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 소포
15년 전 아들이 입대하던 날, 춘천은 새벽부터 앞이 안 보일만치 춘설이 펑펑 쏟아졌다.
보충대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아버지의 제의를 간곡한 말로 사양하고, 아들은 기어이 혼자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의정부행 버스를 탔다. 아들은 차창 안에서 함박눈 사이로 손을 흔들었다. 아내는 ‘아들, 잘 갔다 오라’며 웃어보였다.
어떤 엄마들은 울기도 한다는데 아내는 매우 씩씩해 보였다. 동병상련이었을까, 연민이었을까, 아버지인 내가 더 마음이
짠했다. 본인도, 대학을 졸업하고 한 해를 또 학교에서 보내고 또래들은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하는 때에 늦은 나이에 사병으로 입대를 하는 심정이 착잡했을 것이다.
입대가 늦어진 데는 나도 일조했다. 재학 중에 학내 분규로 입대 시기를 놓쳤을 때 나는 기왕에 그렇게 되었으니 졸업을 하고 입대하라는 조언을 했다. 결국은 입대를 연기하고 대학을 마치며 새 학기에 교사로 신규 임용되었는데 곧바로 현역 입영통지서가 나왔다. 두 달도 채 안 있으면 입대를 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근무하는 학교의 교감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초등교육의 특성상 선생님이 학기 중에 바뀌면 어린 학생들 학습에 끼치는 영향이 많으니 입대를 연기하도록 부모님이 설득해 달라는 협조 요청이었다. 어린 아이도 아니고 본인이 판단할 일이겠으나 나는 일언지하에 안 된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군대를 늦게 가는 것인데 또 1년씩이나 연기를 하기는 곤란하다는 말로 교감 선생님에게 사정을 했다. 교육자의 자세까지 내세우는 전화를 다시 받고서야 학교장 명의의 ‘초등학교 교사 입영 연기요청’이라는 공문서를 한 장 들고 병무청을 찾아 상담을 한 끝에 학년을 마칠 때까지 또다시 연기를 하고 말았다. 교육자의 자세를 고민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들이 동의를 했는데, 군대를 가는 것도 이렇게 힘이 들고 어려웠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입대한 아들 녀석이 지금쯤이면 훈련소로 배치되었겠지 하고 지낼 즈음이었다. 커다란 종이 상자의 소포가 집으로 배달되었다. 훈련소로 가기 전 보충대에서 보낸 아들의 옷가지가 담긴 소포였다. 상자 옆면에는 ‘장정 소포’라는 큰 글씨 아래에 ‘이 소포는 귀댁의 자녀가 입영 시 착용했던 옷과 신발입니다.’ 라고 쓰여 있다. 이리저리 돌려보니 바닥을 제외한 각 면마다 안내와 당부의 글로 채워져 있다.
한 면에는 소포 안의 내용물 명세이다. 중량 3kg, 자켓, 상의 3벌, 하의, 속옷, 양말, 신발이라고 적었는데 눈에 익은 아들의 글씨다. 속옷과 양말까지 보내다니 사회에서 입고 간 ‘사제’는 모조리 반납이었다. 또 한 면에는 부대 배치 결과는 육군병적확인 자동 안내 전화 및 인터넷을 이용하라는 안내였는데, 특별한 것은 다른 한 면에 인쇄된 집배원에게 부탁하는 협조문이다.
집배원 아저씨 고맙습니다. 이 소포에는 군에 입대한 자녀의 의류가 들어있습니다. 각 가정에서 부모님이 무척이나 기다리는 귀한 선물입니다. 귀한 선물이 가정에 전해질 수 있도록 부탁드리며, 만약 전해 드리지 못했을 경우에는 위 주소로 반송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위 주소’란 아들이 입대한 경기도 어느 지역의 보충대 사서함이었다.
옛날에도 그랬었나? 어쩐지 아니었던 것 같다.
논산훈련소로 통칭되는 육군 제2훈련소. 나는 40여 년 전, 유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 수용연대의 연병장을 선착순 구보로 이리 저리 뛰고 있었다. 입대가 확정된 장정들을 중대와 소대 단위로 편성하기 위해 줄을 세우는 중이었다. 고향이나 학교 친구들이 서로 같이 지내려고 몰려다닐까 봐 갈라놓으려 한다고 누군가 아는 척을 했다. 기간병들은 열심히 가로세로, 심지어는 사선으로 대열을 가르며 선착순을 시켰다. 나도 수용연대에서 만난 횡성에서 온 장정 한 명과 강원도 고향 까마귀라며 헤어지지 말자고 언약을 했지만 몇 번을 뛰어다니다 헤어져 결국은 같은 중대에도 편성되지 못했다.
그렇게 한바탕 정신을 빼놓고 장정들을 양팔 간격으로 정렬시킨 다음, 시멘트 포대 속지 같은 누런 종이를 한 장씩 나눠주고는 입고 있던 옷은 몽땅 벗어 싸도록 했다. 팬티와 러닝셔츠는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나 특이하게 신발은 제외였다. 입대 전의 정보에 의하면 신발은 집으로 안 보내주니 좋은 신발은 신고 가지 말라는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신고 갔던 헐렁한 운동화는 빼고 옷가지를 행여 풀러질세라 꽁꽁 싸서 끈으로 묶고 포장지에 주소를 써서 광주리에 던졌다. 아들이 보낸 ‘장정 소포’에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서럽고 눈물겹던 시절의 입영 풍경이다.
군대 많이 좋아졌다는 생각을 잠시 하며, 아들의 소포를 보니 ‘이 녀석이 정말 군대를 가기는 갔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추운 날씨에 훈련을 받는 모습이 떠올랐다. 옛날에 다 겪어본 일이건만 자식의 일이라 그런지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지금까지 담담하던 아내도 눈시울을 붉혔다. 아들이 소포 상자 안쪽에 써 보낸 짤막한 편지를 보고 나서였다. 걱정하지 말라는 아들의 염려가 엄마의 감정을 살짝 건드리고 말았다
아버지, 어머니~! 저 잘 들어와서 잘 지내고 있어요. 안 오시길 잘했어요.
눈 오고 사람 많고… 어쨌든 잘 있다 금방 갑니다.~! ―아들 영준
편지지도 봉투도 없는 장정이 옷을 벗어 상자에 포장하는 짧은 순간에 짬을 내서 가족에게 전한 단 두 줄의 안부였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것인지, 그것이 또 자식인 모양이다.
자식을 군대에 보낸 많은 엄마들이 입대할 때 보다, 훈련소에서 보낸 옷 보따리를 받으면 울컥하는 경험을 한다고 한다.
아내 역시 대한민국의 엄마임에 틀림없다. 씩씩했던 엄마의 모성을 자극한 소포 상자에 써 보낸 아들의 편지.
우리 부부는 오래 전 보충대에서 보냈던 소포상자에 쓴 편지를 그 어느 편지보다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중부 전선의 낯선 신병훈련소로 떠나며 남긴 아들의 애틋한 마음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첫댓글 아 긴박한 순간 다급한 마음으로 부모님을 안심시켜드리기 위해 쓴 아드님의 글
마치 제 아들이 보낸 글처럼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듯한 아릿하고 저릿한 느낌이
제게도 애틋하게 전해 지네요
역사 효자 중의 효자!
이 시대 모든 학교 선생님의 귀감이 되는 박영준 선생^^
아드님 참 잘 두셨습니다. 부럽습니다.
그 바쁘신 틈새에, 점심 식사도 못 하셨다면서
과분한 댓글을 달아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댓글을 읽으면서 문득 학영 주사 입영 전야가불현듯 떠오릅니다.
술을 너무 주어서 훈련소로 가다가 혼났다는 후일담도 해주셨는데,
이제는 수도 서울특별시의 공무원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은 모습이 장합니다.
훌륭한 공직자로 대성하기를 늘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