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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가 친히 세우신 구원의 표징은 칠성사로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는데, 하느님의 자녀로 출생하는 입문성사격인 성세성사, 성령의 은혜로 성장하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견진성사,영혼의 양식이 되는 성체성사,
부부에게 은총을 베풀고 성화시키는 혼인(혼배)성사, 인간을 교육하고 성화시키는 신품성사, 죽음을 준비하는 병자성사, 그리고 오늘 우리가 배워야할 영혼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고해성사가 있다. 이러한 성사는 사랑이신 그리스도를 만나 그분의 사랑을 공급받아 사랑이 되기
위한(루가 6,28)가장 유효한 수단이며, 성사는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상봉이며, '구원의 대화'라 할수 있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창시자요 머리로 '하느님의 성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은 인류의 근본문제로 구원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필생의 목표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멸망할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세상을 단죄함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리하여 죄속에 사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고해성사를 세우셨으며, 이 성사안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의 신비가 드러나고,
이 성사를 통해서 죄를 없애는 그리스도의 심판이 행해진다. 우리들과 하느님, 우리들과 공동체의 변화하여 새로운 통일을 가져 오도록 하는 관계를 파괴하는 죄가 없어지며,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보조를 맞추지 않는 우리들의 삶이 심판인 것이다. 하느님이 먼저 죄의 용서와 자기 자신과의 교통의 수단을 마련해 주셨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과 화해시키셨다.
이것은 인간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뜻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을 의미 한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범하게 되고, 죄속에 있는 인간은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든 하느님과 화해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화해의 길은 고백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용서되고 화해가 이루어진다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성사를 기피하거나 준비없이 형식적이며 의무적인 고백을 한다면, 이 성사의 참 뜻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은총을 다시 부여해 주고 하느님과 다시 친교를 맺게 해주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깊은 사랑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 한다. 그래서 우리들의 신앙생활 안에 체험되는 성사임을 피부로 직접 느끼시고, 고해성사가 구원의 길로 우리를 이끄는 중요한 수단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적 사랑의 가장 위대한 표시중의 하나가 바로 고해성사이며, 이 성사는 하느님께 회심하고 돌아가는 화해의 성사라 할 수 있다.
선하게 창조된 인간은 자유를 악용하여 창조자이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고 죄를 범하게 되었고, 죄속에 사는 온 인류(로마 3,10 - 20)가 유죄판결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로마 5,16.18).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역사속에서 행하실 심판을 포기하시고, 당신 아드님을 보내 주셔서 죄를 단죄하시고, 모든 인간을 죄의 멍에에서 해방시키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죄의 용서뿐 아니라, 당신의 생명까지 아낌없이 주셨다.
그런데 인간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과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예배하고 섬겼습니다"(로마1,25)란 말씀과 같이 인간은 모든면에서 부족하고 불완전 하기 때문에, 비록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 생활하게 되지만, 사람은 하느님이 주신 자유를 항상 선용할 만큼 강하지 못하고 세속과 육신의 간교한 유혹에 빠져들어 은총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느님과의 친교가 파괴되고 단절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를 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이룩 하셨으며, 이러한 화해의 직무는 계속적으로 사도들을 통하여 당신 교회에 맡겨졌으며(2고린 5,18), 교회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며,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줌으로써 이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이러한 특수한 형태의 고해성사를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것이다.
고해성사란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로 하여금, 세례받은 이후에 지은 죄에 대하여 하느님께 그 용서를 받으며, 교회와 화해하도록 해주는 성사이며 그리스도 신자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용서의 표징이라 할 수 있다.
고해성사는 세례성사와 마찬가지로 죽은 이의 성사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영적으로 죄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은총의 지위를 잃어 버렸으므로, 이 성사를 받음으로써 다시 은총의 상태로 회복 되기 때문이다.
인류를 교회로 불러 모아 구원하시고자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인간은 세례성사를 통하여 원죄와 본죄의 사함을 받고 교회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탄생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나약함은 세례 후에도 죄를 범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처지를 고려하여, 성서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사죄권을 가지셨고(마태 9,1 - 8), 이 권한을 교회의 지도자들인 열두 사도 들에게 주셨다(마태 18,18).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를 받을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20,22-23)
라고 말씀하심으로 고백성사를 제정하셨다. 이는 지상에서 맺고 푸는 권한 행사의 효과가 하늘에서도 그대로 유효한 권한이요, 공동체를 해치는 행위를 한 형제들에게 행사하는 권한으로, 사도들의 이러한 사죄권은 다시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과 그 협조자인 사제들에게 계승됨 으로써, 지상에서 죄를 사하는 그리스도의 직무가 존속되고 있는 것이다.
사제는 고백성사를 통해서 인간의 어떤 권한으로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권리를 대행하는 것이다. 사제의 사죄권은 그리스도의 모든 권한을 받았고, 특히 사죄권의 행사는 인류구원과 직접 관계가 있는 것으로 교회는 그리스도가 주신 신품권 또는 사제권의 행사를 통하여 백성을 성화시키는 것이며, 여러 세기를 걸쳐 교회는 죄를 사하는 이 권한을 행사했으며, 그리스도께서 교회안에 계시어 계속적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는 믿음은 언제까지나 가톨릭 교회의 변치않는 신앙이다.
고백, 보속과 고해사제의 사죄이다.
이를 고해성사가 집행되는 순서에 비추어 볼 때, 참회자는먼저 양심적으로 성찰을 하여 지은 죄를 생각해내고, 그 죄를 깊이 참회하는 통회를 하며, 다시는 이같은 죄에 빠지지 않기로 결심하고 나서 고해사제 앞에서 고백을 한다. 그러면 고해사제는 사죄를 하고 보속을 정해준다. 참회자는 받은보속을 실천함으로써 고해성사가 이루어진다.
이 성사는 진실한 회심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죄인에게 은총을 회복시켜 주고, 하느님 사랑의 왕국에로 다시 받아들여 주는 것이다. 그런만큼 당사자에게는 당연히 뼈저린 후회를, 어둠의 세력을 끊어버리고 그리스도의 빛의 왕국에로 돌아서고자 하는 각오가 요구된다.
고해성사는 용서의 체험을, 잃었던 아들과 아버지와의 만남의 체험을 밝혀준다. 이렇게 하느님 앞에 겸손되이 엎드려서 이제까지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할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죄의 용서와 함께 은총을 풍성히 내려 주신다.
고해성사는 우리에게 진정한 통회와 아울러 죄의 고백으로써, 보다 더 확실한 죄의 사함을 실질적으로 받는 성사이며, 하느님과 이웃과의 우정을 회복하는 성사로서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가져오는 새 인간으로 창조되는 성사인 것이다.
그런데 죄는 자동적으로 용서되는 것이 아니다. 이 성사에서는 개인적인 행동이 절실히 요구되며, 죄를 완전히 용서받기 위해서는 통회,고백, 보속이 고해자에게 요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통회는 고해성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죄인은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면서 하느님께로 와야하는 것이고,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없이는 죄를 용서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대죄뿐 아니라 소죄까지도 합해서, 용서 받기를 원하는 모든 죄에 대하여 진정한 통회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통회는 완전한 통회(상등통회)라 할 수 있는데, 중죄에 떨어졌던 사람이라도 완전한 참회를 하면 즉시 하느님과의 친교를 맺을 수 있게 된다.
또한 통회가 불완전(하등통회)할 때가 있는데, 통회는 하고 있으나 인간은 본성적으로 부끄러워 하고, 두려워하고, 자기의 추함에 신경을 쓰는 기분으로 후회하는 통회는 비록 불완전하나, 우리 들과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준비시키므로 소중하다.
통회한 죄인은 고백을 함으로써, 죄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고 동시에 교회 공동체에 자기 자신의 회심과 결의로 화해를 하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하느님의 법에 의하면 조심스러운 양심 성찰을 해서 기억할 수 있는 모든 대죄뿐 아니라, 죄를 과중하게 만드는 사정도 사제에게 고백 해야 한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이다. 또한 한번 고백하여 사죄를 받은 대죄를 다시 고백할 필요는 없으며, 소죄는 고백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죄를 그리스도앞에 고백하면 죄를 피할 수 있는 은총을 받게 된다.
고백이 끝나면 보속이 그 죄과에 따라 주어지는데, 교회는 죄에 대한 현세적 벌이 있다고 믿고 있다. 이것의 의미는 의롭고 자비로운 하느님은 고해자가 자기 죄에 대하여 보상하기를 요구 하신다. 고해자가 보속행위로써 벌을 스스로 받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나 죽은 후 연옥에서 죄에 대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고해자는 사제가 요청하는 보속을 함으로써, 자기 죄에 대한 보상을 해서 고백행위를 완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 죄가 용서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에 의해 용서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은총에 보답하려고 하는 자로서 협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보속을 하는 신자는 벌 또는 응보로서가 아니라, 부르심 으로서 받아들임이 중요하다.
또한 고해성사에서도 그리스도의 은총은 볼 수 있는 표징를 통하여 내려지고 그 내려지는 은총의 상징은 전례행위 자체이고, 그 보이는 행위를 통하여 주님은 은총을 내려 주신다. 고해성사에도 다른 성사와 같이 그리스도의 깊은 뜻과 하느님의 용서가 몸짓과 언어와 표징에 의해 표현된다.
어떤 죄인이 자기 죄를 인정하고 그것을 고백하는것, 보속이 주어진다는 것, 그리고 작은 표징은 각 교회안에서, 복음의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상기하면서 행해짐은, 고백성사에서 표징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재판관이시다"(마태 25,31 - 46), "우리는 다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설 사람이다"(로마 14,10)란 말처럼 고백성사의 판결형식은,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생애의 순례를 통하여 계속적 판결문이 되고 있음을 상기시키며, 고백성사에 재판형식의 표징이 정당하다고 그리스도는 생각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고백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사용하신 말씀 "누구의 죄든지 당신이 용서해 주면"도 판결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고백성사가 인간의 재판과 닮은 요소가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양자의 차이는 근본적인 곳에 있는데, 즉 고백성사의 전체 목적은 일반법정에서 진행되는 것과는 정반대인 죄의 용서이며 최종적 판결을 하느님 손에 맡기고 있는 것이다.
성사적 정의는 언제나 자비이며, 따라서 죄인이 용서의 표시로서 정의를 열망하는 것이다.
성사적 사죄의 재판적 성질은, 이제 참회자에게 하느님의 용서가 주어졌음을 공적으로 그리고 유권적으로 선언함을 말하는 것이다. 성사적 재판은 최종적으로 죄악과 죽음의 세력을 넘어서, 예수의 최종적이며 완전한 승리인 최후의 심판을 희망한다.
이처럼 고백성사의 표징은 심판과 벌의 표징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 성사중에는 하느님의 심판, 즉 죄를 분명히함과 동시에 죄인을 구원하는 심판이 나타나는 것이다. 죄인인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용서가 필요로 한다.
예수님은 성사적 재판소를 용서와 화해의 방법으로 죄인 개개인을 치료하면서 부상당한 공동체 도 치료하는 방법으로 지정하신 것이다. 대죄로 하느님의 사랑을 못 받게 되었던 사람은 고백 성사로서 잃었던 생명을 회복하게 되고, 매일같이 자신의 나약함을 체험하면서 소죄에 떨어진 사람은 고백성사를 반복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기 위한 힘을 회복하게 된다.
이같이 고백성사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성사로, 이 성사가 주는 가장 커다란 선물과 기쁨은 다름아닌 평화의 말씀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성사의 참된 본질을 깨달아 하느님과 함께하는 생활이 되도록 이 성사를 충실히 받아야 한다.
고백성사는 우리의 죄에 대해 심판하고 벌을 주고자 함이 아니라, 오히려 양심의 평화를 가져오고 기쁨이 되어 우리들의 마음을 풍성하게 만드는 희망의 성사임을 알아보았다.
세례 후 영신적 상처를 고치기 위한 고백성사는 그리스도와의 우정을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평화의 성사'로, 혹은 죄에 죽었다가 다시 새롭게 살아난다는 뜻으로 '창조의 성사'라 할 수 있다. 죄는 생(生)의 한 사실로서 우리는 죄많은 세상에 살고 있기에 자신에게는 물론 타인에게 해로운 일을 저지르기 쉽다는 것을 삶의 현장에서 체험하고 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전체 공동체의 운명과 함께 하고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더욱 공동체적 구원을 원하시기에 병들고 죄많은 세상을 치유하시고 언제나 당신 품안으로 돌아서길 간절히 바라시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인간의 나약함을 아시는 그리스도께서 고백성사를 제정하심으로써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속하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화해시켜 주시고, 자녀로서의 모든 특권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하여 이 성사의 실천을 교회에 위임하신 것이다.
고백성사에 있어서 하느님과의 화해는 성령의 은총의 작용으로, 당신 우정의 품으로 다시 받아 들이시는 것을 의미하며, 이웃들과의 화해야말로 지상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죄인은 하느님의 용서와 화해에로의 부르심에 우리의 정신상태를 온전히 새롭게 하여, 새 방향 으로 옮겨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떠한 죄든지 대죄까지도 진실된 회개를 할 때는, 하느님은 조건없는 용서와 화해로 죄인인 우리를 받아 주신다.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시지 않는 죄란 없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용서의 선물을 고백성사에서는 보다 잘 드러내 주고 있으며, 이에 따른 단 하나의 전제 조건은 진실한 참회이다. 그러므로 참된 회심과 참회야말로 하느님과 교회와의 화해를 가져오는 가장 근본적인 핵심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 자신이 죄를 범할 때, 즉시 회개하고 그 분의 사랑에 참회로서 응답해야 한다.
고백성사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가져다 주는 성사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 성사를 통해 우리 자신이 무한한 평화를 느끼고 희망을 갖고 새롭게 변화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형식적이거나 교회법의 의무적 성사는 지양되어야 하고, 적극적으로 진심으로 참회하고 이 성사에 임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원받는 자의 기쁨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 성사는 이처럼 우리 신자생활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죄는 아직도 우리 세계에 존재하고 또 세계 종말까지 늘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죄의 면전에서 만족할 수 없고, 자기 생활과 세계에서 죄와 죽음의 세력을 극복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협력하도록 불리웠다. 그러므로 죄를 의식하는 자만이 구원의 선물의 위대함과 죽음까지도 마다 않는 헌신적 사랑을 통해서, 죄를 대항하여 싸우고 최종적으로 죄를 승리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소명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해 인간은 창조되었지만, 인간은 그 사랑을 배신했다.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역사는 인간의 범죄와 하느님의 용서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인간의 끊임없는 배신, 불순종, 불신앙에 하느님은 끊임없는 용서, 사랑, 자비로 응답해 주셨다.
이제는 인간을 끊임없이 구원에로 부르시는 이 은혜로운 시기에, 인간의 결단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구원의 초대에 응답할 것인지, 아니면 영원한 불안속에 그 초대를 거부할 것인지를 결단 해야 한다.
회개는 구원의 초대에 응답하는 첫 걸음이다. 회개의 필요성을 거부할 만큼 의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책임 또한 막중하고 하느님의 역사, 즉 우리의 인생을 화해시키고 재건하시며 전적으로 재창조하시고 쇄신하시려는 하느님의 의도에 당연히 적극적 으로 회개로써 응답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참회의 삶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의 인격적 참여여야 하며, 죄로부터의 점진적 해방이자 죄를 상대로 벌이는 투쟁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백성사에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생활로 임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는 일생동안 성사적 은총속에 살아가게 되는데, 성사를 통해서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밀착된 생활을 하게 되고 은총과 생명을 받게 된다.
이러한 성사중 자주 받으면 받을수록 좋은 것이 있는데 바로 고백성사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세례 후에 범한 심각한 죄에 대해 사함을 받고 용서를 얻을 수 있는 정상적 방법은 고백성사라 할 수 있다.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은총과 구원의 수단을 마음대로 무시하거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바로 죄의 용서를 위해서 제정하신 고백성사를 도외시한 채 용서를 받겠노라고 한다면, 이는 어리석고 주제넘는 태도이다.
우리는 흔히 고층 건물을 올라갈 경우가 생기면 엘리베이터나 에스칼레이터를 이용한다. 우리 자신도 이를 많이 이용했을 것이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과의 관계가 참으로 우호적일 경우, 즉 죄의 상태에 처해있지 않고 은총의 상태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을 때에는 고백성사의 필요성을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죄의 상태로 기우는 성향을 지니고 있기에 세례 후에도 죄를 범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우리가 죄를 범할 경우 우리는 은총을 잃게 되고 사탄의 간교한 유혹에 빠져 그의 세력하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고백성사를 통한 방법이다.
고백성사는 우리가 죄의 상태를 벗어나 하느님과 새로운 친교를 맺도록 해주는 것이기에 엘리베이터를 타는것과 같은 이치 이다. 한 계단 한 계단 정성스레 올라가다가도 순간의 죄로 말미암아 무너져 내린 상태에서 이를 회복시켜 주는 것은 고백성사를 통해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름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이 성사는 특별한 도움을 주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성사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으며 성령의 말씀에 순응하게 하는 기회와 자극을 제공해 준다. 무엇보다도 이 성사에 따른 은총이 큰 것은 치유적 능력을 지니고 죄를 근절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사를 신앙안에 살아있는 성사가 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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