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훈민정음을 비밀리에 연구한 끝에 1443년 12월 이를 공표하기에 이른다. 새 문자에 자신감을 가진 세종은 일반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하급 공무원들인 서리들에게 새 문자를 가르치는 한편 1444년 2월 16일 중국 운서(한자 발음 사전)의 한자음을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훈민정음으로 표기하게 한다. 그로부터 4일 뒤인 1444년 2월 20일 최만리를 비롯하여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이 언문(훈민정음)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세종의 분노는 대단했다. 비록 하루 동안이지만 이들 일곱 명을 옥에 가두었다가 풀어주었다. 대신 이들을 비롯해 양반사대부들을 설득하기 위한 책을 펴내기로 결심한다. 바로 그 책이 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간행되는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이 책의 편찬을 도와준 이들은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 여덟 명이지만 강희안은 나중에 집현전 학사가 되므로 집현전 학사는 일곱 명이었던 셈이다.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 핵심 조력자들인 셈이다. 그럼 반대와 도움, 그 역사의 진실을 짚어보자.
2. 훈민정음 반포 반대의 진실
1) 최만리 등 7인이 올린 갑자상소의 진실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은 갑자년에 발표되었으므로 갑자상소라 하는데 세종실록에 전문이 실려 있다. 이를 보면 이들도 훈민정음의 과학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상소문 첫 문장에 “신 등이 엎드려 보건대, 언문(훈민정음)을 만든 것이 매우 신기하고 기묘하여, 지혜를 나타냄이 저 멀리 아득한 옛것으로부터 나온 것을 알겠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그렇다면 왜 반대했을까? 크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였다.
첫째, 훈민정음 창제는 중국을 떠받드는 사대주의에 어긋나기 때문에 오랑캐나 하는 짓이라고 본 것이다. 세종대왕도 중국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것을 따를 것은 따르되 우리의 것을 지켜나가자는 것이었다.
둘째, 훈민정음이 학문을 정진하는 데 오히려 손해만 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가 학문만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며, 학문보다 백성들이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는 문자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셋째, 억울한 죄인이 생기는 것은 죄인을 다루는 관리가 공평하지 못한 탓이지 죄인들이 문자를 몰라서가 아니라고 했다. 이에 대해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통해 억울한 죄인을 구제하고 교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두 사람이 주장하는 근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입장이 전혀 달랐음을 이해해야 한다. 최만리의 첫 번째 근거는 당시 보수 기득권층들의 중세적 사고방식인 중화주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은 대국으로 문명국가인데 조선은 그러한 나라의 보호를 받는 작은 중국(소 중화)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에 대해서는 한없이 비굴했지만 소 중화도 못 되는 이른바 오랑캐에 대해서는 우월감과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당시 국제 정세로 볼 때 합리적이었을지는 모르나 사실과 진리에 대한 객관적 인식까지 방해하는 엄청난 편견을 나았다.
이를테면 서해는 밀물‧썰물이 심한데 동해는 덜한 까닭을 양반들은 바닷물 흐름의 근원이 중국에 있으므로 서해는 중국에 가깝고 동해는 멀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던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을 가지고 문자를 보니 그것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입말(조선말)과 글말(중국 글)이 전혀 다른 언어 모순조차 당연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두 번째 근거와 같은 언어 중심주의 오류를 범하게 된다. 한문으로 성립된 것만을 학문의 대상으로 보았다. 중국 글을 익히고 중국 경전에 충실한 것이 학문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던 시기였으므로 그러한 생각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말글은 학문의 유용한 수단은 되지만 그 자체가 학문이 아닌 것은 너무도 자명한 진리인데 사대주의적 편견 때문에 그러한 것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입장에서 보더라도 진정한 중화주의는 중국적인 내용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습득해야 하는데 문자 때문에 그들의 문화 습득이 어려워 더디게 되니 그들 자신조차 모순에 빠지게 되는 어리석음을 저지른 셈이다.
최만리의 세 번째 근거는 세 근거 중에서 가장 합리성을 띤다. 사실 조선의 위민사상인 민본주의의 이상은 근본적으로 지배계층의 자세와 제도에 있는 것이지 언문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새 문자를 만든다고 피지배층의 인권 상황이 눈에 띄게 확 달라질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피지배계층이 사람다운 대접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던 시대고 보니 더욱더 그러했다. 그러나 언문이 벽서나 문학 작품 등을 통해 지배계층에 대한 항거의 수단이 되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민본주의 이상을 실현하는 간접적 수단이 되었으므로 무조건 무시하는 것은 너무 극단적인 생각이다.
결국 최만리는 중화라는 사대적 세계관과 기득권을 수호하고 왕권을 견제하는 입장에서 한글 창제를 반대했던 것이다. 세종은 갑자상소 논쟁 후에더 철저하고 합리적으로 양반들을 설득하고자 이런 논쟁에 이어 해례본 집필을 서둘렀을 것이다. 곧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반포 반대 상소문을 올린 신하들을 설득한 후, 더 철저히 훈민정음 반포를 준비했다. 더욱이 이러한 반대 상소는 단 한 건뿐이었으니, 오히려 대부분의 사대부 양반들이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를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알린 1443년 이후, 아마도 당시 같은 사대부 계층 사이에서도 많은 논쟁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으로 남아 있는 대표적인 것은 최만리 등 7인의 상소문과 이에 대한 세종의 반박문이다.
2) 최만리 등 7인의 갑자상소에 대한 재조명
훈민정음을 통한 세종의 문자 정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종의 정책적 의도가 대단히 복합적이고 중층적이었다는 사실과 훈민정음 반포의 다목적성과 훈민정음의 다기능성에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만리 등의 갑자상소에서도 훈민정음의 다목적성을 어느 정도 인정은 하고 있다.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의 소통과 표현에 대한 세종의 정책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훈민정음의 다목적성과 한자음 표기에 대한 주요 맥락을 오해하거나 주관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이다. 오해가 아니라면 이와 같은 문제 제기가 계속 이어지거나 상소문이 빗발쳤겠지만 갑자상소 외 다른 상소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다시 정리하면 갑자상소는 훈민정음의 다목적성을 인정하면서도 ‘한자음’ 표기에 대한 과도한 인식과 오해에 기초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상소문의 핵심은 정음 창제로 한자음 개혁을 하려는 것을 저지하고 그 문제점을 제기한 후 그런 개혁에 쓰이는 것이라면 정음 창제가 불필요하다는 주장을 한 것으로 핵심 의도는 중화 문화의 상징인 한자음을 개혁함의 부당성을 호소하려는 것이다._민현식(2011). 甲子 上疏文의 텍스트언어학적 分析 硏究. ≪語文硏究≫39-3. 한국어문연구회. 24쪽.
운서는 과거에서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것이기에 지배층으로 입신하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운서를 고치거나 새로 편찬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지배계층이 되는 길을 통제하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최만리 등의 상소가 운서 문제를 특히 거론했는지 이해가 되는 지점이다.
이런 점에서 새 문자의 창제는 곧 중국에 대한 반항의 태도이며 사대 외교의 틀 속에서는 생겨나기 어려운 사업이었고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사업이었다. _이전경(2013). 조선 초기의 문자정책. ≪동서양의 문자정책≫.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문자연구사업단. 8쪽.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의 주된 동기가 한자음 표기는 아니었지만, 굳이 한자음 표기로만 본다고 하더라도 위와 같은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세종의 의도는 한자음을 개혁하자는 것이라기보다는 제대로 적어보자는 것이었다. 제대로 적어본 적이 없는데 무엇을 개혁하겠다는 것인가.
갑자상소는 중국이 천 년 이상 해결하지 못한 한자음 표기를 해결한 언문의 신묘함에 놀라면서도 정작 그 한자음 표기보다는 중국이 해결 못 한 것을 조선이 해결한 ‘과도함’이 지나치다며 세종의 문자 정책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아버지가 해결 못 한 일을 아들이 해결하면 이게 불경죄가 아니냐는 식으로 접근을 한 셈이다. 여기에 과도한 소 중화 의식이 작용해 우리 식의 문자로 인해 오랑캐 나라로 전락할까 전전긍긍했던 셈이다. 중국에 알려질까 봐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그 두려움은 자기검열식 두려움이었다. 중국의 시각에서 보면 오랑캐 나라가 오랑캐 문자를 갖는 것은 전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실제 훈민정음 반포 이후 중국의 공식 반응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중국은 천하통일이라는 정치적 계기에서건 중앙집권 통치의 필요성에서건 그들의 표준 발음을 적기 위해 ‘운서’ 편찬과 같은 처절한 노력을 기울여왔으나 결국 실패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뜻글자, 단어 글자로는 불가능한 것이고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표기법이 이른바 반절법이었다. 물론 반절법을 고안하기까지 그 배경에 깔린 음운 분석 수준이나 음운 이론 수준은 상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문자의 절대적 한계와 모순으로 인해 그런 학문적 성과를 반영할 수는 없었다.
중국이 천 년 이상 노력했지만 해결 못 한 것을 세종은 10여 년의 연구 끝에 단순하고 명쾌하게 해결해버렸다. 그러한 성과에 대한 평가가 ≪홍무정운 역훈≫에 드러나 있다.
우리 세종대왕께서는 하늘이 내린 성인으로 식견이 높고 널리 통달하여 지극하지 아니한 바 없으시어 성운(聲韻)의 처음과 끝을 모조리 연구하여 헤아리고 옳고그름을 따져 칠음ㆍ사성과 하나의 세로 음과 가로 음이라도 마침내 바른 데로 돌아오게 하였으니, 우리 동방에서 천백 년 동안이나 알지 못하던 것을 열흘이 못 가서 배울 수 있으며, 진실로 깊이 생각하고 되풀이하여 이를 해득하면 성운학이 어찌 자세히 밝히기 어렵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범어가 중국에 행해지고 있지만, 공자의 경전이 인도로 가지 못한 것은 문자 때문이지, 소리 때문이 아니다.’고 하였다. 대개 소리가 있으면 글자가 있는 법이니 어찌 소리 없는 글자가 있겠는가.
지금 훈민정음으로써 번역하여 소리가 운과 더불어 고르게 되면 같은 음을 쓰는 ‘음화(音化)’, 다른 부류의 음으로 대신 쓰는 ‘유격(類隔)’, 순서대로 음을 쪼개는 ‘정절(正切)’, 맥락에 따라 다르게 음을 쪼개는 ‘회절(回切)’ 따위의 번거롭고 또 수고로울 필요가 없이 입만 열면 음을 얻어 조금도 틀리지 아니하니, 어찌 풍토가 똑같지 아니함을 걱정하겠는가. 우리 여러 성스러운 임금께서 제작하신 묘법이 다 아름답고 다 선하여 고금을 넘나드는 동시에 전하께서 선대의 사업을 계승하는 아름다움이 또한 앞시대보다 빛나도다._≪홍무정운 역훈≫ 서문 번역
<사진 1> ≪훈민정음 역훈≫
물론 제대로 적기 위해 바르게 적는 것이 필요하고, 바르게 적는 것을 ‘개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기본 맥락에 대한 오해는 다음과 같은 후대의 평가로 이어진다.
당시 상소자인 원로 유신들은 정음이 시험적으로 운용된 결과물을 보고 모두 옛것 즉 기존 전통 음과 배치되는 새 한자음 개혁의 실상을 알고 한자음 개혁 사업 문제의 심각성을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나중에 실패로 끝난 ≪동국정운≫식 한자음 개혁의 실상을 보건대, 원로들의 문제 제기는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_민현식(2011). 甲子 上疏文의 텍스트언어학적 分析 硏究. ≪語文硏究≫39-3. 한국어문연구회. 11쪽.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실패한 것이 아니다. 모든 한자음을 정확하게 적기 위한 전략을 쓰다 보니 일부 비현실적 한자음 표기법이 생긴 것인데 마치 ≪동국정운≫에 있는 한자음 표기 전체가 문제가 있는 듯 일부 논자들이 표현하는 것은 잘못이다. ≪동국정운≫ 서문에 다음과 같은 편찬 원칙이 나와 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옵서 유학을 숭상하시어 도를 중요하게 여기시며, 글을 가까이 하여 백성을 가르치는 일을 널리 일으킴에 지극하지 않는 바가 없으시니. 온갖 일을 살피시는 여가에 이일에 생각을 두시어, 이에 신 신숙주와 수집현전 직제학 신 최항, 수직집현전 신 성삼문·신 박팽년, 수 집현전 교리 신 이개, 수이조 정랑 신 강희안, 수병조 정랑 신 이현로, 수승문원 교리 신 조변안, 승문원 부교리 신 김증에게 시키시어, 세속 관습을 두루 모으고 전해 오는 문적을 깊이 살펴, 널리 쓰이는 소리에 기본을 두고 옛 음운의 반절법에 맞추어서 자모(첫소리)의 칠음과 청탁과 사성(평상거입)의 근원의 쓰임까지 연구하지 아니함이 없이 하여 옳게 바로잡히도록 하셨다.
신들이 재주와 학식이 얕고 짧으며 학문 공부가 좁고 비루하매, 뜻을 받들기에 부족하니 매번 지시하심과 돌보심을 번거로이 하게 되겠기에, 이에 옛사람이 편성한 음운과 제정한 자모를 가지고 합쳐야 할 것은 합치고 나눠야 할 것은 나누되, 하나의 합침과 하나의 나눔이나 한 성음과 한 자운마다 모두 주상 전하의 결재를 받고, 또한 각각 고증을 하여, 이에 사성으로 조절하여 91운과 23자모(첫소리)를 정하여 가지고, 임금께서 친히 지으신 훈민정음으로 그 음을 정하였다.
또 ‘질(質)’·‘물(勿)’ 등의 여러 운은 ‘영(影)’[ㆆ]으로써 ‘래(來)’[ㄹ]를 기워서 속음을 바로 잡아 바른 음에 맞게 하니, 옛 습관의 그릇됨이 이에 이르러 모두 고쳐진 것이다. 책이 완성되매 친히 이름을 하사하시기를, ≪동국정운(東國正韻)≫이란 이름을 내려주시며 신(臣) 숙주에게 명하시어 서문을 지으라 하셨다. ≪동국정운≫ 서문 번역
≪동국정운≫의 편찬 원칙과 전략을 보면, 훈민정음을 바탕으로 음을 정확하게 적기 위해 1차적으로 현실 음을 수집하고 옛 문헌을 살펴 가장 많이 쓰이는 음을 표준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양반 사대부들은 ≪동국정운≫으로 인해 한자를 제대로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며 오히려 이런 장점 때문에 이황 같은 이는 그가 스스로 ≪논어집주≫에서 고백했듯이 성리학 연구에서 중국 학자들보다도 더 깊이 있게 접근할 수 있었다. 이런 학문적 접근이 아니더라도 언문은 사대부들의 한자, 한문 공부에 도움을 주어 사대부들이 조선 시대 내내 훈민정음을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갑자상소와 같은 오해의 1차 원인은 훈민정음 창제 과정이 비밀 프로젝트라 사대부들이 훈민정음 반포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고 2차 원인은 훈민정음 문자 정책을 공개로 전환한 후에 세종이 운서 번역(1444.01.16)을 시도한 것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데 있다. 또한 한자음 표기 외에 훈민정음 반포의 주요 맥락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데서 비롯되었다.
3. 한글을 반포하기까지의 조력자들
그렇다면 한글 반포 공로자들은 누구인가?
세종이 훈민정음을 직접 창제했다고 해서 모든 것을 혼자 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가 한 나라의 모든 정책을 총괄하는 임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임금이 비밀리에 한글 창제를 준비해야 할 만큼 새 문자 창제는 기적이었고 혁명이었지만 그런 비밀 준비 과정이든, 그 사실을 1443년 12월에 공표한 이후든 조력자는 분명 있었을 것이다.
조력자를 조력자로 보지 않고 공동 창제나 공동 아이디어 산출자로 보는 것이 문제지 조력자를 제대로 조명하는 것은 세종으로 하여금 그런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이 되게 한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집어보게끔 하는 중요한 맥락이 된다.
여기서는 ≪훈민정음≫ 해례본 공동 집필자를 1차 조력자로 보고 왕실 가족을 2차 조력자, 그밖에 신미 대사와 같은 이들을 3차 조력자,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4차 조력자로 보고 조명해보고자 한다.
1) ≪훈민정음≫ 해례본의 공로자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만들었다. 훈민정음 해설서 집필에 참여한 집현전 학자는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강희안, 이개, 이선로’다.
정인지는 훈민정음 연구에 있어 큰 역할을 맡았다. 1446년에는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을 쓰고, 1447년에는 ≪용비어천가≫를 지었다. 정인지는 세종대왕의 서문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충하고, 해례본의 편찬 경위와 참여자, 훈민정음 창제자를 밝혀놓음으로써 훈민정음의 진정한 가치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또한 역사, 천문, 음악 등에도 재주가 뛰어나 훈민정음 편찬 사업 책임자로 이름을 남겼다.
최항 역시 주요 훈민정음 연구 분야에서 큰 공적을 남겼다. ≪용비어천가≫의 발문을 쓰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집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역사와 어학에 재주가 있어 ≪고려사≫, ≪동국정운≫ 등을 편찬할 때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1444년(세종 26년)에는 집현전 교리로서 ≪오례의주≫를 편찬하고 ≪운회≫를 번역했으며, 1461년(세조 7년)에는 양성지의 ≪잠서≫를 한글로 번역해서 펴냈다.
신숙주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집필하고 ≪동국정운≫을 펴낸 중요한 인물이다. 신숙주는 ≪동국정운≫ 머리말에서 “성운(글자의 소리)은 곧 훌륭한 사람의 길을 배우는 시작이다. 이리하여 우리 임금(세종대왕)께서 말소리에 마음을 두시고 고금의 모든 것을 두루 살피시고 지침이 될 만한 훈민정음을 만드시어 수억 년 동안 어리석게 살아온자들을 깨우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동국정운≫은 이상적인 중국 한자음의 표준을 적은 책인 만큼 그 책을 펴낸 것만으로도 훈민정음 연구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이었다. 신숙주는 이두는 물론 중국어·일본어·몽골어·여진어에도 뛰어나 훈민정음 및 한자음의 연구와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성삼문은 ≪훈민정음≫ 해례본 반포 1년 전인 1445년에 신숙주와 함께 중국 요동을 여러 번 방문하여 중국의 음운학자인 황찬에게 중국 한자음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인물
(생몰연대)
세종대왕
1397-1450
정인지
1396-1478
최항
1409-1474
박팽년
1417-1456
신숙주
1417-1475
성삼문
1418-1456
강희안
1417-1464
이 개
1417-1456
이선로
?-1453
1443년
47세
48세
35세
27세
27세
26세
27세
27세
?
1446년
50세
51세
38세
30세
30세
29세
30세
30세
?
직책
임금
집현전
대제학
정2품
집현전
응교
정4품
집현전
부교리
종5품
집현전
부교리
종5품
집현전
수찬
정6품
돈녕부
주부
정6품
집현전
부수찬
종6품
집현전
부수찬
종6품
<표 1> 훈민정음 반표와 ≪훈민정음≫ 해례본 완성 당시 세종대왕과 공동 저자들의 나이와 직책
박팽년은 세종이 펼친 한글 보급 정책의 8대 공신으로 성품이 침착하고 말수가 적으며 온종일 의관을 벗지 않은 채 단정히 앉아 있는 등 소학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은 인물이다. 집현전 학사들 가운데서도 학문과 문장, 글씨 모두 뛰어나 ‘집대성’이라는 칭호와 최고의 평가를 받았으며 ≪훈민정음≫ 해례본을 짓는 일에 참여하였다. 이밖에 ≪운회≫를 한글로 번역하는 데 참여했고 시를 비롯해 모든 면에서 뛰어났지만 참화를 입어 저술은 전해지지 않는다.
강희안은 세종이 펼친 한글 보급 정책의 8대 공신이자 세종의 처조카이다. 세종 시대 안견, 최경과 더불어 ‘예술의 3절’이라 불릴 만큼 시, 서예, 그림에 능하고 학문적 역량이 뛰어났다.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처럼 소박한 삶을 지향하여 왕실 친척을 관리하는 돈녕부 주부였지만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냈다. 세조가 즉위한 을해년(1455년) 강희안의 글씨를 저본으로 구리 활자 ‘을해자’가 만들어졌다.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운회≫를 한글로 번역하고 ≪용비어천가≫와 ≪동국정운≫ 등을 편찬하였다. 그림 실력이 뛰어나 조선 팔도 및 서울 지도를 만드는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원예서인 ≪양화소록≫을 펴냈으며, 〈산수인물도〉, 〈고사관수도〉 등의 그림을 남기기도 하였다.
2) 왕실의 조력자들
공식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왕실 조력자는 첫째 아들 이향(훗날 문종)과 둘째 아들 이유(훗날 세조)이다. 해례본이 안평대군 글씨가 맞다면 그가 세 번째 조력자일 테지만 입증할 만한 증거는 없다. 간접 기록을 통해서는 정의공주와 소헌왕후 또한 조력자이다.
이향은 세종의 맏아들이자 조선의 5대 임금으로 여덟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될 정도로 영특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유순하고 자상한 성격으로 집현전 학사들을 아끼고 사랑했다. 30년 동안 세자로 있으면서 아버지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 및 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비난받을 일이 없을 정도로 착하고 어질었지만 몸이 허약하여 재위 2년 4개월 만에 39세 나이로 병사하였다. ≪대학연의≫에 한글로 토와 뜻을 달아 새 문자인 한글을 활용한 교육을 실천하였다. 왕위에 오른 뒤 매일같이 한글 번역 작업에 매진하였으며, 민본주의 과학 정치에도 투철하여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하기까지 하였다.
이유는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조선의 7대 임금이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학문에 능했으며 무예에도 뛰어났다. 세종의 한글 창제와 반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임금이 돼서도 한글 보급에 온 힘을 기울였다.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과 자신이 지은 ≪석보상절≫을 합해 ≪월인석보≫를 펴냈고, 관리의 시험 과목에 ≪훈민정음≫을 넣는 등 세종의 뜻을 이어 한글 보급 정책에 앞장섰다. ≪훈민정음≫ 언해본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간경도감을 세워 불경을 한글로 옮긴 책들을 펴냈으며, 고전 시들을 모은 ≪명황계감≫, 누에고치에 관한 책인 ≪잠서≫를 한글로 번역하게 하였다. ≪국조보감≫, ≪동국통감≫ 등의 사서와 ≪경국대전≫ 또한 편찬하게 하였다.
정의공주는 세종의 둘째 딸로 언니 정소공주가 일찍 죽은 탓에 아버지 세종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어릴 때부터 영민하고 글 읽기를 좋아해 세종의 한글 연구를 도운 공로로 많은 노비를 상으로 받을 정도였다. 세종이 한글 창제 막바지에 변화하는 소리인 ‘변음’과 입안에서 나왔다 들어가는 소리인 ‘토착’을 글자로 만들지 못하고 있을 때 타고난 소리 감각을 발휘해 자음의 체계와 명칭을 완벽하게 정리할 수 있게 도왔다. 따라서 문종, 세조, 안평대군과 함께 한글 창제를 도운 왕실의 조력자 중 한 명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3) 불교계 조력자들
신미대사는 충북 영동에서 정승까지 지낸 김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스님이 되기 전의 이름은 수성(守省)이었다. 신미대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일찍이 유교 경전을 익히고, 과거에 급제해 집현전 학사를 지냈다. 하지만 벼슬에 뜻이 없고 불교 경전에 빠져들어 속리산 법주사 승려가 되었다. 당시 유학자이자 관리였던 그의 동생 김수온은 집현전 학사이자 조선의 4대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세종이 신미대사를 가까이 하게 된 것은 세종 28년 1446년 3월 24일, 훈민정음 해례본 간행 반포(9월 상순) 6개월 전쯤 소헌왕후가 서거하면서이다. 서거 이틀 뒤인 26일 세종은 중궁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경 만드는 사업을 본격화하려고 하는데 이를 반대하는 사대부 신하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친다. 그러나 세종은 “그대들은 불경을 만드는 것을 그르게 여기는데, 어버이를 위하여 부처님께 명복을 빌지 않는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정면 돌파할 의지를 다진다. 실제로 사대부들도 부인들이 절에 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 아무튼 세종은 국시인 성리학 이념을 떠나 제례 분야에서는 불교를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거 나흘 뒤인 3월 28일. 집현전에서 불경 편찬을 강력 반대하지만 역시 세종은 받아들이지 않으며 이런 논리를 내세운다. 고금의 논리로 보면 사대부들의 불교 반대가 옳으니 내(세종)가 무지한 것이지만, 중궁을 잃은 슬픔에다가 내 스스로 몸이 너무 아파 고통스러우니 불교에 기댈 수밖에 없는 나를 이해해달고 감성에 호소한다. 성리학 국시를 책임져야 할 임금으로서는 불교를 반대하는 사대부들을 탓할 수 없었고, 이런 감성적 논리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감성적 호소가 통했는지 사대부 반발이 잠잠해졌고 이 날(3.28) 세종은 집현전 학사 이영서와 왕실 비서실 돈녕부 주부로 글씨를 잘 쓰던 강희안으로 하여금 성녕대군 집에서 불경을 금 글씨로 옮기게 한다.
이로부터 두 달 쯤 뒤에 이 작업이 끝났고 5월 27일 금 불경을 대자암으로 옮겨 소헌왕후의 명복을 비는 행사를 벌였다. 이때 모인 스님이 무려 2천여 명이었고 이 불사가 7일간이나 진행되었다. 이때 행사 주관자인 정효강이 신미대사를 극찬하기를 “우리 큰스님(화상)은 비록 국정 최고 기관에서 모신다 해도 무슨 부족한 점이 있으리오"라고 한 것이다. 사대부 입장에서 기술된 실록 기록이라 사관은 신미를 ‘간승’이라 하고 정효강의 말을 간승에 대한 아부 수준으로 기술하고 있지만 행사 주관자의 평가이므로 이 행사에서 신미의 역할이 컸음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기록으로 볼 때 세종이 신미대사를 직접 안 것은 소헌왕후가 운명하고 불경을 간행하면서부터인 듯하다. 문종 실록 1450년 4월 6일자 기록에서도 그렇게 전하고 있다.
드디어 대법사가 있은 지 4개월쯤 뒤 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되자 세종은 불경을 베끼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훈민정음으로 옮겨 명복도 더욱 빌고 새 문자도 보급하는 다중 포석을 놓는다.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펴내기 위해서는 불경과 관련된 산스크리트말에 능통하고 훈민정음 취지를 잘 아는, 이미 불사를 통해 검증된 신미대사와 그의 동생 김수온이 있어 마음 든든했을 것이다. 이때 세종 나이는 50세, 신미대사는 1403년생이므로 45세였다.
드디어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석보상절≫(1447년 완성, 1449년 간행)을 훈민정음으로 짓게 하고 세종은 직접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1447-1448년 완성 간행 추정)을 훈민정음으로 펴내게 된다. 당연히 신미대사와 그의 동생 김수온의 절대적인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교신도나 다름없고 신미대사를 깊이 존경하였던 수양대군은 아버지 세종을 측근에서 보좌한 탓에 훈민정음 최고 전문가였으니 거리낌없이 “석보상절”을 완성한다. 사대부층을 배려하여 한자 글씨를 더 크게 하고 훈민정음을 작게 하였지만 새 문자 적용 문서로서는 최고였다. 이 문서 편찬을 옆에서 관리 감독하던 세종은 아예 훈민정음을 한자보다 거의 세 배 가까이 키워 언젠가는 훈민정음이 한자보다 주류 문자가 될 것이라는, 훈민정음 창제자로서의 자신감을 내보인다. 중궁의 명복을 빌면서, 부처님 말씀이 천 개의 강에 떠오르듯이 훈민정음이 만백성의 문자로 피어오르길 간절히 바랬다. 당연히 성리학의 나라에서 불경 책을 펴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소헌왕후의 죽음에 호소한 세종의 인간적인 호소를 사대부들은 막을 수 없었다. 이러한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저술과 보급 중심에 신미대사와 그의 동생 김수온이 있었다.
이런 맥락으로 보아 신미대사는 훈민정음 창제 후에 불경 언해를 통해 훈민정음 보급에 공헌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미대사는 세조 때 ≪원각경≫을 비롯해 ≪선종영가집≫, ≪수심결≫ 등 몽산화상의 법어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는 데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훈민정음 반포 후 여러 기록에 불교를 상징하는 수가 곳곳에 숨어 있는 것에서도 신미대사의 역할이 꽤 컸음을 알 수 있다.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합하여 편찬한 ≪월인석보≫의 첫머리에 실린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하는 세종의 한글 어지는 정확히 108자이다. 세종이 지은 해례본의 정음편 한자 갈래 수도 108자이다.
갈래
훈민정음 서문(세종) *괄호는 빈도 수
글자 수
해례본
정음편
(1446)
1
2
3
4
5
6
7
8
9
訓(1)
字(37)
終(3)
新(1)
用(3)
快(1)
齒(4)
穰(2)
成(1)
10
11
12
13
14
15
16
17
18
民(2)
不(2)
得(1)
制(1)
耳(1)
業(2)
即(2)
復(1)
左(1)
19
20
21
22
23
24
25
26
27
正(1)
相(1)
伸(1)
二(2)
矣(1)
舌(4)
慈(1)
連(1)
加(2)
28
29
30
31
32
33
34
35
36
音(22)
流(1)
其(1)
十(1)
牙(3)
斗(1)
侵(2)
下(2)
一(1)
37
38
39
40
41
42
43
44
45
國(2)
通(1)
情(1)
八(1)
如(34)
覃(2)
戌(2)
則(5)
點(2)
46
47
48
49
50
51
52
53
54
之(3)
故(1)
者(1)
使(1)
君(2)
呑(2)
邪(1)
輕(1)
去(1)
55
56
57
58
59
60
61
62
63
語(1)
愚(1)
多(1)
人(2)
初(26)
那(1)
喉(3)
合(2)
上(1)
64
65
66
67
68
69
70
71
72
異(1)
有(1)
予(1)
易(1)
發(23)
脣(5)
挹(1)
同(2)
無(1)
73
74
75
76
77
78
79
80
81
乎(1)
所(1)
爲(2)
習(1)
聲(43)
彆(2)
虛(1)
附(2)
平(1)
82
83
84
85
86
87
88
89
90
中(12)
欲(4)
此(1)
便(1)
並(7)
步(1)
洪(2)
右(1)
入(1)
91
92
93
94
95
96
97
98
99
與(1)
言(1)
憫(1)
於(2)
書(10)
漂(1)
半(2)
凡(1)
促(1)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文(1)
而(3)
然(1)
日(1)
虯(1)
彌(1)
閭(1)
必(1)
急(1)
108
언해본
(1459)
108
<표 2> ≪訓民正音≫ 해례본 정음편 단순 한자 출현 빈도와 언해본 한자 배열표
기록으로는 해례본의 세종 서문 54자가 언해본의 108자보다 먼저지만 사실 해례본은 번역이다. 곧 언해본과 같이 생각하고 말을 하고 한문으로 번역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108을 반으로 줄여 54자가 번역한 것이다.
또한 ≪훈민정음≫ 해례본은 모두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33은 불교의 우주관인 하늘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훈민정음 기본자는 28자인데 28은 사찰에서 아침저녁으로 종을 치는 횟수와 같다. 물론 28이란 숫자는 하늘의 별자리 수와도 일치한다.
세종은 훈민정음 반포를 준비하던 1444년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을 잃고 1445년에는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을, 그리고 반포하던 1446년에는 왕비인 소헌왕후를 차례로 잃는다. 이러한 극한의 고통 속에서 개인의 슬픔마저도 잊고 만백성과 함께 하는 문자를 만들고자 부처님 말씀과 불경에 의지한 것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세종의 가장 큰 조력자는 한자 권력으로부터 소외당한 일반 백성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훈민정음 창제의 가장 강력한 동기를 부여해주었기 때문이다.
4. 맺음말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이 기획하고 주도하였다. 그러나 혼자 이룰 일은 아니다. 집단 지성이 필요했다. 세종은 임금이 되자 마자 집현전을 정비하고 인재를 키웠다. 그런 수많은 인재들의 도움을 받아 임금으로서 연구한 셈이다.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한 갑자상소(최만리 외)의 주역들조차 결국에는 해례본 저술에 도움을 준다. 갑자상소에 대한 반박 또는 반론이 해례본의 정인지서에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력자들은 창제 전과 후로 나누는 것이 좋겠다. 창제 전은 비밀 프로젝트였으므로 직계 가족 곧 왕세자,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자 등이 아버지 세종을 많이 도왔을 것이다.
해례본 간행 뒤에는 신미대사와 같은 불교계 인사들이 거의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참고문헌
김광해(1991). 훈민정음과 불교. ≪인문학보≫12. 강릉대 인문과학연구소.
김슬옹(1993). 세종과 최만리의 논쟁을 통해 다시 생각해 보는 한글 창제의 역사적 의미. ≪한글새소식≫ 1993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