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월간 아티스트 웨이 발행
한 장 뉴스.
아주 특별한 즐거움 함께 보아요!
격월간 아티스트 웨이를 발행하며 (편집 후기 비슷한 거)
줄리아 캐머런의 책 ≪아티스트 웨이≫를 만난 것은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던 때, 2003년 삼 월이다. 이 책을 선물한 언니는 문학 공부 모임에서 만났다. 내 인생 핵심 기억에서 언니를 빼놓곤 이야기할 수 없다. 언니는 그야말로 내 인생에서 선물 같은 존재. 아니 밥과 같고 옷과 같은 존재라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치유하는 글쓰기 연구소에서 쓸 이름을 만들 때 언니를 떠올렸다.
‘언니는 나를, ‘용’ ‘라’ ‘나’ 한 음절 한 음절 다정하게 부르곤 했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표현할 때는 마치 나란 존재가 언니가 소리 내는 음절 위에 살아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지.
‘용’ ‘라’ ‘니’ ‘는’ 이 말에 다정함을 담아 소리 냈지.’
그래서 ‘라니’라는 이름을 지었다. 언니의 부드러움, 따뜻함을 기억하기 위해서.
20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이렇다 할 아트를 하지 못한 아티스트이다. 아트의 사적인 정의를 내려 볼 수도 있고, 이 말의 어원을 다시 새겨볼 수도 있지만, 이것은 결국 이렇다 할 아트를 하지 못한 나를 위로하기 위해 둘러 가려는 행동이며 적당히 나와 합의하려는 것이다.
예술가 정체성이란 말은 좀 이상하다. 정체성이라는 말은, 마치 예술가라는 것이 어떤 것, 예술가다운 것, 본질적인 것이 있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이 말이 어렵고 이상하다.
우리는 언어의 존재이다. 사회라는 곳에 말과 말들이 등록되어 언어가 되든지, 말들이 사회성을 받아들일 때 언어가 되든지 간에, 어떤 언어는 나에게 불안함과 괴로움을 준다. 예술가 정체성이라는 말을 담아내는 언어가 그렇다.
그러니 때로는 언어와 싸울 수밖에 없다. 예술이란 무엇인지, 그 예술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를 계속 써 볼 수밖에 없다. 싸우고 합의하고 싸움에서 진 마음, 합의하지만, 여전히 석연치 않은 마음을 위로할 수밖에. 이 되풀이에서 나는 상처가 지속되기도 하고 자신감을 얻기도 한다.
날마다 어느 만큼만 쓴다. 내 말과 글이 계속 연결에 실패하더라도 타인과 계속 연결되어야 하니까, 언어 속에서 살아야 하니까, 어디쯤에서 합의하고 위로를 보낸다. 내가 나와, 나에게.
이렇게 공개적으로 ‘일 년 내내, 아티스트 웨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끌어가는 것은 예술가로 살고 싶어서, 예술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내 말들을 다정함이 있는, 살아 있는 것이 되게,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로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되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2003년 나처럼 성마르고 강퍅하고 우울한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고 싶어서 그런 것이다. 모닝 페이지에서 위로밖에는 할 게 없더라도 선물 같은 이야기를 쓰지 않으면 더 괴롭기 때문이다. 그러니 카메론의 말, ‘천천히 부드럽게, 완벽함이 아니라 나아감’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이것이 나의 용기이다.
2025년 첫 달과 두 번째 달에 나는 이렇게 <아티스트 웨이>를 하였다.
첫댓글 격월간 소식지라니!!! 라니멋져요! 앞으로도 한 장 뉴스 기대할게요!
고맙습니다. 기쁜소식님의 '기대'라는 말에 마음이 콩닥콩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