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최후의 승자 '사마의'
쓰러져 가는 나라를 구하자며 복숭아 나무 아래서 도원결의를 했던 관우, 장비가 죽고 유비가 뒤를 이어 아들 유선이 즉위한 후 제갈량은 출사표를 쓰고 위와의 전투에 나선다. 전쟁은 오래 계속되었고, 제갈량은 오장원 전투에 패한 후 백제성에서 지병으로 병사하고 말았다.
제갈량의 죽음을 두고 사마의는 전장의 대치속에서 적대심을 나타냄도 없이 천년만에 나타나는 적수이고 지기라며 내심 슬픔을 감추지 못한다.
따져 말하자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수장이 사망하였는데 무엇을 슬퍼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는 어쩌면 이제부터 자신에게 다가올 앞날을 예상하며 슬퍼하는 것은 아니었을런지...
애초 조조는 사마의의 지략을 탐내어 마다하는 군사의 자리에 앉혔으면서도 한편으론 끝내 그를 믿지 못하였고, 그의 뒤를 이은 차남 조비 역시 그를 의심하여 젊은 여인 정주를 여종으로 보내어 18년이란 긴 세월동안 감시를 계속하게 하였다. 그러나 영명한 사마의가 모를리 없었고, 이를 알아채고도 태연하게 정주와의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그의 나이 70에 이른 즈음에 정주와 정식 혼인을 하였고,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잉태하여 출산을 하는 과정에서 약물을 이용하여 사망에 이르게하는 비정함, 그리고 한편으론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음은 어느 것이 진심인지 알수가 없었다.
한편 그를 평가하는 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혜롭고 침착하고, 관대함과 냉엄함을 갖추었으며, 임기응변과 인내심이 강한 비범함을 가졌다고도 하였다. 아무튼 제갈량과 지혜를 겨루는 당대 최고의 지략가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주장대로 오로지 '명리와 대업'만을 생각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대도독의 지위에서 제갈량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자 황제가 조정으로 소환했다. 휘하 장군들이 그를 한사코 따르겠다는 것을 보면 그가 군인들에게 매우 신임을 얻은 듯 보였다.
그를 제거하려는 정적 조상과 짜고 병석에 누운 황제는 섭정을 맡으라며 그의 속마음을 떠보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흉계임을 읽어내고, 나이 많음에 가족을 돌보고 물러나 살겠다고 하였고, 심지어 자식들과 휘하 장군들의 품계를 낯추어 달라까지 청하였다.
그런 후 깊은 병중임을 위장하여 황제와 조상의 눈을 속였고, 이를 방심하여 황제와 조상이 궁궐을 비운 틈타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그는 드디어 정적을 무찌르고 명리를 내세우며 대업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의 자식을 거쳐 손자 사마염에 이르러 삼국을 통일한 후 진나라를 세웠으니 그는 결국 삼국지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그는 제갈량이 유비의 삼고초려 끝에 그를 따라 삼국통일 전쟁에 뛰어든 의도를 공감한듯, 처음부터 마음속엔 한 황실을 무너뜨린 간신 조조를 따르는 것은 명리를 거슬린다고 생각한 끝에 자신의 가문에 의한 대업을 매듭짓고 삼국지의 막을 내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삼국지는 끝이 났다.
다음은 백발의 사마의가 손자 염을 무릎에 앉히고는 이걸 반복해서 외우라고 하였던 문구인데 생각이 나서 옮겨 보았다. 평생을 전쟁 가운데서 살아왔던 자신의 처지와 험난한 세태에 항상 경계심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하는 가르침이라고나 할까.
원중유유수 기상유선 선방분익비명 욕음청로 부지당랑지재후 곡기경
院中有楡樹 其上有蟬 蟬方奮翼悲鳴 欲飮淸露 不知螳螂之在後 曲其頸
(정원의 느릅나무에 매미가 앉았는데, 매미는 날개를 비비면서 힘껏 노래하고
맑은 이슬을 마시려 하나, 뒤에서 사마귀가 목을 굽혀 다가오는 걸 모른다.)
사마의는 위의 대신으로 자(字)는 중달(仲達), 하내(河內) 온현(溫縣: 지금의 하남성 온현 서쪽) 사람이다. 조조가 승상으로 있을 때, 그를 불러 문학연(文學掾)으로 삼았다가 다시 주부(主簿)로 삼았다. 건안 20년(215), 조조가 한중(漢中)을 평정했다. 그는 내친 김에 익주(益州)까지 탈취하자고 주장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건안 24년(219) 관우가 조인을 포위하고 칠군(七軍)을 물에 빠뜨리자, 조조가 도읍을 옮기려 했다. 이때 그는 조조를 말려 천도를 저지하고 손권을 시켜 관우의 뒤를 습격하자고 건의한다. 조비가 황제가 된 후에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가 되었다가 다시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으로 전보되는 등 깊은 신임을 얻는다. 명제(明帝) 때에는 대장군에 임명돼 수차에 걸쳐 군사를 이끌고 제갈량의 진격을 막는다. 나중에는 벼슬이 태위(太尉)에 올라 중신이 된다. 후에 유조를 받들어 대장군 조상과 함께 조방(曹芳)을 보좌하여 태부(太傅)가 된다. 정시(正始) 10년(249), 정변을 일으키고 조상 집단을 주멸하여 국정을 손아귀에 넣는다.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 사마사 · 사마소가 뒤를 이어 권력을 독점했다. 손자 사마염이 진(晉)을 건립하고 황제가 된 후 그를 선제(宣帝)로 추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