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양大洋의 물고기
성후 최정윤
마치 조명이 무대에 들어오듯이 한순간 침침하던 겨울 하늘에서 밝은 광채가 쏟아져 나와, 온 집안 사물을 있는 그대로 산뜻하게 비춘다. 맑음, 고요함. 지루하다고들 하지만, 겨울은 지낼 만 하다. 성급한 마음에 창 너머로 건너다 보이는 건조한 산의 밑둥에서 봄의 훈기가 참을성 있게 때를 기다리는 것을 느끼기도 하면서, 모든 것의 부질없음을 이야기하자면, 글 쓰는 일 조차 불필요하겠지하며 종이를 만지작거린다.
나는 종종 힘겨울 때 '강바닥을 훑고 지나가는 코끼리' 의 법문을 떠올리곤 한다. 쉽게 거뜬히 강을 건널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온갖 시련과 시행착오의 결과 감득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큰스님께오서는 늘 '부처님의 가피로'..... 라고 말씀하신다. 법문을 늘 듣고 또 들으면서, 반복이 주는 중요한 의미를 캐치한다.
새로운 인연이 맺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를 때, 그리고 이미 수 십 년에 걸친 인연들을 돌이켜 볼 때, 감사한 마음의 합장이 절로 열린다. 그 모든 이들로부터 받은 온갖 은덕恩德이며, 보호保護며, 그리고 감내堪耐했어야만 했던 모든 이름의 고통들까지도. 그래서 굳이 좋은 인연, 나쁜 인연 가릴 것도 없다. 오면 오고, 가면 가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치루어 업業을 소멸해야만 하는 내 몫의 분량이며, 가능성이며, 대자대비하신 우주의 질서이다. 법계연기법法界緣起法의 교훈이며 더없는 안심법문安心法門이다.
어느 때 젊은이들과 얘기를 할 일이 있었는데, 흡연, 알콜, 마약등에 대한 개인 의견을 말하는 도중에 그런 것은 개인의 행복(?)에 관한 일이니 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말을 해서 그들이 그렇게도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많이 표현하는데 놀랐었다. 나도 모르게 왜 나와 너를 구별해야만 하는가고 다그치자, 그들은 내가 마치 철학자연哲學者然한듯 웃었다. 그 구별에서 무릇 모든 불행이 시작되며, 윤회의 시작이 된다는 법문 말씀은 우리들에겐 이미 의식의 근저根底에까지 가 있다고 본다. 비록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변화로 건망증처럼 생각을 그르치는 일이 허다하지만. 성인聖人의 말씀은 곧 우리의 마음이고 우리의 생명이다.
인도의 카비르Kabir는 말하기를 - 나는 대양大洋에 있는 물고기가 목 마르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을 때 웃는다 - 라고 했던가. 내가 늘 실상實相을 망각하고 깨어있지 못함을 지적 받은 듯 하여 일순 멈칫했다. 우주법계의 모든 무색無色, 무정無情, 유정중생有情衆生 할 것 없이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모든 존재存在의 존재 이유는 이미 영원성永遠性에 참여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 참여의 과정에서 우리가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망각은 편한 것이라고들 말하지만, 늘 그렇게 깨어 있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의 변명은 끝이 없다.
새벽 예불을 모시고 좌복에 앉는다. 벌써 몇 번째나 참선參禪을 마칠만한 시각이 되면 죽비소리를 딱딱 낸다. 매우 작은 소리지만 선명하다. 어디서? 시각을 보면 정확하다. 아 감사합니다. 신장님들께오서 죽비를 쳐 주시는구나. 너무나 감격하여 머리를 조아렸다. 그런데 같은 숫자의 시간대인 낮에 보니, 죽비소리는 다름아닌 조그만 전자시계에서 나는 소리였다. 건조한 겨울날씨 때문이었거나, 기계조작의 문제에서 발생된 것이었나 보다. 실소失笑했다. 그것이 나의 성향인것을.....
마냥 친견親見의 기쁨을 누리던 시절도 지나고, 엄숙하시고도 결연決然하신 대선사大禪師의 모습을 지나치기라도 할라치면, 투명한 결빙結氷속을 그어나간 얼을 본 듯 날카롭고 섬뜩하기조차 한 느낌을 받는다. 내생엔 중생제도를 위해 기필코 다시 수행자가 되시리라 맹세하셨으니, 그때 지나시는 풀섶의 이슬이라도 되어 대 보살의 일별一瞥에 놀라 깨어나리라. 그리하여 행렬에 참여하여지이다.
아미타불 ----------.
<2002년 봄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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