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역삼동 KTB네트워크 빌딩 12층 동양물산 회장실. 이곳에 들어서면 특이한 병풍이 손님을 맞는다.학이나 거북의 자수나 명필의 붓글씨 대신 임꺽정.둘리.까치.심술통.하니.악동이 등 함박웃음을 머금은 한국 만화 주인공들이 여덟 폭 병풍 가득 그려져 있다.
그 옆에는 '고바우'김성환 화백이 1950년대 그린 만화로 만든 네 폭짜리 병풍이 다소곳하게 서있다. "4년 전 제 생일에 만화가 선생님들이 캐릭터를 모아 병풍을 만들어 보내주셨어요. 별로 해드린 것도 없는데, 감사하죠. 그리고 이 고바우 병풍은 제 가보 1호입니다."
동양물산 김희용(金熙勇.60)회장의 만화사랑은 유별나다. 68년 미국 인디애나주립대 상대를 졸업한 뒤 그림을 그리고 싶어 다시 같은 대학 상업미술과에 입학했을 정도였다.
"아버님(고 김인득 전 벽산그룹 명예회장)은 경영대학원을 가라고 하셨지만 전 그림을 그리겠다고 우겼죠. 그랬더니 "네가 벌어서 해라"하시더군요. 4년간 정말 열심히 그렸어요. 비록 거지처럼, 히피처럼 살았지만 가장 재미있던 시절이었습니다."아버님이 편찮다는 소식에 어쩔 수 없이 귀국해 71년 벽산그룹에 입사했다는 김회장은 "가슴 한구석에는 지금도 만화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만화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림과 사진 실력이 전문가 수준이지만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일은 만화그리기. 기분좋은 날엔 누드, 우울하면 총이나 칼이 그려진다고. "어릴 적 부산에서 살 때 아버님이 극장도 운영하셨어요. 덕분에 다섯살 때부터 영화간판 그리는 아저씨들 옆에 붙어 살았죠. 쓱쓱 붓질을 하면 금방 찰리 채플린이 되는 게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어요. 경기고 시절엔 시험지 뒷장에 선생님들 얼굴을 만화로 그렸다가 아버지까지 불려오셨을 정도로 된통 혼이 났죠."비록 만화가는 못 됐지만 만화가를 돕는 사람은 될 수 있었다.
10년째 한국만화가협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는 김회장은 재정 형편이 어려운 만화가협회 사무실 보증금도 대주고, 연간 1천만원에 달하는 후원금도 내왔는가 하면 만화가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마다않고 흔쾌히 따라나선다.특히 세계적인 시사만화가 루리와의 친분을 이용해 수년간 개최한 세계 풍자만화전은 화제가 됐었다.
그의 열정에 감동한 만화가들은 11월 2일 오후 2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리는 제2회 만화의 날 기념식에서 감사패를 전달하기로 했다.마침 이 날은 그의 환갑일이어서 겹경사를 맞게 됐다.김회장은 "만화는 그 나라 문화수준을 가장 간결하게 보여주는 척도"라며 "만화가들이 문화혁명의 전사라는 자부심을 잃지 말았으면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