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랑이야기
No.1
어느 봄날인가 살구꽃도 만발하였다. 그 애와 그네를 타고 있다. 아침 햇살이 뽀얀 얼굴을 더 희어지도록 만들어주었다. 단발머리는 흔들거렸다. 종소리가 땡, 땡, 땡 풍금소리에 맞추어 함께 노래를 불렀다. 지금은 들을 수 없는 고왔던 그 애의 목소리였다.
NO.2
학교 문 열면 새파란 뽕나무 서너 그루 서있다. 작은 운동장이 또한 보인다. 언제나 그러했듯 계집애들은 공중에 오르다가 뛰어내리는 고무줄 놀이를 자주하였다. 색색의 치마들이 펄럭거린다. 누구의 속살인지 보일 듯 말듯하다. 내 일기日記 속에는 누구의 얼굴만이 예뻤다고 희미하게 씌어져 있었다. 낡은 글씨들이 웃는 듯하다.
NO.3
전학 온 그 아이는 키가 무척이나 작아보였다. 책을 또렷또렷하게 잘 읽었으므로 우리는 그 아이를 아기종달새라 불렀다. 가끔씩 책 읽던 그 아이가 생각난다. 내가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은 좋아했던 것 같다. 서촌의 새집에 들러 오늘은 종달새 같은 것도 보고 싶다. 아마, 그곳엔 아기종달새는 없을 거다.
NO.4
어떤 이름을 가진 그 아이는 옥이와 순이와 자매처럼 다정해 보였다. 모두가 싱그러운 사과나무 같았다. 어떤 아이의 뺨은 언제나 붉으스레 달아있었다. 이상하게도 내 맘을 뜨거워지도록 만들어주곤 했다. 새봄 돌아와 어떤 아이 처녀가 되었을 때 그 아이의 이름은 다시 부를 수가 없었다. 아주 멀리 말도 없이 떠나갔다고 한다.
NO.5
구부러진 논길 따라 걷다보면 숲을 지나 작은 오솔길이 뻗어있었다. 꽃무늬 새겨진 단벌의 원피스와 뛰고 있었다. 뛰고 있는 아이는 산 소년이 되고 싶은 나였다. 잠자리채 강아지 그려진 손가방 들고 단벌의 원피스는 계속 웃기만 한다. 무척 해맑아 보인다. 함께 있는 내가 무척이나 좋았었다고 어른이 되고 나서야 수줍음 타며 이야기 했다.
NO.6
꽃밭에는 모든 아이들이 둘러서있다. 병아리처럼 옹기종기 다홍색의 채송화가 소복하다. 노란 개나리꽃은 신나게 물감을 풀어놓았다. 꽃구경 한답시고 누가 누구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다. 그래! 저 꽃이 너무 예쁘다. 아니야! 이 꽃이 더 예쁜 것 같아! 누가 누구의 손 위에 꽃 한 송이 꺾어주었다. 지금도 꽃구경 한답시고 누가 누구의 얼굴만 떠올리려고 한다.
NO.7
작은 연못엔 금붕어 몇 마리뿐이다. 봄비가 부스스 나리기도 하면 연못은 조그만 실바람에 떨기도 했다. 그 애가 연못가에 와 금붕어에게 말했다. 우산 씌워줄까? 비 맞지 말아라! 비 맞지 말아라! 내 하얀 우산 씌워줄게. 그 애는 아름다운 사랑의 시간을 금붕어에게 주고 있다. 그 애의 정원에도 몇 마리의 금붕어가 살고 있다고 한다. 어여쁜 그 애였다. 티 없는 사랑 느낄 수 있도록.
NO.8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 애가 언덕위에서 넘어져버렸다. 뭉게구름과 무지개 따라가다가... 내일은 운동회날! 무릎은 파랗게 멍들고 있다. 이제 그 애는 울지 않는다. 내일이 오면 함께 손잡고 달리는 꿈, 하늘에 그려 보는 것 같다.
NO.9
수업이 끝나면 모두가 사라지고 아무도 그곳에 없다. 그 애 이름 두 글자 손가락으로 쓴다. 고운 모래 위에... 너 거기서 뭐하니? 그 아이의 목소리. 해가 기울 때면 그 아이의 목소리가 불현 듯 들려오기도 한다.
NO.7
“가시밭에 한 송이 흰 백합화 고요히 머리 숙여” 봄 소풍 노래자랑이다. 꽤나 잘 불러 제일이 되었다. 12가지의 색연필이 선물이다. 그 애가 나보다 더욱 좋아했나보다. “우리 집에 풍금이 있어, 우리 집 정원에 백합도 피어있어”, “언제 우리 집에 놀러와! 꼭 놀러와!”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걸까? 그 애가 보고 싶을 때는 흰 백합화가 피어날 때다.
NO.10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 우리들의 합창은 맑고 아름다웠다. 사랑하는 모든 아이들은 음악 시간을 매우 좋아했다. 쪽배를 타고 노를 저으며 푸른 하늘 은하수를 따라 노래 부를 줄 알았다.
NO.11
반바지 내리고 나무 뒤에서 짠물을 쏟아 내었다. 그 애가 얼핏 다가와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야! 그 애가 깔깔 웃고 있다. 그리곤 달아나 버린다. 반바지를 입는 날이면 지금도 씁쓸한 웃음이 절로 나온다. 쾌활했던 꽃과 같은 그 애도 비슷한 바지를 입어보았을까? 몰래 다가가 뽀얀 엉덩이 살짝 볼 수 있을는지...
NO.12
“...................................”
NO.13
졸업식은 울음바다다. 흰 눈이 평평 나린다. 계집아이들은 모두가 훌쩍거렸다. 내가 누구를 가장 좋아했었나? 누구는 엉뚱한 생각만 하고 있다. 두 눈이 퉁퉁 부어올라 그가 그 계집아이 같다. 하룻밤 뒤척거리면 정말로 누구를 좋아했는지 알 수 있게 될까? 너무도 생생한 계집아이들이었는데... 그때를 그리면 가슴이 조금은 뭉클하다.
NO.14
“이것도 먹어봐!” 알사탕 하나를 내게 주었다. 그 아이의 볼은 벌써 달처럼 둥글다. 철쭉은 붉게 물들어 있다. 아주 달콤하다고 조그만 입술을 꼭 다문채로 있다. 손에 받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하얀 박하사탕이다. 그 아이가 건네준 하얀 박하사탕! 지금도 가슴 한편에서 끈적거리고 있다.
NO. 15
동창회는 작은 풍경화였다. 30년 전이므로 20대 중반이 되어서이다. 처음이었고 아직은 더 이상은 가지를 못하였다. 지나간 기억에 취하여 모두가 그리움들을 풀어놓았다. 모두가 모두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이제는 모두가 서로서로 사랑도 하고 싶단다. 오래된 일들이지만 함박눈이 내렸던 그 겨울의 작은 동창회는 지워지지 않고 있다. 오늘도 아름다운 날들이 흘러가고 있다.
서촌 김 원
한국문인선교회 회장, 현대시인협회 회원, 한강문학 편집고문, 국제PEN한국본부 회원, 세계여행작가협회 감사, 시전집:《빛과 사랑과 영혼의 노래》, 시집:《물방울 꽃들은 바다로 흐른다》,연작시집:《한강》, 《광화문 전설》, 《농무》, 《지구인에 대한 견해》, 한용운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