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M. 쿤데라, 민음사
언젠가 웹서핑을 하다가 우스개 란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잠시 웃다가 깊이 씁쓸해지는 내가 떠올라, 오늘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합니다.
뜨거운 뙤약볕이 신록조차 시들게 하는 시골의 여름날 마루에 앉아 책을 보고 있던 남자는 살포시 열려 있던 담장 쪽 대문 너머로 한 아가씨의 모습을 봅니다.
호박밭에 다소곳이 앉아서 일을 하고 있던 그녀의 이마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고 그 땀방울은 마치 이슬과도 같아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남자는 이 여자가 바로 자신의 인생의 지침을 돌려놓을, 잃어버린 갈비뼈의 주인이라 여겼습니다.
평생을 함께 하고픈 그 여자임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입니다. 허구헌날 백면서생처럼 책의 행간이나 뒤척던 그였습니다. 도(道) 트이는 전 과정, 영민함과 몽롱함이 동시에 내비치는 얼굴은 그의 첫인상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뫼르소'를 마취시켜버린 태양을 견디는, 건강한 노동과 완전히 물아일체가 된 여자의 모습은 도인의 삶을 사느라 첩첩 쌓였을 온갖 번뇌와 괴로운 기억들, 고독에 대한 많은 상념들을 떨치게 해주었던 게지요. 그가 적정하고 그녀에게로 발걸음을 옮겨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준비된 말을 합니다.
“나는 순간 당신의 모습을 보고서 사랑에 빠져 버렸습니다. 너무 아름답습니다. 나에게 그런 아름다움과 함께 할 수 있는 무한의 영광을 주십시오”
그러나 여자는 묵묵부답입니다. 고개를 깊숙이 떨어뜨리고 뭔가 고민하는 눈치였습니다. 몹시 수줍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여자의 그런 모습은 남자에게 더이상 운명적 만남을 뒤로 기약할 수 없는 매력으로 성큼 다가옵니다. 여자에게 용기라도 북돋을 양, 남자는 가가이 다가서며 속삭이듯 한 마디 거듭니다.
“지금 당장 대답을 안주시면 여기 이 자리에서 그대로 마냥 기다리겠습니다.”
머뭇머뭇하던 여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드문드문 입을 엽니다.
“저어기…, 거시기…, 지금…, 나중에 말씀하시면 안될까요? 시간이 좀더 필요하거든요. 저…, 지금…, 응가 누는 중인데, 요즘 변비가 심해 시간이…”
밀란 쿤데라의 글을 보면 저는 그의 재능에 번번히 놀랍니다. 그러면서도 안타까움이 항상 독후감처럼 남습니다. 그럴 때마다 꼭 그의 어깨라도 부여잡고 “고마해라, 많이 썼다, 아이가.”하고 비명을 질러주고 싶어집니다. 그는 늘 똑같은 이야기에 천착(혹은 집착)합니다. 그것은 마치 앞서 말했던 이 우스개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그의 문장은 문학적이고 시적입니다. 사유는 명민하고 예민합니다. 호흡은 또 얼마나 간당간당(看堂―)한지요. 사소한 것에도 인생의 비밀을 통째로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성적 동물들이 실은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과정을 말입니다.
쿤데라는 남자가 호박 덩굴 사이로 엉덩이를 까고 똥을 누는 여자를 보며 생각하는 그런 모든 과정과 심리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는 장난꾸러기입니다. 여자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그 순간 다가가서 그런 고백을 해야 하는 남자의 상황을 합리화합니다. 모두 다 합당하다고 느껴지게 만듭니다. 실은 그것이 우리가 사용하는 자기 합리화의 방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을 말입니다. 결국 여자가 ‘진실’을 밝혔을 때, 우스운 ‘농담’보다 더 못다는 사실(의미)을 말하는 데, 쿤데라는 거의 자기 인생을 다 들이는 것만 같습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천착하면 할수록 점점 더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워지는 존재의 우화는 병적으로 자기 성찰적인 우리의 우화입니다. 그것은 쿤데라라는 천재의 인생을 소모시켜야 했을 만큼, 그가 병적으로 붙들고 있는 ‘거울’이기도 하고 그런 쿤데라를 이런 식으로 ‘오독’하고 마는 제 안의 ‘트라우마’이기도 할 텝니다.
※Profile
1929년 체코 브뢴 출생
1948년 프라하 예술대학 입학, 체코 공산당 입당
1949년 첫 시집 넓은 『정원같은 인간』 출간
1958-68년 프라하 예술대학 영화학과 교수
1967년 『농담』으로 체코 작가연맹상 수상
1968년 단편소설 모음집 『우스꽝스러운 사랑』으로 체코 작가출판사상 수상
1970년 반체제 운동으로 체코 공산당에서 제명
1973년 『생은 다른 곳에』(프랑스에서 불어로 출간)로 프랑스 메디치상 수상
1975년 프랑스로 망명, 렌느 대학에서 비교문학 강의
1979년 연작소설집 『웃음과 망각의 책』으로 인해 체코 공민권을 박탈당함
1984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출간
2000년 『향수』 출간
※국내 출간된 도서
『열애』, 현실과미래사, 2002
『책 그림책』, 민음사2001
『향수』, 민음사, 2000
『견딜 수 없는 미쳐 버리고 싶은』, 현실과미래사, 2000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한국외국어대학교, 2000
『시인이 된다는 것』, 세시, 1999
『농담』, 민음사, 1999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1999
『정체성』, 민음사, 1998년 12월
『생은 다른 곳에』, 까치글방, 1998
『이별』, 하문사, 1998
『가볍고 우울한 사랑』, 거송미디어, 1998
『소설의 기술』, 책세상, 1998
『지혜』, 하문사, 1997
『사랑』, 예문,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