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문 >
대구 매일신문에서 주최한 ‘2019 매일 시니어 문학상’ 논픽션 부문에 당선된 ‘육군 이등병’이라는 작품입니다.
학창 시절과 1974년 입사 후 1980년 5월까지 6년간의 연구소 근무 경험을 담은 자서전입니다.
40~50년 전이지만, 당시 방위산업체 연구소에서 군용 장비 국산화를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상세히 보여주는 글이라 함께 공유하고자 올립니다.
전체 123매 분량이라서 7회로 나누어 매일 올리려고 합니다.
**
육군 이등병
이재영
1. 나의 학창 시절
나는 서부 경남에 있는 인구 20여만 명의 진주시에서 초, 중, 고교를 다녔다.
국민학교(초등) 시절에 공부를 잘해서 반장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던 나는 문학, 미술, 음악에도 소질이 있어 팔방미인 소리를 들으며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당시는 중학교도 시험을 치르고 들어갔는데, 한 학년이 60명씩 8학급인 480명 전체 9등의 성적으로 입학해서 중학교 1학년 때도 반장을 했다.
진주시에는 일제 강점기 시대부터 개천절이 되면 지방신문인 ‘경남일보’가 주최하는 ‘개천예술제’라는 지방 문화제가 열렸다. 촉석루가 있는 남강에 유등을 띄우는 행사와 가장행렬, 소싸움 등의 축제와 각종 문화 행사가 며칠씩 열렸는데,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구경꾼이 몰려들곤 했다.
나는 5학년 때 개천예술제 백일장에 출전해 ‘가랑잎’이라는 시제를 동시로 써내어 초등부 참방(4등) 상을 받았고, 중학교 1학년 때는 ‘아침’이라는 시로 선배들을 제치고 중등부 차하(3등) 상을 받았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창(窓)이라는 시제의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1등) 상을 받았다.
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교내 사생대회를 열어 전교생이 한 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교문 밖으로 나가도 되었다. 나는 높은 계단 위에 나무 대문이 있는 양철지붕의 아담한 집과 그 뜨락의 석류나무를 파스텔화로 그려서 제출했는데, 1학년 특선(1등)이 되어 액자에 넣어진 내 그림이 한동안 복도에 걸리게 되었다. 그 바람에 미술부에 억지로 들어가 부원들과 함께 촉석루 근처 공원에 수채화를 그리러 몇 번 가기도 했다.
중학교 때 나보다 한 학년 위면서 아버지의 지인 아들인 형이 있었는데, 학교 악대부에서 알토 색소폰을 불었다. 멋져 보인 그 형의 권유로 나는 악대부에 들어갔고, 거의 매일 방과 후에 한 시간씩 연습했다.
1학년 때는 작은북을 쳤고, 2학년부터 길쭉한 관악기인 트롬본을 불었다. 그런데, 개천예술제 때 가장행렬이 우리 중학교에서 출발했고, 우리 악대부가 행렬의 앞장에 서서 3km가 넘는 시가지를 행진했다. 학교가 도시의 끝자락에 있으면서 운동장이 가장 컸던 때문이다.
그 당시 부유한 집안의 공부 잘하는 애들은 서울의 경기고, 양정고, 용산고나 부산에 있는 부산고, 경남고 등의 유명한 고등학교로 유학 갔는데, 우리 중학교에서는 매년 한 명 정도가 경기고에 합격했다.
아버님이 초등학교 교장이며 부모님이 연로하셨던 나는 그냥 진주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입학시험 석차는 7학급 420명 중에 19등이었다.
중학교와 턱이 진 운동장을 마주하고 한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 교문도 같이 사용하는 고등학교는 집에서 4km 거리여서 고교 때는 자전거를 타고 통학했는데, 새벽같이 일어나 학교 앞에 있는 태권도 도장에 가서 한 시간 동안 땀 흘리며 운동하고 와서 아침을 먹고 다시 등교했다.
그 당시 경남의 다른 명문고교인 마산고등학교와 경쟁을 하고 있었는데, 매년 서울대 합격생이 재학생은 10여 명으로 재수생을 합하면 열댓 명 수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서 고교 3학년부터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를 겨냥한 ‘특별반’이 운영되었는데, 정원이 문과와 이과를 합해 40명이고, 중간고사나 특별고사 전체 성적에 따라 아래쪽은 드나들었다.
평균 25위권을 유지했던 나는 건축과를 지망했는데, 대입 원서를 쓸 무렵 담임선생님이 서울대 공과대 건축과는 안 되고 농과대라면 무슨 학과든 써주겠다고 했다. 한 명이라도 합격 가능성이 있는 학과에 지원시키려는 학교 방침을 잘 알고 있어 집에 와서 그대로 말씀드렸다.
환갑이 지난 어머니는 “니를 농사짓게 하려고 공부시킨 줄 아나?”라며 방바닥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셨고, 천장만 바라보시던 아버지는 서울 다른 사립대학교 건축과를 지원하느니 차라리 가까운 부산대학교 공과대에서 제일 좋은 학과를 선택해서 지원하자고 하셨다.
다음날 부산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있는 둘째 자형에게 연락하여 확인시킨 결과, 마침 자기 제자가 지원한다면서, 생긴 지 3년째인 전자공학과가 제일 좋다고 해서 나의 진로는 생소한 전자공학과로 결정되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에 시집갔던 둘째 누님은 그때 아들 셋과 넷째 딸을 낳아 잘 기르고 있었다.
2. 방위산업체 입사
서울대를 목표로 선택과목을 화학으로 선정했던 나는 부산대 전자공학과에는 화학이 없어 갑자기 선택과목을 생물로 바꿔서 거의 한 달 만에 학습하느라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하고 40명 정원에 아슬아슬하게 턱걸이로 겨우 합격했다.
그때 의예과를 제외한 1학년생 전원을 ‘교양학부’라 칭하여 학과별 구분 없이 섞어서 50여 명씩 한 반으로 나누어 교육했다. 공대생이 대부분인 우리 C7 반에도 여학생이 일곱 명 있었는데, 수학과와 생물과 등이었다.
70학번으로 입학한 나는 청운의 푸른 꿈을 금정산 산기슭에 있는 넓은 교정에서 마음껏 펼치며 1, 2학년을 즐겁고 보람차게 보냈다.
검도부에 들어가서 죽도로 손목, 머리, 허리 치느라 왼쪽 발바닥에 물집이 일곱 번이나 생겨 터지도록 운동했다.
2학년을 마치고 2월 초에 군에 입대하여 강원도 원주에서 복무했는데, 부모님이 65세 이상인 독자로 6개월 만에 의가사 제대를 하게 되어 휴학은 1년만 하고 3학년에 복학했다.
그래서 학과 동기생 40명 중에 방위병으로 복무를 마친 W와 함께 후배들에 섞여 수업받은 관계로 3, 4학년은 놀지 않고 제대로 공부할 수 있었다.
4학년 말인 10월 초에 금성전기(주)라는 회사에서 학과장님 앞으로 졸업예정자 한 명을 무시험 특채로 추천해 달라는 의뢰가 왔다.
방위병 복무했던 W는 나와 고교 동창이고 공과대학 전체 차석으로 입학했던 수재라 교수님이 추천해서 보냈는데, 면접 보고 와서 하는 얘기가 ‘금성사’ 자매회사이긴 한데 오래된 목조건물 회사가 너무 작아서 마음 내키지 않는다며 자기는 금성사 공채시험에 응시하겠다고 했다.
솔직히 대기업에 공채시험으로 들어갈 확신이 없던 나는 교수님께 대신 가겠다고 말씀드리고, 2층 계단이 삐거덕거리는 ‘럭키 치약’ 만들던 공장에 가서 면접을 봤다.
그런데 가서 보니까, 정부의 자주국방 계획에 따라 럭키금성그룹에서 군용 통신 장비를 제조할 방위산업체로 2년 전에 설립한 그룹 계열사였다.
일본의 NEC(Nippon Electric Co: 일본 전기)와 합작이었고 체신부에 교환기도 납품하고 있으며 연말에 경기도 오산에 짓고 있는 새 공장으로 이전해 갈 계획이라고 했다.
후덕하게 생기고 연세가 있어 보이는 개발부장님과 두 명이 면접을 봤는데, 부장님 자기도 진주고 출신이라며 무척 반가워했다.
나는 주저할 이유가 없어 입사하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밝혔고 며칠 뒤에 출근했다.
바지에 칼주름을 잡은 연하늘색 정장에 하얀 도쿠리(목 폴라)를 받쳐 입고 휘파람을 불며 출근해보니 나와 함께 입사한 동기가 한 명 있었는데, 서울대 전자과 출신이라고 했다.
개발부에는 서울대 전자과 출신인 부장님 밑에 과장은 없고 ‘기좌(技佐)’라고 불리는 대리급 두 명이 있었고, K 대리님은 서울대 전자과 출신이며 다른 한 분은 인하대 기계과 출신이었다.
그 아래로 개발부 연구원이 5명인데, 전자과 출신이 4명이고 기계과 출신이 1명이었다. 그러니 개발부 직원은 부장님과 우리 신입사원 두 명을 포함해서 전부 10명뿐이었다.
나는 기사(技士)라는 명찰을 달고 2층 구석의 칸막이로 구획된 작은 사무실인 ‘개발부’에서 근무했다. 본사는 서울에 있고, 공장 전체 종업원은 150명 정도 되는데 당시 공순이라 불리던 조립부서의 여자 종업원이 다수였다.
창고 같은 작은 식당에서 교대로 점심을 먹었고, 젊은 남자 직원들이 손바닥만 한 마당에서 배구를 하다가 공이 담장을 넘어 개울에 빠지면 건지러 가지도 못하고 깔깔거려 웃으며 바라보고만 있었다.
회사는 작아도 전반적인 분위기는 무척 좋은 느낌이었다.
첫댓글 위에 '개천예술제'가 일제강점기'부터 열렸다고 쓰였는데 오기입니다.
해방 후 1949년에 제1회가 개최됐고, 1950년 6.25동란, 2020년 코로나사태로 제외되고 작년에 제70회가 열렸습니다.
인재이십니다.
네, 난정 작가님. 주OO 작가님 외에 인재 1명 있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