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서 본 상윳따, 꼬살라(Kosala) 6
제 1 장 첫 번째 품
적음 경(Appakā sutta)
적다고 할 때 압빠까(appakā)라고 한다. 압빠까(appakā)는 적다, 작다, 많지 않다, 거의 없다, 사소한 등의 뜻이 있다. 법구경 게송에 ‘고통의 바다를 건너 열반에 이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할 때의 ‘많지 않음’이다. 감각적 욕망이 소멸하여 집착을 끊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은 그만큼 아라한이 되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꼬살라 왕이 세존께 질문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차츰 지혜가 더 깊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적음 경의 본문입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와나 숲의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꼬살라 국의 빠세나디 왕은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는 세존께 인사를 올리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한쪽으로 물러나 앉은 꼬살라 국의 빠세나디 꼬살라 왕은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제가 한적한 곳에 가서 홀로 앉아있는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에서 막대한 재물을 많이 얻었지만 거기에 취하지 않고 게으르지 않고 감각적 욕망을 범하지 않고 다른 존재들에게 죄를 짓지 않는 존재들은 참으로 적다. 그러나 세상에서 막대한 재물을 많이 얻었지만 거기에 취하고 게으르고 감각적 욕망을 범하고 다른 존재들에게 죄를 짓는 존재는 더 많다, 라고,”
이렇게 꼬살라 왕은 세존께 자기가 생각한 것을 말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나 가리지 않고 호기심을 가지고 접근하고 이것을 집착을 한다. 마치 소가 무엇이나 혀로 핥으면서 맛을 보는 것처럼 사람도 무엇이나 가리지 않고 맛을 보려고 한다. 이런 사람은 감각적 욕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감각적 욕망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무엇이나 집착을 하지 않아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지 않는다. 꼬살라 왕은 이런 모든 것들에 취하지 않는 존재는 적고 취하는 존재는 많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재물을 많이 얻었지만, 이라고 할 때 많이는 바후따라(bahutara)이다. 바후따라(bahutara)는 많은, 풍부한, 이란 뜻인데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 때도 사용한다. 이와 반대되는 말이 바로 압빠까(appakā)다. 압빠까(appakā)는 이 경의 제목으로 적다, 많지 않다, 또는 지식이 높지 않은 사람이라고도 한다. 다음에 ‘재물을 많이 얻었지만 거기에 취하지 않고’는 오계에서 술에 취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때 술에 취한다는 것은 알아차림을 방해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재물에 취하면 알아차림을 방해해서 청정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다. 청정한 마음은 선한 마음이지만 청정하지 못한 마음은 선하지 못한 마음이다. 다음에 ‘게으르지 않고’ 라는 말은 경전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아빠마다(appamāda)이다. 아빠마다(appamāda)는 게으르지 않음, 주의 깊음, 열심히, 진지하게, 그리고 불방일(不放逸)이라고도 한다.
다음에 감각적 욕망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것을 즐기는 욕망이다. 여기서 감각적 욕망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욕망이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감각적 욕망을 ‘범하지 않고’ 라고 할 때 ‘범하지 않고’는 아빠잔띠(āpajjanti)의 반대다. 아빠잔띠(āpajjanti)는 도달, 들어감, 만남, 경험, 범하다, 는 뜻이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에 이른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감각적 욕망을 범한 것으로 했다. 아빠잔띠(āpajjanti)는 처음에 밝힌 것처럼 마치 소가 이것저것을 한 번씩 맛보는 상태와 같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똑 같은데 호기심이 생기면 여러 가지를 전부 맛보려고 하거나 갖고 싶어 하는 것을 아빠잔띠(āpajjanti)라고 한다.
아빠잔띠(āpajjanti)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각적 욕망이다. 그래서 집착을 뜻하는 우빠다나(upādāna)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감각적 욕망을 집착하는 것의 전 단계다. 그래서 우빠다나(upādāna)는 본능적인 상태에서 집착하는 것이고 아빠잔띠(āpajjanti)는 본능 이전의 의도에 해당된다. 누구나 감각적 욕망에 이른 뒤에 집착을 한다. 그러므로 이때의 감각적 욕망을 범하지 않았다는 것은 느낌이 일어났을 때 아직 갈애가 일어나지 않은 것을 말한다. 집착은 갈애가 일어난 이후에 일어난다. 그래서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처럼 무슨 일이나 느낌이 일어날 때 일정한 단계를 거쳐서 점점 더 커진다. 그래서 매순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더 커지는 느낌을 맨느낌에 머물게 해야 한다.
다음에 ‘죄를 짓지 않는’ 이라고 할 때는 나쁜 짓을 하는 악행을 의미한다. 이때의 ‘죄를 짓다’라고 할 때 위빠띠빠쟌띠(vippaṭipajjantī)라고 한다. 이는 길을 잃다, 타락하다, 죄를 짓다, 라는 뜻이다 이처럼 재물과 감각적 욕망을 집착하는 사람은 고통의 바다를 건너 윤회가 끝나는 피안으로 가기가 어렵다. 반대로 이것들을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피안에 이르러 지고의 행복을 얻는다. 이때의 피안은 괴로움뿐인 윤회가 끝나는 열반을 말한다.
꼬살라 왕이 자기 생각을 말한 것을 들으신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셨다.
“대왕이시여, 참으로 그렇습니다. 대왕이시여, 참으로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막대한 재물을 많이 얻었지만 거기에 취하지 않고 게으르지 않고 감각적 욕망을 범하지 않고 다른 존재들에게 죄를 짓지 않는 존재들은 참으로 적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막대한 재물을 많이 얻었지만 거기에 취하고 게으르고 감각적 욕망을 범하고 다른 존재들에게 죄를 짓는 존재는 더 많습니다.”
이렇게 꼬살라 왕에게 답변한 뒤에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감각적 욕망과 재물에 몰두하여 즐기고 감각적 욕망에 홀려버린 자들은 자기 과오를 깨닫지 못하도다. 마치 덫이 있어도 모르는 사슴과 같다네. 나중에 그들에게 쓰디쓴 결과가 있으리니. 그 과보가 나쁜 것이기 때문이로다.”
사람들은 감각적 욕망과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이것들을 즐기고 집착하지만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누구나 무명과 갈애를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무명과 갈애를 조종하는 것이 나라고 하는 자아다. 만약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모든 것들이 덫인지도 모르고 걸려들어 목숨을 잃는 사슴과 다를 것이 없다.
이상은 세존의 게송으로 ‘적음 경’이 끝났다. 이와 같은 게송은 항상 말씀하신 내용에 대한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