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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안을 작성할 때 지켜야 할 사항]
1. 답안은 연필, 볼펜 등 흑・청색 필기구로 작성할 것. 2. 자신의 신원을 드러내는 표현을 쓰지 말 것. 3. 한 편의 완결된 글로 쓸 것. 4. 어문 규정과 원고지 작성법에 따를 것. |
【 문 제 】
다음 제시문의 요지(要旨)를 200자 이내로 쓰고, 글쓴이의 주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제목을 붙여 2,800자 정도(띄어쓰기 포함 ±200자 허용)로 논술하시오.
[제시문]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하고, 이타주의는 집단주의와 동일시하는데, 이것은 낭만주의적 관념의 영향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인간이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중요성을 어떻게 잘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주요한 문제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 우리는 흔히 우리 자신을 넘어선 어떤 것, 우리가 헌신할 수 있는 어떤 것, 우리가 그것을 위해 희생해도 될 어떤 목적을 지향해야만 한다고 여기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따라서 그와 같은 어떤 것은 바로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임해야 할 집단적인 것임에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희생하라는 말을 듣게 되며, 동시에 그렇게 하면 훌륭한 거래를 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희생을 한다 하더라도 그 결과 명예와 명성을 얻게 된다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는다. 우리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영웅, 곧 역사의 ‘주역(主役)’이 될 것이요, 작은 위험을 무릅쓴 대가로 큰 보상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극소수 사람들만의 가치가 인정되고 평범한 사람들은 버림받은 시대의 미심쩍은 도덕률이요, 역사 교과서에 한 자리 차지할 기회를 가진 정치적 귀족이나 지적 귀족들의 도덕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도저히 정의와 평등주의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도덕률일 수가 없다. 역사적 명성이란 정의로운 것일 수 없는 것이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 못지 않게 존귀한 무수한 사람들은 언제나 잊혀지게 될 것이다. 한층 고차적인 보상은 후대만이 줄 수 있다는 윤리적 교설이 눈앞의 보상을 찾으라고 가르치는 교설보다 아마 어떤 면에서 조금 우월하리라는 것은 인정해야 마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교설은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성공과 보상을 거부하는 윤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윤리는 굳이 창안해 낼 필요도 없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이미 기독교가 가르쳤던 것이다. 적어도 초창기 기독교는 그러했다. 그것은 다시 우리 시대에 와서 산업에서의 협업뿐만 아니라 학문 활동에서의 협업이 가르치는 바이기도 하다. 다행스럽게도 낭만적인 역사주의적 명성의 도덕률은 이제 쇠퇴의 길에 접어든 것으로 보인다. 무명 용사가 그것을 보여준다. 희생은 익명으로 이루어졌을 때 더 소중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의 윤리 교육도 이 길을 따라야만 한다. 우리는 자기의 일을 행하도록 배워야만 하고, 우리가 자신을 희생할 때는 그 일 자체를 위며, 허구적인 ‘역사의 의미’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정당성은 우리의 일에서, 말하자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일 자체에서 찾아야 마땅하며, 허구적인 ‘역사의 의미’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
3. 문제 해설
1) 문제의 구성
이번 시험 문제는 1) 제시문의 요지 쓰기와 2) 자기 글의 제목 달기 그리고 3) 논술 본문 쓰기, 이렇게 3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지 쓰기는 남의 글을 올바르게 읽고 이해하여 그 핵심 내용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올바른 요지 파악은 토론에서 논점을 잃지 않도록 해 주는 것으로, 이를 잘한다는 것은 남의 글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하는, 이른바 논리적 사고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말한다.
제목은 글 전체의 얼굴과 같다. 그러므로 제목은 글 전체의 핵심 내용을 첫눈에 짐작케 해 줄 수 있어야 하며, 되도록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그러니까 자기 글의 제목을 적절히 붙일 수 있다는 것을 자기 생각을 요령 있게 전달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본문 쓰기는 <논술> 시험의 본령으로서 글쓴이의 종합적인 사고 능력과 표현 능력이 이를 통해 드러난다.
2) 제시문의 출전 및 제시문을 출제지문으로 선택한 이유
제시문은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주로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한 과학철학자이자 사회철학자인 포퍼(K. R. Popper, 1902-1994)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초판 1945, 수정 제5판 1966)의 한 대목을 우리말로 옮기고 몇 문장을 바꾼 것이다.
일반적인 대입논술 문제로서 흔히 예상될 수 있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간의 대비’ 문제와 같이 단선적이고 평면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오해되어 비난받고 집단주의가 이타주의(혹은 역사주의)라는 미명아래 권장되고 있는 사태를 비판하고 건전한 개인주의적 삶을 옹호하는’ 다소 복선적이고 입체적인 문제로서 학생들의 논리적 분석력과 사고의 깊이를 평가할 수 있는 문제라 생각된다. 썩 명문장이라 하기는 어렵고 다소 난해하듯 하나 논리적, 비판적 사고력, 현실 응용력 평가에 적합하다고 생각되고 특히 논술능력에 있어 우수학생을 선발하는데 변별력이 충분한 것으로 사료되어 선택되었다.
3) 제시문의 요지
읽는 이의 시각에 따라서 요지는 여러 가지로 파악되겠으나, 적어도 다음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예시 1】
“흔히 개인주의는 이기주의로, 이타주의는 집단주의로 오해되어 왔다. 이같은 오해로 인해 지난 날 이타주의의 미명 아래 개인을 희생, 역사적 사명에 투신하라는 집단주의 윤리가 강요되었고, 개성 발양을 위한 개인주의는 이기주의로 격하 비판되었다. 새로운 시대에는 소수 정치적 귀족을 위한 집단주의적 윤리가 지양되고, 개개인의 삶이 사회의 중추를 이루는 개인주의적 도덕률이 선양되어야 한다.”
【예시 2】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이타주의와 집단주의는 명확히 구별되어야 한다. 집단적인 목적을 위해 개개인의 일을 희생하도록 요구하는 집단주의적 윤리는 정의와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의 도덕률이 될 수 없다. 개개인의 행위의 보상을 ‘역사적 의미’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일 자체에서 찾는 개인주의적 윤리가 새 시대에는 확립되어야 한다.”
【예시 3】
“이타주의의 이름 아래 집단주의적 사고가 은연중에 강요될 수 있다. ‘역사적 사명’을 논하는 것도, 후대에 올 어떤 보상을 위해 희생하라는 윤리도 극소수 엘리트의 도덕률이 횡행하던 시대의 유물이다. 이것은 평등주의와 정의에 배치된다. 새 시대에 필요한 것은 자기 행위에 대한 어떤 보상을 바라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는 일이기에 이를 추구하는 개인주의 윤리다.”
【예시 4】
“과거는 ‘역사적 사명’이란 미명 아래 평범한 사람들을 오도하여 그들의 희생을 강요하던 귀족들의 도덕률이 지배했다. 그러나 이것은 집단주의적인 것이요, 정의와 평등주의에 어긋나는 것이다. 우리는 초기 기독교와 현대의 협업 체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개개인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면서도 그것이 사회 전체에 기여하게 되는 그런 삶을 영위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다.”
3. 평가 및 채점 원칙
1) 채점 요소 및 기준
(1) 지시 사항을 준수하고 있는가?
① 답안의 길이 (허용 분량 2,600-3,000자 기준 일정 한도 초과 또는 미달의 경우 감 점. 1,300자 미만 0점)
② 원고지 작성법 (어긴 경우 감점)
③ 맞춤법 (틀린 경우 감점)
④ 어휘와 문장 (어법에 어긋난 경우 감점)
⑤ 필기구 (지정되지 않은 것을 사용한 경우 감점 또는 0점)
⑥ 신원 (노출시킨 경우 0점)
(2) 문제의 3구성 요소에 적절하게 답하고 있으며, 답안 구성 요소간의 연결이 적 절한가?
① 요소별 분리 채점
② 요소 간 연결이 부적절한 경우 감점 (특히 제목과 본문 사이의 연관성 주목)
(3) (본문 쓰기에서) 논제 설정은 올바르고, 논거는 적절한가?
① 본문의 논제가 제시문의 요지와 상관이 있는가? (논점 일탈의 경우 0점)
② 논거는 적합한가? (부적합하거나 중첩될 경우 감점)
(4) 글의 짜임새가 논리적이고, 표현은 적절한가?
① 문단을 제대로 구분하고 있는가?
② 서두의 시작과 결말의 매듭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③ 본론에서 얼마나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④ 문장의 표현이 자연스럽고 적절한가?
2) 채점 단계와 수상자 선정 방법
(1) 채점은 3단계로 한다. 제1단계에서는 2인 채점위원의 채점 결과를 합산하여 상위 300명(최하 등위자에 동점자가 있을 경우에는 동점자 전원 포함)을 선발한다. 제2단 계에서는 제1단계 선발자 전원을 대상으로 3인의 교수 채점위원이 채점한 결과를 합 산하여 상위 60명(최하 등위자에 동점자가 있을 경우에는 동점자 전원 포함)을 선발 한다. 제3단계에서는 제2단계 선발자 전원을 대상으로 출제위원 중 3인의 채점위원 이 채점한 결과를 제2단계 채점 결과와 합산하여 순위를 정한다.
(2) 상위 등위자 4명의 답안지를 6인(제2, 3단계 채점위원 전원) 수상자 선정위원회에 서 재검토하여 대상 1명, 금상 3명을 선정한다.
Ⅱ. 경시대회 결과분석
1. 경시대회 결과 개황
1) 참가자 지역별 분포
지역 |
남 |
여 |
계 | ||||||
1학년 |
2학년 |
3학년 |
소계 |
1학년 |
2학년 |
3학년 |
소계 | ||
강원 |
0 |
1 |
8 |
9 |
1 |
5 |
14 |
20 |
29 |
경기 |
5 |
12 |
100 |
117 |
13 |
19 |
64 |
96 |
213 |
경남 |
1 |
7 |
27 |
35 |
1 |
6 |
34 |
41 |
76 |
경북 |
0 |
1 |
19 |
20 |
1 |
10 |
12 |
23 |
43 |
광주 |
0 |
3 |
39 |
42 |
0 |
0 |
19 |
19 |
61 |
대구 |
2 |
7 |
41 |
50 |
1 |
8 |
39 |
48 |
98 |
대전 |
1 |
11 |
28 |
40 |
1 |
6 |
16 |
23 |
63 |
부산 |
0 |
13 |
65 |
78 |
9 |
19 |
48 |
76 |
154 |
서울 |
7 |
20 |
249 |
276 |
10 |
40 |
189 |
239 |
515 |
울산 |
1 |
0 |
7 |
8 |
0 |
0 |
6 |
6 |
14 |
인천 |
3 |
6 |
39 |
48 |
0 |
5 |
54 |
59 |
107 |
전남 |
0 |
0 |
10 |
10 |
0 |
3 |
9 |
12 |
22 |
전북 |
3 |
4 |
30 |
37 |
0 |
11 |
23 |
34 |
71 |
제주 |
0 |
0 |
1 |
1 |
0 |
1 |
3 |
4 |
5 |
충남 |
0 |
2 |
48 |
50 |
2 |
3 |
38 |
43 |
93 |
충북 |
0 |
2 |
16 |
18 |
1 |
6 |
20 |
27 |
45 |
계 |
23 |
89 |
727 |
839 |
40 |
142 |
588 |
770 |
1,609 |
2) 참가자 및 수상자 성별분포
참가자 |
수상자(장려상 이상) | ||||
남 |
여 |
소계 |
남 |
여 |
소계 |
812(50.5%) |
797(49.5%) |
1609(100%) |
23(42.6%) |
31(57.4%) |
54(100%) |
3) 수상자 지역별·학년별 분포
학년별 |
서울 |
부산 |
인천 |
대전 |
대구 |
광주 |
경기 |
강원 |
소계(A) |
1 |
0 |
0 |
0 |
1 |
0 |
0 |
0 |
0 |
1 |
2 |
2 |
0 |
0 |
1 |
0 |
0 |
1 |
0 |
4 |
3 |
17 |
3 |
2 |
2 |
2 |
3 |
5 |
1 |
35 |
계 |
19 |
3 |
2 |
4 |
2 |
3 |
6 |
1 |
40 |
학년별 |
충북 |
충남 |
전북 |
전남 |
경북 |
경남 |
제주 |
소계(B) |
총계(A+B) |
1 |
0 |
0 |
0 |
0 |
0 |
0 |
0 |
0 |
1 |
2 |
0 |
0 |
0 |
0 |
0 |
0 |
0 |
0 |
4 |
3 |
1 |
6 |
3 |
1 |
1 |
2 |
0 |
14 |
49 |
계 |
1 |
6 |
3 |
1 |
1 |
2 |
0 |
14 |
54 |
2. 수상자 명단
구 분 |
이 름 |
학 교 |
학 년 |
지 역 |
대 상 |
한윤형 |
유성고등학교 |
3 |
대전 |
금 상 |
이경원 |
충남고등학교 |
2 |
대전 |
오정은 |
전주여자고등학교 |
3 |
전북 | |
정병기 |
고려고등학교 |
3 |
광주 | |
은 상 |
주대성 |
광남고등학교 |
3 |
서울 |
김태인 |
경기고등학교 |
3 |
서울 | |
한 샘 |
대덕고등학교 |
1 |
대전 | |
채민기 |
세광고등학교 |
3 |
충북 | |
성인혜 |
대영고등학교 |
2 |
서울 | |
동 상 |
송상현 |
상문고등학교 |
3 |
서울 |
김태순 |
용남고등학교 |
3 |
충남 | |
조아라 |
계산여자고등학교 |
3 |
인천 | |
최재철 |
장훈고등학교 |
3 |
서울 | |
유선우 |
경북외국어고등학교 |
3 |
경북 | |
윤세희 |
복자여자고등학교 |
3 |
충남 | |
박진희 |
경희여자고등학교 |
3 |
서울 | |
양승우 |
한영외국어고등학교 |
3 |
서울 | |
장미영 |
경명여자고등학교 |
3 |
대구 | |
진명희 |
성지여자고등학교 |
3 |
경남 | |
김지은 |
과천고등학교 |
3 |
경기 | |
임현태 |
광신고등학교 |
3 |
서울 | |
안혜성 |
신목고등학교 |
2 |
서울 | |
이혜영 |
덕문여자고등학교 |
3 |
부산 | |
남궁정 |
유성고등학교 |
3 |
대전 | |
김기선 |
흥진고등학교 |
2 |
경기 |
구 분 |
이 름 |
학 교 |
학 년 |
지 역 |
장 려 상 |
최성관 |
이리고등학교 |
3 |
전북 |
이정훈 |
오성고등학교 |
3 |
대구 | |
김지현 |
천안여자고등학교 |
3 |
충남 | |
최서윤 |
영파여자고등학교 |
3 |
서울 | |
박현영 |
부산국제고등학교 |
3 |
부산 | |
고은영 |
광양제철고등학교 |
3 |
전남 | |
박병준 |
경기고등학교 |
3 |
서울 | |
정혜성 |
부산국제고등학교 |
3 |
부산 | |
이화정 |
기전여자고등학교 |
3 |
전북 | |
이정섭 |
가포고등학교 |
3 |
경남 | |
홍미회 |
예산여자고등학교 |
3 |
충남 | |
허수진 |
명덕외국어고등학교 |
3 |
서울 | |
김현주 |
예일여자고등학교 |
3 |
서울 | |
고서연 |
숙명여자고등학교 |
3 |
서울 | |
정희찬 |
광주제일고등학교 |
3 |
광주 | |
문정아 |
동신여자고등학교 |
3 |
광주 | |
김용수 |
남한고등학교 |
3 |
경기 | |
김아름 |
의정부여자고등학교 |
3 |
경기 | |
차승우 |
과천고등학교 |
3 |
경기 | |
한명균 |
예산고등학고 |
3 |
충남 | |
고은정 |
예산여자고등학교 |
3 |
충남 | |
윤종한 |
구정고등학교 |
3 |
서울 | |
김영인 |
효원고등학교 |
3 |
경기 | |
김문수 |
대일외국어고등학교 |
3 |
서울 | |
양서정 |
세화여자고등학교 |
3 |
서울 | |
최윤혁 |
대인고등학교 |
3 |
인천 | |
김운영 |
중경고등학교 |
3 |
서울 | |
김하영 |
상문고등학교 |
3 |
서울 | |
이한섭 |
원주고등학교 |
3 |
강원 | |
김기선 |
흥진고등학교 |
2 |
경기 |
▶ 가작 100명
구 분 |
이 름 |
학 교 |
학 년 |
지 역 |
가 작 |
윤혜원 |
성일여자고등학교 |
3 |
부산 |
노성민 |
신일고등학교 |
3 |
서구 | |
김소현 |
경명여자고등학교 |
3 |
대구 | |
김정현 |
청운고등학교 |
3 |
울산 | |
이민철 |
오금고등학교 |
3 |
서울 | |
이지혜 |
남성여자고등학교 |
1 |
부산 | |
채영림 |
부천여자고등학교 |
3 |
경기 | |
오기석 |
광남고등학교 |
3 |
서울 | |
하륜 |
인성고등학교 |
2 |
광주 | |
윤계연 |
서현고등학교 |
3 |
경기 | |
이다은 |
숭의여자고등학교 |
3 |
서울 | |
임성민 |
유성고등학교 |
3 |
대전 | |
서정숙 |
동대전고등학교 |
3 |
대전 | |
정학진 |
서울고등학교 |
3 |
서울 | |
정광현 |
남성고등학교 |
3 |
전북 | |
김가영 |
충북여자고등학교 |
3 |
충북 | |
김은경 |
경기여자고등학교 |
3 |
서울 | |
류준오 |
광주제일고등학교 |
3 |
광주 | |
한종남 |
한영고등학교 |
3 |
서울 | |
최고운 |
서울외국어고등학교 |
3 |
서울 | |
김태열 |
과천고등학교 |
3 |
경기 | |
최준호 |
보문고등학교 |
3 |
대전 | |
조유리 |
부산외국어고등학교 |
3 |
부산 | |
이동언 |
중산고등학교 |
3 |
서울 | |
신현단 |
천안여자고등학교 |
3 |
충남 | |
김수형 |
한영고등학교 |
3 |
서울 | |
한승훈 |
백암고등학교 |
3 |
서울 | |
채필규 |
양재고등학교 |
3 |
서울 | |
황인창 |
휘문고등학교 |
3 |
서울 | |
정성윤 |
살레시오고등학교 |
3 |
광주 | |
김영철 |
서천고등학교 |
3 |
충남 | |
최미지 |
성모여자고등학교 |
3 |
부산 | |
하지수 |
우석여자고등학교 |
3 |
전북 | |
정신구 |
광성고등학교 |
3 |
인천 | |
장영래 |
광신고등학교 |
3 |
서울 | |
박인혜 |
경기여자고등학교 |
3 |
서울 | |
구병성 |
세광고등학교 |
3 |
충북 | |
송정인 |
광주과학고등학교 |
3 |
광주 | |
김준성 |
목포고등학교 |
3 |
전남 | |
최익준 |
보문고등학교 |
3 |
대전 | |
김현호 |
홍성고등학교 |
3 |
충남 | |
정민교 |
계산고등학교 |
3 |
인천 | |
신의성 |
화홍고등학교 |
2 |
경기 | |
권경선 |
안동여자고등학교 |
2 |
경북 | |
류서린 |
유일여자고등학교 |
3 |
전북 | |
정소영 |
이화여자고등학교 |
3 |
서울 | |
김래윤 |
여의도여자고등학교 |
3 |
서울 | |
강민정 |
덕성여자고등학교 |
2 |
서울 | |
박정미 |
영도여자고등학교 |
3 |
부산 | |
김충순 |
한밭고등학교 |
3 |
대전 |
구 분 |
이 름 |
학 교 |
학 년 |
지 역 |
가 작 |
신수경 |
제일여자고등학교 |
2 |
경남 |
김하나 |
숭의여자고등학교 |
3 |
서울 | |
신재현 |
예산고등학고 |
3 |
충남 | |
송영훈 |
순천고등학교 |
3 |
전남 | |
윤지환 |
대동고등학교 |
3 |
부산 | |
김희선 |
한영외국어고등학교 |
3 |
서울 | |
이승우 |
한영고등학교 |
3 |
서울 | |
이새롬 |
민족사관고등학교 |
3 |
서울 | |
이상현 |
동북고등학교 |
3 |
서울 | |
정병욱 |
반포고등학교 |
3 |
서울 | |
임태현 |
서라벌고등학교 |
3 |
서울 | |
강상효 |
중산고등학교 |
3 |
서울 | |
강정화 |
한서고등학교 |
3 |
서울 | |
노형우 |
창원남고등학교 |
3 |
경남 | |
김진수 |
창신고등학교 |
3 |
경남 | |
우정호 |
대신고등학교 |
3 |
서울 | |
장경숙 |
구미여자고등학교 |
3 |
경북 | |
이치훈 |
세일고등학교 |
3 |
인천 | |
이현정 |
근영여자고등학교 |
3 |
전북 | |
이호영 |
진성고등학교 |
3 |
인천 | |
류미진 |
이화외국어고등학교 |
3 |
서울 | |
손효진 |
경북여자고등학교 |
3 |
대구 | |
김명진 |
성지여자고등학교 |
3 |
경남 | |
조현아 |
혜성여자고등학교 |
3 |
서울 | |
장정희 |
대전여자고등학교 |
3 |
대전 | |
허윤 |
대원고등학교 |
3 |
서울 | |
윤영인 |
백암고등학교 |
3 |
서울 | |
방현영 |
광양제철고등학교 |
3 |
전남 | |
진원 |
전북과학고등학교 |
1 |
전북 | |
정성태 |
성일고등학교 |
3 |
경기 | |
최윤정 |
대구여자고등학교 |
3 |
대구 | |
김진만 |
한국교원대학교부속고등학교 |
3 |
충북 | |
김민지 |
유일여자고등학교 |
3 |
전북 | |
신정수 |
조선사대고 |
3 |
광주 | |
최재훈 |
남강고등학교 |
3 |
서울 | |
김문석 |
조선사대고 |
3 |
광주 | |
박지은 |
신목고등학교 |
3 |
서울 | |
경우선 |
양정고등학교 |
3 |
서울 | |
신효정 |
연수여자고등학교 |
3 |
인천 | |
임채욱 |
남강고등학교 |
3 |
서울 | |
김민정 |
안양고등학교 |
3 |
경기 | |
문영재 |
목포여자고등학교 |
3 |
전남 | |
이예림 |
숙명여자고등학교 |
3 |
서울 | |
김병선 |
중동고등학교 |
3 |
서울 | |
구설영 |
남성여자고등학교 |
3 |
전북 | |
김미영 |
우석여자고등학교 |
3 |
전북 | |
박혜원 |
청담고등학교 |
3 |
서울 | |
김정원 |
해성고등학교 |
3 |
경남 | |
이향은 |
부천여자고등학교 |
3 |
인천 | |
나선윤 |
동암고등학교 |
3 |
전북 |
III. 수상작 및 심사평
1. 총평
대부분의 학생들이 지문의 복선적이고 입체적인 논변구조를 단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대비’ 문제로 단순화하여 틀에 박힌 진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어 채점자들은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또한 서론의 주장과 결론 단락을 이어주는 전체적 문맥 속에서 본론 단락들을 이해하기보다는 본론 단락의 일부를 전체 글의 논지인양 다소 빗나간 대답을 하는 글들이 다수 눈에 띄었다. 예를 들어서 전체 논지를 동기론과 결과론의 대비로 본다든지 그릇된 희생과 진정한 희생의 대비 등으로 이해하는 등이 그것이다.
이는 마치 목적지가 서울의 관악구에 있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인데 일부 학생은 아예 서울을 찾지 못하거나 또는 서울에 진입을 했는데도 강북의 종로나 을지로를 맴도는 등 정곡을 찌르지 못하는 경우와 같다. 이런 점에서 논문의 요지 파악에 실패한 학생이 의외로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요지의 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학생이 쓰게 될 논술문이 올바른 문맥 속에 놓이게 되고 논술문의 핵심개념을 통해 그에 합당한 제목이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논술문 내용은 대부분의 학생들에 있어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장단을 논하고 양자를 절충하거나 제시된 지문의 주장에 동조하여 개인주의적 입장을 옹호하기도 한다. 그런데 채점자들은 대상입상자의 경우와 같이 오히려 지문의 입장에 반론을 제기하는 용기와 그것을 끝까지 논리적으로 밀고간 논문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주목했다. 이에 비해 평범하고 무난한 글은 흠을 잡기는 어려우나 독자들을 설득하는 호소력이 없다고 평가되었고 따라서 채점자들의 눈에도 차지 않았다.
응시자 전체 중에서 약 20% 정도의 학생들이 요구되는 분량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있음은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경시대회에 응시할 정도면 각 학교에서 아주 우수한 학생으로 평가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런 학생들조차 요구된 분량을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는 것은 고교교육이 아직도 단편적인 지식암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분량을 채운 답안들 중에도 많은 글들이 도입부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글의 시작 부분에서 문제 제기를 명료하게 하거나 자신의 입장을 압축적으로 표명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거의 반수 이상의 학생들이 이러한 최소한의 조건조차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별 상관이 없는 일상적 예를 장황하게 나열하거나 유명한 경구를 억지로 인용해 보고자 하는 글들이 많다는 것은 논리적 글쓰기가 제대로 지도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가 있다.
끝으로 문제의식이 나름대로 명료한 답안들도 대부분 그 문제의식을 풀어 가는 과정에서 논변능력이 부족한 것이 일반적인 경향으로 평가되었다. 논변능력은 곧바로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고등교육을 받은 소위 우수집단에서까지 논변능력을 갖춘 학생이 20%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은 고등학교에서 철학, 논리학 교육이 시급히 정상적으로 이루어져야함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할 것이다.
2. 수상작 및 심사평
♠대상 수상작♠
한윤형(유성고등학교)
【요지】
개인을 희생하고 집단을 위하면 명예를 얻을 수 있다는 윤리 의식은 위험하다.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약속 받은 것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그것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자기 희생 또한 자기 스스로 그 일에 정당성을 부여했을 때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제목】
개인의 중요성을 인식하자.
【논술】
제시문에서 잘 지적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하고, 이타주의를 집단주의와 동일시한다. 여기에는 집단주의가 이기주의보다 우월한 것이라는 가치 판단이 은연중에 깔려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주의보다 이타주의가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통의 집단주의자들은 자신의 사상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이기주의자라고 매도함으로써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나라는 이러한 ‘매도’가 잘 통하는 사회이다. 민족주의, 국가주의, 지역주의, 가문 중심주의 등의 수많은 집단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때문에 개인의 이성을 무력화시키는 집단의 폐해가 다른 어느 곳보다 크다. 이러한 집단의 횡포는 제시문이 비판했던 ‘윤리적 교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역사의 의미’라는 명예를 내거는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다른 집단들도 모두 보상으로서의 명예를 약속하거나 집단의 이익이 개인의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이 ‘보상’이 개인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고 개인의 일의 정당성을 일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그러한 집단들의 주장의 당위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시문의 논증은 그 자체로는 어느 정도 무리가 있다. ‘한층 고차원적인 보상’이 대다수의 개인에겐 별 의미가 없다는 주장은 자신의 입장에서 그들의 주장을 평가한 것이다. 역사상의 명예를 중요시 여기는 쪽에서는 자신 역시 그것을 획득했다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역사에 이름이 남는 사람들만이 그 ‘명예’를 획득했다고 볼 수 있는 지도 의심스럽다. 명예와 명성은 집단의 일부분으로서 획득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지로 전체주의자들이 국민을 동원할 때에 그 국민들이 자기 개개인의 명예와 명성이 후세에 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집단의 역사적 의미에 주목했고 거기에서 스스로도 희열을 맛보았던 것이다. ‘게르만 민족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나치 치하의 독일 국민, ‘천황 폐하의 신민’으로서의 명예를 위해 전면적인 충성을 바쳤던 일본 국민의 경우를 보라. 제시문의 논증은 실제로 그들을 설득하는 데에는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인간이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중요성을 어떻게 잘 드러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주요한 문제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데에 방해가 된다.’는 주장도 이와 마찬가지 경우다. 인간 개인의 고유한 중요성을 드러내는 일은 개인의 존엄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에겐 중요할 지 몰라도 개인이 스스로를 헌신해서라도 집단의 목적을 지향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다. 근본적인 생각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는 논증은 설득력을 가지기 힘들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제시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명’, ‘역사의 의미’ 등의 전체주의적인 어휘에 맞서 적극적으로 개인의 중요성을 논해야 했다고 본다. 개인이 보다 큰 집단 혹은 보편적인 가치에 맹종해야 한다는 사상에 맞서 개인이 그러한 것들 보다 더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밝혔어야 했다. 집단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흔히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물론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을 집단 아래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될 수 없다. 집단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인간이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만든 것이다. 그 집단은 유일무이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해서도 안 된다. 개인은 분명 집단을 이루지 않고는 살 수 없지만 하나의 집단을 떠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 다른 집단에 소속되거나 스스로 또 다른 집단을 만들어 살아나갈 수 있는 것이다. 역사 또한 마찬가지이다. 애초에 역사의 흐름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무수한 개인의 욕구가 비슷한 방향으로 작용하여 대체적인 경향을 보여 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역사에서 사명을 찾거나 의미를 느낀다 해도 그것이 집단적이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각각의 개인이 지향하는 역사의 방향도 분명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집단이나 가치가 개인에서 출발한 것임을 밝힌다면 개인이 중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제시문에서 전개된 상황에 대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타주의자의 자기 희생과 집단주의자의 그것은 뚜렷이 구별된다. 전자는 판단의 주체요, 후자는 판단의 객체다. 개인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집단이 강요하는 자기 희생은 집단이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을 중시하며 사는 개인주의와 자신의 이익을 희생해서라도 타인을 위하려는 이타주의는 개인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삶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고 그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 제시문이 개인주의, 이타주의를 집단주의와 구별지어야 한다고 판단한 이유는 이처럼 개인에 대한 관념의 차이이다. 개인의 중요성을 인식할 때 우리는 제시문이 상정한 그릇된 상황 - 허구적인 ‘역사의 의미’에서 집단적으로 자신의 행위의 의미를 찾는 -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국적이 같은 스포츠 선수의 선전에 열광하고 지역민이 당한 수모를 자신이 당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자아는 흔히 자신을 확대시켜 집단에 투영하고자 한다. 그것이 적절한 수준에서 끝나지 않으면 스스로의 자율성과 존엄성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개인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가 그러한 인식론적 오류에서 벗어나 보다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건전하고 이성적인 집단은 바로 이 개인에서 나온다. 개인이 집단의 일부가 아니라, 집단이 확장된 개인인 것이다.
▶심사평◀
논란 끝에 한윤형 군의 글이 대상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 이 수상작은 거친 글이다. 다른 대상 후보작들과 비교할 때, 현란한 비유법도 없고 수사학적 재능이 과시된 곳도 없다. 몇몇 글들처럼 아름답고 깔끔한 문장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며 다양한 독서 체험을 반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제시문의 요약도 썩 훌륭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강인한 사고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심사 위원들은 제시문의 주장에 맞서 자신의 논지를 힘차게 펼쳐 가는 후보자의 용기를, 그리고 그 용기를 뒷받침하는 논리적 분석 능력을 높이 샀다.
물론 제시문의 주장에 반대 논증을 펼치는 과정에서 결함이 엿보이는 대목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심사 위원들은 특히 두 번째 문단의 전반부에서 그런 미약함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의 논의가 이 부분의 미약함을 보완하고 있고, 전반적으로 다른 후보작에서 볼 수 없는 개성의 추구에 비추어볼 때, 그런 부분적 결함은 크게 문제삼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모름지기 글이란 성공과 실패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지날 때 감동적이다. 모험을 무릅쓰지 않는 글에서 신선한 인상을 받기 어렵다. 개성을 발휘하는 자유는 평균적인 사고와 정형화된 형식을 깨뜨리는 용기 없이 기대할 수 없다. 수상자는 제시문에 밀착하여 평소의 확고한 신념을 자신 있게 피력하고 있고, 적절한 근거를 통하여 그 신념을 논증의 형식 안에 담아내고 있다. 무엇보다 그 젊은이다운 패기에 찬사를 보낸다.
논술 시험이 자리를 잡아 갈수록 수험생들의 답안자가 점점 더 유형화되고 판에 박힌 형식으로 흐르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독창을 개진하기는커녕 감점의 위험을 최소화하는 방어적 태도가 일반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글쓰기 교육이 점수 획득 요령을 가르치는 데 급급한 것이 아닌가 하는 개탄스러운 생각이 들 지경이다. 이번의 대상 수상작 결정이 글쓰기 교육의 본래 취지를 되살리는 조그만 계기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금상수상작♠
이경원(충남고등학교)
【요지】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이며 이타주의는 집단주의라는 낭만적 역사주의적 관념이 있다. 이것은 개인을 넘어선 ‘역사적 사명’에의 희생을 요구하는데, 정의와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볼 때 바람직하지 못한 도덕률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성공과 보상을 거부하는 초창기 기독교식의 윤리 교육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정당성을 헛된 ‘역사의 의미’에서가 아닌, 우리의 일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제목】
가치 있는 사회적 희생
【논술】
글쓴이는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동일시하고 이타주의는 집단주의로 동일시하는 행위를 낭만주의적 관념의 영향을 받은, 허구적인 역사의 의미를 찾는 행위라 하였다. 또한, 이러한 생각은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각 개인의 자아를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회적 가치를 지닌, 역사적 사명을 띤 희생은 극소수만이 가치를 지닌 미심쩍은 도덕률이라 하였는데, 과연 그런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희생이 사회적 요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나는 유관순이 사회적인 요구와 칭찬 때문에 아우내에서 일본 헌병 경찰 앞에 태국기를 흔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극소수만이 획득할 수 있는 역사적 명성은 도저히 정의로울 수 없다는 글쓴이의 말은 숭고한 정신과 희생으로 돌아가신 수많은 순국 선열들에게 크나큰 모독과 실례가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분들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중요성을 ‘희생’이라는 의미로 발견했고, 그에 따라 행동하였을 뿐 어떠한 사회적 칭찬과 비난에 따른 행동이 아님을 믿는다. 글쓴이는 또 희생을 통해 그에 걸맞는 명성을 얻게 되신 많은 조상을 ‘역사교과서에 한 자리 차지하려 하는’ 정치적 귀족이나 지적 귀족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그것은 비정상적이었던, 과거 암울했던 한 때의 역사를 부정하고픈 글쓴이의 아집이자 편견이다. 개인주의가 이기주의였고, 이타주의가 집단주의였던 과거가 우리의 역사 속에는 분명히 있었다. 과거 일제 치하가 그랬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그분들이 후대의 역사 교과서에 자신들의 이름 석 자가 쓰여지길 바라고 자신을 희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말도 안 된다. 나라를 구하려 한 목숨 초개처럼 내팽개친 분들이 품었음직한 생각이 아니다. 글쓴이가 한 말 중에서 이러한 ‘사회적 희생을 통하여 역사적 명성을 얻고, 더 나아가 영웅이 되는’ 행위가 정의와 평등주의라는 관점에 입각하여 볼 때 ‘미심쩍은 도덕률’이라는 말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희생을 통해 역사적 명성을 얻고 영웅이 되는 기회를 대체 누가 부여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물론 무명으로 잊혀진 고귀한 희생이 있으며, 그분들의 희생도 명성을 얻은 희생 못지 않고 오히려 더 값질 수도 있다. 하지만 글쓴이의 말대로라면 명성을 얻게 된 사회적 명성이 일부의 왜곡이라는 것인데, 이는 인정할 수 없다. 정치적 귀족이 아닌 역사적 영웅이 많다는 데서 그 근거를 들 수 있겠다.
이번에는 글쓴이의 말과 생각을 모두 인정하고, 뒤집어 생각해 보도록 하자. 시대는 앞에서 거론했던 일제 강점기로 정한다. 만일 모든 개인들이 각자의 고유한 중요성을 내세우며, 사회적인 요구나 공동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일신의 편안함만을 추구했다면, 그 누구의 희생도 없이, 후대의 삶이야 어찌 되건 간에 나는 나의 현세를 즐기다 간다하는 식의 사고 방식으로 우리 조상님들이 일관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을 용감하게 벗어 던지고 나서는 희생은 사회적 칭찬과 역사적 명성을 위한, 후대의 역사 교과서를 염두에 둔 연극이란 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나는 사회적 희생의 가치를 발견한다. 소(小)의 희생으로 대(大)를 살릴 수 있는 희생이라면, 자신의 희생으로 침체되어있는 사회를 소생시킬 수 있는 희생이라면, 그것이 글쓴이가 비판하는 대로 헛된 역사적 의미에 탐닉한 희생이든 아니든 가치 있는 희생이라고 본다. 글쓴이가 가장 높은 차원으로 제시한 가치가 있다. ‘개인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중요성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바로 글쓴이가 주장한 이 안에서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라는 전제가 붙는다. 또한 자아 실현은 사회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회가 안정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누군가 희생으로 그를 극복해야 한다. 이것은 사회적 비난이나 칭찬 따위로 시비할 문제가 아닌 듯싶다. 사회적 희생이 글쓴이가 원하는 자아 실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겠는가. 글쓴이는 자아 실현의 중요성은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자아 실현이 사회 속에서 이루어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어느 정도의 질서를 가진 사회 속에서 개인의 존재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혹자는 매섭게 쏘아붙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이 모여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여기서 중점을 두고 다루고 있는 문제는 자아의 실현과 관련 깊다. 서로 다른 개개인의 가치와 자아가 모여서는 사회를 성립하고 자아를 실현할 수 없다. 일단 어느 정도까지는 공동선과 질서를 가진 사회가 우선시되어야 하며, 자아 실현 또한 그 방향을 공동선에 합치되는 범위 내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현대의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도 자아 실현이 가능해진다.
글쓴이의 역사관이 사회적 희생을 가치 있게 보지 못하고 편협한 시각으로 치우쳐 안타깝다. 한 잔 술을 나눈 후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어간 가미카제의 조종사가 되자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다만 나의 생각은 글쓴이와 달라서, 역사적 사명은 필요하며, 또 역사적 의미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질서 있고 바람직한 사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선조들이 역사적 의미 속에서 그들의 정당성을 발견했음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가치를 느끼는 희생이라면, 사회악이 되지 않는 희생이라면 희생해도 좋다. 그것은 글쓴이가 말하는 ‘미심쩍은 도덕률’에 의한 희생, 어쩔 수 없는 희생이 아닌, 개인의 가치를 다가올 후대를 위해 보다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킨 고귀한 희생이다. 그러한 희생을 할 수 있는 개인은 사회적 칭찬과 비난, 역사적 명성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는 높은 이상과 가치를 지닌 인물이다.
▶심사평◀
【요지】는 허구적인 역사적 사명의 이름으로 개인을 집단을 위해서 희생시키고자 하는 역사주의적 집단주의에 대해서 개인주의와 그에 의거한 이타주의를 내세우려는 제시문의 논지를 제대로 서술하지 못하고 있다.
【제목】은 논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을 잘 표현했다.
【논술】문의 첫 번째 장점은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논자는 제시문의 논지를 개인주의를 옹호하고 집단을 위한 희생을 배격하는 것으로 파악하면서 그것을 정면에서 반박하고 있다. 논자가 지문의 논지를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했느냐에 상관없이 논자의 도전적이고 주체적인 사유태도를 높이 사고 싶다. 특히 제시문이 개인주의를 이기주의와 그리고 이타주의는 집단주의와 동일시하는 것을 구시대의 낭만주의적 관념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 논자가 일제시대와 같은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 그리고 이타주의는 집단주의와 통할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은 제시문이 갖는 결정적인 맹점을 정곡으로 비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글이 갖는 두 번째 장점은 자신의 주장을 논리 정연하게 전개했다는 데에 있다. 논자는 먼저 제시문의 논지를 일제시대에 조국을 위해서 희생한 사람들의 예를 들어 비판한 후, 그러한 비판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사회적 희생의 가치와 필요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개진하고 있다. 글이 전체적으로 감정적으로 고조되어 있으면서도 중언부언하지 않고 조리 있게 논리를 전개했다.
다만 이 글은 방금 지적했듯이 전체적으로 감정적으로 고조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제시문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논술은 사실은 제시문의 필자와 토론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엿보이는 비분 강개하는 식의 감정적인 흥분상태에서는 그러한 토론과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논자가 자신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하기 쉽다. 이런 맥락에서 먼저 나는 논자가 제시문의 주장을 얼마나 정확하게 귀를 기울여 들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다. 나는 논자가 제시문이 무엇을 주장하고자 하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제시문의 주장을 자신이 공격하기 쉽게 일방적으로 단순화시킨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과연 제시문은 논자가 파악하는 것처럼 유관순 누나나 독립지사들이 자신들의 명성을 위해서 희생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리고 제시문이 독립지사들의 희생을 비롯하여 모든 종류의 사회적 희생이 무가치하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제시문의 논지는 논자가 파악하는 것처럼 개인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 사회적 희생의 가치와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인가? 오히려 나는 제시문은 사회적 희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며 다만 특정한 종류의 희생, 즉 논자도 배격하는 가미가제특공대 식의 희생을 부정한다고 읽었다.
논자가 파악하듯이 제시문이 단순히 개인주의를 옹호하기 위해서 사회적 희생의 가치를 부정하고 있다면 제시문의 주장은 너무 유치하게 되고 그것을 반박한다는 것은 지극히 쉽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논술에서도 일반적인 대화나 토론에서와 같이 상대방의 주장을 단순화하고 유치하게 만들어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상대방의 주장을 가능하면 강화시킨 후에 비판할 점이 있으면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논자가 의도적으로 제시문의 주장을 그렇게 단순화시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논자가 제시문을 보다 꼼꼼하게 읽기를 바라며 제시문의 주장을 가능하면 강화시켜주는 방향에서 읽기를 바란다. 그런 연후에도 비판할 점이 있어서 비판할 경우에만 그러한 비판은 공정하고 제시문의 필자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논자는 글을 써나가는 중에 불필요하게 감정적으로 고조되면서 논술이나 토론에서 가능한 한 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말도 안 된다’는 식의 극단적인 표현은 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울러 논술문 중에서 “그렇다면 희생을 통해 역사적 명성을 얻고 영웅이 되는 기회를 대체 누가 부여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라는 부분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가 불분명하다.
논자는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논리 정연하게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논자가 그러한 장점에 제시문의 주장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면서 그것의 논지를 정확하게 파악한 후 자신의 주장을 차분하게 전개하는 훈련을 덧붙인다면 보다 훌륭한 글을 쓰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금상수상작♠
오정은(전주여자고등학교)
【요지】
과거에 사람들은 개인주의를 배격하고 집단주의를 옹호했다. 집단적 목표에 따른 개인의 희생을 ‘역사적 사명’으로 가치 있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사명은 개인의 고유성을 침해하는 허구적 목표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정당성을 개인주의적 관점, 말하자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일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제목】
우리가 우리에게서 찾아야 하는 삶의 정당성
【논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논문을 통해 영웅의 역사적 정당성을 주장한다. 영웅이 대의를 실천하고 역사적 과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쓸모 없는 인간들의 생명을 빼앗아도 좋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이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전체주의(나치즘)를 표방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독재하에 있던 국민들은 지배 체제에 절대 복종하며 무수한 전쟁을 치르는 과정 속에서 희생되었다.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천왕에게 복종하면서 ‘가미가제 부대’라는 완전한 희생을 요구하는 체제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역사적 사명’이라는 목적 속에 희생되는 개인의 모습은 어디 있는지 고찰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역사의 모습 속에서도 희생의 의미는 과연 정당화 될 수 있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헌신할 수 있는 역사적 사명을 지향하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사명’이란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이다. 집단은 개인으로 이루어져 있고 개인은 개성적으로 원자화되어 있다. 이 때 집단은 역사적 사명이라는 하나의 이념을 개인에게 강요한다. 이념은 어디까지나 허구에 지나지 않으며 이념을 위한 개인의 희생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스탈린 아들의 죽음이 제시된다. 전쟁 중 포로가 된 스탈린의 아들은 생리적인 모욕을 받고 전기철조망으로 다가가 자살을 한다. 작가는 그의 죽음을 가치 있고 특이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 까닭은 전쟁이라는 집단의 목표 속에서 개인의 희생이 무의미하게 일어나고 있을 때 스탈린의 아들은 다른 이유로 죽었기 때문이다. 집단이 표방하는 ‘역사적 사명’이란 위대하게도 보이지만 존귀한 많은 사람들이 잊혀지게 만드는 허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미가제 전투기를 타고 폭격에 성공한 자는 목숨을 잃게 된다. 전투기 조종사는 나라를 향한 충성심에 젖어 죽음을 불사했을지 모르나 결국 그들의 역사적 명성이란 정의로울 것이 없었다. 집단주의에 의한 희생 속에 죽은 조종사 개인의 모습은 없다. 희생이 강요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집단은 개인을 타인의 시선 속에 가두며 역사적 사명이라는 허구를 당위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들은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 탈을 쓰고 희생을 받아들인다. 은장도의 논리다. 사회적 시선이 그러하므로 자결해야 하는 ‘열녀’ 는 강요된 죽음 속에 만들어진 것이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지옥 같은 타인의 시선 속에는 개인의 실존이 없다. 그러므로 강요받은 집단적 희생이란 무의미하다.
집단을 위한 개인의 희생이 무의미한 마지막 이유는 결정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되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명을 위한 희생이라는 도덕률은 정의와 평등과는 거리가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동등하며 무엇과도 교환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이다. 그러므로 라스콜리니코프의 주장은 틀린 것이 된다. 일본의 군국주의자였던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을 보면 자결하는 젊은 장교가 등장한다. 그는 국가에의 충성과 친구들 사이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결한다. 우국이라는 관념은 추상적인 것이다. 그는 그 가치를 위해 소중한 목숨을 버린다. 그의 판단은 자신의 실존에 입각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념이라는 허구를 위한 희생 속에서 개인의 정체성이 사라진다.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나와 너, 나와 그것이라는 두 가지 관계를 소개한다. 집단의 권위에 대한 개인의 관계는 ‘나와 그것’의 관계이다. 개인이 존재 양식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집단의 목표라는 미명아래 개인의 존엄성과 고유성은 ‘소외’라는 모습이 되고 만다. 우리는 무명용사가 아닌 잊혀진 *‘하나코’가 된다.
역사적 사명이란 허구의 모습이고 집단은 희생을 강요하면서 고유성을 침해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인주의가 이기주의가 아니듯 집단주의도 이타주의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개인주의라는 말속에는 자신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의 존엄성과 자유도 인정한다는 의미가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개인주의는 이타주의와 연결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을 직시하며 존재양식으로 살아가야 옳은 이유는 개인주의가 제시해 준다. 반면 집단주의는 이타주의를 집단 내에서만 희생이라는 형식으로 지닌다. 집단의 목표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는 목표 달성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이기적이다.
요즘 대학가에서는 차츰 운동권이 줄어들고 있으며, 그들의 목소리도 작아지고 있다고 한다. 사회 풍조가 개인주의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역사의식의 결핍이라 개탄하는 사람들도 많으나 과연 그들이 추구하는 역사의식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을 위해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의 여부도 점검해 보아야 한다. 물론 서른이 되어 잔치가 끝나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4.19를 바라보면, 4.19에 동참했던 사람들의 행위는 영웅이나 역사적 사명과 같은 추상적 이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에 입각하여 스스로 ‘푸른 솔’이 되었다. 이것이 글쓴이가 말한 무명용사의 희생이다. 자발적 행위이다. 김수영 시인의 시들은 물론 역사적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 속에 담겨있는 것은 거창한 역사적 사명이 아닌 시인의 신념, 치열한 고뇌이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역사적 사실들 속에 개인의 신념은 없었다. 역사라는 강요가 개인을 묻어버렸다. 그러나 김수영 같은 경우 그것은 시인 ‘자신의 일’이었다. 집단이 강요한 희생이 아닌 자발적 신념이었다.
이제 우리의 정당성은 우리에게서 비롯되어야 한다. 역사가 왜곡되게 추구해왔던 ‘집단적인 이타주의’ ‘희생을 통한 역사적 사명의 실천’과 같은 허울 좋은 굴레를 벗어야 한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니다. 사람들은 개인주의라는 이름 속에 ‘거대한 뿌리’를, 즉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다. 우리가 우리의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각자 선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최윤 <하나코는 없다> 이상문학상 수상집 -문학사상사
▶심사평◀
이 글은 채점위원들 간에 큰 견해 차이를 보인 몇 안 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풍부한 표현력, 문학 작품을 통한 많은 예시 등이 이 글을 참신하게 읽히게 만들었는가 하면, 그러한 글쓰기가 최상의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는 바로 그 점이 좋은 논리ㆍ논술을 구성하는 요건에는 흠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명 이 글에서 작품에 대한 언급 또는 인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나치게 크다 할 수 있다. 또 “우리는 무명용사가 아닌 잊혀진 ‘하나코’가 된다”라든가 “물론 서른이 되어 잔치가 끝나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또는 “그들은 자신의 신념에 입각하여 스스로 ‘푸른 솔’이 되었다” 등과 같이 문장 전체가 인유(引喩)이자 은유로 이루어진 것은, 그것이 최소한으로 절제되어 사용될 때 더욱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흠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지극히 타당한 말을 지극히 교과서적으로 풀어 가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다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타인의 시선’ ‘개인의 실존’ ‘치열한 고뇌’ 등과 같은 개념을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글을 전개시킨 것도 사고의 수준이 높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미덕에 비하면 이따금 눈에 띄는 잘못된 용어 선택 (“개인은 개성적으로 원자화되어 있다”)과 비문(非文)(“우리가 자신을 직시하며 존재양식으로 살아가야 옳은 이유는...”)은 오히려 사소한 결점이라고 생각된다.
♠금상수상작♠
정병기(고려고등학교)
【요지】
낭만적인 역사주의적 관념의 영향으로 개인주의는 비판되고 이타주의는 집단주의로 긍정적으로 여겨지곤 한다.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우리의 희생은 역사적 사명이라 하여 당연시되고 합리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소수를 위한 부정의, 불평등일 뿐이다. 우리는 성공과 보수를 거부하는 윤리를 추구해야 한다. 허구적인 역사의 의미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신의 일을 행해야 한다.
【제목】
전체주의를 배격하고 구성원의 다양한 개성 추구로 열린 사회를 만들자
【논술】
흔히들 역사적 사명, 역사적인 의무를 띠고 있다고들 하면 정당하고 마땅히 따라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적이다고 하면 보편타당하고 통찰력을 지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명, 의무와 같은 말들이 왜곡되면 인류에게 큰 피해를 끼칠 수 있다. 전체주의가 그 예라고 하겠다. 칼 포퍼라는 학자는 예전에 역사주의라는 포장으로 감싸진 전체주의가 인류의 존엄성을 짓밟는 체제라 하여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전 인류에게 해를 끼쳤던 전체주의라는 지난날을 반성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역사주의와 전체주의의 관계를 고찰해 보아야 하겠다.
제시문에서 필자는 개인주의가 이기주의로 받아들여져서 부정적으로 여겨지고 이타주의가 집단주의로 받아들여져서 찬양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는 개인의 희생을 역사적 사명, 역사의 주역으로서의 행동이라 하여 합리화하여 당연시하는 그야말로 낭만적인 관념이 작용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인의 희생은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닌 집단의 이익이라는 미명 아래 무의식적으로 혹은 폭력적으로 강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낭만적인 관념의 본질을 파고 들어가면,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가 희생되는 부정의, 불평등한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필자는 말한다.
우리가 필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있는 이유는 제시문에서 지적하는 허구적인 역사의 의미가 전체주의의 초석이기 때문이다.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그 사회가 추구하는 목표가 역사의 진보를 향하는 것이라고 하여 찬양된다. 구성원들의 희생으로 세워진 집단이 전지구를 지배하는 우수한 종족이 되어 다른 열등한 종족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이 역사의 진행 방향으로 미루어볼 때 필연적으로 실현된다고 말한다. 자신들의 논리가 보편타당하고 피할 수 없다는 법칙과 같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개개인은 이러한 역사전개의 법칙을 실현하기 위해 마땅히 희생을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들의 희생을 역사적 사명과 책임을 다한 것이라고 하여 정당화한다. 그렇기에 구성원 개개인은 독립된 인격을 가진 존재, 그 무엇으로도 침해받을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닌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다. 집단의 이익을 위해 언제든지 희생되고 소모될 수 있는 하나의 부품으로 여겨질 뿐이다. 개인 하나가 희생되어도 또 다른 구성원을 투입하여 보충하면 그만인 것이다. 마치 기계가 작동하다가 보수를 하기 위해 마모된 부품을 교체하는 것과 같다. 소수의 정당한 요구나 비판도 집단의 이익에 반하는, 그래서 역사의 진보를 방해하는 반동 세력이라고 하여 역시 철저하게 무시된다.
우리가 이러한 전체주의 사회를 거부해야 하는 이유는 앞서 칼 포퍼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것이 인류에게 해악이 되고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을 짓밟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전체주의 사회는 자신과 다른 집단, 민족, 나라에 대해 극히 배타적이다. 자신의 우월성을 앞세워 남을 지배하고, 그럼으로써 역사의 진보를 달성하려 하기에 다른 집단과의 충돌은 필연적이다. 전체주의가 지배하였던 나찌 독일, 파시즘의 이탈리아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기에 전체주의는 전 인류를 멸망으로 몰 수 있는 것이다. 나찌즘 아래 희생된 수많은 유태인들, 내부의 약자들을 생각하면 알 수 있다. 또한 전체주의는 궁극적으로는 독재자에 ‘의해’ 악용되는 논리이다. 국가의 발전이라는 거창한 목표 아래 강요되는 구성원들의 희생은 사실 소수 권력자들의 이익을 채우는 데 쓰일 따름이다. 소수 권력자들은 집단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끈다는 주장 아래 피지배층의 희생을 바탕으로 안락한 삶을 누린다. 피지배층의 반항은 독재자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그것은 전체주의가 아닌 구성원 모두의 나름대로의 존엄성과 다양성이 인정되는 하나의 열린 사회다. 열린 사회는 구성원들의 다양한 개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제시문에서 필자가 주장하였듯이 진정한 개인주의는 결코 공동체의 안전을 위협하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이기주의와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진정한 개인주의는 개개인들의 개성이 모여 관용으로 나아간다. 개성은 타인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남이 없는데 나만의 개성을 주장할 수는 없다. 타인을 인정하는 가운데 타인과 다른 나의 독특함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개성인 것이다. 이렇게 차이의 인정과 개성은 동떨어진 개념이 아니다. 수많은 개성인들이 모여 만드는 공동체야말로 진정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획일적인 목표를 강제하는 사회에서 구성원들간의 갈등, 남을 짓밟는 배타적인 경쟁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하나의 획일적 가치를 추구하면, 그 한정된 가치를 얻기 위해 갈등이 나오는 것이다. 성공과 보수라는 가치를 거부하는 윤리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성원들의 개성을 바탕으로 하는 열린 사회는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이 허용된다.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을 통해 열린 사회는 궁극적으로 구성원 모두의 인간다운 존엄성이 인정되는 방향으로 나가갈 수 있다.
공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을 말하였다. 요는 같지 않고 다름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예수도 또한 인류의 다양한 삶들이 주춧돌이 되어 문명을 만든다고 말한 바 있다. 두 성현이 강조한 다양성, 차이의 미덕이 인류를 진정 올바른 사회로 이끌 수 있다. 구성원들의 개성으로 만드는 다양성의 열린 사회야말로 전체주의에서 벗어나 우리가 나아갈 길이라 하겠다.
▶심사평◀
【요지】에서는 집단주의에 대해서 개인주의와 그에 입각한 이타주의를 주장하고자 하는 제시문의 논지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제목】은 논자가 논술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잘 전달은 하고 있으나 구호식의 표현이 상당히 어색하다. “전체주의의 문제점과 전체주의에 대한 대안으로서 ‘구성원의 다양한 개성 추구가 인정되는 열린 사회’” 정도가 어떨까?
이 논술문의 가장 뛰어난 점은 제시문의 논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논자는 제시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허구적 역사적 사명을 내세워 국민들을 동원하고 개개인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집단주의 내지 전체주의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바람직한 사회형태로서 각 개인의 개성이 보장되는 열린 사회를 주창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제시문의 논지가 약간 애매하게 전개된 면이 있기에 많은 응시자들이 제시문의 논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상당수의 응시자들이 제시문이 바람직한 희생의 방식을 논하는 것으로 파악하거나 아니면 영웅주의적 역사관에 대한 비판으로 파악했다. 이에 대해서 위의 논자는 제시문의 논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또한 위의 논자는 논자와 마찬가지로 제시문의 주장에 동의하는 입장에서 쓴 여타의 응시자들과는 달리, 제시문의 주장을 단순히 반복 해설하는 차원을 넘어서 제시문에 보이지 않는 독자적인 주장들을 통해서 제시문의 논지를 보강하고 있다. 이 점 역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 논술문의 또 하나 뛰어난 점은 차분하면서도 논리 정연하게 쓰여졌다는 점이다.
이 글의 결정적인 결함은 마지막 절에서 발견된다. 논자는 공자의 화이부동이란 말을 오해하고 있다. 공자의 화이부동은 논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열린사회를 옹호하는 말이 아니라 ‘다른 인간들과 화합하되 영합하지는 말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예수가 과연 인류의 다양한 삶들이 주춧돌이 되어 문명을 만든다고 말한 적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마지막 절의 이러한 오류들은 그 앞에서 논자가 전개하는 있는 논리의 훌륭한 수준에 비하면 상당히 의외의 것이다. 또한 그 앞 절의 ‘사회구성원 모두가 하나의 획일적 가치를 추구하면, 그 한정된 가치를 얻기 위해 갈등이 나오는 것이다. 성공과 보수라는 가치를 거부하는 윤리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라는 부분은 전후의 논리적 상관성이 약하다.
♠은상수상작♠
주대성(광남 고등학교)
【요지】
흔히들 우리가 헌신할 수 있는 어떤 것, 역사적인 사명을 가지고 임해야 할 집단적인 것을 위해 희생해서 역사적으로 명성을 얻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 존귀한 고유성을 지닌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의 일을 행하도록 배워야 하고, 삶의 의미를 우리가 하고 있는 일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제목】
인간, 사회 속의 주체적 인격체로서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논술】
누구나 어렸을 적에 충무공이나 안중근 의사와 같은 위인들의 전기를 읽으며 이러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사회를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해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사는 것만이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단정지어 말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삶 역시 다양한 삶의 방식 중의 하나일 뿐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만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으며 사회를 이루지 못한 개개인은 생존조차 위협받는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개인이 사회 속에서만 의미를 갖고, 사회가 주구하는 가치를 무조건 따라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회에서 받아들인 민주주의의 이념적 토대가 되는 사회 계약설에 따르면 사회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인간들이 자발적 동의에 의해 만든 것일 뿐이지, 구성원들의 보편적 의지를 담은 절대적 실체도 아니요, 구성원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한 전체도 아니다. 따라서 사회를 위해 구성원이 희생을 해야 한다거나 사회의 방향에 구성원들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사회가 개개인이 존엄성을 지키고, 자아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가 오늘날 가장 이상적인 정치 체제로 인정받는 이유도 민주주의가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들이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하기 때문인 것이다.
무조건 사회를 위해 개인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처럼 논리적 근거가 없을 뿐더러,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 인간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천부 인권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며, 주체적인 인격체이다. 한 인간이 자신의 다양한 가능성을 개발하기를 포기하고, 사회의 결정에만 맹목적으로 따르며 살아간다면 진정한 자아 실현을 이루기 어렵다. 더욱이 한 사회의 공식적 의사결정이 사회의 지도층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는 자신의 선택이 아닌 남의 선택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것이 된다. 한 예로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자 전쟁에 참가한 많은 나라의 젊은이들이 전쟁터에 끌려나가 죽어야 했다. 그들은 조국을 이끄는 지도자들의 결정에 따라 목숨을 바쳐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맹목적으로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존귀한 고유성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지키려면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 사회가 추구하는 방향에 동의해서 자발적으로 참여하더라도 한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가 반드시 올바른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삶이 언제나 의미 있는 삶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속한 집단을 위해서 헌신하려면, 개인의 사리사욕을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곧 이기주의가 아니고 이타주의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 집단도 더 큰 관점에서 보면 더 큰 집단의 구성원이 되며, 그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집단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가치일 수 있다. 즉, 인류공동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집단주의가 항상 남을 위하는 이타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집단 이기주의로 변질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20세기 초반에 세계적으로 전체주의가 널리 만연했을 때의 상황은 이러한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 당시, 전체주의 국가들은 집단을 위해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했다. 그러나 전체주의 국가들이 국민들의 힘을 결집해서 한 것은 인류를 위한 일이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식민지를 건설하고, 세계 대전을 일으킨 것이었다. 그들은 인류에 해악만을 끼쳤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를 위한 헌신이 단지 허구적인 역사의 의미, 즉 역사적 명성을 얻기 위해 행해질 때, 이러한 삶은 더욱 더 의미가 없어진다. 자발적인 참여로 사회에 봉사한 사람이 비록 많을지라도 역사적으로 명성을 얻고, 역사 교과서에 한 자리를 차지할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를 발전시켜 온 원동력은 대다수의 이름 없는 사람들이다.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아도 고려가 세계 최강의 몽고 군대에 맞서서 수십 년간 항전할 수 있었던 힘은 유명한 명장의 활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름 없는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에 있었다. 또한 한국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준 동학 농민운동은 이름난 지도자가 이끈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스스로의 역량으로 이루어 낸 것이었다. 따라서 역사적 명성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평등과 정의에 반하는 사람들이요, 외면적인 가치만을 추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일 뿐이다.
물론 사회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집단을 이루는 구성원으로서 그 집단의 존속을 위해 어느 정도의 노력을 기울일 의무가 있다. 집단의 운명과 구성원의 운명이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고, 집단이 구성원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한 구성원도 집단의 존속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다. 따라서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이러한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으로서의 본연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삶은 우리가 개인적인 욕망만을 위해 살아가지 말고 보다 넓은 관점에서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고려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아울러 성공이나 부와 같은 외면적 가치에 집착하는 것을 지양하고, 내면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준다. 하지만 사회를 위한 삶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러한 삶의 목표가 주체성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판단한 후에 결정된 것이라야 한다. 물론 이 때 그러한 삶이 가지는 의미는 자신이 주체적으로 삶을 선택하고, 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서 오는 것이다.
인간은 고귀한 존재이며, 주체적인 인격체이므로 자신의 삶의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고, 선택할 삶을 살아가면서 자아를 실현해야 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개인과 사회에 대한 균형 잡힌 관점을 가지고, 자신의 공동체 속에서의 역할과 의미, 사회의 존립 근거 등에 대해 이해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정립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한 방안일 뿐만 아니라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밑거름이기도 하다.
▶심사평◀
이 글은 크게 나무랄 데가 없는가 하면 그러면서도 뚜렷이 장점을 찾기도 어려운 글이다. 그러나 정독을 하면 글쓴이의 단단한 논리적 구성을 느낄 수 있으며, 글의 시작과 끝은 거기에 합당한 호흡 고르기의 효과도 누리고 있다. 또 ‘사회 계약설’ ‘보편의지’ 등 사회철학의 기본개념이 이 글의 논리 전개를 적절히 돕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쓴이의 사고의 힘, 깊이 등이 읽는 이에게 크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 이유를 찾는 한 예로 여섯째 문단을 들 수 있다. 여기서 글쓴이는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으로서의 본연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삶의 방식을 말한 후, 이런 삶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고려”하는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물론 중요한 지적일 뿐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합당한 전개이다. 그러나 바로 이어 논의되듯, 이러한 삶은 “성공이나 부와 같은 외면적 가치에 집착하는 것을 지양하고, 내면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가르침을 과연 주는 것일까? 글쓴이는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없는 윤리적 명제를 그냥 이어 붙이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이 글은 지당한 이야기의 연속이나, 그것이 글쓴이에 의해 반성적으로 사유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때로는 그와 같은 비논리가 범해지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이렇듯 반성적 사유가 미흡하므로 글의 힘도 떨어지는 결과가 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은상수상작♠
김태인(경기고등학교)
【요지】
인간의 개체적 행동을 영웅적 역사주의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함으로써 제한하고, 개체성을 지닌 자아에게 역사적 사명감을 갖고 희생이나 헌신하라는 것은, 특정시기의 낭만주의적 관념으로서 정의롭지 못하며 인간의 평등을 부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행동은 ‘역사적 의미’라는 맥락에서가 아닌 개인의 자체적 행위 내부에서 찾아야 하며 이를 기반으로 한 윤리교육이 필요하다.
【제목】
현대 사회의 역사 발전에 있어서의 선각자적 소수의 중요성과 대중의 역할
【논술】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역사를 ‘창조적 소수의 발전’이라는 말로써 설명하였다. 즉, 특정시기의 역사는 소수의 창조적 집단에 의해서 개척되는 것이고 다수의 비창조적 대중은 이를 모방(mimesis)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사회변화와 변동이 이루어진다는 영웅주의적 관점에서 파악한 것이며 역사 변동에 있어서의 소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사회 체계는 개체가 모인 집단성에 근거한 개념이며 이에 따라 개인에게 알맞은 역할 행동이 요구되는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자신이 맡은 역할과 행동 범위에 따라 사회의 계층 분화 현상이 필연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계층(das Stratum)이라는 개념은 몰역사적인 것이며 특정시기가 아닌 인간의 보편성에 근거한 일반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의 정치적 자유 획득과 기술 발전으로 등장한 현대사회는 계층간의 특성을 설명해주던 상하 수직적인 관념이 쇠퇴하고 상호간의 정보이동의 자유에 의한 대중사회로 이동(shift)하게 되었다. 따라서 몇몇 문명사학자들은 현대사회에서의 역사란 영웅주의나 역사적 사명을 강조함으로써 발전하는 것이 아니며 개체성에 근거한 대중의 자유로운 참여를 강조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대중들의 자율적 행위를 이끌어내 역사 발전의 소외계층을 소멸시킨다는 장점을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지나치면 역사 발전의 일반적 원리나 경향을 무시한 채 토인비가 제시한 창조적 소수의 역할을 배제한 공허한 관념에 머무를 위험성이 있다.
제시문의 글쓴이도 이와 같은 관념에 기초하여 영웅사관이나 역사 속에서의 개인의 의미를 평가 절하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현대사회의 계층 분화성이나 이때까지의 역사적 행위와 방향성을 살펴봄으로써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역사 발전 자체의 궁극적 원리가 소수의 개척에 의해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급격한 사회 변동의 경우 그 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선구자에 의해 주도되어지며, 이에 절대다수인 대중의 참여가 확산됨으로써 이루어지는 경우를 인류의 역사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경우, 이를 주도한 자본가(부르주아) 계급의 역할이 컸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중세사회에서 근세사회로 이동하면서 건국된 조선시대 역시 ‘신진 사대부’라는 소수적 계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발전이었던 것이다. 이는 20세기 이후의 일제 식민지 시대에서도 드러난다. 즉, 역사적 위기 의식 하에서 사명감을 갖고 독립운동이나 투쟁을 전개하던 소수의 독립 투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독립을 이루는데 자체적으로 이바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층에 의한 역사적 변동은 현대사회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정치 분야의 경우 소수의 정치가들에 의해서 정치적 활동이나 국가 운영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본의 소유여부에 의해 경제 활동의 계층성이 결정되는 경제 분야에 있어서도 몇몇 경제인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이루어진다. 세계의 증권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유태계 자본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제시문의 주장대로라면 위에 제시한 예를 통한 역사인식은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즉, 사회적 위기상황 속에서 역사 의식을 갖고 독립운동을 벌인 선각자들의 행위는 부적절한 것이 되며 개체성에 근거한 독자적 행위만이 적절한 것이 된다. 제시문의 글쓴이는 대중사회에 기초한 Journalism적 역사 인식을 갖고 있지만 그 자체가 소수의 Academism에 의한 역사 발전에 기초함을 간과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이러한 창조적 소수에 대한 역사적 명성 부여나 보상은, 실질적이고도 절차적인 정의로서 본질적인 정의의 개념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글쓴이는 영웅주의적 보상이나 명성부여가 중세주의적 사고 방식에 기초한 엘리트주의라고 비난하지만 이미 상층으로의 이동성(Status mobility)이 자유로운 ‘능력사회’에서는 누구나 상층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을 배제한 진술이다. 즉 소수의 역사적 개척이나 발전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바람직한 것이며 사회의 건전한 발전을 지속시키는데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보상이나 명성부여는 그것을 위한 선의의 촉진제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개인들의 행동양식이 공명심에 기초한 현실 추수적 경향이며 칭찬이나 비난의 심리적 압박감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다는 주장은 논리적 근거가 빈약하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독립투사’의 경우 공명심이나 영웅주의에 매몰되어 행동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회, 인문, 기술, 과학분야의 학자들에 의한 발전도 개인적 이익에 기초한 것이 아닌 진리 탐구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창조적 소수의 발견과 발명에 의한 역사발전은 앞으로도 지속되는 보편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오늘날의 사회 속에서 개인들이 취해야 할 바람직한 행동 양식과 교육의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개인은 역사적 흐름을 자각하고 주체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사회적 위기의 발생시 이에 적극적으로 대항 할 수 있는 역사적 사명감이 필요한 것이다. 이에 기반하여 글쓴이가 주장하고 있는 자아의 개성(individuality)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탄력적인 행위도 현대사회에서 필요한 덕목이다. 교육 분야에 있어서는 사회의 발전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창조적인 대체 세력이 변화하는 사회를 이끌어 갈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철저한 역사의식과 사명을 소유한 대중들의 사회참여를 이끌어내어야 한다. 이러한 두 가지 방향의 교육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 건전한 사회발전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깨닫고 사명감을 통해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개인이 모여 전체적인 사회 체계를 이룰 때 외향적 의미만이 아닌 내면적이고도 실질적인 발전이 가능하다. 남북의 화해에 기반한 한반도의 정치구조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바는 바로 위에서 제시한 개인들의 철저한 인식과 사명감,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다.
▶심사평◀
【요지】는 제시문의 핵심적 주장을 말한다. 제시문의 글쓴이는 ‘집단주의’가 ‘이타주의’의 미명 아래 횡행하고, 이 상황에서 소수의 정치적 권력자들이 대의 명분과 후대의 역사적 보상을 앞세워 대중들을 자기들의 의도에 맞게 동원하고, 개인들은 그에 따라 자아를 잃어버린 채 부역 당하는 것을 경고 경계하고 있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답안지는 초점이 조금 비켜나 있다.
【제목】은 논술 내용과 부합하기는 하나, 조금 더 간명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가령, “역사 발전에서 소수 선각자의 중요성과 대중의 역할” 정도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논술】문은 주견이 뚜렷하고 비교적 논리적으로 진술되어 있다. 제한된 시간 내에 이 정도의 글쓰기란 매우 어려운 일로 글쓴이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물론 퇴고할 시간이 없어서 그러했으리라 짐작하지만, 부분적인 잘못이 눈에 띈다. 예컨대, ‘계층’이나 ‘계급’도 충분히 ‘집단’으로 이해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개인’의 차원에서 ‘전체’와 대비시키고 있다. 또 모든 ‘독립 투사’들이 “공명심이나 영웅주의”에서 벗어나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소한 문제라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글쓴이에게 추가적으로 당부하고 싶은 점은 굳이 영어 단어나 독일어 낱말을 병기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번거롭기도 할뿐만 아니라 오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 중 “Journalism”과 “Academism”은 그 뜻에 맞게 사용되고 있지도 않다. 원고지 쓰는 법도 다시 한 번 점검하기를 권고한다.
♠은상수상작♠
한샘(대덕고등학교)
【요지】
집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이타’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역사적 사명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대가는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으며 불평등하고 정의롭지 못한 도덕률이다. 역사적 명성은 극소수만 획득할 수 있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남이나 대가를 위해서가 아닌 그 자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제목】
바람직하지 않은 ‘역사주의적 명성의 도덕률’ 바람직한 도덕률의 추구
【논술】
모파상의 단편 ‘비계 덩어리’에서 점령군인 독일 장교는 마차가 이 마을을 통과하려면 불 드 쉬프라는 마차 안에 있는 창녀가 자신과의 하룻밤을 허락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마차 안의 사람들은 이 요구에 분노하지만 곧 ‘여러 사람의 안전을 위해 그녀의 희생은 당연히 받아 들여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는 불 드 쉬프에게 국가나 가정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여인들의 ‘영광스러운’ 희생을 장황하게 나열하며 그녀로 하여금 희생을 하게 만든다. 모두를 위한 ‘전체주의’가 얼마나 아름답게 ‘이타주의’로 변할 수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역사적 명예’라는 보상이 뒤따른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한 희생, 글쓴이의 용어를 빌리자면 ‘역사주의적 명성의 도덕률’은 우리들에게 타당성을 가질 수 없다.
‘역사주의적 명성의 도덕률’은 조선 역사 속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다. 유교의 바람직한 목적은 세상 사람들에게, 후손들에게 나의 이름과 업적을 빛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면 ‘전설의 고향’에서 청상과부가 된 며느리에게 시아버지는 자결을 강요한다. 며느리가 이를 거부하자 자객을 시켜 죽이고 자결한 것으로 위장한다. 이유는 바로 ‘열녀문’,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였다. 또 다른 예로 우리가 대부분 한번쯤은 읽었을 ‘충효예집’과 위인전에도 부모, 임금, 국가를 위해 희생한 조상들의 이야기가 자세히 실려있다. 그리고 한결같이 이와 같은 자랑스러운 조상을 본받아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자는 어조로 끝을 맺는다.
이런 주장은 보편적인 진리로 받아들여 왔지만 그것은 왜곡된 진리이다. 이런 논조라면 가문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거부한 그 며느리는 ‘이기주의자’가 된다. 하지만 전체를 위해 희생을 해서 가문과 개인의 이름을 빛내든 희생을 거부하고 개인의 의미를 찾든지 하는 문제는 개인의 선택권 문제이다. 어떠한 다수도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희생을 하느냐 마느냐’의 선택권에 다른 사람의 의견이 들어 있다면 무슨 이유에서든지 참다운 희생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거나 비난을 면하기 위해 후대에게 주는 고차적인 보상을 위해 희생하는 것 역시 진정한 희생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순수한 목적을 잃은, 명예와 교환한 대가성 희생이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주의적 명성의 도덕률’에 대해 글쓴이는 ‘극소수 사람들만의 가치가 인정되고 평범한 사람들은 버림받은 시대의 미심쩍은 도덕률’이라 했다. 그러나 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가 아닌 극소수에게 가치 있는 도덕률이라는 이유로 어느 정도의 존속은 필요하다고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 이 도덕률이 왜 극소수에게는 필요할까? 여기서 극소수는 사회의 권력층, 지도층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민주주의 시대라 하여 시민의 세력이 극소수인 권력층, 지도층보다 크다고 생각하지만 거대한 다수인 시민들이 뭉치기는 매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이런 권력의 횡포에 ‘역사적 명예 손상’, 즉 ‘역사주의적 명성의 도덕률’의 역효과를 이용한 후대의 심판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훨씬 큰 혼란과 상실을 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1998년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던 클린턴 대통령을 보자. 그의 부도덕성을 비판하고 그에 따른 대가를 요구한 여론의 비난과 앞으로 있을 역사의 심판은 그의 권력을 이용한 국민 우롱의 브레이크가 되었다. 이 때의 국민들의 행동은 ‘불 드 쉬프’에게 희생을 강요한 다수, 국가에 대한 충성을 위해 자결을 요구하는 다수와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후대의 명예를 위한 도덕률이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국민들의 생활에 영향을 끼칠 수 있고 국가와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극소수에겐 역사적 명예 의식이 존립해야 한다. 이것이 불평등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재산 보유자 순위 중 10% 안에 드는 사람들의 총재산이 나머지 90%의 사람들의 총재산보다 많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현실적인 타당성을 갖는 것이다.
강요적인, 대가성이 있는 희생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우리는 아름다운 희생을 추구할 수 있다. 많은 학생들이 방학동안에 도서관, 경찰서, 우체국 등에서 청소를 한다. 나 역시 봉사 시간을 채우기에 여념 없는 활동을 해왔다. 그런 어느 날 TV에서 우연히 ‘신나는 집’의 아이들을 보게 되었다. 3일 동안 밥을 못 먹어 누워 있다는 아이, 지금까지 학교에서 주는 무료 급식만으로 끼니를 해결했다는 내 또래의 이야기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래서 이번 방학부터는 그 곳에서 봉사하기로 했다. TV에서의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8살인데도 글자를 못쓰는 아이, 초등학교 4학년임에도 독후감이 뭔지 조차 모르는 아이가 있었다. 지저분하고 다른 또래에 비해 지적 능력이 크게 낮은 아이들이었지만 나는 내 시간을 할애만 하는 희생이 아닌 더 큰 축복을 그들에게서 받았다. ‘봉사는 내 인생에서 마이너스가 된다’는 생각을 고쳤고 불평만 하던 내 환경에 감사했다. 또 언젠가 미국의 어떤 판사가 돈이 없어 월세비를 못내 고소 당한 장님 부부를 판결하는 대신 빚을 모두 갚아 주었다는 사례를 신문에서 읽었다. 미국인들이 기부금을 하는 이유도 ‘역사의 의미’에서 찾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받은 것을 환원한다’는 원칙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주위의 목소리, 역사적 명성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의 마음속의 동정심, 자신의 원칙대로 ‘일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희생’이 진정한 희생이라 생각한다.
매년 선거철만 되면 XX 양로원 △△고아원이라 적힌 커다란 박스를 정치인과 원생이 나란히 붙들고 있는 사진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역사주의적 명성을 위한 도덕률은 없어져야 한다. 학교에서도 다수를 소수의 희생, 조선의 유교주의적 희생을 가르칠게 아니라 희생의 선택권이 개인에게 있음을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과 의지로 명성과 대가가 아닌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는 희생에 대해 생각하게 해야한다.
▶심사평◀
제시문은 첫눈에 보이는 것처럼 평이하지 않다. 제시문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눈앞의 보상과 역사의 보상 등 서로 관련된 여러 계기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의 요구에 제대로 응하려면 일차적으로 제시문에 대한 정확한 의미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적지 않은 응시자들이 제시문의 논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실패하고 있기 때문에 정곡을 찌르는 논술문의 작성에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이 글은 여러 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이 글의 필자는 우선 제시문의 논지를 잘 파악하여 정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필자 스스로 여러 가지 논거를 들어 제시문의 논지를 강화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선명하게 서술하는 뛰어난 면을 보여준다. 약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흠잡을 때 없는 비교적 매끄러운 문장도 좋은 점이다.
다만 지정학적 여건을 지적하고 있는 서론부까지의 서술은 너무 평범하고 일반적인 사항이며 제시문의 논지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도 않기 때문에 간명하게 처리하는 것이 나았다. 제목도 글의 내용에 비하면 너무 크고 일반적이다. 자기 글의 핵심적 내용을 가능한 한 간결하면서도 정확히 표현하는 제목이 바람직하다.
♠은상수상작♠
채민기(세광고등학교)
【요지】
지금껏 우리 사회는 이상을 위해 개인을 희생할 것을 요구하고, 이에 대한 대가로 역사상의 명성과 긍정적 평가를 제시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집단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집단주의적 사고 방식에 근거를 둔 것으로, 마땅히 지양되어야 한다. 오히려 개인이 행하는 일 자체에서 정당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윤리 교육의 방향도 이에 맞추어 변경되어야 한다.
【제목】
개인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의 필요성과 우리의 자세
【논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우리 사회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것을 중시해 왔다. 이것을 위해서는 생명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사고 방식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국가의 안위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군인들과, 조국의 해방을 위해 험난한 투쟁의 길을 선택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배경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 나라의 지정학적 위치와 역사적 발달 과정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한반도가 중국 대륙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교량적 역할을 담당해 온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를 활용하여 고구려와 같은 강대국이 번성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사이에서 세계 어디서도 찾아보지 못할 만큼 많은 외침을 경험하여 왔다. 그 과정에서도 우리의 주권을 빼앗기지 않고 지켜 왔지만, 결국 20세기초에 이르러서는 일본에 의해 국권을 강탈당하고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도 있듯이, 어지러운 시국과 국가적 위기 상황은 개인이 초인적인 의지와 노력을 통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배경을 제시해 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우리가 처한 지정학적 위치와 우리가 경험했던 숱한 외침의 역사는 영웅의 출현을 열망하고 거기에 갈채를 보내는 사회적 의식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영웅주의적’ 사고 방식을 강도 높게 비판하면서, 우리의 의식이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다수 대중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배려 없이 소수 특권 계급의 이익과 입장만을 옹호하고 있는 주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영웅의 출현에 환호하는 사고 방식은 평등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며, 정의롭지도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이타주의와 집단주의 각각의 의미에 대한 깊은 고찰 없이 ‘개인’과 ‘집단’이라는 양측의 공통 분모에만 주목한 이분법적 사고 방식에 대한 비판이다. 이처럼 과격한 논리를 사용한다면, 이타주의와 집단주의를 혼동하게 되고, 전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면 개인의 희생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집단주의적 사고 방식을 갖게 되며, 결국에는 역사의 긍정적 평가를 받기 위해, 또는 이름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감수하고, 또 그것을 요구하는 세태가 출현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허위적인 ‘역사적 의미’보다는 개인의 행동 자체에서 의미를 찾는 노력이 필요하며, 윤리 교육의 방향 역시 여기에 맞추어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체적 목표의 달성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고 방식은 자칫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심지어는 강요하기까지 하는 전체주의적 혹은 권위주의적 이념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제시문의 주장이 갖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과거 인류의 역사에서 실제로 나타났던 나치즘이나 파시즘이 그것을 뒷받침해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개인의 희생이 자연스럽게 강조되었으며, 이러한 사상은 인류에게 큰 불행을 안겨주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 2차 세계대전 당시 국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던졌던 일본의 가마가제 조종사들은 군국주의의 대표적 희생양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이 시공을 초월하여 존중되어야 할 가치임을 생각할 때, 제시문의 주장은 우리 사회에 준엄한 경고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과거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현대 사회의 모습에서도 본문의 주장은 설득력을 획득할 수 있다. 아직도 전쟁의 위험은 상존하고 있지만, 국제 연합과 같은 각종 국가 기구나 NGO로 불리는 비정부기구의 활동에 의해 과거와 같은 침략적 성격의 전쟁의 발발 가능성은 낮아진 것이 사실이다. 또 사회의 각 분야가 분업화되고 있는 현상 역시 근거가 될 수 있다. 분업화된 조직에서는 한 사람의 초인적 노력과 능력보다는 각자 자신의 역할에만 충실함으로써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도 전체의 과제의 수행에 기여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가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의 발전 방향을 고려해 보았을 때 하나의 행위가 지니는 의미를 무시하거나,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대의를 구하려는 행동을 그저 ‘칭찬을 받거나 비난을 면하기’ 위한 것으로 매도한다면 자기가 속한 국가와 사회의 안녕을 외면하고 일신의 영달과 자기의 안위만을 구하는 풍조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사회 속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우리가 지금까지 겪어온 숱한 위기 상황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았던 이들이 있었기에 그 극복이 가능했음을 생각해 본다면, 제시문의 주장이 이기주의로 치달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예로부터 숱한 외침을 경험해 왔으며, 따라서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개인의 노력과 희생이 강조되어 왔다. 이러한 생각은 개인의 행복과 안녕을 위협할 수 있는 위험한 것이며, 달라진 현대 사회에도 더 이상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속히 개선되어야 한다. 다만 거기에는 새로운 가치관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 요소에 대한 인식과 그것인 발현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는 경계와 노력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심사평◀
이 글은 제시문의 논지를 전적으로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명성의 도덕률’과 ‘희생’에 대해서 그것이 유의미할 수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는 경우를 준별하여 논의한다. 몇 가지 적지 않은 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이 글의 필자가 어쩌면 일면적일 수도 있는 제시문의 논지를 한정할 나름의 기준을 제시하면서 제시문의 논의를 보완하는 노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논술에서 무엇보다도 피해야 할 것은 정형화된 답안이다. 평소 함양한 풍부한 교양을 바탕으로 새로운 논의 주제를 만나서 펼치는 긴장감 있는 사고가 행간에 배어 있는 글은 참신하다. 논술은 이런 내용을 담은 사고를 논리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점에서 문예창작과 구별되고, 다른 사람에게 설득력 있게 개진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기와도 다르다.
이 글은 몇 가지 사항에 주의했다면 더 나은 글이 되었을 것이다. 우선 제목부터 그렇지만 어법에 맞지 않는 문장들이 드물지 않게 눈에 띄는 것은 결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의할 점은 예 들기이다.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적절한 예를 드는 것은 바람직하나 이해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은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불필요하게 많은 예를 들거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것은 논술의 목적에도 맞지 않거니와 핵심적 내용을 부각하는 데도 오히려 방해가 됨을 유념해야 한다. 논술은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진공으로부터의 사고는 없다. 좋은 논술을 하기 위해서는 독서를 통한 교양의 함양을 통해 사고의 지평을 확대하고, 일상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에 대해서 무관심이나 섣부른 예단이 아니라 때로는 집요하게 생각도 해보고 또 이따금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개진도 하고 수정도 하는 합리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은상수상작♠
성인혜(대영고등학교)
【요지】
개개인의 희생이 역사적 대의 혹은 무의미한 영웅심에 바쳐져서는 안 된다. 역사적 영웅이라는 위명 아래 평범한 대중의 존재는 사라지고 소수의 지배자들만 역사에 기록된다. 그래서 이런 허구적이며 낭만적인 도덕률에서 벗어난 윤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새로운 윤리는 후대의 명성이 아닌 현재 개인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정당성을 지향해야 하며 희생 또한 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제목】
현대 사회에서 낭만주의적 도덕률의 필요성
【논술】
인간은 모두 양면성을 갖고 있다. 철저히 개인적인 면이 있는가 하면 집단주의적 성향도 있으며 현실적인 반면 낭만적인 면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반대되는 성향들이 서로를 견제, 보완해 줄 때 비로소 인간이 가진 진정한 힘이 발휘된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조국이나 세계의 평화 혹은 개혁을 꿈꾸는 낭만주의적 도덕률의 급격한 쇠퇴와 더불어 개개인의 일을 중요시하는 개인주의적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과연 이런 변화가 바람직할 것인가? 역사적 영웅관과 보상은 헛된 명성에 불과한 것일까? 필자는 오히려 현대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낭만주의적 도덕률이며 이것이 개인적인 사고 방식과 조화를 이룰 때 올바른 윤리관이 탄생한다고 생각한다. 그럼 낭만주의적 도덕률의 필요성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낭만적인 역사주의적 도덕률과 현대에서 확산된 개인주의적 가치관의 차이를 살펴보자. 전자는 우리가 소위 말하는 사명, 운명으로 귀결되며 역사적 평가와 영웅주의적 꿈에 바탕을 둔다. 반면 개인주의적 도덕관은 전체의 터무니없는 이상에의 희생을 거부하며 자신의 일과 가족에 충실하는 데서 보람을 찾는다.
문제는 개인주의적 도덕관의 급속한 확대로 낭만주의적 도덕률이 사라져 가는 데 있다. 모 회사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요즘 젊은 사원들은 집에서 하는 재택 근무나 혼자서 일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한다. 집단 속에서보다 개인적이고 타인에게는 폐쇄된 공간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학교도 마찬가지여서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집단생활에 못 견뎌 학교를 자퇴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회 전반적으로도 집단에서 형성된 이상적 가치보다 자신의 실리와 일상이 더 소중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물론 이런 변화는 제시물에 따르면 좋은 변화일지도 모른다. 꿈에서나 나올 듯한 영웅은 어린이들의 전유물이 되었고 자기 개인의 일에 충실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개인의 일에만 몰두하고 역사적 대의나 후대의 비판에 신경 쓰지 않는다면 세상은 삭막해질 것이다. 역사를 향한, 세상을 향한, 큰 꿈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꿈이란 허구이며 즉 현실이 아니기에 더 값지다. 인간의 유구한 역사 내내 꿈이라는 비현실적인 것에 모두가 매달렸던 것은 그 꿈이 가져다주는 허구적 행복감이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하고 더 나아가 현실을 바꿀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추세라면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도덕관에 밀려 꿈은 필요 없는 것으로 될 것이다. 자신의 일과 해야될 일, 해서는 안 될 일만 생각하는 현대인에게 꿈이란 현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들이 현실에 길들여지고 안주하여 꿈이 없어진다면 세상은 제자리걸음만 하게 된다. 해저 200해리에서 작가가 꿈꾸었던 잠수함이 없었다면 인간이 잠수함을 발명하기까지 더 오랜 시간을 보냈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신화를 만들며 우주를 꿈꿨고 결국 우주로 나갔다. 인간은 세계를 꿈꿨고 바다로 신대륙으로 지구를 탐험했다. 진시황제를 보고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어.’
소망하던 소년은 훗날 한나라 고조가 되었고 세상을 평정하기 위해 일어선 유비는 한낱 돗자리 장수에 불과 했었다. 이 모든 일이 단 한사람의 큰 꿈에서 시작되어 다른 사람들의 소망을 모으고 결국 대중의 역사적 사명이 되어 역사에 기적을 낳았다. 역사의 고비고비, 발전, 개혁의 순간마다 꿈이 없었던 때는 한번도 없었고 그래서 필자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로서 꿈을 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비록 터무니없는 것이라도 꿈은 미래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적 영웅이라는 존재를 위해서는 수많은 개인의 희생이 뒤따른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간 평범한 백성들의 이름은 역사책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다. 다만 영웅이 된 몇몇 사람들만이 기록될 뿐이다. 하지만 제시문처럼 모든 영웅들이 소수의 특권층이며 그들의 역사적 대의에 희생됐던 사람들의 희생이 보잘것없다고 생각지 않는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필자는 영웅이란 대중의 꿈과 소망의 결집이라고 생각하며, 개인 스스로가 영웅에의 꿈에 뛰어든 것도 자신의 선택이고 보람은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오히려 자신의 꿈을 위해 몸바친 이들이니 남이 보기에 허무할 지라도 자신만은 행복하지 않았을까? 극소수의 사람들만 역사에 기록된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영웅심에 빠져들지 말아라 라고 하는 것은 미래의 명성에 연연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소수의 영웅을 보고 부정의와 불평등을 부르짖고 역사적 명성이 정의롭지 않다고 하는 것은 작가의 독단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원래 불평등하다. 그것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개개인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다. 모든 이가 영웅이 되고 싶지만 불평등한 인간은 역사의 잣대에 의해 영웅으로 평가되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또 인간은 언제나 후대의 평가를 의식하며 현대에서의 옳은 길을 찾는다. 작가가 얘기하듯 역사의 감시, 비판을 보잘것없이 여긴다면 우리는 히틀러가 죽인 유태인들에게 독일이 현재까지도 배상금을 무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에는 시간의 흐름을 관통하는 잣대가 있고 인간은 그 잣대를 의식하기에 도덕과 윤리의 틀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현대에서 개인주의적 도덕관의 폐해와 그를 보완하기 위한 낭만주의적 도덕관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리고 현대에서 강조되는 개인주의적 도덕관 아래에서 낭만주의적 꿈을 꾸자고 주장한다. 자신의 일에만 매달려 있기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미래의 내 모습을 그리고 현실성 없는 영웅심이라도 생활의 원동력으로써, 미래의 청사진으로써 굳혀나가자고 주장한다. 인간은 남과 함께 꿈꿀 줄 아는 존재이고 그 꿈속에서 현실적 안목으로 독단적 개인주의가 아닌 성숙된 개인주의를 키워나가야만 한다. 현실은 이런 비현실적인 꿈과 개개인의 노력으로 바뀐다. 역사에 이름 없는 평범한 이들도 꿈을 꾸기에 영웅으로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심사평◀
【요지】는 제시문의 핵심에 근접해 있으나 표현이 정확하지 못하다. “위명”은 “미명”이라고 했어야 할 것 같고, “허구적이고 낭만적인”에서 “낭만적인”은 차라리 삭제하는 편이 더 좋았다.
【제목】은 본문에 알맞게 붙여졌을 뿐만 아니라, 주장하는 바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논술】문도 제한된 시간 내에 썼다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자기 생각을 충분히 잘 서술한 것이다. 주의 주장도 분명하고 논리적 구성도 매우 좋다. 다만 부분적인 흠이 몇 가지 눈에 띄어서 몇 마디 덧붙인다.
첫째, 글쓴이의 ‘개인주의’에 대한 이해가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 개인주의란 사회(집단)와의 관계에서 ‘개인들’이 주체이고, 사회는 이 개인들의 ‘집합체’라고 파악하는 입장이지, 사회에 대해서 적대적이거나 사회를 부정하는 사상이 아니다. 따라서 ‘개인주의적’ 개인들이라고 해서 “집단 생활을 못 견뎌”하거나 “폐쇄된 공간을 선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개인주의적 개인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개인의 일에만 몰두하고 역사적 대의나 후대의 비판에 신경쓰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개인주의적 개인들도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며 당연히 그에 따르는 책무감을 가지고 있다.
둘째, 제시문의 필자가 경계하는 것은 ‘이타주의’의 미명 아래 집단주의가 확산되고, 그를 계기로 소수의 실력자들이 그들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해 ‘전체를 위해서 너를 희생하라. 그 희생은 사회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역사적으로 보상받을 것이다’는 명분을 주입시키면서 대중을 동원하고, 대중들은 주체적 의식 없이 그에 매몰되는 현상이지, 개개인의 역사적 사명 의식 자체나 사회적 책무감 자체가 아니다. 제시문의 필자를 비판하면서 글쓴이는 이 점을 다소 왜곡한 감이 없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