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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김영배 ( 남 ) ♧ 2012/10/10(수) 03:20 (MSIE9.0,WindowsNT6.1,Trident/5.0) 111.118.36.103 1366x768 ♧ 조회: 327 | |
◆◆◆ 현충원에서 지나간날 회상 ◆◆◆ 추석 다음날, 4호선 동작驛에서 내려 4번 출구로 향하면 바로 驛舍 밖으로 나가게 되는데 육교위로 올라서기 전의 40 계단. 현충원 안에는 사진에서처럼 피라칸사(장미과)라고 불리우는 꽃이진 뒤에 앵두보다 작은 顯忠池에는 여전히 연꽃이 어여쁨의 자태를 뽐낸다. 그옆의 개천에 토종 잉어와 금잉어 물의 깊이는 60센티쯤...물이 얕아서 물고기들이 잘 - 26묘역으로 올라가는.. 현충탐 좌측 잔듸밭에 있는..백두산 천지의 모양과 같다는 天池石. 그자리에서 "半우향우" 하면 26 묘역으로 올라가는 길과 우측의 "둥그런 문 같은거..." 그 옆에 쓰여있는 안내문의 내용이 읽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자유의 나라 남쪽으로 필사의 탈출하여 조금 남은 여생을 한국에서 보내다가 타계하신 조창호 소위도 위에 문구에 해당되는 학도 의용군 였으리라. 위에 48위의 유골을 발굴 했으되 이름을 모르니...그러니까 군번없는 의용군 이다. 48위의 유골중...누군가는 이름이 있는 흔적이 있었을 터인데... 좀 성의를 갖고 자세히 살펴 봤으면 의용군 누군가는 개인화기라도..아님 대검이라도... 우리나라 사람은 예로부터 자신이 갖고 있는.. 신발에 라도 뭔가 쓰기를 ..흔적을 남기는 민족이며...듣기에 학도 의용군들이 대부분 17~18세 나이라는데...대부분 장가도 안 들어본 사람들 아닌가.! 너무도 불쌍타..!! 그러니까 의용군 모두가 총칼이 부족 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당시 그 부모님들의 애타는 심정으로..발굴단이 똑같은 마음으로 細密히 발굴을 했는지. 저들과 동창으로 살아계신분이 있으면...(당시 최하 17세이면)올해 79세... 어쩌면 혼인 했던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선배님들 고히 잠드소서. 서글픈 맘으로 26 묘역으로..... 추석 다음날여서 그런지...26묘역 부근에서 많은 車들이 내려 온다. 여기 26묘역 맨위 541번에 누워있는 이차세...경상도 상주 사람 .. 28연대 2중대에서 젤 먼저 전사한 전우다. 부대가 캄란에서 투이호아로 옮긴지 얼마 안되서... 나하고 동갑,65년도 1월에 입대. 군번은 1141. 나보다 입대 고참.당시 계급 상병. 내가 묘소를 찾을적마다 하는 소리." 전우는 잘있었나.영배가 왔네." 그리곤 나는 이렇게 말 한다. 전우가 있는 그곳은 어떤가..........거기에 뭐가 있나?!!..죽은뒤에 뭐 아는게 있나?!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나.여기 땅속에 있는 전우들 다 만나고...귀신 밤길간다고 밤 열두시부터 그 때 만나면 만난다는 .. 죽음의 셰계의 있는 뭔가의 흔적이라도 보이게나... 나도 이제 늙었어.머리털도 많이 빠지고 허애...자네도 살아 있으면 그렇겠지... 65년도 그해 겨울, gop에서 얼마나 추웠던가.정말 추웠어.거기 밤이면 호롱불 켜고 있던곳. 막걸리와 빵은 다 싹쓰리 해서 없고.뭔 사탕 같은 것만 있었지.그 때 생각하고 빵을 샀어. 정도로 먹고 싶었어...이북방송은 우리끼리 대화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꽝꽝 들리는 곳에서.. 그때,65년도 gop에서 추석에도 참 배가 고팠지..우리에게 매끼 지급 된다는 육군정량 600g 이라는거,그거 다 어딜가고 우린 그리도 배가 고팟는지. "근데 분대장은 올적마다 웬 큰 절이냐고?" "온 별소릴...그럼 이사람아 절을 해야지...자네가 살아있으면 절. 안해..그냥 껴앉지" 난 지금도 그 당시의 생각을 한다네...차암 내...
그러니까 동네 애들과도 한번도 쌈을 안해봤다면서...그런 자네가 뭔 전쟁을 하겠나..... 전쟁은 말야 참 무자비한거야...전쟁은 사람을 죽이는거라고...상대를 죽여야만 내가 사는거지...전쟁은 요행을 바라는게 아냐...자넨 비 전투원으로 가야 했어. 지금 자네가 있는곳에서도 쌈을 하나?거기는 컴퓨터로 계산 할 수도 없을만큼 사람이 많을 텐데.아하...그러니까 거기도 전쟁을 하겠구먼... 전우가 죽은지 ..그러니까 66년 12월 이니까....3개월 지나면 45년이나 되어 가는군... 전우야 잘있게나 또 올께..." 여기 26묘역 803번 황음주 경상도 사람...1소대 향도였지...그때,도깨비 2호작전 였던가? 거기가 차이산야. 죽음의 게곡이라고 불리우던 곳이기도 하지. 그 때, 5일간의 작전을 마치고 홍길동(철수)하던 중 였어...15시 30분 정도 됐었어. 집채만한 바위가 쌓여 山이된 계곡 였어.나와 자네가 나란히 내려갔었지. 그때 자네와 나와의 앞에 그 운명의 바위가 나타났어.슬라브 2층 크기는 됨직한 큰 바위이고 높이도 그 정도 됐지.금방 뛰여내릴 수 있는 높이가 아냐.. 그때 너랑 나랑 참 잘못했어.시간을 너무 끈 거야..사실 1분도 채 안되는 시간 였지만, vc가 우릴 겨누고도 남을 시간이지...그런데 내 좌측에서 막 뛰여 내릴려는 자네가 그냥- 썩은 통나무 처럼 밑으로 쳐 박히며 "따당 땅!!" 계곡을 울리는 소리가 났지. 자네 철모는 계곡 저 아래로 소릴 내가며 굴러가고... 그 때에 우리 뒤를 20보 정도 거리로 쫒아오던 중대장 경호병이자 무전병 조종학이가 뒤를 돌아보며 총을 겨누자 중대장이 "쏘지 말라우..아군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 소릴 들었어... 그러나 종학이가 바본가.그래도 입대전엔 여럿 거느리던 똘만이 대장였어.전쟁 경험없는 중대장 보다는 20배는 상황 판단이 빠른 사람야. 이미 차이산 전체의 작전상황을 꿰뚫고 있는 종학인 지체하지 않고 방아쇨 당겼지... 황해도에서 피난 왔다는 중대장과 종학인 계급의 차이는 많지만, 무전기에 의하면 우리 2중대 뒤에는 아군이 하나도 없다는 걸 종학인 알고 있었거든. 거리가 가까우니까 "까깡 깡!!" 메아리와 함께 m.1의 총성이 들리고... 그때, 총의 방향 뒤쪽을 보니까.종학이 총에 맞은 vc 한명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걸 모두가 봤지. 복수야 했지만...좀전까지 살아있었던 자넨...不歸의 客이 됐어. vc 가 겨눈 총구에 자네 뒤통수에 두발이 이마로 뚫고 나왔더군.그중에 한발은 철모 하사 계급장 옆으로 뚫고 나왔고...참으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 였어. vc가 만약에... 좌측에 있었던 자넬 겨누지 않고 나를 향해 쐈다면 ..........!!!!!! 지금 이자리에 위치가 서로 바뀌였겠지... 조국엔 어제가 추석 이라네... 40 여년전 보다는 많이 달라 졌지만 귀성객은 여전해.他地에서 근무하던 자식들이 고향엘 가는거야...고향 이라는 그 말이 참 정답지.자네도 살아 있으면 경상도 당.고향집에 있겠지. 자네가 있는 "저승" 이라는 곳 말야...그런 곳이 진짜 있는가? 그런데가 있으면 참 좋겠네. 그런데가 있어야 이곳에 전우들과 밤이면 만나고.모두들.. "낼모래 영배가 또 올거야.또 여기 앉아서 여기 26묘역에 있는 전우들과 한참을 중얼중얼 거리며 살아있는 전우들 얘기를 하겠지.그러다가 뒤돌아보고 또 돌아봐 가며.. 잘있게 담 일요일날 오겠네.그러며 가겠지. 아 !! 이 만생...3분대장..자넨 바로 내 옆에서 머리가 반이나 날아가 버렸어. 눈 깜짝할 사이에 ..피 범벅이된 자넬 안고 어쩔쭐 몰라 쩔절맸던... 나도 월남에서 있는 동안 참 못 볼것도 많이봤어. 그 당시 자네의 모습은 너무도 참혹했어.그 현장을 자네 가족이 안본게 천만다행일 정도로. 자넨 우리 소대에서 유일하게 대졸 출신였어.전주 사람이지... 3분대는 부분대장 이차세..그리고 분대장 였던 자네가 먼저 戰死해 유고가 되는 바람에.. 지리멸렬...자네의 시신을 담은 자루가 끌어 올려지고 정글위로 헬기가 사라질 때, 우리 2소대원 모두가 통곡을 했어.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지.. <멀기도 하네 ~~멀기도 하네 북망산이 멀기도 하네~~~에헤이 에헤이 헤이 87년쯤 40年生이신 자네 큰 형님과 44年生이신 자네 아우님을 묘소에서 만났어. 형님과 아우님이...이자리에서 墓碑를 쓰다듬으며 우시는데 정말 ... 살아온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됐었어. 같이 울었지.언제까지 이렇게 계속될런지...참 서럽고 슬프다네. 여기에 있는 김승래 전우는 최덕종.배무언 전우와 같이 근무했었다는데, 난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이곳에 올적마다 들려 그의 명복을 빈다. 3중대 1진 同期 나중에 시간이 되면 배소부에 관해서 써야 겠다. 그리고 사진도 같이 올려 봐야겠다. (67년 1차 귀국명단에 이름을 올린 나는...나의 1분대원들을 난,"나 몰라라" 하고 귀국을 했다. 나중에야...... 그 소식을 들었다.)
분대장직을 이어받은 기현이는 병장으로 진급됐고.나중에 보충된 병력 보다는 전투경험도 많고... 내가 내 1분대원들과 같이 있을 때,평상시에도 그랬지만..."낮에 움직일때는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개활지로는 가지마라!"정말 수백번을 얘기 했는데... 기현이가 작전중 좀 빨리 갈려고"개활지를 뛰다가 vc가 던진 방맹이 수류탄에 옆구리 한쪽의 내장이 모조리 튀여나와 겨우 거기까지 기어간 위생병을 보고.입으로 피를 토하고.헐떡거리며, 분대장(김영배)말씀이 옳았어."기.....복......아.-나---좀------살려라! 위생병 엄기복 전우는 이것저것 계산할것도 없이 상의를 벗어 둘둘말아 기현이의 터져나온 내장과 피로 범벅이된 옆구리를 틀어 막을제...기현이는 숨 졌다고... 아하..아...!! 나중에 살아서 돌아온 전우에게 그말을 전해들은 나는...그냥 천길 낭떠러지로 한없이 굴러 떨어지는...전우야 미안하다. 그리고 여기 또 한명의 내 1분대원.임인성 고창 사람. 1분대선 키가 젤 작고..작은대신 참 야무진 사람 였는데. vc의 저격에 이마에 두발맞고 ..말한마듸 못하고 즉사 했다니... 국민학교를 졸업할때 까지 남에게 맞기만해보고 한번도 남을 때려본적이 없었다는 착하디 착한 사람.vc를 생포했을 때, 늦은 시간이면 후송이 안되기 때문에 나무에 묶어서 다음날 까지 우리가 보호해야 하는데,임인성 전우가 그렇게 처리하곤.나한테 와서는, "분대장님 저 포로요.저렇게 놔두면 밤새 모기가 물 텐데요." 그리곤 모기약을 발라주는.. 그렇게 착한 전우가.....정말 죽어서도 늬들을 만날 수 만 있다면,내가 덜 죄스러울텐데. 진정 죽어서도 뭔가를 아는 그런 천당과 지옥이란게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화기분대원 키가크고..순진하고. 1년만에 귀국해보니 9사단 28연대는 월남에 있고 타 부대로 배속.(그럴 수 밖에) 근데 환영은 커녕 푸대접에 기합에...먹는건 조금도 고쳐져 있지않고 배는고프고. 그래서 재파 해서 분대장으로 있다가 작전중에 전사... 매년 현충일 전날이되면 혼자남은 여동생이 울산에서 밤열차를 타고 그리고 07시쯤 오라버니 묘소에 와서 준비해간 제수물 차려놓고 한시간이상 울다가 간답니다. 나는 현충일날 08시 이전에 갔다가 그녀를 만난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대관령에서 근무하며 못 만났는데,올해도 만나질 못했습니다. 어디 아프시지나 않은지 걱정됩니다. 그리고 이사람 지영길전우... 내가 대관령에 있을 때,오빠의 관한 얘기를 올렸던...난 그냥 지나치기만 했었는데. 오빠가 서울 현충원에 매장될때,그때 와 주셨던 오빠 전우분을 찾는다는... 물론 백용구 전우부터 알만한 전우님들이 적극 나서줬었던.특출한분.거기다 월남서 전사한 전우의 여동생 지선희님였으니. 여기서 선희님의 프로필일까 그거는 더 소개를 안해도 되고. 그래서 나는 26묘역에 있는 백마1진 전우들을 만나러 가는길에 지영길전우님 묘소에 들립니다.그런데 올추석 다음날에 들렸더니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애서 제가 대신 말 합니다. (순전히..그럴것이다...그런 생각으로 저의 뜻이니까 오해 마시기를.)
"안녕하십니까.? 살아돌아오신 전우님들께 살아돌아오지 못하고죽어서 땅속에 있는 전우가 인사드립니다.외로히 땅속에 있는 저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 무지무지하게 고향땅에 가고 싶습니다.제고향 부산엔 어머님이 계시거든요. 어머님은 활발하고 생활력이 강하신 분 입니다.우리 형제들이 자랄때 누구에게라도 맞고 들어오면 쪼매도 용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되는 겁니다. 어려운 집안이 아니었음에도 우리는 어머님에게서 "사람은 없을 때를 생각해야한다"며 늘- 절약을 배웠습니다. 그랬던 어머님도 제가 훈련소에 도착 입고간 옷을 받으시곤 방으로 들어가셔선 숨죽여 우셨 답니다.나중에 그얘길 동생들에게 듣고 저는 웃어넘겼지만 맘속으론 그러질 못했습니다. 저도 다른 전우님들처럼 .. 제대하면 원대한 게획이 있었습니다. 저는 집안의 맏이거든요.忠은 마쳤으니까 이제부턴 孝라.효를 동반한 장래의 계획을 세워서. 저에게도 장래를 약속한 아름다운 여인이 왜 없겠습니까.양가의 부모님게 허락받고 혼인해 아들딸 낳고 부모님께 효도하면서 오손도손..여동생들에겐 든든한 친정으로...남동생들에겐 <지氏집>버팀목으로 조상님들께 자랑스러운 후손으로 행복하게 살 자신이 있었습니다. 저에겐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습니다.지금 그애들이..내 동생들이 무지무지하게 보고싶어 가슴이 막 - 아프고 일천간장이 찢어지는듯 합니다. 제가 죽던 날,저는 천만뜻밖으로 어둡고 어두운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어두운길로가고 있지?" 의구심은 자꾸만 들었지만.저는 어머님이 계신 곳으로 가는 길이 아니란걸 느꼈습니다.그게 죽음의 길 이더군요. 제가 가는 이길이 가난한 나라의 경제를 일으키는데에 한몫울 했다지만..분하고.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앞섭니다. 꿈에도 그립고 우리나라 글자중에도 괜스레 가슴저리게 정다운 글자..어머니.....저의 전사 통지서를 받으신 어머님의 그때 심정이 어떠셨을까....."자식의 죽음은 가슴에 묻는다"는 말 처럼 "눈앞에 보이는게 없으셨을 어머니...그때에 가엾고 불쌍한 내어머니... 어머니...죄스럽습니다.그리고 어떻게라도 ..아니 한달에 한번만이라도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여동생들은 "친정에 대들보가 무너졌다"며...통곡을 했을 것이고... 저도 올해는 이가을이 떠나도록 울어볼까 합니다. 그리고..베트벳 전우님들 제 여동생 선희를 에뻐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요.(그렇게 말 하는듯 했습니다.)
위에 쓴글은 현충원에 다니다보니 땅속에 있는 사람들의 절규를 듣는듯 했습니다. 그당시 vc가 나를 겨눴다면 나는 벌써 40년도 넘도록 저렇게 땅속에 있을터이니 연민의 情에 지나칠수가 없더군요. 어떤 사람은 날보고 "뭣땜에 현충원에 그렇게 자주 다니냐고?" 그러나 그건 전쟁을 안해본 사람은 모릅니다.이해를 못하는거죠. 그것은 마치, " 딱지가 앉아 아문줄 알았던 상처에서 다시 피가 나듯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가버린 날은 돌아오지 않는것이 철측인것처럼..." 나로선 전투부대 분대장으로서 당시의 상황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잊혀지지 않으니..... 땅속에 있는 전우들로 인해서 나는 살아돌아온게 사실이니까. 나는 내가 국회의원모양 선거유세하러 현충원에 다니는거 아닙니다. (그동안 컴도 고장나고 요새는 우울증이 생겨서 글 올리는거 잘안되고 늦습니다.이해를..)
김영배: 죄송! 죄송 합니다. 자다가 깨서 박병장이 깰까봐 거실서 핸폰으로 댓글주신 세분께 감사의 댓글을 쓰다가 댓글이 틀려서 몇번 고치고 겨우 다 되었는데 아마 삭제를 눌렀나 봅니다. 전우: 이 글을 올리시면서 김전우님은 많은 눈물을 흘렸으리라 생각됩니다. 종균기자의 전투보도도 늘 있게 마련이고 전사학자의 전투기록도 전쟁과 함께 수없이 기록되지만 이렇게 현장에서 함께 했던 병사의 풀잎같은 죽음을 적나라하고 깊이있게 표현한 경우는 드물다고 봅니다. 감동적인 기록입니다. 김 전우님의 아픔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합니다. -[10/10-06:29]- 황진국: 영배성의 글은 다못읽어요.우리285전우회(28연대5중대)에 소대장중 자기병사가 동작동에 없는 사람은 슬슬 꽁무니빼고 안나와요. 나마 내소대원 세명 인황이 귀국하던날 전사한 조용일 하사 (고중사) 가 늘 눈에 선해서 . . . -[10/10-07:09]- 황진국: 나마는 나만으로 인황은 인환으로 수정합니다 죄송. -[10/10-07:12]- 김영배: 전우님 감사합니다.성함도 모르는데...제가 잘못해 놓구선 닷글을 다시 부탁 드려서 죄송합니다. -[10/10-07:53]- 김영배: 전우님 감사합니다.성함도 모르는데...제가 잘못해 놓구선 닷글을 다시 부탁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황진국 전우님.요새 많이 바쁘십니까! 시간이 나면 오늘 이라도 나랑 만나서 권영만 준장 묘소에 같이 가십시다.시간은 아무때라도 좋으니까 전화 주시기 바랍니다. -[10/10-08:01]- 최진사: 동작동 국립묘지의 말없는 비석들...내 짧은 인생길에 각인되어 있는 월남전 기억을 더듬으며 최진사도 현충원에 자주 가는 편입니다. 조용한 비석사이를 걸으면 땅밑 전우들이 말을 걸어 오는듯 합니다. 하나하나마다 슬픈 사연들이 있겠지만 김영배 전우님의 대화를 엿들으니 우선 눈물이 고입니다. 하이얀 눈들이 덮혀있는 동작동 현충원을 걷던 어느 겨울이 생각납니다. -[10/10-08:51]- 안명철: 전우님들의 전사 현장을 지척에서 목격하셨으니 4-50 여년이 흐른 현재에도 그 애통함이 가슴에 깊이 각인되셨으리라 생각됨니다. 저의 분대원들은 모두 큰 상이없이 귀국하여 다행이지만 같은 중대 화기소대 선임하사외 2명이 하룻밤새 인근 마을을 월맹군들이 점령한것을 모르고 정찰나갔다 적들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교전하다 아군의 장갑차로 구출되어 마을을 빠져 나오던 순간 B40로켓포를 맞아 장갑차 탑승자 모두 전사하는 장면을 목격하였기 저역시 전우들의 희생에 가슴 저림을 느끼며 늦었지만 올해는 꼭 현충원 26묘역을 찾아 그들의 넋을 위로하려 합니다. 전우애와 애국심이 남다르신 선배전우님 존경합니다. 건강 완벽하게 회복하시어 오래오래 후배 전우들의 표상이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0/10-09:09]- 박용환: 이 글말은 김선배님께서 넉넉한 인생경험과 인정으로 쌓아오신 노력에서 돌출되는듯 합니다만..배경 음악과 함께 하였다면 울음 소리까지 나오겠습니다. 아침부텀 눈가에 뭔가가 맺히는건..김 선배님!! 책임지세요.....으휴 -[10/10-09:25]- 김병장: 눈물이 앞을 가려 수건을 앞에 놓고 글을 읽습니다...오늘은 아침부터 맘이 울적하여 항상 씩씩한 마눌 눈치만 보며 조용히 보낼까 합니다...김영배 선배전우님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10/10-09:45]- 박재영: 백마1진 선배님의 참전 회상기를 읽는 내내 눈시울이 뜨거워지다 눈물을 훔치기까지 합니다 위 전우님의 말씀처름 어느 종군기자가 어떤 역사학자가 이보다더 사실적인 전쟁기를 기록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아침은 눈가에 맷힌 눈물을 훔치며 하루일를 시작합니다 -[10/10-09:51]- 김영배: 어제는 정오쯤에 박병장과 함쎄 과천 대공원엘 갔습니다.둘레길을 한바퀴돌고 몇개의 동물구경을 하고 난뒤에 밖으로 나와보니 16시경,아직 시간이 있어서 박병장은 집으로 가고 저는 4호선으로 동대문에 내려.창신동과 숭인동 일대에 있는 벼룩시장을 몇바퀴 돕니다.자신이 쓰다가 안쓰는 옷을 비롯해 가전제품등...잘만 만나면 좋은거 값싸게 살 수도,특이나 디카는 dslr 이나 렌즈등을(물론 중고 입니다.)남대문 중고상 보다 훨씬 싸게 살 수도 있습니다.130정도면 앞의 모양이 나팔관 식으로 벌어진 dsir 렌즈까지 포함해 구입할수 있더군요.저는 니콘 똑닥이 쿨픽스 p300 을 20만원에 중고로 구입(원래 새거는 38만원 정도) 사진이 잘 나오더군요. 그래서 dsir 디카 구입 꿈은 접기로 했습니다. 위에 글은 추석 다음날 이만생 전우까지지 댓글을 써놨다가 중단됐었는데,어제 아무 원고도 없이 거의 90분 만에 내리닫이로 부연 설명을 쓰고 吳字가 있나를 한번 훌어본뒤 그냥 세이브 했으니 미진한 내용을 다 - 쓰질 못했습니다. -[10/10-10:29]- 김영배: 그제밤 잠을 못자서 잠시 혼곤히 잠에 빠졌다가 오늘 02시에 깨어 박병장이 깰까봐 거실로 나가 핸폰으로 댓글을 썼다가 뭔가를 잘못해 제글이 몽땅 삭제가 됐었습니다.죄송 합니다. 이번 토요일 베트벳 번개팅에 1년도 훨씬 지나서 만나뵙게 된다니 반갑기 한이 없습니다. 안명철 전우님도 가슴아픈 기억이 있으시군요.죽은 사람을 잊지 못하는거 마음만 아프지만 그래도 어쩝니까! 박용환 전우님 저는 배경 음악 넣을줄 모릅니다.쥔장님이나 선희님이 맨델스죤의~승려들의 전쟁행진곡~을 넣어 주셨으면 합니다만,김병장.박재영 전우님.옛기억을 올려 마음을 울적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특이나 지난번 박재영 전우님께 신세를 많이져서 뭣으로 원수를 갚을까? 고민중입니다. -[10/10-10:50]- 최현득: 마음이 답답하고 울쩍해서 어제밤에 읽었다가 뎃글을 못달았습니다 생과사의 갈림길에 40년의 세월은 훌쩍흐르고 우리도 이제는 늙은이가 되었으니 귀가 열려 먼저간 전우들과의 대화가 가능할겁니다 우리 포대원도 26묘역에 있습니다 이들의 애간장 태우는 죽음이 우릴 국가유공자로 만들었구나 생각 합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토욜에 뵈올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다른행사가 있어서 6시가 넘어야 갈것 같습니다. -[10/10-11:10]- 이성윤: 김영배 전우님글, 눈물로 잘 읽었습니다. 베트벳에는 가끔 들어오지만 김영배 전우님 글은 늘 (초창기부터)맘에 와 닿는 군요? 제가 2중대 후배? 라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 기회가 있으면 옛날 이야기들을 나눌수가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0/10-11:53]- 박남철: 김영배 전우님의 애뜻한 전우애 충분히 이해합니다. 2억만리 타국에서 함께싸우다 전사한 전우님들의 안타까움은 우리가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잊을수가 없겠지요. 항상 올리시는 글 감명깊게 보고 있습니다 건강 하세요 -[10/10-14:03]- 선희: 영배님 저의 댓글이 날라가버렸군요.영배님의 오빠가 하셨을듯한 그말씀 .. 똑 같습니다. 오빠의 그마음이나,,사랑하는 가족들..어머니의 통곡속.......그날의 기억은 지울수가 없답니다. 최진사님이 하아얀 눈이 내렸던날의 현충원 오빠를 보러 가 주셨던날들과..전우님들과 함께했던 나날들이 오빠의 최고의해 였습니다. 비록 현충원에 계시지만 이렇듯 행복한 오빠 입니다. 항상 감사함을 가슴에 묻고 지냅니다. 고맙습니다 -[10/10-17:50]- 홍종만 : 새벽에 비온뒤 어느덧 개었습니다,이제 秋夕도 지나고 오늘은 中華民國의 雙十節이고 季節은 어김없이 늦가을로 접어드네요...銅雀洞 國軍墓地를 돌아보시면서, 그옛날 1966년 派越1陣 白馬28聯隊 小銃分隊長 金英培 戰友님의 가슴속에 맺힌 恨과 그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져며옴을 느끼지않을수 없습니다...그리고 베트벳을 통해서 알게된 지선희.지선화님과 母親어른, 집안의 기둥이었던 지영길 戰友님의 이야기는 그시절을 되돌아 보게 하는군요... -[10/10-18:19]- 홍 진흠: 홍하사도 댓글을 써 둔것 같은데~ 지금은 전혀입니다. 너무 지난날에 얶메이지 마시고 ~우울증은 오로지 자신만이 고칠 수 있습니다. -[10/10-20:06]- 류지현: 무엇으로 ,어덯게 말씀드려야 금쪽같은 전우님을 먼저보내신 영배행님의 슬픈 앙금을 걷어 드릴까요? 이젠 행님이 현충원을 자주 찿어셔서 진한 전우애의 감동을 지하에서 계시는 임들께서도 진하게 느끼실 것입니다. 저도 침투하기전에 작난치고 C-레이션 안주로 맥주한캔을 나눠 먹어며 정를 나누던 놈이 팀별 작전후 돌아와 그 친구 야전침대가 체워지지 않고 비워져 있을땐 화가 치밀고 사물을 정리하여 고국으로 보낼땐 놈들을 씨를 말리고 껍질을 벗기고 싶었습니다만, 영배행님! 너무 마음에 부담을 줄이시고 행님의 건강을 위해서 맘 편히 현충원에 다니시길 원합니다. 그래야 지하에 계시는 전우님 께서도 편하실 것입니다. 만날때 경례 올리겠습니다. -[10/10-20: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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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12년도에...베트벳에 올렸던 나의 글 입니다.
당시 전우님들의 댓글과 함께 올립니다.
이제 시대는 변해서 사람들은 당시의 우리나라 경제 상태를 모르고 요즘의 잣대로
월참자들을 비난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지나간날, 목숨이 경각에 있었던 순간을 잊지 않고자 합니다.
늙은이는 추억을 먹고 산다지면 그 추억을 가슴에 담고 스스로
즐길 일이지 뫃여 앉기만 하면 왕년에 세계편화를 위해 크게 활동했던
양 목소리를 높이는건 부질없는 생각 아닐까요??
요 근래는 젊은이들 앞에서 80전에 늙은이 행세하긴 부끄럽지
않던가요??
내가 볼때는 귀하는 월남참전시 보다는 "월남전과 한국"에서 진현
이를 위해 문고리 3인방으로 몸을 크게 던졌던건 인정하리다.....
두분 선배님들 건강하시지요?
백마전우회 선.후배 모두에게 읽히는 곳입니다.
제 생각이 잘못이기를 바라며 노년에 진짜 좋은 추억으로 남기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