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우리詩》 2015년
하반기 신인상 당선작
스파이더맨 외 4편
전 선 용
살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
허공에서 묽은 생을 일군다
소수점 하나에 불과한 인간이 꿈꾸는 이상
두려움보다 생존이 우선이다
한 가닥 동아줄에 무거운 생을 올려놓고
흔들리는 꿈을 이루려는 저들,
내려진 하얀 동아줄에 이승과 저승의 고리가
달그락거린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늘을 오르고 나면
결국엔 정상에 오를 수 있을까
칡덩굴 같은 민초의 소망이란
푸른 하늘을 향해 줄기를 뻗어 가는 것
유리창에 반사된 떡 진 구름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가난
닦아낼수록 짙어지는 구름
떠다니는 구름을 하나씩 지우면서
사는 게 허업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동아줄을 잡지 못해 추락한 지상의 생
다신 놓치지 않으려 끼니때에도 고리를 단단히 묶는다
든든한 배경이라곤 성한 몸뚱어리
믿는 구석은 허공을 디디는 담력뿐이다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정상의 꿈을
저 꼭지에서 이루고 싶었겠지
지상에서 바라본 허공이 생각보다 높은 유리 벽
허드렛물이 비처럼 내린다.
백미러
흘러간 길을 다시 돌아보는 일
누군가 나를 해코지할까,
신경이 곤두서기 때문이다
뒤통수가 간지러워 백미러에 자꾸만 손이 간다
이리저리 각도를 조율하고 미심쩍게
힐끔힐끔 뒤를 흘기는 눈동자
망막엔 지울 수 없는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보이지 않는 사각에서 부지불식간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지나쳤다
저것은 생채기 난 스키드마크
울음을 머금고 있다
좌회전을 하며 우측 깜빡이를 켰을 때
급제동을 할 때도 재빨리 백미러를 본다
습관적으로 밟은 브레이크
빨강 신호등처럼 뒤통수가 붉어지고
생의 교차로에서 신호를 위반했음을 알았다
아우토반 같은 호시절
과속을 하며 뒤를 보지 않았던 탓에
백화현상으로 시야가 흐려졌다
상향 라이트를 깜빡이며 따라오는 차
무소의 뿔처럼 달려든다
추돌당할 것 같은 느낌
비상 깜빡이를 켜고 슬그머니 갓길로 이동한다
충돌만큼 큰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추돌
뒤에서 달려드는 것은 허점을 노리고 덤비는 것들이다
백미러에 담긴 트라우마가 영사기처럼 돌아갈 때
간지러운 뒤통수가 제동을 건다
추월하고 지나간 것은 모두 허상이다.
입을 막다
물컹한 수면이 출렁이자
상수리나무 우듬지가 나뭇잎 배 되어 흔들린다
수채화 물감이 묻어나는 노을
낮술 한 여인네 낯빛처럼 볼고족족하다
게우는 트림에 곁 물 잦아들고
산 하나 통째 삼키고도 성에 안 차는지
구름을 안주 삼아 끌어당긴다
그 입 참 크다는 생각
세상을 들이켜고 우주를 담은 입은 거대한 위장의 통로
달과 함께 수장당했던 이태백도 호수의 먹이었다
오물거리는 물의 파동은 잠시였을 뿐
수면은 아무 일 없었던 듯 말간 하늘을 가리킨다
이른 아침 등굣길 옆 감삼못*에서
물의 어금니에 끼인 주검이 발견됐다
지난밤 낯선 처자가 사산한 아이를 먹이로 주었다고
보리밭 끄트머리에서 수군거리던 바람이 귀띔한다
개가 사람을 물면 개를 죽여야 한다고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결국 연못 입을 봉인하기 위해 거대한 콘크리트를 채웠다
높다란 아파트가 들어서고 그 이후
연못의 입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먹이사슬 놀이는 끝이 났다
구름도 상수리나무도 노을도 떠났다
아이들이 돌 수제비를 뜨며 놀던 자리
청약통장을 던지며 어른들이 놀고 있다
식성이 좋다는 이유로 연못의 입을 막아버린 사람들,
사람들은 호수가 배설한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남은 것이 있다면 미개한 문명뿐이다.
* 현재 대구 달성고등학교 자리에 있던 못
금박 양장본 시집
잘 제본된 한 권의 시집
첫 장을 펼치기도 전에 고름 냄새부터 풍긴다
몇 날을 밤새워 앓았던가?
진한 커피로 밤을 새겨 나갔을 문장에 화농의 꽃이 피었다
저 꽃은 고독의 씨방이 몸부림친 흔적
피고름으로 인쇄된 첫 페이지에 시의 일대기가 펼쳐진다
욕창을 쥐어짤 때 질러댄 단말마 비명
고통의 시간이 행간에 스며들었는지 욕지거리가 난다
스스로 종기를 키운 미련한 고집 탓에
일찌감치 메스를 대지 못한 종기,
시집두께만큼 농이 찼다
뜨거운 냄비 뚜껑을 열 듯 조심스럽게 넘겨보는 페이지
곪아 터진 종기로 열이 펄펄 끓는다
끓어 넘치기까지 태웠을 온도는 섭씨 100도 이상
재고로 쌓여가는 시집,
덧난 종기가 용광로처럼 성을 낸다
왜 시인은 곪아 터져야 하는지
왜 시인은 열병을 앓아야 하는지
금박으로 인쇄된 표지에 화농의 꽃이 말하듯
시인은 입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절벽에 서 본 사람만이 아는 간절함
이쯤에서 화농으로 번진 악몽을 벗어 던지고 싶은,
누군가, 라면 받침으로 유용하게 쓰고 있다면
다행한 일,
뜨겁게 달궈진 양은냄비
곪아 터진 종기를 지지고 있다.
오토바이 퀵
가난을 쥐고 당기는 가속페달
배기관에서 불꽃이 일면 가난을 넘으려는
매연이 구름처럼 솟는다
목숨을 담보로 달리는 스피드를 계산하면
간당간당 허약한 품삯 정도,
곡예 하며 생과 사를 주행하는 동안
송곳 같은 가시 바람은 무릎관절을 파헤친다
겨울이면 시퍼렇게 돋아나는 동상
생물이니까 번식도 빠르다
미적분으로 쓸모 있는 거리를 계산한다는 건 무리
오직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지름길을 찾는다
브레이크 없는 질주는 후천적 본능
색맹이 되어버린 시력은 빨간 불도 녹색이고 녹색도 녹색이다
노란 불은 주춤거리는 의식행위
어중간한 것은 경쟁에서 뒤처질 뿐
사선에선 양보가 미덕이 아니다
전속으로 달려야 성이 차는 주행습관
힘껏 페달을 당기자,
지구가 화끈거리며 밀려간다
피안의 거리에 한 발짝 다가서는 속력
과속은 허기를 재촉하며 귀가를 서두른다
지독한 매연을 끼니로 때우다 보면
설익은 별이 떠오르고 그제야 맥을 고르는 엔진
헬멧을 벗지 않으면 살아도 죽은 것
오늘도 살았구나, 한숨 돌리는 안도도 잠깐의 사치
뺨을 꼬집으며 생사를 확인하는 잠꼬대
“퀵입니다.”
당선소감 - 전선용
붉게 물든 단풍의 허세가 땅에 가득합니다
푸른 하늘의 허풍도 만만찮습니다
천지가 개벽할 때 오늘처럼 이랬을까요?
땅과 하늘을 보며 가을을 실감합니다
당선 소식을 듣고 나지막한 봉제산을 오릅니다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산길은 다른 여느 날보다 가팔라 보입니다
상수리나무가 우거진 중턱,
세상과 나 사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도토리 한 알이 툭 떨어집니다
지축을 흔드는 뇌전
그 소리는 울림,
정말 큰 울림이었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무엇을 향하여 울림이 될까
산을 오르는 내내 먼지처럼 질문이 피어납니다
산사의 예불 종소리가 웅웅거리며 대답을 재촉합니다
훌륭한 시인이 되라는 어느 노 시인의 말씀이 여운이 되어 고막을 흔듭니다
저는 아직 훌륭한 시인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내가 시인이라니…
겸손이 아니라 부족한 저를 되돌아봅니다
뒤늦게 시작한 문학의 길은 제겐 생명입니다
그럴듯하게 포장된 시인이 되기보다 초라하지만,
도토리처럼 울림이 있는 삶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임보 선생님, 홍해리 선생님, 고맙습니다
사방이 길이나 올바른 길을 뒷모습으로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힘쓰겠습니다
유정 선생님을 비롯하여 격려와 응원을 보내주신 덕성시원 시우님들께도 아울러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전선용
대구출생. 제1회 북한 인권문학상 시 부문. 제6회 포항소재 문학 시 부문. 제4회 대한민국 독도문예대전 시 부문. 제16회 용인문학 신인상. 제9회 농촌문학상 시 부문 수상.
첫댓글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아름다운 시로 세상을 평정하시리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귀한 자리에 초대받아 한편으론 어깨가 무겁습니다.
스파이더건 퀵이건 생명에 관한 일이군요.
문학의 길을 생명으로 여기시는 마음 변절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는 부끄럽지만 나태하면서도 문학을 생명으로 여기는 얼치기 시인입니다.
신인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아곳에서 오 시인님을 뵈니 반갑다는 생각이 듭니다.
충고의 말씀 기억하겠습니다.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함께 할 수 있어 기쁜 마음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더욱 정진하시어 세상을 바꾸는 시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도반의 길에서 손잡고 갈 길이지요
선생님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멋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