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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1시간 거리밖에 안되지만 막상 양수리로 접어들면 도심의 흔적은 찾을 수 없는, 한가로운 시골풍경이 펼쳐진다. 북한강과 남한강의 두 물줄기가 만나는 두물머리 정경은 산수화를 연상케 하고, 강 너머의 부드러운 곡선을 자랑하는 운길산은 푸근한 어머니의 가슴을 느끼게 한다. ‘그린토피아’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양수리 문현리에 자리해 있는 팜스테이 마을이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다 신양수대교를 지나 작은 양수리 시내를 지나 북한강을 옆에 조금만 가면 작은 샛길 앞에 ‘연꽃마을’과 ‘녹색체험마을 그린토피아’ 두 개의 이정표를 발견할 수 있다.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쉽게 놓칠만큼 작은 샛길이지만 길을 들어서 조금만 더 직진하면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인다. 앨리스가 발견한 이상한 나라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모습이 신기하다. 연꽃마을은 수도권과 인접해 있을 뿐 아니라 오래전부터 상수원보호지역으로 묶여 개발이 이뤄지지 않아 자연 그대로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마을 앞으로 흐르는 북한강과 마을 뒤편의 작은 야산은 정겨운 시골마을 그대로의 모습이다. 정말이지 팜스테이 마을을 위해 일부러 조성한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안성맞춤인 그린토피아. 연꽃마을이 팜스테이 그린토피아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0년부터다. 그 전까지만 해도 연꽃마을은 살기 척박한 땅이었다. “평지가 없어 벼농사를 할 수도 없어 밭농사와 과수원을 하는 것이 연꽃마을 주 수입원이었죠. 봄이면 마을 할머니들이 나물 뜯어 좌판에 펼쳐놓고 팔아 생계를 유지하시고 그러셨죠. 산 밑에 있는 마을이 그렇듯이 여기도 규모가 영세해 농사로는 수익이 얼마 안 되었죠.”
팜스테이 추진을 도맡았던 정경섭 씨는 그린토피아로 거듭나기 전 열악했던 연꽃마을을 알려주었다. 시골마을이 관광지가 되고, 휴양지가 되리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연꽃마을, 연꽃마을이 팜스테이 마을로 유명한 그린토피아가 되기까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정경섭 씨다. “아내가 먼저 시골로 내려가서 사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을 해 왔어요. 평소 양수리에 자주 왔었기 때문에 결정은 쉬었죠. 복잡한 도시에서의 삶보다 느긋하게 삶을 즐기는 것이 더욱 행복할 수 있겠다고 여겨지더군요.” 미국 유타대학에서 화학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LG정유 기술 연구소 소장, 기술담당 상무 등 소위 보장된 길을 달리던 그는 나이 50에 낙향을 선택했다. 아쉬움은 없었다. 숨가쁘게 살아온 삶에 쉼표를 찍고 자신과 가족을 돌보며 사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행복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 어찌보면 도시인이 흔히 갖는 ‘전원생활’의 막연한 꿈이 그를 양수리의 작은 마을로 부른 것인지도 모른다. 1997년, 지금의 마을로 들어온 그는 퇴직금으로 매입한 5,000여 평의 땅에 40평의 집을 짓고 주변에는 배와 포도 등의 과실수를 심어 농사를 시작했다. 평생 공부를 해왔던 그는 전공을 바꿔 농사를 배우기 시작했고 ‘귀농창업대학과정’ ‘하기농민대학’ ‘서울농대 최고농업경영자 과정’ ‘그린투어 최고지도자 과정’ ‘벤처농업인 과정’ ‘인터넷전문가 과정’ 등을 이수했다. 농사꾼이 되고자 공부를 시작했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농사만으로는 연꽃마을의 발전은 이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꽃마을은 실거주자도 얼마 되지 않는 작은 마을로 평지가 없어 농경지로는 적합지 않았다. 농사를 지어서는 수익을 올리기 어렵다는 판단 내린 그는 자신과 마을을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다 해답을 찾아냈다. 그것이 팜스테이 ‘그린토피아’이다.
앵두마을 축제로 자신감 찾아 <전원일기>의 과수원 촬영지였던 연꽃마을은 실거주자 대부분이 과수원을 하고 있을 정도로 과실수가 많은 동네다. 포도, 앵두, 복숭아, 배 나무가 많은 마을의 현실을 감안해서 정경섭 씨는 우선 마을 사람들에게 ‘녹색체험마을’을 통해 농외수익 비전을 제시 했다. 어려운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껴오던 마을 사람들도 정경섭 씨의 제안을 들으며 마을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마을의 발전이 개인의 발전이 된다는 정경섭 씨의 설득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당장 녹색체험마을로의 성공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 없다는 여론이 생겼고, 마을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정경섭 씨가 있었다. 일단 뜻이 모여지자 사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2000년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녹색체험마을 사업은 정부로부터 그린투어 선도마을로 지정받았다. 뿐만 아니라 농협으로부터 팜스테이 마을로, 양평군으로부터는 생태건강마을로 지정받았다. 이에 따른 지원금도 만만치 않았다. 마을 가꾸기 경진대회에 참가해 3,000만 원을 지원금을 받는가하면 정보화 선도마을로 지정되면서 컴퓨터, 디지털 TV, 인터넷 인프라 구축 등으로 지원금을 받았다. 여러 지원금을 바탕으로 도로를 넓히고 주민들을 교육시켜 2002년에는 마을 최초로 ‘양수리 앵두축제’를 개최했다. “연꽃마을에 가장 많은 나무는 앵두나무에요. 요즘 앵두를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는데 착안했죠. 그래도 처음 준비하는 축제여서 과연 사람들이 찾아와 줄까 걱정을 많이 했었죠.” 정경섭 씨는 여행 관련 인터넷 카페 및 게시판을 돌아다니며 앵두축제를 홍보하기 시작했다. 축제 홍보비용을 따로 둘 정도로 예산이 넉넉하지도 않았고, 처음이라는 부담감도 있었다. 하지만 축제 시작일, 무려 300여 명이 넘는 외지인들이 연꽃마을을 찾아왔다. 마을이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이 방문한 것이었다.
차별화 보다 마인드 변화가 가장 중요 첫 번째 앵두축제 성공 이후 연꽃마을은 활기를 띄고 변화하기 시작했다. 외지인들이 마을을 찾으면서 유기농으로 재배한 농산물 판매 수익도 자연스레 증대되었고 이 밖에 2차 관광수입도 증가했다. 몇몇 주민들은 집을 개조해 민박을 시작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 앞, 길 앞에 꽃을 심으며 마을 미화를 시작했다. 한편 정경섭 씨는 그린토피아만의 차별화된 농장체험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한다. 팜스테이는 농촌의 새로운 수익모델로 제시되고 있으며 이에 2006년 농협에서 지정한 팜스테이 마을은 전국 208군데에 이른다. 208개의 팜스테이에서 실시하는 농촌체험 프로그램의 차별화는 한계가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경기도권의 농촌과 경남의 농촌의 풍경이 크게 다르지 않기에 농촌체험 내용 역시 서로 닮은꼴이 된다는 것. “도시인들이 팜스테이를 찾아오는 것은 시골 풍경을 느끼고 어릴 적 놀이와 추억을 아이들과 나누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또한 몸과 마음에 휴식을 주기 위한 것이죠. 이색체험을 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팜스테이를 지속적으로 찾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정경섭 씨는 프로그램의 차별화보다 ‘서비스 정신’을 갖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한다. 팜스테이의 주요 고객인 도시인들은 이미 ‘서비스 산업’에 익숙해진 사람들이라는 것. 반면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팜스테이의 운영자들은 1차 농업의 종사자였기에 ‘서비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게 더 문제라는 것이다. 관광농원화는 1차 산업이었던 농촌을 3차 산업으로 업종 변화라고도 할 수 있기에 소비자중심의 마인드 변화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 농촌은 분명 변해야하며, 지금도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 변화는 단지 외양의 변화가 아니라 체질개선과 마인드의 변화도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다.
글·사진_이명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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