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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 】조선의 청백리, 탐관오리
사욕으로 士林 망친 정순붕 《어느 시대 어느 땅에서나 불가항력의 함정이 있게 마련이다. 그 함정에 갇혀서 원통한 피를 흘리는 사람도, 그 피를 빨기 위해 함정을 파는 독충(毒蟲)들도 도사리고 있다.》
고변(告變)은 부귀영화의 지름길. 조선시대 탐관오리들이 녹봉(祿俸)과는 별도로 큰 재물을 버는 길은 대략 세 가지였다. 첫째, 백성을 위협하고 농락하여 착취하는 것. 둘째, 벼슬하기를 원하는 자들을 상대로 매관매직하는 것. 셋째, 역모를 꾀하는 자를 찾아 고발하는 것. 첫째 방법은 군소 벼슬아치들이 행하는 것으로 대상이 일반 백성들이라서 벌어들이는 액수가 상대적으로 적다. 둘째 방법은 권력을 지닌 고위 벼슬아치나 가능한 방법으로 보다 큰 재물을 얻게 된다. 셋째 방법은 권력의 다과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저마다 행할 수 있는 것으로 가장 손쉽고 빠르게 부귀와 영화를 함께 움켜쥘 수 있는 방법이었다. 어째서 그러했던가. 왕조시대의 핵심은 「왕」이다. 그리고 그 대척점(對蹠點)에 「역적」이 있다. 임금이 곧 국가였던 왕조시대에는 현재의 왕을 넘어뜨리려는 자가 가장 사악하고 극흉한 범죄 자이기 때문이다. 왕조시대의 역적은 지금으로 치면 반국가사범에 해당한다. 물론 범죄의 성격은 같다고 해도 요즘의 반국가사범과 왕조시대의 역적이라는 말은 서로 풍기는 뉘앙스가 다르다 . 실패하는 경우, 반국가사범은 범죄자 자신만 처벌되지만, 역적은 범법자 자신이 처형됨은 물론 가족과 친족들까지 죽임을 당하거나 종이 되어 끌려가고 재산도 모두 몰수당 하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는 것이다. 절대권력을 지니고 자자손손이 세습되는 왕위는 아주 매혹적인 자리였다. 탐나는 물건일수록 노리는 자가 많아지고, 지닌 자로서도 노리는 자가 많을 것이라고 지레 공포를 느끼게 마련이다. 그래서 세상의 왕들은 모두 역모를 경계하고 왕위 방어에 노심초사했다. 「역적은 삼족을 멸한다」는 잔혹한 처벌은 결국 왕들이 느끼는 그런 공포심의 일 그러진 표출인 것이다. 지상의 모든 왕조가 다 그러했지만, 조선왕조 시대에 역시 그런 시대구조가 낳은 사생아인 「고변(告變)」이 성행했다. 본래 고변은 「반역을 고발한다」는 의미로, 역모를 꾀하는 자들을 관가에 고발하여 그 반역의 실상이 증명되면 대가가 아주 후했다. 막중한 왕위를 위험으로부터 구출한 공으로 치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고변한 자는 신원과 출신계급을 가리지 않고 공신(功臣)으로 녹훈(錄勳)되어 군(君:왕의 서자에게 붙이는 존칭. 또는 종친이나 훈신에게 내리는 정일품 종일품 정이품 종이품의 작위)에 봉해지고 관작(官爵)과 재물을 함께 얻는다. 재물은 대개 역적에게서 몰수한 재산을 그 역적을 고발한 고변자에게 주었다. 그래서 고발당한 역적이 부유한 자일수록 고변으로 얻는 재산이 많았다. 왕조시대에 역모라면 그 위에 다시 없는 무서운 죄목이다. 일단 역모라는 사안으로 고발되면 사건의 성격상 고발당한 자가 자신은 절대 역모를 꾀한 일이 없음을 증명해내 야 한다. 그러나 이미 역적이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어 옥에 갇힌 상황에서 자신이 무죄함을 증명해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 역사에는 죄 없이 고변 당한 현인들과 명 사들이 속절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가 후세에 가서야 그 무고함이 밝혀져서 신원(伸寃)된 경우가 많다. 「고변」이 지닌 그런 속성 때문에, 고변은 중종조의 명신인 조광조(趙光祖)의 경우에서 보듯 정적(政敵)이나 개인적으로 증오하는 자를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처치할 수 있는 수단으로 애용되기도 했다. 아주 드문 사례지만, 역모로 고발당한 자가 자신의 무죄함을 명쾌하게 증명해내는 경우가 있다. 그리 되면 고변한 자를 반좌법(反坐法)에 걸어 처형했다. 무고(誣告)나 위 증(僞證)으로 고변했음이 드러난 자에게는 그가 고변한 범죄의 처형 형량을 그대로 되돌려 적용해서 처벌하는 것이 반좌법이었다. 탐관오리의 사전적인 뜻이 「탐욕이 많고 행실이 깨끗하지 못한 관리」인 바, 이 글에서는 보다 큰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수단으로 「고변」이라는 방식을 부당하게 사용했 던 명종(明宗)때의 탐욕스럽고 비루했던 대신(大臣) 정순붕(鄭順朋)의 사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정순붕의 고변과 그 후일담은 사건 규모가 크고 처절함과 극적인 요소를 아 울러 지닌 점에서 조선왕조 5백년 동안 쏟아져 나온 그 많은 고변자들 중에서도 가장 비상한 사례에 해당한다. 조선왕조시대 사림(士林)이 화를 입은 이른바 「사화(士禍)」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로 4대 사화를 꼽는다. 연산군 4년(1498년)의 무오사화(戊午士禍), 연산군 10년(1504년) 의 갑자사화(甲子士禍), 중종 14년(1519년)의 기묘사화(己卯士禍), 명종 즉위년(1545년)의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정순붕과 을사사화 4대 사화 중에서 최후의 사화인 을사사화는 중종조(中宗祖) 왕실의 외척들인 대윤(大尹:인종의 외숙인 尹任)과 소윤(小尹:명종의 외숙인 尹元衡)의 반목과 대립에서 비롯된 사림의 화옥(禍獄)이었다. 1544년 11월에 중종(中宗:1488~ 1544년, 재위 1506~1544년)이 붕어하고 인종(仁宗:1515~1545년, 재위 1544~ 1545년)이 즉위하자, 인종의 외숙인 대윤 윤임이 득세하면 서 유관(柳灌) 이언적(李彦迪) 성세창(成世昌) 등 사림의 명사들을 많이 발탁하여 정부의 대관으로 임명하는 등 정계에 신기운을 일으켰다. 중종때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의 명현들을 대거 처형한 기묘사화의 참극 이래 사림의 기운이 저상되어 내려오던 터라 사림에서는 크게 환영했다. 본래 인종은 배우기를 즐겨하는 돈후한 성품으로서 아주 어질었다. 인종이 어린 나이에 세자궁에서 연강(筵講)때 벌에 쏘였던 일화는 그 인품을 잘 말해주는 사례로 유명하 다. 하루는 세자궁의 경연관이 책을 펼치고 읽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어린 세자의 얼굴색이 파리해지더니 경연관에게 책 읽는 것을 중지하라고 조용히 명했다. 그리고는 자 리에서 일어나서 내전에 들어가더니 조금 뒤에 돌아와서 하는 말이 『벌이 옷소매 속에 들어가서 몹시 쏘아대기에 안에 들어가서 그 벌을 집어내고 왔노라』고 했다. 당시 인종의 나이가 아주 어렸는데도 그처럼 급한 일을 그렇듯 조용히 처리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모두들 『하늘이 내리신 성덕(聖德)』이라고 칭송해 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임금이 새로 즉위해서 사림의 명현들을 조정에 모으기 시작하자 세상사람들은 새로운 정치가 베풀어지리라고 크게 기대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종이 즉위한 지 불과 8개월만인 을사년(1545년) 7월에 붕어하고 어머니가 다른 동생인 당시 12세의 어린 아이였던 명종(明宗)이 새로 등극하여 명종의 친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 정하게 되자 정세가 일변했다. 새로 실권을 잡은 명종의 외숙 윤원형은 자파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즉각 조정에 있는 윤임 쪽 세력 제거에 나섰다. 이리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된 사대부가 거의 1백명에 달했던 대규모 사화인 을사사화가 시작되었다. 이때 예조참의로 있던 윤원형의 손발이 되어 앞장 서서 계책을 꾸미고 실무를 맡아 대규모 사화를 일으킨 4대 원흉이 있으니, 지중추부사인 정순붕과 병조판서 이기(李己)와 호조판서 임백령(林百齡)과 공조판서 허자(許磁)로서, 정순붕은 그들 중에서도 수모자(首謀者)였다. 정순붕 일당은 먼저 형조판서직에 있던 윤임과 영의정 유관과 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을 역모로 몰아서 일단 귀양을 보냈다가 뒤이어 사약을 내려 선전관으로 하여금 귀양 길을 가고 있는 그들을 뒤쫓아가게 해서 길에서 죽게 했다. 인종이 승하한 때가 을사년 7월 초였고, 그 뒤 원상(院相:왕이 죽은 뒤 새 왕이 즉위해도 상중이므로 정무를 시작하지 못하고 卒哭까지 스무엿새 동안은 임시로 신하 중에서 중망 있는 원로 재상급 또는 원임자가 정무를 대신 처리하게 하는데, 그 일을 맡은 신하)이 정무를 맡았었다. 드디어 명종과 수렴청정하는 문정왕후가 정무를 시작한 것이 7 월27일이었는데 윤임과 유관과 유인숙에게 사약을 내린 것이 8월29일이었으니 사람을 역모로 몰아 처치하는 일을 흡사 거센 풍우가 몰아치듯 급박하게 몰아갔음을 알 수 있다. 을사사화 초기에 제일 먼저 죽임을 당한 이들 세 사람은 다 한때 세상에 그 이름을 크게 날리던 사람들이었다. 윤임(1487~1545년)은 무과에 급제 하여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고 인종의 외숙인 왕실의 인척인데 58세의 나이로 죽었다. 유관(1484~1545년)은 영의정으로서 덕행과 기절로 사림의 숭앙을 받았는데 61세의 나이로 죽었다. 유인숙(1485~1545년)은 성품이 충후 정직하고 강직하여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을 보면 원수처럼 미워한다는 세평을 듣던 사림의 명사였는데 이때 60세의 나이로 죽었다. 을사사화의 원인 자체는 물론 대윤 윤임과 소윤 윤원형의 불화와 권력다툼에 그 발단이 있었다. 그렇지만 당시 조정에 진치고 있던 정순붕 일당이 윤원형의 수족 노릇을 하거나 윤원형보다 오히려 더 신명나게 날쳐대지 않았다면 당시 을사사화가 그렇게까지 참혹한 규모로 번지지는 않았을 터였다. 정순붕 일당은 윤임 일파들이 꾸몄다는 「역모」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서 그들이 명종 대신 왕족인 계림군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다고 꾸며내서 계림군도 죽였다. 또 죽은 이들에게 동정적인 발언을 한 사람도 일당으로 몰아 죽이는 등 이리저리 고리를 연결해 가면서 사건 규모를 확대해서 계속 사림을 소탕해갔다. 윤임과 유관과 유인숙을 죽인 뒤 그들은 공신 책정을 서둘러서 정순붕을 머리로 하는 일당 29명이 「추성위사협찬홍제보익공신」이라는 훈호(勳號)의 공신으로 녹훈된 것이 9월 1일이다. 보통 줄여서 「위사공신(衛社功臣)이라고들 부르다가 뒤에 「정난공신(定難功臣)」이라고 고쳤으니, 「사직을 보위한 공신」이라거나 「국가의 어려운 고비를 바로잡은 공신」이라는 의미를 스스로 부여한 것이다.
정순붕은 재물을, 임백령은 여자를 정순붕은 본래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작은 아들인 현(石賢)을 일가인 정백붕(鄭百朋)에게로 양자 보냈다. 그런데 이때 집안을 잇는 아들은 정순붕이 고변하고 그에 따르는 일들을 하는 것을 극력 말린 반면, 양자로 간 정현은 적극적으로 생부를 도와 날뛰면서 사대부들을 죄에 얽어 넣음으로써 이때 같이 공신이 되고 관직을 받았다. 당시 정순붕 일당은 나라와 임금을 위해 그런 일을 했다고 했지만, 세상사람들은 그들의 속내는 다른 곳에 있다고 쑤군댔다. 개인적으로 품고 있던 원한이 있거나 노리는 목적이 따로 있어서 그렇다고 본 것이다. 사람들은 정순붕 이기 임백령 허자 등 을사사화의 네 원흉이 왜 그런 일을 하게 되었는가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정순붕은 유인숙과 인척지간인데도 그의 재산을 노렸고, 이기는 일찍이 병조판서가 될 뻔했을 때 유관이 막았기에 유관에게 원한이 있었으며, 임백령은 윤임과 같은 동네 에 살면서 옥매향(玉梅香)이라는 인물 고운 평양기생을 두고 다투다가 윤임에게 빼앗긴 일로 윤임에게 원한을 품었고, 허자는 유순하고 근실하나 출세에 급급하여 그들을 따라 다니며 일을 같이 꾸몄다』 결국 그들은 고변으로 상대를 죽이고 공신이 됨으로써 노리던 것을 얻었다. 정순붕은 우의정으로 올라가고 유인숙의 재산과 노비들과 종으로 떨어진 그의 가족들까지 다 받음으로써 부귀영화를 누리게 됐고, 이기도 좌의정이 돼 벼슬에 대한 한을 풀었으며, 임백령은 윤임의 재산을 나눌 때 특히 윤임의 첩이 되어 살고 있던 기생 옥매향을 종으로 받아옴으로써 빼앗겼던 여자를 되찾아 묵은 한을 풀었다. 그래서 사람들 이 특히 임백령의 여자문제를 더욱 더럽게 보았다고 한다. 당시 식자들의 눈에 정순붕의 처신이 어떻게 비쳤는지를 잘 말해주는 일화가 있다. 유인숙이 사형을 당해 죽은 뒤에 정순붕의 친구였던 이연경(李延慶)이 정순붕과 마주치자 대뜸 물었다. 『자네가 젊었을 때는 원명(原明:유인숙의 자)과 교유하면서 항상 「원명은 절의에 죽을 선비」라고 일컫더니 어찌 이렇듯 죽이기까지 하는가』 당황한 정순붕이 얼굴빛이 변하면서 허튼 말을 몇 마디 대꾸하고 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정(柳貞)이라는 젊은 벼슬아치가 두렵게 생각하면서 이연경에게 말했다. 『호랑이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은 사람마다 모두 위태로워 하는 것인데, 공은 어찌하여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그러자 이연경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령(耳齡)이 교활하게 원명을 죽인 것은 자기 자손을 위함이다. 그러나 만약 나를 해치면 다만 친구를 죽였다는 이름만 남을 뿐 자기에게 이로울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나는 걱정할 일이 전혀 없다』 과연 그 말대로였다. 이연경은 정순붕에게서 아무 해도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악한 원숭이, 나무에서 떨어지다 정순붕은(1484~1548년)은 성종 15년 갑진년에 태어났다. 자는 이령이고 본관은 온양으로 헌납 정탁(鄭鐸)의 아들이다. 연산군 10년 갑자년(1504)에 문과에 급제했다. 시세 에 영합하기를 잘해서 중종때 조광조가 득세할 당시 사림과 교유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이 온통 큰 화를 입었던 기묘사화 때 그가 해를 입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아주 다행으로 여겼다. 당시 그는 조정에서 밀려나 일단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내려갔는데 그나마 이내 관작을 삭탈당했다고 한다. 뒷날 그토록 사악하게 남의 재물을 탐냈던 배경에는 그때 겪은 쓰라림과 고생스러움이 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을사사화 때 가장 세차게 날뛰어서 많은 사람들을 역모로 얽어 죽임으로써 사림을 붕괴시킨 그는 공신으로서 우의정에 올라 큰 부귀영화를 누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타인의 억울한 피 위에 쌓아올린 그 부귀영화는 수명이 짧았다. 문제의 을사년에서부터 불과 3년 뒤인 무신년에 죽으니 그 나이 64세였다. 뒷날 선조 때에 가서 당시의 악행에 대한 처벌로 관작(官爵)을 추탈당하고 삭훈(削勳)으로 훈호도 빼앗겨 공신록에서 그 이름이 영원히 제거되었다. 반면 유관 유인숙 윤임을 비롯하여 그에게 해를 입은 당시의 희생자들은 모두 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고 시호들이 추증되어 명예를 회복했다. 을사사화의 원흉 정순붕이 당대인들에게 얼마나 미움을 받았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세간에 전해진 그의 죽음에 관한 일화이다. 정순붕의 말로에 대한 이야기는 정순붕보다 약간 뒤의 시대를 살았던 조선조가 낳은 최상급의 문장가였던 유몽인(柳夢寅:1559~1623년)과 이수광(李日卒光: 1563~1629년) 의 글에 담겨서 후세에까지 전해졌다. 유몽인은 그의 저작 『어우야담(於于野譚)』에 정순붕의 말로에 대해 자세하게 적으면서 탄식을 금치 못했고, 이수광도 그의 유명한 저작 『지봉유설(芝峯類說)』에 그 이야 기를 기록해 놓았다. 그들보다 훨씬 후대 사람인 영정조조의 대문장가 이긍익(李肯翊:1736~1806년)도 그의 대저작물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기재되어 있는 정순붕의 죽음에 관한 일화를 옮겨 놓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눈에 띈다. 똑같이 정순붕의 죽음에 관한 일화를 다루는 것인데도, 유몽인과 이수광의 기술을 비교해보면 여러 부분에서 상이함이 드러나는 것이다. 유몽인과 이수광이 동시대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상이함은 아주 흥미로운 현상이다. 그것은 결국 유몽인과 이수광이 살아있던 시대에까지도 정순붕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조선사회의 큰 화젯거리였음과 또 그 이야기가 사회 각계각층에 여러 갈래로 나뉘어 전해지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 전승과정에서 듣고 옮기는 이의 성품이나 취향과 기억력의 차이가 작용하여 이야기의 내용이 서로 조금씩 달라져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실린 이야기를 살펴보자. 『유인숙(柳仁淑)이 역적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자 그 문적에 있던 노비(奴婢:사내종과 계집종)들은 임금으로부터 공신(功臣)의 집에 하사품으로 내려졌다. 당시의 일등공 신은 정순붕(鄭順朋)이라 유인숙의 노비들은 대부분 정순붕에게로 넘겨져 그 집에 귀속되었다. 주인이 바뀌어 정씨네 집안에 들어간 유인숙 가문의 노비들은 모두 죽은 옛 주인을 생각하고 슬피 울었으나, 오직 한 계집종만이 빼어난 미모를 뽐내면서 조금도 슬픈 기색이 없이 희희낙락하였다. 그뿐 아니라 동료 계집종들을 꾸짖기까지 했다. 「우리들이 옛 주인을 잃은 것은 하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누구든 우리 주인이 되지 못한다는 법이 어디 있느냐. 주인이 바뀐 이상 마땅히 새 주인을 섬겨 편안하게 해드릴 뿐 새것 헌것 가릴 게 무어냐」 그러면서 홀로 새 주인을 극진히 정성껏 받들었다. 정순붕은 그 비녀를 아주 신임하여 가까이 시중들게 하면서 잠시도 옆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비녀도 정성을 다해 모셔 해가 지나도록 매질 한번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순붕 을 잘 받들었다. 하루는 순붕이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귀신이 와서 자기의 얼굴을 누르는 바람에 놀라서 소리치면서 깨어났다. 그 뒤로 같은 꿈을 자꾸 꾸었다. 그는 마침내 고질병이 들어 회복되지 못하고 죽었다. 정순붕의 아내가 수상하게 여긴 나머지 용한 무당을 불러 물어보았다. 무당이 말하기를 베개 속에 요괴가 들어 있는 연고로 당한 변괴였다고 했다. 즉시 정순붕이 베던 베개 를 뜯어 보았더니 과연 그 속에서 사람의 두개골이 나왔다. 「이건 필시 유가(柳家)에서 온 노비들의 짓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부인은 유인숙 가문에서 온 노비들을 모두 불러 놓고 매를 쳐서 문초를 할 차비를 차렸다. 그런데 미처 매를 들기도 전이다. 한 계집종이 「그건 내가 한 일이오」 하고 자수하고 나섰다. 바로 순붕이 그토록 신임했고 그간 매 한대 맞을 만한 조그만 잘못조차 한번도 저지른 일이 없이 극진하게 순붕을 모셨던 그 계집종이었다. 그 계집종은 스스로 정순붕의 아내 앞에 나서서 입을 열었다. 「우리 옛 주인이 무슨 죄가 있다고 당신네 늙은이가 모함을 하여 억울하게 돌아가시게 했단 말이오. 내가 주인의 원수를 갚아 가슴에 맺힌 한을 풀고자 하여 겉으로 복종하 는 체하면서 벼른 지가 오래 됐소. 유씨 가문에서 온 종이라 해서 경계하여 믿지 않을까 두려워서 있는 힘껏 아첨을 하였더니 그 늙은이가 마침내 나를 전적으로 믿게 되어 내 말이라면 따르지 않는 것이 없게 되었소. 그래서 은밀하게 사람을 시켜서 사람의 해골을 얻어다가 베개 속에 넣어 그 늙은이로 하여금 베게 한 것이오. 이제야 주인의 원수를 갚았으니 죽어도 한이 없소. 어서 죽이시오」 순붕의 자제들은 그 계집종을 아비의 빈소 옆에 끌고 가서 때려 죽이고 그 일 일체를 비밀히 덮어버려서 당시의 사람으로서는 아는 이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정순붕의 작은 아들 작(石昔)이 칠십세가 되도록 살다가 죽었는데, 죽기에 임하여 비로소 사람들에게 「우리 집안에서 심히 꺼린 것이 사람의 도리를 못한 것이다. 이 제 내가 죽게 되니 한 가지 뛰어난 충의가 있었던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그 계집종 일을 이야기했다. 유가(柳家) 계집종의 뛰어난 충의는 결코 흔한 것이 아니다. 정순붕에게는 정렴과 정작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 그럼에도 그 시대에 세상에 나가 벼슬할 뜻이 없어서 모두 절간이나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재주를 감추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어찌 그 아비가 사림(士林)을 벌거숭이로 만든 죄악을 씻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아무리 효심이 무궁하다고 할지라도 아비의 죄악을 씻어낼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평생토록 부끄러워하며 살다가 마침내 죽음의 자리에 이르러 한을 품은 채 죽었으니 이 또한 슬픈 일 아닌가』 한편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실린 이야기는 이러하다. 『을사년에 유관(柳灌)을 모함하여 죽이고, 유관의 가속(家屬) 및 노비를 모두 몰수하여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 그 노비 중에서 갑이라는 여종이 있어 나이 겨우 열네살인데 영리함이 뛰어났으므로 순붕이 몹시 귀여워했다. 그래서 의복과 음식을 친 자녀처럼 해주고, 갑이 또한 시키기 전에 모든 일을 순붕의 뜻에 맞게 하며 매사에 정성을 다하여 섬겼다. 또 종의 신분으로 떨어져서 같이 순붕의 집으로 끌려온 옛 주인의 가족들과 마주치면 마구 욕설을 퍼부으면서 「저것들이 전에 나를 학대했기 때문에 내가 이처럼 보복하는 것이다」라고 하니 순붕이 더욱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하루는 갑이가 보물을 몰래 감추었으므로 순붕이 꾸짖으니 갑이가 울면서 「제가 여기 온 뒤로 주인의 옷을 입고 밥을 먹고 하여 은혜가 비길 데가 없는데, 무엇이 부족하여 도둑질을 하겠습니까」 하므로 순붕이 의심을 하면서도 놓아 주었다. 갑이가 일찌기 그 집 젊은 사내종과 통정하였는데 그 사내종에게 말하기를 「주인이 만약에 눈치를 채고 매를 치면서 다그치면 어떻게 벗어나겠느냐. 매에 못이겨서 너를 끌 어넣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라고 위협하자 사내종이 「어떻게 해야 모면할 수 있을까」 하고 매우 두려워했다. 그러자 갑이가 「반드시 요즘에 죽은 시체에서 사지를 하 나 잘라 오너라. 모면할 수 있도록 내가 방술(方術)을 해보겠다」 하니 사내종이 그 말에 따라 역질(疫疾)로 죽은 시체에서 팔뚝을 하나 잘라 가져왔다. 갑이가 그것을 받아 몰래 순붕의 베개 속에 넣었더니 오래지 않아 순붕이 역질로 죽었다. 순붕의 집에서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갑이를 족쳤다. 갑이가 마주 욕하기를 「너희 가 우리 상전을 죽였으니 곧 나의 원수이다. 내가 오래 전부터 죽이려고 벼르다가 이제 원수를 갚았으니 죽을 곳을 얻었다. 더 무엇을 물으려느냐」하고 마침내 죽임을 당했 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자의 죽음 위의 두 이야기를 보면, 당시 정순붕의 죽음에 관한 소문이 세간에 얼마나 화제가 되었던가가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가지를 많이 치면서 전해졌는 지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정순붕을 죽인 계집종의 주인이 유인숙이라느니 유관이라느니 하는 혼동까지 일으킨 점이다. 또 계집종이 정순붕을 죽인 방법도 서로 다르다. 이쪽은 베개에 「해골을 넣어 요귀의 요얼을 입게 해서」 죽인 것이고, 저쪽은 베개에 「최근에 역질로 죽은 시체의 팔뚝을 넣어 역질에 전염되게 해서」 죽인 것이다. 그렇다면 두 이야기 중에 어느 쪽이 보다 사실에 가까울까.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 계집종은 유인숙의 종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첫째, 베개에 해골을 넣는 것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육탈(肉脫)이 된 뼈가 아니라, 최근에 역질로 죽은 시체에서 잘라낸 생짜의 팔뚝을 넣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베개 자체가 극히 작은 물건인데 그 속에다 시체에서 막 잘라낸 팔뚝을 그대로 넣는다면 냄새가 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베개는 머리를 올려놓는 물건이라 코가 금세 냄새를 맡게 마련인데 그 작은 물건에 들어간 시체 팔뚝의 비린내 내지 썩은내를 어찌 맡지 않을 것인가. 베개를 베기도 전에 들통이 났을 것이다. 둘째, 앞에서 소개한 정순붕의 친구 이연경에 관한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있다. 이연경이 정순붕에게 『자네가 젊었을 때는 원명(原明:유인숙의 자)과 교유하면서 항상 「원명은 절의에 죽을 선비」라고 일컫더니 어찌 이렇듯 죽이기까지 하는가』라고 야유한 뒤 그가 해를 당할까 봐 걱정하는 유정에게 한 말 속에 있는 『정순붕이 교활 하게 원명을 죽인 것은 자손을 위해서였다』는 대목에서도 정순붕이 상대를 죽이고 빼앗은 것은 유인숙의 재물과 노비들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밖에, 유몽인의 경우는 그 이야기의 출처가 정순붕의 작은 아들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고, 내용이 사리에 맞고 진솔한 점에서 훨씬 더 높이 사게 된다. 아무튼 위의 두 가지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당시 정순붕이 죽음에 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이리저리 전하면서 정순붕의 당한 재앙을 몹시 즐거워했을 모습을 눈 앞에 보는 듯하다. 듣는 자들이 자기 취향에 맞게 이야기를 자꾸 꾸며가는 바람에 원래는 없던 계집종의 이름, 나이, 보물 절도사건, 젊은 사내종과의 통정사건, 역질을 앓다 죽은 시체의 팔뚝 등등이 새로 들어가고 그런 와중에 계집종 상전 이름까지 혼동이 오는 등 일종의 전설이 되어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당대 시중의 일반 백성들이야 무식해서 정순붕을 죽인 계집종 이야기에다가 그런 부자연스러울 정도의 극적인 장치를 가하는 것이 더 마음에 들어 그렇게 자꾸 꾸며가면서 즐겼다고 치고, 당대의 명망가이며 지식인이었던 이긍익까지도 그쪽을 선호한 사실이다. 이긍익의 저술을 읽어보면, 그가 이미 유몽인의 「어우야담」도 읽어 알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런데도 그는 유몽인이 전하는 「해골」 운운 이야기를 그의 저술에 옮기지 않고, 이수광이 전한 「역질로 죽은 시체 팔뚝에서 옮은 역질로 죽어간」 쪽을 택해서 그의 책에 기록했던 것이다. 결국 정순붕이 저지른 악행에 비추어 그의 죽음이 좀더 처참하고 더러운 죽음이기를 바랐던 세간 인심의 투영된 것 아닐까. 정순붕의 죽음 뒤에 붙는 후일담은 그것 뿐이 아니다. 뒤에 남겨진 아들 형제가 아비의 악행을 보면서 겪은 고통과 수치감을 이기지 못하고 세간을 버린 것 또한 당대의 화젯 거리였다.
죄값은 자식이 치른다 정순붕의 아들 정렴과 정작은 둘 다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장남인 정렴(1506~1549년)은 자질이 맑고 욕심이 없으며 총명이 남달리 뛰어나서 어떤 글이든지 한번 보면 모두 통했다고 한다. 천문, 지리, 음률, 의약, 복서, 산술, 한어(漢語) 등등을 남에게 배우지 않고도 통달했다. 중종 32년 정유(1537)년에 과거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포천 현감 등을 역임했다. 그의 아비가 악행을 저지르던 을사년에 그는 39세의 장년이었고, 무신년에 아비를 죽인 유인숙 가문의 계집종을 아비의 빈소 옆에서 때려 죽일 때는 42세였다. 을사사화 때 아비가 고변하는 것을 극력 말리다가 아비의 미움을 사고 또 남의 집에 양자로 간 동생 현이 아비와 함께 고변하는 일에 뛰어들어 날뛰면서 동참하지 않는 그를 해치려고 하므로 몸을 피해서 과천 청계산과 양주 괘라리에 가서 숨어 지내기도 했다. 을사사화 뒤 세상을 버리고 깊이 숨어 인적을 끊고 선가(仙家)의 연단법을 공부하더니 43세의 나이로 죽었으니 자식의 도리로 아비를 위해 유인숙의 계집종을 때려죽인 다음 해였다. 그는 죽던 날, 스스로 다음과 같은 자신을 위한 만가(挽歌)를 지어 놓고 앉은 자세로 죽었다고 한다. 『일생에 만 권 글을 다 읽고 하루에 천 잔 술을 다 마시며 높이 복희씨(伏羲氏:중국의 전설적인 고대 제왕) 이상의 일을 말하고 세속의 이야기는 아예 입에도 담지도 않는다 안회(顔回:孔子의 수제자)는 30세에 죽어도 아성(亞聖)이라 일컬어졌는데 선생의 수명은 어찌 그리도 길었는고』 (一生讀破萬卷書 一日飮盡千鍾酒 高談伏羲以上事 俗說從來不掛口 顔回三十稱亞聖 先生之壽何其久) 정렴의 아우 정작은 나이가 정렴보다 27세나 아래였는데, 역시 이인(異人)의 풍모가 있었다고 한다. 을사사화의 풍파를 지켜본 뒤 형 정렴을 따라 세상을 버리고 선가의 연단하는 학문을 배웠다는데, 평생 여색을 멀리하고 시를 잘 짓고 의술에도 밝았다. 나이 70이 되도록 오래 살았고,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아비 정순붕을 죽인 유인숙 가문 계집종의 뛰어난 충의에 관한 이야기를 세상에 전했다. 죽기 전에 가벼운 병을 앓았는데 역시 형처럼 앉은 채로 운명했다고 한다. 자기 이익을 구하기 위하여 남을 원통한 함정에 밀어넣는 사람들이 어찌 명종이 즉위했던 그 옛적 을사년에만 있었겠는가. 필자는 옛 서적들을 읽다가 위와 같은 정순붕과 그 가문 사람들 이야기를 만나게 되자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내가 소녀시절에 본 어떤 사람의 일이 생각났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보통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주변 사람들이 쉬쉬하면서 그를 피했다. 그 사람이 육이오때 거제도 포로수용소 의무실에 직원으로 근무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그리 되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때 그 사람은 자기와 아주 사이가 나쁜 의사가 하나 있어 그가 어찌나 밉던지 수용소를 관할하는 미군 당국에 그 의사가 빨갱이라고 밀고했더니 미군들이 그를 끌어다가 총살해 버리더라고 이야기하더라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들과 전쟁을 하고 있는 마당에서 누군가를 가리켜서 「빨갱이」라고 했다면, 그것은 옛 사람들이 미운 자를 「역적」이라고 고변한 것과 마찬가지 일일 터였다. 어쨌든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놀란 것은 그 사람이 그런 경력을 지니고도 날마다 아주 평안하게 그처럼 스스럼없이 살아가고 있는 점이었다. 돌아보면 우리 인간세상은 역시 고해(苦海)다. 어느 시대 어느 땅에서나 을사사화 때의 「역모」라는 말에 해당하는 불가항력의 함정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함정에 갇혀서 원통한 피를 흘리는 사람도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오늘도 정순붕 가문의 사람들의 사적은 사서(史書) 속에 슬프게 자리잡고 앉아서 그런 함정의 존재를 다시금 일깨우면서 책 읽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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