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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감영도병(圖屛)」: 경기감영 관아 그림
◈ 의주로의 문화유적을 찾아
◇ 경기감영(京畿監營) 터 : 종로구 평동 164번지
- 1896년에 수원으로 이전할 때까지 자리한 경기감영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가 민정·군정·사법 업무와 관하의 수령을 지휘·감독했던 관청이 경기감영(京畿監營 : 경기도청에 해당)이다.
경기감영은 조선초 1393년(태조 2)에 설치된 후 건양 원년(1896)에 수원으로 옮겨갈 때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 경기감영은 일명 ‘기영(畿營)’이라고도 했다.
경기감영에는 총 책임자로 관찰사가 포정사(布政司)에서 집무했고, 도사(都事)와 판관(判官) 같은 수령관(首領官)이 배치되어 관찰사의 업무를 보좌하였으며, 이 외에도 비장(裨將)이 있어 군사․치안 관계 업무를 처리하였다. 또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 등 6방으로 이루어진 영아전(營衙前)이 있어서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다.
19세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12 화폭의 관아도인 「경기감영도병(京畿監營圖屛 : 보물 제1394호)」에는 ‘기영’이라는 편액이 걸린 경기감영의 솟을대문과 본관건물인 ‘선화당(宣化堂)’은 물론 관아의 측간과 작은 창고까지 묘사되어 있다.
이 관아도에는 경기감영 주위에 돈의문(서대문)·영은문(迎恩門)·모화관(慕華館)·연지(蓮池)·활터를 비롯하여 백성들의 기와집과 초가집, 약방·신발가게·쌀가게·주막 등이 있었다.
최근에 적십자병원 일대를 재건축하여 D타워 고층빌딩이 들어섰는데 그 지하 1층에는 발굴현장이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19세기에 그린 돈의문 밖 경기감영과 그 주변의 경관과 지형, 시설물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기록화이자 일종의 회화식 지도인 「경기감영도병」 모사본을 전시하고 있다.
* 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 경기감영터 [京畿監營址] (두산백과)
◇ 천연정[(天然亭), 청수관] 터 : 서대문구 천연동 13-1번지
- 경기 중영(京畿 中營)과 일본공사관이 사용하던 서지(西池)의 정자 터
서지(西池)는 조선초 1407년(태종 7)에 돈의문 서북쪽에 모화관(慕華館)을 세우면서 누각 남쪽에 판 연못이다. 연못의 규모는 상당히 커서 길이가 380척, 폭 300척 깊이 2~3장이었다. 연못이 완성된 뒤에는 개성 숭교사(崇敎寺) 연못에 있는 연뿌리를 배로 실어다 심었다.
이 연못은 반송정 옆에 있었으므로 반송지(盤松池)라 하였으나 서대문 밖에 있다 하여 흔히 서지라고 불렀다. 동지(東池), 남지(南池) 중에서 서지가 제일 크고 넓었으며, 연꽃이 무성하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서지의 연꽃이 무성하면 서인이 득세하고, 동지의 연꽃이 무성하면 동인이 득세하였으며, 남지의 연꽃이 무성하면 남인이 득세하였다고 한다.
서지 연못가에는 반송정과 원관정이 있었으며, 연못 서쪽 언덕에는 경기감영 소속 중군 병력의 주둔지인 경기 중영(京畿中營)이 있었다.
경기 중영 구내에는 천연정(天然亭)을 중심으로 서상헌·청원각 등의 여러 건물들이 즐비하고, 넓은 못 위에는 연잎, 연꽃이 피어 절경을 이루었다. 후일에 천연정을 중심으로 한 경기 중영의 건물을 일본공사관으로 사용하면서 ‘청수관(淸水館)’이라 부르게 되었다.
청수관은 조선이 외국에 제공한 최초의 공관(公館)이다. ‘청수관’이라는 이름은 경기 중영 정문 앞에서 시원한 샘물이 솟아났으므로 이에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천연정은 18세기 중엽에 서지(西池) 서쪽에 세웠던 정자이다.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집(阮堂集)』에 따르면 천연정은 무악재를 오가는 관원들을 맞이하고 전송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연회장이었다고 하며, 주객과 손님들이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면서 태평세월을 뽐내고 자랑한 곳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천연정은 경기 중영(京畿 中營)의 부속 건물로 사용되다가 강화도조약(1876년)에 따라 조선 정부는 청수관을 일본 공사관으로 제공하였다.
조선말에 구식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1882) 때 일본인들이 구식군인과 군중들에게 공격을 당하자 하나부사 일본공사와 공사관원들은 청수관(淸水館)에 불을 지르고, 인천을 통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 당시 서지 연못 부근의 여러 건물이 불에 타서 천연정만 남았다.
서지 자리는 일제 때인 1919년에 메워져서 죽첨보통학교가 들어섰다가 광복 후에 금화초등학교로 바뀌었고, 천연정 자리에는 현재 동명여자중학교(1921년 개교)가 들어서 있다.
◇ 모화관(慕華館) 터 : 서대문구 영천동 268-5번지
-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객관(客館)
현재 영천동 69번지(전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 독립문 남쪽에는 조선말까지 모화관(慕華館)이 있었으나 개항 후에는 이곳에 독립관(獨立館)을 세웠다.
모화관은 조선시대에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을 영접하던 곳이다. 조선초 태종 7년(1407)에 개경의 영빈관(迎賓館)을 모방하여 서대문 밖에 건립하여 이름을 모화루(慕華樓)라 하였다. 모화루 앞에는 영은문(迎恩門)을 세우고, 세종 12년(1430)에 이를 확장, 개수하여 모화관이라 개칭하였다. 그리고 모화관 남쪽에 큰 연못을 파고 연(蓮)을 심었을 뿐 아니라 양어장을 만들음으로써 백성들의 원성을 자아냈다.
조선시대에 이 부근은 넓은 공한지여서 군사들의 조련 및 무과(武科) 시험장소로 쓰였다. 또한 가뭄이 들면 이곳과 창덕궁 후원, 경회루에서 도롱뇽을 물독에 넣은 후 어린이 수십 명이 버드나무 가지로 물독을 치고, 큰소리로 외치면서 비를 빌었다.
중국 사신이 조선에 오면 2품 이상인 원접사(遠接使)를 의주(義州)에 보내고, 또한 2품 이상의 관리를 선위사(宣慰使)로 삼아 서울로 오는 도중의 5개 처에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여,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였다.
중국 사신이 서울에 도착하면 이 모화관에 드는데, 이 때 조선의 왕세자는 그의 앞에 나아가 재배(再拜)의 예를 행하고, 모든 관리들도 재배의 예를 행한다. 이 때 관리들의 절반은 중국 사신이 도착하기 전에 모화관에 나아가 대기하였다. 또, 사신이 돌아갈 때는 관리들이 품계에 따라 두 줄로 섰다가 일제히 재배례를 행하였다.
청일전쟁 이후에는 모화관은 폐지되고, 1896년에 서재필(徐載弼) 등이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이 해에 모화관을 독립관이라고 개칭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회관으로 사용하였다
독립협회는 독립관을 본부로 삼아 이곳에서 「독립신문」을 발행하는 등 대한독립을 기념하여 왔으나 일제 때 무참하게 헐렸다.
◇ 독립문 : 서대문구 현저동 941(사적 제 33호)
- 조선말에 독립협회가 사대주의의 잔재를 제거하고, 자주독립을 주창하기 위해 세운 문
독립문은 1896년(건양 원년) 11월 21일에 착공되어 1898년(광무 2년) 1월에 완공되었다. 이 문은 독립협회를 조직한 서재필(徐載弼)박사가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울 것을 뜻있는 사람들에게 발의하자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 독립문 건립계획이 구체화되었고, 국왕의 동의를 얻게 되었다.
독립문 건립비용은 당시 돈으로 3,835원(圓)이 들었다. 그중 2,300원을 먼저 지급하고, 보조금 수입을 독립공원 건립과 독립관 개수에 사용하였으므로 독립문 건립비용이 부족하였다. 이에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통하여 여러 차례 보조금 헌납을 호소한 결과 세자(순종)가 거금 1,000 원을 하사하는 외에 이름 없는 백성들로부터 고관대작에 이르기까지 전국에서 2,000여 명이 희사한 기탁금으로 완공하였다.
이 문은 45×30cm 크기의 화강암 1,850개로 이루어졌는데 그 규모는 높이가 14.28m, 너비는 11.48m가 된다. 이 문의 한 가운데에는 아치식 문이 있고, 내부 왼쪽에는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문의 위 부분에는 난간이 장식되어 있다.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형으로 한 이 문은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설계하였고, 공역은 한국인 기사 심의석(沈宜碩)이 담당하였으며, 인부들은 중국인 노무자를 고용하였다.
이 당시 독립협회는 외국에 의존하는 정책에 반대하고, 우리나라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주장하는 개화 지식층(開化知識層)이 설립한 단체이다. 이 단체는 서재필․이상재․윤치호 등이 중심이 되어 1896년 7월~1898년 11월까지 활동하였다. 독립협회는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사대 외교의 상징인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을 세움으로써 사대주의의 잔재(殘滓)를 제거하고, 자주독립을 주창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애국심을 북돋으려 하였다.
서울시는 1979년에 독립문~금화터널~경인고속도로 입구까지의 「성산대로」 개통을 위하여 독립문을 해체한 후 북서쪽으로 70m 떨어진 현재 자리에 옮겨서 복원하려고 하였다. 이에 많은 학자들이 반대하였으나 이를 강행하였다.
◇ 행촌동 양호(楊鎬)거사비(去思碑): 종로구 사직로 9번지
- 정유재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행촌동 양공거사비는 일명 ‘양호비(楊鎬碑)’, 또는 ‘양공타루비(楊公墮淚碑)’로 불린다.
임진왜란이 끝난 1598년(선조 31)에 조선정부는 현재 중구 서소문동 58번지 17호 자리에 선무사(宣武祠)를 짓고, 양호거사비를 세운 뒤 생존한 명나라 병부상서 형개(邢玠)와 양호(楊鎬 : ? ~ 1629년)의 위패(位牌)를 모셔놓았다. 선무사는 매년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냈던 생사당(生祠堂)이었다.
선조 30년(1597 : 정유년) 1월 15일, 왜군 20만 명이 재침하자 명나라 신종(神宗)은 형개(邢玠)를 총독으로, 양호를 경리조선 군무(經理朝鮮 軍務)로 삼아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으로 향하게 하였다.
양호는 1597년 7월,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에 도착했다. 이 당시 왜군이 남원을 함락시키고 북상하여 그 선봉이 서울 가까이 왔다는 보고를 받자 행군을 재촉하여 9월 3일, 서울에 들어와 어수선한 민심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마귀(麻貴) 제독으로 하여금 날래고 건장한 군사를 뽑아 왜군을 막게 하고, 기병 2천명을 뽑아 뒤에서 돕게 하였다. 그리고 선조와 함께 동작진(銅雀津)으로 건너가 방어책을 살폈다. 며칠 후 9월 7일, 명나라 장수들이 충청도 직산(稷山)에서 대승을 거두어 왜군의 기세를 꺾었다.
이어서 양호는 형개(邢玠) 총독에게 글을 보내 먼저 울산에 진을 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쳐서 적의 한쪽을 끊고, 마귀 제독과 4만의 군사를 남하시켜 순천에 진을 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치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양호는 12월 8일, 용감한 군사 수백 명과 함께 조령(鳥嶺)을 넘어 의성을 거쳐 12월 20일, 경주에 이르러 장수들과 합류했다. 12월 22일에 왜군 진지 10리 밖에 진영을 꾸미고, 소수 군대로 왜군을 유인하자 왜군은 정예병으로 추격하므로, 마귀 제독과 함께 협공하여 왜군 1천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튿날 몸소 싸움터에 나가 왜군의 진지 두 곳을 빼앗자 가토 기요마사는 도망갔다. 양호는 마귀 제독 등과 가토 기요마사가 점령한 울산성을 공격해 전투를 벌였지만 1천 명이 전사하고, 3천 명이 부상 당하는 피해를 입고 함락하지 못하자 철수했다.
그러나 양호는 이 전투에서 100여 명이 전사했다고 명나라 황제에게 거짓 보고를 했다가 부하 장수 정응태의 탄핵을 받아 황제를 속였다라는 죄목으로 1598년에 파직을 당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러자 조선 정부는 양호에게 무훈장군이란 칭호를 주고, 명나라 황제에게 그의 공적을 찬양한 뒤 정응태의 상소는 잘못된 무고(誣告)라고 밝히자, 명의 황제는 양호를 재등용하여 요동도어사(遼東都御使)로 삼았다.
조선정부는 정유재란 때 양호 장군의 도움을 고맙게 생각하여 광해군 2년(1610)에 양호의 영정(影幀)을 명나라에서 구해 와서 선무사에 걸어놓고, 제사를 지냈으나 조선말인 1908년 7월에 폐지하고, 그 이듬해에는 건물마저 헐어버렸다.
양호거사비의 비문을 보면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양공(楊公)의 이름은 호(鎬)요, 호는 창서(蒼嶼)이니, 하남인이다. 1580년에 진사가 되었다. 신종 25년(1597)에 경리조선(經理朝鮮)의 명을 받고 조선에 왔다. 가을에 왜적이 3도를 유린하고 서울로 진격해 오자, 공(公)이 평양에서 단거(單車)를 몰고 진중(陣中)에 나아가 여러 장수들을 격려하여 왜적을 물리쳐서 조선을 보전케 하였다. 겨울에 또다시 몸소 출전하여 왜적의 사기를 꺾었고, 장차 다시 출정하여 적을 섬멸하려든 차에 얼마 후 비방을 받고 삭적(削籍)되었다. 조선 백성들이 공(公)이 조선에서 떠남을 막으려 했으나 머무르게 할 길이 없기에 눈물을 흘리며, 이 비를 세운다.」
양호거사비는 조선시대에 4차례 걸쳐 건립되었다.
1598년(선조 30), 선무사에 첫 번째 비를 세우고 나서 두 번째로 1610년(광해군 2)에도 독립문 부근의 무악재에 세웠는데 이 비는 훼손된 관계로 현재는 볼 수 없다.
그 후 세 번째로 1764년(영조 40)에 무악재의 양호거사비가 낡았으므로 이 비석과 똑같은 7척 높이의 비석을 선무사 앞뜰에 세웠다. 그리고 무악재의 낡은 비도 선무사에 옮겨 놓아 최근까지 두 개의 비가 서 있었다. 그런데 선무사의 양호거사비는 1974년에 남가좌동의 명지대학교로 이전했다.
네 번째 세운 양호거사비는 현재 종로구 행촌동 대신중고등학교 교정에 서있다.
이 비는 조선말 1835년(헌종 1) 봄, 화재로 모화관 부근의 양호거사비 비문이 훼손되자 호조판서 장지연(張止淵)이 옛 비문을 모각(模刻)하자고 건의하였다. 이리하여 네 번째 양호의 비를 1835년에 홍문관 대제학 신재식(申在植)과 용양위 호군 신위(申緯)가 양호의 무공을 기리는 비명(碑銘)을 모화관 동쪽(현재 대신중고등학교 자리)에 세웠다.
그 뒤 1896년에 독립협회에서 독립문을 건립하면서 이 비를 매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60여 년 뒤인 1955년 7월, 대신고등학교를 신축할 때에 이 비가 발견되어 현재 자리에 세워 놓았다.
행촌동 양호거사비의 높이는 266cm, 비신(碑身) 234cm, 비폭(碑幅) 94cm, 비의 두께 32cm이다. 이 비는 남가좌동의 명지대학교로 이전된 양호거사비와 달리 받침돌에 연꽃잎 무늬도 새기지 않고, 이무기가 조각된 이수(螭首) 부분도 생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