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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에서는 100개의 기업이 나타나면 99개는 망하고 1개만 생존한다. 실패한 기업에게 도덕적인 문제가 없고 최선을 다했다면 계속 기회를 주는 것이다. 99번 실패를 하더라도 1번 성공하여 1000배의 성공을 하게 된다면 그동안의 실패를 전부 값고도 남게 된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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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것이 미국 실리콘밸리의 성공 모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실패한 사람에게도 계속 기회를 주는게 청년들의 도전정신을 살리는 길이며 벤처와 청소년을 살리는 길이라고 이 같은 말을 했다.[56]
안철수는 강력한 추진력과 기업가 정신, 도덕성, 차분하고 지적인 이미지로 인해 젊은이들의 가장 대표적인 멘토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교수직에 임하면서 동시에 박경철과 함께 ‘청춘 콘서트’라는 강의를 해오고 있다. 박경철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이 강의는 1년에 3천건의 강의 의뢰가 들어올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일정 문제로 1년에 80여 건밖에 하지 못한다. 안철수는 돈을 많이 주는 기업들의 강의는 되도록 하지 않으며 사람이 많이 오는 무료강연을 많이 하는데 강의할 때마다 적게는 1500명에서 많게는 3천명 정도까지 몰린다.[57]
젊은층의 지지로 인해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서울시장으로 출마할 것을 제의한 적도 있고, 참여정부에서 정보통신부 장관직 제의를 받은 적도 있으며, 청와대 수석, 국회의원 출마 제의 등등 종류별로 다 받았다고 한다.[58] 하지만 안철수는 모두 거절했다. 안철수는 “정치를 잘할 자신이 없고 힘(권력)을 즐기지 못하기에 거절했다”며 “실무적인 방법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 앞으로 정치를 할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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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 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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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 다수 |
안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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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모 범천의원 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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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원장 부친이 운영하는 부산 범천의원
안철수 원장의 부친 안영모(81)씨는 공고를 나왔지만 기적적으로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졸업 후엔 경남 밀양 15육군병원에 군의관으로 근무하다 1963년 제대해 갓 돌이 지난 안 원장을 안고 부산의 판자촌인 범천동에서 병원을 개업했다. 안철수 원장이 초등학생 시절 병원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신문 배달 소년을 무료로 치료해준 일화가 신문에 실렸는데, 이 기사를 본 안 원장은 아버지에게 크게 감명 받았다고 한다.
50세에 서울과 대구, 부산 등에서 강의를 들으며 56세에 전문의 과정을 취득했다. 56세에 전문의(가정의학과) 자격을 취득하셨다"면서 "이때 평생 연구하며 최선을 다하고 도전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말해왔다.
다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교수로 과학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열정적인 삶을 산 부친의 영향이 크다. 남을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라"고 강조한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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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angwonilbo.com/news/38562
안철수 선조의 고향 양산
정가(政街)에서 대권주로 오르내리고 있는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안철수(50)교수 선조(先祖)의 고향이 양산시 용당동인 것으로 알려졌다. 양산시 용당동 일대 살고 있는 철수씨의 친척(4가구)들에 따르면 철수씨는 순흥안씨 감찰공파의 25세손이며 선조의 고향은 용당동 당촌 생동마을이다. 막내 삼촌 영길(70)씨는 철수는 할아버지 호인씨의 다섯 형제 중 셋째 아들 영모(82)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어릴적 늘 책을 가까이 한 덕으로 또래들 보다 아는 것이 많았다고 안 교수의 어린시절을 떠올렸다.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로 부모님의 말을 잘 따르는 착한 아이로 성장했지만 어릴적 선조의 고향인 용당동 생동마을에는 단 한번도 와 본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안교수의 선조는 오래전에 수십년 동안 용당동 당촌 생동마을에 살았으며 고조부(高祖父)의 음택(陰宅:묘)은 아직까지 생동마을 뒷산에 있다. 그러나 안 교수의 집안에서는 음택이 있는 정확한 위치를 알려줄 수 없다고 밝히고 8촌 명길(72)씨도 철수씨 증조부(曾祖父)가 울주군 은현리 와지에서 당촌 생동마을로 이사를 와 오래 동안 살았으나 생활터전을 잡지 못해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최근 서울 모 대학지질학과 교수팀과 학풍회에서 현지를 답사해 탐문조사 등으로 확인작업을 벌렸으나 음택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 전문가들은 사람은 보통 고조부나 증조부의 기를 타고 태어나며 안 교수 선조의 음택이 있는 곳은 삼국사기와 신중동국여지승람에 기우제를 지내면 효염이 있다는 우불산자락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했다. 또 안 교수 선조의 음택은 구성낙지형(九星落地形:아홉개의 별이 땅으로 떨어지는 형상)자리에 있다고 밝히고 광산으로 허물어졌던 우불산이 복구돼 상처가 아물어지면서 명산(名山)의 기(氣)를 발휘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우불산은 조성왕조가 개창될 무렵 태조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다가 우불산(于佛山)에 산신(山神)이 거주한다는 말을 듣고 자신을 왕으로 등극하게 해 달라고 기원하며 제(濟)를 올린 곳이다. 이후 왕에 등극한 이성계가 명을 내려 우불산신사(于佛山神祠)를 짓게하고, 춘추 정일에 제를 지내도록 하여 그 명맥을 유지해왔으나 지금은 팔월 하정일에 지역 유림들이 모여 제를 지내고 있으며 이성계가 제를 올렸다는 단(壇)의 흔적은 찾을 수 가 없다. /최철근 기자
-용당,당촌,편들마을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우시산국(于尸山國)이였는데 신라시대(新羅時代)에는 우풍현(虞風縣)으로 고려시대(考慮時代)에는 흥려부(興儷俯)라고 하였다가 다시 울산군 (蔚山郡)이라 개명(改命)되었고,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울산군 서면(西面<坊>)이든 것을 웅촌면(熊村面<坊>)으로 명명(命名)했다가 한말(韓末, 1896년)에 와서 웅촌면을 웅하면 (熊下面)과 웅상면(熊上面)으로 분할할 때에 양산군(梁山郡) 웅상면으로 편입되고 그의 경게를 용당(리)으로 하였다. 1917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편들(片坪), 당촌(堂村),죽전(竹田)생동(生洞)을 병합하여 용당리라 하였다. 당시 법정 9개리, 행정15개마을로 조정하므로 당촌,죽전,생동 마을로 조정하므로 당촌,죽전,생동 마을을 병합하여 당촌마을로 분동되고 1979녕에 편들 마을이 분동되었다.
양산시 용당동 당촌 생동마을
안철수 교수 선조의 고향으로 밝혀진 양산시 용당동 당촌 생동마을.
慶尙南道 梁山市 龍塘洞(용당동)
(1) 가매-소(沼) : 탑골에 있는 탑골목(용당저수지)밑의 거랑(川)에 있는 소. 옛날에는 명주구리실한타래가 모두 잠겼을 정도로 깊었다고 한다. 가마처럼 생겼다고 함
(2) 가사-골(谷) : 죽전마을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절이 있었다고 한다
(3) 강당(사당) : 용강사(龍岡祠)
(4) 꽃밭들(嶝) : 소망터 남쪽에 있는 등섬이 참꽃이 많이 피었다고 한다
(5) 기목들 : 편들마을 동북쪽에 있는 들 기목나무(500여년 수령) 때문에 붙여진 들이름이다
(6) 구시 웅덩이(沼) 배일봉-배읍봉 산봉우리 북쪽 밑에 있는 소
(7) 너머곡(谷) : 죽전마을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울산군 웅촌면 와지마을을 다니는 길이었고 서나무숲이 형성되어 있어서 일명 서나무 고개라고도 한다
(8) 녹야원(寺) : 윗생동 마을에 있는 절(1980년에 세움)
(9) 당보(洑) : 샛들 서남쪽에 있는 보
(10) 당촌(堂村) : 용당마을 서남쪽에 있는 마을(우불당이 있음)
(11) 당촌앞들 : 당촌마을 앞에 있는 들
(12) 당촌 저수지 : 당촌마을 서북쪽, 죽전마을 입구에 있는 저수지. 1943년에 준공
(13) 대밭등(嶝) : 쿵쿵이 바위옆에 있는 등성이
(14) 덜락소(沼) : (덤내소) 용당마을 북쪽에 있는 소
(15) 독밋등(嶝) : 벼락 버든(들)서쪽에 있는 등성이
(16) 돌 모드미 : 벼락버든 북쪽에 있는 골짜기
(17) 동산(東山) : 용당마을 동쪽에 있는 산
(18) 동산새미(井) : 동산에 있는 우물
(19) 딧들 : 용당마을 뒤쪽에 있는 들
(20) 딧들뚝 : 뒷들에 있는 뚝
(21) 딧들보(洑) : 뒷들에 있는 보
(22) 딧새미(井0 : 용당마을 뒤쪽에 있는 우물
(23) 땅근바위 : 배일봉(배읍봉)에 있는 바위
(24) 말구부리등(嶝) : 안장기 동쪽에 있는 등성이, 말등이 구부러져 있는 것처럼 생겼음
(25) 매봉지(峰) : 대운산의 꼭대기(정상)에 있는 봉우리. 매한마리가 앉을 정도의 봉우리
(26) 못고개(죽전 못고개) : 죽전 못 위쪽에 잇는 고개. 죽전마을에서 서창마을로 넘어간다
(27) 못골(谷) : 죽전마을 남쪽에 있는 골짜기
(28) 무젯골(谷) : 용당마을 남쪽에 있는 골짜기
(29) 민등지(嶝) : 산밭골 동쪽에 있는 밋밋한 등성이
(30) 바랑골(谷) : 범섯골 북쪽에 있는 바른 골짜기
(31) 방깐밑들 : 용당마을 서쪽에 있는 들. 방앗간이 있었는데 금 lx이 된다
(32) 배일봉 - 배읍봉 : 용당마을 정동쪽에 있는 산봉우리. 꼭대기에 물이 남
(33) 범 바위 : 민둥지 동쪽에 있는 바위. 범굴과 절이 있있다고 함
(34) 범 바웃등(嶝) : 범 바위가 있는 등성이
(35) 범섯골(谷) : 용당마을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36) 범섯골 도랑(川) : 배일봉에서 한창제지 공장 북쪽으로 흘러 회챠천에 유입됨
(37) 벼락버든(버덩) : 진등 동쪽에 있는 버덩. 벼락을 맞은 바위가 있음
(38) 복판보(洑) - 복금보 : 용당마을 남쪽 복판(가운데) 있는 보
(39) 불매제(嶝) : 성 비알의 북쪽에 있는 등성이. 당촌마을과 용암마을과의 경계를 이룸
(40) 사또봉(峰) : 당촌마을 남쪽에 있는 봉우리
(41) 사전 삔디기(버덩) : 우불당밑에 있는 들
(42) 산밭골(谷) : 돌모드미 동쪽에 있는 골짜기 산삼을 캤었다고 함
(43) 삼밭골(谷) : 범섯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삼밭이 있었음
(44)상대 공굴(橋) : 터다리→회야교 : 회야천 위로 울.부간의 경게이면서 웅상읍과 웅촌면의 경계 다리이기도 함
(45) 새각당 도랑(川) : 편들마을 앞으로 흘러 기목들을 거텨 회야천에 유입됨
(46) 샛들 : 용당마을 동북쪽에 있는 들. 용당마을 사람들의 농사는 이들 위주로 함
(47) 샛들 들(堤) : 샛들에 있는 뚝
(48) 생동(生洞) : 당촌마을 동쪽에 있는 마을
(49) 생동앞들 : 생동마을 앞에 있는 들
(50) 소망터 : 대밭등 서쪽에 있는 등성이
(51) 솔배기 : 용당마을 북쪽에 있는 들. 큰 소나무가 있었음
(52) 안장지(嶝) : 독민등 동북쪽에 있는 등성이. 등성이가 말 안장처럼 생겼음
(53) 어름밧골(谷) : 범바위등 동쪽에 있는 골짜기. 봄까지 어름이 녹지 않고 있음
(54) 연호교(蓮湖橋)→용당교 : 생동마을 동남쪽에 있는 다리
(55) 용강사(龍岡祠)→강당 : 용당마을에 있었던 사당, 고려 태조때 공신 장무공, 박윤웅과 지한주사 사은공 박취를 모심
(56) 용당고개(용당재) : 용당마을 동남쪽에 있는 고개. 울산군 온양면 내암리로 넘어가는 고개. 1950년대까지도 웅상 웅촌지역민이 울산군 온양면 남창장날에는 장보러 이고개를 넘나들었고 역으로 웅상 서창장날에는 남창장군이 넘나들었음
(57) 용당교회 : 용당마을안에 있는 교회. 1978년에 세움
(58) 우불당→우불단 : 우불산이 있는 산신당, 해마다 봄.가을이면 나라에서 향자 축문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으며, 가뭄에는 기우제를 지냈다고함. 그후 해마다 8월 하정일에 제사를 지대다가 1994년부터는 "읍민의 날"(5월 8일) 전야제 행사에 병행하여 제사를 지내고 여타행사를 거행함에 8월 하정일 제사는 지내지 않음
(59) 우불산 : 영남의 네 명산의 하나로서 매우 영험하다고 함
(60) 웅상면 공동묘지 : 용당리 산75-2번지 당갓에 설치되어 있음
(61) 음달 도랑(川0 : 죽전 못골에서 시작하여 중뫼 비알을 경유 죽전 대미도랑.죽전 집앞 도랑, 울산군 웅상면 고연리 와지 도랑등과 중뫼 도랑에서 합류하여 회야천에 유입됨
(62) 응달산 : 죽전마을 동남쪽에 있는 산 . 늘 그늘이 져 있음
(63) 이주암(寺) : 탑곡 저수지 위쪽에 있는 절. 1984년에 세움
(64) 짚은 골(谷)→깊은 골 : 꽃밭등 남쪽에 있는 골짜기.rhfdl 깊다고 함. 동남간으로 성터, 성비알(비탈)이 있음
(65) 죽전(竹田) : 당촌마을 서북쪽에 있는 마을. 대밭이 많음
(66) 중뫼비알(비탈) : 죽전마을 동남쪽에 있는 산비탈
(67) 진등(嶝) : 무젯골 동쪽에 있는 등성이
(68) 청용암(寺) : 탑곡저수지 둑밑(함박골)에 있는 절. 1940년에 세움
(69) 쿵쿵바위 : 죽전마을 서쪽에 있는 바위. 발로 굴리면 "쿵쿵"하는 소리가 남
(70) 탑곡(塔谷)→일명 탑골,탑작골 : 안장지 남쪽에 있는 골짜기 탑이 있었음. 현재 탑두,탑좌대,탑산이 흩어져 있음(현장에서 발견된 것이 8점. 기와조각 2점)
(71) 탑골 저수지→탑곡저수지 : 탑곡에 있는 저수지. 1933년에 준공
(72) 탑작골 도랑(川)→중보도랑 : 탑곡저수지에서 흘러 용당마을 앞을 거텨 회야천에 유입됨. 가매소가 있음
(73) 편들(片坪) : 용당마을 남쪽에 있는 마을. 월래 망터 걸(들)에서 형성되었다가 마을이 망하고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고 함
※ 망터걸 → 마을이 망한곳이라는 뜻이라고 함
(74) 해각사(寺) : 아랫생동 마을에 있는 절. 1980년에 세움
(75) 호박소(沼) : 용당마을 북쪽에 있는 소. 디딜방아의 호박처럼 생겼음
(76) 홈 골(谷) : 기목지 남쪽에 있는 거랑(川) 용당리와 삼호리의 경계가 됨
(77) 김곤양(김곤陽)집터 : 아흔 아홉칸의 집에 열두대문이 있는 큰 대호로 살았던 김곤양의 집이 있는 곳
대정공원묘원(안철수 조부모 묘소)
풍수로 봐도, 안철수가 박근혜 이긴다/황재연/시사오늘
˝풍수로 봐도, 안철수가 박근혜 이긴다˝
황재연 풍수지리가 ˝덕을 쌓아야 흥한다…그런 점에서 安˝
2012년 08월 09일 (목) 윤진석 기자 nabizib@naver.com
(시사오늘, 시사ON, 시사온=윤진석 기자)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원장은 대선 후보 지지율 1·2위를 다툰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이들의 대선 운명을 가늠하자는 차원에서 황재연 풍수지리가를 찾았다. 그는 (사)천인지 황재연 수맥풍수지리연구학회 서울지회장을 맡고 있다. 황 지회장은 2006년 대선을 앞두고서 "이명박 시장의 부모 묘 터가 좋지 않아 (대통령 자리에 올라도)앞날에 어려움이 예상 된다"고 언급, 관심을 모은 이다.
풍수로 보는 '박근혜·안철수' 대선 전망. 황재연 지회장은 이에 "풍수지리 사상 안에는 개인과 가문의 길흉화복, 그리고 국운의 흥망성쇠가 담겨져 있다"며 "안철수 교수가 대통령 되면 좋다"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특히 동기감응(同氣感應)'으로 봤을 때, 안철수 교수의 앞날이 더욱 밝다는 것이다.
"동기감응은 조상의 기운과 후손의 기운은 서로 감응한다는 뜻이에요. 덕을 베풀어야 좋을 땅으로 갈 수 있고 발복(發福·복이 나타남)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순흥안씨(順興安氏 )감찰공파 자손인 안철수 교수는 생가 터도 좋고, 조부모 묏자리도 좋아요."
(사)천인지 황재연 수맥풍수지리연구학회 황재연 서울지회장
황 지회장은 안 교수의 조부모 묘 터와 생가 터 사진을 꺼내 보여줬다. 그에 따르면 안 교수의 조부모님 묘는 부산시 기장군 정관면 용수리 부근 공원묘지에 위치해 있다. 또 안 교수 생가는 부산 진구 범천동 범천의원 건물이다.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건물 1층에는 안 교수 부친인 안영모 원장이 운영하는 범천의원이 자리 잡고 있다. 안 교수는 이 건물 2층에서 자랐다고 전해진다.
그러면서 명당에 대해 설명하기를, 용(龍)·혈(穴)·사(砂)·수(水)가 핵심으로 이른바, 생기를 북돋아 주는 곳이라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안철수 교수 생가 터와 조상 묘 터는 명당이라는 것.
"두 곳 다 명당이라 가문과 자손 모두 번창할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어요. 특히 생가 터는 제왕의 기운을 품고 있는 곳입니다. 게다가 안 교수 부친인 안영모씨는 평생을 의사로서 헌신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한 분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어려운 이들에게 돈을 받지 않고 무료 진료를 해주는 등 차곡차곡 선행을 쌓아왔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근데 안철수 교수 역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분 아닙니까? 이 같이 덕을 쌓은 결과물들이 안철수 교수가 발복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반면, 황 지회장은 박근혜 후보에 대해서는 "오수작탈형(烏首鵲奪刑)인 생가 터는 명당이지만, 선영(先塋)과 금오산 자락의 선조 묏자리가 매우 안 좋다"고 했다. 앞서도 그는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여야 대선주자들 중 풍수와 사주 관계상 박근혜 전 대표가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전망하면서도 "(선조 묏자리 부근) 금오산 철탑을 조심해야 할 것"이라며 우려한 바 있다.
"동작동 국립묘지에 있는 고(故)박정희 전 대통령 묘도 안 좋지만, 가장 큰 문제는 선친의 묘 터가 있는 금오산 위 네 개의 철탑입니다. 적지 않은 고초를 겪을 수 있어 풍수지리가로서 볼 때는 매우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물론 당장 발복되는 터로 옮기면 대통령이 될 수 있지만…그것도 인연이 돼야 가능한 일이죠."
그러면서 황 지회장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종합적으로 볼 때, 안철수 교수가 박근혜 후보 보다는 훨씬 유리한 앞날을 가졌다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동기감응´과 덕의 중요성에 대해 거듭 강조했다.
"'구천통곡 남사고'라는 설화가 있어요. 조선 중기 유명한 지관인 남사고가 아버지 묘를 아홉번 옮기고도 통곡했다는 얘기입니다. 풍수에 능한 자가 선택한 자리였을 텐데도, 대체 왜 옮기는 곳곳 마다 발복하기가 어려운 곳이었을까…일각에서는 남사고의 아버지가 악행을 저질러 그리 됐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당나라 복응천(卜應天)이 지은 '설심부(雪心賦)에서도 이런 말이 있어요. '나쁜 짓을 하면 좋은 땅도 도리어 재앙이 따른다'…조상이 쌓으면 명당을 얻을 것이요, 본인 또한 덕을 쌓으면 대대손손 흥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안 교수가 대통령 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풍수로 봐도 안철수 교수가 박근혜 후보를 이길 가망성이 높습니다." 어찌 보면, 뼈 있는 말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 그 중의 하나라고 쳐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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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http://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795
⊙ 고조부 묘 주산인 영축산에는 王氣가 서려 있는 십자맥이 있어 -김성수
안철수 원장의 고조부 묘. 안철수(安哲秀) 서울대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조상 묘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안 원장의 조부모 묘는 부산의 한 공원묘지에 안장된 것으로 알려졌고 증조부(안석필) 묘는 39년여 전 부산시 영주동에 충혼탑이 건립될 때 화장을 했다고 한다. 안 원장의 할아버지(안호린)는 1984년에, 할머니는 1991년에 별세했다고 한다. 1962년생인 안 원장이 조부모 묘가 만들어지기 전에 태어났으므로 풍수상 안 원장의 현재와 미래는 그의 조부모 묘와는 큰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순흥안씨 족보(族譜)상 안 원장 고조부(안치헌) 묘는 경남 양산시 용당동 ○○산에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해당 지역 지방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을 요청했다. 안 원장의 조상은 원래 양산에서 가까운 울주군 은현리 와지에서 살다가 용당동으로 이주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해 주었다. 고조부의 묘가 아직 용당동 생동마을 부근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위치는 그 친척들도 가르쳐 주질 않아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그는 풍수가들이 용당동 인근에 있는 우불산(于佛山) 자락에 안 원장의 조상 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도 했다.
우불산은 《삼국사기》 등에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는 산으로 기록돼 있다고 한다. 조선왕조가 개창할 무렵 태조가 그곳을 우연히 지나다가 우불산에 산신(山神)이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을 왕으로 등극하게 해 달라고 기원하는 제를 올린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최근에만 안 원장 조상 묘의 위치를 묻는 전화 30여 통을 받았다”며 “얼마 전에도 ○○대학 팀이 이곳까지 왔다가 못 찾고 그냥 돌아갔다”고 전했다. 그는 또 “족보상에 안 원장 고조부 묘가 있는 것으로 기록된 ○○산이 생동마을 인근에 있느냐”는 질문에 “그런 산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면서 “마을 인근에 안 원장 조상 묘가 있는 것으로는 알고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고 덧붙였다. 대략의 위치를 파악한 이상 안 원장 정도의 인물이라면 그의 조상이 터잡은 묫자리를 찾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속철도(KTX)를 이용해 경주까지 가서 그곳에서 현지인의 승용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우리 일행이 탄 KTX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장성했던 시절에도 보릿고개를 겪어야 했던 나이 탓인가. 이럴 때마다 필자는 우리 국민의 부지런함에 놀라고 그 부지런함이 대한민국 발전에 커다란 동력이 되었음을 확인하곤 흐뭇한 생각에 젖기도 한다. 풍수에 대한 생각이다. 우리 사회가 풍수를 좀 더 열린 시각으로 받아들인다면 이 이상의 발전을 이루었음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무궁하게 발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현재와 미래의 일이 아니라 과거에 있었던 일 정도로 생각한다. 언론들도 대통령 선거철이 돌아오면 풍수를 등장시킨다. 그러면서도 풍수에 커다란 의미를 두지 않는다. 재미 또는 가벼운 읽을거리 정도로 치부한다. 필자가 《월간조선(月刊朝鮮)》에 연재하고 있는 이 꼭지 역시 그런 의도로 기획됐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럼에도 필자가 이런 연재를 하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더 풍수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기(氣)의 존재, 명당과 사후(死後) 혼백(魂魄)과의 관계, 명당이 후손에게 미치는 영향 등을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라는 경험론적 입장에서 보면 풍수지리학은 엄연하게 존재한다. 과거의 성공적 사례가 없었다면 대통령 선거 같은 큰일을 앞두고 조상의 묘를 옮기고 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대통령을 성공한 대통령과 실패한 대통령으로 나눈다면 이런 분들은 실패한 대통령으로 기록되기 마련이다. 이런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언론 등이 검증에 나서지만 한계가 있다. 풍수 전문가로서 이들에 대한 본원적 검증은 풍수 검증이라고 확신한다.
오랜 역사를 통해 도선국사 같은 풍수계 선각자들이 입증한 바에 따르면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명당 기운을 받지 않으면 과거 급제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오랜 경험의 지혜를 원용해 지금 경합하고 있는 여러 대선 주자들 가운데 누가 그 운명을 타고났는지 검증해 보자는 것이 풍수 검증이다. 풍수 검증은 자칫하면 천기누설의 대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아주 조심스럽다. 풍수가도 사람이기 때문에 특정한 사람을 선호할 수 있다. 그걸 우선 배제해야 하고 풍수적인 소견만을 밝혀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는 것이다. 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가미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혹세무민이 되기 때문이다.
안 원장은 우리 국민이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잠재적 대통령 후보자이다.
이 글을 쓰는 9월 9일 현재까지 그는 대통령 출마 의사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박근혜(朴槿惠) 후보와 여론조사에서 선두 자리를 다투고 있다. 안 원장 고조부 묘가 있다는 양산시 용당동으로 향했다. 용당동으로 가는 길에 생동마을 이장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는 다시 걸려 온 전화에 약간 화가 난 듯 소리를 높이며 “내가 오늘도 조금 전에 안철수 원장 6촌과 식사를 함께 했는데 그 사람도 고조부 묘가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서 “제발 안 원장 조상 묘 찾는 일과 관련해서는 내게 전화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생동마을 이장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자는 말을 듣자마자 전화를 끊어 버렸다.
우리 일행은 인적이 드문 생동마을 부근에 승용차를 세워 두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기다렸다.
마을 이장과 마찬가지로 안 원장 고조부 묘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무작정 찾아 들어간 집에 노인 한 분이 있었다. 그 노인에게 이 부근이 족보상에 기록돼 있는 ○○산이 맞는지를 물었다. 노인은 “맞다”고 했다. 그는 “마을 젊은 사람들은 ○○산이라는 이름을 안 쓴 지 오래됐기 때문에 잘 모를 것”이라면서 “이 산에 몇 기의 묘가 있다”고 했다. “○○산이 우불산으로 불리기도 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우불산은 여기서 조금 떨어져 있다”고 했다. 노인은 또 “그곳에는 최근에 매장한 안씨 성을 가진 사람의 묘도 있다”고 귀띔했다. 풀을 깎지 않아 풀숲을 헤치고 가야 하는 어려움은 있었지만 길은 험하지 않았다. 오래됐지만 최근에 벌초한 것으로 보이는 묘가 산속으로 난 길 가까이에 있었다. 좌향(坐向)도 족보에 기록된 그대로 동 건좌(東乾坐)였다. 묫자리에 올라섰을 때 필자는 더욱 확신을 가졌다.
영축산을 주산으로 한 안 원장 고조부 묘는 청룡이 잘 막아 주고 안산이 수려해 큰 명당의 형국을 빚고 있는 가운데 생기가 솟아나는 진혈이었다. 특히 안산이 수려해 부(富)와 귀(貴)를 겸비할 자리였다. 앞으로는 제법 큰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산을 잘 감아 주고 있어서 후손 중에 큰 부자가 나올 수 있는 자리였다. 안산도 절을 하는 형국으로 주변에 인재들이 몰려들고 복종을 하는 자태였다. 또한 묘지 주변에는 돌이 안 보이고 안산에도 돌이 안 보이는 점으로 보아 과단성과 카리스마가 없을 것이라는 점도 흠이라면 흠이었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안 원장 고조부 묘 바로 위에도 아주 훌륭한 명당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 자리에 썼다면 안 원장 고조부의 후손들은 더욱 더 탄탄대로를 걷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우불산 자락에서 안 원장 조상 묘를 찾은 까닭이었을 것이다.
안 원장 고조부 묘에서 10리 안쪽에는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는
필출제왕지지(必出帝王之地)로 알려진 대명당이 있다. 이는 필자가 결록(訣錄·풍수지리에서 특정 터의 좋고 나쁨을 이론적으로 풀이한 일종의 터 감별 증명서)에서 확인하고 현장 답사를 마친 곳이기도 하다. 그 명당이 아직도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나라가 지니고 있는 힘의 원천은 오직 인재(人材)이고, 인재는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해 국가발전을 이끌어 간다는 게 풍수가로서의 생각이다. 그래서 많은 명당이 모두 주인을 찾고 그로 인해 많은 인재가 탄생해 국가 발전을 이룩하도록 해야 한다는 게 풍수가로서의 간절한 바람이다. 통도사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5년(646) 때 자장 스님이 창건했다.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이다.
팔만대장경판을 모신 법보사찰 해인사, 고려 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 이래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 송광사와 함께,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와 금란가사(金欄袈裟), 대장경을 봉안하고 있어 불보사찰이라 한다. 통도사를 불지종가(佛之宗家·불자들의 마음의 고향)요, 국지대찰(國之大刹·나라의 으뜸 가람)이라고 칭하는 이유다. 필자는 1500년 가까이 우리나라 최고의 사찰로서 명맥을 유지해 온 힘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살펴보고 싶었다. 그곳에서 필자는 망외의 소득을 얻었다. 통도사 서축암에서 십자맥(十字脈)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창경궁, 고인이 된 이병철(李秉喆) 전(前) 삼성그룹 회장 조상 묘 부근, 서울 명동 등에서 발견한 십자맥보다 훨씬 크고 기운이 왕성한 십자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십자맥이 영축산 자락 통도사에 있었던 것이다. 안 원장 조상 묘를 찾는 일은 힘들었지만 십자맥을 발견함으로써 그날의 피곤도 한순간에 날려 버릴 수 있었다. 풍수가로서 그곳을 대한민국의 인재를 양성하는 도량으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 10리 안쪽에 必出帝王之地로 알려진 대명당 존재
⊙ 77세. 건국대 경제과 졸업.
⊙ 전매청, 건설부 근무. 한국풍수지리학회 회장. 저서로 《명당》 《운명 디자인》《명당에서 인물 난다》 등이 있음.
우리는 안 원장의 고조부 묘를 찾기로 했다.
그는 안 원장의 친척들이 아직도 용당동 일대에 살고 있으며
생동마을 이장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 일행은 족보상의 기록에 따라 무작정 안 원장 조상 묘 찾기에 나서기로 했다.
그러면서 사족처럼, 사실은 풍수 전문가로서는 본질이지만,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많은 사람이 풍수를 고루하다고 생각한다.
풍수지리학은 현대과학의 방법론으로 따지자면 분명 몇 군데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다.
풍수 전문가의 눈으로 봤을 때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될 사람이 당선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 일행은 경주역에서 내려 경주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황정일 박사의 안내를 받아
우리 일행은 노인이 일러준 대로 몇 기의 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필자는 그 묘를 보는 순간 풍수상 안 원장의 조상 묘가 맞다는 확신을 했다.
풍수상으로는 당할 자가 없는 자리가 분명했지만 손이 귀할 것이라는 흠이 있어 보였다.
묘지에는 다른 후보들과 달리 풍수가들이 찾아온 흔적이 없었다.
안 원장 고조부 묘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영축산 자락에 있는 통도사에 들렀다.
또한 안 원장 조상 묘의 주산인 영축산 자락에 있다는 점도 겸사겸사 필자의 발걸음을 재촉하게 한 이유다.
원래 십자맥은 왕기(王氣)가 서려 있어 나라의 큰 지도자나 큰 재벌이 나온다고 한다.
<구술 정리 :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