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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움과 경외의 나날들 / 13장 오늘날의 도전들에 직면해서: 인터뷰(마커스보그)
2019.11.18. 황효덕
성경과 예수와 하나님, 또는 일반적으로 종교에 관한 책들의 저자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마커스 보그는 오리건주립대에서 오래 가르쳤고 석학교수와 포틀랜드의 트리니트 성공회 대성당의 주임 신학자를 역임했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주로 미국을 여행하고 교회들에서 강연하는 일에 보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문) 최근 몇 년간 신무신론자(New Atheist)들로 알려진 작가들이 저술한 많은 베스트셀러들이 출판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믿음에 관한 비난들에 대한 당신의 응답은 무엇인가요?
답: 이런 사람들이 저술한 책들의 공통점은, 적어도 서구문화 속에서 “신”이라는 말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이해를 공격하는데, 이런 신은 제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초자연적 유신론”을 이릅니다. 나 또한 신에 대한 그런 방식의 이해를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자연적 유신론과 함께 고대 종교들의 형태 속에서 발견되는 다른 신에 대한 이해가 있는데, 이는 신을 이 세계로부터 분리된 인간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지 않고 “이 세상에 스며드는 영적 실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즉 그 신은 모든 것들을 감싸 안는 영, 즉 그 자신 안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는 영입니다. 사도행전17:28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라고 바울이 고백하는 그런 신입니다. 이른바 범재신론입니다. 그런데 신무신론자들이라 불리는 세 명의 작가(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리처드 도킨스)들은 신에 대한 이러한 다른 이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신무신론자들이 쓴 이런 책들 속에는 진실이 담겨있지만, 그것은 제한적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 역사 속의 가장 커다란 악 중에 일부가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졌습니다만 그와 동시에 종교들은 지금까지 살았던 위대한 성인들과 위대한 사람들 또한 생겨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책들 속에는 절반의 진실이 들어있는데, 그것은 모든 종교가 부끄러워할 일들을 많이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부분적인 진실입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기도에 관해 무엇을 가르치나요?
복음서를 읽다 보면, 우리는 예수가 관상기도(contemplation prayer)의 한 형태를 실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관상 기도는 내적 침묵의 기도입니다.
또한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기도하는 법을 알려주셨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 기도 내용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요...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주님의 기도 가장 중심에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 도래하기를 원하는 간구가 놓여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기도는 지극히 현(現)세상적인 기도입니다.
그 다음에는 빵에 대해서 기도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 기도는 농부였던 청중들에게 가르친 것으로서, 그들의 삶의 물질적 토대인 빵은 중요한 생존의 문제였고, 따라서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충분한 빵과 충분한 음식을 뜻했습니다.
다음 구절은 “우리의 부정을, 죄를, 빚을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구절인데, 1세기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오는 주님의 기도 세 개의 버전들 중에 두 개 버전들에는 그 구절에 “빚”과 “채무자들”이란 단어들이 사용되었습니다. 빚은 농부의 삶에 또 다른 중요한 생존 문제였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충분한 음식과 서로간의 빚 탕감을 뜻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을 위해 필요한 것에 매우 집중합니다.
문)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오류가 없는 문자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는데, 당신은 복음서들을 인간의 산물로서 보는 것이 하나님의 실재를 부인하거나 거룩한 영의 현존을 부인하는 것과 연관되지 않는다고 썼습니다. 이에 관해 좀 더 말해 줄 수 있나요?
답: 오늘날 미국 기독교계에 가장 큰 분열을 일으키는 문제는 성경 무오류성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무오류성은 교회의 오랜 가르침이 아닙니다. 1600년대 후반기에 처음 언급되었고, 1910년경에 구체적으로 이름 붙여진 하나의 움직임으로서의 기독교 근본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시기에서야 비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들도 성경의 무오류성을 믿는 것이 기독교의 정통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성경의 무오류성은 현대에 생겨난 것입니다.
성경의 무오류성과 확실성에 대한 대안은 성경이 인간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단순한 어떤 것을 뜻하는데, 즉 성경은 두 개의 고대 공동체들의 산물임을 말합니다. 히브리 성경(유대교성경, 구약성경)은 고대 이스라엘의 산물이고, 신약성경은 초기 기독교 운동의 산물입니다. 성경은 그 두 개의 고대 공동체들 속에서 우리의 영적 선조들이 생각했던 바를 문서로 정리하여 정경으로 만든 것입니다.
문) 부활절 이전의 예수와 부활절 이후의 예수 사이의 차이와 왜 그 둘을 다르게 보는 것인 중요한가요?
답: “부활절 이전의 예수는” 십자가 죽음 이전의 예수로서 살과 피를 가진 역사적 인물입니다. 그는 우리와 다른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전통이 예수를 완전한 인간이라고 말할 때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부활절 이후의 예수”는 예수가 그의 죽음 이후에 되었던 것을 말하는데, 이 예수는 하나의 영적 실재입니다. 내가 부활절 이후의 예수가 영적 실재라고 말할 때, 나는 그가 하나님의 모든 특성을 가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구분이 중요한 이유는, 만약 우리가 그 구분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부활절 이후의 예수가 가진 신적인 특성을 부활절 이전의 온전한 인간 예수에게 투사하려는 경향을 가지며,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해 집니다. 인간인 우리는 인간이 아닌 누군가(신적 존재)를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 당신은 우리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기독교의 핵심 또는 심장에 대해서 또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 줄 수 있나요? (당신의 책 ‘기독교의 심장’ 내용을 통해서...)
답: 기독교인이 되는 일은, 예수 안에서 결정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 속으로 보다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의 의미를 간략히 말하면,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전통의 틀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지요.
그리고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갈망입니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나에게 그런 갈망들을 살아내기 위한 하나의 매개물, 통로, 공동체를 제공합니다.
14장 기독교의 심장과 영혼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것들, 즉 기독교의 심장으로 이해하는 것들을 아래 다섯 개의 요점으로 밝혀보겠습니다.
성스러움의 실재
첫 번째 요점은 기독교의 심장에는 하나님, 성스러움, 영ㅡ이 말들은 내가 동의어들로서 또한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들입니다ㅡ에 대한 확고한 주장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보수주의적 기독교에서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적 기독교에서도 불확실함과 일종의 모호함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일차적으로 보는 관점에 따라서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실재에 관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은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의심스러운 실재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려 합니다. 그 점에 대해 폴틸리히가 반세기 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당신이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를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계시의 원천들
두 번째 요점은 계시의 원천들에 관한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두 가지의 주된 계시의 원천들이 있는데, 그 두 가지 모두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 속에 알려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안에서 알려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언급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은 사람의 말들로 표현되었습니다. 성경을 확실하고 오류가 없는 신적인 산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현대적인 기독교이단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말로 쓰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졌고, 기독교 전통은 이러한 인간의 말들–성경-을 거룩한 계시로 천명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언제나, 그 말들 자체가 아닌, 그 말들 너머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한 인간 안에 구체화된 형태로서의 예수는 신약성경의 언어로 표현하면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고, 성육한 말씀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한 인간 안에서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시를 발견하는 유일한 종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의 두 가지 원천들에 관한 두 번째 요점인 예수의 우월성에게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또한 예수와 성경이 충돌할 때-간혹 그 둘이 충돌하는데-는 예수가 결정적입니다. 나는 종종 “정통 기독교는 예수가 성경을 능가한다고 확언한다”고 말함으로써 이 점에 대해 단적으로 표현합니다.
나는 성경은 물론 예수 또한 역사적이고 은유적으로 해석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이라는 말로 내가 뜻하는 바는, 우리가 예수를 그가 살았던 1세기의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은유적이라 함은, 예수와 예수의 가르침들이 1세기의 맥락을 초월하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는 “하나님의 비유” 또는 “하나님의 은유”라고 말하는 것으로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통로, 길
세 번째 요점은 기독교가 “바른 길”(the way)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기독교 배타주의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며, 기독교인들에게는 기독교가 “바른 길”이요 통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길”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믿는 것에 관해서만 중요시 한다고 생각합니다.(p.248 비행기 옆 좌석의 여인과 나눈 대화 참조) 신약성경에서 기독교인에 대한 가장 초기의 이름은 “그 길”(행9:2)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또한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길에 관한, 변화의 경로에 관한 종교입니다.
더하여 기독교는 그 길에 관하여 두 개의 차원을 갖는데, 성경에서 그 두 차원은 똑같이 중요합니다. 첫째는 개인적 차원, 즉 개인의 변화에 관한 차원으로써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것으로서, 내적인 변화 과정에 대한 은유로 이해되었습니다.(거듭남, 새로운 정체성과 존재방식) 둘째로, 이 변화는 정치적입니다. 즉 이 세상의 변화에 관한 것입니다.(하나님의 나라) 이처럼 우리가 기독교를 하나의 길로 바라볼 때, 그 길은 실천-하나님이라는 실재와 또한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뜻하는데, 믿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 핵심입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그 길이 기독교에서 십자가에 의해 탁월하게 상징되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개인적 변화의 통로에 대한 하나의 상징임은 물론, 이 세상을 통치하는 권력에 맞서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는 개인적이면서 또한 정치적입니다.
공동체
네 번째 요점은 기독교의 핵심에 공동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는 영속성을 가진 모든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가장 중심에 놓여있습니다. 찬양공동체, 양육공동체는 물론 심지어 관상기도 공동체까지(가장 고독한 경험의 관상기도 또한 공동체에서 더욱 강력한 체험)
그 다음에는 우리의 신앙과 인격을 형성해 주는 공동체가 있는데, 이것은 새로운 정체성과 존재방식으로 재(再)사회화하는 공동체로서의 기독교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우리 대부분은 현대 서구 문화의 영향가운데 사회화되었는데 지난 수백 년 동안의 서구적 삶의 핵심 가치들은 기독교의 뚜렷한 핵심 가치들과 근본적으로 달랐기에,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다른 비전과 존재방식으로 재사회화되는 것을 뜻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그런 재사회화의 통로 또는 대리인입니다.
진정한 기독교
마지막 다섯 번째로, 내 판단으로는, 진정한 기독교에 대한 어떤 날카로움(edginess)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것을 알고 있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요? 권력자들에 의해 처형당한 사람을 따르는 것, 이 세상의 권력들, 그 시대의 지배체제, 즉 그 시대의 지배 권력들에 의해서 처형당한 사람을 따르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요? 이 세상의 권력들이 예수를 살해했고 하나님은 그가 옳았다고 해원(解冤)시키셨는데, 그것이 바로 부활절의 핵심 의미들 중에 하나입니다. 성금요일과 부활절은 제국에 의한 처형과 하나님의 해원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권력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너희가 십자가에 매달은 그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2:36)
신약성경이 선포하는 진정한 기독교의 메시지는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있다는 것과 그 더 나은 세상은 본래 하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말하고 있는 더 좋은 세상이 이 땅에 생겨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기독교의 날카로움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한데, 특히 미국의 기독교인들에게 더욱 중요합니다. 기독교인이 되고 또한 제국의 시민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요?... 예전에 도로테 죌레가 사용했던 도발적인 구절로 바꿔 말하면, “파라오 집안의 식구가 되는 것과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요약
나는 여러분들에게 내가 기독교인이 됨을 어떻게 특징짓는지에 대한 두 개의 간략한 정의를 남겨둡니다. 첫째, 기독교인의 삶의 가장 중심에는 예수 안에서 결정적으로 알려진 분으로서의 하나님과의 변혁적인 관계가 놓여있습니다. 둘째, 기독교인이란 기독교 전통의 틀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 길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첫댓글 2019년 예수학당에서 마커스 보그 저서 <놀라움과 경외의 나날들>을 공부할 때, 제가 발제한 내용을 올립니다.
함께 공부했던 유성식목사님께서 당신이 운영하는 까페에 이미 올린 글이기도 합니다.
뒤늦게 저도 유성식목사님을 따라서 우리 까페에 올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