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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아이를 야단치지 말자
제1절 일부러 야단맞을 짓을 하는 아이
제1장에서도 말했듯이, 아이는 처음부터 부모에게 야단맞을 짓을 하진 않는다. 오히려 처음에는 칭찬받을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런데 부모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때부터 부모가 짜증 낼 만한 일을 한다. (...) 부모는 때때로 첫째 아이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가령 첫째 아이가 동생을 울리기라도 하면 부모는 첫째 아이를 야단친다. 그러면 아이는 곧바로 방침을 바꾼다. 소위 '퇴행(regression)'이라는 행동을 해서 예전보다 부모의 손길을 훨씬 많이 요구하는 것이다. (...) '왕좌'에서 굴러떨어졌다고 생각한 첫째 아이는 빼앗긴 왕좌를 탈환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55-56쪽)
아이는 야단맞는 식으로라도 주목받길 바라게 된다. (...) 부모가 아무리 심하게 야단쳐도 문제행동을 그만두지 않는다. 야단치는데도 문제행동을 멈추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야단치기 때문에 아이는 문제행동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58쪽)
제2절 아이를 야단쳐도 효과가 없다
큰소리로 야단을 맞으면 아이는 부모가 무서워서 문제행동을 멈춘다. 그런 의미에서 야단치는 행위에는 즉효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야단치는 부모가 생각하는 만큼의 효과는 없다. 많은 경우 그 뒤에도 같은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기 때문이다. (...)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야단맞을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부모가 자신을 보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모는 아이가 적절한 행동을 하면 당연하게 여기고 별다른 눈길을 주지 않은 경향이 있다. (59-60쪽)
적절한 행동을 해도 부모에게 주목받지 못하는 아이는 부모가 난처해 하는 일을, 그것도 가장 난처한 시점에 한다. 그래서 부모가 그 아이를 야단치면 아이는 주목받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그 뒤로도 야단맞을 짓을 계속해서 한다. (62쪽)
제3절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는 아이
나는 아이들이 이렇게 어른의 눈치를 봐 가면서 태도를 바꾸는 사람으로 자라지 않기를 바란다. 야단을 많이 맞으며 자란 아이는 이것이 야단맞을 일인지 아닌지만 생각한다. 또 야단만 안 맞으면 뭐든지 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결국에는 자신의 행동이 적절한지 아닌지를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65쪽)
부모에게 야단맞으며 자란 아이는 소극적으로 변한다. 그러면 적극적으로 뭔가를 하려고 하지 않게 된다. 또 사실은 하고 싶지 않지만 남에게 맞추기 위해 할 수 없이 어떤 일을 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틀렸는데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기도 한다. (65-66쪽)
제4절 그릇이 작은 아이가 된다
부모가 아이를 심하게 야단치면 아이는 야단맞을 짓을 하지 않게 되어 '착한 아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실패나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하에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는 아이가 되지는 않는다. 틀에 박힌 아이로 자라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약간 틀에서 빠져나왔다 해도 일단은 큰 꽃을 활짝 피우게 해야 한다. 그 뒤 혹시 필요하다면 꽃 아래에 있는 잡초를 뽑아 주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사실은 잡초를 뽑아 줄 필요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모가 난 부분을 많이 지니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 툭 튀어나온 부분을 교정해 주려고 하다 보면 원래는 그릇이 큰 아이도 그릇의 한 귀퉁이도 차지하지 못할 정도로 작아진다. (67-68쪽)
* 기질 긍정론임. [주역]에서도 기질 긍정론이 나옴. (박희택)
에너지의 방향을 바꾸기는 쉬워도 원래 에너지가 없는 아이에게 에너지를 내게 하는 단계부터 가르치기란 무척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아이의 부족한 점이나 실패한 부분을 지적하면 비록 야단칠 의도가 없다 해도 아이는 비판당했다고 느낀다. (...) 비판당했다고 느낀 아이는 부모가 자기 마음을 몰라 준다고 생각하거나 이렇게 비판당하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생각하게 되어 야단맞은 아이의 경우처럼 소극적으로 변한다. (...) 실패하지 않으려고 소극적으로 행동하는 아이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다가 실패하는 아이가 훨씬 많을 것을 배울 수 있다. (68-69쪽)
* 에너지의 방향 바꾸기는 기질 개선론(체질론)이라 할 수 있음. (박희택)
제5절 관계가 소원해지면 아이를 지원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을 야단치면 그 사람과 거리가 생긴다. 아들러는 분노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감정이라고 했다. 이렇게 거리가 멀어지면 아이를 지원해 줄 수 없다. 그런데 부모는 아이를 야단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과 아이와의 관계를 멀어지게 한 다음에 아이를 지원해 주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가까운 관계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면 아이는 그 말을 귀담아 듣는다. 하지만 관계가 먼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아무리 옳는 말을 해도, 아니 옳은 말을 하기에 아이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더 들으려 하지 않는다. (71, 73쪽)
자신과 아이가 대등한 수평관계라고 생각한다면 아이를 야단칠 수 없다. (...) 어른이 아이를 대등하게 보지 않기에 아이를 야단치거나 모욕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어른끼리라면 상대에게 어떤 점을 고치라고 요구할 수는 있어도 다짜고짜 야단칠 수는 없을 것이다. (73쪽)
* 어른과 아이의 대등한 관계에 대해서는 제3잘 제6절에 다시 나옴. (박희택)
제6절 아이를 몰아붙이지 않는다
아이가 부모의 말에 수긍하면 부모가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부모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셈이 된다. 그러므로 아이를 끝까지 몰아붙이면 아이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죽어도 인정하지 않을 뿐더러 행동을 고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즉 아이가 자신이 한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행동을 수정하려고 할 때 부모에게 졌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부모는 아이에게 도망갈 여지를 남겨 줘야 한다. (75-76쪽)
아이가 자신을 야단치는 부모에게 대놓고 반항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 만약 부모에게 야단맞으며 자란 것을 아이가 원망한다고 해도, 이미 대놓고 반항하며 푼 상태이기 때문에 자신이 부모가 되었을 때 부모에게 당한 일을 자신의 아이에게 하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 만약 부모가 아이를 이기면 그 아이는 더 이상 부모 앞에서 대놓고 문제를 일으켜서 부모의 화를 돋우지는 않는다. 그 대신 뒷전에서 부모의 마음이 상할 만한 일을 하기 시작한다. 부모에게 복수하려는 생각에서다. (...) 아이에게 지는 한이 있더라도 관계가 호전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다. (76쪽)
* '대놓고 반항하며 푼 상태이기 때문에'는 '억눌린 상태로 남지 않았기 때문에'란 뜻임. (76쪽 괄호)
'부모에게 야단을 맞아서 자신감을 상실한 결과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학생이 해야 하는 과제 중 하나인 공부에 좌절한 아이는 결국 공부에 손을 놓아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감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런 아이는 부모에게 야단맞을 것을 자신이 해아 하는 과제를 하지 않기 위한 이유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는 아이의 도발에 넘어가 아이를 야단치지 말아야 한다. (78쪽)
제7절 야단치는 대신 할 수 있는 일
야단만 치고 어떻게 하면 좋은지, 뭐라고 하면 좋은지 가르쳐 주지 않으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다. 한편 아이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부모에게 전달할 때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행동이 반드시 바뀐다. (...) "그렇게 울지 말고 말로 부탁해 볼래?" (80쪽)
'~해 주실래요?' 또는 '~해 주면 좋겠어요'라는 식으로 의문문이나 가정문을 사용해서 상대방이 거절할 여지를 남기는 것이 핵심 포인트다. 명령형인 '~해' 또는 '~하세요'라는 말은 상대방에게 거절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러면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그 사람은 감정적으로 반발하게 된다. 한편 어른도 아이에게 부탁하는 방식으로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이와 어른은 대등한 관계이므로 아이에게 명령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81쪽)
제8절 스스로 실패한 책임을 진다
아이가 엎지른 우유를 부모가 대신 닦는다면 아이가 뭘 배울 수 있을까? 아이는 자기가 무엇을 해도 부모가 그 책임을 대신 져 줄 거라고 배울 것이다. (...) 우유를 엎지른 것은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한 실수다. 아마도 쏟을 줄 몰랐을 것이다. 이럴 때 야단치면 아이는 그저 위축될 뿐이며 그때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우지 못한다. (84쪽)
아이가 실수를 통해 이런 상황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배울 수 있다면 아이를 야단칠 필요가 없다. 먼저 최대한 원래 상태(상황)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앞으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게끔 대화를 나눈다. 이 두 가지를 하면 아이를 야단칠 필요가 없다. (84-85쪽)
제9절 차분하지만 단호한 태도를 취한다
육아와 교육을 할 때 야단치는 행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아이가 하는 일을 내버려 둘 수 없을 때는,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큰소리로 떠들어 남에게 피해를 줄 때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알려 줘야 한다. 하지만 그럴 때도 차분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아이를 대하면 될 뿐, 위압적이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다. 위압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반드시 분노라는 감정을 품고 큰소리를 낸다. 그리고 이렇게 위압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분노의 칼끝을 상대방에게만 향하지 않고 이리저리 휘두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마치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 같이 느끼게 된다. (87쪽)
반면 차분하지만 단호는 태도는 그 단호함이 주의를 주는 사람에게만 전달되므로 주변 사람들은 편하게 있을 수 있다. (...) 평소와 다름없는 태도로 문제행동을 그만두도록 말로 타이르면 된다. (88쪽)
제3장 아이를 칭찬하지 말자
제1절 야단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부모가 아이를 야단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대부분의 아이는 훨씬 활발해진다. 야단맞는 것은 아이에게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므로 부모가 아이를 야단치지 않으면 단지 그것만으로도 아이는 심리적으로 편안해진다. 부모는 아이를 야단칠 때 아이가 지금 한 행동뿐 아니라 과거의 일도 언급하며 아이를 비판한다. 이것은 야단치는 경우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95쪽)
부모가 야단치기를 그만두면 당황하는 아이도 있다. (...) 그렇다고 야단맞고 싶진 않지만 야단맞을 짓을 하지 않으면 부모가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아이는 어떻게 대하면 될까? 이런 경우에도 야단을 치지 않는 방식으로 아이를 대해야 한다. (...) 야단치면 아이는 부모가 자신이 한 행동 때문에 주목했다고 생각하고 그 행동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야단치는 것뿐 아니라 잠깐 눈길을 주는 등 아이에게 주목하는 모든 행동에 적용된다. (96-97쪽)
제2절 적절한 주목이란?
아이가 눈앞에서 울고 있을 때, 예를 들어 어린이집 선생님이 딸을 주목하지 않고 시계를 봤던 것과 같은 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면,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고 해서 초조하거나 짜증이 나지 않을 것이다. (...) '야단치지 말자, 주목하지 말자'라는 식으로 애쓰다 보면 야단치지 말자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아이를 주목하는 행위가 되고 만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어떤 행위의 적절한 면에는 주목하고, 그와 동시에 그 행위의 부적절한 면에는 주목하지 않으면 된다. (100, 102쪽)
아침에 늦잠을 잔 아이에게 "지금 몇 시인 줄 알아!"라는 식으로 일어난 시각에 주목해서 말하는 대신, 일단은 일어났다는 것 자체에 주목해서 말해 보자. "살아 있어서 다행이네." (102쪽)
* 아이의 부적한 면이 아니라 적절한 면에 주목하는 방법임. (102쪽 정리)
제3절 항상 문제를 일으키진 않는다
아무리 문제만 일으키는 것 같은 아이라 할지라도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 부모는 일찍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므로 이런 날에는 일찍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무심히 지나친다. 그러나 늦게 일어난 날에는 반드시 그 일에 주목해서 "지금 몇 시인 줄 알아!"라며 야단치는 것이다. (103-104쪽)
체벌에 반대하는 사람도 버릇을 가르친다는 대의명분으로 아이에게 손을 대거나 체벌은 하지 않지만 야단은 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한, 체벌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 야단치는 대신에 아이를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은지 알지 못하면 아이와의 관계를 더는 진전시킬 수 없다. (104-105쪽)
제4절 칭찬해도 효과가 없다
칭찬받으며 자란 아이는 칭찬하는 사람이 없으면 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복도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을 때 바로 줍지 않고 일단 주위를 둘러보는 아이가 있다. 이제부터 자신이 쓰레기를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을 누군가가 봐 준다면 쓰레기를 주우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아이는 만약 보는 사람이 없으면 쓰레기를 줍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아무도 없어서 칭찬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하는 일이 적절한지 아닌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 (107쪽)
야단맞으며 자란 아이가 부모나 선생님에게 야단맞기 싫어서 문제행동을 그만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칭찬받으며 자란 아이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칭찬받을 것 같으면 적절한 행동을 하지만, 자신의 판단하에 스스로 적절한 행동을 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부모에게 칭찬받고 싶고 칭찬받기 위해서 공부했던 아이는 이제 공부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 이렇게 성적이 나쁘면 부모로부터 버림받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럴 때 아이는 공부라는 과제를 앞에 두고 망설이거나 멈추게 된다. (107, 109쪽)
제5절 칭찬에 담긴 의미
칭찬한다는 것은 상위에 있는 사람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식으로 평가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 만약 대등한 관계라면 상대를 칭찬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야단치는 것에 대해서는 이 점을 명확하게 인지한다. 대등한 관계라면 상대를 야단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딘지 상대를 자신보다 아래라고 여기기 때문에 야단칠 수 있는 것이다. (112-113쪽)
그런데 칭찬하는 것에 대해서는 야단치는 것처럼 이 점을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칭찬도 수직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상대방을 능력이 없고 자신보다 아래라고 여기기 때문에 칭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도 자신이 인간관계에서 아래에 위치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지 않을까? (113쪽)
제6절 어른과 아이는 대등하다
지식과 경험, 책임질 수 있는 범위가 다르므로 어른과 아이는 같지 않다. 그러나 같지는 않지만 인간으로서는 대등하다. 어른은 아이보다 빨리 태어나 부모가 되었고, 다른 한쪽은 아이가 되어서 만난 것 뿐이다. 자신이 아이와 대등하다는 것을 알고 아이를 존중하며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면 아이를 완력으로 통제할 필요가 없으며 야단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또 아이를 아래로 내려다보고 치켜세우거나 칭찬할 필요도 없음을 알게 된다. (116쪽)
아이가 부모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 민감해지는 편이 좋지 않을까?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확신하지 못할 경우에는 아이에게 직접 "엄마(아빠)가 한 말을 듣고 어떻게 생각했니?"라고 물어 보는 것도 좋다. (117쪽)
제7절 인정 욕구에 관하여
승인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는 감정이지만 인정받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야기되는 폐해가 훨씬 많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 또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어도, 야단맞고 싶지 않은 아이 또는 칭찬받고 싶은 아이는 자신의 의사가 아니라 부모나 교사의 의사를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119, 121쪽)
아이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므로 부모에게 칭찬받기 위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단념하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가 자신이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 어릴 적부터 칭찬받으며 자라서 어른이 되고 나서도 인정욕구가 강한 사람은 육아를 몹시 힘들어 한다. (...) 신생아는 부모가 아무리 잘 보살펴 줘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이가 좀 더 자라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