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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 죽당(竹堂)공 휘 찬식(璨植) 유사(遺事)
사진 1 : 영천댐 수몰 직전의 용산리 사진
위 [사진 1]의 중심부에 계천(溪川)(옛 이름은 호계)이 가로지르고 있는데, 이를 기준으로 동쪽은 속칭 “인구”라 칭하고, 서쪽은 “월연”이라 하였으며, 그 아래쪽은 “신용산”이라 하였다.
죽당공이 운영한 “자양우체국”은 월연 아래쪽에 위치하였다.
인구마을은 삼휴공(18世)께서 영천 석동에서 이 마을로 살림을 옮겨와 일생을 함께하신 마을이고, 모재공께서도 귀미마을에서 인구마을로 분가하여 생활하신 마을이며, 죽당공도 이곳에서 태어나 젊음을 보낸 곳이다.
1. 가계(家系)
29세 죽당(竹堂)공 휘 찬식(璨植)은 시조공의 28세손이며, 호수공 휘 세아(世雅 16世)의 13세손이고, 삼휴공 휘 호신(好信 18世)의 11세손이고, 모재공 휘 중교(重喬 21世)의 8세손이시다.
자언공 휘 일필(一鉍 22世)은 7대조가 되시고. 휘 하주(夏澍 23世) 농와공은 6대조이시며. 5대조는 휘 성휴(性休 24世)입니다,
고조부는 휘 유명(裕明 25世)이시며, 증조부는 휘 치선(致璇 26世)이시고. 조부는 휘 진우 (鎭禹 27世)이시며, 아버지 휘 연석(淵錫 28世) 용헌공과 어머니 하양 허씨의 6남매 중 막내로 1910년 10월 20일 영천시(출생시는 영천군) 자양면 용산리에서 태어나셨읍니다.
※ 참고 1 : 죽당(竹堂)공의 휘는 “찬식(璨植)”이지만 법적(호적등본상) 성명은 “준걸(俊傑)” 임을 밝혀둡니다.
죽당공이 태어난 이 시기(1910년)는 우리나라의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잘 알려진 일본에 의해 조선이 식민지가 되는 해이다. 이는 바로 죽당공의 앞날이 순탄하지 않는 생을 영위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예측할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일 수 있읍니다.
2. 생몰(生沒)
경술1910년 1월 18일 생 - 을묘1975년 2월 28일 졸 (향년 66세)
3. 배위 : 안동권씨 권재생(權在生), 父 숙재(肅載), 祖 의훈(宜勛), 증조 晟運.
무신1908년 5월 6일(음력) 생-임신1993년 6월 10일 졸.(향년 86세)
사진 2 : 죽당공 내외분 사진
4. 효성(孝誠)과 우애(友愛)
1919년에 부공(父公)께서 45세로 별세하였을 때. 송당공은 20세, 백당공은 13세. 죽당공 10세로 큰 어려움을 맞이하셨읍니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서 성장하면서도 유가의 후예로 예의범절을 지켰으며 어머니 봉양과 형제자매 간의 우애도 깊었다. 또한 성품은 결단성이 있고, 친화력은 매우 강하였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몇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홀로 되신 어머니를 극진이 모셨고, 형제자매 간의 우애 또한 남달랐다. 복날이 되면 보신탕을 큰댁 어머니께 보내드리고, 형님 형제분도 모시고 대접하였습니다. 특히 할머니 생신날 아침은 큰댁에서 먼저 차리고 다음은 기차(其次)의 순서로 진행되었읍니다.
사진 3. 하양 할매의 생전의 영상과 3형제분께서 상주 옷차림으로 3년상을 내셨읍니다.
2) 죽당공의 아버지 용헌공의 제삿날에는 행사(行祀)를 대소가 부녀들이 모두 모여 제수 준비를 하셨고, 자정너머 자손들이 제사를 곡성(哭聲)으로 지냈읍니다. 제사가 끝나고 어머니 앞에서 부공(父公) 생각에 통곡하셨읍니다.
5. 학업(學業) : 1922년 일제하에 처음 신교육이 도입과 더불어 자양서당(일명 영흥학원) 1학년에 입학하여 2년간 배움을 받으신 것이 유일한 학력입니다. 지금의 자양초등학교는 일제치하인 1935년에 자양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였고, 1941년 4월 자양공립국민학교로 개칭되었기에 이 시기는 초등학교 교육도 의무 교육이 아니고, 모든 생활이 매우 어려웠던 때임을 짐작할 수 있다.
6. 직업(職業)의 변천
1) 적은 농토로 농업에 종사하면서 신용산에 점포(옛날 이름 “점방”, 그 후는 “상점”, 요즈음은 “슈퍼”라 칭한다.)를 두고 잡화상을 운영하였지만 운영이 순조롭지 못하여 다른 방도를 찾으셨읍니다.
2) 해방후에 신용산에서 정부 위탁 식량베급소와 유류배급소를 운영하였읍니다.
3) 죽당공이 35세가 되는 해인 1945년은 일본이 폐전 선언과 동시 나라는 일재(日帝)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국가적인 혼란으로 인한 생활고로 허덕이는 이 때 생활경제를 해결하기 위해 둘째 고모가 살고 계시는 포항 으로 이주하여 소규모 장사를 하셨읍니다.
살림이 좀 나아진 이후 동해안 어부들의 오징어잡이용 “보채낚시”를 생산 하는 가내공업을 운영하였고, 이로 인해 상당한 수준의 부를 형성하였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 참고 2 : 여기서 “보채낚시”라 함은 납이나 사기 등을 활 모양의 굵은 철사 가운데에 부착하고 그 양쪽에 복합낚시를 단 것으로 일명 ‘사도’라고 불렀다. 지금은 환경오염 우려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납을 사용하지 않으며, 재질과 모형도 많이 바뀐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 [네이버 지식백과] “오징어 낚시도구”에서 발췌
사진 4 : 죽당공이 제조 판매한 오징어 낚시의 참고용 모형
4) 6.25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나라의 정세가 불안하여 자녀 중 아들 2명은 고향인 영천 자양의 큰집으로 피란시키고, 죽당공은 포항 인근 지방에서 숨어 있었지만 공산군에 점령된 낚시 공장은 모두 소실되어 더 이상 회복이 불가하다는 판단아래 다시 고향인 자양면 용산동으로 이사를 하셨읍니다.
5) 귀향 후 가진 것이 없기에 처음에는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세월이 흘러 다시금 “신용산”에서 미곡상을 열어 지방의 곡식을 영천 양곡상에게 공급하는 장사를 시작하셨읍니다.
그 당시 자양에서는 모든 유통구조가 물물교환의 형태를 띄우고 있기에 자양 에서 구입한 쌀(벼, 백미 등)을 군대에서 불하된 트럭을 개조한 차에 실고 영천시(그 당시는 “영천읍”이었음)의 곡물상에 판매한 것으로 알 고 있읍니다.
사진 5. 댐 정상가동에 의한 수몰로 폐허화된 신용산의 수몰 후의 모습.
6) 세월이 흘러 정부에서는 1961년에 도서. 산간벽지 등에 우편물을 배달할 수 있는 사설우체국을 설치 운영할 수 있는 별정우체국법 (법률 제1,297호. 그 동안 몇 번 개정은 있었으나 현재도 존재하는 법률임.)을 제정 공포하였고, 이 법에 따라 위 죽당공은 자양면 용산동 2구(구 자양 파출소 앞)에서 별정(사설)우체국을 신설함과 동시 정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1964년 9월부터 1970 년 3월까지 6년간 자양우체국을 운영하셨읍니다.
물론 우체국의 고유 업무인 우편업무와 법으로 허용되는 우체국 금융사업 업무를 담당하셨으며, 또 집안의 청년들에게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하시는 등의 일도 하셨다. 다만, 자양면 전체가 포철 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영천댐의 조성으로 일대가 수몰되어 허가증을 국가에 반납하셨읍니다.
7. 공적(功績) :
1) 조상을 위한 위선사업(爲先事業)에 항상 앞장을 섰읍니다.
o 1976년 간행 국역호수선생실기 국역 사업에 역할을 맡았으며
o 초곡재 유사, 1973년 원당재 판공, 하천재 판공을 맡았읍니다.
2) 가까운 친인척과의 유대 강화
죽당공은 5남매 중 막내로 특히 양 고모님에 대한 정이 많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특히 덕동 고모와 포항 고모님은 일찍 혼자되어 외로운 생활을 할 때 농한기에 집에 초청하여 한 달 이상 편히 쉴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셨으며, 특히 그 당시 먹기 힘든 가축 대접을 잘 하신 걸로 기억합니다.
그 외에도 인척들과 관광들을 즐기신 줄 알고 있읍니다.
사진 6. 위 사진은 죽당공 내외분과 포항 고모와 함께 기념을 위한
사진이고, 아래는 덕동삼종숙, 삼휴공 주손과 함께하신 관광사진.
3) 자양초등학교 육성회(옛날 사친회, 육성회 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음) 에 학부형 대표로 참여하면서 수년간 학교 후원에 적극 참여하였읍니다.
4) 주택(住宅) 건립과 변천
인구마을 남쪽 끝에 4간 ㄷ자형의 기와집을 지어 거주하시었고, 그 후 대구시 대명동에 자녀교육을 위한 신주택도 마련하셨고, 대구시
수성구 상동에 수몰 후 이주를 위하여 주택을 마련(구입)도
하셨읍니다.
사진 8. 수몰되기전 죽당공 저택과 수물 후 모든 것이 살아진 그림
5) 1972년 1월 2일 삼형제(송당공, 백당공, 죽당공)분을 위한 후손들의 계모임을 중형 백당공과 협의하여 삼체계를 창계(創稧)하는 주된 역할을 하였고 계안도 지인의 도움을 받아 지으셨읍니다.
8. 묘소(墓所) : 삼귀리 대양골 삼형제분의 묘소 아래쪽에 쌍분입니다.
9. 자손(子孫)
o 장남 병철(炳哲) 配 안동 권분기(權粉基), 父
양태(養台), 祖 병희(秉熙). * 장남 병철은 1932년(壬申年) 1월 6일 출생하였고, 1973년(丙申年) 5월 졸 하였음.
* 손자 호용(鎬墉). 생부 병걸(炳杰) 配
o 차남 병걸(炳杰). 配 진주 강명자(姜明子). 父 대희(大羲), 祖 일수(一秀)
* 손자 호용(鎬墉). 출계 병철(炳哲).
* 손녀 희령(希呤), 夫 문희봉(文熙奉). 父 영주(永柱).
차손녀 연손(然孫). 夫 瀑田崇(Takita takashi)
삼손녀 연수(娟守). 夫 이동원(李東原)
o 장녀 병주(炳珠) 夫 의성 김정원(金政源) 父 진구(進九),
* 외손자 김상윤(金相潤), 김 준(金 俊).
o 차녀 순희(順姬) 夫 강릉 김석래(金碩來) 父 남선(南旋),
* 외손녀 김미숙(金美淑), 김영숙(金英淑), 김민경(金珉炅).
9. 택호(宅號) : 다리골(현 :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
10. 종합
o 위 죽당공은 경술국치라는 어려운 시기인 1910년에 농토도 적고, 부존자원도 없는 자양에서 태어나 10세라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으 시고, 성년의 해인 20세가 되든 해(1930년)에는 김좌진장군 등 항일열사 들에 의해 항일운동이 극에 달한 시기였읍니다.
1945년 8월에는 일본의 무조건항복과 광복을 이루었으나 1945년 9월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소 양군의 한국분할점령을 이루어 남북간의 분단의 역사가 진행되었다. 죽당공은 35세가 되는 해에 일본 폐전과 더불어 나라는 해방 되었지만 국가적인 혼란과 절대빈곤이라는 시대에 생활고를 격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누님이 살고 계시는 포항 으로 이사를 하여 현지에서 소규모 장사를 시작하셨읍니다.
경제가 좀 나아지면서 그 당시 과학기술로 알려진 오징어 낚시용 “보채 낚시”를 제조하는 업체를 운영하면서 열정적으로 경영하였다고 합니다.
o 이런 와중에 나라의 정세가 혼란스러운 일 들을 겪게 된 시기입니다. 본인의 나이가 40세가 되는 해인 1950년 6월에 북한군의 남침과 더불어 포항의 전투로 낚시공장은 모두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읍니다. 1953년 7월 남북은 휴전 협정을 맺어 전쟁은 중단되었지만 경제는 극히 어려운 시기에 죽당공은 포항에서 고향인 자양면 용산리 소재 집안 제실로 거처를 옴기고, 이를 계기로 제기를 위한 노력과 고생 끝에 신용산 소재 “정미소” 건물로 이사를 하고 요즈음 말하는 슈퍼의 전신인 “자양상회”라는 잡화상을 운영하며 특히 양곡을 판매 하는 등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하셨읍니다.
o 또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구석진 두메산골로 유명하여 오지(奧地) 라고 말하는 자양면 용산동에 “별정(사설)우체국”을 개설하시고 1964년부터 1970년까지 6년간 운영하셨읍니다.
만약에 영천댐이 조성되지 않았다면 우체국은 계속 운영되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유는 별정우체국은 법률상 상속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o 한편 죽당공은 그 시절에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하였지만 예의범절을 지키시고 이웃에서 어머님을 봉양하시면서 본인의 남매간에도 우애를 유지 하는 노력을 하신 걸로 기억된다.
한편 그 시절 사회적으로도 온갖 수난을 겪으시면서 자기 몸은 돌보지 못한 결과로 인해 1965년도에는 대구의 대형병원에서 위암이란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아야 하는 시련도 감수하셨으며, 어머니께서도 중풍이라는 병으로 1993년 돌아가실 때까지 30여년 가까이 병고에 시달리게 되었고, 특히 보행도 불편하시고, 말하는 것도 어둔하는 등의 생활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끝내는 대구시 상동소재 집에서 운명하셨다.
o 이를 종합하여 볼 때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사회적으로 큰 도움도 받지 못한 체 자수성가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모든 일을 시작할 때는 과감한 도전 정신과 정확한 판단력, 카리스마를 발휘하시면서 한국전쟁 발발 전에는 포항에서 오징어 낚시공장, 남북한 전정협정(1955년)이후는 고향에서 조그마한 가게(요즈음 “슈퍼”)를 운영하시고, 자양우체국(별정우체국)장직을 마지막으로 댐 수몰과 동시에 일생의 모든 것을 마감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o 결과적으로 본인의 노력에 의한 순수한 자수성가로 시골에서 어느 정도 부(富)는 이룩하였으나 과로에 의한 내외분의 질환으로 상당기간 병고를 앓았으며, 자녀들이 어린 상태에서 치료에 많은 비용을 지출함에 따라 끝내는 그렇게 편하시지 않는 상태로 일생을 마감하였기에 본 글을 편집하는 아들의 입장에서 죄송한 마음 금할 수가 없었음을 밝혀둡니다.
<자료정리> 차남(次男) 병걸(炳杰).
첫댓글 저근할아버지 생애를 잘 올렸습니다,
옛날 정미소옆 전방(마트)와 곡물 장사로 성공하셔서 우체국 공사를 직접 하셔서
별정우체국장 역임 하시고 문중 대소사에 중임 맡으셔서 많은 족적을 남겨습니다,
편히 영면하시고 극락왕생하소서~~
석평형님과 한살 차로 같이 자랐는데 그때 가장 무서운 분이 죽당공이셨다. 하루가 꾸중으로 시작해서
꾸중으로 끝이 났다. 왜냐하면 항상 장난꾸러기로 문제를 일으키니까!
그러나 성장해가니 다정하신 성품으로 항상 칭찬을 하여주셨다.
송당, 백당공께서 일찍 작고하셨기에 3 대소가의 모든일을 맡아 바르게 처리하셨다.
후손들의 숭조와 족의를 두터이 하기 위해 삼체계를 창계하심은 정말 잘 하신일이다.
우리 모두는 죽당공의 뜻을 명심하여 실천에 노력하자.
적은 할아버님관련하여 정성스럽게 정리하신 자료 잘 보았습니다. 어린시절 방학때에 자양에 들리면 따뜻이 맞아주시던 추억이 있습니다. 어느 잔칫날 보문이와 장난치다가 혼난 기억등 옛 추억에 잠시 젖어 보았습니다.
작은할아버지, 아니 끝에할배는 나한테 항상 무서운 분이셨고 카리스마도 있었다. 엄한 훈육의 영향을 받아 옆길로 새지않고
잘 성장 했던것 같아 고마움을 느끼며, 삼체계가 50회 가까이 이어 올 수 있도록 숭조목족의 정성을 아르켜 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 어린시절 저근 아버님의 자상하신 성품으로 많은 도움을 받은 기억이 납니다
아버님의 심부름으로 신용산 저근아버님 점방에 가서 무언가 얻어 오는일
특히 집안 큰일의 매듭은 저근 아버님이 정확하게 조치하신기억이 납니다
제가 운영하던 911호 추럭이 더이상 부채를 안고 운영이 힘이들어 두 형수님 모시고 저근 아버님께서 판단하에 정리해 주셔서 나는 무거운 짐을 벋고 훌훌단신 군에 입대할수있게 해 주셨지요 군에 있을때도 휴가 나와 자양가면 꼭 돈을 손에 쥐어 주신 고마우신 은혜를 갑지 못 죄스러울 뿐입니다.
제가 뵙지 못하였지만 삼체계를 만드셨다는 이야기는 항상 들어왔고 자손들 걱정도 많이 하셨다 들었네요
오늘 생애를 정리한 내용을 보니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적은할아버님께서 늘 큰집 걱정을 하시고 저희 남매들이 잘못될까봐 노심초사 하신것을 어머님을 통해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은행에 취직해서 달력을 보내 드렸는데 보시는 분마다 손자가 직장을 다닌다고 자랑하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저희들이 안정된 생활을 하기전에 돌아가셔서 효도도 한번 하지 못해서 정말 죄송할 따름입니다.
옛날 영천오는 버스 기다리면서 자양상회에서 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위천아제께서 상세한 자료 올려주셔서 잘 보았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끝에 적은 할아버지.
방학 때 자주 자양 가서 적은 할아버지 댁에서 폐 끼치곤 했었는데요.
주야 아지메하고도 늘 친구같이 놀고해서 특별히 가깝게 지내곤 했었는데 그 때가 그립고 뵙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