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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4 : 충청도 공략, 탄금대에서의 신립의 배수진
04.08.21
일본군이 부산진성과 동래성, 밀양성을 격파하며 파죽지세로 북상을 시작하자, 경상 순찰사 김수는 제승방략의 동원체계에 따라 군사를 모집, 정해진 위치에 대기하라고 각 고을에 통지하였고, 이에 따라 문경 이하의 수령들은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로 집결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지휘할 총지휘권자인 순변사 이일이 며칠이 지나도 도착하지 않았고, 이 지역의 지휘관인 박홍과 이각은 행방불명되어 연락이 되지 않았다.
순변사에 임명된 이일은 서울을 떠나기 전 한양에서 300여 명의 군사를 모아서 내려갈려 하였으나, 양반자제들은 모두 병역 면제 대상이었고, 그나마도 대부분은 이를 기피하였고, 모병에 응한 이들은 대부분 한량, 건달들이어서 3일동안 군사를 모으지 못하여 출발이 늦어지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이일과 군관몇명과 약간의 병사만이 먼저 출발을 하였고, 군사는 별장 유옥이 모집하여 뒤따라가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지휘관도 나타나지 않은데다가 연일 큰 비가 내려 군량마저 바닥이 나자 군사들의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었고, 마침내는 야음을 틈타 도주하기 일까지 벌어졌다.
제승방략의 약점이 그대로 들어나는 사태였다.
더구나 일본군이 내습해 온다는 유언비어마저 돌기 시작하자 일반병사들 뿐만 아니라 수령방백들마저 하나 둘 도망하여 이일 등이 문경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대구에 모여있던 군사들은 모두 흩어져 버린 상황이었다.
이일은 문경을 거쳐 23일에 상주에 도착하였는데, 성을 지켜야할 상주 목사 김해는 산 속으로 달아나 버렸고, 판관 권길이 혼자서 상주 일원을 지키고 있었다.
이일은 먼저 창고를 열어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군사를 모집하여, 농민 8백여 명이 모이게 되었다. 이일은 이들 농민병과 휘하에 데려온 군사 60여 명을 합하여 군을 편성하였다.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사실상 최초로 편성된 조선의 주력방어군인 셈이다.
23일 저녁에 개령에 사는 한 사람이 이일을 찾아와 적이 근방까지 왔다고 알려 왔으나, 이일은 이 정보를 믿지 않았고, 오히려 개령 사람을 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나 고니시가 이끄는 일본군 제 1번대는 19일 밀양을 접령한 후 21일에 대구로 진출, 대구에 무혈입성하고 24일 낙동강을 도하하여 선산에 진출하여 이날 저녁 상주 남쪽 20여리 지점인 장천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일은 다음날 아침이 되어도 일본군이 나타나지 않자 옥에 갇혀 있던 개령사람을 [민심을 혼란케 하였다]라는 죄명으로 처형하였다.
이일은 아침부터 군사들을 상주성 북쪽의 북천(北川) 강변으로 데리고 나가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산을 의지하여 진을 치고, 진 가운데 대장기를 세운 후 이일은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종사관 윤섭과 박지, 그리고 판관 권길과 사근찰방 김종무 등은 말에서 내려 이일의 말 뒤에 서게 하여 대장의 위세를 갖춘 후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일는 적이 어느정도까지 진출했는지 알아보지도 않았고, 군사훈련을 시키는 와중에 그 주변지역에 보초도 내보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군은 몇 차례나 척후병을 보내 조선군의 상황을 일거수일투족까지도 정찰하고 있었고, 훈련을 받고 있던 군사들은 정찰을 하고 있는 일본군 척후병들을 발견하였지만, 아침에 죽은 사람이 생각나 감히 보고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조선군 병사들이 훈련을 하고 있던 중 상주성 안 두 어 군데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이일은 급히 군관 한명을 보내 알아보내도록 하였는데, 군관이 다리 밑을 지나가던 순간 다리 밑에 숨어 있던 일본군 저격병이 조총으로 저격한 뒤 목을 베어 가지고 사라져 버렸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조선군 병사들은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기세가 꺾였다.
잠시 후 일본군 본진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조선군을 사면에서 포위해 압박하였다.
대부분이 농민들인 이일 군은 불시에 일본군의 대규모 기습 공격을 받자 크게 동요하였고, 일본군은 더욱 요란한 소리를 내며 쉴새없이 조총을 쏘면서 접근해 갔다. 이일군은 활로 응사하였으나, 전투가 벌어진 지 얼마 안되어 후퇴를 거듭하였다.
이일이 '나가서 싸우라'고 독전하였으나 뛰어나가는 자는 몇 사람 되지 않고 도망치는 자가 더 많았다.
한성에서 데려온 60 여 명의 군관들만이 겨우 가까이 온 일본군을 향해 활로 응사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일은 단신으로 말을 타고 적진에 뛰어들어 격전을 벌였으나, 전세가 절대적으로 불리해지자 산길을 타고 전장을 탈출했다.
군관 두명이 이일을 따라 도주에 성공하였다.
남은 군사들은 장수가 도망친 뒤에도 마지막까지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역부족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순변사 이일은 그 길로 문경에 이르러 패전을 조정에 알리고 조령에 있던 조방장 변기와 충주의 신립 진영으로 갔다.
26일 일본군 선봉이 문경을 공략하였지만, 성은 비어 있었고 백성들은 보이지 않았다. 텅 빈 성 안을 수색하고 있던 일본군이 관아 앞을 지나는데 갑자기 화살이 쏟아졌다.
현감 신원길이 20여 명의 결사대와 함께 숨어 있다가 기습을 한 것이다. 신원길은 곧 잡혔고, 끝내 항복하지 않아 참살을 당하였다.
소백산맥 최고의 요새인 조령은 조선군이 지키지 않고 있었다.
척후를 보내 이 사실을 탐지한 일본군은 유유히 조령을 넘어 28일 전군이 충주 남쪽 단월역에 진출했다.
침공 10여 일만에 경상도지역을 석권하고, 이제 그 칼끝을 충청도로 돌려 북상하기 시작한 일본군 앞에 소백산맥이라는 험준한 천험의 장벽이 길을 가로막아섰다.
당시 소백산맥에는 3곳의 관문이 있었다.
하나는 소백산과 도솔산 사이의 죽령으로 경상도 영주와 충청도 단양을 잇고 있고, 다른 한 곳은 주흘산과 백화산 사이의 조령으로 경상도 문경과 충청도 괴산-충주를, 마지막 한 곳은 또 하나의 백화산과 황학산 사이의 추풍령으로 경상도 금산과 충청도 옥천을 잇고 있었다.
소백산맥은 침공하는 일본군으로서는 큰 장벽이었지만 수비하는 조선군에게는 하늘이 준 천연의 지형이었으므로 당연히 조선군은 이 관문을 지켜야 했었다.
4월 26일 조선의 3도 도순변사에 임명된 신립은 부장 김여물과 80여 명의 군관을 이끌고 충주에 도착하였다.
충주목사 이종장이 충청도 군현의 군사 8,000 여 명을 모아 놓고 신립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전쟁이 터진 이후 가장 규모가 큰 조선의 정규병들이었다.
(※주:이 당시 신립의 휘하의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이 있습니다. 일단 한국과 일본의 기록을 유추했을 때 8천명정도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정설입니다.
하지만 이 중 알려진 대로 얼마정도가 기마병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많이 있습니다. 이 문제 역시 한국과 일본의 기록으로 볼 때 최소 4천명은 되었으리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훈련상태나 무장 상태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신립은 충주의 단월역에 군사를 주둔시킨 후 충주 목사 이종장과 부장 몇 사람을 거느리고 조령(鳥嶺)으로 지형을 정찰하러 나갔다.
이때 종사관 김여물등이 「적군은 대병력이고 우리는 병력이 적으니 정면으로 싸우면 전세상 불리할 것 같으니 마땅히 부근의 험하고 중요한 지형을 지키고 복병을 배치하였다가 적이 협곡 안으로 들어오면 좌우에서 일제히 공격하여 격멸하고 만일 적의 공격을 당할 수가 없으면 차라리 물러가 한성으로 들어가서 지키는 것이 좋다」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충주목사 이종장 역시 「적은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우리가 넓은 평지에 있는 것은 옳지 못하고 험한 곳을 지키는 것이 제일 좋은 방책이다. 그러므로 넓은 들에서 싸우는 것은 불리하니 조령의 험한 곳을 의지하여 깃발을 많이 세우고 연기와 불로 적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적을 기습하여 승리하는 방책으로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신립은 「적은 보병이고 우리는 기병이니 넓은 들에 맞아 들여 용맹한 기병으로 물리치는 것이 이기게 될 것이요, 또한 적은 이미 영 밑에 와 있다고 하니 우리가 영(嶺)위에까지 나가서 진지를 확보하기에 앞서 적과 서로 부딪치게 된다면 사세가 위태롭지 않겠소. 뿐만 아니라 우리 군사들은 모두 훈련이 미숙한 새로 뽑은 군사인데 더구나 그들은 평소에 의사가 소통되지 못하였으며 상하가 단합도 충분하지 못한 즉 이제 사지(死地)에 넣지 않으면 그 투지를 드높일 수 없을 것이요」라며 조령 방어를 포기하였다.
김여물은 신립이 새재를 포기한다는 생각이 굳어지자 「그렇다면 새재의 여러 곳에 깃발을 꼽고 허수아비를 배치하자. 그러면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킬 수 있을 것」 이라고 조언했지만 신립은 이것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잠깐 이 문제에 대해 잡담을 하면...
신립은 원래 야전에서 대규모 기병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것을 특기로 삼았다고 합니다.
신립이 명성을 떨치게 되었던 북방의 여진족 니탕개와 싸울 때에도 야전에서 기병을 활용하여 적을 물려쳤습니다.
이렇듯 기마전으로 명성을 떨친 신립이 기마대를 거느리고 방어전을 택하기보다는 야전(野戰)을 택한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주변이 논들인 저습지대를 결전장으로 삼은 것은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물론 태반의 조선병사들이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백성들이었고, 그나마 대부분이 일본군의 조총과 무력 앞에서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하는 일이 많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군사들을 사지로 넣어 전투력을 높일려는 생각은 아주 이해 못할 부분은 아닌 듯 싶습니다.
어쨌든...)
그 때 상주에서 패한 이일이 충주 단월역 신립의 진영으로 찾아왔다.
이일은 신립에게 「적은 경오(庚午), 을묘(乙卯)때의 왜적과 다르고 북쪽 오랑캐 같이 치기 쉬운 적이 아니니 물러가서 지키는 것만 못하다」라고 건의하자, 신립은 크게 화를 내며 이일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또 다시 우리 군사까지 망쳐 놓으려는 것인가」하고 크게 책망을 하였으나, 곧 이일과 변기 두 장수를 선봉으로 삼아 지난날의 죄를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도록 했다.
신립은 군사를 이끌고 충주성으로 들어갔다.
4월 26일 일본군 선봉이 상주를 출발하여 함창을 거쳐 문경에 도착하였다.
현감 신길원이 20 여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일본군을 기습하였으나 곧 잡혔고 끝내 항복하지 않아 참살을 당했다.
27일에 문경을 출발하여 조령을 넘었고, 28일 아침에는 안보역을 지나 정오경에는 충추 남쪽 단월역에 다달아 척후로 하여금 조선군의 상황을 정찰케 하였다.
신립도 27일 정찰병들로부터 일본군이 새재를 넘었다는 정보를 들었으나, 직접 말을 타고 새재를 정찰한 결과 일본군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자, 정찰병을 허위보고죄로 참형에 처하였다.
그날 밤 충주성 안에서 작전을 계획하였는데 한신(韓信)의 고사에 따라 탄금대 부근에서 배수진을 치기로 결정하였다.
신립은 바다를 건너와 북상하는 적의 피로한 틈을 타서 이들을 평지로 끌어내어 갑자기 몰아치는 전법을 쓰기로 한 것이다.
28일 아침 일찍히 신립은 군사 8,000 여 명을 거느리고 충주성을 떠나 탄금대로 출발하여, 남한강과 달천이 합치는 중간지대의 저습지에 진을 치고 적이 남쪽 산간에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탄금대 동남쪽 들판은 습지였다. 더욱이 며칠 전에 비가 와서 발이 푹푹 빠졌다.
이때 군관 이운룡이 배수진을 보고 "사지(死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고 울면서 만류하였지만, 신립은 크게 화를 내며 그에게 곤장 30대를 때렸다.
조선군의 진용은 총지휘관인 도순변사 신립 장군, 순변사 이일, 조방장 변기, 종사관 김여물, 충주목사 이종장 등이 대오를 정비하고 있었다.
한편 적은 정오부터 공격준비를 시작하였다.
좌익대장 마쓰우라의 3,000병력, 우익대장 종의지의 5,000병력, 중앙에는 대장 고니시(小西行長)의 직할부대 7,000 병력이 합하여 1만 5천명이 공격에 직접 참가하였고, 아리마, 오오무라,고지마등이 거느리는 3천 7백명은 예비대로 충주성에 위치하고 있었다.
적은 좌익부터 달천 우안의 본도를 따라 전진하고 나머지 부대는 충주 본 가도를 따라 탄금대에 접근하여 삼면에서 포위 공격하려 하였다.
신립이 명령하여 진을 치던 지역의 서쪽과 북쪽은 달천과 남한강이 막고 있으며, 동쪽과 남쪽에는 지금은 달천강의 제방을 하고 관개가 되어서 옥토가 되어 있으나 당시는 늪으로 되어 있고 갈대가 우거진 갯벌이어서 군사활동이 적당치 않았으며 더욱이 기마병이 말을 타고 달리며 싸우기는 불편한 지역이었다.
신립 장군은 종사관 김여물에게 장계를 초하게 하였는데, 김여물은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전투가 준비된 복장으로 붓을 잡고 장계를 썼다고 하니 당시 상황이 급박함을 짐작하게 한다.
전세가 더욱 급하게 되자 신립은 1차로 기병을 돌격시켰다.
일천기의 군사가 일제히 칼과 창을 들고 함성을 지르며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공격하였다. 적은 보병이라 조선군이 조금 우세한 형태로 진행되었다.
전세를 파악한 신립은 다시 2차로 1천명을 혼전하는 싸움터에 진격시켰으나, 피아의 사상자만 내고 일진일퇴하였다.
신립은 3차로 2천명의 기병을 모두 돌진시키니 말의 돌진소리, 조총소리, 인마의 고함소리가 탄금대 벌판을 뒤덮었다.
하지만 말을 타고 달려오는 기마병은 일본 조총부대의 말 그대로 '밥'이었다.
일본군의 대기마전술은 기마대책용 목책을 세워 기병의 접근을 막은 후에 조총 사수들을 일렬로 사선(射線)에 늘어세운 후 멀리서 달려오는 적들에게 일제사격을 퍼붓어 화망을 구성하여 한꺼번에 적을 물리치는 부대 단위 전투였다.
전세를 지켜보던 신립은 김여물을 남겨 놓고 직접 나머지 군사를 이끌고 마지막 돌격을 감행하였으나, 벌떼 같이 덤벼드는 적병을 어찌할 수 없어 되돌아오니 종사관 김여물이 말을 타고 최후의 총돌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립이 웃으며 하는 말이 「그대를 이 위기에서 살려 볼까하오」하니, 김여물은 빙긋이 웃으면서 「이 사람이 어찌하여 죽음을 피하는 사람이 되오리까」하고 같이 말을 달려 총돌격의 선두에 서서 깊이 적중으로 들어가니 적진이 크게 흔들렸으나 이미 전세를 돌리기에는 늦었다.
신립과 병사들은 밀리고 밀려 상당수가 남한강 물에 빠져 익사하였다.
나머지 군사들은 충주목사 이종장과 조방장 변기의 지휘 아래 굳게 뭉쳐서 배수진을 끝까지 지키다며 필사의 힘을 다하여 적과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
이로써 조선군의 두번째이자 사실상 가장 큰 규모의 정규군이 궤멸하였고, 사실상 한양까지의 문이 열려져 버렸다고 할 수 있다.
순변사 이일은 신립의 뒤에 따라 가면서 조총을 피하다가 사잇길을 쫓아 산중에 들어 간 다음 적병 수 명을 만나서 활로 쏘아 죽이고 한강을 넘어 북으로 달아났다.
이일은 사람을 시켜 장계를 급히 조정에 올리게 하니 조정에서는 비로소 충주전투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패전의 소식을 접한 조정은 한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