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최목사님이 신방하러 왔다. 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거실 한쪽에 서있는 턴테이블에 관심을 가졌다. 이것이 돌아 가냐고. 지금까지 어떻게 고장이 안 나고 가지고 있었냐고 신기해했다. 뭔가 여백이 느껴지는, 나팔이 달려 있는 빈티지풍의 턴테이블이다. 아직까지 내가 간직하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턴테이블은 좋은 소리가 난다. 벌써 써 온지가 30년은 넘었다. 단순한 모델이어서 고장이 나지 않은 것 같다. 나팔만 안 달렸으면 조그마한 나무상자 같은 모습이다. 오래된 기계라 고장 날수 있겠지만 이대로 가면 평생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우리 부모님은 음악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오일장을 다니면서 곡물 장사를 하는 아버지는 잠자는 시간 외에는 집에 없었고, 엄마는 집안일을 하느라 늘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우리 집에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다.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산 밑의 조금 높은 곳에 있는 집은 길게 일자형이었다. 턴테이블이 놓여 있는 마루는 집 벽에 딱 붙어있었다. 마루에 서서 보면 멀리 강물이 흐르는 것이 보인다. 그때 엘피판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최희준의 <인생은 나그네길>이었다. 다른 노래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그 노래를 늘 흥얼거렸었다. 누가 들으라고 해서 들은 것이 아니다. 혼자 자발적으로 듣고 따라 불렀었다.
엘피판은 돌고 있었고, 나그네길 노래도 돌고, 그 노래를 듣는 나도 돌고, 그리고 점점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소리가 나지 않게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나는 늘 혼자 놀기를 잘했으며 사람들한테 정을 별로 주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노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입속으로 조용히 흥얼거렸다. 가요 중에 유일하게 부를 줄 아는 노래이다.
결혼할 때, 직접 목각해서 만든 조그마한 화장대 하고 이 턴테이블을 혼수로 가지고 왔다. 화장대는 자주 이사를 다녀서 조각한 부분이 부러져 벌써 오래전에 버렸다. 턴테이블은 아무런 조각도 없고 밋밋한 것이 단단한 나무로 되어있었다. 서울로 이사 올 때도 크고 좋은 가구들은 다 버려도 이것만은 가지고 왔다.
턴테이블이 우리 집에 처음 있었을 무렵에 더 이상한 것은 책꽂이에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꽂혀 있었다. 한글을 익히고 처음 읽은 책이었다. 가족들은 아무도 그때 내가 그 책을 읽었는지 몰랐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한 구절, “이렇게 하루가, 우울하고 불쾌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의 행복하기까지 한 하루가 마감되었다. 이런 날들이 그의 형기가 시작되는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만 10년을, 그러니까 3653일이나 계속되었다.”
이 책을 누가 사 놓았을까. 턴테이블만큼이나 우리 부모님들은 책하고도 거리가 멀다. 아버지가 곡물장사에 도움이 되는 책을 사러 서점에 갔다가, 하루생활이라는 것을 오일장을 다니는 장돌뱅이의 하루로 오해하고 샀는가. 올해 로서 내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 온지 만10년이 되는 해이다.
나팔이 달린 빈티지풍의 턴테이블. 최희준의 ‘인생은 나그네길’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나는 그동안 이 세 가지를 골똘히 생각해 본적이 많았다. 하지만 늘 그냥 생각으로 끝나버렸다. 생각속의 생각들을 끄집어내어 버려야 하는데.
나는 어릴 때 벌써 몸이, 마음이, 먼 훗날 할머니가 되어서 서울에서의 나그네 생활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입속에서는 끊임없이 ‘인생은 나그네길’을 부르고 있었으니까.
오래 되어서 빛나는 매력을 지닌 턴테이블은 나와 상징성이 같으며 함께하는 운명체이다. 그것은 내 이름이 이을 연, 빛날 희, 이어서 빛난다는 뜻이 있다. 그리고 턴테이블과 나는 몇 십년동안 한 번도 떨어져서 지내 본적이 없었다. 그것의 본질적인 가치는, 내가 즐겨 듣는 노래로 살아있는 움직임을 느끼게 해준다. 나의 기호와 나팔에서 모아서 나오는 소리가 정확히 합치된다고 할까, 나에게 턴테이블은 나를 보고 있는 바로 곁의 보물이 되었다.
나이 먹어서 좋을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지만, 나 또한 우두커니 서있는 턴테이블이 되었다. 하지만 내입에서는 좋은 노래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내 노래 소리를 듣는 사람들은 누구든 빈티지턴테이블 같이 빛나는 매력을 나타낼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