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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의 이적 20_물고기 입의 한 세겔
마태복음 17:24-27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물고기 입에서 한 세겔을 베드로에게 주신 이적은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본문을 잘 이해하기 위해 마태가 어떤 말씀의 문맥과 연결시키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마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것을 보여주신 후 귀신 들린 아이를 통해 산 아래의 세상은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는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에 대해 말씀하시고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셨다(첫 번째 예고는 16:21). 즉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에게 넘겨져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산을 옮기는 믿음을 이루시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물고기 입에서 한 세겔을 베드로게 주시는 이적을 나타내셨다.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24절). “반 세겔(두 드라크마)을 받는 자들”이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성전의 세금을 거두는 자들일 것이다. “너의 선생은”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베드로에 대한 관심보다도 그저 예수님이 율법을 잘 지키느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성전의 일에 대해 협조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시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말씀의 배경이 되는 말씀은 출애굽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들을 계수할 때에 자기의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것을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질병이 없게 하려 함이라 13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14 계수 중에 드는 모든 자 곧 스무 살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15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16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대속하리라(출 30:11-16)
20세 이상의 이스라엘 남자는 매년 은 반 세겔을 성전에 내는데 부자든 가난한 자든 차별 없이 생명의 속전으로 내야 했다. 이 생명의 속전이 성막의 봉사에 사용되었는데 후에 이것이 성전세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베드로는 성전세를 내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기에 내겠다고 하고 집에 가니 예수님께서 먼저 알고 물으신다.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25-26절). 한마디로 왕이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받되 아들에게는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성전이신 예수님은 반 세겔을 내어야 할 의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를 면제받는 “아들들”이라고 하셨는데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고 자기 백성들을 불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계로 세우신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들들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 구원의 은혜가 허락된 자들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앞에서 말씀하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자기 백성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아들로 삼으시는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신 것이었다.
아들들은 세를 면하게 된다고 말씀하시면서도 예수님은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27절)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생명의 속전으로 반 세겔을 내라고 말씀하신 율법의 의도를 알아야 할 것이다. 출애굽기 본문을 자세히 보면 생명의 속전을 단순히 반 세겔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세겔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맥상 반 세겔을 내라고 하셨다면 그다음 본문에서 ‘반 세겔은 십 게라’라고 말씀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출 30:13)라고 말씀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율법에서 반 세겔을 강조한 것이라기보다 한 세겔을 더 강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율법의 의미를 어디서 확인할 수 있는가? 마태복음에서는 이미 이렇게 선언했었다.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헬, 플레로오)라는 말은 ‘충만하게 채운다’라는 뜻이다. 즉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자들에게 율법이 나타내고자 한 바를 온전히 드러내고 그 의미를 충만하게 채우시겠다는 말씀이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 후 베드로에게 바다의 물고기 입에서 한 세겔을 취하여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27절)라고 말씀하셨다.
율법에서 생명의 속전을 ‘반 세겔’로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는 ‘한 세겔’을 은연 중에 말씀하고 있는 것을 통해 언젠가 한 세겔로 온전히 드러날 생명의 속전을 암시하고 있고 그것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한 세겔로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십자가에서 ‘나와 너’가 하나 됨을 이루실 것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아들들에게는 세금을 내어야 할 필요가 없지만 바다의 물고기, 즉 윗물에서 분리된 아랫물로써 세상을 상징하는 그 바다(계 13:1)에서 취한 것으로 세금을 내어 세상의 것, 이 땅에 속한 것에 돌려준다는 의미로 이적을 나타내셨다.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라고 하였는데 “먼저”라는 말의 헬라어는 ‘프로토스’라는 말로 ‘첫째, 최고’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은 윗물이신 하나님이 아랫물에 속한 죄인들과 같이 되신 것이고 그 바다에서 첫째, 즉 장자로서 한 세겔을 토해내어 첫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기 백성들과 하나 되는 생명을 이루신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성전세를 받는 자나 성전세를 내는 자는 자기 행위로 영생을 얻고자 하는 자들인데 그들에게는 그저 율법의 반 세겔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합류된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한 세겔을 통해 율법의 완성이 십자가임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반 세겔 자체에 대한 것보다는 율법에서 말씀하는 그 반의 의미는 하나로 완성되어야 할 의미를 지향하고 있었다.
13 (그러나)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3-18)
성전에 바치는 반 세겔을 생명의 속전이라고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은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지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속죄의 은혜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생명의 속전은 20세 이상의 남자만 내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여자와 어린아이는 남자가 내는 것에 속한 존재가 된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을 통해 베드로(그 외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즉 여자요 신부인 교회가 남자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존재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결국 예수님께서 성전세, 곧 생명의 속전이 되셔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생명의 속전 안에서 신부된 교회는 생명을 얻는 존재가 된다.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라고 할 때 “주라”는 말의 헬라어는 ‘디도미’(넘겨주다)인데 나와 너를 위해 한 세겔을 넘겨줌으로 예수님과 베드로가 하나가 되는 생명의 속전이 되신다는 사실을 이 세상에 장자(첫째)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십자가로 보여주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바다의 물고기 입에서 한 세겔을 얻게 하신 것은 그냥 신기하고 놀라운 이적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를 보여주시는 표적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표적이나 비유를 통해 많이 나타내셨지만 정형화된 말씀으로 직접 언급하신 것은 16:21에서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는 말씀이 처음이다. 그리고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22b-23a절)라고 두 번째로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 후 이 표적을 나타내심으로 그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하셨다.
첫 번째 예고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넘겨져”라는 말이 17:22에서 새롭게 사용되는데 헬라어로 ‘파라디도미’로 ‘파라’(~곁에)와 ‘디도미’(넘겨주다)의 합성어로 가룟 사람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것을 표현하는데 반복적으로 쓰였다(마 26:15-16, 21, 46 등). 신약 곳곳에서 이 단어는 우리 성경의 표현으로는 ‘넘겨주다, 잡히시다’라는 말로 번역되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나타낸다(행 3:13, 고전 11:23 등). 그러나 이 말을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셨다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파라디도미)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파라디도미)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겉으로 보이는 것은 가룟 사람 유다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어 죽임을 당하신 것으로 보이나 실제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고 밝히고 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고발하고 십자가에 죽였다. 그러나 실제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손에 넘겨주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대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었다는 뜻이다.
결국 바다의 물고기 입에서 한 세겔을 취하여 예수님 자신과 베드로를 위하여 성전세를 내도록 하신 이 표적은 일차적으로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처단하는 죄인들의 죄를 고발하신 것이다. 눈에 보이는 건물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 율법을 근거로 예수님께 성전세를 받아내는 죄의 권세에 매여 있는 것이 인간들의 죄다.
그러나 성전이신, 아니 성전보다 더 크신 분이 성전에 내어야 하는 반 세겔 생명의 속전을 한 세겔로 완성하셔서 ‘나와 너’가 하나 되는 생명을 이루셨다. 하늘에 속한 분이 친히 죄인이 되셔서 세상에 그렇게 자신을 넘겨주신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고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속전으로 넘겨주심으로 자기 백성과 하나 되는 몸을 이루신 것이 교회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는 의미는 율법의 완성 안에 있다는 뜻이고 생명으로 하나 되어 십자가의 길을 가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이다(2022071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