 셰익스피어 비극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악의 부추김과 질서의 회복
연극이 시작하는 첫 장면에서 번개와 벼락이 치는 궂은 날 저녁에 등장하는 세 마녀는 어둠의 세계와 정상적인 세계를 서로 뒤바꾸어 놓는다. 안개가 자욱한 광야와 껌껌한 동굴 앞에서 맥베스 앞에 나타난 세 마녀는 도덕적 모호성과 혼란을 예고하고 있다. 셰익스피어 시대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마녀의 존재와 그들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이들 세 마녀를 악마의 대리자로 해석한다.
그러나 현대 관객들에게는 우리 곁을 맴도는 인간의 본원적 욕망과 공포가 투영된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제2장에는 충직한 장군 맥베스의 덕성과 영웅적인 면모가 묘사되고 있다. 이 장면에서 관객은 맥베스에게 관심과 호의를 품게 되고 그럼으로써 바로 자기 자신을 맥베스와 동일시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관객은 맥베스가 마녀들의 예언을 들은 후 왕이 되려고 야망을 불태우는 것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죄의 유혹에 빠질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왕이 될 것이라는 마녀들의 예언이 적힌 맥베스의 편지를 읽은 맥베스 부인(Lady Macbeth)은 벌써 덩컨 왕을 시해할 마음의 준비를 한다. 그녀는 남편이 주저하는 빛을 보이자 아녀자처럼 군다고 비난하며, 마음이 너무 나약하여 야망을 이룰 수 없다고 단정한다. 이처럼 전통적인 관념상 남녀의 역할이 전도된 것 또한 질서의 교란, 즉 악의 현시이다. 마치 성서의 창세기 3장에서 뱀의 달콤한 유혹에 빠진 아내 하와가 남편 아담에게 선악과를 권하는 대목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맥베스 부부는 아내의 말에 잘 설득되는 현대의 남편과 드세진 아내의 조상이기도 하다.
셰익스피어가 몸담았던 글로브 극장의 그림.
셰익스피어가 몸담았던 글로브 극장의 그림.
덩컨 왕의 시해 직후에 등장한 맥베스의 모습은 극도로 흥분된 상태인데, 살인에 따르는 죄의식과 긴장감은 관객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대낮에 어둠이 세상을 뒤덮고 매가 올빼미에게 채어 죽으며 왕의 말이 마구간을 뛰쳐나와 사람에게 덤벼들었다는 등의 자연계의 질서 혼란은 곧 인간사회의 질서 교란과 서로 병치되고 있다.
게다가 맥베스는 왕위에 오른 후 마음의 안정을 잃어버린 채 점점 폭군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동료장군 뱅코우(Banquo)의 후손이 왕이 되리라는 마녀들의 예언이 있자 자객을 보내 뱅코우를 살해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어느 날 중신들을 초대하여 만찬을 베푼 자리에 뱅코우의 유령이 나타나는데 그 유령은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맥베스에게만 보인다. 이는 맥베스의 사악함을 상기시켜주는 동시에 그가 저지른 범죄가 발각될까봐 전전긍긍하는 공포심을 외형화한 것이다. 그는 궁지를 벗어날 길을 찾지 못한 채 가혹한 폭군이 되어가고 그만큼 반대 세력이 늘어만 간다.
4막 1장에서 맥베스가 자신의 장래에 대하여 묻자, 마녀들은 세 유령을 보내 그의 물음에 상징적으로 답한다. "맥더프를 조심하라"는 제1유령의 '무장한 머리'는 죽음을 맞는 맥베스를 예언하고,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자는 그 누구도 맥베스를 해치지 못할 것"이라는 '피투성이 아이'는 어릴 때의 맥더프를 상징하며, "버남(Burnam)숲이 던시네인(Dunsinane) 성 앞에 올 때까지 맥베스는 안전하리라"고 말한 '손에 나무를 든 왕관 쓴 아이'는 궁극적으로 젊은 맬컴 왕자가 던시네인 성까지 쳐들어 올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세 마녀의 예언은 문자 그대로의 뜻과 그 속에 담긴 본 뜻이 다르다. 그러나 맥베스는 이처럼 모호한 언어를 농하고 있는 악마의 예언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싶은 유혹을 떨칠 수가 없다. 마음에 드는 달콤한 예언만을 받아들이고 불리한 것은 관심도 두지 않는다. 이처럼 무슨 일이든 자기에게 유리하게만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 점쟁이에게 점치러 가서 언제나 좋은 예언만을 골라 그것에 매달리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현상이다. 여기의 세 마녀는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상징이며, 그에 대응하는 맥베스의 행동은 욕망의 달콤한 유혹을 물리치기 어려운 인간 심리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망명지인 잉글랜드의 왕궁에서 맥더프는 자기 가족이 맥베스에게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맬컴 왕자에게 맥베스를 제거하여 폭압정치를 종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맥베스에게 최후의 공격을 가하기 전에 먼저 도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 쪽에는 맥더프와 왕자 맬컴, 다른 한 쪽에는 맥베스, 이들 두 부류의 등장인물은 각각 선과 악을 대표하고 있으며 선이 악을 제압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밝은 미래가 놓여지리라는 기대를 갖게 해주는 것이다.
결국 맥베스 부부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지만, 관객에게는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킨다. 맥베스는 정치적으로 고립되어가며, 양심의 가책 때문에 몽유병에 걸린 부인은, "아직도 피비린내가 난다. 아라비아의 모든 향수로도 이 작은 손 하나를 향기롭게 할 수 없겠구나"하고 끊임없이 손을 문지르면서 독백을 읊조린다. 맥베스는 부인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에 완전히 기세가 꺾이게 되고, 버남 숲이 움직여 온다는 보고를 듣고는 마녀들의 예언이 자기에게 기만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인생은 아무 의미도 없는 백치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허무한 그림자라는 독백을 한다. 수수께끼 같은 마녀의 예언, "버남 숲이 던시네인 성까지 이동해 온다"는 것은 맬컴의 반란군이 버남 숲의 나뭇가지를 꺾어 위장한 모습이고,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자는 맥더프를 지칭하는데, 이는 맥더프가 어머니의 몸에서 보통의 인간처럼 태어난 것이 아니라 제왕절개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언어의 모호성에 의존한 극적 아이러니(dramatic irony)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맺는 말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들 가운데 햄릿과 맥베스는 비범한 상상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두 인물은 매우 상반되는 성격도 가지고 있는데, 햄릿은 자기 내면에서 충동을 해소해버리지만, 맥베스는 충동이 일자 곧 행동에 나선다.
이런 관점에서 맥베스의 성격을 살펴보자. 첫째, 그는 보통 인간보다 스케일이 큰 인물이지만 누구나가 곧 이해하고 찬양할 수 있는 자질인 용기와 명예심을 가지고 있다. 둘째, 그는 보통 인간보다 뛰어나지만 그것은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이다. 셋째, 그는 보통 인간에 비해 탁월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맥베스에게서 상상력은 양극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외부의 영향인 초자연적 암시에 쉽게 감응하는 동시에 내부에 잠재해 있는 양심에 대해서도 예민하다. 이런 인물은 달콤한 유혹에 빠지게 되면 스케일 큰 인물에 걸맞는 급격한 비극적 파멸에 이른다.
『맥베스』에서 마녀들과 맥베스 부인의 존재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지만 현대의 독자나 관객이 마녀의 존재를 믿기에는 곤란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마녀들의 역할을, 한 인간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갈등으로 본다면, 모든 인간의 내심에 존재하는 악의 속성이 현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맥베스 부인의 경우에는, 오늘날에도 부귀영화를 위하여 남편에게 부정한 수단을 강요하는 아내가 존재하는 만큼이나 실재적이다.
뱅코우의 살해와 그 유령이 나타나는 3막 4장 이후로 맥베스는 완전히 폭군으로 변하여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데, 표면적으로 보면 그것은 내면에 깃든 악의 속성이 더욱 강하게 표출되고 있음을 뜻하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은 그를 버리고 도망간다. 그 때문에 맥베스는 점점 생기를 잃고 허무와 염세에 빠진다.
작품 전체에 드리워진 어두운 분위기는 비극적 공포를 조성하는 효과를 자아내는데, 마녀들의 등장과 주인공의 살인, 질서의 파괴에 잇따르는 필연적인 결과들이 그러한 어두운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그리고 맥베스 부부의 고뇌에 찬 행동은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인간성이 풍부한 고귀한 인간이 불가항력적인 유혹에 끌리어 죄를 범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맥베스』는 고귀한 한 인간의 죄와 벌을 통하여 모든 인간이 그 내면에 공유하고 있는 보편적인 인간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맥베스』가 고전의 반열에 드는 이유도 이와 같이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맥베스는 분명 악한이다. 첫 장면에서 그가 왕이 되리라는 세 마녀의 예언대로 덩컨 왕을 시해할 생각을 할 때 이미 그의 내면의 탐욕이 드러난다. 그는 왕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때도 거침없이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덩컨 왕의 시해로부터 맥더프와의 최후의 결투에 이르기까지 그의 악행은 점점 더 늘어나며, 뱅코우와 맥더프의 처자를 살해하는 대목에서는 그의 잔인성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관객은 맥베스를 단순한 악한으로 보지 않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상상력이 강하고 암시에 민감한 맥베스는 죄를 범하려는 자신의 충동을 스스로 분석·검토하면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의식하는 자아와 행동하는 자아가 일치하지 않을 때, 그는 여러 가지 잡념에 시달리는 등 심리적 분열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와 같이 맥베스의 역할은 기괴한 악의 희화(戱畵)가 아니라, 악행을 저지른 위대한 한 인간이 심리적으로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그 의미가 있다. 따라서 관객은, 야망의 압박과 유혹에 반응하는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에 그에게서 연민의 정도 느끼게 되는 것이다.
2. 셰익스피어 시대의 관객은 일반적으로 마녀의 존재를 믿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세 마녀를 악마의 대리자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현대의 관객은 이미 마녀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녀의 역할이란 오늘날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닐까?
마녀의 모습은 극중에서도 추상적으로 나타난다. 즉 암시적인 존재일 뿐 극의 진행과는 무관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의 예언은 모호한 말장난으로 되어 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은 자'와 '버남 숲의 이동'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은 맥베스의 허영심을 폭로하는 말에 불과할 뿐 현실의 논리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관객에게 세 마녀의 존재는 인간의 본원적 욕망이 투사된 상징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3. 맥베스 부인은 남편이 아녀자 같이 겁 많고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야단치는 강심장의 여인이다. 야심 앞에 머뭇거리기보다는 차라리 젖먹이 아이도 떼어놓고 남편의 머리라도 쥐어박겠다고 할 정도다. 맥베스가 죄의식 때문에 공포에 질려 깜짝깜짝 놀라는 태도를 부녀자의 심약한 기질과 비슷한 것이라 볼 수는 없지만, 전통적인 관념으로 본다면 여인들을 연상시키는 정서적 감각을 암시하는 면이 있다. 이처럼 대조적인 성격으로 나타낸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맥베스 부부의 성적 기질이 뒤죽박죽이 되어 있음은 자연계 및 인간사회의 질서 교란을 암시하며 관객은 이러한 상황이 궁극적으로는 반전될 것을 예상하게 된다. 그렇다면 양성간의 평등이 보편화된 오늘날에도 이러한 극의 표현 양식이 호소력이 있겠는가 생각해보자.
추천할 만한 텍스트
『맥베스』,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역, 민음사, 2004.
각주
1) 엘리자베스 I세 여왕이 등극한 1558년에서 제임스 I세가 승하한 1625년에 이르는 기간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다른 말로 '르네상스 시대' 또는 '셰익스피어 시대'라고도 한다.
2) 소리는 같으나 뜻이 다른 말-동음이의어-을 가지고 말 재롱을 부리는 기법으로 셰익스피어는 그의 극에서 이를 재치 있게 잘 구사한다. 예를 들면 어떤 남자가 여자사공의 '배(船)'를 타면서 "당신의 '배(服)'를 탔으니 내가 당신 남편이요" 하였다. 건너편 언덕에 배가 닿자 내리는 그 남자에게 여자사공이 "내 배에서 나온 내 아들아 잘 가거라"하였다. 이 때 선박인 '배'와 사람의 '배'가 소리가 같은 것을 가지고 말 재롱을 부리는 것, 이러한 기법을 펀(pun)이라 한다.
3) 브래들리(1851~1935)는 옥스퍼드대학의 시학 교수로서, 자신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해 강의한 내용을 『셰익스피어 비극(Shakespearean Tragedy)』이란 단행본으로 발간하는 등 유명한 셰익스피어 연구가이다.
4) 오필리어는 『햄릿』에서 햄릿을 사랑한 여인인데 정신이상으로 물에 빠져 죽는다. 그리고 데스데모나는 『오셀로』에서 무어인 장군 오셀로의 아내로서 자신의 질투심 때문에 남편에게 교살된다. 또한 코딜리어는 『리어왕』에 나오는 늙은 리어왕의 막내딸이며 부친을 구하려다 오히려 사로잡혀 죽음을 당한다.
5) 이 시대에는 사람의 신체는 blood(혈액), phlegm(점액), choler(황담즙), melancholy(흑담즙)로 구성되어 있다하고 이를 4체액(cardinal humors)이라 하였다. 이런 체액의 배합 형편에 따라서 사람의 체질이나 성질이 정해지게 되며 이 배합의 비율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생리적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였다.
6) 셰익스피어는, 우주는 거대한 질서에 따라 운행된다고 보았다. 그 우주의 질서는 미시적 세계인 인간의 질서와도 서로 조응하게 되는데, 여기서 우주의 거대한 질서체계를 큰 세계(macrocosm), 그에 상응하는 인간의 질서체계를 작은 세계(microcosm)라 불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맥베스 [Macbeth] - 권력의 야망에 걸린 죄와 벌의 비극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2006.5.22,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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