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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열 말씀 강론 05
출애굽기 20:7
여호와의 이름
십계명을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계명이고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사람에 대한 계명으로 구분하여 해석하려는 사람들은 1계명은 예배의 대상, 2계명은 예배의 방법, 3계명은 예배의 태도, 4계명은 예배의 시간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이런 구분은 우리가 십계명을 행위로 지켜 하나님께 예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앞서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는 이런 바탕에서 세 번째 계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거론하면 안 된다든지 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거나 서원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기 두려워서 성경을 읽을 때 “여호와”(혹은 야훼)라는 표현이 나오면 “아도나이”(주님)라고 읽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이름을 장난스럽게 부르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함부로 농담하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이기에 습관적으로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는 것도 조심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열 말씀이 언약의 말씀으로 그 안에 온전한 진리를 담아 생명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라면 우리는 결코 이런 식으로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가? 흔히들 “여호와”가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여호와에 대한 여러 호칭, 예컨대 “엘샤다이, 샬롬, 닛시, 라파, 이레, 삼마”라고 붙인 것을 가지고 여호와의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의 이름은 없다. 히브리어 “엘로힘”을 번역하면서 ‘하나님’이라고 지칭하였는데 하나님을 부르는 제대로 된 이름이라고 할 수가 없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에 보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 3:14-15)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란 히브리어로 ‘예흐예 아쉘 예흐예’이다. 직역하면 ‘나는 나다,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라는 말이다. 하나님만 존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있는 자”가 결코 이름이 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모든 호칭은 하나님의 일하심이나 본성을 부분적으로 나타낸 별명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없다. 아니 이름을 가질 수 없는 분이다.
이름이란 그 이름을 가진 사물의 특성 혹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인격이나 속성을 담아 표현하는 것으로 그 존재 자체를 나타내는 말이다. 아담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것은 동물들의 본질이나 그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고 동시에 그 동물들을 다스리고 있음을 나타내는 행위이다(창 2:19). 이름은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붙여주는 것이기에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다스린다는 뜻이 된다. 이런 점에서 이름을 가진다는 것은 이 땅의 존재에게만 필요하다.
결국 “여호와”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이름이라기보다 그분의 존재 자체를 나타내는 방식일 뿐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없다면 망령되게 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이런 점에서 우리는 망령되게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열 말씀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나타내셨는가를 통해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과 언약의 관계에 있다는 의미로 자신의 존재를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는 이름이 없지만 굳이 이렇게 표현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연관하여 생각해야 한다. 즉 5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히, ‘엘 칸나’)으로 나타내신 것과 관련이 있다. 똑같은 단어를 이사야 9:7에서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번역하였기에 우리는 같은 의미로 이해하였다. 언약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셨고 또한 자신의 열심으로 우상을 섬기지 않는 자들로 만드시겠다는 의미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언약을 성취하시는 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이루신다는 뜻임을 앞에서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이 말씀도 열 말씀으로 언약의 말씀이라면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야 한다.
“망령되게”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솨브’인데 ‘헛된 것, 악한 것, 허탄한 것, 거짓말, 속임수’라는 뜻으로 상징적으로 우상숭배와 동의어로 쓰이는 말이다. 에스겔 13:6-9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허탄한 묵시”를 보고 거짓된 점괘를 전한다고 하였다(겔 22:28). 그리고 “부르지 말라”라는 말은 ‘나사’인데 ‘들어 올리다, 붙잡다, 대면하다, 마주 서다’라는 뜻이다. 즉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라고 번역된 말 그대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의 뜻을 반영하여 이해하자면 ‘여호와의 이름을 거짓되고 허탄한 것으로 생각하고 마주 서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였는데 “죄 없다”라는 말은 ‘나카’인데 ‘용서받다, 깨끗하다, 정결케 되다’라는 뜻인데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라고 앞에 강한 부정의 표현인 ‘로’가 붙었기에 ‘정결하게 되지 못할 것이다’라는 뜻이다. 즉 진리의 말씀이신 하나님 안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마주 서 있으면서 스스로 율법을 가지고 거짓되게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열심에 도전하는 것인데 그런 것으로는 결코 정결하게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결국 이 말씀을 언약의 관점에서 정리하자면 ‘여호와의 이름을 거짓되고 허탄한 것으로 여기고 마주 서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거짓되게 하는 자는 정결하게 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열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우상을 섬기는 자리에 두지 않겠다고 언약을 하신 하나님께서 또한 진리의 말씀을 대항하여 속임수나 거짓되게 붙잡는 자를 내버려 두지 않고 정결한 상태가 되도록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렇게 만드시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도 이렇게 선포하셨다.
2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2 인자야 이스라엘 땅에서 이르기를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사라지리라 하는 너희의 이 속담이 어찌 됨이냐 23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속담을 그치게 하리니 사람이 다시는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이 속담을 사용하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고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날과 모든 묵시의 응함이 가까우니 24 이스라엘 족속 중에 허탄한 묵시나 아첨하는 복술이 다시 있지 못하리라 하라 25 나는 여호와라 내가 말하리니 내가 하는 말이 다시는 더디지 아니하고 응하리라 반역하는 족속이여 내가 너희 생전에 말하고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겔 12:21-25)
첫 번째 계명에서 ‘다른 신’이라는 말의 의미를 단순히 세상에서 사람들이 섬기는 신이라는 개념으로서 다른 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2인칭으로 삼고 마주 서 있는 자’라는 뜻으로 이해하였다. 모든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1인칭이 된 존재로 스스로 하나님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이름을 내고 명예를 위해 사는 존재이며(창 11:4) 또한 하나님을 대항하여 마주 서 있는 원수이다(롬 5:10, 8:7). 인간은 항상 하나님을 대적한 상태로 있기에 존재 자체가 악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모든 인간은 마귀에게서 나서 마귀를 아비로 여겨 하나 된 존재이기에 그 속에서는 결코 진리가 나올 수 없고 악을 쏟아 놓을 뿐이다(마 12:34-35).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로서 존재 자체가 생명이며 진리이며 선이시다. 그러므로 오직 그분만이 진리를 넘겨주실 수 있는 분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로 친히 이 땅에 오셨고 언약의 죽음을 이루셨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로 죄의 권세에 매인 자기 백성들을 대속하시어 진리의 말씀이 되게 만드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요 6:20)라고 하셨는데 “내니”(헬,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이 구약에서 “스스로 있는 자”(히, ‘예흐예 아쉘 예흐예’)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고 또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열심을 그대로 보여주신 것이었다. 이 일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임을 이 땅에 오실 때부터 나타내셨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름이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구약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요 12:13)라고 하였다. 요엘서 2:32에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라는 말씀을 베드로 사도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행 2:21)라고 하면서 이스라엘을 사람들을 향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라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스스로 이루어 낼 수 없는 일이다. 언약의 성취는 오직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 율법을 가지고 계명을 지켜서 나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신다는데 나의 열심으로 가능하다고 우긴다. 주일성수하며, 예배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 하고, 십일조 바쳐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며, 내가 사회적으로 성공해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전도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고 대적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구원이란 우리가 한 일이 없어도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 된 상태를 말한다. 그러기에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나온 바울 사도의 고백이 바로 다음과 같은 것인데 이 고백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바울 사도는 자신이 받은 구원의 은혜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하였는데 “내가 나 된 것”(헬, ‘에고 에이미’)라는 말이 바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여 존재 자체를 나타내신 것과 같은 표현이다. 성경에서 은혜라고 표현한 것은 죄악 가운데서 구원이 이루어진 것을 뜻하는 말이다. ‘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 된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자신을 하나님께서 복음 전도자로 삼아주셨기 때문에 감사해서 그것이 은혜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의 완성을 나타낸 말이다. 즉 상대방에 의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상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 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20230614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