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公孫丑問曰 夫子加齊之卿相 得行道焉 雖由此霸王 不異矣 如此 則動心否乎 孟子曰 否 我四十不動心 공손추가 묻기를, “선생님께서 제나라 공경과 재상이 되어 도를 행할 수 있게 된다면 비록 이로 말미암아 패자(覇者)와 왕자(王者)가 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으리니 그렇다면 마음을 움직이겠습니까?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하니,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마흔 살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라고 하셨다. 相, 去聲.
○ 此承上章, 又設問孟子, 若得位而行道, 則雖由此而成霸王之業, 亦不足怪. 任大責重如此, 亦有所恐懼疑惑而動其心乎? 이는 윗 장에 이어서 다시 가정하여 맹자에게 묻기를, “만약 지위를 얻어 도를 행한다면, 곧 비록 이로 말미암아 패도와 왕도의 업을 이룰지라도 또한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아니다. 맡은 임무가 크고 책임이 무겁기가 이와 같다면 또한 두려워하고 의혹하는 바가 있어 그 마음에 움직임이 있겠느냐?”고 한 것이다.
雙峯饒氏曰 集註恐懼疑惑四字 雖是說心之所以動 然恐懼字是爲下文養氣張本 疑惑字是爲下文知言張本 要之 不疑惑然後能不恐懼 故集註論心之動 則以恐懼居先 論心之所以不動 則又以無所疑惑居先 쌍봉요씨가 말하길, “집주의 恐懼疑惑이라는 4글자는 비록 마음이 동요하는 까닭을 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恐懼라는 글자는 아랫글에 나오는 養氣의 張本(근원, 발단)이 되고, 疑惑이라는 글자는 아랫글에 나오는 知言의 발단(張本人)이 되는 것이다. 요컨대, 의혹하지 않게 된 연후에야 능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집주에서 마음의 동요를 논할 적에는 곧 두려움을 앞세웠고,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까닭을 논할 적에는 곧 의혹하는 바가 없다는 것을 앞세웠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四十强仕, 君子道明德立之時. 孔子四十而不惑, 亦不動心之謂. 사십은 강사(强仕: 벼슬할 만한 강한 사람)인데, 군자의 도가 밝고 덕이 세워지는 시기다. 공자가 40에 불혹이라 하였는데, 이 역시 부동심을 일컫는 말이다. 朱子曰 盡心知性 無所疑惑 動皆合義 無所畏怯 雖當盛位行大道 亦沛然行其所無事而已 何心動之有 易所謂不疑其所行者 蓋如此 而孔子之不惑 亦其事也 公孫丑非謂孟子以卿相富貴動其心 謂覇王事大 恐孟子擔當不過 有所疑懼而動其心耳 不知覇王當甚閑事 주자가 말하길, “마음을 다하여 천성을 알면 의혹하는 바가 없고, 움직임이 모두 의로움에 부합하면, 두려워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비록 성대한 자리에 올라서 大道를 행할지라도, 역시 거칠 것 없이 도도하게 그 일삼음이 없는 바를 행할 따름이니, 무슨 마음이 동요하는 것이 있겠는가? 주역에서 이른바 ‘자기가 행하는 바를 의혹하지 않는다는 것’이 대체로 이와 같은 것이고, 또한 공자님의 불혹도 역시 이러한 일이다. 공손추는 맹자가 경과 재상이란 부귀함으로 인해 그 마음이 동요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패업과 왕업은 그 일이 크기 때문에, 아마도 맹자가 담당해낼 수 없어서 의혹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있기에, 그 마음이 동요될 것이라고 말하였을 따름이니, 패업이나 왕업은 매우 한가한 일에 해당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道明屬知言 德立屬養氣 쌍봉요씨가 말하길, “道가 밝다는 것은 말을 아는 것에 속하고, 德이 섰다는 것은 氣를 기르는 것에 속한다.”라고 하였다.
陵陽李氏曰 明則不疑 立則不懼 然未有不明而能立者 故知言養氣 雖二事並進 而其序必以知言爲先 孔子不惑 則自不動矣 능양이씨가 말하길, “밝으니 의혹하지 않고, 섰으니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밝지 않고도 능히 설 수 있는 자는 아직 없었다. 그러므로 知言과 養氣는 비록 두 가지 일을 나란히 증진하지만, 그 순서는 반드시 知言을 우선으로 한다. 공자께서는 의혹하지 않으셨으니, 저절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孔子四十而不惑 在三十而立之後 德立而道明 誠而明者也 孟子所以四十不動心者 先知言而後養氣 道明而後德立 明而誠者也 운봉호씨가 말하길, “공자께서는 나이 사십에 미혹되지 않으셨는데, 이는 나이 삼십에 선 후에 있었으므로, 덕이 서서 도가 밝아진 것이니, 정성스러움으로 인해 밝아진 사람이다. 맹자가 나이 사십에 부동심이 된 까닭은 먼저 말을 안 후에 氣를 기른 것으므로, 도가 밝아진 후에 덕이 선 것이니, 밝음으로 인해 정성스럽게 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東陽許氏曰 疑懼卽是動心處 集註却言 有所恐懼疑惑而動其心 似疑懼又在動心之外者 蓋心本虛靈靜一 能明天下之理者 此也足以應天下之事 亦此也 今理有所不能明而疑 事有所不能應而懼 然則疑懼乃動心之目 心因疑懼而動 而疑懼非心之所動也 동양허씨가 말하길, “의혹과 두려움은 곧 마음을 동요시키는 부분이다. 집주에서는 도리어 말하길, 의혹하고 두려워하는 바가 있어서 그 마음을 동요시킨다고 하였으니, 마치 의혹과 두려움은 또한 마음을 동요시키는 것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체로 마음은 본래부터 허령하고 고요하며 전일하므로, 능히 천하의 이치를 밝힐 수 있는 것도 이것이고, 충분히 천하의 일에 대응할 수 있는 것도 역시 이것이다. 지금 이치에는 능히 밝힐 수 없어 의혹하는 바가 있고, 일에는 능히 대응할 수 없어 두려워하는 바가 있으니, 그러한즉 의혹과 두려움은 마침내 마음을 움직이는 항목인 것이다. 마음은 의혹과 두려움으로 인해 동요되지만, 의혹과 두려움은 마음이 동요되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2 曰 若是 則夫子過孟賁遠矣 曰 是不難 告子先我不動心 (공손추가) 말하기를, “이와 같다면 선생님은 맹분보다 훨씬 뛰어나십니다.”라고 하니,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어렵지 않으니 고자(告子)도 나보다 먼저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셨다. 賁, 音奔.
○ 孟賁, 勇士. 告子, 名不害. 孟賁血氣之勇, 丑蓋借之以贊孟子不動心之難. 孟子言告子未爲知道, 乃能先我不動心, 則此亦未足爲難也. 고자는 이름이 불해다. 맹분은 혈기의 용맹함인데, 공손추는 아마도 이를 빌려 맹자가 부동심의 경지에 이른 어려움을 찬탄한 것 같다. 맹자는 고자가 아직 도를 알지 못함에도 도리어 나보다 앞서서 부동심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으니, 이것은 그리 어렵다고 보기에 충분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賁齊人 能生拔牛角 秦武好多力士 賁往歸之 맹분은 제나라 사람이다. 능히 쇠 뿔을 생으로 뽑을 수 있었다. 진나라 무왕이 많은 力士들을 좋아하자, 맹분은 가서 그에게 귀의하였다. 朱子曰 孟子是義精理明 天下之物 不足以動其心 告子之不動心 是硬把定 是麤法强制而能不動 非若孟子酬酢(酌)萬變而不動也 주자가 말하길, “맹자는 義에 정밀하고 이치에 밝았으니, 천하의 어떤 사물이라도, 그 마음을 흔들기에 부족하였다. 고자의 부동심은 억지로 붙잡아 안정시킨 것으로서, 거친 방법으로 강제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니, 酬酌(술잔을 주고받음)함이 아무리 변해도 움직이지 않는 맹자와는 같지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南軒張氏曰 孟子以集義爲本 告子則以義爲外 故在孟子 則心體周流人欲不萌 而物各止其所者也 在告子 則心制其欲專固凝滯而能不動者也 남헌장씨가 말하길, “맹자는 集義를 근본으로 삼았고, 고자는 의를 밖에 있는 것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맹자에게 있어서는 心體가 두루 흘러 인욕이 싹트지 않아서 만물이 각자 제자리에 가서 멈추는 것이고, 고자에게 있어서는 마음이 그 욕심을 제어하여 오로지 굳게 응결되게 만들어 움직이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告子外義 未爲知道 然未四十時已能不動心 其不動心 又先於孟子 以此觀之 則不動心未足爲難 可知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고자는 의를 밖에 있는 것으로 여겼고, 아직 도를 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나이 사십이 못되었을 때, 이미 부동심을 할 수 있었고, 그 부동심도 또한 맹자보다 앞섰으니, 이로써 살펴본다면, 부동심은 어렵다고 여기기에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告子强制其心而能不動 孟子有定見有定力而自然心不動 此處孟子亦姑借告子以淺說耳 신안진씨가 말하길, “고자는 억지로 그 마음을 제압하여 움직이지 않게 할 수 있었고, 맹자는 일정한 견해와 일정한 힘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곳에서 맹자는 또한 잠시 고자를 빌려서 쉽게 설명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3 曰 不動心有道乎 曰 有 (공손추가) 말하기를,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에 방법이 있습니까?” 하니, (맹자가) 말씀하시기를, “있다.“
程子曰: “心有主, 則能不動矣.” 정자가 말하길, “마음에 한결같이 주장함이 있으면,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有主二字包得闊 下文黝舍曾孟皆是有主 但有精粗之分 신안진씨가 말하길, “有主(일관된 주장이 있음, 줏대가 있음)라는 2글자는 포함하는 바가 매우 넓다. 아랫글에 나오는 북궁유, 맹시사, 증자, 맹자 모두 줏대가 있었으나, 다만 정밀하고 거친 구분이 있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4 北宮黝之養勇也 不膚撓 不目逃 思以一毫挫於人 若撻之於市朝 不受於褐寬博 亦不受於萬乘之君 視刺萬乘之君 若刺褐夫 無嚴諸侯 惡聲至 必反之 북궁유가 용기를 기르는 방법은 피부가 찔려도 움츠리지 않으며 눈동자가 찔려도 피하지 않으며, 털끝만큼이라도 남에게 좌절하면 마치 저자나 조정에서 종아리를 맞는 것처럼 여기고, 헐렁한 옷을 입은 미천한 사람에게도 모욕을 받지 않으며, 또한 만승의 군주에게도 모욕을 받지 않아서 만승의 군주를 찌르는 것을 미천한 사람을 찌르는 것같이 보아, 두려워하는 제후가 없어서 나쁘다고 하는 소리가 들리면 반드시 보복하였다. 黝, 伊糾反. 撓, 奴效反. 朝, 音潮. 乘, 去聲.
○ 北宮姓, 黝名. 膚撓, 肌膚被刺而撓屈也. 目逃, 目被刺而轉睛逃避也. 挫, 猶辱也. 褐, 毛布. 寬博, 寬大之衣, 賤者之服也. 不受者, 不受其挫也. 刺, 殺也. 嚴, 畏憚也. 言無可畏憚之諸侯也. 黝蓋刺客之流, 以必勝爲主, 而不動心者也. 북궁이 성이고, 유가 이름이다. 膚撓란 피부가 찔려서 떨리고 굽히는 것이다. 目逃란 눈이 찔려서 눈동자를 굴리는 것이다. 逃는 피하는 것이다. 挫는 모욕(챙피)을 당하는 것이다. 갈은 모포이고, 관박은 넓고 큰 옷이니, 천한 자가 입는 옷이다. 不受者란 그 모욕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刺란 죽인다는 말이다. 嚴은 두려워하고 거리끼는 것을 말한다. 즉, 가히 두려워하고 거리낄만한 제후가 없다는 말이다. 북궁유는 아마도 자객의 부류로서,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주재로 삼아 부동심의 경지에 이른 사람인 듯하다. 慶源輔氏曰 集註云黝蓋刺客之類 以其言所謂視刺萬乘之君若刺褐夫而知之也 以必勝爲主 亦以其言而知之 惟其心以必勝人爲主 故無有尊貴 視之一如匹夫 不受其挫 必反報之 경원보씨가 말하길, “집주에서 이르길 북궁유는 자객의 부류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만승지군 찌르는 것을 갈부 찌르는 것처럼 하였다는 그 말로써 알 수 있는 것이다. 반드시 이기는 것을 일관된 주장으로 한다는 것 역시 그 말로써 알 수 있는 것이다. 오직 그 마음이 반드시 남을 이기는 것을 일관된 주장으로 삼기 때문에, 존귀한 사람도 없어서, 그들 보기를 필부와 동일하게 보기 때문에, 그들의 모욕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드시 보복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惡聲必反 不專謂諸侯 於褐寬博萬乘皆然 쌍봉요씨가 말하길, “나쁜 소리가 들리면 반드시 갚아준다고 하였는데, 오로지 제후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갈관박이나 만승지군에 대해서도 모두 그러하였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東陽許氏曰 一毫挫於人 謂所辱者至小也 不受者 必報之也 不惟必報於賤者 雖貴者亦必報之 惡聲至必反之 謂不惟辱來必報 雖言小不善 亦必報也 동양허씨가 말하길, “一毫挫於人이라는 것은 모욕을 당한 것이 지극히 작음을 말한 것이다. 不受라는 것은 반드시 보복한다는 것이니, 단지 반드시 천한 사람에게 보복할 뿐만 아니라, 비록 귀한 사람일지라도 또한 반드시 보복한다는 것이다. 나쁜 소리가 들려오면 반드시 갚아준다는 것은 단지 모욕이 오면 반드시 보복할 뿐 아니라, 비록 말이 조금 선하지 못할지라도, 역시 반드시 보복한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5 孟施舍之所養勇也 曰 視不勝猶勝也 量敵而後進 慮勝而後會 是畏三軍者也 舍豈能爲必勝哉 能無懼而已矣 맹시사의 용기를 기르는 방법은 이기지 못할 상대를 보기를 이기는 것과 같이 여겨서, 적군을 헤아린 다음에 전진하고 이기기를 생각한 다음에 맞붙어 싸우는 것은 적의 삼군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내가 어찌 반드시 이기겠는가, 두려움이 없을 뿐이다. 舍, 去聲, 下同.
○ 孟, 姓. 施, 發語聲. 舍, 名也. 會, 合戰也. 舍自言其戰雖不勝, 亦無所懼. 若量敵慮勝而後進戰, 則是無勇而畏三軍矣. 舍蓋力戰之士, 以無懼爲主, 而不動心者也. 맹은 성이고, 시는 발어사며, 사는 이름이다. 會란 회합하여 싸운다는 말이다. 맹시사는 그 싸움을 비록 이길 수 없더라도 역시 두려워하는 바가 없다고 스스로 말한 것이다. 만약 적을 헤아리고 승리를 숙려한 후에 나아가 싸운다면, 이것은 용기가 없고 삼군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맹시사는 아마도 힘써 싸우는 전사로서 두려움이 없음을 주재로 함으로써 부동심의 경지에 이른 사람인 듯하다.
朱子曰 量力廬勝是畏三軍者 此舍譏別人 舍自云 我則能無懼而已 問施發語聲 曰 此古註說 後面只稱舍 可見 問有何例可按 曰 如孟之反周之僑尹公之他之類 주자가 말하길, “제 힘을 헤아리고 승리를 고려하는 것은 삼군을 두려워하는 짓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맹시사가 다른 사람을 기롱한 말이다. 맹시사는 스스로 말하길, 나는 곧 두려움이 없게 할 수 있을 따름이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누군가 묻기를, “孟施舍의 施자는 말할 때 하는 소리입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이것은 옛날 주석에서 한 말이다. 뒷면에서는 그저 舍라고만 호칭한 것에서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누군가 묻기를, “살펴볼 만한 어떤 사례가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예컨대 맹지반, 주지교, 윤공지타 같은 부류가 있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註云舍蓋力戰之士 亦以其言而知之也 惟其心以無懼爲主 故不問其徒之衆寡 我之勝否 遇敵則戰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집주에서 말하길, ‘맹시사는 대체로 역전의 용사인 듯하다’고 하였는데, 이 또한 그 말로써 알 수 있는 것이다. 오직 그 마음은 두려움이 없는 것을 일관된 주장으로 삼았기 때문에, 자기 무리의 많고 적음과 나의 승리 여부를 불문하고서, 적을 만나면 바로 싸웠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黝舍皆以心有主而能不動 一則主於必勝 一則主於無懼 皆是麤猛之不動心 孟子此處且敷演粗說 신안진씨가 말하길, “북궁유와 맹시사는 모두 마음에 줏대가 있음으로써 움직이지 않을 수 있었는데, 하나는 곧 반드시 이김에 주안점을 두었고, 하나는 또 두려움이 없음에 주안점을 두었으니, 모두 거칠고 사나운 부동심이다. 맹자는 이 부분에 대하여 또한 부연하여 대충 말하였다.”라고 하였다.
東陽許氏曰 黝舍不動心 本又在告子之下 公孫丑又以孟賁比孟子 故孟子亦以勇士之類言之 동양허씨가 말하길, “북궁유와 맹시사의 부동심은 본래 또한 고자의 아래에 있었다. 공손추는 또한 맹분을 가지고 맹자와 비교하였기 때문에, 맹자도 역시 용사의 부류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6 孟施舍似曾子 北宮黝似子夏 夫二子之勇 未知其孰賢 然而孟施舍守約也 맹시사는 증자와 비슷하고 북궁유는 자하와 비슷하니 이 두 사람의 용기는 누가 나은지 알 수 없거니와, 그러나 맹시사는 스스로를 지킴에 요령이 있다.
○ 黝務敵人, 舍專守己. 子夏篤信聖人, 曾子反求諸己. 故二子之與曾子, 子夏, 雖非等倫, 然論其氣象, 則各有所似. 賢, 猶勝也. 約, 要也. 言論二子之勇, 則未知誰勝; 論其所守, 則舍比於黝, 爲得其要也. 북궁유는 남을 대적하는 것에 힘썼고, 맹시사는 자신을 지키는 것에 오로지 하였다. 자하는 성인을 돈독하게 믿었고, 증자는 자신에게 돌이켜 구하였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증자와 자하와 더불어 비록 같은 등급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 기상을 논한다면 각자 비슷한 곳이 있다. 賢은 낫다는 것과 같다. 約은 요약됨이다. 두 사람의 용기를 논한다면, 누가 나은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지키는 바를 논한다면, 맹시사가 북궁유에 비하여 그 요체을 얻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한 것이다.
慶源輔氏曰 黝務敵人 謂專以必勝於人爲主也 舍專守己 謂專以我無所懼爲主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黝務敵人이란 오로지 반드시 남에게 이기는 것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고, 舍專守己는 오로지 내가 두려워하는 바가 없는 것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子夏篤信聖人 朱子曰 這箇雖無事實 但看他言語 如日知其所亡 月無忘其所能 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看他此處 又把孟子北宮黝來比 便見他篤信聖人處 누군가 자하가 성인을 돈독히 믿었다는 것에 대하여 물었다. 주자가 말하길, “이것은 비록 그러한 사실은 없지만, 다만 그가 한 말을 살펴보아야 한다. 예컨대 날마다 자기에게 없는 것을 알아가고, 달마다 자기가 능한 것을 잊지 않는다거나,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하게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한다는 것 등등이 있는데, 그의 이러한 부분을 살펴보고, 또한 맹자와 북궁유를 가지고 와서 비교한다면, 곧 그가 성인을 돈독하게 믿었던 부분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曾子反求諸己 便是聖人與他說話 他也未敢便以爲然 必要求諸己以審其理而後信 子夏篤信聖人 則以聖人之言爲必可信 不問說得是與未是 便信了 쌍봉요씨가 말하길, “증자가 자기에게 돌이켜 구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곧 성인께서 그와 더불어 말을 하면, 그는 감히 곧바로 그렇다고 여기지 못하고, 반드시 자기에게 구함으로써 그 이치를 살핀 다음에 믿었다는 것이다. 자하가 성인을 독실하게 믿었다고 한 것은, 바로 성인의 말씀이면 반드시 믿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서, 말한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불문하고, 곧바로 믿었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如何是孟施舍守約處 朱子曰 北宮黝便勝人 孟施舍却只是能無懼而已矣 如曰視不勝猶勝也 此是孟施舍自言其勇如此 孟子言此二子之勇 未知其孰勝 但孟施舍所守得其要也 蓋不論其勇之孰勝 但論其守之孰約 且二子之似曾子子夏 直以其守氣養勇之分量淺深 爲有所似耳 豈以其德哉 누군가 묻기를, “어떤 것이 맹시사의 지킴이 요약되었다는 부분입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북궁유는 곧 남을 이겼지만, 맹시사는 도리어 그저 두려움이 없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예컨대 말하길, 이기지 못할 것을 이길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맹시사가 자기의 용맹함이 이와 같다고 스스로 말한 것이다. 맹자는 말하길, 이 두 사람의 용기 중에서 누가 나은지 알지 못하지만, 단지 맹시사가 지킨 것이 그 요약됨을 얻었다고만 하였다. 대체로 그 용기에 있어서 누가 나은지 논하지 않았고, 다만 그 지킴에 있어 누가 요약되었느냐만 논했던 것이다. 또한 두 사람이 증자와 자하와 닮았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야말로 그들이 氣를 지키고 용기를 기르는 차이로써 그 얕고 깊음을 헤아려서 닮은 바가 있다고 여겼던 것일 따름이니, 어찌 그 덕으로써 말한 것이겠는가?”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孟施舍取必於己 其氣象似曾子之反求諸己 北宮黝取必於人 其氣象似子夏之篤信聖人 此是論二子之勇有所似 非論其是非等級也 然將二子所守來比量 則孟施舍守其在我者爲得其所守之要耳 쌍봉요씨가 말하길, “맹시사의 취함은 반드시 자기에게서 하였으니, 그 기상이 증자가 자기에게 돌이켜 구하는 것과 닮았고, 북궁유의 취함은 반드시 남에게서 하였으니, 그 기상이 자하가 성인을 독실하게 믿은 것과 비슷하였다. 이것은 두 분의 용기에 닮은 바가 있음을 논한 것이지, 그들의 시비와 등급을 논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두 분이 지킨 바를 가지고 비교하고 헤아려본다면, 맹시사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지킨 것이 그 지키는 바의 요체를 터득함이 되었다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凡言守約 不是守這約(約要也) 言所守者 得其要也 守得其約 則守字活 言守定這約 則守字死了 무릇 守約이라는 것은 이 約(約은 약속이다)을 지킨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바가 그 요약됨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킴이 그 요약됨을 얻었다는 것은 守자가 범위가 큰 것이며, 이 약속을 굳게 지킨다고 말한다면, 守자는 범위가 쪼그라드는 것이다. 7 昔者曾子謂子襄曰 子好勇乎 吾嘗聞大勇於夫子矣 自反而不縮 雖褐寬博 吾(豈)不惴焉 自反而縮 雖千萬人 吾往矣 옛날에 증자께서 자양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용기를 좋아하는가? 내가 일찍이 큰 용기에 대해 스승님께 들었는데, 스스로 반성하여 정직하지 못하다면 비록 헐렁한 옷을 입은 미천한 사람이라도 내가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스스로 반성하여 정직하다면 비록 천만 명의 사람일지라도 내가 가서 대적하겠다.’고 하셨다. 好, 去聲. 惴(췌), 之瑞反. ○ 此言曾子之勇也. 子襄, 曾子弟子也. 夫子, 孔子也. 縮, 直也. 「檀弓」曰: “古者冠縮縫, 今也衡縫.” 又曰: “棺束縮二衡三.” 惴, 恐懼之也. 往, 往而敵之也. 이는 증자의 용기를 말한 것이다. 자양은 증자의 제자다. 부자, 선생님이란 공자를 말한다. 縮이란 곧다는 말이다. 단궁에 이르길, “옛날에 관을 바르게 꿰맸지만, 지금은 옆으로 꿰맨다.”고 하였다. 또 말하길, “관을 묶는 것이 곧게 2개, 옆으로 3개다.”라고 하였다. 惴는 그들을 두렵게 만든다는 말이다. 往은 가서 대적한다는 말이다.
衡與橫同 引二說證縮爲直 衡은 橫과 같다. 두 마디 말을 인용하여 縮이 곧다는 뜻임을 입증하였다.
朱子曰 儀禮禮記多有縮字 每與衡字作對 下文直養之說 蓋本於此 乃一章大旨所繫不可失也 주자가 말하길, “의례에 관하여 예기에서는 縮자가 많은데, 매번 衡자와 더불어 쌍을 이루었다. 아랫글에 나오는 直養이라는 말도 대개 여기에 뿌리를 두었을 것이다. 이는 곧 章 하나의 큰 취지가 묶여있는 곳이니,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自反縮與不縮 所以不動 只在方寸之間 若仰不愧俯不怍 看如何大利害 皆不足以易之 若有一毫不直 則此心便索然 黝舍是不畏死而不動心 告子是不認義理而不動心 曾子是自反而縮而不動心 스스로 돌이켜보아 곧거나 곧지 않음에 있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까닭은 그저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만약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땅을 굽어보아 부끄럽지 않다면, 아무리 큰 이해관계를 보아도, 모두 이로써 그것을 바꾸기에 부족할 것이다. 만약 터럭 하나만큼이라도 올바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이 마음은 곧 삭막하게 될 것이다. 북궁유와 맹시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동심이고, 고자는 義理를 알지 못하는 부동심이며, 증자는 스스로 돌이켜보아서 올바른 부동심인 것이다.
雙峯饒氏曰 縮不縮指理言 不惴吾往指氣言 理者氣之主 理直則氣壯 理曲則氣餒 吾之理不直 雖一夫之賤亦爲之屈 吾之理直 雖千萬人之衆 在所必伸 孟子因丑有過孟賁之語 所以先說黝舍然後說歸曾子來 쌍봉요씨가 말하길, “곧거나 곧지 않음은 이치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두려워하지 않는다거나 나는 가겠다는 것은 氣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理라는 것은 氣의 주인이니, 이치가 곧으면 氣가 씩씩하고, 이치가 굽으면 氣가 쪼그라드는 것이다. 내 이치가 곧지 않다면, 비록 천한 사람 한 명일지라도 또한 그에게 굽히는 것이고, 내 이치가 곧다면, 비록 천 명 만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펼쳐야 할 바인 것이다. 맹자는 공손추가 맹분을 넘어선다는 말을 하였기 때문에, 먼저 북궁유와 맹시사를 말한 연후에 돌아와서 증자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魯齋王氏曰 朱子云 孟子養氣之論 孔子已道了 曰內省不疚 夫何憂何懼 愚謂與此正相表裏 自反則內省也 直則不疚矣 雖千萬人吾往 不憂不懼也 노재왕씨가 말하길, “주자가 이르길, ‘맹자의 養氣之論은 공자께서 이미 말씀하셨으니, 안으로 성찰하여 부끄러움이 없다면 무릇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라고 하셨다’고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이것과 바로 서로 표리를 이루는 것이니, 스스로 돌이키는 것은 안으로 성찰하는 것이고, 곧다는 것은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비록 천 명 만 명일지라도 나는 가겠다는 것은 근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此曾子之大勇 以義理之直爲主 而不動心者也 孟子之論至此始精細 下文至大至剛以直養而無害之說 蓋自此自反而縮發之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이것은 증자의 큰 용기인데, 의리의 올곧음에 주안점을 두어 부동심을 이룬 것이다. 맹자의 논리는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精致하고 세밀해졌으니, 아랫글에 나오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굳세니, 올곧음으로 길러서 해치지 않는다’는 말도 여기의 ‘自反而縮’으로부터 피워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8 孟施舍之守氣 又不如曾子之守約也 맹시사의 지킴은 기력일 뿐이니 또한 증자가 자신을 지키는 데 요령을 얻은 것보다 못하니라.”라고 하셨다.
言孟施舍雖似曾子, 然其所守乃一身之氣, 又不如曾子之反身循理, 所守尤得其要也. 孟子之不動心, 其原蓋出於此, 下文詳之. 맹시사가 비록 증자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가 지킨 것은 바로 제 한 몸의 기였으니, 증자가 제 몸에 돌이켜 이치를 따라서, 스스로 지킨 것이 더욱 그 요체를 얻은 것만 못하였다는 말이다. 맹자의 부동심은 그 근원이 아마도 여기에서 나온 것 같은데, 아랫글에 자세히 되어 있다.
朱子曰 孟子說曾子爲子襄一段 已自盡了 只爲公孫丑問得無了期 故後面有許多說話 此一段爲被他轉換問 所以答得亦周匝 然就前段看語脉 氣象雖無 後截亦自可見 前一截已自具得後面許多意思足 주자가 말하길, “맹자는 증자가 자양을 위해 말한 한 단락을 말하면서, 이미 스스로는 할 말을 다하였다. 그저 공손추가 질문하기를 끝날 기약이 없도록 하였기 때문에, 뒤에서 수많은 말을 했을 뿐이다. 여기의 한 단락은 그에 의해 질문이 전환되었기 때문에, 대답한 것도 또한 널리 두루 미쳤던 것이다. 그러나 앞 단락에 나아가 말의 맥락과 기상을 살펴보면, 비록 뒷절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또한 저절로 앞의 한 절이 이미 스스로 뒷면의 수많은 뜻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守約只是所守之約 言北宮黝之守氣 不似孟施舍守氣之約 孟施舍之守氣 又不如曾子所守之約也 孟施舍就氣上做工夫 曾子就理上做工夫 守約이란 그저 지키는 바가 요약된다는 것이니, 북궁유가 기를 지키는 것은 맹시사가 기를 지키는 것이 요약된 것과 같지 않고, 맹시사가 기를 지키는 것은 또한 증자가 지키는 바가 요약됨만 못하다고 말한 것이다. 맹시사는 氣 위로 나아가 공부를 한 것이고, 증자는 理 위로 나아가 공부를 한 것이다.
慶源輔氏曰 論舍之氣象 雖大略有似於曾子 然舍之所守不過是一身之血氣 故未嘗反之於心 以自顧其直與不直也 其視曾子之自反以縮不縮爲勇怯 則其所守之要 非舍之所能知 所可比也 反身謂自反循理謂直 경원보씨가 말하길, “맹시사의 기상을 논한다면, 비록 대략 증자와 비슷함이 있지만, 맹시사가 지키는 바는 일신의 혈기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래서 일찍이 마음에 돌이켜서 스스로 그 곧음과 곧지 않음을 돌아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증자가 스스로 돌이켜서 곧음과 곧지 않음을 용감하고 비겁함으로 삼았던 것에 비추어 보면, 증자가 지키는 바의 요약됨이란 맹시사가 능히 알 수 있는 바가 아니고, 또한 견줄 수 있는 바도 아니다. 제 몸에 돌이킨다는 것은 스스로 돌이킨다는 것을 말한 것이고, 이치에 따른다는 것은 올곧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或問孟子之不動心如何原於曾子 曰 浩然之氣 便是 大勇 以直養 便是自反而縮 行有不慊於心則餒 便是自反而不縮
쌍봉요씨가 말하길, “혹자가 맹자의 부동심은 어째서 증자에게서 발원한 것이냐고 물었다. 내가 말하길, 호연지기는 곧 큰 용기이니, 以直養이라는 것은 곧 自反而縮이고, 행한 것이 마음에 부족하면 곧 쪼그라든다는 것은 곧 自反而不縮이다.”라고 하였다.
9 曰 敢問夫子之不動心 與告子之不動心 可得聞與 告子曰 不得於言 勿求於心 不得於心 勿求於氣 不得於心 勿求於氣 可 不得於言 勿求於心 不可 夫志 氣之帥也 氣 體之充也 夫志至焉 氣次焉 故曰 持其志 無暴其氣 (공손추가) 말하기를, “감히 묻습니다만, 선생님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과 고자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얻어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고자가 말하기를, ‘말에서 (깨달아) 알지 못한다면 마음에서 알기를 구하지 말아야 하며, 마음에서 (편안함을) 얻지 못한다면 기운에 도움을 구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마음에서 (편안함을) 얻지 못하다면 기운에 도움을 구하지 말라는 것은 옳지만, 말에서 (깨달아) 알지 못한다면 마음에서 알기를 구하지 말라는 것은 옳지 않다. 대체로 의지는 기운의 장수이고 기운은 몸에 꽉 차있는 것이니 의지가 최상이고 기운은 그 다음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그 의지를 잘 지키면서 또 그 기운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 此一節, 公孫丑之問. 孟子誦告子之言, 又斷以己意而告之也. 告子謂於言有所不達, 則當舍置其言, 而不必反求其理於心, 於心有所不安, 則當力制其心, 而不必更求其助於氣, 此所以固守其心而不動之速也. 이 절은 공손추의 질문이다. 맹자가 고자의 말을 외워서 말한 다음, 자신의 뜻으로 판단하여 알려준 것이다. 고자는 말에서 통달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곧 그 말을 버려 두어야 마땅하고, 또한 반드시 마음에 그 이치를 돌이켜 구할 필요가 없으며, 마음에 불안한 바가 있다면 곧 그 마음을 힘써 통제해야 마땅하되, 반드시 다시 氣에 그 도움을 구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마음을 굳게 지켜서 신속하게 부동심의 경지에 이르렀던 비결이다.
速謂年未四十 빠르다는 것은 나이가 아직 40이 되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다.
朱子曰 告子之意 以爲言語之失 當直求之於言 而不足以動吾之心 念慮之失當 直求之於心 而不必更求之於氣 蓋其天資剛勁有過人者 力能堅忍固執以守其一偏之見 所以學雖不正 而能先孟子不動心也 觀其論性數章 理屈詞窮 則屢變其說以取勝 終不能從容反覆審思明辨 因其所言之失 而反之於心 以求至當之歸 此其不得於言而不求諸心之驗也 주자가 말하길, “고자의 뜻은 말에서 잃으면, 마땅히 곧바로 말에서 그것을 구해야 하지만, 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부족하고, 생각에서 잃으면, 마땅히 곧장 마음에서 구해야 할 뿐, 다시 반드시 기에서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대체로 고자의 천부적 자질의 굳셈은 남들보다 더함이 있어서, 그 힘은 굳세고 강인하고 고집스러워서 자기의 치우친 견해를 능히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배움이 비록 바르지 못했지만, 능히 맹자보다 먼저 부동심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性을 논했던 몇몇 장을 살펴보면, 이치가 굽고 말이 궁할 경우, 누차 그 말을 바꾸어서 승리를 취했지만, 끝내 조용히 반복하여 살펴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여, 그 말의 잘못을 바탕으로 그것을 마음에 돌이킴으로써, 마땅히 돌아갈 곳에 이르기를 구할 수 없었으니, 이것이 바로 그가 ‘말에서 터득하지 못하면 마음에서 구하지 않았다’는 것의 증험이다.”라고 하였다.
告子只去守箇心得定 都不管外面 是亦得 不是亦得 孟子之意 謂是心有所失 則見於言 如肝病見於目相似 고자는 그저 가서 마음을 굳게 지킬 뿐이었기에, 외면은 전부 상관없었으니, 옳아도 되고 옳지 않아도 괜찮았다. 맹자의 뜻은 마음에서 잃은 바가 있다면, 말에서 드러나니, 예컨대 간에 병이 생기면 그것이 눈에 드러난다는 것과 서로 비슷하다고 말한 것이다.
孟子旣誦其言而斷之曰, 彼謂不得於心而勿求諸氣者, 急於本而緩其末, 猶之可也; 謂不得於言而不求諸心, 則旣失於外, 而遂遺其內, 其不可也必矣. 맹자는 이미 그 말을 외워서 판단하여 말하길, 저 사람이 마음에서 얻지 못하면 기에서 구하지 말라고 말한 것은 근본을 급히 하고 그 말단을 늦춘 것으로서 그래도 괜찮지만, 말에서 얻지 못하면 마음에서 구하지 말라고 말한 것은 이미 밖에서 잃었으면서도 마침내 그 안마저 놓아버린 셈이니,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慶源輔氏曰 不得於心 勿求於氣 可 氣固有時以能動其心 然心之不正 則未必皆氣使之 大抵心是本氣是末 故程子亦曰 人必有仁義之心 然後有仁義之氣 睟然達於外 此不得於心勿求諸氣 所以爲急於本而緩其末 猶之可也 猶言尙爲可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마음에서 터득하지 못하면, 氣에서 구하지 말라는 것은 옳다고 하였는데, 氣는 본래 그 마음을 움직일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마음이 바르지 않다고 해서, 반드시 전부 氣가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다. 대저 마음이 근본이고 氣는 말단이기 때문에, 정자도 역시 ‘사람은 반드시 仁義의 마음이 있은 연후에 仁義의 氣가 생겨나서, 또렷하게 밖에 이른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음에서 터득하지 못하면 기에서 구하지 말라는 것이니, 이 때문에 근본은 급하게 하고 그 말단은 느슨하게 함이 되는 것이다. 猶之可也란 그래도 괜찮다고 말한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以下文觀之 氣亦能反動其心 則勿求於氣之說 亦未爲盡善 但心動氣之時多 氣動心之時少 故孟子取其彼善於此而已 至於言 則雖發於口而實出於心 內有蔽陷離窮之病 則外有詖淫邪遁之失 不得於言而每求諸心 則其察理日益精矣 孟子所以知言養氣以爲不動心之本者 用此道也 而告子反之 是徒見言之發於外而不知其出於中 不知言便不知義 所以外義也 其害理深矣 故斷然以爲不可 於此可見 告子之不動心 所以異於孟子 而亦其能終不動哉 주자가 말하길, “아랫글을 잘 살펴보면, 氣도 역시 거꾸로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니, 氣에서 구하지 말라는 말은 또한 모두 다 훌륭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 다만 마음이 氣를 움직일 때가 많고, 氣가 마음을 움직일 때는 적기 때문에, 맹자는 이것이 저것보다 낫다는 것을 취했을 따름이다. 말에 이르면, 비록 입에서 피어나지만 실제로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 안에 가려지고 빠지며 흩어지고 곤궁한 병통이 있다면, 밖에는 치우치고 빠지며 사악하고 도망치는 잘못이 있는 것이다. 말에서 터득할 수 없어서 매번 마음에서 그것을 구한다면, 이치를 살펴봄이 날로 더욱 정밀해질 것이다. 맹자가 知言과 養氣를 부동심의 근본이라고 여긴 것은 이 방도를 사용하였기 때문이지만, 고자는 이를 반대로 하였으니, 이는 말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만 헛되이 보았을 뿐 그것이 마음속에서 나옴을 알지 못한 것이다. 말을 알지 못하면 곧 義를 알지 못하니, 이 때문에 義를 밖에 있는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것이 이치를 해침이 매우 깊었기 때문에, 단호하게 안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여기에서 고자의 부동심이 맹자와 달랐으면서도, 또한 끝내 능히 부동심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리라!”라고 하였다.
然凡曰可者, 亦僅可而有所未盡之辭耳. 若論其極, 則志固心之所之, 而爲氣之將帥; 然氣亦人之所以充滿於身, 而爲志之卒徒者也. 故志固爲至極, 而氣卽次之. 人固當敬守其志, 然亦不可不致養其氣. 蓋其內外本末, 交相培養. 此則孟子之心所以未嘗必其不動, 而自然不動之大略也. 그러나 무릇 可하다고 말하는 것은 또한 겨우 된다는 것이어서 미진함이 있다는 말일 따름이다. 만약 그 지극함을 논한다면, 곧 뜻은 본래 마음이 향하는 곳이고, 기를 이끄는 장수가 된다. 그러나 기 역시 사람이 몸에 가득 채우고 있는 것으로서 기를 따르는 졸개가 된다. 고로 뜻은 실로 지극한 것이 되고, 기는 곧 그 다음이다. 사람은 실로 마땅히 그 뜻을 공경해서 지켜야 하지만, 그러나 역시 그 기를 잘 길러주지 않으면 안 된다. 대개 그 내외본말을 두루 배양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맹자의 마음이 반드시 동요하지 않기를 기필한 적이 없음에도, 자연스럽게 동요하지 않게 된 까닭의 대략이다.
慶源輔氏曰 心有知而氣無知 雖云氣一則能動志 然大抵是氣隨心動 故以志爲氣之將帥 氣從志所使 猶卒徒之聽命於將帥也 不言心而言志者 志者心之動而有所之處也 但志則就其動處言 故尤切耳 下文又言 是氣也而反動其心 亦可見矣 心無形而氣有質 雖云心爲本氣爲末 然人之所以充滿其身而不至餒之者 實賴氣爲志之卒徒也 志而無氣 則志無所使 亦由將帥而無卒徒 則亦虛名而已 경원보씨가 말하길, “마음에는 앎이 있지만 氣에는 앎이 없다. 비록 氣가 전일하면, 능히 뜻을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대저 氣는 마음을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뜻을 氣의 장수로 삼는 것이다. 氣는 뜻이 시키는 바를 따르는데, 마치 졸개의 무리가 장수의 명령을 듣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음을 말하지 않고 뜻을 말한 까닭은, 뜻이라는 것이 마음이 움직여서 생겨난 부분이기 때문이다. 다만 뜻은 곧 그 움직이는 부분에 나아가 말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적절한 것일 따름이다. 아랫글에서 또 氣이지만 거꾸로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한 것에서도 또한 알아볼 수 있다. 마음은 형체가 없지만 氣는 바탕이 있으니, 비록 마음이 근본이 되고 기가 말단이 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사람이 자기 몸을 가득 채워서 쪼그라들지 않게 할 수 있는 까닭은 실제로 氣가 뜻의 졸개무리가 된다는 것에 의지해서다. 뜻이면서 氣가 없다면, 뜻은 부릴 만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이 또한 장수이면서 졸개의 무리가 없는 것과 같으니, 역시 헛된 이름일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吕與叔克己銘云 志以爲帥氣爲卒徒 此蓋就帥字上生出卒徒字 신안진씨가 말하길, “여여숙의 극기명에 이르길, ‘뜻은 장수로 삼고, 기는 졸개의 무리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대체로 帥자 위로 나아가 卒徒라는 글자를 만들어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潛室陳氏曰 集註謂致養其氣 卽無暴氣 發得暴 失養 故也 必言致者 見養氣之難 須以集義爲本 又無正忘助長之弊 方爲能致養也 잠실진씨가 말하길, “집주에서 자기 氣를 기르기를 지극히 하는 것이 곧 기를 사납게 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기가 사납게 발현된다면, 그 기름을 잃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致를 해야 한다고 말한 까닭은 養氣가 어려우니, 반드시 集義를 근본으로 삼아야 하고, 또한 조장하는 병폐를 바로 잊어야만, 바야흐로 능히 기름을 지극히 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集註於持志謂守其志可也 必曰敬守其志 添入一敬字 最有意 蓋孟子養氣之功在集義 而所以集義者在敬 敬義夾持 方爲成德之事 或疑兩言字不同 告子不得於言 己之言也 孟子之言 天下之言也 愚嘗應之曰 理一而已 告子於己之言 且不能反求其理 如何能於天下之言而求其理 孟子於天下之言 能究極其理 則於己之言 可知也 운봉호씨가 말하길, “집주는 뜻을 붙잡는다는 것에 대하여, 그 뜻을 지킨다고만 말해도 괜찮았는데, 반드시 그 뜻을 공경하며 지킨다고 말함으로써, 하나의 敬자를 붙여 넣었는데, 제일 큰 의미가 있다. 대체로 맹자가 養氣하는 공이 集義에 있고, 集義하는 것은 敬에 달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敬과 義를 끼고 붙잡아야 바야흐로 덕을 이루는 일이 되는 것이다. 혹자는 두 개의 言자가 같지 않다고 의심하면서, 고자의 ‘말에서 터득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의 말이고, 맹자의 말은 천하의 말이라고 하였다. 나는 일찍이 그에 대응하여 말하길, 이치는 하나일 따름이라고 하였다. 고자가 자기의 말에 대하여 또한 그 이치를 돌이켜 구할 줄 모르는데, 어떻게 천하의 말에 대하여 능히 그 이치를 구할 줄 알겠는가? 맹자가 천하의 말에 대하여 능히 그 이치를 지극히 궁구할 수 있다면, 자기의 말에 대해서는 어떠할지 가히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下文知言養氣 其本已安於此 告子不得於言 卽不求其理於心 是不知言也 不得於心卽不求其助於氣 是不養氣也 孟子告子其不動心之名雖同 而其所以不動心之本 則相反而全不同者在此 신안진씨가 말하길, “아랫글의 知言과 養氣는 그 근본이 이미 여기에서 안정된 것이다. 고자의 ‘말에서 터득하지 못하면, 마음에서 그 이치를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마음에서 터득하지 못하면, 기에서 그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를 기르지 않는 것이다. 맹자와 고자의 부동심이라는 이름은 비록 같지만, 그들이 부동심에 이르게 된 근본이 서로 반대되어서 완전히 다른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0 旣曰 志至焉 氣次焉 又曰 持其志無暴其氣者 何也 曰 志壹則動氣 氣壹則動志也 今夫蹶者趨者 是氣也 而反動其心 (공손추가 말하기를,) “이미 의지가 최상이요 기운이 그 다음이라 하셨고, 또 그 의지를 잘 지키면서 그 기운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하심은 무슨 말씀입니까?” 하니, (맹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의지가 한결같으면 기운을 움직이게 되고, 기운이 한결같으면 의지를 움직이게 되니, 지금 넘어지는 사람과 달리는 사람은 이것이 기운이지만, 도리어 그 마음을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 公孫丑見孟子言志至而氣次, 故問如此則專持其志可矣, 又言無暴其氣何也? 壹, 專一也. 蹶, 顚躓也. 趨, 走也. 孟子言志之所向專一, 則氣固從之; 然氣之所在專一, 則志亦反爲之動. 공손추는 맹자가 뜻이 지극한 것이고 기는 그 다음이라고 말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와 같다면 그 의지를 오로지 붙잡으면 될 것인데, 또 다시 그 기를 함부로 하지 말라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물은 것이다. 壹은 전일한다는 것이다. 蹶은 넘어진다는 말이다. 趨는 달린다는 말이다. 맹자는 의지가 향하는 곳이 전일하면, 곧 기가 진실로 그것을 따르나, 그러나 기가 전일하게 머물러 있으면, 곧 뜻이 도리어 그것에 의해 움직인다고 말한 것이다.
慶源輔氏曰 志者心之所之 故可言向 氣則做出來底 便是不可以向言 只得下在字 下文云氣全在是 兩在字相照應 察理精矣 경원보씨가 말하길, “志라는 것은 마음이 가는 바이기 때문에, 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氣는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곧 향한다는 것으로 말할 수 없고, 그저 어디에 있다는 在자를 쓸 수밖에 없다. 아랫글에서 氣全在是라고 말했는데, 이 두 개의 在자가 서로 호응을 이루니, 이치를 살펴봄이 정밀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如人顚躓趨走, 則氣專在是而反動其心焉. 所以旣持其志, 而又必無暴其氣也. 程子曰: “志動氣者什九, 氣動志者什一.” 마치 사람이 넘어지고 달리면, 기가 오로지 여기에 있어서, 거꾸로 그 마음을 움직이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미 그 의지를 견지하였더라도, 다시 반드시 그 기를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정자가 말하길, “의지가 기를 움직이는 것은 열에 아홉이고, 기가 의지를 움직이는 것은 열에 하나다.”라고 하였다.
程子曰 告子不得於言勿求於心 蓋不知義在內也 志帥氣也 持定其志 無暴亂其氣 兩事也 志專一則動氣 氣專一則動志 然志動氣爲多 且若志專在淫辟 豈不動氣 氣專在喜怒 豈不動志 故蹶者趨者反動其心 정자가 말하길, “고자의 ‘말에서 터득하지 못하면 마음에서 구하지 말라’는 것은 대체로 義가 안에 있다는 것과 志가 氣를 인솔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 志를 굳건히 붙잡는 것과 그 기를 사납게 하거나 어지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별도의 두 가지 일이다. 志가 전일하면 氣를 움직이고, 氣가 전일하면 志를 움직이지만, 志가 氣를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또한 만약 뜻이 오로지 음탕하고 편벽됨에 있다면, 어찌 氣를 움직이지 않겠는가? 氣가 오로지 기뻐하고 노여워함에 있다면, 어찌 뜻을 움직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넘어지고 달려가는 것도 도리어 그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爲告子將氣說得太低了 故說志最緊要 氣亦不可緩 故曰志至氣次 持其志無暴其氣 是兩邊做工夫 志卽是心之所向而今欲做一件事 這便是志 持其志便是養心 不是持志外別有箇養心 如喜怒若當喜也 須喜 當怒也須怒 這便是持志 若喜得過分 一向喜 怒得過分 一向怒 則氣便暴了 志却反爲所動 蹶趨是氣也 他心本不曾動 只忽然喫一跌 氣打(才)一暴 則其心便動了 주자가 말하길, “고자가 氣를 붙잡고 설명한 것이 너무 저급하였기 때문에, 志가 제일 중요하지만, 기 역시 늦추어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가 으뜸이고 기가 그 다음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志를 붙잡고 그 氣를 사납게 함이 없다는 것은 양쪽으로 공부를 하는 것이다. 志는 곧 마음이 향하는 곳이니, 지금 한 건의 일을 하고자 한다면, 이것이 바로 志인 것이다. 그 志를 붙잡는 것이 바로 마음을 기르는 것이지, 志를 붙잡는 것 이외에 달리 마음을 기르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기뻐하고 성냄에 있어, 만약 마땅히 기뻐할 것이라면, 모름지기 기뻐해야 하고, 마땅히 성내야 할 것이라면, 모름지기 성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志를 붙잡는다는 것이다. 만약 기뻐하기를 과분하게 하여 줄곧 기뻐하기만 하고, 성내기를 과분하게 하여 줄곧 성내기만 한다면, 氣가 곧 사나워질 것이고, 志는 도리어 동요될 것이다. 넘어지고 달려가는 것은 氣다. 그의 마음은 본래 일찍이 움직인 적이 없지만, 그저 갑자기 넘어져서 氣가 일단 사나워지면, 그 마음이 곧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蹶趨反動其心 若是志養得堅定 莫須蹶趨亦不能動得否 曰 人之奔走如何心不動 曰 蹶趨多遇於卒然不虞之際 所以易得動心 曰 是 누군가 묻기를, “넘어지고 달리는 것이 거꾸로 그 마음을 움직인다고 하였는데, 만약 志를 굳세게 기른다면, 넘어지고 달리는 것도 역시 마음을 움직일 수 없지 않을까요?”라고 하였다. 말하길, “사람이 달려가면 어찌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말하길, “넘어지고 달려가는 것은 대부분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즈음에 당하기 때문에, 마음을 움직이기가 쉬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옳다고 하였다.
問在車聞鸞和行鳴佩玉 皆所以無暴其氣 今旣無此 不知如何而爲無暴 曰 凡人多動作多語笑 做力所不及底事 且如只行得五十里却硬要行百里 皆是暴其氣 學者須事事節約 莫敎過當 此便是養氣之道 志動氣是源頭濁者 故下流亦濁也 氣動志者 却是下流壅而不泄 反濁了上面也 누군가 묻기를, “수레를 타고 가면 鸞和의 방울소리를 듣고, 걸어가면 패옥을 울렸는데, 이 모두가 자기 氣를 사납게 함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지금은 이미 이러한 것이 없어졌으니, 어떻게 해야 사나움이 없도록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보통 사람들은 동작이 많고 말과 웃음이 많으며, 자기 힘이 미칠 수 없는 일을 한다. 또한 예컨대 겨우 50리를 갈 수 있는데, 도리어 기어이 100리를 가려고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자기의 氣를 사납게 만드는 것이다. 배우는 자는 모름지기 사사건건 절제하고 요약하여, 합당한 정도를 지나치게 함이 없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養氣의 道인 것이다. 志가 氣를 움직이는 것은 발원지를 탁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하류도 역시 탁하게 되는 것이다. 氣가 志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도리어 하류를 막아서 새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거꾸로 위쪽을 흐리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程氏遺書云 志一動則動氣 氣一動則動志 外書云 志專一則動氣 氣專一則動志 二說孰是 曰 此必一日之語 學者同聽之而所記 各有淺深 類多如此 志一動則動氣 氣一動則動志 此言未說動氣動志而先言志動氣動 反添一動字了 故不若後一說所記得其本旨 蓋曰 志專一故可動氣 而氣專一亦可以動其志也 누군가 묻기를, “정씨유서에 이르길, 志가 일단 움직이면 氣를 움직이고, 氣가 일단 움직이면 志를 움직인다고 하였고, 정씨외서에 이르길, 志가 전일하면 氣를 움직이고, 氣가 전일하면 志를 움직인다고 하였는데, 두 설 중에 어떤 설이 옳을까요?”라고 하였다. 말하길, “이것은 필시 같은 날에 한 말이지만, 배우는 자들이 함께 듣고서 기록한 것이 각자 깊고 얕음이 있고 비슷한 것이 많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志가 일단 움직이면 氣를 움직이고, 氣가 일단 움직이면 志를 움직인다는 이 말은, 氣를 움직이고 志를 움직인다고 아직 말하지 않았음에도, 먼저 志가 움직이고 氣가 움직인다고 말함으로써, 도리어 動자 하나를 첨가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뒤의 일설에서 기록한 것이 그 本旨를 터득한 것만 못한 것이다. 대체로 志가 전일하기 때문에 氣를 움직일 수 있지만, 氣가 전일해도 또한 그 志를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持志養氣之爲交養 何也 曰 持志所以直其內 無暴所以防於外 兩者各致其功而無所偏廢 則志正而氣自完 氣完而志益正 其於存養之功 且將無一息之不存矣 누군가 묻기를, “持志와 養氣를 번갈아 기르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持志는 그 안을 올곧게 하는 것이고, 사나움이 없게 하는 것은 밖에서 방비하는 것이니, 두 가지 모두 각자 그 공을 지극히 하여, 어느 하나라도 그만두는 바가 없다면, 志가 올발라서 氣도 저절로 완전해지고, 氣가 완전해져서 志가 더욱 바르게 되니, 그는 보존하고 기르는 공에 대하여 장차 한순간이라도 보존하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養氣次第工夫 內外是交盡 不可靠自己 自守其志 便爲無事 氣纔不得其平 志亦不得其安 故孟子以蹶趨形容之 告子所謂不得於心勿求於氣 是未爲全論 程子所以言氣動志者什一 正謂是爾 曰 然 兩者相夾著方始德不孤 누군가 묻기를, “養氣란 그 다음의 공부로서, 이렇게 하면 내외를 모두 다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의존해서는 안 되니, 스스로 자기 志를 지키는 것은 곧 일삼음이 없는 것이 됩니다. 氣가 조금이라도 그 평온함을 얻지 못하면, 志 역시 그 편안함을 얻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맹자가 넘어지거나 달려가는 것으로써 그것을 형용했던 것입니다. 고자가 말한 이른바 ‘마음에서 터득하지 못하면 기에서 구하지 말라’는 것은 온전한 논리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정자가 氣가 志를 움직이는 경우는 열 중에 하나라고 말했던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일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그렇다. 兩者가 서로 끼어서 밀착되어야만, 비로소 덕이 외롭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志帥也氣卒徒也 如周亞夫軍中夜警 亞夫堅臥不起 不起固是帥之定處 然設或被他警不已 自家如何睡得安 於此見持其志 又不可不養其氣 쌍봉요씨가 말하길, “志는 장수이고, 氣는 졸개의 무리다. 예컨대 주아부가 군중에서 밤에 놀랐지만, 주아부는 굳건히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지 않은 것은 원래 장수의 안정된 부분이다. 그러나 혹여 그가 놀라기를 그치지 않았다면, 자기 스스로는 어찌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겠는가? 여기에서 그 志를 붙잡고 다시 그 氣를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君子所以足容重手容恭聲容靜氣容肅行中鸞和步中采齊 皆是要無暴其氣 군자가 발은 중후함을 포용하고, 손은 공손함을 용납하며, 말소리는 고요함을 포용하고, 기세는 엄숙함을 포용하며, 수레를 타고 갈 적에는 鸞和의 방울소리에 맞게 하고, 걸어갈 때에는 采齊에 맞게 하는 까닭은 모두 자신의 기를 사납게 함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新安陳氏曰 前言心與氣 忽又變心言志者 蓋心以全體言 志以心之動而有所向處言 欲致持之之功 則就其動而有所向處用力 若心則不可言持矣 故志字尤切 後云氣一則動之 卽以是氣也而反動其心證之 可見動其心卽是動志矣 程子什九什一之說 蓋言志動氣之時多 十中常有九 所以志爲至 氣動志之時少 十中亦有一 所以氣亦次焉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앞에서 心과 氣를 말하다가, 갑자기 다시 心을 변화시켜 志를 말한 것은 아마도 心은 全體로써 말한 것이고, 志는 心이 움직여서 향하는 곳이 있는 부분으로써 말했을 것이다. 志를 붙잡는 공력을 지극히 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움직여서 향하는 곳이 있는 부분에 나아가 힘을 쓰는 것이다. 만약 心이라면, 붙잡는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志자가 더욱 적절한 것이다. 뒤에 이르길, 氣가 전일하면 志를 움직인다고 하였는데, 이는 곧 氣이지만 거꾸로 그 心을 움직인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니, 그 心을 움직이는 것이 곧 그 志를 움직이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정자의 십중구와 십중일의 학설은 대체로 志가 氣를 움직일 때가 많아서, 십중에 항상 구가 있으니, 이 때문에 志가 으뜸이 되고, 氣가 志를 움직일 때는 적어서, 십중에 또한 하나가 있으니, 이 때문에 氣가 역시 그다음이 된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