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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특집 // 한권의 책
정연순 - 사람과 예술에 대한 진실성의 발견
손영순 - 의술, 그의 손
우희정 - 씨앗 한 톨의 여정
원지선 - 그댄 천재였나
김미옥 - 의미있는 일을 위해
원정수 - 자신과의 합일
강정주 - 예수의 인간적인 고뇌
공동제 // 연애
손영순 - 첫사랑
우희정 -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
조나영 - 벤이의 추억
김미옥 - 연애의 기억
강정주 - K와 함께
신작수필
정연순 // 눈물을 선택하다. / 뉴스에 감염 되었을까./ 번지 점프를 망설임
김영례 // 봄꽃 이불 / 이짜 그리고 쁘라다 / 이 복된 날에
손영순 // 하루 / 서백당 / 남산에 오르다.
우희정 // 어떤 인연 / 나도 미치고 싶다. / 가을 여행 셋
원지선 // 시어머니도 항변하라 / 시집 예찬 / 벤츠 / 풀밭에서
조나영 // 명품 신드롬 / 육안과 심안 / 화장실에서 생긴 일 /섬집 아기
장경희 // 돌아오지 않는 시간 / 트라우마
원정수 // 그들의 일상 / 마음 문이 열리다. / 길잡이 / 상처를 아물게
강정주 // 눈꽃 나라로 / 프로와 아마추어
안의숙 // 달빛 아래서 / 꾼엔들 잊힐 리야 / 구두를 돌보며
서문
느리게 가는 시계를 가지고
해가 갈수록 계절의 변화마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예전 같지 않은 기온도 그러하고 기록적인 강수량도 느닷없는 바람도 사람을 놀래키고 질리게 합니다. 100여년만의 강풍이 도시를 발칵 뒤집어 놓고 질척한 땅에 뿌리내린 채소며 곡식 과일나무들은 하나같이 햇빛 실조증을 앓았습니다. 덩달아 배추 값이 정치판에 오르고 김치는 금치의 영광을 누렸습니다.
정보화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눈 뜬 장님에 말하는 벙어리가 되기 십상입니다. 핸드폰만 해도 그렇습니다. 손에 익을 만하면 어느새 고물취급 아닙니까. 공짜기회를 잡아 바꾸어보지만 신제품의 유통기간은 더욱 짧아서 하루살이의 생존처럼 덧없기만 합니다.
모든 것이 너무 빠릅니다. 정신이 없습니다. 속도를 따라 잡지 못하는 자의 아우성조차 허공에 사라져버리고 사람들은 앞만 보고 질주합니다. 옆을 돌아볼 겨를이 없지요. 한 눈 팔다가는 낙오자가 되고 맙니다. 무엇을 위해서 달리는 것인지요? 더 잘 살기 위해서라고들 하지만 물질의 풍요만 누리면 잘 사는 것인지요?
세상이 그럴수록 수필은 느리게, 깊게 그리고 유쾌하게 빚고 싶습니다. 들꽃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색과 향기와 모습을 느긋이 바라보는 여유를 수필에서 찾으려 합니다. 숲의 소리, 바람의 속삭임, 바다의 함성도 듣습니다. 내 안에 너무 오래 눌려있어 목이 맨 소리도 들어야겠습니다. 그러면서 쉬엄쉬엄 그러나 꾸준히 수필을 빚어내고 싶습니다. 대상이 무엇이든 보고 또 보고, 바닥을 훑어가며 하나가 되기까지 그 안에 머물면서 마침내 사랑하게 된 내력을 쓰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느리게 가는 시계를 가지고 싶은 겁니다.
수필을 쓰는 일은 의미 있고 유쾌한 근로입니다. 살아가는 모든 이야기들을 망라할 수 있는 자유스러움과 진솔함을 만끽하는 가운데 성숙해가는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은 글을 쓰는 보람이기도 합니다. 한양의 문우들은 오랜 세월 수필 안에서 서로를 겪어오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이 여정을 함께 할 것입니다.
한양수필을 아끼시는 독자 여러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격려가 정진하는 데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모쪼록 변함없는 애정을 부탁드립니다. 책을 디자인 하시고 삽화를 그려주시는 상남 시백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책을 묶어 내는 소소리 우희정 동인에게도 회원 모두의 고마움을 전합니다.
2010년 10월
회장 정연순
특집
한 권의 책
사람과 예술에 대한 진실성의 발견
-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신성림 역 -
정연순
빈센트 반 고흐는 나에게 시험문제였다. 19C 후반 네덜란드의 인상파 화가이며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 자신의 귀를 자른 천재화가. 그것만 외우면 시험은 문제없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그의 작품 ‘해바라기’를 흑백사진으로 보았지만 아름다움을 느끼기보다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독한 가난과 정신병으로 권총자살을 한 사실이 추가되었다.
어른이 되어서야 그가 귀를 자른 정황을 제대로 알게 되었지만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여전히 헛갈렸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극적이고 불행하고 가난한 그의 인생사를 색안경으로 끼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번역서 개정판을 읽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 책은 그가 1872년 8월부터 1890년 7월 29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18년 동안 동생 테오와 몇몇 친구들에게 쓴 편지모음이다. 유일한 후원자이자 동반자였던 동생에게 쓴 668통이나 되는 편지 중에서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잘 보여주는 편지를 선별하여 묶은 것이다. 더욱이 편지에 언급되어있는 그림을 함께 실어 그림의 탄생배경까지 보여주고 있어 고흐, 그 인간과 예술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음은 물론이요 깊은 감동까지 더해 주었다.
그가 사물을 바라보는 깊은 애정과 관찰, 몰입하는 태도는 글을 쓰는 나를 돌아보게 하였다. 또한 빛과 색과 형상을 캔버스에 표현하려는 열망과 포기하지 않는 습작의 과정은 나를 많이 부끄럽게 하였다.
그는 말한다. ‘많이 감탄해라!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감탄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여 평범한 사람들이 자연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책을 하면서 풍경이 걸어오는 말을 알아듣고 나도 느낌과 생각을 말하다 보면 저절로 흥겨워진다. 가끔 풍경이 말하기를 멈춘 것처럼 느껴질 때는 답답하고 무의미하고 지루해진다. 아무리 수다스러운 사람도 입을 다물고 싶을 때가 있지, 하지만 그것은 풍경에 거는 농담일 뿐이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 교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나에게 있는 것이다.
‘너는 텅 빈 캔버스가 사람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모를 것이다. 텅 빈 캔버스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삶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여백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이 아무리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확신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 하고 나아간다. 그는 저항하면서 나아간다.’고 창조하는 용기와 불굴의 의지를 보이기도 한다.
친구인 베르나르에게 이런 말도 하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영생을 확신했고 시간의 무한성, 죽음의 무의미함, 평온과 헌신의 필요성과 의미를 인정했지. 신경질적이고 둔한 우리 현대인의 두뇌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인 이 두려움 없는 예술가는 조각을 하지도, 그림을 그리지도, 글을 쓰지도 않았네. 단지 자신의 말을 통해 살아있는 사람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지.’ 예수를 예술가로 보는 그는 예술의 영원성에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는 사회가, 화단이 그의 그림을 인정해주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그것은 예술적 성취이기도 하지만 당장 생활고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호의적인 평론기사에 대해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게 된다 해도 침착하게 받아들이고 이성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상업성을 경계한다.
‘내가 개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모든 사람에게 거치적거리고 짖는 소리도 아주 큰, 불결한 짐승이다. 그러나 그 짐승에게도 사람의 내력이 있고 사람의 영혼이 있다. 이 개는 한때 아버지의 아들이었지만 너무 오랫동안 쫓겨나 있던 개는 더 사나워졌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 번도 부자관계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절규한다. 너무도 처절해서 섬뜩하기까지 하다. 예술과 운명은 어떠한 필연적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 비의는 무엇일까?
사망할 당시 지니고 있던 편지에는 ‘내 그림들, 그것을 위해 나는 내 생명을 걸었다. 그로 인해 내 이성은 반쯤 망가져버렸지. 그런 건 좋다.’고 쓰여 있다. 어떻게 그를 연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책은 그에 대한 나의 색안경을 어느 정도 벗겨준 것 같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그가 본 것을 보고 그가 들은 것을 듣고 그가 느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생겼다.
- 닥터 노먼 베쑨 데드알렌 시드니 고든, 천희상 역-
손영순
이 책은 캐나다의 흉부외과의사의 실명 소설이다. 자서전도 위인전도 아닌 한 의사의 진솔한 삶을 담은 다소 지루한 내용이지만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책을 가슴에 보듬었다. 이런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다면 눈을 감게 되더라도 참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생을 마감할 것 같은 따뜻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폐결핵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삶에 대한 진실을 강하게 느꼈다. 특히 폐결핵은 부유한 사람들보다 빈민층 사람들의 치료가 시급한 것을 보고 신혼의 단꿈도 접은 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뛰었다. 남들은 자기과시를 위해 눈에 띄는 곳에 걸어두는 의사면허증을 욕실 벽에 걸어두고 병원을 찾지 못하는 어려운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치료해주었다.
혼자의 힘으로는 한계를 느낀 그는 정부에 호소하여 많은 서민들이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국민보건그룹을 창설했다. 그리고 빈민아동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자신의 집에 아동미술학교를 설립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보호자가 되었다.
그는 지식으로만 환자를 다스리지 않고 수도승과 같은 마음으로 아픈 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 스스로 화가가 되고 시인도 되어 감수성 물씬한 분위기를 만들어 환자가 편안한 마음으로 믿고 몸을 맡길 수 있게 하였다.
세계2차 대전으로 중국의 많은 부상병들이 의료진의 손길을 기다릴 때 자진해서 의무병으로 입대했다. 남들은 공산주의라고 비난했지만 그는 캐나다의 공산당에 입당하여 위험한 전쟁터로 뛰어들었다. 그에게는 먼 이국의 생명도 귀한 존재니 한 명이라도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모든 두려움을 감수하고 중국으로 갔다.
일본군이 스쳐간 산간지역과 마을을 찾아다니며 수많은 부상병들의 목숨을 구했으며 외로운 부상병들에게 따뜻한 손길로 아픔을 위로해주었다. 조금만 치료하면 구할 수 있는 생명들이 의료진들의 부족으로 생명을 구하지 못 할 때는 자책감으로 자신의 신체 일부를 잃어 가는 듯 괴로워했다.
힘들고 어렵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중국정부에 호소하여 기동 의무대를 조직하여 기지병원을 설립해 의료진과 의료장비들을 구했다. 그에 대한 신념과 믿음이 있었기에 중국 정부도 힘닿는 데까지 지원해주었다. 마을 주민들과 사병들이 부상병들을 위해 헌혈 하는 것도 그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살벌한 전쟁터라 쫓기며 마취도 하지 못한 채 부상병의 다리를 잘라야 했고 자신의 피를 뽑아 수혈 하면서 수술을 하는 모습을 보고 서로 위로 하면서 외로움을 달래주었다. 그의 치료를 받다가 목숨을 구하지 못한 병사들도 아마 그의 따뜻한 손길에 미소 지으며 이승을 하직했을 것이다.
결국 약한 몸으로 급하게 부상병을 치료하다가 자신의 손을 베어 패혈증으로 49세에 생을 마감했다. 남겨둔 재물도 권력도 명예도 없이 이국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거쳐간 마을마다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오늘날까지 외국인으로 보기 드문 중국민중의 영웅으로 추앙 받게 되었다. 그가 세운 20여 개의 기지 병원은 지금도 시범병원으로 남아 그의 정신을 이어가며 생명을 구하고 있으니 그는 영원한 의사로 남게 되었다.
질병을 돌보되 사람은 돌보지 못하는 의사는 작은 의사라 하고 사람은 돌보되 사회를 돌보지 못하는 의사는 보통의사, 질병과 사람과 사회를 통일적으로 파악해서 그 모두를 고치는 의사를 큰 의사라고 했다. 그는 진정 큰 의사였다.
요즘 가족들의 간병도 힘들다고 피하는 시대에 이 책을 읽고 나니 나의 생명도 존중 받은 듯 귀하게 느껴졌다.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 바로 세계를 구하는 일이며 모든 인간의 생명이 차별 없이 소중한 존재로 보호 받아야 우리의 삶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 나무와 숲의 연대기 데이비드 스즈키․웨인 그레이디, 이한중 역
우희정
환경운동가이자 생물학자인 데이비드 스즈키와 자연작가인 웨인 그레이드의 공동저작물이기도 한 나무와 숲의 연대기로 인해 나는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이 책은 데이비드 스즈키의 오두막 앞에 있는 ‘더글러스 퍼(Douglas-fir)’ 한 그루의 일생이 담긴 이야기이다. 주로 북미 서해안 일대에서 자라는 이 나무는 우리나라로 치면 소나무 정도가 될 것 같다.
너무 가까이 있기에 오히려 별스럽지 않게 여겨지는 나무, 그것도 한 그루의 나무를 통해 우리가 그동안 미처 생각지 못했던 점을 일깨워주며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안내해 간다. 으레 거기 있으려니 하는 생명 하나에도 자연의 숭고한 뜻이 있고, 또 자연을 어떻게 겸허히 대해야 하는지를 자상하게 말해준다.
탄생, 뿌리내리기, 성장, 성숙, 죽음 5부로 나누어진 그의 일생을 따라가다 보면 나무뿐 아니라, 한 마리의 도롱뇽, 한 포기의 양치류, 보잘것없어 보이는 미물에 이르기까지 유기체 모두가 서로 얽히고설켜 순환됨을 알 수 있다.
또한 단편적인 내 지식이 얼마나 좁은 시각의 산물인지를 실감케 한다. 나는 이 글을 읽기 전까지 산불이 모든 생명체를 소멸시키는 아주 좋지 못한 사건이라 여겼다. 몇 년 전, 기억도 생생한 영동지방의 산불은 분명 우리에겐 악마의 불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꼭 불이 파괴만을 뜻하는 게 아니란 사실을 이 책의 첫 장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산불로 인해 숲 속의 모든 생명체가 재가 된 자리에 우리의 주인공 더글러스 퍼는 영역을 확보하고 싹을 틔워 새 생명을 시작하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생명체인 나무는 불, 씨앗, 생장 등으로 순환을 하였고 앞으로도 그 과정은 지속될 것이다.
한 톨의 씨앗에는 생명의 신진대사 과정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유전정보가 있다. 나무는 구과(毬果)에서 빠져나와 뿌리를 내리면 한 발짝도 자리를 옮길 수 없는 숙명이다. 포식자나 기생충을 피할 수도 없고,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 함을 스스로 안다. 공기로부터 이산화탄소를, 흙으로부터는 물을 비롯한 여러 원소를, 태양으로부터는 빛을 끌어온다. 독특한 기후나 지리, 생태적 조건을 이용하여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알고 더러는 다른 종들과 제휴를 맺기도 하면서 그 나름의 생존전략을 짠다.
숲이란 단순히 나무들이 몰려있는 곳이 아니라 많은 유기체가 모여 있는 공동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숲을 이룬다. 뿌리가 얽혀 피를 나누듯 부족한 것을 메우며 영양분을 나누고, 자신을 둘러싼 박테리아나 곤충, 새나 동물과 더불어 삶을 이어간다.
마지막 장, 400여 년의 기나긴 일생을 마감하려는 ‘더글러스 퍼’의 모습은 뭉클한 감동 그 자체이다. 흐르는 세월은 그도 피할 수 없어 결국에는 고사목이 되고 말았지만 결코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아직도 그는 자신의 뼈와 살을 숲속의 또 다른 유기체에 나누어줄 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 자연에서의 죽음은 새 생명을 부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 다른 순환을 뜻하는 일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는 생물학적 지식을 어렵게 설명하지 않는다. 도리어 다른 곳에서 갖기 어려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적 감수성을 바탕에 깔고 생명에 대하여 진지한 인식을 갖게 한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번역자의 자세이다.
‘이 책이 건전한 상식을 위한 훌륭한 안내서 역할을 한다면 큰 보람이고 더불어 나무 한 그루의 운명과 사람의 운명이 둘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는 번역자의 의미 있는 말이다.
- 저 물레에서 운명의 실이 이어령 -
元祉善
‘다시 읽고 싶은 책’이란 말이 귀에 닿는 순간 전깃불처럼 머릿속에 켜진 책 수필집 저 물레에 운명의 실이었다. 두꺼운 표지로 새롭게 단장된 책을 들면서 낯선 감이 들었다. 그런데 첫 페이지를 열자 말자 ‘아, 그래 이거였어!’ 하는 탄성이 나왔다.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으며 다시 탄성을 질렀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한 권의 책 속에 든 단 한 문장도 낯설거나 기억에 없는 것이 없었다. 그동안 수없이 인용하고 써 먹었던 상식적 문장들이 한 줄도 빠짐없이 책 속에 앉아있었다. 아예 한 권을 통째로 다 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래전 독서기록장을 찾아보니 1976년 5월, 그러니까 스무 살 5월에 읽었던 책이다. 35년 전인가. 스무 살엔 내가 천재였었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그리고 내가 가지게 된 여성, 여자라는 이미지를 확고하게 그림 짓게 만든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아선호사상이 특별한 할아버지 슬하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어머니의 심각할 정도의 아들 선호주의에서 십대를 살았다. 장녀로 태어났지만 두 살 터울로 동생을 보면서 호적등록을 할 정도였으니. 의식이 거의 질식 상태에서 이 책을 만나 해방을 맛보았던 것 같다. 뭔지 모를 피해의식과 자존감의 상실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까. 스무 살까지 겪었던 일상들이 개인의 문제이기 전에 인류역사이며 사회 일반화라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이다.
스무 살 그때는 세포 하나하나마다 새로운 공기를 찾아 방황하던 시기였나 보다. 그랬으니 의미를 머리에 기억을 시킨 게 아니라 온 세포를 열어 스펀지처럼 흡수시켰다는 표현을 하고 싶다. 머리로 기억한 것이 이렇게 선명하게 한 점의 토씨도 틀리지 않게 외우고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정말 놀라울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에서 받은 충격으로 너무나 많은 사고의 변화를 겪었고 살아오면서 오늘의 내 모습을 만드는 기승전결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정말 고맙고 감사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알고 있고 이해까지 했는데 놓친 부분이 있다. 분명 35년 전 그때 오늘날 이렇게 변할 모습을 얘기해 주고 있었다. 30년 후에 어떤 의식이 자리할 것이며 사회 속에 여성의 위치는 어느 방향으로 가게 되며 그래서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것을 보는 눈이 부족했다. 과거를 치유하고 피해의식에서 해방되는 행복함과 여자로서, 인간으로서 자아를 찾는 일에 급급했다고 할까. 조금 더 깊이 있는 사고를 했더라면 내적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성공한 삶을 꾸리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에 미치면 오늘 만나는 어떤 책에서도 20년 후 70대에 성공한 삶을 제시해주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본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면서도 나와 상관 지을 줄 모른 채 겉만 훑고 지나치는 많은 부분이 있을 것이다.
스무 살에 기록하여 둔 독서기록장엔 ‘내가 아들을 갖게 된다면 꼭 이 분 같은 모습으로 키우리.’라고 각오하고 있다. 스무 살이었는데, 스무 살 밖에 안 되었는데 왜 내 삶을 변화시킬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자신이 바로 서고 다음 아들 키울 생각을 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못내 안타깝다. 그때 내가 ‘저 분처럼 되어야지’ 했더라면 지금 나는 어떤 모습일까. 그나마 특별히 독서량이나 많은 지식을 쌓아가는 아들로 성장해주긴 했다.
작가가 현존해 있는 오늘 다시 읽고 진정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이렇게나마 남길 수 있어서 참 좋다. 가끔 TV에서 숨 쉬는 시간마저 아까운 듯 빠르게 말하는 작가를 본다. 그때마다 몇 날 며칠 하고 싶은 얘기 해주고 얘기를 다 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할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을 한다. 글과 말은 또 다른 느낌이니까.
- 흐르는 강물처럼 파울로 코엘료 작, 박경희 역 -
김미옥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는 당신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도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용감하십시오. 남들이 아닌 바로 ‘나’에게 의미 있는 그것을 위해.”
연금술사로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오른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 흐르는 강물처럼을 선물 받고 앞장의 프롤로그만을 읽은 채 며칠간 푸른색의 표지만 보았던 때가 떠오른다.
아주 다양하면서도 혼돈의 삶을 산 작가는 결국은 열다섯 살 때 꿈꾸던 작가로 성공한다. 나는 열다섯 살에 도대체 무슨 꿈을 꾸었나? 누구나 혀를 찰 이 나이에 내가 좋은 글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없음은 지극히 평범한 나의 DNA탓이라며 한탄이나 했었다.
‘뭐부터 달랐으야 했을까?’, ‘무엇부터 달라져야 할까?’
환경과 세월이 만들어준 습관이 아니고서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쪽뿐인 귀고리를 걸고 외출 하는 게 고작이었다. 얼마나 우스운가? 그 짓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정도를 남과 ‘다름’이라고 시도했다.
내 인생의 ‘노’는 휴식 중이었다. 어쩌면 멈춤인지도 모르는데 휴식으로 하자. 보통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삶이 아닐 바에는 지극히 평범해지자 맘먹으며 이리 저리 젓던 인생의 ‘노’를 놓아버린 시간이었다. 작가의 표현처럼 최초의 꿈은 빛을 잃었다. 나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심으로 피곤과 권태에 빠져 ‘노’를 놓아버릴 구실을 찾느라 급급했다. 그러나 아무 행동이 따르지 않은 무심한 시간들은 나를 또 다른 불안으로 몰아넣었고, 그러면서 한편으론 다시 열정적일 수 있는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찾고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더는 진도를 나가지 못한 채 뚫어져라 본 표지 글이, 도달하기를 잠시 포기한 나의 바다를 다시 꿈꾸게 했다.
깊은 밤을 흐르는 강물처럼
두려움도 슬픔도 없이 나아가라
마침내 바다에 다다를 때까지…
삶을 세 개의 악장으로 구분해 놓은 작가가 조금 친근해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과’, ‘몇몇 사람들과’, ‘아무도 없이’.
하지만 나의 ‘많은 사람과’ 나의 ‘몇몇 사람’과 나의 ‘아무도 없이’는 작가의 그런 날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음을 깨닫고 금방 풀이 죽기도 했다. 그러면 또 페이지를 덮었다 열었다 하면서 읽은 책이 흐르는 강물처럼이다.
“바보에게 천 가지 지혜를 가르쳐준들 그가 원하는 것은 정작 네 것뿐이리니.…… 제 할 일은 제쳐둔 채 남의 정원에 대해 말하기 좋아하는 그 바보는 제 뜰의 꽃과 나무는 안중에도 없다.”
그 바보가 바로 나는 아니었는지? 나는 내 인생의 텃밭에 무슨 씨앗을 뿌렸을까? 알량하게 나온 싹에 비료는 줘 봤는지. 나의 행동의 때가, 생각의 의미가, 성취의 기쁨이 가늠되지 않을 때 나는 책장 네 번째 칸에 꽂혀있는 이 책을 기억 해낼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다시는 펼쳐지지 않는 책’이 되지는 않겠지. 삶에 있어 꼭 필요한 돈이나 여행, 관계, 폭풍을 마주하는 법까지 인생을 점검해 볼 수 있는 지혜를 담은 이 책을 나는 ‘다시 읽고 싶은 책’으로 기꺼이 꼽는다.
- 이방인 알베르 까뮈 작 김화영 역 -
원정수
이방인을 처음 읽은 게 여고 시절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는 것이 이 소설의 시작이다. 이어지는 일인칭의 화자. 뫼르소는 마치 마네킹이 움직이듯이 별 생각 없이 일상을 살아간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나 외로움도 느끼지 않는 듯 행동하는 그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더구나 작열하는 태양아래 무심코 한걸음씩 발을 떼다가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살인. 뚜렷한 이유나 동기도 없이 아랍인을 살해하는 장면에서 더욱 고개가 갸웃해졌다. 보통의 정서나 죄의식의 기준으로는 전혀 가당치 않은 행동이 아닌가. 그리고 그는 태양 때문에 살인했다고 말한다. 이방인의 클라이맥스인 그 장면, 세계적인 명작으로 남게 된 대목이리라. 단순하면서도 강하게 내 기억 저장고에 넣어두었다.
그 후로 나는 ‘이방인’이란 단어가 왠지 나 자신과 잇대어지곤 했다. 사람들 틈에서 빙빙 겉돌기 일쑤고 남과 쉽게 가까이 못하는 자신을 느낄 때, 이방인은 화두처럼 떠오르곤 했다.
이즘 다시 이방인을 읽었다. 뫼르소가 말하고 움직이는 대로 시선을 따라갔다. 예전에 이해할 수 없었던 그의 모든 일상을 더도 덜도 없이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지난날 어느 순간의 내 모습이 얼비쳤다. 깊은 슬픔과 고통이 엄습했던 적이 있다. 그 순간 치닫는 감정을 어쩌지 못하게 되자, 그만 맥을 놓아버린 사람처럼 스르르 잠이 들어버렸다. 한동안 머리가 텅 빈 인간처럼 먹먹한 채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마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간 듯했다. 뫼르소의 일상에서 그때의 내 모습을 떠올리다니. 어쩌면 맞지 않는 연상이지 싶지만 혼자 새기고 말면 그뿐 아닌가.
그리고 뫼르소의 살인. 뜨거운 태양과 후덥지근한 바닷바람, 아랍인의 뻔쩍거리는 단도가 순간적으로 살의를 느끼게 해서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이물질이 목에 걸리듯 제대로 읽혀지지 않던 대목이 “아, 그렇구나.” 고개가 끄덕여졌다. 잠재되어 있는 어떤 의식이 나를 깨우쳐준 것일까. 아니면 그만큼 알베르 까뮈의 심리나 장면 묘사가 절묘한 것일까?
살인을 저지르고 뫼르소는 체포되어 심문과 재판이 이어지다 결국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일체의 허위와 군더더기 감상을 배제한 채 자신을 담백하게 드러내고 또 받아들인다. 그에게는 죽음 또한 삶과 마찬가지인 것 같다. 철저히 사회나 사람들로부터 이방인으로, 자신과 분리된 채 산 뫼르소. 하지만 사형집행을 앞두고 그는 자신과 합일이 되는 듯하다.
나는 별이 반짝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그처럼 세계가 나와 다름없는 형제처럼 느껴지자 나는 행복스러웠고 또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현대인의 부조리를 극명하게 표현한 이방인. 이 책을 덮으면서 내 사고에 날개를 달고 멋대로 훨훨 날아봤다. 어떤 잣대에 맞춰 이방인이라 할 수 있을까. 세상의 규범, 논리 또 도덕과 사고의 틀에 맞춰진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이방인인가. 이방인이 되기도, 되지 않기도 쉽지 않으리라. 어느 쪽으로든 선택한 삶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건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인물임을 깨닫는 것으로, 내가 한때 이방인을 화두로 삼았던 해답을 찾기로 했다.
- 그리스 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작 이윤기 역 -
강정주
나는 달빛을 받고 있는 조르바를 바라보며 주위 세계에 함몰된 그 소박하고 단순한 모습, 모든 것(여자, 빵, 물, 고기, 잠)이 유쾌하게 육화(肉化)하여 조르바가 된 데 탄복했다. 나는 우주와 인간이 그처럼 다정하게 맺어진 예를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일은 포도주가 되고 여자가 되고 노래가 되어….
그의 손에서 대지는 생명을 되찾았고 돌과 석탄과 나무와 인부들은 그의 리듬으로 빨려 들어갔다. 보라, 조르바는 사업체 하나를 춤으로 변화시켰다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다 ‘거룩하게 만들기’이다. 나는 조르바라고 하는 위대한 자유인을 겨우 책 한 권으로 변화시켰을 뿐이다.
내가 처음 이 책과 영화를 본 때는 30대 초반이었다. 안소니 퀸이 열연한 영화 조르바의 감동을 잊을 수 없어 책을 구해 읽었다. 아마 젊음이 가져다준 감동이었을 것이다. 사유하기보다 행동하는 인물이었던 조르바. 그는 작가가 만났던 실존 인물이었다. 카잔차키스가 한평생 배움과 사색을 통해 얻으려 했던 깨우침, 그 인간의 길을 조르바는 행동으로 보여 준다.
원고 나부랭이를 팽개치고 행동하는 인생을 살고 싶었던 주인공은 크레타의 갈탄광을 매개로 조르바와 만나게 된다. 갈탄광 사업을 조르바에게 맡기고 그 사업이 망하기까지 지중해의 아름다운 크레타섬에서 조르바와 보내며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감동을 느낀다.
니체와 베르그송의 영향을 받은 카잔차키스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고, 생의 도약을 성취시키는 인간’을 지향한다. 그의 사상의 핵심인 메토이소노(聖化)란 ‘물리적 화학적 변화 너머에 존재하는 변화’를 말한다.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나의 살과 피로 표현한 바 있다.
“인간이란 참 묘한 기계지요. 속에다 빵, 포도주, 물고기, 홍당무 같은 걸 채워 주면 그게 한숨이니 웃음이니 꿈이 되어 나오거든요. 무슨 공장 같지 않소.” 카잔차키스는 배운 것 없는 조르바의 거친 말과 행동을 책을 통해 메토이소노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한 예수를 인간적인 모습으로 이해하려했던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는 이 책에서 신을 통한 구원에 이르려는 수도승들을 비웃고 그들을 무지한 사람들 등쳐먹는 사기꾼으로 묘사한다. 중세의 금욕주의자들이 앓았다는 ‘성자의 병’을 앓기도 했다는 그는 평생을 구도자의 모습으로 살았다.
그는 신을 통하여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예수를 사랑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 살려하는 나와 카잔차키스의 사상이 크게 대립돼지 않는 다고 생각된다. 인성을 입은 예수의 인간적인 고뇌를 그는 너무도 깊이 이해했다. 그의 다른 소설 「최후의 유혹」에선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의 약혼녀로 그려 놓기까지 한다. 그의 책은 기독교에선 금서가 되었고 그는 그리스정교회에서 파문 당한다. 그의 무덤엔 파문당한 사람의 무덤에만 쓰인다는 나무 십자가가 서 있고 비문엔 그가 미리 준비한 글이 적혀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배운 것 없는 조르바는 작가가 평생 배움으로 얻으려 했던 것들로 살아왔다. 그렇다면 행동 없는 배움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고 싶지만 그것 또한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지만 일상 속에 되풀이 되는 행동들은 너무 제한적이고 좀 심하게 말하면 유전자에 로봇처럼 조종되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이럴 때 평생 삶에 대한 지적 탐구를 그치지 않았고 비로소 인간의 한계와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유’하게 된 그를 존경한다. 그리고 그가 이상적 인간의 모습으로 그린 조르바를 떠올린다.
[공동제 ]
연애
첫사랑
손영순
첫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애틋한 그리움이 몰려온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면 언젠가는 만나게 될까? 「레터스 투 줄리엣(Letters to Juliet)」이란 영화가 있다. 50년 전 헤어진 애인을 찾는 애절한 어머니의 편지를 보고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그 님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긴 세월 옛추억을 더듬어 님의 이름을 찾아보지만 동명이인이 나타나 실망하고 돌아서는 길에 멀리서 님의 모습이 보인다.
농장에서 일 하는 남자의 모습이 차창으로 지나치는 순간 어머니는 환희에 차서 차를 돌리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의 아들이라며 아버지가 곧 돌아올 것이라 한다. 그의 아들이 50년 전 애인 모습으로 보인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기다리는 동안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젊었을 때 애인을 기다리는 마음과 조금도 다름없이 머리를 매만지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다.
말발굽소리가 가까워지자 여인은 반가움과 기쁨에 님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간다. 말에서 내린 남자도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고 놀람과 기쁨을 누르며 연인의 손을 꼭 잡는다. 그들은 주름진 얼굴에 흰 머리카락을 날리며 포옹하면서 50년 세월을 묻어버린다. 농장에서 익어가는 사과빛처럼 연인들의 얼굴이 불그레하다.
둘은 팔짱을 끼고 농장을 돌면서 그동안 못다한 얘기들을 나누며 이루지 못했던 사랑을 약속한다. 서로 배우자들과 사별하였기에 둘은 하객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린다. 만인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알리며 행복해한다.
만약 내가 지금 옛 님을 만난다면 다가갈 수 있을까? 지금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에 용기가 나지 않는다. 젊었을 때의 좋은 모습만 그리고 있다는 것은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살면서 좋고 예쁜 것만 골라서 살 수 없기에 추한 모습도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좋은 것만 보인다는 것은 결국 꿈속의 만남으로 끝난다. 결국 나는 첫사랑을 이룰 만한 위인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남편을 생각해본다. 40년 동안 아웅거리며 부딪침도 많았지만 그만큼 의지하며 믿음이 간다. 조금 퇴색된 듯하지만 서로 소중하고 편안하다. 그렇다면 남편을 옛 애인처럼 생각하고 나도 멋진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주름살과 흰 머리카락에 볼품은 없지만 ‘나 남편과 사랑하겠소’ 공개한다면 모두가 복을 빌어 줄 것 같다. 젊은 사람들은 사랑 서약을 하고도 금방 헤어지는데 한평생 함께한 남편에게 다시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오’ 하며 용기를 내어본다.
피식 웃고 마는 멋쩍은 표정이겠지만 그의 마음을 알기에 그래도 좋은 걸 누가 말릴 사람도 없겠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
우희정
하늘과 바다를 가르는 것은 청빛 띠안개뿐입니다. 그들은 서로 닮아 한 몸이라고 한다지요. 나는 지금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내 옆에는 한 남자가 누워있습니다. 그의 섬세한 손길이 닿는 곳마다 잠들어 있던 세포가 오소소 일어납니다.
난바다의 어디쯤에서 밀려오는 저 파도도 나처럼 달뜬 가슴으로 님의 손길을 느끼는 것일까요. 그러기에 저다지도 잠 못 이루고 몸을 뒤채는 것이겠지요.
운명처럼 다가온 사람, 그러나 이룰 수 없는 사랑입니다. 눈앞에 빤히 보이는 데도 서로 닿지 못하는 숙명,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지만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대한 갈망으로 애가 탑니다.
그와 함께할 수 없는 이유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포기하고 돌아서려니 더욱더 애끊는 심정입니다. 바라보고 있어도 여전히 그리운데 날더러 어쩌란 말인가요.
사랑에 빠지면 유치해진다고 했나요? 그래요, 세상의 모든 시(詩)가 나를 위한 연가(戀歌) 같고 유행가 가사조차 어찌 알고 내 심정을 노래하는지 애잔하기만 합니다.
이제 그와의 인연을 결정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나는 깨닫습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점점 빠져나올 수 없는 심연으로 빠져들 것 같아 두렵기도 합니다.
그와 나, 피안의 세계로 들듯 함께 바다를 건넜지요. 해무 자욱한 길이 바로 우리의 앞날 같아 불안했습니다.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우리만의 장소로 드는 초입에서 선홍빛 꽃을 송이째 뚝뚝 떨어뜨리는 동백나무를 만났지요. 쏟아져 내리는 꽃비를 맞으며 나는 한참을 그 아래에 서 있었답니다.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후회 없이 그리움 쏟아내고, 절정의 순간에 그 정열 고이 접어 제 몸 던질 줄 아는 그 용기가 가슴이 먹먹하도록 부러웠지요.
그도 하는 사랑을 나는 무에 그리 어렵다고 도리질만 하는지 참 모르겠네요. 왜 매번 마음 내키는 대로 틀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스스로를 가두려는 것일까요?
얼마 전 250여년 세월에 꿋꿋이 서로 의지하며 푸르던 두 그루 동백나무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모습이 하도 다정다감하여 ‘부부나무’로 불린다지요. 나도 저들처럼 살고 지고 평생을 늙어갈 용기가 왜 없는 것인지요. 오로지 하룻밤 풋사랑으로 이별의식을 꿈꾸고 있다니요.
하지만 그게 운명이라면 지금 이순간이 꿈이라도 좋습니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에 신데렐라의 주문이 사라져도 그가 내 몸 깊숙이 찍은 화인만으로 참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구의 어느 한 귀퉁이에서 두 사람이,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연인이 죽도록 사랑에 겨워해도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돌고 있습니다. 오로지 왈가왈부하는 것은 손꼽을 정도의 사람들일 뿐, 여전히 태양은 오늘도 예외없이 떠오르는 걸요.
바로 그날 남자와 여자는 함께 해돋이를 하고, 비자나무 숲길을 걷다 연리지를 보았답니다. 두 나무의 가지가 맞닿아 결이 통하는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그들도 연리지를 꿈꾸지 않았을까요.
벤이의 추억
조나영
오늘 코스는 도봉산이다. 친정이 정릉 산중턱에 있어 자주 오르내리다 보니 등산엔 자신 있었는데 힘이 들었다. 매주 화요일은 친구 셋이서 산에 간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서울 근교의 산은 자체가 예술이다. 맑고 청아한 가을 하늘을 자랑하던 산에도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계곡에 부은 발을 담그고 간이돗자리 위에 새송이버섯전, 불고기, 과일 등 각자 마련해온 반찬으로 파트럭(potluck) 파티가 열렸다. 푸짐하게 먹고 즐기다보니 순수했던 대학 신입생 시절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열아홉 살 7월에 우리는 도봉산에 갔다. B와 그의 친구들인데 리더는 베테랑급이었다. B는 3월에 만난 미팅파트너다. 나는 겁없는 호기심으로 운동화를 신고 오봉을 락클라임 했다. 먼저 올라가 내 밧줄을 끌어준 리더의 박수소리에 정신을 차려 보니 꼭대기 패인 바위엔 물이 조금 있었다.
오봉에서 내려와 군인용 반합에 밥을 지었다. 우리는 반합에 가득한 다섯 공기가 넘는 밥을 단숨에 먹어치웠다. 감자와 양파를 넣은 된장국과 김치가 고작이었는데 어찌 그리 식성도 좋았을까. 깔깔대며 재밌게 놀다 콧노래를 부르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거의 다 왔는데 천둥이 치면서 소나기가 쏟아졌다.
비닐봉지를 덮어쓰고 내려오다 미끄러져 내 얇은 옷은 흠뻑 젖어 속살을 드러내고 말았다. B는 수줍은 색시처럼 손수건 귀퉁이로 나를 잡아 올렸다. 배가 출출해졌다. 소나기가 지나간 바위에 걸터앉아 간식으로 가져간 삶은 계란 열 개를 꺼냈다.
껍질을 벗기는 순간 무릎에 있던 계란 다섯 개가 쪼르르 굴러가버렸다. 한 개씩 밖에 못 먹었으니 가슴속까지 쓰렸다. 껍질이 깨지며 땍때굴 굴러가는 아까운 계란을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잠자리에 들 때까지도 그 광경만 떠올랐으나 어느 산짐승이 배불리 먹었겠지 하는 너그러운 마음이 들고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B와 함께 1, 2학년 땐 소극장 ‘까페 떼아뜨르’에서 추송웅과 김금지의 「타이피스트」도 관람했고 앤서니 퀸 주연의 「25시」 영화도 보았다. 교외선을 타고 청평 호수에 가면 기타 반주를 하며 ‘카튼 필드’를 내게 불러주었다. 감미로운 그의 목소리에 다이돌핀이 솟구쳤다. 이렇게 자주 만났으나 졸업 후 나는 교사로, 그는 본과 학생으로 바빴던지 소식이 끊겼다.
‘운당 구인환 카페’의 「예술의 향기 방」을 맡아 매일 관리하는데 작년 우연히 회원에 가입한 B를 만났다.
*Benny(便醫: 편한 의사) 많이 낯익은 이름, 혹시 미팅파트너 Dr. 田 벤이가 아닌지. 내가 지어준 이름이라…. 꽤 오랜 세월이 흘러버렸군, 어떻게 우리 카페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반갑네요, 이렇게 오랜 세월 뒤 그대를 만난다는 것이…. 꿈만 같네요. 이런 걸 두고 ‘사랑의 기적’이라고 해도 될는지요? 정확히 42년 전 만나 몇 차례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 되다가 Web World에서 다시 만나게 되니 정말 기쁩니다. 자주 들르겠습니다.
*정말 반갑네. 1967년 3월 21일(춘분)에 만난 후 처음 받은 편지! To : Salvia ‘만났노라’ ‘사랑했노라’ ‘잊지 못하겠노라’. 10대에 만나 어언 60대가 되어버렸네. 이 카페에 자주 들르길 바라며 그동안 쌓였던 이야기는 만나면 하자. 우리 카페에 가입한 걸 알았더라면 벌써 답글을 썼을 텐데….
1) 와우~~~이 무슨 사랑의 팡파레란 말입니까? 우리의 호프인 반장님의 사랑이 운당카페에서의 해후라니요? 한 미모 했을 나영 반장이 그 10대 때는 얼마나 예뻤을지 가늠이 갑니다.~~벤이님~~~자주 오셔서요, 그 사랑 이야기로 힘빠진 운당의 여성회원님들에게 희망을 주셔요. ~~~호호홋~~~ㅎ. 아~~~나의 첫사랑은 어디서 무얼 하실까? 그림을 그리실까? 신문을 보실까? 호반의 벤치로 가봐야겠네에~~~
2) 아유, 재미나라. 이래서 인생은 살만한 거 아니겠어요? 눈물이 찔끔 배어나도록 멋진 러브스토리. 사십여 년을 가슴에 묻고 있었던 고 달콤새콤했던 이바구를 내일 해주실 건가요? ‘예술의 향기방’ 개설 후 운당님 카페에서 홈런을 날리네요.
3) 살면 다시 만나리…. 첫사랑이 그리워지는 새벽입니다. 젊은 날의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빛이 더 또렷해지지요. 순수해서? 아니면 그만큼 열정이 뜨거웠다는 건지요. 꽃피는 봄이 오면 잊었던 옛님 소식도 듣는데 세월이 주춤거릴 것 같네요. 조반장님 상기된 얼굴이 더 예뻐 보이는 이유가 있었군요. 오늘은 더 멋져 보이던걸요^^나지요. 추억은 아름다운 것!! 하하. 나영님의 재회에 제 가슴이 왜 이리 설레일까요. 축하합니다~
4) 어머나~~~이게 웬일이예요…. 나영 선생님!!! 나영 선생님의 「섬마을 선생님」 그 노래를 다시 듣고 싶습니다. ……와…… 내 친 언니가 요즘 첫사랑을 만나는 것을 보고 은근히 샘이 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는데…. 만나야 될 사람들은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두 분의 만남을 위해서~~~~~축배를 들어야겠네요~~~~~~
세상은 자연적 인위적으로 만남의 연속이다. 추억의 도봉산을 그리며 운당카페에서 B를 매일 만나고 있다.
연애의 기억
김미옥
국어사전을 꺼내든다. 내 사전엔 1,611쪽 6번째 단어다. ‘연애’ 발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3개의 단어가 수록돼있다. 내가 정확히 알려고 하는 단어는 ‘남녀간의 그리워 사모하는 애정’의 뜻을 가진 ‘연애’이지만 지금 막 알게 된 다른 두 ‘연애’의 뜻은 ‘아지랑이’의 옛 명사이고 ‘물방울과 티끌’이다. 전혀 다른 뜻임에도 왠지 한 묶음으로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올해 동인지 공동제가 ‘연애’다. 그 제목을 말씀하시며 정 선생님께서 나를 꼭 집어 “저 김 선생 눈 좀 봐라. 벌써 달라졌제? 지금 마음이 어디 가 있노?”라며 농을 하신다. 유독 나만이겠는가? 지천명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때로는 아플 만큼 그리운 이 하나 가슴에 품지 않은 이 어디 있겠나. 30년을 함께 희로애락을 맞이하고 있는 남편을 살짝 외면한 채 내 마음은 벌써 베르테르의 연서를 들고 목련꽃 그늘 아래섰다.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 드려요.’
단지 카피해서 보냈을 뿐인 그 짧은 CM송이 한동안 나를 잠들지 못하게 했던 날들이 떠오른다.
오랜 시간 꿈을 꾸었다. 한 사람 생각만으로도 머리에는 별이 내렸고 달이 떴다. 내가 보는 세상은 사랑으로 빛났다가 폭풍우 몰아치는 광활한 대지도 되었다. 서 있는 땅은 구름이 되었고 유배지의 험난한 돌길도 되었다. 새털처럼 가볍던 날들이 때로는 지독한 지옥이 되기도 했던 열병의 시간. 감정은 머릿속의 모든 이성을 누르고 온통 그리움만이 나를 지배했다.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그것은 나를 강가에 서게 했으며 하늘을 올려다보게 했다. 아주 멋진 풍경을 혼자만이 봐야 하는 그런 안타까운 느낌의 기억. 함께면서도 외롭게, 혼자이면서도 외롭지 않게 그렇게 시시때때 변덕을 부리며 손톱 깊숙이 박힌 가시처럼 때로는 지독히 아팠고, 가시 빼낸 자리처럼 오랫동안 우리하고 얼얼했다.
젊은 날에는 ‘연애’라는 느낌이 다소 퇴폐적이고 유치하다고 여겼던 적이 있다. 잠을 자지 않아도 밥을 먹지 않아도 그 사랑하나로 살아질 것 같았던, 또 그 사랑 하나로 세상이 끝날 것 같았던 그것은 ‘연애’가 아닌 다른 멋진 이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그냥 ‘연애’라니 안 될 말이었다. 노란색이 촌스럽다 여겨지던 느낌과 같은 것이었을까? 이 나이에서야 비로소 그 노란색이 마음 저리게 고운 색이란 걸 알게 되었듯이 ‘연애’의 의미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또 얼마나 슬픈 이름인지 진심으로 마음에 품게 되었다. 이정하님의 「몽산포 일기」는 아직도 나를 꿈꾸게 한다.
그대와 함께 걷는 길이
꿈길 아닌 곳 어디 있으랴만
……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참으로 아득한 꿈길 같았습니다.
……
사랑한다 사랑한다며 그대 가슴에 저무는
한 점 섬이고 싶었습니다.
시도 유행가도 나의 얘기라며 감탄했던 시간들이 돌아보니 한 순간 꿈같다. 어쩌면 다시는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르는 마음 깊은 곳에, 한 그루 나무로 간직해 놓은 참 좋은 그 사람이 있다. 때로는 봄산에 피는 아지랑이 같기도, 물방울 같기도, 또 한 점 티끌 같기도 한 나의 그 사람.
무슨 마법에 걸린 것처럼 집 앞에서도 길을 잃게 만들던 그 폭풍 같던 시간을 다시 꿈꾸는 내 욕망이 낯설고도 슬프다.
K와 함께
강정주
얼마 전에 친구가 호들갑스럽게 전화를 했다.
“강샘, 내가 K를 찾았어. 외국에서 오래 살았더군. 머리 벗겨진 것은 그 나이에 그럴 수도 있지 뭐.”
아! 헤어진 지 수십 년이 흘렀건만 내 기억 속의 그와 나는 현재진행형이었다. 친구가 찾아보라는 인터넷 카페를 들어가 보았다. 화가이고 나이와 이름은 같았지만 그는 아니었다.
나는 지금 베토벤의 크로이첼 소나타를 듣고 있다. 지금도 K와 함께 이 음악을 듣고 있다면 아마도 내 인생은 참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이 소나타는 내 청춘의 어느 한 길목에서 많이 들었고 지금도 이 곡을 들으면 잊을 수 없는 한 시절이 떠오른다. 예전 대학 졸업식 때 사진을 찾아보았다. 그는 나에게 졸업을 축하한다며 사탕꽃바구니를 주었다. 빛바랜 사진 속의 나는 그것을 들고 환하게 웃고 그는 내 뒷줄에 군모를 삐딱하게 쓰고 서 있다. 정말 오래전 일이다.
나는 대학에 입학한 후 극동방송에서 윤학원씨가 진행하는 클래식 음악프로를 자주 들었다. 그는 이 방송을 통해 알게 된 남자다. 그는 가끔 음악을 신청할 때마다 그림을 곁들인 멋진 사연을 적어 보냈기에 진행자뿐만 아니라 듣는 나도 감동이었다. ‘아, 저런 사람과 연애 한 번 해봤으면….’ 2년 후 그 생각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우리 대학은 3학년이 되어야 비로소 메이데이 축제에 남자 파트너를 데리고 참석할 수 있었다. 내가 잘 다니던 명동의 클래식다방 ‘훈목’의 DJ가 대학 4학년생으로 나와도 가까웠기에 서로의 친구들 5명씩을 모아 축제에 가기로 했다. 그가 말해 준 친구 명단에 K가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예정된 운명처럼 나의 파트너가 되었다. 마른 체구에 하얀 얼굴의 미대생이었다. 연약해 보이지만 카리스마가 있었고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좌중을 끄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친구들과 달리 그와 나는 축제에 함께 갈 수 없었다.
나도 K도 서로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밀고 당기는 신경전 끝에 그는 일회용 가면무도회 같은 축제에 참석할 수 없다고 했다. 너 없으면 파트너 못 구할 것 같으냐는 자존심으로 나는 다른 짝을 구해 축제에 참석했다. 그는 한 번 만남으로 끝나기 싫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는데 내 어린 자존심은 그걸 못 참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린 너무 닮아있었다. 함께 클래식음악을 좋아하고 테니스와 탁구를 즐기고 그는 그림을 전공하고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있었으니…. 그 시절엔 음악을 대부분 다방이나 감상실에 가서 들었다. 학교 앞에도 클래식 전문 다방이 일곱 곳 정도 있었다. 우리는 이런 곳에서 만나 음악을 듣곤 했다.
그 후 그는 군대를 갔다. K는 군대에 가기 전에 후배에게 맡겨놓은 화실에서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해 주었고, 군에 있을 동안 내 대학졸업을 축하한다며 다방에서 소품전을 열어주었다. 졸업과 동시에 나는 서울의 중등 교사로 발령받았고 그는 제대 후 화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는 내가 대학 4학년 때인가 군대를 갔기에 나와 만날 수 있던 날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다른 남자친구들을 만났고 교사가 된 이후에도 주변엔 항상 데이트할 상대가 있었다. 그러나 정작 결혼을 생각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K였다. 나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양복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와서 프러포즈를 해 달라고. 가난한 화가였던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늘 작업복만 입던 그가 멋쟁이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하나의 풍경은 선명하다. 비가 추적추적 오던 가을 어느 날 그의 화실. 아마 탁자엔 촛불이 켜있고 와인도 한 병 있었을 것이다. 레코드판에서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멋진 하모니를 이루며 크로이첼 소나타가 흐르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는 분위기 속에 우린 서로의 두 손을 잡았다. 그것뿐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그 일이 유일한 사건일 수 있었던 것은 70년대 우리들의 순정이 정말로 순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인연들 중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 것은 세월이 지나야 안다. 한국전쟁으로 그도 나도 아버지를 잃었고, 이북에서 엄마 등에 업혀 피난 내려와 서울에서 성장기를 거치며 가슴엔 각자 서로의 슬픔을 감추고 있었다. 외롭게 도서관이나 들락거리던 시절, 한동안 정서를 함께 나누었지만 모든 것을 털어낼 정도로 솔직해 보지도 못한 것 같다.
결국 헤어지게 되었고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 후 몇 번인가 우연히 만날 수 있었다. 우리도 다른 연인들처럼 나이 사십이 되면 첫눈 오는 날 덕수궁 돌담길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적이 있다. 그러나 사십이 되기 전 눈이 펄펄 내리던 날 그는 내가 근무하던 학교로 찾아왔다. 그날따라 나는 일찍 퇴근했었고 그가 남기고간 명함 한 장만 내 손에 전달되었다. 나는 많은 생각 끝에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 나에게 손바닥 크기의 유트릴로 화집을 선물했었다. 유트릴로와 그의 이미지는 닮아있다. 그가 찾아 왔던 날은 회색빛 하늘에서 끝도 없이 눈이 내렸다. 그날 하얗게 변한 세상 속 어디로 나는 걸어가고 있었을까. 그는 또 어디로 떠나간 것일까. 그 기억은 유트릴로의 그림 「눈이 내린 생-피에르 광장」을 생각나게 한다.
정연순
․눈물을 선택하다
․뉴스에 감염되었을까
․번지점프를 망설임
눈물을 선택하다
아들의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아기가 잘 못 돼서 소파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을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수태 소식에 기뻐하고 축하했던 것이 불과 몇 주일 전이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숨이 막혔다. 이틀 뒤에 수술이 예약되었다는데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 리가, 도리질을 쳤다.
다른 병원에 가서 고명한 의사에게 한 번 더 확인을 하기로 했다. 며늘아이 아네스가 말없이 베드에 누웠다. 눈들이 초음파 모니터에 고정되었다. 이게 웬 일인가. 쿵당쿵당 아기의 심장이 뛴다. 저 생명의 숨소리! 부채처럼 펼쳐진 아기집의 부드러운 움직임 속에 작은 점 하나. 그것이 숨을 쉬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소리가 그보다 거룩할까. 장하다! 고맙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축배를 들었다.
아기는 잘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정기검진에서 아기의 머리에 물혹이 발견되었다. 의사가 몇 가지 경우를 알려주었다. 물혹은 저절로 없어질 수도 있지만 정상아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면서 끔찍한 단어들을 줄줄이 입에 올렸다. 우리 가족의 삶이 순식간에 헝클어지고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천형의 선고였다.
국내 최고라는 또 다른 병원에서도 같은 소견이었다. 혹의 크기까지 정확하게 일러주면서 양수검사를 권하였다. 산모에게도 태아에게도 위험부담이 있지만 그 방법이 현재 의학으로서는 가장 확실하다고 하였다. 결과에 따라 낙태를 하거나 출산을 하거나 선택해야 했다. 낙태를 결행할 수 있는 시간도 열흘 정도 뿐, 그 시기가 지나면 출산할 수밖에 없단다.
대낮임에도 빛을 느낄 수 없었다. 내 몸 어딘가에서 아기의 숨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아들내외 얼굴이 흙빛이었다. 한나절 만에 얼굴이 반쪽이 돼 버린 아네스는 태중의 아기를 쓰다듬으며 고뇌에 차 있었다.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 지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그분의 뜻이 무엇일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걸까. 기도를 하고 대화를 하고 생각을 하고, 그래 봤자 한숨과 눈물뿐 답이 없었다. 장애 아이를 둔 지인의 사무친 고난과 그늘진 모습이 다가오고 자원봉사를 하면서 만난 장애아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절망하는 아비어미 모습을 차마 상상할 수 없었다. 우리 부부가 아기를 데리고 멀리 떠나서 여생을 바치리라.
마음은 하루에도 수십 번 뒤집기를 하였다.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 그런 아기라면 차라리 천사가 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태어난들 저는 행복할까. 낙태할 구실들이 떠오르고 그것이 현명한 선택이라는 속삭임이 끊이지 않았다. 미사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묵상을 하고, 그래도 행복 끝 불행 시작, 그 말마디만 맴돌았다. 부모로서 아들내외에게 어떤 선택도 권할 수 없었다. 생명을 거스르지 않기를 기도할 따름이었다.
결단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들 내외는 양수검사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둘이 똑 같이 단호한 것으로 보아 충분히 대화를 하고 기도를 하고 뜻을 모은 것 같았다. 검사를 해도, 하지 않아도 선택은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이 자녀도 주시는 대로 받을 따름이라고도 했다. 아들내외는 생명을, 눈물을 선택한 것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아네스, 거기 성녀가 흐느끼고 있었다.
사랑이 솟구쳤다. 이제 우리 부부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분명해졌다. 눈물 저 편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아들내외를 위로할 말이 없었다. 모든 말이 상투적이고 빈 말인 것 같았다. 말이란 말은 다 가볍고 싱겁게 느껴졌다. 검진 때마다 초음파모니터를 통해 아기를 만나는 아네스 심정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나는 아무래도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출산 날이 다가왔다. 무시로 가슴에 먹구름이 차오르고 회오리가 쳐도 내색하지 않았다. 동산만한 아네스의 배에 손을 얹고 고요하게 아기를 느끼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꾼 태몽을 떠올리곤 하였다. 여러 촉 중에 한 촉이 말라버린 난분에서 눈부시게 노란 꽃이 활짝 피어나더니 온 집안이 향기로 가득하더라는 그 꿈. 물혹은 저절로 없어질 수도 있다지 않는가. 그리고 잘 못 될 확률이 높다는 거지 100퍼센트 그렇다는 건 아니잖은가. 일말의 희망을 위해 혼신을 다해 마음을 모았다.
마지막 검진이었다. 마음을 굳게 먹어도 자꾸 가슴이 두근거리는 바람에 입을 꼭 다물고 의사의 입만 바라보았다.
“아! 혹이 안보이네요. 그렇죠? 안보이죠?”
끓이고 있었던 것처럼 눈물이 뜨거웠다. 혹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건강한 아기를 의미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낳아봐야 안다는 의사의 말이 야속하면서도 창조주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봄빛이 눈부신 날 아침, 아네스가 순산을 하였다. 빚어낸 듯 예쁘고 건강한 딸이었다. 머리에는 정말 아무 흔적도 없었다. 손톱 발톱 다 갖추었다. 실눈을 뜨고 꿈속인 듯, 배냇짓인 듯 오물거리기도 하고 앙앙 울어대기도 했다. 몸을 푼 아네스에게서 나는 시큼한 땀내가 달디 달았다. 아네스를 비추고 있는 그분의 미소가 내게도 속속들이 배어들었다.
뉴스에 감염되었을까
나에게는 ‘샘’이라는 이름의 모임이 있다. ‘사랑의 샘’인데 그냥 그렇게 부른다. 원래 성당의 단체에 소속되어 봉사활동을 하다가 하나 둘 이사를 하게 되면서 한 달에 한 번 얼굴이라도 보자고 해서 시작한 것이 30년을 바라본다. 워낙 신앙심이 두텁고 인성이 좋은 또래들이라 그 오랜 세월 동안 마음 상하는 일이 없었다. 누가 무슨 제안을 하든지 ‘아니’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고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다.
나이순으로 1년씩 돌아가면서 회장 혹은 족장이라 불리면서 모임을 이끌어 가는데 분위기와 활력은 변함없이 이어진다. 가족들의 공인은 물론 파격적인 지원까지 받는 행복한 모임이다. 이 친구들은 회칙이라고 할 것도 없는 매우 간단하고 어수룩한 약속을 다 같이 존중하면서 지켜오고 있다. 그중 하나가 회갑기념으로 순금 한 냥을 선물하는 일이다. 여섯이 받았고 이제 막내와 꽃띠가 남았다.
문제는 거기서부터다. 금값이 몇 해 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공 행진을 하는 것이다. 회갑기념 선물이니 때맞추어 주어야 하는데다 모아놓은 회비가 넉넉지 않아서 미리 사 놓을 수도 없었다. 금값이 이렇게 오르리라고 예측할 만큼 똑똑하지도 못하다 보니 어!? 어!? 하다가 오늘이 되었다. 석 달 후면 일곱 번째 막내의 회갑이 돌아오는데 어찌할 것인가? 회비를 부지런히 모아도 날아가는 금값을 따라잡을 재간이 없다.
둘러앉아서 그걸 의논하는데 하나같이 미리부터 웃음기를 머금고 있다.
“우리 그런 거 받았어? 받은 일 없다고 우기자. 수억 받고도 모른다는데 까짓 꺼.”
웃음보가 터진다.
“놋쇠로 해 주자. 대통령하겠다는 사람도 금 도장 받고 놋쇤 줄 알았다는데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이 모르는 거 당연하잖아.”
박자가 딱 맞는 맞장구에다 머리가 좋다며 추켜세우기까지 한다. 금하고 놋쇠하고 다른 거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농을 치는 연기도 수준급 능청이다. 점입가경이다.
“있지, 외제차 타는 사람은 안 해 주는 걸로 하면 어떨까?”
진즉에 그 생각을 왜 못했냐며 안타까운 듯이 실눈을 깜박거리는 추임새가 가관이다. 툭 하면 주인공의 차를 얻어 타고 단골기사로 부려먹는 주제들이 어깃장을 놓는데 정작 주인공은 생글거리며 한 술 더 뜬다.
“그래도 나는 기사 할 거야. 목만 자르지 마.”
하는 거 봐서 안 자를 수도 있다며 막강한 고용주처럼 목에 힘을 준다. 잘 할 테니까 봐 달라며 사정을 하는 주인공의 애교에 다들 웃느라 숨이 넘어간다.
“이러면 어때? 일단 놋쇠로 해 주는 거야. 그리고는 금으로 해줬는데 무슨 소리냐고 한통속으로 우기는 거야.”
여럿이 금을 주었다고 입을 모으면 놋쇠를 받았다는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 것이다. 생사람 잡는 일이다.
이쯤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가셨다. 누군가 우리 하는 짓이 뉴스를 보고 배운 대로라며 한숨을 쉬자 또 누군가가 배운 게 아니라 감염된 거라고 말을 바로 잡았다. 모두 끄덕였다. 씁쓸해서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지고 피로가 덮치는 것 같았다. 오염된 강에서 맑은 물을 마시려고 안간힘을 쓰는 물고기 신세와 무엇이 다를까.
누구에게나 옳지 않은 일이나 양심을 속이는 일에 대한 저항력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뉴스가 전하는 각양각색의 부정과 부패를 접하면서 반복되는 학습효과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곧은 의지가 흔들리고 무디어져서 모방심리가 발동하거나 울분이 터질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사례들을 질리도록 많이 보아왔다. 공은 바닥을 쳐야 튀어 오른다. 지금이 그 바닥이기를, 하여 뉴스에서 검고 썩은 사건의 비중이 점차 줄어든다면 한결 사는 맛이 돋우어질 것이다.
친구들은 신뢰와 사랑으로 다져진 건강한 어머니들이다. 사회적 오염에 완전무장에 버금가는 나름의 면역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서로를 존경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회갑선물에 대한 그런 발상들은 오염의 초기증상이 아니라 유쾌한 백신이 되어 더욱 강한 항체를 만들어내리라 믿는다.
린위탕(林語堂)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마른 잎은 굴러도 아직 대지는 살아있다. 새싹을 피워 올리는 힘 있는 대지, 살아있는 대지가 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가는 친구들이 있으니 세상이 그런 와중에도 줄기차게 성장해 가는 것일 게다.
번지점프를 망설임
카와라우 다리 위에 번지점프를 하려는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곤두선 긴장이 나에게 전이되어 입에 침이 마른다. 43m 까마득한 저 아래는 소용돌이치며 질주해 온 강이 잠시 숨을 돌리면서 짙푸르게 빛나고 있다. 밧줄을 매고 뛰어내리는 청년은 주문을 외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전을 위하여 젊음의 힘을 불러내는 기도일 것이다.
나도 조금 비슷했다. 어린 날의 여름에는 날이면 날마다 남창 거랑 쌔삐딸에서 멱을 감았다. 산이 워낙 가팔라서 새비탈, 쌔비탈, 쌔삐딸로 변했지 싶다. 산은 봉우리에서 쭉 뻗어내려 강물에 아랫도리를 담그고 또 물속에 하늘을 이고 봉우리를 담그고 있었다. 산의 이쪽 끝에 초등학교가 있고 저쪽 끝에 절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절의 스님이 땡땡이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새비탈에는 봄마다 오색 연등이 걸리고 여름 한철 벌거숭이들이 줄지어 다이빙을 했다.
머슴애든 가시나든 메리야스 팬티 하나로 그만이던 시절이었으니 책가방 놓고 겉옷만 벗으면 그대로 수영복이었다. 물장구치고 멱 감으면서 공연히 질러대는 아이들 소리로 거랑물도 씩씩하게 흘렀다. 좀 큰 아이들은 원숭이처럼 바위틈을 타고 올라 땡볕에 달아오른 바위절벽에 몸을 붙이고 다이빙 순서를 기다렸다. 네댓 길 되는 바위 위에 서서 다이빙 폼을 잡는 아이를 올려다보면 키가 훨씬 커 보이고 늘씬하고 야무져 보였다. 초자가 머뭇거리면 딴에 응원이랍시고 ‘괜찮아’를 외치고 덩치 있는 아이가 그러면 사정없이 ‘겁쟁이’라며 놀려먹었다.
나는 스타였다. 다이빙대에 똑 바로 서서 강 건너 수수밭을 바라보기도 하고 아이들을 내려다보고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 몇 초간의 긴장 끝에 결연한 각오로 무릎에 힘을 주고 허리를 펴고 두 팔을 위로 쭉 뻗는다. 하나아, 두울, 셋! 몸을 솟구쳐 손끝으로 물을 뚫으며 머리가 수직으로 수면에 닿게 뛰어내린다. 잠시 물소리에 섞이는 박수와 웃음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퐁! 솟구쳐 오르면서 머리를 흔들고 한 손으로 얼굴의 물을 쓰윽 훑어내리면 눈앞에는 웃는 차돌멩이 같은 얼굴, 얼굴들. 두어 번 개헤엄을 치면 발이 강바닥에 닿았다.
‘봤지? 이렇게 하는 거야.’ 그럼에도 벼락 치는 소리를 내면서 배가 먼저 떨어지는 아이도 가끔 있었다. 그때마다 배가 터져버리는 끔찍한 상상을 하면서 그 아이 꼬드긴 것을 후회하곤 했다. 얼굴이 벌게진 그 아이의 낭패감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다이빙 절대 하지 말라는 둥 놀란 화풀이를 해댔다.
죽을 뻔한 적도 있다. 바위 아래는 물색이 하도 진해서 무섬증이 들 정도였는데 발을 바닥에 대보려고 팔을 위로 치켜들고 아래로 내려가는 순간 꼬르륵 무언가에 끌려들어가는 것 같아 기겁을 하고 솟구쳐 올랐다. 다시는 물귀신에게 까불지 않기로 맹세, 또 맹세를 하였다.
입술이 파래가지고 덜덜 떨면서 물에서 나오면 온몸에 소름이 좍 돋았다. 저절로 옹송그려졌다. 그래도 서들에 서면 금방 따뜻해졌다. 발바닥에 돌멩이의 온기를 느끼면서 온몸으로 햇볕을 쬐는 기분, 세상이 다 나를 위해 있는 것만 같았다. 따끈한 돌멩이를 귀에 대고 옆으로 기울이면서 팔짝팔짝 뛰면 귀에서 미지근한 물이 찌르르 나왔다. 순간 귓구멍이 확 뚫리면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매미소리를 듣는 재미도 여간 아니었다.
어느새 나는 팬티 위에 윗도리로 러닝셔츠를 입어야 할 만큼 자랐다. 물에서 나올 때마다 전에 없이 민망스러웠다. 물이 빠지면서 메리야스는 어찌 그리도 몸에 찰싹 달라붙던지 엉거주춤하고서 메리야스를 떼어내기 바빴다. 그리고 또 몇 해가 지나자 밤이라야 멱 감으러 거랑에 갈 수 있었다. 그것도 반드시 복숙이 언니와 함께였다. 물 가운데서 먼저 온 아낙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나고 이리 들어오라는 신호가 왔다. 옷을 벗거나 인기척에 숨을 죽이거나 달을 바라보거나 모두 어른들을 따라했다. 은밀한 설렘이 일렁거렸다. 야릇한 우스개도 어렴풋 눈치 챌 수 있었다.
저만치 윗물은 남정네들 차지였다. 목소리만으로도 누구다라며 킥킥 아낙네들은 내숭을 떨었다. 눈치 빤한 내가 모를 리 없었다. 남정네가 헤엄을 치면 아낙네들이 자지러졌다. 첨벙대는 소리와 물결을 타고 전해지는 묘한 흥분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밤마다 기를 쓰고 복숙이 언니를 따라나섰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소녀를 벗어나고 있었다.
가슴이 도도롬해져 가는데도 나는 철들지 않아서 봄이건 여름이건 무한정 찾아올 줄 알았다. 그랬던 내가 번지 점프를 망설이고 있다. 하자니 겁이 나고 안하자니 지금 아니면 영영 못해볼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쓸쓸해진다. 나이가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를 않는다. 뛰자니 무모한 것 같고 돌아서자니 겁쟁이 같다. 결국 멋있게 팔을 벌리고 뭐라고 소리를 지르며 낙하하는 젊은이에게 박수를 쳐주고 돌아서면서 쌔삐딸 다이빙을 추억한다. 카와라우 번지점프하고는 댈 바도 아니게 재미있었던 쌔삐딸 다이빙이다. 문득 광고카피가 떠오른다. “니들이 그 재미를 알어?”
첫댓글 누군가 우리들 글을 보고 너무 교과서 적이고 딱딱하다지만 그래도 난 한양수필이 좋아 . 시는 단어에 뜻이있고 소설은 사건 을 구성해가고 수필은 인간성이 담긴 품위를 중요하게 여기니 한양식구들 모두 격을 높혀봅시다.
하모하모요. 박광정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수필은 군자라 하시더라고요.
장공주님. 잠은 언제 자나요? 몸조심도해야지 한양수필도 건강해질걸. 아직20대니 40대50대 까지 잘 가봅시다.
ㅋ ㅋ 염려마시어용 ~~~^^
장선생님! 카카오 톡으로 대화를 나누니까 더욱 더 정감있게 느껴졌어요.
저는 오늘 예술의 전당을 다녀왔어요. 디즈니전을 보고 왔어요. 아주 귀한 시간이었어요. 특히 '라푼첼' 은 언제봐도 또 보고싶은 영화인 것같아요. 월트 디즈니의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호기심, 자신감, 용기, 불변성, 이중에서도 자신감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그리고 일단 이거다 생각하면 추호도 의심도 말고그것에 빠져들라고..
어제 반가웠어요. 장선생님!!! 수고 많으세요. 아름다운 카페를 만들어주시느라~~~~~
격려 고맙습니다 박현주 선생님!! ^^
그리 힘든 일도아닌데요 뭐
어쨌거나 한달이면 딱 한번 보던 우리 회원들을
카페에서 자주 보니 너무 좋고 더 가까워진 것 같아 좋네요 자주자주 뵈요.
어젠 예당 야외무대에서 비를 철철 맞으면서 오페라를 봤답니다. 너무 좋았어요.~~ㅎㅎ
아..예당 야외무대에서 리허설하는 것을 봤어요. 저는 일요일날이요.
이름이 기억이 안나네요. 바리톤 서00의 아리랑 편곡과 향수,...작은 키에 무대를 뛰어 다니면서 리허설하는 모습이 꽤 매력적이던데요. 샘!!
매주말 야외무대에서 공연을 하나봐요. 저는 그 근처에는 안살지만 ....이번 비로 피해가 있긴했지만 참으로 매력있는 곳이예요. 주차장도 공사를 하고 국악당까지 가서 주차를 했거든요. 웬지 예당에서 우연히 만날것같은 예감이드네요. 장선생님! 좋은 하루 되세요~~~~
그러셨군요 ' 오페라 온 스퀘어 ' 였구요 바리톤 서정학. 소프라노,이수연. 가수,테이 등이 모스톨릭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 맞추어 세빌리아의 이발사 중 '나는 이 거리의 최고의 이발사' 마술피리 중 '밤의 여왕' 아리아 등을 비에 흠뻑 젖으며 듣는 맛이란 특별한 감동이였답니다.
앞으로 4주 동안 다체로롭고 멋진 공연이 계속 이어진답니다, 토,일 이예요 ~~ ^^ 구경오세요. 올해는 홍신자씨가 죽산 국제공연을 하지 않네요 신혼 재미에 푹 빠졌나봐요. ^^ ㅎ
장선생님도 늦게까지 작업하시네요. 아! 감사합니다. 서정학씨의 이름이 생각이 안났어요. 아들이 고 3이라서 공연히 마음만 바쁘고..오늘도 비가 많이 왔지요? 저는 비오는 데 홍대 거리를 기웃거렸어요. 지인이 "이지바이"라는 빵집에 대해서 알아본다고 해서요. 덕분에 빵집 사장님도 만나고..와플과 커피도 마시면서 오랫만에 고 3 엄마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있었어요. 네..이번 주말은 화창한 날씨였음 좋겠네요. 늦게 자면 피부에 안좋다하는데..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장선생님!!!!~~~~~~
그러셨군요. 고3엄마 힘들지요.
그래도 마음 편히 가지세요. 아이를 믿으시고요.
스트래스 받지 마시고 편안하게 즐겨보세요. 그러면 아이도 함께 가벼워 진답니다.
얼마전 홍대 앞에서 실험 예술제가 열렸죠?
각국의 예술인들이 참여해서 다채롭고 새로운 세계를 펼쳤어요.
문화의 힘은 창조의 원천이기때문에 모든이에게 꿈의 실현이란 새힘과 용기를주는것 같아요~~
피부 걱정은 잠시 밀쳐두고 마음이 시키는대로 한답니다. ~~ㅎㅎ
이렇게 카페에서 장선생님과 데이를 하는 재미도 솔솔하네요.
사진, 글, 그림..음악!! 정말 대단하십니다.
오늘 신문을 읽는데...앤소니 브라운이라는 동화작가가 이렇게 말하던데요..
무한한 상상력을 가질려면 어른들도 아이들 그림을 그려야한다고...
정말 세상은 살만 한것같아요.
도전할 게 너무 너무 맣아요.
샘의 카카 내용처럼 ..늘 도전하면서 그렇게 ...
샘...카르페디엠~~~~
나는 한때 그것을 '현재를 즐겨라, 삶을 즐겨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현재에 몰입하라'로 이해하기로 했다.
그것은 현재를 즐기는 것뿐만 아니라 고통, 고뇌도 모두 받아들여,
그 속에서 자신을 훨훨 불태우는 것을 의미했다.
---- 이지상<언제나 여행처럼>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