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제목 알려주세요
오승재
나는 가끔 후원하는 선교사나 선교 기관, 교회 부목사에게서 내 기도 제목을 알려 달라는 말을 들으면 당황한다. 하나님께 기도할 내 문제를 왜 알려 달라고 하는가? 내 기도로는 부족하니 자기가 나와 하나님 사이에 끼어서 나 대신 기도해 주겠다는 것인가?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접 고하라.”고 성경을 말하고 있는데 왜 내 기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인가? 하긴 가톨릭교회에서는 고해성사란 게 있어 신도가 범한 죄를 사제에게 고하면 사제가 그리스도의 권한을 대신해서 죄를 사해 주기도 한다고 한다. 그리스도가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라고 하셔서 그때의 사도를 대신한 지금의 사제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죄를 사해 줄 권한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심과 동시에 지성소와 성소를 분리하던 휘장이 찢어져 더는 대제사장을 거치지 않고 누구라도 하나님께 직접 대면해서 회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 기도할 수 있게 되었는데 웬 기도 제목? 하고 당황하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기도 제목을 물어서 기도해 주고 그 기도가 응답되면 몇 번째 응답받은 기도라고 기록하고 적어놓기도 한다고 한다.
한편 바울과 같이 훌륭한 분도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 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라고 로마에 있는 모든 신자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 줄 걸 부탁한 바가 있다. 그렇다면 나에게 기도 제목을 구한 것도,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요즘 어떤 신학자는 그런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끼어 대신 기도해 주는 중보기도가 아니라 도고(禱告, 중보기도와 구별하기 위해 지어 놓은 기도 이름)라고 말하기도 한다. ‘중보(仲保)’란 국어사전의 뜻은 ‘두 사람 사이에서 일이 성사되도록 주선하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라고 중보자는 예수뿐임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교회에서 창립 이래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화요일마다 모여 기도하는 ‘중보 기도팀’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연(代言) 하는 목사님을 위해서도 중보기도를 한다는 것을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터이다. 그들은 방언도 하고 환상도 보며 또 신유(神癒)의 은사를 가진 분도 있어 신도의 본이 되는 분들로 교인들에게 알려져서 온갖 기도 제목을 수소문해서 기도하며 목사님이 가정 방문을 할 때 수행원이 되기도 한다. 또 그들의 자부심은 모든 가정의 기도 제목을 누설하지 않는다는 비밀 공유의 신성한 단체로 일종의 특수 계층이다.
이런 예비지식 때문에 나는 나에게 묻는 기도 제목을 선뜻 말해 주지 않았다. 잘한 짓이었을까? 교회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요 각자는 예수님의 지체이다. 서로 주께서 받은 은사를 내어놓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때까지 남을 섬기지도 않으며 도움의 손길도 거부하고 지냈다.
그런데 지난 2023년 6월 셋째 주 토요일 내 아내는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갔는데 뇌경색이라는 진단을 받고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되었다. 기억력 상실과 언어 장애로 자기 이름도, 사는 집도 기억하지 못했다. 혈관이 막혀 혈액순환 장애로 뇌 일부가 기능하지 못한다는 진단이었다. 90이 넘은 고령이었지만 아들 생일이나 전화번호 등 평소에는 나보다도 훨씬 기억력이 좋던 사람이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교회 목사님께 아내가 뇌경색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해서 교회도 당분간 못 나가겠다고 말했다. 목사님은 곧 심방을 오겠다고 했지만, 병원에서는 중환자실은 보호자도 특정 시간 외에는 면회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목사님은 ‘중보 기도팀’에 환자의 상태를 말하고 같이 기도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평소 기도 제목을 주기 싫어했던 나지만 앞뒤 가릴 여유가 없었다. 꼭 회복되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고 아내는 중환자실에 맡기고 귀가했다. 이튿날 아침 8시 면회시간에 갔더니 아내는 내 이름도 집 주소도 손만 허위적 거릴 뿐 알지 못했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고 미소하며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간밤에는 나가겠다고 얼마나 큰 소리로 외치는지 다른 환자에 방해가 되어 독방에 감금된 상태였다고 말했다. 이틀 뒤 아내는 일반 병실로 옮겼다. 중환자실에서는 더는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일반 병실도 3일이 지나자 뇌 기능이 서서히 회복되기까지 이제는 기다리는 일밖에 할 것이 없다고 말하며 재활 병실로 옮기는 것이 어떻냐고 물었다. 나는 집으로 퇴원하는 것을 고집했다. 집에 가면 기억나는 게 많아 곧 회복될 것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내가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을 때부터 집으로 가면 26년간 둘이서만 한 공간에서 같이 살았던 기억을 더듬어 분명 기억을 회복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퇴원 때까지의 환자의 상황을 볼 때 나는 절망했고 이제는 회복이 안 되더라도 끝까지 돌보면 함께 살겠다고 나 자신을 하나님께 맡겨버린 상태였다. 우리는 4남매를 가진 다복한 가정이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딸만 서울 용인에 사고 있고 세 아들은 미국에서 살고 있어 1995년 모시고 살던 어머니가 떠나신 뒤 지금까지 26년을 둘이서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다. 2017년 1월 넘어져서 대퇴골 수술은 받았으며 그해 9월 다시 넘어져 반대편 대퇴골 수술을 받았다. 병원에서 치유, 재활로 각각 3개월여를 보낸 뒤는 외출이 어려워진 데다 코로나로 집에 갇혀 있자 점차 내가 돌봐 주어야 할 상태가 되었는데 또 뇌경색으로 쓰러진 것이다. 친구들은 나에게 말했다. 나는 오래 건강할 것이라고. 아내를 돌봐 주고 있으면 남편은 더욱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아내가 떠난 뒤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 세상을 떠나는 것을 자주 보았다고 한다. 위로의 말인지, 위협하는 말인지.
어떻든 나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며 살 생각이다.
퇴원 절차를 밟으면서부터 아내의 표정은 밝아졌다. 그동안도 손짓 눈짓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싶으나 입으로 말이 안 나오는 것뿐인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는데 퇴원을 기다리면서 평소에 썼던 휠체어를 가지고 올라오니 더 반가워했다. 퇴원 소식을 듣고 서울에 살던 딸이 병원으로 왔는데 아내는 딸 이름도 부르게 되었다.
집으로 온 뒤 아내는 기적적으로 기억을 회복했는데 자기가 왜 뇌경색으로 기억을 잃었는지 또 어떻게 이렇게 기적적으로 회복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그때 상황을 좀 자세히 알려달라고 말했다. 자기도 회복된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어떻게 뇌경색이 왔는지. 어떻게 감쪽같이 좋아졌는지 너무 신기하기만 해”
“그걸 모르겠어?”
“뭔데요?”
“우리 교회 목사님과 교회 중보기도 팀 때문이지”
“뭐라구요? 당신은 중보기도라는 것을 되게 싫어했잖아요?”
“글쎄. 그러나 그 명칭이 무슨 상관이야.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셨을 거야.”
나는 매일의 생활이 기적이며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며 아내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