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디언 미술 담당 기자인 조너선 존스는 자신이 선정한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걸작 20개'를 소개했다.
존스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작품들은 당신의 인생을 채워줄 뿐만 아니라
인생의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걸작들이라면서 이 그림의 진수를 느끼려면 복제화가
아닌 원화를 직접 봐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은 존스가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걸작으로 뽑은 20개 작품들이다.
아래는 스라이드로 그림들이 보여지며 작은 번호를 눌리면 수동으로 볼 수도 있다.
20 works of art to see before you die
1◇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년작, 스페인 마드리드 소피아왕비 미술관소장)
<피카소및 작품 소개>
피카소(1881-1973)가 1900년 파리에 도착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미술의 천재가 프랑스의 현대 조형예술 분야에 혁명을 일으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피카소는 1904년에 몽마르트의 바토 라브와르에 정착하고, 1907년에는 큐비즘의
발판이 되는 중요한 작품 <아비뇽의 아가씨들>을 제작한다.
1936년 스페인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곧 공화파에 가담했고,
옛날에 고야가 그랬던 것처럼 <게르니카>를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한다.
이 그림 은 1937년대의 대표적인 벽화로 피카소가 그린 것 이다.
게르니카는 바스크 지방의 요람으로, 스페인 내란 기간 중 프랑코를 위해 싸우던
독일 공군의 융단폭격을 받고 폐허가 되었습니다.
피카소는 이런 전쟁의 비극과 잔학상을 초인적인 예리한 시각과 독자적 스타일로 세기의
대 벽화를 완성해내었습니다.
추상화의 대가인 피카소가 게르니카라는 벽화를 그리게 된 계기는 조국 스페인에서
내란이 발생하였는데 그 사건은 독재정치가 프랑코가 일으킨 반란 이였다.
그 사건으로 스페인사람은 죽거나 많이 다쳤는데 가장 많이 피해를 본 곳은 게르니카라는
작은 도시였다.
그 일을 들은 피카소는 조국에서 일어난 학살행위를 고발하기위해 게르니카를 그려
파리국제 전시회에 공개했고 게르니카는 포악한 정치에 대한 저항과 화해의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켜서 스페인의 내전 상징뿐만 아니라 세계평화와 화해를
향한 새로운 전망과 가능성을 열었다고 평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벽화 그림을 자세히 보면 말을 탄 사람은 한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다른 한 눈은 옆을 보고 있다.
처음에는 공습을 주도한 히틀러 정권만을 비난 했지만 피카소는 이중적인 인물화를 통해 게르니카
공습이 실제로는 스페인 군부가 이렇게 되도록 조종시켰다고 피카소는 주장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피카소는 사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줄 때 숨겨진 진실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해서 여러 각도에서 본 사물을 모두 모아 그림으로 표현했다.
다쳐서 죽어가는 말, 불타는 집 속의 여자의 공포, 부러진 칼을 쥔 채 죽어가는 전사,
왼편의 죽은 아이를 잡고 우는 사람, 말과 램프를 든 여자의 모습 모두 전쟁으로 인해
상처 받은 사람들과 동물 들을 표현 한 것 같아 마음 한 곳이 씁쓸했다.
또 흑백의 단조로운 색채를 이용해서 전쟁의 잔혹함을 더욱더 잘 표현 한 것 같다.
게르니카라는 벽화 그림은 게르니카도시의 공포에 젖은 사람과 동물들의 모습을 화면가득
나타내서 전쟁의 잔인함과 야만적인 파괴행위를 말하고 또 억압적인 독재정치의 힘이
커져 가는데 대한 공포, 사람과 동물 모두 독재의 희생물이라고 표현 했다고 한다.
이 그림을 보면서 한사람의 독재라는 욕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해야 하고
공포에 떨어야 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 인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고 평화가 유지 되어서 이런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피카소가 이중적인 인물화를 그려 사람들에게 숨겨진 진실을 알려주려고 한 것과
사물을 여러 각도 에서 보아 표현 하였다.
2◇ 잭슨 폴록의 '넘버 31'(1950년 작,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잭슨 폴록및 작품소개>
큰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막대기로 페인트를 뿌리면서 그림을 그린다기 보단 만들고
있는 희한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현대미술에서 빠뜨릴 수 없는 미국의 위대한 화가 잭슨 폴록입니다.
이 그림들은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드로핑이나 액션 페인팅이라는 새로운 화법에 주목하게
만들었습니다.
시멘트공이었던 아버지와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미국 서부를
유랑하듯이 자랐습니다.
청소년기를 반항과 방황의 모습으로 보낸 폴록은 두 형과 어머니의 도움으로 예술가의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와 그의 예술을 사랑하는 여인도 있었구요.
그가 청년시절을 보낸 시기의 미국은 대경제공황으로 빈곤과 실업으로 많은 사람들이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폴록 또한 1930년대 중반부터 빈곤과 급성 알콜중독으로 크게 고통을
받았습니다. 형의 도움과 국가의 지원으로 간신히 일을 하던 폴록은 정신병원에의 입원을 반복하며
아주 힘들게 작품 활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가 그러한 정신적 어려움을 격게 된 데에는 지나치게
강한 어머니의 영향과 경제공황 아래의 뉴욕이라는 비정한 대도시 등이 원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그때까지만해도 예술은 유럽, 그중에서도 파리가 그 중심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이젤에 세워둔 캔버스에 붓을 가지고 팔만 움직여 그림을 그리던 과거와 다르게 폴록은 온몸을
움직여가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캔버스 위에 오직 행위의 흔적만을 남겨 흔적 자체의 생명감을
오히려 강조하는 이런 그림을 행위미술(액션페인팅)이라 합니다.
이차대전 이후 미국을 휩쓸었던 이러한 그림 경향은 이제껏 파리에만 집중되었던 미술의
관심을 미국으로 향하게 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초현실주의에서 보게 되는 자동기술과
유사한 이러한 잭슨 폴록의 그림 제작방식은 '그리는 의식'을 '그리는 행위'와 일체화시키는
몰입의 상태를 중시합니다. 그렇게 작업한 그의 흔적은 조형적으로 너무나 아름답고 완벽한
구성을 만들어 내어 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를 이어 액션 페인팅 화가가 되었습니다.
1956년 술을 먹고 과속으로 운전하다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폴록의 영향은
미술계의 '제임스 딘' 이라 평가를 받을만큼 독특하고도 절대적이었습니다.
폴록은 현대 추상화에 있어서 그림의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폴락이 1950년의 여름에서 가을까지 계절의 빠른 변화에서 착안하여 3개 벽 크기 회화중
한개이다.
1947년에, 폴락은 캔버스를 지면에 놓고 페인트를 깡통에서 부어 뚝뚝 떨어지게 하거나
또는 막대기에 사기질 페인트를 이용하여 때때로 가볍게 시작하고 강하게 붓을 움직이는 듯한
기법을 시작 하였다.
페인트의 조밀도는 침묵하는 색깔의 물웅덩이와 전면에게 튀기기에 의하여 상쇄한다.
이 긴장감 넘치는 그림은 추상 표현주의의 역사에서 경계표이다.
3◇ 미켈란젤로의 모세상(1515년 대리석 235cm,이탈리아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1545년 설치)
<미켈란젤로및 작품소개>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카프레제 출생.
이탈리아 조각가·화가·건축가·시인. 카프레제 출생.
외모와 신체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 외부와의 접촉을 기피,이탈리아 르네상스 말기에
활동하였으며 89세에 로마에서 죽었다.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성당내에 무덤이 있다.
조각작품 약 40점, 회화로는 4면의 대벽화 외에 약간의 타블로, 건축에서는
교회와 기념건축물 등의 설계와 장식을 남겼고 또 회화·조각·건축에 관한 습작·소묘·에스키스 등
약 800점이 세계 각지에 분산하여 전해지고 있다.
모세상은 시스티나 천정화가 완성되고 얼마있지 않아서 당시의 교황 율리우스 II가
사망했는데, 그때 유언에,1505년에 계약한 바 있는 미켈란젤로의 율리우스 II 묘당을 위해
10,000 두카덴(Dukaten)을 남겨 놓았다.
사실 이 묘당을 위해서 계획하고 추진하던 미켈란젤로의 그간의 노력은 그 시스티나
천정 벽화의 고난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식은 적이 없었다. 그곳에 안치될 상의 하나로 예정된 것이
바로 이 모세상이다.
머리 위의 뿔과 십계의 石板(석판)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 예고자로서의 모세는
그 위엄의 모습을 대리석에서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여기서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여러 예언자 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형태감을 넘어서서,
평생 대리석을 유일한 매체로 삼던 미켈란젤로의 조각가로 서의 본격적인 대결이 그의 응집된
量塊(양괴) 속에서 이 <모세>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모세 상은 신비롭고 위대한 작품에 속한다. 미켈란젤로 특유의 정중동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 미켈란젤로의 최대의 업적 중의 하나이다.
밑에서 쳐다보도록 예상해서 만들어진 위엄에 넘치는 이 작품은 살피듯 하면서 명상에 잠겨 있는
그 포즈가 사려 깊은 통찰력과 격한 분노의 양면을 가진 인간임을 보여준다.
미켈란젤로의 모세 상은 지혜의 상징인 성서를 겨드랑이에 끼고 15 ° 상단을 치켜
응시하고 있는 눈동자가 강렬하다.
이 작품은 율리우스 2세 묘의 중심에 자리해 있으며, 모세 상을 제외하고는 미켈란젤로의
제자 작품이다. 모세를 주제로 한 '모세의 우물'보다 더 널리 알려졌다
모세상에 대한 여러 비평가들의 묘사는 부정확하며 또한 일치하지도 않는다.
미켈란젤로는 과연 모호하고 불분명한 방식으로 조각을 했던 것인가?
어떤 성격의 전형을 나타낸 것인가, 아니면 역사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인가?
대부분의 평자들은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율법의 판을 받은 곳인 시나이 산에서 내려오는
장면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세부묘사에 들어가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크게는 거의가 유대인들이 황금송아지를 우상 숭배하는 것을 보고,
분노가 폭발하여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 전이라고 여긴다.
특히 주스티나 크나프같은 평자들은 매우 설득력 있는 해석을 하고 있다.
하지만 토드는 율법의 판이 미끄러져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견고하게 붙어 있다'고
보았으며, 모세 상은 여러 개의 조각이 어울려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것의 부분이고
또한 좌상보다는 입상이 역사적 사건을 나타내는 데 쓰여왔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격렬한 몸짓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는 장면은 그 작품의 원래 목적인
장례기념물이라는 것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평온한 자세로 있어야 할 것이다.
모세는 통속적인 설명으로는 "건져낸다"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아들"이라는 뜻일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노예 생활에서 부터 구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인도한 위대한
종교 지도자이며 정치가이다. (애굽을 나온 것은 1290년 경).
모세는 레위 족속 아므람과 요베겟 사이에서 낳으며 미리암과 아론의 동생이다.
당시 애굽의 박해로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 강물에 띄웠는데 마침 애굽의 왕녀가 발견하고
데려다가 양자를 삼고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유모로 들어가 바로의 궁전에서 40년간
양육 받으며 애굽의 학술에 통달하였다(행 7:22).
작품으로는 시스티나 예배당 정면벽화 '최후의 심판'완성 '다비드' 제작
4◇ 렘브란트의 '호머의 흉상을 바라보는 아리스토텔레스'(1654년 작,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렘브란트및 작품 소개> (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1669)
네덜란드 화가·판화가. 제분업자(製粉業者)의 아들로 태어나 스와넨부르흐와 암스테르담에
있는 P. 라스트만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라스트만은 이탈리아로부터 카라바조 및 엘스하이머의 영향을 네덜란드에 도입한 일련의
이야기 화가들, 이른바 '렘브란트 전파(前派;Pre-Rembrandtists)'의 대표자로,
구약성서에서 작품의 소재를 취하여 전세대의 기교파와는 대조적으로 우의성(寓意性)을
배제하고 이야기의 명쾌한 서술을 지향한 그의 회화는 렘브란트에게 영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1625년 무렵부터 레이덴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친구 J. 리벤스와 경쟁하며 강한
명암대비와 정교한 자연주의적 세부묘사를 한 이야기 그림을 그렸다. 1631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
그 곳에 정착했다. 암스테르담 외과의사회의 위촉으로 그린 '털프 박사의 해부학강의(1632)'
로 크게 호평을 받아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그는 수많은 초상화를 계속 그리는 한편
레이덴시대의 친구인 문인정치가 C. 호이겐스의 추천으로 네덜란드 총독 프레드릭 헨드릭을
위해 '그리스도의 수난' 연작(連作)을 제작했다.
1634년 ~ 1639년에는 G. 플링크·F. 볼 등 많은 제자를 양성한 이 시기의 작품에는
'아브라함의 희생' '눈을 찌푸린 샘슨' 등 극적 순간의 격렬한 움직임과 얼마쯤 과장된 몸짓과 표정에
의한 감정의 표출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들은 렘브란트가 이탈리아 유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P.P. 루벤스를
필두로 하는 당시의 국제적인 바로크 조류(潮流)에 아주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실적인 네덜란드 풍경화 속에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는 일련의 독특하고 환상적인
풍경화 제작과 한평생의 취미였던 미술품·골동품 및 타국의 무구(武具)·의상 등 대규모
수집도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이 10년 동안이 그의 명성과 생활의 절정기였다.
그러나 그의 회화가 성숙해짐에 따라 당시 일반이 좋아하던 평판(平版)의 초상화
등에 만족하지 못해 외면적으로 정확한 묘사보다는 오히려 내면적인 것과, 깊은 인간성을
중요시해서 종교적 또는 신화적인 제재(題材)나 자화상이 많아졌다.
그의 대표적인 명작 '야경(1642)'을 고비로 갑자기 세계적인 명성에서 멀어져갔다.
이 작품에서 그는 당시의 유행인 기념촬영적인 단체 초상화에서 벗어나 그의 독특한 명암의
효과에 의한 대담한 극적 구성을 사용했으나 일반인은 그 예술성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죽은 지 100년도 지나지 않아 그의 위대한 예술성이 입증되었다.
그의 예술은 시대를 초월한 것이었으며, 17세기 네덜란드 회화와 유럽 회화를 대표하는
최대의 화가였다. 종교·신화·초상·풍경·풍속·정물 등 다방면에 걸친 그의 작품은 현존되고
있는 것만도 약 600점의 회화, 300여 점의 에칭과 수천 점의 소묘가 있다.
높은 종교적 정감과, 인간심리의 움직임이 깊이 있게 표현된 그의 작품에는 따뜻한
애정이 스며 있다.
작품으로 '사스키아 반 오이렌부르흐의 초상' '헨드리케 스토펠스의 초상'
'엠마오의 그리스도' '야곱의 축복' '유대인 신부' '성가족(聖家族)' '다에나'
'병자(病者)를 고치는 그리스도' '3그루의 나무' 등 다수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초상화를 저절로 존경의 마음이 우려나올 숭고한 모습으로 그렸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서사시의 창시자인 호메로스의 정신적 유산을 묵상하는 엄숙한
순간을묘사했다.
지성과 윤리의 표상인 호메르스의 흉상에 오른손을 가볍게 올려놓고 있다.
그러나 위대한 철학자의 얼굴에는 웬지 슬픔이 가득하고 피곤에 절은 두 눈에는 짙은 어둠의
그림자가 깔려있다.렘브란트가 철학자의 모습을 이처럼 표현한 것은 우울증을 위대한 지성인의
특징으로 보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지론을 방영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울증을 지식인이라면 의당 앓아야 할 특권으로 보았다.
미지의 세계을 사색하고 그 본질을 케는 학자라면 기질상 당연히 이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작품에는 렘브란트는 베네치아 파의 대가인 티치아노의 후기 화풍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위엄을 풍기는 철학자의 얼굴을 멀리서 보면 생기가 넘치지만 가까이서 보면
한낱 색으로 분해된다.렘브란트는 티치아노의 세션된 기교에 감탄을 금치 못했고 기법의
효과를 모방하여 이처럼 뛰어난 걸작을 창조해 냈다.
그림을 주문한 시칠리아의귀족 돈 안토니오 루포는 아리스토텔리스의 초상화를
보고 기쁨에 입을 다물지 못했는데 이탈리아와 북유럽 화가의 작품들을 수집하는 수준높은
컬렉터였던 그는 렘브란트의 그림을 추가해 보다 풍요로운 컬렉션을 자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5◇ 산족의 암벽화(원시미술,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 남아공국립미술관 소장)
3만5천년 전까지 산족의 조상들이 남쪽 아프리카에 거주했으며 수렵채집인의
사회에서 우아하고 섬세하게 그린 3500개 이상의 암벽화가 있기도 하다.
이렇게 동물, 사람, 지형적인 도안으로 된 미니멀 표현양식(최소한의 조형수단을
써서 표현하는 회화나 조각)은 거의 낙서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가장 놀랄만한 인간의
성취를 달성하였다.
이 암벽화는 마술사의 의식에 연관된 것으로 보이며 정신적으로 동물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대부분이 황토색이나 흰색으로 그려져 있으며 산족과 그 후에는 반투(Bantu)족이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음영의 이미지는 남아프리가 큰 영양과 다른 동물들을 사냥하는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가장 흥미로운 벽화중에는 얼룩말, 고래, 펭귄, 코뿔소 가족, 성적으로 흥분하여 춤추는 남자들이
그려져 있다.
6◇ 티티안의 '다나에'(1544∼46년경 작, 이탈리아 나폴리 카포디몬테국립미술관 소장)
Titian ( 1495-1576)및 작품 소개
북이탈리아의 피에베 디 카도레 출생. 베네치아에 전해진 플랑드르의 유채화법을
계승하여 피렌체파의 조각적인 형태주의에 대해 베네치아파의 회화적인 색채주의를 확립하고,
생애의 마지막까지 왕성한 제작활동을 하였다.
기록에 남은 최초의 제작은 1508년 조르조네의 조수로서 독일인의 상관(商館) 폰다코
디테데스키에 그린 벽화이다.
그 이전의 ‘알려져 있지 않은 티치아노’의 기간이 너무 오래되어, 최근에는 그의 생년을
1488~1490년으로 추정하는 설이 유력하다.
초기 작풍은 조반니 벨리니와 조르조네의 기법을 따랐으며, 피티화랑의 '합주(合奏)'
등은 조르조네의 작품인지 티치아노의 작품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지만, 유명한
'성애(聖愛)와 속애(俗愛)'(로마 보르게미술관 소장)에서는 이미 그 특유의 사실적인
묘사의 견실함과 명쾌한 색채를 보여주었으며, 1518년 완성된 베네치아 프라리성당의
제단화 '성모승천'에서는 선배들의 영향을 벗어나 자유로운 동적 표현으로의 진로를 보였다.
또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 있는 '비너스의 예찬''주신(酒神) 축제'를 비롯하여,
1523년의 '바커스와 아리아드네'(런던 내셔널갤러리) 등 일련의 고전신화 그림,
드레스덴회화관의 '공전(貢錢)', 루브르미술관의 '장갑을 쥔 사나이' 등은 구도의
동적 리듬에 한층 진보가 보이며, 색채도 명도(明度)를 더해서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이렇게 확고한 기반을 닦은 그는 국내외의 여러 왕후들로부터 위촉받아 더욱 명성을
떨쳤으며, 그 중에서도 독일황제 카를 5세를 위해 그린 1533년의 '개를 데리고 있는 입상'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은 그의 초상화 중의 걸작이다.
당시의 '마리아의 참배'(베네치아 아카데미아미술관) '파르도의 비너스'(루브르미술관)
'우르비노의 비너스'(우피치미술관) 등은 풍속화적 ·풍경화적인 요소가 두드러지며,
인간성에 중점을 둔 독특한 작풍을 보여준다.
또한 풍만한 나부(裸婦)의 표현도 주요한 모티프를 이루며, 1540년대에는
'큐피드와 비너스'(우피치미술관) '음악가와 비너스'(프라도미술관) '다나에'(나폴리국립미술관)
'거울을 보는 비너스'(워싱턴국립미술관) '유로파의 겁탈' 등 독자적 관능성을 발휘하였다.
1545년에는 로마 교황 바오로 3세의 초빙으로 '교황 바오로 3세와 측근자'
(나폴리국립미술관)를, 1548년에는 카를 5세의 초빙으로 '카를 5세의 기마상'(프라도미술관)을
그려, 원숙한 기법을 보여주었다. 또한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 2세의 많은 초상과,
'프랑수아 1세의 초상'(루브르미술관) '리미날디의 초상'(피티미술관), 그 밖의 몇 점의
자화상 등, 그 성격묘사의 예리함은 그의 투철한 사실성의 깊이를 말해준다.
만년에도 왕성한 제작욕을 보여 '형관(刑冠)'(뮌헨미술관)과 같이 격정적인 장면을 즐겨
그렸으며, 필치는 더욱 강해져서 마침내 그의 예술은 단려한 고전적 양식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격정적인 바로크 양식의 선구로서 17세기의 P.루벤스, H.렘브란트로 이어지는 길을 개척하였다.
7◇ 카라바치오의 '성녀 루치아의 매장'(1608년 작, 이탈리아 시칠리아 시라쿠자의 플라초 벨로모 미술관 소장)
카라바치오(1573-1610) 소개
서양미술사 최초의 자유분방한 예술가, 반항적 기질의 소유자로서 미술의 발전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는 카라바지즘이라고 불리는 17세기의 사실주의적 경향의 원조였다.
그가 사용한 빛과 어두움의 대조를 이용한 명암의 대비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카라바치오는 개인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짧은 삶을 살다 갔지만 그의 천재성은
그가 그린 그림들이 신 예수를 평범한 인간 남자로 그렸다고 해서 당대에 많은 비난을 당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빛과 어두움, 얼굴표정 등등에서 후에 렘브란트, 베르메르 같은
네덜란드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카라바치오의 <엠마오 식사>
같은 그림을 보며 느꼈을 그 시대 사람들의 충격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스승의 죽음으로 모든 꿈이 사라지고 절망과 공포로 가득찬 가슴을 움켜안고 낙향하는
두 제자. 이들에게 조용히 다가와 같이 걸으며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이야기해주던 남자.
무시당하는 시골 마을 나사렛 출신의 목수. 뜨거운 팔레스타인 태양 아래서 일하느라 피부색은
거무튀튀하고 머리카락은 헝클어지고 튼튼한 팔근육과 샌들로 맨땅을 걷느라 먼지가 새하얗게
덮힌 더러운 발을 가진 남자. 가난한 어부, 죄인 취급 받던 세리 같은 오합지졸 같은 무리들을
이끌고 배를 곯며 여기저기 다니던 남자. 그 남자가 허름한 숙소에서 두 제자와 여관집 주인남자,
하녀에 둘러싸인 채 빵를 떼는 모습...이 예수를 카라비치오는 단정하게 흘러내리는 긴 웨이브
블론디 머리털과 뽀얀 피부, 갸름한 얼굴, 가녀린 손가락을 가진 귀족 같은 남자로 그릴 수는
없었을 겁니다.
반종교개혁의 이상을 품은 그는 고전적인 이상미를 거부하고 빛에 의해 극적으로 표현된
리얼리티 묘사를 통해 신을 가깝게 느낄 수 있기를 바랬다.
주요작품으로는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1597) ,*성 마태의 소명(1598) ,*의심하는 토마1602-3년경
8◇ 벨라스케스의 '시녀들'(1656년 작,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국립미술관 소장)
벨라스케스 [1599.6.6~1660.8.6]및 작품 소개
에스파냐의 화가로서 1599년 6월 6일 세비야에서 출생하였다.
17세기 스페인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가로서 전세계적으로도 위대한 거장으로 인정
받고 있다. 초기의 작풍은 당시의 에스파냐 화가들과 다름없이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은
명암법으로 경건한 종교적 주제를 그렸으나 민중의 빈곤한 일상생활에도 관심이 많았다.
1622년 수도 마드리드로 나가, 이듬해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가 되어, 평생 왕의 예우를
받았으며 나중에는 궁정의 요직까지 맡았다.
초기의 어두운 색조와 명암법에 의한 마지막 걸작은 '주정뱅이들─바커스의 대관(戴冠)'
(1629)이고, 1628년의 첫 이탈리아 여행에서 받은 베네치아파의 영향으로, 중기(中期)는 밝고
선명한 색조와 경묘한 필치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 왕족·신하 그리고 궁정의 어릿광대·난쟁이
등을 그린 다수의 초상화는, 그를 미술사상 초상화가의 대가로 만들었다.
이 불행한 사람들을 왕족들과 다름없는 담담한 필치로 묘사한 것은 인간 존재의 중요성과
본질적인 비극성까지 추구하였음을 보여준다.
초상화의 대표작으로는 '왕녀 마리아 안나' '왕녀 마르가리타'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
(1650) 등이 있으며 또 큰 구도의 작품으로는 '브레다성의 항복'(1637)이 유명하다.
그 후 두 번째 이탈리아에 체류(1649∼1651)하는 동안 장기간 연찬을 거듭하여 기법상의
혁신이 완성되었다. 만년의 대작 '궁녀들(라스 메니나스)'과 '직녀(織女)들'(1657)은 평생의 화업(畵業)을
집약한 것들이다. 거기서는 전통적인 선에 의한 윤곽과 조소적(彫塑的)인 양감(量感)이라는 기법이,
투명한 색채의 터치로 분해되어, 공기의 두께에 의한 원근법의 표현으로 대치되었다.
전동(顫動)하는 빛의 파도에 씻기고, 완전히 대기를 파악하는 벨라스케스의 공간과
기법은 시대를 크게 앞질러 인상파의 출현을 예고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그의 종교화 ·
신화화는 모두 주제의 제약에 속박되지 않는 조형성 탐구라는 근대성을 지녔으며, 백색 ·흑색 ·
회색의 해조(諧調)된 색채가 비속화나 이상화에 치우치지 않는 독자적인 리얼리스트로서,
그 시대의 에스파냐 화단에서는 개성이 출중한 화가로서 평가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특히 베네치아의 회화를 연구한 결과 공간·원근법·빛·색채의 처리와 보다
폭넓은 기법을 발전시켰는데, 이것은 그가 일생 동안 추구한 시각적 현상에 대한 충실한 묘사에 있어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 세세한 드로잉이나 명암의 강렬한 대비 대신 풍부한 붓놀림과
자연광을 이용하여 3차원적인 효과를 달성했다.
정교한 구도는 루벤스의 회화 양식에 기초를 두었지만, 그는 세부의 정확한 정밀 묘사와
주요인물들의 살아 있는 듯한 묘사를 통해 생생한 실재감을 전달하고 있다.
〈왕가 The Royal Family〉라고도 알려져 있는 '시녀들 Las Meninas'에서 그는 시녀들과
다른 하인들을 거느린 마르가리타 공주의 면전에 있는 왕과 왕비(배경의 거울 속에 그들의 상이
보일 뿐임)를 그리는 동안 자신의 작업실에서 순간적으로 우연한 장면을 얼핏 본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이 복잡한 구도에서는 거의 실물 크기의 인물들이, 중앙의 공주와 조명원에 대한 관계에
따라 자세한 정도가 다르게 묘사되어 있으며, 벨라스케스 자신이나 당대의 어떤 다른 미술가도
능가하지 못할 정도로 뛰어나게 실재와 같은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시녀들'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으며, 사람들은 이 그림
앞에 서면 위압감을 느낀다. 분명 이 작품이 주는 느낌,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하나의 이유인지도 모른다.
햇빛이 드는 아침, 화가의 작업실. 화가는 왕과 왕비를 그리고 있고, 시녀들은 어린 공주와
그녀의 시중들, 난쟁이와 개를 데려오고 있다. 늘 그렇듯이 벨라스케스는 이 대상들 모두를 편견 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땅딸한 난쟁이 여인과 잘 생긴 개에게도 가운데 있는 빛나는 공주와 동일한 비중을
두고 있다.
자신의 작업실의 양쪽 면을 모두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서 이 그림은 눈부시게 투명하다.
거울을 통해서만 왕과 왕비를 보여주는 것은 보는 이를 그들(왕과 왕비)이 서 있던 위치에 서게
하려는 장치라고 할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는 이는그림의 중심이 된다. 하지만 작품의 실제 중심은 그림 한쪽에서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화가 자신이다. 왕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 그는 자신의 옆에 있는
위력적이고 상징적으로 확대되어 펼쳐진 캔버스를 다루고 있다.
그림 안의 모든것은 뛰어난 상상력의 결과이며 아주 잘 그려졌다. 하지만, 작품 전체는
부분들을 모두 더한 것 이상이다. 이 그림이 갖는 위엄의 일부는 벨라스케스 자신의 정신적인
승리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벨라스케스는 두 가지 상반되는 욕망에 의해 분열된 사람이었다.
훌륭한 화가가 되겠다는 그의 첫번째 욕망은 이미 성취한 것으로 보인다.
훌륭한 귀족으로 대접받고 싶다는 나머지 욕망은 왕 앞에서 취하고 있는 그의 편안한
자세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계급 사회에서 살고 있는 화가였다.
화가는 자신의 손으로 노동을 하는 사람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절대로 기사는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길고도 힘들었던 노력을 통해 그 특권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그림에서도 보이듯이 그는 승리의 상징인 산티아고 기사단 Order of Santiago의
십자표시를 달고 있다.
(벨라스케스가 [시녀들]을 그리던 때는 아직 이 십자표시를 받지 못했던 때였다.
그는 나중에 그림을 다시 가져와 십자표시를 그려넣었다).
결국, 이 그림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보고 있으면 위대함의 현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그림은 우리의 작음에서 벗어나 보다 큰 무엇으로 올라가는 느낌을 준다.
그것은 스스로는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그림을 보는 이는 고귀해진다.
그것도 벨라스케스가 원했던 것처럼 사소한 방식으로가 아니라, 예술가에게만 가능한 심오한
방식으로 말이다.
9◇ 마크 로스코의 로스코 예배당의 유화들(1956∼66년 작,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로스코 예배당 안 벽화)
마크 로스코및 작품 소개
로스코는 미국출신의 화가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감상적이고 과장된
추상표현주의 양식에 인간의 내면을 관조하는 명상적 성찰을 도입했다.
색채를 유일한 표현 수단으로 사용하는 그의 표현방식은 이른바
'색면파'(Colour Field Painting)를 낳게 했다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작품에서 뿜어나오는 심오하도록 사색적이고
폭넓게 암시적인 작품을 대하는 감상자에게 자신을 몰입시켜 몰아의 경지에
들어서고 신비적 공허와 숭고를 체험하게 한다. 이들 밝고, 찬란하고, 암울하게
사색적인 절제된 추상화들은 마크 로스코 생애 마지막 20년에 해당한다.
이 시기의 로스코는 프란츠 클라인(Franz Kline),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클리포드 스틸(Clyfford Still)을 포함한 뉴욕 화파
일세대 화가들 중 한명으로 큰 존경을 받았다.
사각형 틀 안에서 각기 다른 톤으로 부드럽고 잔잔하게 얼룩져 있는 그의
화면은 잭슨 폴록과 함께 추상표현주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되어 왔으며 20세기
미술사에 한 획을 긋는 화가로 자리매김 하였다.
대표적인 초기 작품으로는 건축학적 구도에 대한 로스코의 관심을 볼 수
있는 ‘지하철 환타지’(1940)와 'Aquatic Drama'(1946)를 포함하여 색사각형 회화가
본격화 되는 시기인 50년대 이후의 ‘무제’(1950/1956), 'Red Band'(1955) 등 로스코의
고전적 양식이 만개한 첫해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있다. 후기 작품인 캔버스 작품
8점과 종이에 그린 그림 3점도 있다.
마흔이 되어서야 자신만의 성숙된 양식을 발전시켰던 로스코는 그가 평생
힘들게 지켜온 주제나 내용에 대한 추구를 결코 포기한 적이 없었으며, 나아가
물질주의가 팽배하던 미술이라는 토양위에서, 또한 종교적 교리나 예술적 상징이
사라져버린 사회적 상황에서 소신 있게 인간의 한계와 영원성의 문제에 전념하는
태도를 견지했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자신의 회화를 통해 인간의 유한성을 직시하고
실존과 마주하며 또 현세의 갈등을 극복하고 절대적인 영원에 도달하는 체험을
제공하고자 했던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고 로스코 작품의 영원한 주제인 ‘숭고미’를
느낄 수 있다.
마크 로스코는 1940년을 전후해 미국에서 일었던 급격한 화풍의 변화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해외에서의 전쟁으로 인한 폐해와 혼란, 유럽을 피해 뉴욕으로 온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호앙 미로(Joan Miro), 피에 몬드리안(Piet Mondrian)이 유입한
사상으로 인해 마크 로스코와 동시대 화가들의 회화는 구상화에서 추상화로 이행한다.
마크 로스코에게는 화가 밀턴 에버리(Milton Avery)라는 중요한
스승이 있었으며, 에버리의 절제된 형상, 미묘한 색감은 젊은 로스코의 작업 방향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밝은 시각 효과를 내는 색면이 일깨우는 신체적 감각을 탐구했다.
마크 로스코는 추상 이미지가 "휴먼 드라마"의 근원적 속성을 직접 반영할 수 있고,
회화가 비극, 환희, 숭고함과 같은 영원한 주제들과도 때로는 맥을 같이 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20년에서 1930년대 시기동안 마크 로스코는 누드, 자화상, 인물이 있는
내부정경, 도시와 자연경관 등을 그린 수백 점의 그림을 종이와 캔버스에 남기고 있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형태의 고의적 변형과 물감의 엄격한 적용은 몹시
선망한 아프리카와 대양주 미술, 어린이 미술과 같은 몇몇 비서구 시각 전통이
공유한 특징들이다. 드로잉과 회화의 재료와 도구에 대한 초창기 실험적
시도는 흑연, 잉크, 투명/ 불투명 수채, 유채를 포함한 많은 소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마크 로스코의 초기 전시회에는 야외 풍경을 그린 ‘무제’(풍경화)와 같은
수채 풍경화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자연의 유기적 곡선 묘사는 재빨리 도시의
기하학적 구도로 대체된다. 동시에 형상은 갈수록 뒤틀려 나타나고, 이런 특징은
1930년대 말 그려진 두 작품 ‘거리 풍경’과 ‘지하철 환타지’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후자는 마크 로스코가 뉴욕 지하철을 인간 소외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탐구한 대표적 작품이다.
평면적이고 무표정하면서 지극히 연약한 인물들은 그물망 같은 답답한
지하세계에서 건축적 배경과 뒤섞인다.
1950년경 마크 로스코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구축하여 ‘단순한 표현
속의 복잡한 심정’이라는 그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이들 작품은 보통 1955년작
‘무제’에서 나타나듯이 두개에서 네개의 직사각형이 큰 색면 위에 수직으로
배열되어 있는 구도를 보인다. 이런 형태 안에서 마크 로스코는 폭넓은 색채와 색조,
여러가지 양식적 관계를 활용해 극적이고 소박하며 시적이기도 한 다양한 분위기와
효과를 자아낸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은 1957년 ‘무제’에서 볼 수 있듯이 1950년대에 상당히
어두워졌다. 1958년 무렵에는 화려한 색상 대신 붉은색, 갈색, 고동색, 검은색 등
어두운 색을 선택하여 사용하였고, 특히 생애 마지막 10년동안 몰두했던 벽화작업에서
이러한 경향은 두드러진다.
1968년 대동맥류가 발병한 후 마크 로스코는 주로 커다란 캔버스에 그리던 것을
그만두고 종이에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들 작품 중 상당수는 판넬이나 직물 위에
설치되어 틀이 없는 캔버스화처럼 보인다.
1969년작 ‘무제’는 마크 로스코가 생애 마지막에 그린 고동색 혹은 검은색과 회색의
색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그의 작품 구도는 기본적인 색채, 색조, 색면의 대치구도로 한층 집약된다.
하지만 선명한 붉은색으로 가득찬 1970년작 ‘무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 오로지
어두운 색채만이 그의 작품을 압도했던 것은 아니다.
로스코는 대부분의 추상표현주의 화가들과는 달리, 격렬한 붓놀림이나
물감을 뚝뚝 떨어뜨리고 뿌리는 극적인 표현기법에는 결코 의존하지 않았다.
그림을 그린 동작이 나타나 있지 않은 그의 그림들에는 서로 스며드는 듯한 커다란
색면들이 나란히 병치되어 있어, 마치 그것들이 몽롱한 공간 속에 그림 평면과
나란히 떠 있는 듯이 보인다.
로스코는 이 기본양식을 계속 단순화하여 세련되게 다듬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는 부드러운 윤곽을 가진 2~3개의 직4각형만으로 구성을 제한했고,
이 직4각형들은 마치 추상화된 기념비적 성상처럼 벽 크기의 수직 화폭을 거의 가득 채웠다.
그러나 이같은 거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그의 그림은 부분적인 색채 간의 미묘한
차이로 인해 보는 사람들에게 놀랄 만한 친밀감을 주었다.
1958~66년에 그는 14개의 거대한 화폭(가장 큰 것은 가로가 3m, 세로가 5m나
되었음)에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들은 결국 텍사스 주 휴스턴에 있는 예배당에 걸렸는데, 특정 종파와 관계가 없는
이 예배당은 그가 죽은 뒤 로스코 예배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그림들은
신비스럽게 빛나는 갈색·적갈색 및 빨간색·검은색으로 그린 모노크롬이었다.
그 신비스러운 분위기는 로스코가 말년에 신비주의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말년에 그는 그의 그림에서 많은 것을 배운 예술가들이 그를 완전히
잊어버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괴로워했고, 건강마저 나빠지자 자살했다.
로스코가 소유했던 모든 작품은 두 자녀와 재단이 나누어 가졌다.
재단이 차지한 작품들은 1984년에 미국·영국·네덜란드·덴마크·이스라엘 등지의
19개 미술관에 분배되었다. 그의 우수한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은
워싱턴 국립미술관이다.
10◇ 한스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1521∼22년 작, 스위스 바젤 미술관 소장)
홀바인및 작품 소개[1497~1543]
아우크스부르크 출생. Hans Holbein d..의 아들이며, 독일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처음 아버지와 목판화가인 브루크마이어에게 그림을 배우고 바젤·북이탈리아·런던 등지에서
명성을 얻은 뒤 영국 헨리8세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뒤러, 크라나흐와 견줄 만한 걸출한 화가였고 이탈리아 르네상스와는 판이한
상징 ·환상 ·비유의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특히 초상화에 뛰어났다.
그는 특출한 성격묘사로 대상의 인간성을 부조(浮彫)의 영역으로까지 끌어올렸으며
또 정교한 필치에 의한 세부의 마무리와 풍부한 빛깔로 의상의 재질감까지 교묘하게 나타냈다.
보니파키우스 아머바흐의 초상화 '헨리 8세상' 등이 좋은 예이다.
종교화에는 '그리스도의 시신(屍身)' '마이어시장의 성모', 목판에 의한 '구약성서'
'죽음의 무도'(1525?) 등이 있다.
홀바인의 '무덤 속 그리스도의 주검'은 그러나 에라스무스나 홀바인이 기대한
세상을 그 당대에는 만나보지 못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은 끝내 유혈충돌로 이어졌고 양측의 불관용은
16세기 중반 이후 한 세기 동안 피비린내나는 폭력과 종교전쟁을 야기했다.
에라스무스 같은 온건한 인문주의자는 양자 모두로부터 배척을 받았다.
왕이나 제후의 절대권력 아래 있지 않고 독립적이었던 스위스의 도시들에서는
특히 급진주의가 세를 얻었다.
바젤도 폭력적 상황을 겪었고 이를 피해 프라이부르크로 피신한 에라스무스는
당시 홀바인이 그린 그의 초상화에도 나타나듯 매우 지쳐 있었다.
예수는 이 시기의 유럽을 위해 아마도 다시 한 번 십자가를 지고 싶었을 것이다.
너무나 사실적 표현으로 등골이 오싹할 정도이다.그리스도는 그림속에서도
좁은 공간속에 갇혀있는 연약학 사람의 아들중의 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는 반쯤 눈을 허공에 가늘게 뜨고 죽어 있는 모습니다.자신을 버린 아버지가
야속한듯,허공에 눈을 정지하여 애달프게 애원하는 모습이 역역하다,
그의 입은 여느 인간의 죽은 모습과 똑같이 입을 반쯤 열어 하늘을 향하여 무언가
할 말을 다하지 못하여 한이 맺힌 모습이다.
닫힌 공간. 세상과 절연된 곳. 그 곳에 썩어져가는 육신이 외롭게 누워 있다.
마른 명태처럼, 꺾인 나무가지처럼 그렇게 버려진 육체. 시신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하는 인간 형상이라는 점에서 가장 쓸쓸한 이미지다.
주어진 소명과 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세상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깊이 자각했던
한 영혼. 그것들을 위해 그 어떤 고통도,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던 한 영혼.
그렇게 순수한 영혼이었기에 오히려 그의 육신은 이리도 망가지고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
홀바인은 그 망가진 육신을 통해 절묘한 반어법적 표현으로 예수의
영혼을 생생히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다.
너무나 사실적이여서 무덤속에 있는 그리스도가 답답한 모습이기에 무덤속의
좁은 공간의두려움을 느낄 정도이다.
혹시나 그리스도가 살아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들 정도로 좁은 공간속의
그리스도,사실적 묘사로 슈퍼스타의 이미지가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이며 연약하여 죽은
사람의 모습니다.
그리스도의 수염은 흩트러져서 몸부림을 치다가 죽은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홀바인의 의도가 섬세함보다 더 예리하개 표현하였다.
그의 머리로 부터 시작하여 이마와 반쯤 떠진 애처러운 눈, 그리고 벌려진 입과 그의
목을 차고 내려오면서 빈약하게 보이는 가슴과 전체적으로 날엽하다 못해 애처러운
몸의 맵시,어떻게 그런 몸으로 그 험악한 십자가와 채찍을 감당했을까 할 정도의 날씬한
몸의 모습이다.그리고 가슴을 타고 내려와 그의 배꼽이우습기도하고 유머러스하게도
돌기처럼 삐숙 나와 있다.
화가는 왜 전체적인 분위기 속에 자신의 유모러스 한면을그곳에다 표현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전체적인 모습이 너무 슬퍼서 아마 그리스도의 중간지점에 다가 그 무거운
죽음과 절망을순화시킨 다음에 다시 날엽한 모습으로 쭉벋은 그의 다리까지 시원스럽게
표현하였다.
그리스도의가지런한 두 다리의 모습은 죽은 자의 모습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다시
일어날 것 같은 아름답고 다듬어진 모습이다.
이렇게 화가는 자신의 생각을 드라마틱한 시적표현으로 보는 이의 눈을 순간에
고정시킬 정도의 영감을 자아내었다.
그러나 점점 그리스도의 두상에서 다리로 내려가다보면 점점 어둠이 걷히고 날이 밝아오는
힘찬 일출이 시작되는 분기점에서 마음에 희망이 가슴으로 벅차 오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돌을 깎아 만든 인간 형상 앞에서는 경배도 드리는데, 청동으로 주물을 떠 만든
인간 형상 앞에서는 아름답다고 연신 탄성을 울리는데, 주검 앞에서는 그 누구도 그런
따뜻한 감정을 쏟아내지 않는다. 얼음 같은 외면과 절벽 같은 이별만이 있을 뿐이다.
썩어 들어가는 앙상하고 싸늘한 주검을 통해 16세기 당시부패한 가톨릭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
홀바인이 진정으로 그리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부활의 약속에 대한 반기일까,
아니면 뒤틀리고 썩어 뭉게진 냉혹한 현실일까. 아마 둘 다 아닐게다.
현실과 진정한 믿음의 그 단절의 깊은 골을 죽은 예수를 통해 조망해 보고,
무엇보다 예수의 영혼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리라.
후대 미술사가들은 그를 그 시대 인간의 본성을 정확히 읽고 표현할 줄 알았던 극소수의
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평가한다. 그러다면 그가 진정으로 그리고자 한 것은 지금 이
그림 안에는 없다. 그가 그리고자 했던 것을 알려면 그가 살았던 시대를 둘러 볼 필요가
있다.
홀바인은 그 망가진 육신을 통해 절묘한 반어법적 표현으로 예수의 영혼을
더욱 생생히 드러내놓고 있다. 그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유럽은 종교개혁의 열기에
휩싸여 들었다.
역사가들이 당시 교황들에게 '패륜아' 니 '탕아' 니 하는 수식어까지 붙인 것을 보면
당시 가톨릭 교회가 얼마나 정신적 위기에 봉착해 있었는가를 가름할 수 있다.
루터와 맞섰던 교황 레오 10세에 대해 한 카톨릭 역사가는 "사도 시대에
살았더라면 교회당의 문지기로도 적합하지 않았을 인물" 이라고 평했다.
이렇듯 세속화되고 권력과 돈에만 혈안이 돼 있던 교회와 교회지도자들에 대해
프로테스탄트들 뿐 아니라 에라스무스같은 온건한 인문주의자들도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에라스무스는 교황들에게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도록 요구한다면 이 세상에서
그들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힐난했다.
홀바인이 이렇게 남루하고 비참한 그리스도를 그린 데는 바로 화려한 보물과
예술, 기름진 음식에 취해 있는 교회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의 의도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 또한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에라스무스의 제자였던 것이다.
홀바인은 이 그림을 통해 묻고 있다. 야누스의 얼굴처럼 분명 함께 존재했지만
부활의 영광에 가려져 간과되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그 답 또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부활의 영광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고통스런 죽음의 처참함이 있었기
때문임을...
머리로만 수긍하던 그 사실을 가슴으로 느낄 것을 요구했다. 어리석은 세인의 눈으로
보았던 그림을 다시 한번 응시하며 부활의 영광에만 들떠 기뻐하던 경솔함을 놓고,
예수의 비참한 죽음을 겸허한 가슴으로 먼저 본다.
11◇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BC 1333∼1323년 작, 이집트 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
투탕카멘 소개
3300년만에 살아난 이집트왕 투탕카멘은 제18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불과
1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다가 10대에 끔찍한 최후를 맞았지만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유명한 파라오로 남아 있다.
그가 유명해질 수 있었던 것은 무덤에 잘 보존되어 있었던 석관, 황금 마스크 등
5,000여 가지가 넘는 보물 때문이었다. 이와 동시에 투탕카문의 무덤 발굴에 관여한
사람들이 의문의 죽음을 당함으로써 왕의 저주에 대한 의혹도 함께 퍼지게 되었다.
투탕카멘의 묘는 1922년 영국인 하워드 카터(1873∼1939)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이것은 20세기의 이집트 발굴 사상 최대의 쾌거였다.
사실 투탕카문은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아버지 아크헤나텐으로 인해 피폐해진
이집트를 재건하기 위해 고대 종교를 부활시키고 수도를 멤피스로 옮기는 등 많은
업적을 쌓기도 했다.
이집트 고대유물보존위원회의 자히 하와스 사무국장은 “(복원된) 얼굴은 턱선이
수염 없이 각지지 않았고, 윗니가 아랫니보다 많이 튀어나와 있는 등, 1922년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황금마스크의 형상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고 말했다.
9세 소년으로 왕위에 오른 투탕카멘은 단층촬영 결과 19세에 사망했으며,
167㎝의 키에 가냘픈 체격이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당초 머리에 외부로부터 충격을 받고 죽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사실과 다른 것으로 판명됐다.
연구진은 “투탕카멘이 사망 수일 전 왼쪽 허벅지 뼈가 부러져 살 밖으로 나올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가 감염되면서 사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대유물보존위원회측은 카이로 박물관에 보관 중인 파라오 등의 미라 전부를 5년 동안
단층촬영할 예정이며, 사진과 복원된 얼굴 모습을 전시할 계획이다. 사진-소년 파라오 투탕카멘의 황금관 (카이로박물관)
발굴된 투탕카멘의 유물은 현재 카이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사진은 전시 상태의 것이 아니라 특별히 촬영된 것이다.
세밀하게 포착된 아름다운 보물들을 살펴보자.
미라는 체형에 맞춘 3중의 관, 석관, 4중의 궤에 들어 있었다
황금 마스크를 쓴 투탕카멘 왕의 미라는 체형에 맞춘 3중의 관, 석관 그리고 4중의
궤 안에 들어 있었다.
발굴을 진행하던 카터가 서서히 전실의 북쪽 벽에 구멍을 낼 때 먼저 눈에 띈 것이
황금과 청색의 파이앙스로 된 벽으로, 그것이 왜 있는지 한순간 이해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현실 가득히 안치된 첫째 궤의 측면이었다.
그것에 그려져 있던 것은 안정의 상징인 제드 기둥과 이시스의 매듭 체트였다.
첫째 궤는 봉인되어 있지 않았고, 나아가 그 안에 있는 궤의 문에 붙어 있는
봉인은 손대지 않은 채였으므로 미라 발견의 기대가 높았지만, 1923년 2월 말 작업은
중단되어 버렸다.
그리고 출자자이고 카터를 잘 이해하였던 카나본경이 같은 해 4월 갑자기 사망하였다.
마치 사실이기라도 한 듯 ‘파라오의 저주’라는 말이 나온 것은 이 뒤의 일이다.
작업이 재개된 것은 약 2년 뒤인 1925년 1월이다. 벽과 궤, 궤 사이의 틈새에는
노와 항아리, 작은 상 등 공양을 위한 물품들이 아무렇게나 들어 있었다.
이윽고 궤가 하나씩 열리자 나타난 것은 누런색의 규암으로 만들어진 석관이었다.
그리고 뜻밖에도 붉은색 화강암으로 만든 뚜껑은 가운데에서 둘로 갈라져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본래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어서 수수께끼이다.
12◇ 얀 반 에이크의 '롤린 대주교와 성모'(1435년경 작,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얀 반 에이크및 작품 소개
플랑드르의 화가.
당시에 새로 개발된 유화 기법을 완성한, 주로 초상과 종교적인 주제들을 다룬
자연주의적인 패널에서 은폐된 종교적 상징들을 많이 사용했다. 걸작으로는 헨트 대성당에
있는 제단화인 〈어린 양에 대한 경배 Adoration of the Lamb〉(1432)가 있다.
얀 반 에이크는 1422년 10월에 네덜란드의 백작인 바이에른의 요한의 '명예 시종 겸
화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1395년 이전에 태어난 것이 틀림없다.
그는 1425년 그 백작이 죽을 때까지 계속 헤이그 궁전에서 일했으며 그뒤 잠깐
브뤼주에 머물다가 그 해 여름에 플랑드르의 가장 강력한 통치자이자 가장 중요한 예술
후원자인 부르고뉴의 선량공 필리프의 부름으로 릴에 가서, 죽을 때까지 그 공작 밑에서
일했다(→ 플랑드르 미술).
그는 필리프 공을 위해서 그뒤 10년 동안 많은 비밀 임무들을 수행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베리아 반도를 2차례 방문한 일이었다.
첫번째는 1427년 스페인의 이사벨라와 필리프 공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2번째는 1428~29년에 포르투갈의 이사벨라에게 청혼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1441년에 죽었으며 브뤼주에 있는 생도나티앙 교회에 묻혔다.
마지막 10년 동안에 그린 그림들만이 그의 작품으로 확실히 확인되었으므로
초기의 발전 과정은 이 후기 작품들을 미루어 추론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에이크는 플랑드르 회화의 창시자로 찬사를 받아왔으며,
학자들은 중세의 사본 채식(彩飾)이 번창하던 마지막 단계에서 그의 예술의 원천을 찾았다.
그의 후기 그림에서 나타나는 자연주의와 우아한 구도는 부르고뉴의 공작들을 위해
일한 익명의 부시코 장인과 림뷔르흐 형제(폴·헤르만·예하네코인)와 같은 15세기초의
사본 채식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의 화풍이 확립되는 데에 중요한 영향을 준 것은 확실히 투르네의 화가인
로베르 캉팽(1378~1444경)의 패널들이었는데, 플랑드르의 미술사에서 캉팽이 중요한
구실을 했음이 최근에야 비로소 밝혀지게 되었다.
에이크는 1427년 캉팽의 미술에서 대담한 사실주의와 은폐된 상징적 표현법 및 밝은 유화
기법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이 유화 기법은 이후에 에이크의 고유한 양식적 특징이 되었다.
투르네의 시민이었던 캉팽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번화한 궁정에서 일하는 학식있는
대가였으며, 플랑드르 미술가로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들에 서명을 했다.
그가 그린 패널의 대부분에는 '요하네스 데 에이크'라는 당당한 서명이 적혀 있으며,
몇 점의 작품에는 '최선을 다해'(Als ich chan)라는 그의 오만한 좌우명이 들어 있다.
캉팽의 명성이 사라지면서 그가 얀에게 미친 영향이 잊혀지고 그리하여 대부분의
캉팽 작품들이 얀의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은 조금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얀 반 에이크의 그림 중 9점에 그의 서명이 적혀 있고 10점에 연대가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라는 것을 입증하고 그것의 연대를 추적하는 데는 몇 가지 어려움이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그의 걸작인 〈어린 양에 대한 경배〉라는 제단화에 휘베르트
반 에이크를 이 그림의 주요제작자로 소개하는 매우 미심쩍은 글이 적혀 있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미술사가들은 '젊은 남자의 초상(진실한 추억) Portrait of a Young Man
(Leal Souvenir)'(1432)을 비롯해 '조반니 아르놀피니와 조반나 체나미의 혼인(?)
The Marriage of Giovanni Arnolfini and Giovanna Cenami(?)'(1434)·
'성모와 카논 반 데르 파엘레 Madonna with Canon van der Paele'(1434~36)·
'성모와 아기 예수와 성인들 Madonna and Child with Saints'(1437)·
'성녀 바르바라 St.Barbara'(1437)·
'샘가의 성모 Madonna at the Fountain' 등 그다지 야심적이지는 않지만 얀의 양식 발전을
보다 확실하게 추적해볼 수 있는 작품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이 그림들은 7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몰려 있지만, 얀이 로베르 캉팽의 조각과도 같은
묵중한 사실주의에서 좀더 섬세하고 다소 깐깐한 회화 양식으로 나아간 일관된 발전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헨트 제단화 Ghent Altarpiece〉에 1432년의 연대가 적혀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그림을 그의 양식 발전 과정상 최초의 것으로 보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는
것 같지만, 이 대작의 제작에 휘베르트가 참여했는지의 문제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제단화에 적혀 있는 구절은 이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뚜렷이 밝히고 있다.
"가장 위대한 화가인 휘베르트 반 에이크가 (이 작업을) 처음 시작했고,
2번째로 위대한 화가인 그의 동생 얀이 그 뒤를 이어 완성했다……." 이 주장을 기초로
하여 미술사가들은 휘베르트가 〈헨트 제단화〉에 이바지했다고 생각해왔으며,
심지어 '수태 고지 The Annunciation'(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무덤의 세 마리아 The Three Marys at the Tomb'(로테르담 보이만스반뵈닝겐 박물관) 등
좀더 초기의 '에이크풍'의 몇몇 그림들까지 그의 것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삽입 구절은 16세기에 전사된 것이고 그 이전의 자료들에서는 휘베르트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면, 알브레히트 뒤러가 1521년
헨트를 방문했을 때 오직 얀 반 에이크만을 찬양했으며, 그뒤 1562년에 플랑드르의 역사학자인
마르쿠스 반 바르네웨이크는 그 제단화의 제작자로서 오직 얀만을 언급했다.
더욱이 최근의 문헌학적 연구는 삽입된 구절에 대한 신뢰성에 심각한 의혹을 던지고 있다.
따라서 휘베르트가 그 작품 제작에 참가했다는 것은 매우 의심스러우며,
그의 미술에 대한 어떤 지식도 현재로는 불확실할 뿐이다.
한편 휘베르트의 존재는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헨트의 시문서를 보면 '거장 휘베르트'
(meester Hubrechte de scildere)라는 기록이 3번이나 나오며 그의 묘비명의 사본에는
그가 1426년 9월 18일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휘베르트 반 에이크가 얀과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16세기에 왜 그가 '헨트 제단화'의 주요부분을 그린 것으로 여겨졌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그와 휘베르트의 관계, 그가 채식자로 활동했을 가능성, 로베르 캉팽에 대한
재평가 등으로 인해 얀 반 에이크의 업적과 중요성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는 초기 작가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유화를 그리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재질감과 빛, 그리고 자연의 공간 효과를 충실히 묘사하는 기법을 완성했다.
그의 사실주의 기법을 능가하는 작품은 거의 없었다. 일찍이 1449년에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인 키리아쿠스 당코나는 그의 작품들이 '인간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자연 그 자체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고 감탄했다.
그러나 캉팽처럼 에이크에게도 자연주의가 단순히 기술적 재주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자연은 신을 구현한 것이었으며 그는 일상 사물들로 가장한 종교적인 상징들로
그림을 채웠다. 그의 풍경화와 실내화들을 그토록 자연스럽게
비추고 있는 빛까지도 신의 은유적 표현인 것이다.
얀 반 에이크의 기법이 세련되고 그의 상징적 표현이 난해하기 때문에 그의
후계자들은 그의 미술에서 일부만을 빌려 썼다. 캉팽의 수제자인 로히르 반 데르 웨이덴은
스승의 평범한 사실주의를 에이크풍의 우아함·섬세함과 조화시켰는데, 사실 캉팽도 말기에는
에이크의 우아한 양식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 에이크의 공방에서 도제살이를 했으며
그가 죽은 뒤 〈성모와 아기 예수와 성인들과 기증자 Virgin and Child, with Saints and Donor〉
(뉴욕 시 프릭 컬렉션)를 마무리한 페트루스 크리스투스조차도 웨이덴의 영향을 받아 에이크의
양식에서 복잡한 요소들은 곧 버렸다. 15세기 후반에 네덜란드의 화가들인 휘고 반 데르 후스와
유스투스 반 헨트가 에이크의 유산을 되살렸지만, 퀸틴 마시스나 얀 마뷔즈 같은 16세기초
플랑드르의 대가들이 얀의 작품에 관심을 기울였을 때 그들은 원래의 작품에 비견할 수 없는
단지 충실하기만 한 모사품들을 만들었다.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얀 반 에이크의 영향이 캉팽과 웨이덴의 보다 쉬운 양식들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했으며, 오직 얀이 2차례 방문했던 이베리아 반도에서만 그의 미술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이탈리아에서는 키리아쿠스와 인문주의자인 바르톨로메오 파초가
그의 뛰어남을 인정하여 로히르 반 데르 웨이덴 및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인
피사넬로와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와 함께 그를 당대의 주요화가로 평가했다.
그러나 르네상스기의 미술가들은 그밖의 화가들처럼 그를 모방의 대상보다는 감탄의 대상으로
생각했다.
그의 그림은 지금도 지대한 관심을 끌고 있으며 그 뛰어난 기교도 여전히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많은 화가들에 의해 모사되어왔으며 수집가들이 탐을 내는 미술품이 되었다.
베르사유 조약을 보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과의 평화조약을 맺기 전에 〈헨트 제단화〉
를 벨기에로 되돌려줄 것을 명기하고 있다.
13◇ 파르테논 석상 엘긴 마블(BC 444년경 작, 영국 런던 영국박물관 소장)
영국 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대리석 조각은 ‘엘긴 마블스’
라고 불린다. 1801년 콘스탄티노플 주재 영국대 사였던 엘긴은 터키 정부로부터 파르테논의
발굴 허가를 받는다.
그는 1년 남짓 걸려 대리석 조각을 하나하나 떼어내 영국으로 보냈다.
1815년에는 자기 나라 하원에서 불법 반출이 아니라는 판결까지 받는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엘긴에게 3만5000파운드를 지급하고 이를 사들여 국립박물관에 전시한다.
그리스실 7전시실에는 바다의 여신인 네레이드의 제전이 있다. BC 400년경에 만들어진
신전 모양의 무덤으로 기둥 사이에 있는 여신들의 자태가 매우 아름답다.
그리고 8전시실에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에서 가져온 BC 5세기 유물인 '세 여인'이라는
대리석 조각이 있다. 19세기 초 터어키에 주재하고 있던 엘긴 경이 가져왔다고 해서 일명
'엘긴 마블'이라고 하며, 이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다.
머리도 팔도 없는 세 여인의 조각은 파르테논의 동쪽 팀파눔을 꾸미고 있던 군상으로,
왼편으로부터 레토, 디오네Dione, 아프로디테로Aphrodite 추정하고 있다.
파르테논의 여러 조각 중에 이 작품은 가볍게 리듬이 흘러내리는 물에 젖은 듯한 옷주름의
아름다움, 그것을 통해서 느껴지는 육체의 따스한 무게, 그리고 세 여인의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자태가 빚어내는 우아함 등 그리스 조각의 진수를 보여준다.
14◇ 앙리 마티스의 '댄스 Ⅱ'(1910년작,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앙리 마티스및 작품 소개
1869년 12월 31일 북부 프랑스의 르카토캉브레지에서 태어났다.
마티스는 아카데미의 기준 - 모델로부터 한 발 물러서서 거리감을 두고 묘사적으로,
선택적으로 접근하는 태도 - 에 맞춰 그리려고 노력했지만, 모로는 오히려 그에게 내면을 보라
고 강조했다.
모로는 상징주의가 새롭게 수용한 마니에리스모(16세기 유럽에서 성행한 미술
양식으로 조화를 중시하는 고전주의와 이상 미를 추구하는 자연주의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
었으며, 길쭉한 팔다리, 부자연스러운 자세 등 객관적 형태보다는 정신성을 깊이 탐구했다:
역주)전통으로 마티스를 이끌었다. 실제로 보이는 모습과 무관하게 대상의 개념을 표현하도
록 권했던 것이다.
얼마 안 가 마티스는 마니에리스모 양식, 모델의 자연주의적 변형, 장식성에 대한 자신의
약점을 조화시키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마티스는 18세기 화가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의 정물화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마티스는 또 돈을 벌기 위해 원화와 똑같은 복제화를 그렸다. (그는 당시 "괜찮은 복제화
는 한 점에 200~300프랑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마티스의 레퍼토리는 프랑스 로코코미술에
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네덜란드 미술까지 다양했다.
'책 읽는 여자'(1895)의 차분한 분위기와 그해 마티스가 그린 정물화들은 인상주의가 아
니라 샤르댕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마티스가 처음에 작업실에서 그린 실내화의 강렬한 명암
에서 그가 파리를 떠나기 전에 보았던 코로 회고전의 영향력이 느껴진다. 실내화와 풍속화
에 대한 진지한 탐구 덕분에 마티스는 그물 여섯 나이로 국립 미술협회 회장이던 피에르 퓌
비 드 샤반의 추천으로 준회원으로 뽑혔다.
자신감이 불타 오른 마티스는 파리의 미술관을 순례하면서 렘브란트, 고야 등을 보았다.
그는 당대의 화가들도 만났는데, 인상파의 아버지로 불리던 카미유 피사로도 포함되어 있었
다. 고갱에게 야외작업을 권유한 주인공이며 폴 세잔과 빈센트 반고흐가 자문을 구하기도
했던 바로 그 '겸허한 거인 피사로'를 만난 것이다. 신인상파(체계적인 붓질로 캔버스를 덮
었던 화가들)에 남모를 영향력을 행사하던 피사로는 마티스에게 더없이 훌륭한 길잡이였다.
샤르댕, 인상주의, 세잔(세잔의 중요성에 마티스가 처음 눈뜬 것은 피사로 덕분이었다.)사이
의 균형 점이던 피사로는 마티스가 당시 지향하려고 했던 우아하고 원숙하며 사려 깊은 인
상주의를 완전하게 구현한 인물이었다.
"나는 어디서나 스스로를 탐구했다."마티스는 나중에 자신의 형성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
다. 그는 클로드 모네, 카미유 피사로 같은 인상파 화가를 조심스럽게 흉내내려는 시도에서
부터 빈센트 반 고흐와 오딜롱르동에게 영감을 받아 자극적인 색을 쓰는 데 이르기까지 다
양한 예술적 가능성을 탐구했다. 폴 세잔 식의 공간구성을 모방했고 신인상파 화가 폴 시냐
클의 충고에 따라 색을 실험하기도 했으며 피에르 퓌비 드샤반의 평온한 세계를 따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길을 열어 준 것은 마티스 자신의 직관이었다.
남프랑스는 1899년에서 1903년 사이에 그가 맛본 환멸을 해독할 수 있을 것처럼
마티스를 유혹했다. 그러나 그를 초대한 폴 시냐크가 그토록 열광했던 지중해의 "눈부시게
쏟아지는"햇빛과 "뜨겁디뜨거운 날씨"에 마티스는 그만 질려 버렸다. 마티스가 끝까지 완성한
작품 중에서 그나마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은 시냐크의 테라스를 담은 그림이었다.
이 그림에서 마티스는 처음으로 신인상주의의 좀더 장식적인 측면과 세잔의 구조적인 색채사용
법을 결합했다. 여기서는 시냐크보다는 마르케의 영향을 더 분명했다. 신인상주의 지도자 시
냐크는 점묘법을 충실하지 않은 마티스의 그림을 혹독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마티스는 스
냐크의 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플라주 데 그라니에 해변에서 그린 '생트로페만'의 장식
적 열망은 퓌비 드 샤반의 영향과 시냐크의 '시간의 조화', 앙리 에드몽 크로스의 '저녁
공기'같은 신인상파가 추구한 낙원의 알레고리에 지고 있던 빛을 뚜렷이 드러내면서 새로
운 도약을 위한 출발점 역할을 한다.
이상향을 표현한 그들의 그림과 색채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마티스는 이미 형성되어
틀이 잡혀 있고 공식적으로 승인되어 있던 미학 앞에서 겸허히 머리를 숙였다. 돌이켜보면
1896~1897년에 그린 최초의 걸작 '저녁 식탁'에서도 그린 태도를 보였지만, 1904~1905년에
그린 걸작'호사, 평온, 관능'에서도 마티스는 비슷한 자세를 보였다. 그는 화가와 화가가
다루는 주제 사이에 거리를 두는 신인상주의의 엄밀한 기법이 자연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
운 가능성을 그의 상상력 앞에 열어 줄 수 있으리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해 초가을 파리로 돌아온 마티스는'모자를 쓴 여인'을 그렸다. 콜리우르의 풍경화를
터득한 밝은 색조로 자신의 아내를 강렬하게 표현한 초상화였다. 마티스는 이 작품을 1905
년 오톤 살롱 전시회에 출품했다.
이 그림은 곳곳에서 갈등을 빚었다. 대중은 이것을 지나치게 가식적이라고 보았고, 보구적
은 살롱전 화가들은 이 도전 적은 그림을 마뜩찮게 여겼다. 회고전이 예고되어 있던 르누아
르, 마네의 그림과도 갈등을 빚었을 뿐더러, 심지어는 자신의 그림들과도 갈등을 빚었다. 마
티스가 이제까지 그린 그림은 주로 작은 풍경화나 정물화였던 것이다. 부인도 마티스를 편
들지 않았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부인을 요란한 색체를 발산하는 인물로 변모시켰으니 말
이다.
모리스 드니 는 이 작품 - 그리고 그해 마티스가 살롱전에 내놓은 모든 작품들 -을
'고통스러울 만큼 현란한' 그림이라고 평가했다. 뒤에 이 그림을 구입한 레오 슈타인은 첫눈에
"어떤 그림보다도 거칠고 추하지만 강하고 밝은 그림"이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티스
는 이 초상화가 자신의 작업에 미칠 영향을 누구 못지 않게 우려하고 있었다. 과시적 색체
는 그에게 일종의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야수파는 그를 일상적인 표현을 넘어 인간의 얼굴이 지중해의 강렬한 빛과 격렬하게
융합되는 미지의 영역으로 몰고 갔다.
오톤 살롱전이 개막된 직후, 야수파에 관한 논의가 한창 달아오르고 있을 때 마티스는 '
삶의 기쁨'(19051906)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엄청난 대작(174X238cm)을 완성하기 위해 그
는 별도의 작업공간을 빌려야 했다. (세브레가 쿠방 데주아조 56번지에 새로 빌린 이 화실
을 그는 1908년까지 사용했다.)'호사, 평온, 관능'과 마찬가지로 '삶의 기쁨'은 마티스가
그때까지 시도한 모든 기법과 양식을 보여 준다.
이 그림은 고도의 감각성과 추상성을 동시에 표현해, 상징주의 시인 스테판 말
라르메가 그렸을 법한 회화 시를 창조하겠다는 마티스의 의도가 제대로 구현된 작품이었다.
'푸른 나부:비스크라의 추억'(1907)은 단순한 작은 조각의 그림이 아니라 그림의
장으로 난폭하게 밀고 들어온 환영이다.
'모자를 쓴 여인'에서도 그랬듯이 마티스는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노예를 거
느린 오달리스크',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 에두아르 마네의 '올림피아'에
나타나는 전통적인 포즈를 받아들이면서 드라마틱한 긴장을 불어넣고 있다. 과감하게 정면
을 드러낸 자세, 보란 듯이 위로 올린 팔, 여인의 굽은 두 다리의 일관된 수평성은 극단적인
해부학적 왜곡이라는 느낌을 낳는다. 수정한 부분이 많다는 것은 2차원 표면에 그려진 인물
이 원래 모델을 충실하게 재현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깊이를 주기 위해 파랑에 의존했지
만 (그는 이 것을 세잔 에게 배웠다.)캔버스는 자주색, 야자나무 잎, 무화과나무 잎으로 장식
된 평면처럼 읽힌다. '푸른 나부'는 궁극적으로 장식미술 작품이다. 마티스가 1907년 앵데
팡당전에 이 그림을 출품했을 때 붙인 제목, '그림 III'은 이 작품이 '호사, 평온 ,관능'후
속 작품으로 의도되었음을 암시한다.
순간적으로 분출하는 영감에 휩싸여 마티스는 유채 스케치 '춤 I'을 완성했다. 이 작품
에서는 발랄함과 유례없는 활기, 과단성이 결합되어 있다. 마티스는 슈추킨의 격려에 힘입어
그림을 한달음에 완성했다.
곧 이어 속편으로 그려진 '춤 II'는 '춤 I'에 비해 좀 격정적인 색조로 바뀌었고 발랄하
고 뛰도는 춤꾼들도 좀더 원초적이면서 뚜렷한 목적의식 아래 춤을 추고 있으며 전체적인
구성도 더 장대해졌다. 춤꾼들의 몸놀림 자체는 '삶의 기쁨'에서 어렴풋하게 감지되는 카
르마뇰(프랑스 혁명 당시에 유행한 춤: 역주)이나 마티스가 남프랑스에서 보았던 사르데냐
춤이 아니라, 그가 파리의 카바레에서 보았던 파랑동(프로방스 지방의 춤: 역주)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1913년 봄 (마르세유와 코르시카를 거쳐)이 시레물리노로 돌아온 뒤에도 탕헤르의
기억의 마티스의 그림들에 살아 있었다. '꽃과 도자기 접시'와 '파란 창'의 엷은 황록색을 진한
청색의 바탕이 뒤덮었다. 청색은 입체파의 기하학적 형태와 마티스가 마음의 눈으로 본 모
로코 사이에 놓인 베일로, 세잔의 분위기를 전하는 후광으로 작용했다. 나아가 청색은 동방
에 대한 마티스의 주관적인 이해와 정물화 및 풍경화의 객관적인 세계를 결합했다.
그해 여름 마티스는 '등I'(1908~1909)를 좀더 건축학적인 조각으로 재구성하고, 1909년
'춤 II'와 '음악'의 야심만만한 후속 작품으로 슈추킨에게 스케치만 보여 주고 아직 끝내
지 못하고 있던 폭포에서 물놀이하는 여인들의 그림을 마저 그렸다. 뒤에 '강가의 물놀이
'(1909~1916, 82~83페이지)로 완성되는 이 그림은 주홍색, 청색, 녹색의 수직 줄무늬로 모로
코의 자연을 독창적으로 표현했다. 마티스는 마치 '등'조각들의 장대한 느낌을 캔버스에
옮겨 놓으려고 마음먹은 듯하다.
그러나 이 그림의 분위기와 이전의 장식적인 작품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이제는 삶을 찬양하고 무희들의 발랄한 원무를 그릴 시가가 아니었다. 임박한 세계대전의
조짐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춤'과 '음악'에 나타났던 약동하는 색채는 녹색,
검은색, 흰색, 회색의 줄무늬로 바뀌었다.
마티스는 이런 암울한 분위기에서 아내의 마지막 초상화를 그렸다. 이 그림에서 아내의
얼굴은 아프리카 가면의 추상적인 특성에게 자리를 내준다. '모로코의 행복한 시절'은 이제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는 또 하나의 대형 장식화 '모로코 사람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검은색, 회색, 황토색
의 토막들로 이루어진 이 그림의 추상적인 구성은 이고르 스타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1913)에 나오는 음의 토막들과 비슷한 기능을 한다. 독일의 프랑스 침공을 코앞에 두고
마티스는 노틀담 대성당을 그렸다. 깨지기 쉽고 투명한 어항으로 임박한 전쟁의 파괴력을
막아내기라고 하려는 듯이.
매서운 추위 덕분에 마티스는 인상파 분위기의 간단한 채색 스케치를
연상시키는 실내화들을 빠른 속도로 그려 나갔다. 니스의 빛은 인상파의 작품보다 눈부셨다.
이때 그려진 '바이올린이 있는 실내'에는 1916년에 시도한 기하학적 화풍이 반영되어 있
다.
니스 에콜 데자르 데코라티프에서 스케치한 미켈란젤로의 '밤'(1524~1534)을 토대로
만든 '커다란 나부좌상'(1925~1929)이다. 마티스는 자기 아파트의 장식적인 벽면을 배경으로
역동적 포즈를 다양하게 시도했다. 이 묵직한 조각상은 처음 니스에 와서 그린 실내화의 은은한
빛 속에서 거의 증발해 버렸던 긴장을 다시 끌어들이고 있다. "'오달리스크'를 완성했다고
해서 내가 그때까지 이룩한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깊은 울림의 세계로
돌아가 공간이 다시 열리는 것을 보고 싶었다. 나는 공기가 자유롭게 흘러들 수 있는 공간
을 다시 만들고 싶었다."
15◇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동방박사의 경배'(1481년경 작,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소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및 작품 소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토스카나 지방의 빈치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1466년 피렌체에 가서, 베로키오 의 공방에서 회화 조각을 수업받았다.
<그리스도의 세례> 그림 가운데 좌단의 천사가 실로 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스승이 붓을 버렸다고 하는 일화는 이 화실에 있었던 무렵의 일이다.
사실 베로키오는 그 후 조각에 전념하였다. 30세때 화가, 건축가로서는 둘째치고
군사 기술 전문가로서 밀라노 대공에게 초청되어 그를 위해 일했기 때문에 이로 인해
그 당시 손을 대고 있던 <동방박사의 경배>는 끝내 미완성인 채로 남아야했다.
이 작품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보티첼리와 달리 윤곽보다도 빛에 의해 다양하게
시각화되는 인체의 조소적 효과를 표현하려했다.
밀라노에 도착하자 성프란체스코성당의 제단화<동굴의 성모>를 시작했으며
이 작품에서 인물들이 동굴의 어스럼으로 부터 나타난다. 수증기를 품은 대기가
그들을 감싸고 그 형태에 보드라운 베일을 씌우고 있다.
이 엷은 안개를 스푸마토(sfumato)라고 한다.<동방박사의 경배>나 <동굴의 성모>는
독창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초기르네상스와 뚜렷하게 다른 점이 없다.
그러나 12년 후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찌에 수도원 에 그린 <최후의 만찬>은 전성기
르네상스 회화의 이상의 최초의 고전적 표현이라 한다. 중앙의 인물 그리스도 뒤쪽에
소실점이 있어 공간감과 원근감이 잘 나타난다. 전통적인 프레스코 기법에 구애받는 것이
싫어 템페라를 사용했는데 이것이 벽에 잘 붙지 않아 훼손이 심하다.<모나리자>는 <동굴의 성모>에서
이미 주목한 미묘한 스푸마토가 이 회화에서 완성을 보였다.
형태가 극히 엷고 섬세한 겉칠의 층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화면 전체가 부드러운 빛으로
빛나고 있다.
1517년 프랑수아 1세의 초빙으로 프랑스 의 보아주에 가서 건축· 운하 공사에 종사하다가
죽었다.만년에 이르러 레오나르도는 과학적 관심을 갖고 수많은 소묘를 남겼다.
인체 해부를 묘사한 그림들은 인체묘사와 의학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과학적 연구는
수학· 물리· 천문· 식물· 해부· 지리· 토목· 기계 등 다방면에 이르며, 이들에 관한
수기(手記)나 인생론· 회화론 등이 많이 남아 있다.
그의 작품으로는 <동방박사의 예배>,<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등이 있다. <동방박사의 예배>는 르네상스에서 완전히 독립적이지는
않지만 기존의 프레스코화가 아닌 그가 새롭게 시도한 유화템페라로 그린 것이다. 빛과 그림자의
표현이 뛰어나다. 전성기의 과도기적 작품이다. 전시대의 거장 만테냐의 작품과 비교하면 건물과
인간을 대치되게 하여 보는 이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방법을 사용한 반면 레오나르도는 인물의
구도를 정하고 그다음 보조 역할로서의 건축의 모티브를 정하였다.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의 한 식당에 그려진 것인데, 이 그림이 수도원 식당에 걸렸을 때의
반응은 굉장한 것이었다 한다. 이 그림은 그리스도의 눈을 중심으로 원근법이 사용되었고,
뒤로 상징적 건축은 구도의 완벽한 균형감과 안정감을 준다. 이 그림의 내용은 마태복음의
한 구절을 그림으로 옮긴 것인데, 그는 가장 치밀한 계산아래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한 무리의 군상을 목표로 했던 것 같다. 이런 그의 그림에 대한 확고한 생각은 가장 간결하게
그린 그림으로 나타낸 그의 <모나리자>에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이 그림에 대한 논의는 끊임이 없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그래서 이 그림에 대한
시대를 초월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이 그림이 가진 놀라울 정도의 살아있는 느낌을 보는
사람이 갖는다는 것이다. 피렌체의 한 부인을 그린 이 그림은 당시로는 평범한 얼굴이 아니었을
이 작품을 유명하도록 만든 것은 스푸마토라는 특이한 채색법의 사용에 있다.스푸마토란 한
형태와 다른 형태가 뒤섞여 들어 가는 듯 한 채색법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상상할
거리를 남겨 놓는다.
다빈치는 이런 신비스런 미소를 눈과 입꼬리에 남겨 놓으므로서 보는 우리로 하여금 무엇인가
생각하게 한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의도이기도 하지만 그의 미술이 마침내 도달한 목표였는
지도 모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미완성 걸작으로 알려져 있는 '동방박사의 경배'는 1481년
의뢰를 받아 접착제로 붙여진 열개의 나무판 위에 그려졌다. 이 그림에는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찾아온 동방박사 세명을 그리고 있는데 대조적인 채색과 밑그림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 왔다.
<예수전> 24도중 한 점이다.구세주의 탄생을 예견한 동방박사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했다.
하늘의 유성의 움직임,그리고 말에서 내린 세 박사,갓난아기인 예수를 안은 마리아와 요셉,천사에
이르기 까지 시선과 동선은 면밀하게 계산되어 있으며,그것들이 서로 교차 되면서 감상하는
사람의 시선을 안쪽으로 이끌어간다. 말구유의 구조로 인해 공간에 깊이가 강조되면서 작품
전체에 견고한 인상을 부여하고 있다.
16◇ 마사치오의 '아담과 이브의 낙원 추방'(1427년경 작, 이탈리아 피렌체 브란카치성당 소장)
마사치오및 작품 소개
1425~27년경,프래스코,208*88cm,
마사치오, 토마소 카사이(Masaccio, Tommaso di ser Giovanni di Mone Cassai)
(1401년 12월 21일 - 약 1428년) - 르네상스 미술의 발판을 놓은 이탈리아의 화가.
평면상에 처음으로 현실적인 3차원 공간을 재현한 그의 이름은 토마소 카사이 였으나
모두 그를 마사치오라 불렀다.
1423년에서 1425년 사이에 마사치오는 많은 인물화와 프레스코, 그리고 성당의
제단화를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마사치오의 프레스코, 특히 카르미네의 산타 마리아 성당의 브란카치 기도소에
(Cappella Brancacci) 마솔리노와 함께 구약 및 신약성서의 내용을 주제로한 프레스코는
르네상스 미술의 효시라고 미술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를 사귀게 되어 원근법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배우게 된다.
1423년 에는 그들의 격려로 마솔리노와 함께 로마로의 여행을 가서 고대 로마, 그리스
작품에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화려한 장식의 고딕 양식에서 벗어나
좀더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하게 된다.
14세기의 회화에선 어떤 작품이든지 패널화의 경우엔 황금색 배경이었고,
프레스코화의 경우엔 단색의 하늘색으로 톤의 변화 없이 처리하였다.
따라서 공간이 아무리 훌륭하게 묘사되었어도 배경과 별개로 느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15세기엔 원근법의 발견과 함께 현세의 실제 공간을 다시 얻게 됨에 따라,
초월적인 상징의 배경은 사라지고 대기가 가득 찬 하늘을 배경으로 한 도시의 건물들이
자리잡게 되었다.
회화에 있어서 르네상스 양식을 성립시키고 원근법의 성숙, 인체표현의 성공,
개성적 감정표현, 생생한 현실감을 화면 속에 과감히 반영시킨 사람은 마사치오(Masaccio,
1401-1428)였다.
그는 지오토의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공기, 빛, 색체에 의한 조형성을 더 추구하였으며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의 영향을 받았다. 사실상 고딕 후기의 사람이면서도 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로 불리듯 자연에 대한 인식과 생명 있는 인간의 모습, 인간의 감정을 나타냈고,
중세회화에서 발견할 수 없었던 입체성과 구조성을 띤 구성으로 회화에 새 경지를 이루었다.
1424년부터 1428년 사이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브랑카치(Brancacci)예배당의 일련의
프레스코화들은 모두 대기가 가득 찬 구름 낀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화면 중앙에 소실점이 형성되는 정확한 원근법에 의해 제작되었다. <아나니아의 죽음>
<도판10>은 두 화면의 소실점이 중앙의 한 점에 모이도록 제작되어 있어서,
1420년대에 행해진 마사치오의 원근묘사법을 잘 알 수 있다.
그의 원근법은 피렌체에 있는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성 삼위일체><도판11>에서
완벽하게 실현되었다. 이 그림은 수학적 법칙에 근거해 그려진 작품으로 그림 속에
선들이 예수의 머리 뒤로 집중되어 있다. 높이 667cm인 이 프레스코화는 소실점을
관람자의 눈 높이에 맞춤으로써, 이 그림의 앞에 서면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가 있는
한 감실 앞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또한 마사치오는 앞의 물체와 뒤의
물체를 겹치게 하는 중첩법과 거리에 따라 길이를 줄여 표현하는 단축법으로 공간의 깊이를 표현했다.
이렇듯 길이, 폭, 깊이의 삼차원적 방법으로 표현해 작품 속 인물들이 실제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평면인 화면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고 과학적인 원근법을
구사한 결과이다.
첫 나체와 비극의 표현
거의 등신대에 가까운 남녀의 전라 표현으로는 미술사상 가장 초기의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그 적나라한 묘사에 대해 비난이 일자 둘의 허리 부분에 나뭇잎을 그려넣었지만 ,
최근 18세기의 화재로 더럽혀진 화면의 세정 수복이 이루어 지면서 오리지널의 신선한 색채와
함깨 원상 복귀 되었다.
낙원에서 쫓겨나는 두 사람의 후회와 슬픔 어린 표정이 인상적이다.
17◇ 베르메르의 '델프트 풍경'(1660∼61년경 작, 네덜란드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소장)
<베르메르및 작품 소개>
렘브란트 다음 세개의 거장들 가운데 위대한 화가는 얀 베르메르 반 델흐트
[Jan Vermeer van Delft. 1623-75]다.
베르메르는 조심스럽고 침착하게 작품을 제작하는 화가였다.
그는 일생동안 그다지 많은 수의 작품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작품 중 의미심장하거나 거창한 주제를 묘사한것은 거의 없다.
1632년 10월 31일 네덜란드의 델프트에서 출생하였다.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평가도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다가 19세기 중반에야 겨우 진가를 인정받았다.
화가의 아들로 태어나 1655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직업을 계승하였다.
화가로서는 카렐 파브리티우스의 영향을 받았는데, 두 사람 사이에 사제관계가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매우 둔필이었으며 현존하는 작품은 40점 정도이고 거의 소품들로서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의 가정생활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그 밖에 종교를 제재로 한 것도 있다.
불과 2점이지만 풍경화도 있으며, '델프트풍경'(헤이그국립미술관 소장)은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작품은 전형적인 네덜란드 가옥의 실내에 서 있는 단순한 인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작품은 우유를 따르고 있는 여인과 같은 단순한 일을 하고 있는 한
인물밖에 묘사하지 않고 있다.
베르메르와 함께 이른바 유머러스한 도해적 설명은 풍속화에서 아예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그의 그림은 사실상 인간이 들어있는 정물화다.
이렇게 단순하고 가식이 없는 그림이 불후의 명작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따져보기 힘들다.
그러나 원화를 볼수있는 다행스런 기회를 가진 몇몇 사람들은 나처럼 그것이 일종의
기적적인 일이라는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것이다.
그 작품의 불가사의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 정체를 밝히기는 어렵지만 말로
기술될 수는 있을것이다. 그것은 바로 질감, 색채 및 형태를 치밀하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베르메르의 기법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 밝고 정확한 화면속에는 힘들여 제작했던 흔적이 나타나 있지 않다.
형태를 흐릿하게 만들지 않으면서도 사진의 거친 대조를 교묘하고 부드럽게 수정하는
사진사처럼, 베르메르는 윤곽선을 부드럽게 만들고 그러면서도 굳건하고 단단한
물체의 성질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의 최고 걸작들을 그처럼 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와같은
부드러움과 정확성의 불가사의하고 독특한 조화에 있다.
베르메르의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단순한 정경의 조용한 아름다움을 참신한 눈으로
보게 만들고, 그 화가가 창문을 통해서 넘쳐 흘러들어오는 빛과 그 빛에 의해 천의 색채들이
돋보이는 것을 관찰하면서 느꼈던 감흥이 어떤것이었는지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의 그림은 색조(色調)가 아주 뛰어났으며 적·청·황 등의 정묘한 대비로
그린 실내정경은 마치 개인 날 북구의 새벽 대기(大氣)를 생각나게 한다. 맑고,
부드러운 빛과 색깔의 조화로 조용한 정취와 정밀감(靜密感)이 넘친다.
초기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뚜렷한 대비는 만년이 될수록 완화되었다.
그 밖에 '편지를 읽는 여성'(드레스덴미술관) '우유 따르는 하녀'(암스테르담국립미술관)
'터번을 쓴 소녀'(헤이그국립미술관) '레이스를 뜨는 소녀'(루브르미술관) 등이 있다.
파부리티우스의 델푸트풍경에서 차용한 그림입니다. 작가의 몇안되는 풍경화중의
하나이죠.
이 그림은 구성의 짜임새. 색. 빛의 효과에서 쉽게 도달하기 힘든 수준의 정밀하고
과학적인 사실묘사로 당시에도 높은 평가를 받아습니다.
이 그림을 위해 베르메르는 카메라 옵스큐라. 즉. 압실 기법을 이용하였습니다.
이는 일광에 의해 빛나는 물체를 암실과 렌즈를 통해 전면의 벽에 투사하는 기법이죠.
또한 이 그림은 성벽 밖. 운하 건너편에서 그린 것인데요. 실제 건축물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몇몇 건물만을 기록하였고 배경의 반 이상을 하늘로 배치하여
현실과 과거에 대한 그의 환상. 그의 기억과 추억속에 존재하는 델프트를 그린거죠.
현재를 그린 풍경화이면서 그의 기억속에 존재하는 델프트를 그려서
그의 애정과 기억을 뒤섞어 표현한 그림입니다.델프트는 그의 고향이거든요.
아래에 밝게 채색한 강가와 그 위에 서서 몇 척의 배와 운하, 고풍스러운 건물과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 하늘, 그리고 얘기 나누고 있는 두 명과 네 명으로 무리진 사람들의
모습이 시적인 정취를 느끼게 합니다.
그의 그림 대부분이 빛을 주제로 한 양식화된 실내그림인 것에 비하면
객관적이고 정확한 풍경화라 할 수 있으나,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더 많은 이야기와
자유로운 추억까지 떠오를 수 있는 것은 그의 그런 애정이 있기 때문일겁니다.
그림의 구도도 안정적이며 색채감 또한 완벽하리 만큼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농도를
구사하고 있어 바라보고 있으면 감상하는 독자(관객)로 하여금 평안함을 선사하는 작품입니다.
18◇ 폴 세잔의 '생트 빅투아르산'(1904∼06년 작, 러시아 모스크바 푸슈킨미술관 소장)
폴 세잔및 작품 소개
세잔 [1839.1.19~1906.10.22] 프랑스의 화가. 원어명 Paul Czanne ,별칭 근대회화의 아버지
부슈뒤론주 엑상프로방스 출생. 근대 미술사상 거장의 한 사람이다.
반관전적(反官展的)인 입장의 혁신적인 경향에 눈을 뜨고 무거운 분위기의 원숙한
정물화·초상화 등을 그렸다. '검은 대리석의 탁상시계가 있는 정물'이 대표작이다.
프로이센-프랑스전쟁과 파리코뮌의 동란기를 마르세유 근처 어촌에서 지낸 세잔은,
71년 가을 피사로와의 교우관계를 다시 시작하고, 인상주의의 원칙을 배웠다. 74년 제 1 회
인상파전에 '교사자(絞死者)의 집' 등 3점, 77년의 제 3 회전에 '쇼케상(像)' 등 16점을
출품하고, 인상파 핵심인물의 한 사람이 되었다. 초기작품에 비해 화면은 더 작고 밝아졌으며,
필촉(筆觸)도 섬세하면서 신중하고, 때로는 정성을 들인 색조분할(色調分割)도 이루어졌다.
문학적인 주제에 대신하여 수욕도(水浴圖)가 등장한 것, 시각이 냉정하면서도 객관적으로
된 것도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그 뒤 세잔은 인상파전에 참가하지 않게 되었는데,
이는 2번의 출품에 대한 세평이 좋지 않았고, 살롱응모에 관하여 인상파 내부에서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80년 무렵부터 자화상과 부인상이 많아졌다.
수욕도도 남녀를 다른 구도로 계속 그렸고, '푸른 꽃병'으로 대표되는 정물화도 색채의
아름다움, 마티에르의 변화, 구도상의 연구 등으로 주목할 만하다. '에스타크의 바다'
'소나무가 있는 생트빅투아르산' 등의 연작도 남프랑스의 밝고 여유 있는 큰 공간을 평면성과
공간감을 잘 그려 파악한 작품들이다. 90년부터 수년 사이에 '붉은 조끼의 소년'과
'트럼프를 하는 사람들' 등의 연작, '온실의 세잔부인' 등의 걸작을 잇따라 그렸다.
95년말 파리에서 가진 세잔전은 그 무렵의 젊은 화가들을 놀라게 하였다.
인상파이면서도 훨씬 지적이고 신선한 야성미가 넘치는 세잔예술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세잔은 수채화를 많이 그리게 되었고, 제작의 간편함과
색채의 투명감 탓으로 수채화 기법이 유화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그림물감은 엷게 칠해져 엷은
물감의 층이 복잡하게 겹쳐져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컷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었다.
유화나 수채화에서 칠하고 남은 여백이 많아졌는데, 그 여백조차 일종의 표현력을 지니고
효과적으로 작용하였다. 말년의 작품 대부분에서 볼 수 있는 이 기법은, 사물의 형태를
복수의 시점에서 보는 구도상의 연구와 어우러져, 입체파와 추상미술 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20세기 미술은 V. 고호·P. 고갱·G. 쇠라뿐 아니라 세잔에게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01년 엑스 교외에 아틀리에를 세우고, 1906년 10월 15일 교외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뇌우로 졸도, 22일 사망하였다.
작품을 구분하면 '목맨 사람의 집'(1872)
이 그의 전기작품(인상파) 중에 손꼽히는 걸작이며,
'에스타크'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등은 원숙기의 작품이며
'목욕하는 여인들''생트빅투아르산' 등이 대표적인 후기작품들이다.
그 밖에 정물에 관한 그림과 초상화에도 많은 걸작을 남겼다.
1885년 캔버스에 유채,작품의 크기는 세로 73㎝, 가로 91㎝이다.중앙에 소나무를 배치한
대담한 구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생트 빅투아르산(山)은 세잔의 고향인 프로방스 지방에 있는 산으로, 세잔은 1890년에서
1906년 사이 생트 빅투아르산을 주제로 18점 이상의 그림을 그렸다.
그는 1901년부터 프로방스 지방의 로브 아틀리에에 자리를 잡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산의 모습에
빠져들었다.
멀리 평온하면서도 웅장한 생트 빅투아르산이 광활한 하늘 위로 우뚝 솟아 있고,
그 앞의 들판에는 소나무와 마른 풀들이 우거져 있다. 들판의 필치는 수직선과 수평선이 뒤얽혀
있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이 그림에서 세잔은 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 보다는 산의 가장
조화로운 모습을 그리려고 노력하였다. 산에 대해 빠짐없이 섬세하게 관찰한 뒤 산과 들판,
그외 자연의 모습을 삼각형, 사각형, 사다리꼴 등 딱딱한 모양으로 나타내었다.
세잔은 정확하고 일정한 터치로 따뜻한 색조를 나란히 놓아 전망을 가깝게 하고,
또 차가운 색조로 전망을 멀게 하였다. 그는 색채와 붓질만으로 입체감과 형태를 충분히
표현하였으며, 선으로 그린 데생의 개념은 완전히 사라졌다.
산은 색채와 빛의 대립관계 속에서 하늘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제까지 세잔이 탐구한 입체감과 색채감, 기하학적인 아름다움 등이 모두 하나로 어우러져
있는 작품이다.
19◇ 라파엘의 '아테네 학당'(1510∼1511년 작,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소장)
라파엘및 작품 소개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는 이탈리아 화가, 건축가로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작가 의 한 사람으로
조숙한 천재였으며, 우르비노 지방화가에서 바티칸 교황청 궁정화가까지 최고의 사회적
영예와 세속적 성공을 누린 예술가이다.
1483년 우르비노의 화가 지오바니 산지오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와 페루지아의
화가 페루지노의 문하에서 그림 공부를 했었다. 초기의 작품은 페루지노의 것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했으나 <기사의 꿈> <삼 미신>에서 <마리아의 결혼>에로의
발전은 서정적인 스승의 예술을 점차 순화하고 형식미로 통일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504년 예술의 중심지인 피렌체로 옮겨 1508년까지 4년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암법을
위시해서 바르톨로메오, 미켈란젤로의 조형법도 단시일에 익혔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그란듀카의 성모=대공의 성모>등 일련의 우아한 성모 그림과 성가족그림, 초상화 <도니부처>,
그리고 미켈란젤 로의 영향을 나타내는 극적인 <그리스도의 매장>등이 있다.
그의 화실에서 미켈란젤로는 화가로서 갖추어야할 일반적인 교양과 기법을 특히
프레스코벽화의 확고한 기초를 쌓았다.
이때부터 독특한 개성을 나타내기 시작한 미켈란젤로는 그 당시 피렌체풍의 세련된 미술을
거부하고 기념비적이고 강한 표현을 즐겨하게 된다.
1508년 말에 고향 친구인 브라만테의 추천으로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초청되어
포마로 옮긴 라파엘로 는 1520년 4월 37세의 젊은 나이로 죽을 때까지 12년간을 바티칸
궁정화가로 율리우스 2세와 레오 10세 아래에서 일하고 시대의 총아로 그의 작업의 정점에 이르렀다
바티칸궁 <서명실>의 벽화 중 특히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상징적 회화라고 할 수 있는
<아테네 학당>과 <성체논의> 등의 벽화 제작은 그의 총체적인 재능이 그리이스 정신과
그리스도교 정신의 총합이라는 교회의 세계주의적인 의도와 혼하연 일체가 되어 르네상스 인문주의
예술의 정화로 되어 있다. 특히 <아테네 학당>은 장대한 건축공간과 다수의 인물군상의
완벽한 통일과 조화를 실현하여 고전양식의 규범이 된다.
라파엘로는 살아 있는 동안 예술가로서의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
아테네 학당(The School of Athens) 1509년, 프레스코로마, 바티칸 미술관
이 작품은 율리우스 교황의 스탄자(거처)에 그려진 벽화이다.
바티칸 궁정 장식화 가운데서는 물론이며, 라파엘로의 전작품을 통해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입니다.(바티칸궁안 서명의 방 왼쪽 벽은<성체논의>, 오른 쪽 벽은<아테네 학당>이
그려져있다) 54명의 인물이 표현되어 있으며 그 대부분 철학자,천문학자,수학자들이다.
배경건물은 베드로 성당을 연상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이 책을 끼고 토론하며 걸어가는 모습이 그림의 핵심을 이룬다.
내부는 거대한 홀로 이루어진 하나의 바실리카(로마의 공회당)처럼 인물 초상화,
브레만테의 건축 기법, 조각, 실내 장식 등을 과학적 원근법을 적용시켜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꾸며놓고 있다.
이 곳에 "아테네 학파"들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 그리스
철학자들의 군상을 각자의 성격에 맞는 포즈와 행동으로 뛰어난 상상력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중앙의 거대한 아치를 배경으로 소실점이 가운데로 모이는 입구에서 들어오는
두 철학자의 모습이 보인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Timaeus)』를 옆에 끼고 다른 한 손으로
이데아(Ideal)를 말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으며, 그 옆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들고 땅을 향해 자연과 생물에 관한 학구적인 몸짓을 하고 있다.
구성에 있어 수평선을 강조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계단에는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반라의 차림으로 누워 있다.
그리고 그 밑에 책상에 기대어 필기를 하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있으며, 바로 뒤에는 잣대를
든 피타고라스가 무언가 적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화면 오른쪽 구석에는 유클리드가
컴퍼스를 그리면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으며, 약간 뒤쪽으로 검은 베레모를 쓴 라파엘의
자화상이 슬쩍 그려져 있다.
거대한 드라마가 펼쳐져 있는 이 그림은 네 개의 수평적 계단 위로 서 있는
인물들과 아치를 받치는 두꺼운 벽기둥, 그리고 평면적으로 넓게 퍼진 공간 등
모두 플라톤이 있는 위치로 아치가 순서적으로 후퇴하는 양상의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 거대한 작품은 주제의 뛰어난 형상화와 조각적 입체감이 균형감 있게 하나로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
20◇ 마티아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1509∼15년경 작, 프랑스 콜마르 운터린덴미술관 소장)
마티아스 그뤼네발트및 작품 소개
1869. 12. 31 프랑스 피카르디 르카토~1954. 11. 3 니스.
20세기 프랑스 화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화가로 간주되기도 한다.
1900년경에 야수파 운동의 지도자였던 마티스는 평생 동안 색채의 표현력을 추구했다.
그의 소재는 주로 실내풍경이나 구상적 형태였으며, 그가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는 지중해
특유의 활기가 넘쳐 흐른다.
프랑스 북부 태생의 중산층에서 출생한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한다는 신조는 마티스의
인생 전체를 특징짓게 되었다.
금테 안경, 정성껏 다듬은 짧은 턱수염, 약간 살찐 체구, 보수적인 옷차림의 철저히
부르주아적인 그의 겉모습은 파리의 선도적인 전위 예술가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묘한 것이었다.
그의 초기 그림은 1850년대에 프랑스 사실주의자들이 즐겨 채택했던 17세기 네덜란드
양식을 보여준다.
1896년에 마티스는 보수적 취향의 국립미술협회가 주최하는 살롱에 그림 4점을
출품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정부는 그의 작품인 〈책을 읽는 여인 Woman Reading〉(1894)을 사들였다.
이때부터 그는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점점 더 자신만만하고 대담해졌다.
그후 2년 동안 그는 브르타뉴로 취재 여행을 떠났고, 노련한 인상파 화가인 카미유 피사로를 만났으며,
얼마 전에 보수주의자들이 격렬하게 항의하는 가운데 프랑스 국가에 기증된 귀스타브 카유보트
소장품에서 인상파 미술의 걸작들을 발견했다.
그의 색채는 한동안 더욱 밝아지고 강렬해졌다. 1897년에 그는 표현방식면에서의
해방을 향한 중요한 첫걸음을 떼어놓았고, 〈저녁 식탁 The Dinner Table〉(또는 〈La Desserte〉)
으로 살롱전에서 가벼운 물의를 일으켰다.
짙은 빨간색과 초록색을 사용한 이 작품에서 그는 르누아르풍의 광채와 엄격한 고전주의적
구도를 결합시켰다. 1898년에 툴루즈 출신의 아가씨 아멜리 파레르와 결혼한 마티스는
1년 동안 파리를 떠나 런던에서 J. M. W. 터너의 그림을 연구한 뒤, 코르시카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지중해의 햇빛과 색깔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
망막에서 뒤섞이게 하기 위해 작은 색면을 병치시킨 점묘파적 기법은 꿈틀거리고 활달한
자연스러운 붓놀림으로 전환했고, 사실주의적인 색채는 빨강과, 초록, 주황과 파랑, 노랑과
보라의 강렬한 보색대비로 바뀌었다.
새로 얻은 이 자유분방함이 작품으로 나타난 것은 콜리우르에서 완성한 〈열린 창 Open Window〉
과 9월에 파리로 돌아와서 그린 아내의 초상화 〈모자를 쓴 여인 Woman with the Hat〉이었다. 이 2점의
작품은 그해 가을에 열린 살롱 도톤전에서 역시 강렬한 색채를 실험하고 있던 다른 예술가들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되었는데, 비평가 루이 보셀은 이들을 '야수들'(les fauves)이라고 불렀고, 그리하여 20세기
미술에서 최초의 중요한 '이즘'인 포비슴, 즉 야수파가 탄생했다. 그리고 마티스는 이 집단의 지도자로
인정받았다.1908년에 그는 미국의 뉴욕 시와 소련의 모스크바 및 독일의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야수파는 조직적인 단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래 지속될 수 없었고, 야수파에 속했던 화가들은
곧 각자의 기질에 따라 표현주의나 입체파, 또는 일종의 신전통주의 쪽으로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마티스는 이런 경향들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야수'란 말이 단순히 순수한 색채를 좋아하는
화가를 뜻하는 용어라면 그는 평생 동안 야수파로 남아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칠 만큼 합리적인 견해를 갖고 있어서, 자칫하면 혼란스러워질 수도 있는 화풍에
어느 정도의 질서를 부여하고 싶어했다. 그는 야수파가 등장한 1905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그린 일련의 주요작품에서 계속 색채의 균형과 선의 단순화를 추구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삶의 기쁨 Joy of Life〉(1906)·〈디저트, 붉은 하모니 The Dessert,
a Harmony in Red〉(1908)·〈붉은 화실 The Red Studio〉(1911)·〈금붕어 Goldfish〉(1915)·
〈피아노 교습 Piano Lesson〉(1916)·〈몽탈방, 커다란 풍경 Montalban, Large Landscape〉(1918)
등을 그렸다.
이런 작품들에서는 마티스의 성숙한 화풍이 갖고 있는 중요한 특징들이 거듭 나타난다.
형태는 흐르고 미끈하고 굵은 윤곽선으로 둘러싸여 있고, 세부적인 묘사가 거의 없이 단순하게
처리되었다. 색채는 넓은 영역에 걸쳐, 얇고 평면적이지만 밝게 칠해져 있으며 그림자는
사실상 완전히 제거되었다. 그리고 묘사된 공간은 극단적으로 평면화되어 원근법의 규칙이나
입체감을 내기 위한 관습적 생략기법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단순한 장식미술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강렬하고 자유분방하지만,
그림 전체의 효과는 이슬람의 양탄자나 직물 및 도자기의 무늬를 연상시킬 수도 있다.
그의 소재 선택과 그 처리 방법에서 낙천주의와 쾌락주의를 엿볼 수 있으며,
이들 소재는 지성과 관능을 동시에 암시해준다.
옷을 입은 여인뿐만 아니라 많은 습작물들이 있지만 판에 박힌 관습적 정취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의 그림은 그 착상에 있어서 대담함이 사라졌고 절제적이었던 표현수단도 복잡해졌다.
그당시 대부분의 화가나 작곡가들(특히 파블로 피카소와 이고리 스트라빈스키)과 마찬가지로
마티스도 일종의 현대화한 고전주의라고 할 수 있는 고전적 형식에 안주했고, 전위적 예술의
충격에 다소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예술 대중을 즐겁게 해주려고 애쓰게 되었다.
그러나 니스 시절의 전형적인 작품들 중 〈목련꽃을 든 오달리스크 Odalisque with Magnolias〉·
〈장식적 무늬가 있는 인물화 Decorative Figure on an Ornamental Background〉 등은 인기를
누리고도 남을 만한 걸작들이다.
경제적 안정을 이루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부지런했다. 1920년에 그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제작한 〈나이팅게일의 노래 Le Chant du Rossignol〉에서 무대 배경과 의상을 맡았다. 그는 또한
여러 해 동안 소홀히 했던 조각으로 돌아가, 1930년에 연작의 4번째 작품이자 가장 추상적 형태인
〈뒷모습 The Back〉을 완성했다. 여성 나체 부조인 〈뒷모습〉은 그가 1909년부터 이따금 다루어온
주제였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메리언에서는 대규모 벽화 연작의 마지막 작품인 〈춤 Ⅱ The Dance Ⅱ〉
(반스 재단 소장)를 완성하여 설치했다.
마티스는 파리에 간 초기부터 에칭과 드라이포인트, 석판화 등의 판화기법에 흥미를 갖고
있었으며, 종종 많은 판화작품을 제작했다. 1932년에 그는 스테판 말라르메의 〈시집 Poesies〉
삽화로 29점의 에칭을 발표했는데, 그의 독특한 재능인 부드러운 윤곽과 경제적 선묘법은 말라르메의
시에 담겨 있는 '순수성'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 그는 그래픽 아티스트로서 활발한 활동을 보이게
되었는데, 특히 앙리 드 몽테를랑의 〈파시파에 Pasiphae〉(1944), 피에르 르베르디의
〈얼굴들 Visages〉(1946)·〈포르투갈 편지 Lettres Portugaises〉(1946),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 Fleurs du Mal〉(1947), 피에르 드 롱사르의 〈사랑의 사화집 Floriege des Amours〉
(1948), 그리고 샤를 도를레앙의 〈시집 Poemes〉(1950)에 그린 삽화는 유명하다.
위의 책들은 주로 흑백 삽화로 제작되었으나, 예술과 인생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
〈재즈 Jazz〉(1947)를 출판하면서 화려한 색채 삽화를 곁들였는데, 여기서
이용한 기법을 그는 '가위로 그린 소묘'라고 불렀다. 이것은 그림에 들어갈 소재들을
색종이(원하는 색을 얻기 위해 불투명 수채물감으로 직접 칠한 종이)에서 잘라낸 다음 풀로
붙인 것이다.
마티스는 말년에 그의 마지막 작품들에서 창조력이 약해진 조짐이나 슬픔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 작품들은 그가 평생 동안 그린 그림들 가운데 가장 대담하고 완숙하며
평화롭고 낙천적이다.
마티스는 코트다쥐르 언덕이 있는 방스에 1943년부터 별장을 갖고 있었는데,
1941년 중병에 걸렸을 때 그 지방의 도미니쿠스회 수녀들 가운데 하나가 그를 간호해준 데 대한
보답으로 그 별장터에 도미니쿠스회 수녀들을 위한 로제르 예배당을 짓기로 결심하고,
1948년에 설계를 시작해 3년 만인 1951년에 완공했다. 그는 우선 스테인드 글라스의 일부를
손수 도안했고, 그 다음에는 벽화를 그렸으며, 성직자의 의복과 예배용 물품을 비롯해 교회
안팎의 거의 모든 것을 도안하는 것으로 일을 매듭지었다.
예배당이 완공되기 전에 그는 색종이를 오려 만든 거대한 작품(그가 〈재즈〉의 삽화에서 했던
작업을 확대한 것)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이 작품은 여러 가지 점에서 그를 1950년대 초의
'가장 젊은' 화가이자, 가장 혁신적인 예술가로 만들어주었다.
이젠하임 제단화는 이젠하임 병원을 운영하던 안토니우스파 수도원의 주문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아홉 장면의 유화와 두 장면의 나무 조각으로 구성돼있다.
현재 프랑스 알자스주(州) 콜마르의 운털린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511∼1515년 이젠하임의 안토니우스파(派) 수도원 중앙 제단화로서 그려졌으며, 니콜라우스 폰
하게나우가 조각한 고딕식 목각제단에 끼워져 있다.
가동식(可動式)의 다익(多翼) 제단화로서 2중 여닫이로 되어 있다. 닫혔을 때의 크기는
너비 3m, 중앙에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 좌우에 성안토니우스와 성세바이젠하임스티아누스,
아래에는 베드로가 그려져 있다. 열린 상태에서는 중앙이 성모자와 천사, 좌우에 성고(聖告)와
부활, 그리고 익부(翼部)를 열면 성안토니우스의 유혹 등이 모두 9개
장면으로 그려져 있다. 철저한 사실주의와 후기고딕의 정열이 혼합된 뛰어난 수법의 제단화이다
원래 위의 형태로 아래쪽 제단대(predella) 위에 본 그림이 있고 좌우 양쪽에 다른
그림이 하나씩 있으며 본 그림을 펼쳐가면 한 가운데 조각품이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 보호를 위해 이를 3개 부분으로 나눠 전시하고 있다.
본그림의 예수 오른쪽에 세례 요한과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한 희생을 상징하는
'신의 양'이 있고 왼쪽에는 사도 요한과 성모마리아,막달라 마리아가 있다.
왼쪽 날개는 안토니우스 성자,오른쪽 날개는 세바스티아누스 성자.
아래 제단대(predella) 그림은 가장 왼쪽이 막달라 마리아,그 옆이 성모마리아다.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부분)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는 인상파 이전까지 서양 미술을 지배해온 주요 모티브였지만
이토록 처절한 예수를 묘사한 작품은 어디에도 없다. 굵은 못이 박혔던 발등의 상처나 온몸 가득한
가시 자국,그리고 절명한 예수의 표정은 극도의 고통을 무릅쓰고 수난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예수의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이것이 1515년에 완성된 작품이라면 믿겠는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예수의 주검은 오늘날 팔레스타인이나 예루살렘 등에서 테러 또는 테러에 대한
보복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부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지켜봐야하는 고통에 일그러진 막달라 마리아의 얼굴.(요즘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처럼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결혼설을 인정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은 주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는 성녀의 모습이 아니라 온갖 삶의 질곡과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이웃들의 모습이다.이젠하임 재단화 첫화면의 가운데 그림(부분)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린뒤 막달라 마리아의 표정은 더욱 절망적이다.예수의 주검을 넣을 관
앞에서 죽음의 고통보다 더한 낙담에 빠진 여인은 피눈물을 마구 쏟는다.이젠하임 재단화 첫 화면의
제단대 그림(부분)
피눈물을 흘리는 것은 성모 마리아라고 예외가 아니다.신의 아들이 아니라 인간의 아들인
예수의 주검 앞에서 어머니는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참아내고 있다.이젠하임 재단화 첫 화면중 재단대
그림(부분)
이젠하임 재단화 두번째 화면
이젠하임 재단화 첫번째 화면의 가운데를 양옆으로 펼치면 나타나는 두번째 화면.
가운데 본그림은 '천사들의 연주'와 '아기 예수의 탄생' 두 주제가 한 화면에 그려져 있다.
왼쪽 날개 그림은 '수태 고지'이며 오른쪽 날개는 '예수의 부활'이다.
아래 제단대 그림은 첫화면 그대로.
여기서 예수는 더이상 앞서의 상처투성이 예수가 아니다. 썩어 없어질 인간의 육체가 아니라
전지전능한 '신성'이 충만한 신적 존재의 모습이다.
첫 화면에서 예수의 수난을 바라보며 고통을 느꼈던 관찰자들은 이제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
화가의 천재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 그림은 원래 이젠하임 병원의 주문을 받아 제작한 것이었다.
만약 평범한 그림들처럼 예수의 탄생에서 수난,부활로 이어지는 연대기적 순서를 따랐더라면,
그리고 일반적인 종교화들처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평안한 얼굴을 한 영적 존재의 모습이었다면-
천사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던가 한줄기 빛이 십자가를 향해 비치고 있다던가- 보는 이들의 드라마틱한
감동은 반감됐으리라.
이젠하임 병원의 환자들은 인간적 고통을 겪는 예수가 신으로 부활하는 극적 반전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병든 몸에도 기적이 행해지리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지않았을까.
그것이 작가인 그뤼네발트의 의도였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젠하임 재단화 세번째 화면
이젠하임 재단화 두번째 화면 '천사들의 합창'과 '아기 예수의 탄생'을 열어젖히면 이제 조각
작품이 나타난다.
가운데 앉은 이가 성 안토니우스,그 좌우로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히에로니무스가 서있다.
아래 제단대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 그림을 열면 나오는 조각품으로 예수와 12제자들의 상이다.
양 옆 두 날개 그림은 역시 그뤼네발트의 것으로 왼쪽은 '은자 성 바울을 방문한 안토니우스'
이며 오른쪽은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이다.
성 안토니우스가 여러차례 등장하는 것은 그의 유골이 이젠하임 병원에 모셔져 있을 정도로
성안토니우스가 이젠하임 병원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성 안토니우스는 각종 전염병을 치유한 성인으로 유명했으며 그의 유골이 있는 이젠하임 병원에 유럽
각지의 환자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성 바울은 사도 바울이 아니라 최초의 은자라고 일컬어지는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