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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서각은 이전과 달리 문자의 사용이 보편화됨으로 인해, 이전의 그림적인 형태 만이 아닌 문자와 결합하면서 본격화된다. 문자의 사용은 이를 종이에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서예와 함께, 서각 예술의 발전을 가져왔다. 나아가 불교의 도래는 불교 의례에 필요한 예술품의 폭발적인 수요를 가져왔고 사찰편액이나 현판 등이 서각의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특히나 불경은 손으로 쓴 필사본이 주류였겠지만, 다량의 제작과 배포를 위해서는 목판을 이용하여 책의 형태로 찍어낸 것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는 나무에 글씨를 새기는 서각 기능이 필수적이다. 불경 등의 출판 수요 증가는 목판본의 제작 시도와 서각의 수요를 가져왔을 것이다.
(1) 고구려의 서각 삼국가운데 가장 먼저 국가의 형태를 이룬 고구려는 가장 먼저 불교를 수용하게 되고, 이때 주조된 불상들 중에는 글씨가 새겨져있어 서각의 한 단면을 였볼 수 있으며 장수왕이 건립하여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위치한 광개토왕비에는 1775자 가량의 예서가 새겨져 있어 고구려의 서각기능인들의 능력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1979년에 발견된 중원고구려비 역시 예서로 쓰여졌다. 현재 남아 있는 이 2개의 석비만으로 추정하긴 곤란하지만, 고구려비는 자연석을 거의 그대로 이용하여 면의 결을 살리면서 서각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 경우에 글씨의 모양은 돌의 면을 고려하여 새겨야 했기 때문에 글자의 크기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또한 글씨 새김면의 구획도 없어, 이를 새기는 사람의 창의와 계획성이 발휘될 수 있었을 것이다.
(2) 백제의 서각 현존하는 백제의 서각 자료는 매우 적은 편이다. 우선 무녕왕릉 발굴과 함께 나온 무녕왕과 왕비의 지석으로 육조체로 새겨져 있다. 또 다른 서각은 사택지적비로 구양순체를 음각으로 새겼다. 백제의 서각으로 돌이 아닌 금속에 새긴 것으로는 일본 나라현에 전해져오는 칠지도가 있다. 칠지도에는 해서로 각이 되어 있다.
(3) 신라의 서각 신라의 서각은 진흥왕순수비 등 고구려와 백제에 비하여 풍부하게 전해져 온다. 4개의 진흥왕순수비 외에도 임신서기석 등 개인들이 제작한 비문도 있어 서각 문화가 그많큼 보편화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4) 통일신라기의 서각 통일신라기는 한반도 영역의 통합에 따른 사회적 발전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화려한 불교 문화를 꽃피운 시기이다. 이 시기 서각사에서 특기할 점은 비문을 새긴 서각자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통일신라기에는 제작자들의 역할이 전문화되고 이름을 남길 정도로, 제작 방식의 변화와 제작자들에 대한 인식 제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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