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강의 뿌리는 '광주'였습니다.
인간에 대한 질문, 그리고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작가가 항상 천착해온 주제였습니다.
폭력의 육식을 거부한 채 나무가 되기를 택한 주인공의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한 '채식주의자'가 개인과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다뤘다면,
그 이후 발표된 장편 '소년이 온다'는 국가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을 다루고 있습니다.
JTBC 손석희의 앵커 브리핑 중... 2016.5.17
“인간의 내면, 삶에 대한 의문을 깊숙이 파고들어 생생하게 보여주는 데
문학만 한 예술은 없다.
언어는 완벽하지 않지만 그만큼 유용한 도구도 없다.
살아 있는 인간을 가깝게 느끼고 싶다면 역시 답은 문학이다.
2015년 작가 한강의 언론 인터뷰
뉴욕타임스는 2024년 7월 13일, 2000년 1월 이후 나온 도서를 대상으로 ‘21세기 100대 베스트 도서’(100 Best Books of the 21st Century) 선정 결과를 발표했다.
NYT는 소설가, 논픽션 작가, 시인, 비평가 등 문학가 503명 등을 대상으로 2000년 1월 이후 나온 베스트 책 10권을 추천해달라는 방식으로 이를 선정했다. 여기에 ‘파친코’(2017)가 15위, ‘채식주의자’(2016)가 49위에 각각 올랐다.
독후감
뉴욕혜윰
몇 년 전,아내가 퀸즈 도서관 한국책 코너에서 대여해온 책들이 거실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그 몇 권의 책 중엔 ‘채식주의자’ 와 ‘ 소년이 온다’ 가 함께 있었지만, 나는 그 두 책 모두 읽지 못했다. 아니, 읽지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당시에는 일하느라 읽을 시간이 없었거니와 소설보다는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심리학 같은 주제의 책들을 주로 읽는 나의 취향 때문이었다.
그 두 책의 저자인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 급하게 퀸즈 도서관 여러 곳을 다 뒤져서라도 한강 작가의 책을 빌려야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전투적인 북헌팅을 시도했고, 그런 노력 덕분에 다행히 '채식주의자' '흰' '노랑무늬 영원' 등 무려 세 권이나 미리 선점하여 확보할 수 있었다. 한국어로 된 책을 구하기가 수월한 한국에서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 이후 저자의 책들이 품절 사태가 벌여졌다는데 한국에 비해 한강 작가의 책을 구하기가 훨씬 어려운 뉴욕에서 그녀의 작품을 세 권이나 도서관에서 대여를 했다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기쁜 마음으로 세 권의 책 중 서구권에서 가장 화제를 모은 작품이었다는 '채식주의자'의 책장을 먼저 펼쳤다. 노벨문학상 소식이 알려진 후에야 뒤늦게(?) 작품을 대하는 상황이 조금은, 아니 많이 아쉬웠다.
내가 원래 소설을 좋아하는 취향이었다면, 아내가 도서관에서 빌려 왔던 몇 년 전 그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라는 선입견 없이 작품을 대할 수 있었을 텐데… 후회해 봤자 소용도 없는 아쉬움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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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직접 설명한 작품의 주제의식이나 문학평론가들이 하나같이 일관되게 얘기하는 평가가 아니더라도 ‘채식주의자’를 다 읽고 나면 누구라도 이 책이 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 인간이 동물에게 가하는 폭력, 그 폭력에 맞설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혹은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는 비극적인 그 무언가에 관한 이야기라는걸.
주인공 영혜는 어느 날 섬뜩한 꿈을 꾸고 난 후 육식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동물에게 폭력을 가하는 폭력의 주체 (육식 인간)로 사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육식을 거부하기 시작하면서 이 슬프고도 비극적인 이야기는 시작된다. 폭력을 거부하기 위해, 단지 폭력적으로 삶을 연명해 가는 것을 거부하려고 육식을 하지 않으려는 선택은 또 다른 폭력으로 영혜에게 돌아온다.
폭력의 가해자가 되지 않으려고 했을 뿐인데 그 노력은 고스란히 더 큰 폭력의 피해자로 전락해 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배우자에게 버림받고, 가족들에게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결국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영헤는 더 이상 동물로 살지 않고 식물로 살기 위해, 아니, 식물인간이 되기 위해 음식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지난봄, 어쩌면 여름이 막 시작되기 전인 늦은 봄이었거나 초여름이라고 해도 좋았을 어느 날, 나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아지트인 비밀의 숲에서 적당한 간격으로 서있는 두 개의 참나무 기둥에 해먹을 걸고 아기의 요람처럼 흔들리는 해먹에 파묻혀 눈부시게 푸른 하늘과 숲과 바람을 바라본 적이 있었다. 무섭도록 푸른빛의, 그래서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호수와도 같은 푸른 하늘, 그 하늘과 맞닿은 숲, 그 숲속에서 하늘을 향해 팔을 치켜든 커다란 나무에 달린 수많은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수없이 봐왔던 숲과 바람과 나무였는데 왜 그날따라 그 광경이 그토록 찬란하게 보였는지 모른다.
나도 이 숲의 나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이 순간 죽어서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나의 사체가 유기물로 분해되고, 분해된 나는 빗물에 녹아 땅으로 스며들어, 나무의 거름이 되고, 나무의 수액을 타고 나무의 일부가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르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그 눈물은 한참을 멈추지 않았다. 슬픔이 아닌 감격의 눈물이었다.
더 이상 죽음이 무섭지도, 두렵지도, 슬프지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특별한 혜택이라거나 자연과는 분리된 독립적인 생명체라는 우월감이 아닌, 나라는 실체는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서 동물로서의 죽음 이후에도 나를 이루고 있는 원자들이 어떤 존재가 되더라도 영원속에 남을 텐데, 어차피 계속 존재할 거라면 기왕이면 나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 찬란한 감격의 순간 내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아무것도 슬프지 않아. 아무것도 나에게서 그 무엇도 빼앗아 갈 수 없어…..’
우여곡절 끝에 메인스트리트 퀸즈 도서관에 딱 한 권밖에 비치되어 있지 않은 ‘채식주의자’를 (거짓말처럼) 대여하는데 성공한 후, 그다음 날 나의 비밀의 숲에 가서 해먹에 누워 책을 읽었다. ‘채식주의자’를 이루는 3개의 연작소설 중 마지막 편인 ‘나무 불꽃’에서 주인공 영혜가 정신병원에 재입원하기 위해 언니와 병원에 입원 수속을 하러 간 날, 입원 수속을 마치고 마침내 병실에 함께 들어간다. 환자복이 아닌 사복을 입은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를 동생에 대한 죄책감으로, 모질지만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려는 언니. 쇠창살이 쳐진 창밖으로 보이는 커다란 나무들을 보며 영혜가 언니에게 나지막이 말한다.
언니…..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채식주의자’ 속 응축된 모든 에너지가 그 대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다시 팽창하며 폭발하는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내가 지난봄 비밀의 숲에서 경험했던 무아지경 상태에서 깨달은 삶과 죽음의 명확한 경계선… 그 경계는 요단강처럼 깊고 넓은 것이 아니며 내 두 발 사이의 간극보다 더 좁은 무엇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의 감격의 눈물…. 그 눈물이 기시감처럼 다시 흘러내렸다.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쇠창살 밖의 큰 나무들을 바라보며 내뱉은 나지막한 영혜의 속삭임은 그녀 또한 세상의 모든 나무들 중 하나가 되기로 결정한 절규와도 같은 외침이었다. 세상의 모든 폭력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부조리로부터, 세상의 모든 억압과 편견과 통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나무가 되는 방법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자기 파괴를 통한 자기 구원에 이르는 길을 찾은 자의 마지막 선택. 나뭇잎이 초록 빛깔로 활활 타오르는 나무 불꽃 속에, 억겁의 사슬 속 자신이 지은 업보를 재가 될 때까지 태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사진출처 / 뉴욕퀸즈도서관 채식주의자 영문판 해설 페이지
[출처] 독후감 / 채식주의자|작성자 뉴욕혜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