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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815호 [159.10]
해월신사 순도 120주년 특집
“동학은 후천개벽의 운수이다”
- 해월신사의 생애(10)
편집실
해월신사 순도 120주년 특집으로 해월신사의 일대기를 연재한다. 올해는 삼암 표영삼 종법사 환원 10주기 되는 해로 삼암 종법사가 남긴 기록을 중심으로, 여러 기록을 참고하여 해월신사의 발자취를 재구성하였다. /편집실
원평장터 / 글 최순식, 판화 홍선홍
포덕 33년 임진년(1892) 정월에 조병식이 충청도관찰사가 되어 다시 동학을 금지한다고 포고하고 신사의 동정을 살폈다. 신사는 진천군 부창리로 옮겼으며 여기서 통유문을 발한다.
“우리 도는 후천개벽의 운수이며 무극하고 참된 도이다.”
동학에서는 대신사의 득도(1860년 4월 5일)이전을 선천先天, 이후를 후천後天이라 한다. 후천개벽이란 말은 동학의 대표적인 슬로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대신사는 ‘다시개벽’이라 했고, ‘후천개벽’이란 말은 동학 창도 33년째 되던 1892년 새해에 신사께서 처음 사용한다.
‘후천개벽’이란 말은 앞으로 오게 될 새 세상을 여는 것을 의미하는 희망의 메시지로 떠오른다. ‘후천개벽’이란 용어가 처음으로 등장한 역사적인 임진년(1892), 이 해에 때마침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교조신원운동은 바로 동학혁명으로 연결되었으니, 교조신원운동은 바로 동학혁명의 시작이나 마찬가지였다.
공주와 삼례 교조신원운동
5월 신사는 상주 왕실촌으로 이사를 하고 “주문 13자는 곧 사람이고, 밥은 곧 하늘이다.”라고 하였다. 이곳에서 신사는 1892년부터 1893년에 걸쳐 공주와 삼례, 그리고 광화문 복합상소는 물론 보은 장내리 집회도 지도하였다.
7월에 서인주, 서병학 두 사람이 와서 신사를 뵙고 동학의 합법화를 쟁취하기 위해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사교로 탄압을 받았던 서학(천주교)도 자유롭게 포교하던 때였기에 합법화에 대한 교도들의 열망을 전달한 것이다. 그러나 7월은 무더운 여름철이고 농번기였다. 일손을 놓고 큰일을 벌릴 수는 없었다. 신사는 “아직 때가 이르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가을 추수가 끝나자, 신사는 억울하게 처형당한 대신사의 죄를 사면하고 동학을 합법화하기 위해 각지의 동학 조직에 동원령을 내린다. 먼저 충청감사에게 소청하고 연이어 전라감사에게 소청하기로 하였다.
공주감영 선화당(유형문화재92호)
1천여 명이 의관을 정제하고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형성하고 서인주, 서병학 등 8명의 대표가, 공주에 있는 충청감사에게 탄원서(각도동학유생의송단자)를 제출한다. 10월 21일, 공주에서 시작된 신원운동은 정부를 상대로 한 동학 합법화 운동으로 동학 창도 이래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충청감사에게 제출한 탄원서에는 동학의 합법화를 요구하고, 동학 도인들의 삶을 ‘안녕하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혼란의 근본원인이 탐학한 관리들의 수탈과 외세(일본)에 의한 약탈적 무역자유화에 있음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대책마련을 요구한다.
“동학은 이단이 아니다.”
“지금 왜놈 상인들은 각 항구에서의 통상을 통해 이익을 독점하고 전곡을 다 빼내어 가기 때문에 백성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다. 서울과 요해처, 관세와 시장세, 산림천택山林川澤의 이익을 왜놈들이 모두 독점하고 있다.”
“무고한 백성들이 엄동설한에 집을 떠나 사경을 헤매고 남편과 아버지가 헤어져 길가에서 울부짖고 있으니 무슨 죄가 있어 이처럼 감당하기 어렵도록 하는가. 대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이 근본이 견고해야 나라가 평안하게 될 것이다. 무고한 백성들을 구휼해 달라.”
예를 갖추어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의송단자議送單子를 올리자 감사는 사태의 확산을 막기 위해 22일에 제음題音을 내리고 24일에는 각 읍 수령에게 감결甘結까지 시달하여, “아전들에게 명하여 일체로 횡포와 침탈을 못하게 하여 편히 생업을 가지게 하라”고 명령했다.
공주 교조신원운동을 마무리하고 10월 25일경에는 삼례에 도회소를 설치하고 전라감사를 상대로 한 운동에 들어갔다. 10월 29일부터 수천 명이 모여들었고 서인주, 서병학이 앞장섰다. 11월 2일 전라감사 이경직에게 의송단자가 전달됐다. 이때 전봉준과 유태홍이 자원하여 전라감영에 갔다고 한다. 신사는 중도에서 낙상하여 참석치 못했다.
전라감사가 11월 11일에 ‘동학도의 전재錢財를 약탈하는 행위를 엄금하라’는 감결을 각 읍에 시달하자 삼례교조신원운동도 막을 내렸다. 감결을 내렸으나 각 읍에서는 여전히 동학을 탄압하고 있었다. 충청도보다 전라도가 더 심했으며 삼례와 원평에는 오갈 데 없는 도인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동학도들은 해산에 앞서 충청, 호남 양영兩營의 조치가 믿기지 않아 11월 12일에 사후 대책을 마련하고 각 접에 통문을 냈다.
“ⓛ이번에 선생님의 신원을 얻어 내지 못했으니 이제부터 각고의 노력을 다하자. ②양영의 관칙(關飭=감결)은 예측할 수 없으니 각 읍에서 다시 지목하면 소사小事는 인근 각 접에 통지하여 소장을 만들어 본관本官에 제출하고, 대사大事는 도소에 알리면 다시 법헌(法軒=신사)에 알려 의송단자로써 시정토록 하자. ③대의에 나섰다가 가산을 탕진한 이가 많으니 여러 도인들의 의연금으로 도와주자”는 요지였다.
광화문 복합상소
11월 19일 동학지도부는 최후의 수단으로 서울에 올라가 복합상소를 단행키로 했다. “장차 대궐에 나아가 복합할 방도를 다시 의논하니 다음 조치를 기다리라”고 각 포에 통지하였다.
이즈음 전라도에서 ‘서학도들이 동학도를 섬멸하고자 움직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본교역사』에는 “서학하는 자들이 있는 말 없는 말을 보태어 함부로 남을 비방하며 동학을 배척하기를 서도西道에는 신통한 묘술이 있어 공중에 누각도 지을 수 있다거나, 천지를 진동시키는 대포로 능히 동학 도인들을 섬멸할 수 있다는 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했다. 이에 대해 도소는 “서도하는 사람도 역시 착한 본성이 있는데 어찌 공연히 근거 없는 말로써 동서의 교敎를 서로 해치랴. 이는 필시 뜬 말일 것이다”고 하여 유언비어에 동요하지 말라고 경통을 보냈다.
신사는 정부를 상대로 한 교조신원운동은 11월 하순부터 준비하기 시작했다. 11월 하순경 보은 장내리에 동학도소를 설치하고 육임六任을 임명하고 복합상소운동의 준비에 들어갔다.
도소가 설치되자 갈 곳이 없는 도인들이 찾아와 하루에도 수십 명씩 들고 나자 임원들은 손님 맞는데 온종일 매달려야 했다. 그래서 각 접에 경통을 보내어 접주의 인증을 가져와야 출입할 수 있도록 통제조치를 내렸다.
조선시대 광화문
포덕 34년(1893) 1월 중순에는 청원군 솔뫼 손천민의 집에 봉소도소를 설치하고 복합상소의 준비에 들어간다. 1월 20일 “2월 10일까지 한성도소에 참여하라”는 경통을 띄웠으며 선발대가 상경하였다. 2월 8일(양 3.29)은 왕세자 탄신 기념 특별 과거일이라 동학도들도 과시에 나가는 선비로 가장하여 상경했다. 서병학을 필두로 선발대는 2월 1일에 상경하여 도소를 남서南署 남소동南小洞 최창한의 집에 설치했다.
『천도교회사초고』에는 “강시원, 손병희, 김연국, 손천민, 박인호 등이 수만 교도를 솔하고 과유로 분장, 일제히 한양에 부赴하였다”고 했다. 이 때 참석한 인원은 약 천여 명으로 추산된다. 2월 10일에 지도부는 복소 전략을 의논하고 전면에 나설 인사를 선정했다.
『해월선생문집』에는 소두疏頭에 강사원, 간사에 서병학, 손천민, 김연국이라 되어 있다. 그리고 충청도의 박우현, 박광호, 박근서, 임정준, 김여삼, 박원칠, 조재벽, 황하일, 손병희, 임규호와, 호남은 김석윤, 김낙봉, 남계천, 장경하, 조동현, 손화중, 배규찬, 영남의 이문찬, 김경화, 김문팔, 김군오 등이 대표자로 참여했다 한다.
그러나 『동학도종역사』는 “소수 박광호, 제소製疏 손천민, 서사書寫 남홍원, 도인 대표 박석규, 임규호, 이용구, 박윤서, 김영조, 김낙철, 권병덕, 박원칠, 김석도, 이찬문”을 거명하고 있다. 또한 『천도교회사초고』는 “소수 박광호, 제소 손천민, 서사 남홍원, 봉소 손병희, 박인호, 박석규, 임규호, 김낙봉, 권병덕, 박덕칠, 김석도, 이근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 신문에는 30명이라고 보도한 곳도 있다. 광화문 복소에 직접 참여했던 권병덕은 대표자가 9명이었다고하여 차이를 보인다.
대표자의 인선을 마친 10일 오후에는 치성식을 봉행했으며, 11일 아침에는 봉소인 9명이 소장을 받들고 광화문전에 나아가 자리를 폈다. 권병덕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주의를 착하고 9인이 각기 수주를 집하고 주문을 송하니 관람 제인이 운집 사위하는지라 수문군守門軍이 잡인을 금하고 진력 보호하며 궐내에 입시하는 대관이 조복을 착하고 내문하며 외국인도 내문하더라. 오후 5시경에 박석규가 소함韶函을 부하고 도소로 귀하니 교졸은 여관 문전에서 출입을 조사 수직하더라.
일본 신문에도 “광화문 쪽으로 자리를 깔고 상소문을 붉은 보자기에 싸서 앞에다 놓고 일동은 가지런히 앉았다”고 했다. 동학도들이 의외로 의젓하고 당당하게 격식을 갖추니 관에서도 별다른 방해가 없었다. 저녁때는 교졸을 풀어 동학도들이 들어 있는 숙소에 배치하여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감시하는데 그쳤다. 상소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지난 경신년 4월에 경주에서 신臣 제우濟愚는 천명을 받아 사람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불과 3년에 사학邪學으로 몰려 3월 10일에 정형正刑을 받았다. … 본래부터 동학이라 한 것이 아니다. 도는 한울님으로부터 나왔으나 당시 사람들이 서학으로 잘못 알고 배척하자 스승님은 “도는 비록 천도이나 학인즉 동학이라” 했다. … 선성先聖들이 밝히지 못한 대도를 알게 했으니 천하의 무극대도이다. 억울함을 펴게 하여 주시고 정배 간 도인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11일과 12일까지 조정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13일 하오에야 사알司謁이 나와 상소할 요지를 물어다가 상주上奏한 뒤 어명이라 전하기를 “집으로 돌아가 안업安業하면 소원을 들어주리라”고 했다. 정부는 장차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 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해산시키는데 만 급급했다. 기대했던 광화문 복합상소도 임금이 내린 한 마디의 말만 전해 듣고 15일까지 모두 한강을 넘어 해산했다.
공주와 삼례에서는 지역 민중에게 동학을 알리었고 광화문 복합상소에서는 전국의 민중과 외국인에게까지 동학의 위력을 알릴 수 있었다. 또한 삼례 교조신원운동 때부터 외세 침략을 경계해 오던 동학은 광화문 복합상소를 계기로 반외세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때 동학도들이 내건 괘서掛書의 종류를 보면 ①2월 7일자의 괘서는 서학교두에게 경고한 것이고 ②2월 24일(양 4월 10일)자 괘서는 일본인에게 경고한 괘서이며 ③ 2월 18일(양 4월 4일)자 괘서는 서양공관에 경고한 괘서이다.
양반들로부터 무지몽매한 잡배들로 취급되었던 동학도들은 교조신원운동을 통해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잘 조직된 힘을 가진 집단으로 보여 졌으며, 나라를 위한 집단으로 인식되었다. 공주와 삼례에서 시작된 ‘교조신원운동’은 단순히 신앙적 차원의 동학 합법화운동만은 아니었고, 종래 각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민란과도 차원을 달리하는 새로운 형태의 대중운동이었다. 공주와 삼례, 서울에서의 교조신원운동을 통해 관에서 동학도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지 못하는 현실을 지켜보면서 백성들은 이제 동학이 새로운 대안임을 알아차린다.
보은 취회
포덕 34년(1893) 3월 10일(양 4.25)은 대신사 순도 기념제일이라 많은 지도자들이 옥천군 청성면 거포리 갯밭(포전) 김연국의 집에 모였다. 신사는 10일 밤 제례를 봉행하고 척왜양창의운동斥倭洋倡義運動을 벌이기로 단안을 내렸다.
동년 3월 10일에 해월신사, 김연국가에 가서 형례亨禮를 마치고 해월신사께서 방금 보은 장내로 갈 것이니 제군은 각지에 발문하여 팔역 도인을 장내로 모이게 하라 하시다.
참석했던 손병희, 김연국, 이관영, 권재조, 권병덕, 임정준, 이원팔 등은 곧 신사의 명에 따라 각지로 돌아가 행동에 옮겼다. 3월 11일에는 도를 지키고 스승님을 받들며 척왜양과 보국안민을 위해 보은으로 모이라는 통문을 보냈다. 청암 권병덕은 청주로 돌아와 “도인을 일제히 휘동하야 13일에 장내로 진왕하니 도유 회자會者 수만에 달했다”고 한다.
보은 장내리 동학군 집결지
수만 명 동학도들이 충청 보은과 전라 원평에 모였다는 보고를 받은 정부는 긴급 대책을 서둘렀다. 3월 16일(양5.2)에 해산 명령을 내리고, 17일에는 호조참판 어윤중을 양호도어사兩湖都御使로 임명하여 현지로 내려 보내 해산시키도록 했다. 해산명령을 받은 동학도들은 재차 통유문을 발송하여 더 많은 인원을 동원했다. 3월 17일은 종일 비가 내렸고 18일부터 다시 시위에 들어가 옥녀봉 기슭 동쪽 강변에 수백 명이 동원되어 반장이 넘는 석성을 쌓았다.
3월 18일에는 신사가 포명包名을 정해주고 대접주大接主를 공식으로 임명하는 제도 정립이 단행되었다. 포명이 부여되자 포명을 쓴 깃발들이 나부껴 장관을 이루었다. 3월 20일 현재 모여든 동학도는 2만 내지 3만에 이르렀다. 3월 21일자 보은군수 보고에는 전봉준에 관한 기록, 즉 즉 “수두首頭 최시영, 차좌 서병학 이국빈 손병희 손사문 강가 신가 경강 충경접장 황하일 서일해 전라도접장 운량도감運糧都監 명名부지 전도사全都事”라 했다.
양호도어사로 임명된 어윤중은 7일 후인 3월 25일에 보은군 관아에 나타났다. 그는 내려오면서 3월 23일에 해산하라는 문건을 동학도소에 보내는 동시에 자신과 면담할 대표자를 뽑아 두라고 당부했다. 동학 지도부는 허연, 이중창, 서병학, 이희인, 손병희, 조재하, 이근풍 등 7명을 선발했다. 26일 어윤중은 동학도 대표자들과 만나 글로 적은 의견서를 건너 받았다.
왜놈과 양놈을 물리치려는 창의가 어찌 큰 죄가 되어 체포하고 소탕해 버리려 하는가. 저희들은 비록 시골의 천한 백성이나 어찌 왜놈과 양놈이 강하다는 것을 모르리오마는 모두가 왜놈과 양놈을 치다가 죽으면 오히려 삶의 현명한 모습이리라 여기는데 나라에서 칭찬할 일이지 걱정할 일은 아니다. 임금님에게 글로 알리어 저희들의 의리에 좇는 길을 알아주면 감히 돌아가리다.
『취어』에는 대표자들의 주장을 간략히 정리한 기록이 있다. ①광화문 복소 때 어명을 믿고 퇴산했으나 달라진 것이 없으며 ②우리의 의거는 척왜양에 있으며 ③동학을 모함하는 쪽은 서학일 것이며 ④장계를 다시 올려 우리들에게 새로운 혜택을 베풀어 달라고 했다.
어윤중은 비폭력적이며 결의에 찬 동학도들의 행동을 보고 느낀 점이 많았다. 그는 3월 27일에 자신이 판단한 대로 장계를 올렸다. 동학도를 만난 경위와 동학도들의 주장을 간략히 적고 있다.
신은 이달 18일에 내려주신 봉서를 받았다. 26일에 공주영장 이승원 등과 장내리 당민黨民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제출한 글에 의하면 단지 척양척왜하여 충성하려는 것인데 비류匪類로 취급함이 지나치다고 했다. 이제 스스로 물러가면 비류로 오인받을 것이니 우리의 실정을 품달하여 적자赤子로 인정한다는 분명한 명지明旨을 베풀어주면 퇴산하겠다고 했다. 곧바로 퇴산시키지 못하고 장계를 올려 삼가 처분을 기다린다.
3월 26일이 되자 수원과 용인에서 300여명이, 그리고 27일에는 호남 영광에서 100여명이 새로 왔다. 28일에는 수원접에서 6~7백명이 와서 장재평에 설진했다가 29일에 장내리로 들어 왔다. 그리고 경상도 상주, 선산 접에서도 100여명이 왔고 태안 접에서도 수십 명이 왔다. 3월 30일에는 장수접에서 1백 30명, 영암, 무안, 순천, 인동, 지례접에서 2백 60여명이 호수부의湖水赴義, 호장대의湖長大義, 호남수위湖南水義라 쓴 깃발을 펄럭이며 잇따라 왔다.
관원들이 돌아가라 하자 “우리는 몇 백리를 멀다 않고 왔는데 어찌 허황하게 돌아갈 수 있겠는가.” 하며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당당하게 들어왔다. 해산해야 할 동학도들이 새로 모여들자 어윤중은 불안하기 이를 데 없었다. 3월 27일에 보은 군수 이중익을 다시 급파하여 “왕명을 받들어 퇴산한다 하고서 어찌하여 퇴거하지 않으며 깃발도 내리지 않고 있는가” 추궁하게 했다. 동학도들은 “많은 사람들이 깃발을 보고 자기 접을 찾아가니 등燈으로 바꾼 다음 깃발을 거두겠다. 그리고 노약자들을 돌려보냈으나 각 읍 경계에 있는 군교들이 막고 있다. 또한 통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계속 오고 있다”고 해명했다.
한편 3월 28일에 조정은 어윤중의 제1차 장계를 심의하고 나서 해산하라는 윤음을 내렸다. 29일 조정은 청주진 영장 백남석과 병영 군관 조기명에게 전보로 윤음을 하달하는 동시에 친군 장위영 정령관 홍계훈에게 병력 6백 명을 주어 내려가도록 했다. 윤음을 전해 받은 어윤중은 4월 1일에 보은 군수를 대동하고 장내리로 달려갔다. 그는 동학도들에게 윤음을 봉독해 주고 3일내에 퇴거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국왕은 동학의 모임을 난으로 규정하고 조금도 포용하려 하지 않았다. “만일 이 타이름을 들은 후에도 너희들이 계속 뉘우치지 않고 해산하지 않으면 나는 마땅히 큰 처분을 내릴 것”이라고 하여 속임수와 협박으로 일관되어 있다.
한편, 보은에 1백 명의 군대를 진주시킨 상황에서 동학지도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5일간의 여유를 달라고 했으나 어윤중은 3일 이내에 퇴산할 것을 명령했다. 장장 20일간을 버텼던 동학도들은 식량난마저 겹쳐 더는 버티기가 어려웠다. 교도들은 농사철이라 마음은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신사는 눈물을 머금고 퇴산을 명령했다. 사실상 동학도 일부는 3월 30일에 퇴거하기 시작했다. 상주접, 충경접, 공성접, 김산접, 안동접이 퇴거했으며, 성주, 김산, 상주접원도 퇴거했다. 결국 신사의 명에 따라 4월 2일(양5.17)부터 동학군은 장내리를 떠나갔다.
신사도 해산을 확인하고 저녁에 상주 왕실 본댁으로 돌아왔다. 금구 원평에 모였던 동학도들도 보은에서 해산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해산했다. 그러나 정부는 약속과는 달리 곧 중요간부들을 체포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4월 10일에 국왕은 “서병학의 입을 통해 발문을 짓고 방을 붙인 자의 이름이 밝혀졌으니 당연히 사실을 조사해야 할 것이다. 호서의 서병학, 호남의 김봉집金鳳集, 서장옥을 체포하여 가두어 조사해서 보고하라”고 했다.
보은․원평 집회는 산회했으나 동학운동에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수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실력을 보여주었고 포包제를 신설하여 단위조직을 일사불란하게 관리하게끔 했으며, 높은 질서의식을 발휘하여 정치적으로도 척왜양의식과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차원으로 높일 수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참고자료
『동학의 발자취』(표영삼 지음)
『동학도종역사』
『시천교종역사』
『본교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