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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구의 존재/ 정영희5
2. 지용이의 귀환/ 심규박2
3. 혼자 떠나 보니/ 김연미3
4. 비빔밥과 함께 하는 삶/ 양기석2
5. 버킷리스트/ 김옥수3
1. 친구의 존재/정영희5
1. 새벽근무를 하는 탓에 나는 늘 남들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한다. 휴식시간, 한 동료의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졌다. 주말에 30년 지기 친구들을 만난다고 했다.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온 친구들이라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문득 내게도 그런 친구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선뜻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2. 어릴 적에는 동네 친구들과 산으로 들로 다니며 온 동네를 누볐다. 숨바꼭질을 하고, 고무줄 놀이를 하고,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놀던 시절이었다. 분명 서로의 이름도 알고 누구네 집 아이인지도 알았을 텐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생각 나는 건 같이 몰려다니며 웃고 떠들고 장난치던 기억들이다. 그 기억은 지금도 나를 웃음짓게 만드는 따뜻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3. 집안 형편이 더 어려워지면서 졸업도 하지 못한 채 못하고 전학을 갔다. 그나마 알고 지내던 친구들과도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당시 나에게 친구란 같은 반에 있는 동급생 정도의 의미였다. 방과 후 함께 어울려 놀거나 속마음을 나누는 친구는 없었다. 학교와 집을 오가는 반복된 일상 속에서 우리 네 남매는 가족이자 친구가 되어 지냈다.
4.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무더운 여름밤, 같이 배드민턴을 치고 직접 만든 시원한 음료를 나누어 마시던 모습이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우리 집을 보며 동네 어른들은 말했다.
"저 집에는 무슨 좋은 일이 있길래 매일 웃음이 넘치노?"
그때는 또래 친구들이 없어도 우리는 늘 즐거웠다.
5. 그런 시간이 영원할 줄 알았다. 동생들이 친구를 만나러 나가고 각자의 삶을 살기 시작하면서 빈자리가 느껴졌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많이 의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친구를 만나러 간다며 들뜬 표정으로 집을 나서는 동생들을 보며 보면 부럽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모두 제 갈 길을 가는데 나만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6. 중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의 산업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했던 시간이었다. 다양한 지역에서 온 친구들과 선후배들 덕분에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지금도 가끔 떠오른다. 사감 선생님 방에 다 같이 모여 '전설의 고향'을 보던 밤이, 무서운 장면이 나올 때마다 눈을 가리고 소리를 지르며 서로를 붙잡고 웃었던 기억은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시절 함께 했던 사람들 모두가 나의 친구였다.
7. 세월이 흘러 친구들은 하나 둘 고향으로 돌아갔고 결혼 소식도 들려왔다. 부산에서 같이 생활하던 친구들이 만나자는 연락을 해 왔다. 오랫만에 봐서 그런지 서먹했다. 대화의 흐름에 동참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그들 중 반 이상이 어린 시절 한 동네에서 같이 자란 친구들이었다. 오랜 친구란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부러움을 느꼈다.
8. 자취 생활을 할 그 무렵, 인터넷을 할 수 있는 PC방이 생겨났다. 외로움과 호기심에 이끌려 찾았다. 채팅을 시작하며 또래 모임에도 가입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같은 연도에 태어난 친구들의 모임이라고 생각했다.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만났다. 다른 지역에서 참석한 친구들과 인연도 쌓았고 그렇게 만난 동갑내기 친구와 결혼도 하게 되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고 다양한 정보와 인맥도 만들어갔다. 만남 자체는 즐거웠지만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반복적인 모습에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사람은 많았지만 마음을 나눌 친구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9. 따뜻한 마음을 가진 친구 같은 가족을 갖고 싶었다. 수직적인 관계가 아닌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배려했으면 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높고 단단했다. 관계는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의 모난 부분을 하나씩 다듬고 맞춰가야 한다는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10. 이후에도 수많은 모임에 가입을 했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고 다양한 정보와 인맥도 만들어갔다. 만남 자체는 즐거웠지만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반복적인 모습에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많은 모임이 생겼다가 없어지기도 다반사였다. 사람은 많았지만 마음을 나눌 친구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11. 그러던 중 2년 전 모임에서 지금의 친구를 알게 됐다. 처음에는 강한 인상과 거침없는 입담에 가까워지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모임이 있던 날,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 주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연락처를 주고 받았고 한참이 지나서 연락이 왔다.
"중고거래 앱인 당근에서 모임을 만들려고 하는데 너도 꼭 가입해라 친구야!"
그 한마디가 가슴 어느 언저리에 깊이 새겨져버렸다. 어쩌면 나는 그 말을 오랫동안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12. 그 친구는 나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졌다. 솔직하고 당당하며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는다. 나에게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받은 경험이 있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13. 친할수록 지켜야 할 선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자로 안부를 묻고 통화를 한다. 상대의 시간을 존중하고 배려하기 위함이다. 힘든 일이 있을 때도, 좋은 일이 생겼을 때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그때마다 깨닫는다. 친구란 늘 생각나는 존재라는 것을.
14. 오랜 세월을 함께한 사이는 아니다. 하지만 지난 2년은 마치 20년을 함께 한 시간처럼 느껴진다. 이제는 직장 동료의 30년 지기 친구들이 부럽지 않다. 나에게도 앞으로의 시간을 함께 걸어갈 소중한 벗이 생겼기 때문이다.
15. 인생을 살아가면서 친구란 얼마나 오래 알았느냐보다 얼마나 깊이 마음을 나누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늦게 만났지만 오래 함께하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친구가 아닐까.
늘 생각나는 친구야. 우리 건강하게 오래 오래 함께 하자. 내가 친구에게 전하고 싶은 진심 어린 마음이다.
2. 지용이의 귀환/심규박2
1. 08학번 지용이는 특별한 학생이 아니었다. 그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랐지만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에도 반듯한 가르침을 받았는지 밝고 예의 발랐으며, 다. 학과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고, 사람들의 눈에 띄는 행동을 한 적도 없었다.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가기 위해 휴학했고 해병대에 지원했다. 캠퍼스에 빨간 단풍이 들 무렵 포항으로 입대한다며 인사를 왔고, 나는 건강히 다녀오라고 격려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이 그러하듯 그의 존재는 내 기억 속에서 조금씩 희미해졌다.
2. 그러던 중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났다. TV 화면 속에서 불길이 치솟고 포성이 울렸다. 북한의 도발로 연평도는 불바다가 되었고, 우리 장병들은 즉각 대응 사격에 나섰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현장에 지용이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던 국토가 불타는 모습을 뒤로한 채 나라를 지키기 위해 포탄이 날아오는 쪽을 향해 포를 쏘고 또 쏘았다. 죽음을 각오한 전투였다.
포격전이 끝난 뒤 지용이는 부상을 입고 국군통합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대통령이 병문안을 다녀갔고, 방문했고 언론은 그의 용맹함과 애국심을 칭찬했다. 사람들은 그를 영웅이라 불렀고, 그는 국가를 위해 싸운 자랑스러운 용사로 기억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그에게 훈장만 남긴 것이 아니었다.
3. 2011년 봄, 학교로 돌아온 이듬해 봄, 복학한 지용이는 예전의 지용이가 아니었다. 대통령의 격려도, 국민의 박수도 그의 가슴속 상처까지 치유해 주지는 못했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혼자 있으면 불안해했다. 술을 마시는 날이 고 자신을 방에 가두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날에는 술에 취해 갑자기 침대 위에 엎드린 채 입으로 총소리를 내며 손가락 총으로 어딘가를 향해 마구 쏘았다. 친구들이 찾아가도 울면서 문고리를 잡고 열어주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혼잣말을 했고, 전사하거나 함께 부상 당했던 전우들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4. 어느 날 지용이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교수님, 우리 지용이 좀 살려 주세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울음소리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지용이의 상태를 물어보니 늘 머리가 아프다며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헛소리를 한다고 했다. 집 가까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차도가 없다고 했다.
5. 나는 큰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라고 권했다.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으니 치료비 걱정은 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뜻밖이었다. 아직 행정절차가 끝나지 않아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지 않았으며 그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화가 났다. 전 국민이 그가 싸우는 모습을 TV를 통해 보았다. 대통령까지 병문안을 다녀갔다. 그런데 정작 치료가 절실한 순간에는 서류 절차가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충분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6. 나는 재직 중인 나와 지용이가 소속된 대학의 학교의 부속병원으로 지용이를 데리고 갔다. 병원장을 만나 사정을 설명하며 가정형편이 어려우니 무료 진료를 부탁했다. 규정상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지만, 병원장은 교직원 복지 혜택 기준을 적용해 치료비의 절반을 감면해 주겠다고 했다. 고마운 일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대학병원 정신과 치료비는 여전히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7. 나는 할 수 있는 곳마다 전화를 걸었다.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는 고등학교 후배에게도 동문에게도 연락했고, 언론사에 근무하는 지인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나라를 지키다 다친 청년이 왜 이런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지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8. 그 사이에 지용이의 병은 점점 깊어 갔고 결국 휴학을 했다. 그 후에도 나는 가끔 어머니께 전화를 드려 지용이의 안부를 물었다. 몇 달이 지나 국가유공자 지정이 완료되었고, 큰 대학병원에서 본격적인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제야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이 되었다.
9. 다음 해 지용이는 다시 복학했고 다시 사회와 어울리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후배들에게 웃음을 보였고 수줍은 모습으로 연구실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가 목숨을 걸고 했던 장한 일에 대해서는 입에 담지 않았다. 4학년에 올라가자 그는 국가의 지원으로 ‘풍산금속’ 방위산업체에 취업하면서 또 한 번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일하며 학교에 다니기 어려웠던지 세 번째 휴학을 했다.
10. 몇 년 뒤 보훈처로부터 국가유공자의 학업에 편의를 제공할 수 있다는 공문이 학교에 도착했다. 학교와 협의한 끝에 휴학중이던 지용이가 학업을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되었다. 오랜 시간 멈춰 있던 그의 대학 생활도 비로소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11. 졸업 보고서 발표 날이었다. 연구실 문이 열리고 지용이가 들어왔다. 곁에는 아내가 있었고, 품에는 어린 아들이 안겨 있었다.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연평도의 포화 속에서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스물한 살 청년이 어느새 한 아이의 아버지가 가정의 가장이 되어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그에게 아들과 함께 강의실에 들어오라고 했다. 그리고 전공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부탁했다. 연평도에서 있었던 일, 그 후 자신이 견뎌야 했던 시간들, 그리고 지금의 삶에 대해서.
12. 후배들은 숨죽여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발표하는 지용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는 전쟁도, 국민적 영웅도, 아픈 마음으로 그를 걱정하던 사람들도 없었다. 그저 밝고 예의 바르며 친구들과 잘 어울리던 08학번 지용이가 서 있을 뿐이었다.
13. 전쟁은 한 청년의 평탄한 삶을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픔이 그의 삶을 삶의 끝내지는 못했다. 전부가 아니었다. 그날 나는 내가 만든 작은 연못을 떠나 거친 바다를 건너온 한 제자의 청년의 귀환을 조용히 축하하고 있었다.
3. 혼자 떠나 보니/김연미 3
1. 내리는 듯 아닌 듯한 비는 내 마음 같기도 하다. 비 때문인지 공기가 차갑게 닿았다.
2. 2월에 예매한 미술관 티켓은 입장권의 마감일이 다 되어갈 때까지 외면받다가 드디어 제 본분을 다하게 되었다. 전날밤까지도 썩 내키지 않았다. 다가왔다. 취소할까, 갈까. 몇 번을 망설였다. 혼자 하는 장거리 1박 2일의 외출은 처음이다. 기껏해야 대구에 있는 친정을 오가는 정도였다. 이제는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고 단단히 마음먹었지만 쉽지 않았다. 남편의 끼니도 걱정이 되었고 취업 준비로 바쁜 딸아이도 마음에 걸렸다. 내가 1박 2일 집을 비워도 되는 걸까.
3. 연휴가 끼어 서울행 기차표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어렵게 새벽 5시 30분 차를 예매했다. 어린아이도 아닌데 밥 못 챙겨 먹겠냐며 남편은 울산역까지 데려다주었다.
“조심히 다녀와. 재밌게 놀다 와.”
은근히 붙잡아 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은 내 속도 모르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4. 새벽의 역은 생각보다 붐볐다. 캐리어를 끄는 사람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옷과 모자를 맞춰 입은 노부부, 손을 꼭 잡은 연인들. 주변은 즐거워 보이는데 나만 다른 공간에 있는 듯했다. 환한 풍경 속에 혼자 덩그러니 놓인 이방인 같았다.
5. 기차에 올라 자리에 앉았다. 긴장했는지 몸이 잔뜩 굳어 있었다. 하지만 불편함도 잠시, 새벽부터 서둘러 나온 탓인지 금세 잠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 기차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고, 나 역시 앞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6. 서울역에 도착한 뒤 가장 먼저 별마당도서관으로 향했다. 늘 가 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생각보다는 평범하게 느껴졌다. 울산도서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이 들었다.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은 많았지만 책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도서관이라기보다 거대한 관광지에 가까웠다. 기대는 종종 현실보다 한 발 앞서 달려가는 법인지도 모른다.
7. 더현대 서울 전시회장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많았고 전시장은 붐볐다. 그림 앞에 서서 천천히 감상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그림을 보며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좋은 그림을 보는 일에는 감상을 나누는 즐거움도 포함되어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있다.
8. 종로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광화문 광장을 지나게 되었다. 광장 한쪽에서는 집회가 열리고 있었고, 세종문화회관 앞에는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관광객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신기한 풍경이었다. 투쟁과 문화, 관광과 일상이 한 공간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공존하고 있었다.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세상은 늘 하나의 모습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9. 북촌의 숙소에 짐을 풀고 근처 도서관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건물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곳곳에 꽃이 피어 있었다. 도서관이라기보다 오래된 공원의 산책길 같았다. 혼자 걷는 시간이 제법 좋았다. 누구에게 맞출 필요도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 상의할 필요도 없었다. 숙소에 돌아와 누웠을 때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별것 아닌 안부 전화였지만 괜히 반가웠다.
10. 다음 이튿날 아침, 북촌 한옥마을을 걸었다. 아직 단체 관광객들이 들어오기 전이라 마을은 조용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기와지붕들은 아름다웠고 골목마다 여유가 흘렀다. 북촌동양문화박물관 전망대에 올라 한옥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참 좋은 풍경이었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이 풍경을 함께 볼 사람이 곁에 없다는 것이. 몇 시간이나 기다려 먹은 수제비와 에그타르트를 먹을 때도 남편이 생각났다. ‘이건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인데.’
11. 좋은 것을 보아도, 맛있는 것을 먹어도 자꾸만 가족 생각이 났다. 그토록 바라던 혼자 여행이었지만 생각만큼 자유롭지는 않았다. 나는 그동안 혼자 여행을 다니고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사람들이 멋져 보였다. 어쩌면 그런 모습이 진짜 독립이라고 생각했고 동경했다. 하지만 북촌의 골목을 걷고, 전시장의 그림 앞에 서고, 낯선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알게 되었다. 나는 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좋은 것을 보면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이었다.
12.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올 때와는 다른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떠날 때는 혼자라는 사실이 낯설었는데,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은 이상하게도 든든했다. 울산역에 도착하니 남편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겨우 하루였는데도 반가웠다. 문득 떠나는 날의 어제의 내가 생각났다. 혼자 여행을 통해 무언가를 얻어 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 하지만 내가 얻은 것은 거창한 깨달음이 아니었다. 좋은 그림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함께 오고 싶다고 생각되는 사람.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문득 생각나는 사람. 그 사람이 있다는 것.
13. 역을 나서자 떠날 때 보았던 것처럼 비가 내리는 듯 말 듯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남편의 차에 올라탔다. 하루 동안 비워 두었던 자리가 다시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4. 비빔밥과 함께 하는 삶/양기석2 나의 교직 생활. 나의 삶과 비빕밥은 다르다.
교직생활은 시간의 흐름은 통시적이지만 비빔밥은 어울리지 않는다. 비빔밥만 빼면 된다.
1. 유월 하순이 되자 온갖 푸성귀들이 우리집 앞 텃밭에 그득하다. 상추, 깻잎, 머위, 전구지와 방아 잎 등을 따서 뱐찬으로 한다. 된장국에 넣어 끓인다. 그리고 큰 양푼이 그릇에 밥과 고추장을 넣고 참기름을 듬뿍 곁들여 비빔밥을 만들어 먹는다. 입맛이 당기지 않거나 반찬이 별로일 때는 그보다 좋을 수 없는 한 끼의 밥상이다. 별다른 요리 레시피도 필요치 않고 간만 잘 맞추면 된다. 좋아하는 반찬을 넣거나 채소를 바꾸어서 다른 맛을 내어도 좋다. 영양가가 조금 빈약하다고 생각되면 계란 후라이를 만들어 비빔밥 위에 얹기만 하면 된다. 반찬도 거의 들지 않으니 식사 후에는 설겆이가 수월하다.
2. 스스로 밥을 해먹기 시작한 것은 갓 스물 살이 되던 대학교 신입생 시절이었다. 당시에 가난한 집안 형편에 하숙은 못하고 시내 변두리에 방을 구해서 자취를 했다. 쌀을 씻은 뜨물에 된장을 풀어서 깍두기 김치의 무와 멸치를 넣은 냄비를 석유곤로에 올려 국을 끓였다. 다시 밥을 해서 그릇에 퍼놓고 솥에 눌러 붙어 있는 누룽지에 물을 부어서 끓여 숭늉까지 마시고 나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3. 주말이 가까워지고 식량이 떨어질 무렵이면 으레 남은 김치 조각과 국물에 밥을 넣고 비벼서 먹었다. 요리라기 보다는 남은 음식 재료를 총동원하여 만든 생존형 음식이었다. 교대를 졸업한 후 시골학교에 교사로 발령을 받고도 한동안 비빔밥 과 만들어서 먹었다. 산간 오지 학교에서 근무를 할 때 하숙을 못하니 식사를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4. 나의 학교생활도 돌이켜보면 비빔밥과 함께 한 삶이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교사는 전 학년 모든 과목을 가르쳐야 했다. 예체능은 물론 특별활동까지 망라했었다. 음식 요리로 비유하면 비빔밥이었다. 교재연구도 하고 여러 직무연수도 받으면서 학생지도에 임하게 되었다. 여러 해를 지나면서 중견교사를 거치면서 나름대로 교직생활에 자부심을 가지고 지내면서 정년까지 무사히 마무리를 하였다.
5. 교직 생활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외에 각자 부서별로 업무를 맡는다. 젊은 시절에는 새 학년도가 되면 수업시수가 많은 고학년에, 업무도 새롭게 맡아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나 자신도 그러한 생활이 고생은 되었으나 나중에는 학교 업무를 두루 섭렵할 수 있어서 학생지도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마치 여러 반찬을 잘 만들어서 비빕밥 재료를 쓰듯이 교사도 여러 분야에서 두루 가르치면서 일을 하다 보면 변신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학년 담임.
6. 초등교사는 전 교과를 가르치니 교직연수도 폭 넓게 해야 했다. 중등처럼 전공과목이 없긴 해도 어떤 분야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평소에는 원격연수와 방학 때는 출석연수를 해야 했다. 여러 교과연수 외에도 교육학, 컴퓨터, 영어, 환경, 등 그 시대의 요구에 따라 중요시 되는 다양한 분야에 이르렀다. 다양한 연수.
7. 매년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방학을 보내고, 다시 만나면 신체가 폭발적으로 자라면서 내적으로도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을 보면서 자극을 받고 나 자신도 더 성장하고 싶었다. 83년에 방송대학교 경영학과에 3학년에 편입을 하게 되었다. 초등교육과에 가고 싶었으나 선배들부터 입학한다는 방송대 방침으로 인하여 생소한 경영학과 공부를 한다고 애를 먹기도 했다. 88년에는 방송대 중어중문학과에 다시 편입을 하게 되었다. 교사로서 필요한 인문학 공부를 위해서 동양의 고전을 공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양한 학과 공부.
8. 40세가 되던 해 그 동안 미루어 왔던 교육대학원에 상담교육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늘 가르치면서 배우는 이른바 교학상장(敎學相長)을 하려는 자세를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학위도 다양하게 받다보니 여러 반찬으로 알록달록한 비빔밥처럼 여겨지는 공부를 한 셈이었다.
9. 30여년의 교사생활을 할 즈음 마침내 교감으로 승진을 하게 되었다. 책임은 늘었지만 업무 외에 수업이 없으니 평소 관심이 있던 책을 볼 수 있었다. 젊은 교사 때 즐겨하던 영어와 컴퓨터 분야 대신 한국사와 한자 책을 잡기 시작하였다. 여러번 시험에 응시한 후 국가공인 한국사능력검정 1급, 한자자격검정3급과 2급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10. 학교에서 관리직은 다양한 분야에서 통찰력을 요구하였다. 학생, 교직원, 학부모 외에 학교를 드나드는 사람들을 접견하면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학교경영에 반영하였다. 특히 최고 경영자인 학교장이 되고 나서는 교내 안전 사고와 학교폭력을 방지하여 민원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였다. 서로 갈등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색의 반찬이 비빔밥이 되듯이 학교 구성원 전체가 조화를 이루어 서로의 갈등은 풀고 통합할수 있도록 이끌었다.
11. 이제 퇴직을 한 지도 6년이 되었다. 전원생활을 하면서 관심분야도 많이 바뀌었다. 밭농사, 정원 가꾸기와 더불어 집 손보기이다. 요즘은 농작물은 심어서 재배하고 잡초는 뽑아내는 일을 하고 있다. 매일 풀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때론 너무 일만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즈음에는 향교에 가서 옛 성현의 말씀도 듣고 있다.
12. 욕심인지 모르지만 한 가지 일만 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하는 삶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때론 몸과 마음이 힘들지만 오히려 그러한 삶이 험난한 세상을 버티게 한다. 조금씩 이루어가는 과정을 즐기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간다. 내일은 또 어떤 비빔밥을 먹을지 삶이 될지 모른다.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부담없이 해먹을 것이다. 그리하여 앞으로의 내 삶도 오색 무지개처럼 다양하게 수를 놓고 싶다.
5. 버킷리스트 /김옥수 3
서두에 전재 조건이 너무 많다.
1. 유투브로 해리슨 길거트를 만났다. 그는 횡문근육종이라는 말기암 선고를 받고 버킷리스트 행하기를 선택했다. 친구들과 동생의 도움으로 18세다운 버킷리스트 8개를 모두 이루고, 입원한 지 일주일 만에 웃는 얼굴로 모두에게 안녕을 고했다. 기계의 도움으로 가쁜 숨을 내쉬며,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선명하게 내 뇌리 속에 남았다.
2. 그는 조금 더 연명하기 위해 병원을 선택하지 않았다. 삶의 길이를 늘이기보다 남은 삶의 깊이를 채웠다. 죽음을 대하는 그의 태도, 아들과 형을 지지하고 지켜보는 가족들도 경이로웠다. 그가 떠난 후, 동생이 전한 감사인사는 슬프지만 따뜻한 여운으로 남았다.
3. 분석 화학자에 의하면,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원소는 흙의 원소와 같다. 사후, 인간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생명 생태계 순환의 이치인 셈이다. 육체는 가루가 되어 사라지더라도 그 원소는 소멸되지 않는다.
4. 영혼의 존재를 믿는 나도 죽음을 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내게 죽음이란, 수십 년 간 쓰던 낡은 옷 곧 육체를 벗고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 유전자를 이어받은 자손들은 물론이거니와 관계를 맺고 함께 했던 사람들이 있는 한 그들의 기억 속에서도 존재할 것이다.
5. 언제 떠나도 아쉽지 않은 나이지만, 지금부터라도 할 수 있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버킷리스트를 적어본다. 죽음을 앞두고 급하게 채워 넣을 숙제가 아니라, 선물 같은 남은 날들을 어떻게 가장 나답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다짐이다.
6. 해리슨은 8개나 되었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5개를 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재주가 모자라 이루기 힘든 일, 여건 상 불가능한 것은 걸러낸다. 지금도 가능하고, 잘 할 수 있는 일, 마지막 때까지 보람으로 남을 일을 생각하니 한 가지로 축소된다.
7. 어느 날,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으로 4년 동안 함께 했던 활동하는 분이 뜬금없이, “위원님이 선도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맡아주면 으면 참 좋을텐데요.” 했다. “맡겨만 주면 하죠.” 했더니 반색했다. 공모사업을 안내해 주었다.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아직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것이 반갑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최저시급에도 미치지 않는 수고비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내 버킷리스트를 이룰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되었다. .프로그램 공모가 시작되자마자 신청서를 넣었고, 선정되었다.
8. 유럽 크루즈 여행을 가려고 넣어둔 예금부터 찾았다. 장소를 구하는 일부터 실내 인테리어 공사, 교육기자재를 구비하는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필요한 분들이 연결되었다. 프로그램 공모가 시작되자마자 신청서를 넣었고, 선정되었다.
9. 친구들은 나더러 또 미친 짓을 한다고들 한다. 일이 지겹지도 않느냐며, 은퇴자답게 여유롭게 살라 한다. 했다. 그들이 보기에 나의 버킷리스트는 미친 짓에 불과하다. 크루즈 여행을 기획한 친구는 난리, 난리를 했다. 쳤다. 10대부터 함께 한 내 친구들은 해리슨의 친구들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10. 청소년들의 명단이 왔다. 그 명단 위에 오래 전에 만났던, 지금은 청장년이 되어 있을 아이들의 얼굴이 오버랩 된다. 되었다. 잘 살고 있겠지? 길 가에 있던 오토바이에 키가 꼽혀 있어 그냥 한 번 타 봤을 뿐이라던 녀석은, 그때 상담소 냉장고가 너무 낡았다며, 첫 월급을 타면 냉장고를 사다주겠다 했다. 한 번도 오지 않았다.
11. 삼촌의 성폭력을 피해 가출한 아이는 2년을 혼자 떠돌다 내게 왔었다. 프로그램으로 인연이 닿아, 내가 운영하던 쉼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말없이 베개를 안고 당직실로 들어와 내 옆에 눕던 그 아이는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12. 가슴이 두근거린다. 간식도 챙기고, 대상별로 기획해둔 프로그램을 다시 살핀다. 10시간 교육으로 무슨 큰 변화가 있으랴만, 나를 만나는 아이들 중, 일부라도 생각이 바뀌고 삶의 태도가 바뀐다면, 나의 버킷리스트는 성공이다. 나는 미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버킷리스트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13. 일하면서 놀고, 놀면서도 일하는 일 중독자인 내게는 일할 수 있는 날이 봄날이다. 내일은 내 것 아니니,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오늘, 버킷리스트를 이루어 가는 오늘이 봄날이다.
글이 짧아지면 프로그램을 넣으면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