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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순 떠올리기
강희근
1.
1968년 4월 어느날, 나는 촉석루 어우름에서 동기 선생을 처음 뵈었다. 동국대, 신문문예, 신춘시 동인 이런 정도의 이력을 들고 인사 올렸다. 반가이. 자상스런 눈빛으로 인사 받아주시고 열심히 하라 격려해 주셨다.
2.
경남일보에다 진주 안착을 알리고 파성 선생, 동기 선생, 아천 선생 모시고 진주 문학의 어깨 기울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리라는 다짐성 수필을 발표했다.
3.
당시 진주에는 파성, 동기 두 분은 초월해 계시고 아천 최재호 선생이 문협 지부장, 곽두돈 선생이 부지부장, 김석규 시인이 간사, 그 밖에 이명길, 이월수, 향소야, 조인영, 조종만, 이석, 이두정, 박용수, 최용호, 김덕기, 강남기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경남일보에는 장태현(40년대『시림』동인), 김수성 등이 기염을 토하며 있었고.
4.
60년대 말, 70년대 초입에는 개천예술제 문학부 행사에 문예공모, 시화전, 백일장, 문학의 밤 등이 있었다. 백일장 마치고 점심 겸 술 한잔 하는 가운데 공모작품 심사부터 먼저 시작했다. 지금 기억으로는 외부심사위원으로 유엽 시인(당시 팔순 귀머거리), 구상 시인, 정진업 시인, 박노석 시인, 동기 시인 등이 도도한 자세로 점심 드시고 술 한잔 드시는 가운데 한쪽머리 실무자들이 심사를 하고,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중․고등부 공모작들을 뽑다가 보니 모조리 지도교사 대필 흔적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그것도 현재 실무진으로 와 있는 교사들 학교 학생 공모작이 혐의가 있다는 것 아닌가. D여중 P교사 시인을 보고, 이것 당신이 써준 것 아닌가 하고 물었는데 P교사가 대충 얼버무리는 대답을 했다. 이때 동기 선생은 “마한노무 자식들, 그래갖고 시 쓰나? 고마 떼리 치와라” 고 큰소리로 나무라셨다. 그때에 아, P교사가 “아니라예, 그런 일 없습니다”하고 뿌질러 말했다. 동기 선생은 속으로 “마한노무 자식들, 얼빠진 자식들.......” 누가 들어야 할지 모르는 무대상 무지칭에게 하는 말을 속으로 하셨다.
5.
최용호 시인이 근무하던 MBC(당시는 진주 민간 방송)사옥이 본성동 다릿가에 있을 때인데 동기 선생이 최 시인을 자주 찾았다. 수위실에서 일일이 확인을 하고 방송국으로 올려 보냈는데 수위가 최 시인에게 인터폰으로 “동기가 왔다는데, 동기동창 치고는 나이도 많고 해서 돌려 보내버릴까요?”하자 최 시인이 동기 선생인 줄을 알고 “잘 모셔 주세요.”하고 말했다는 것.
6.
동기 선생이 시 낭송은 잘 안하셨다. 한 번 정도 들었다. 백일장 후 후렴잔치에서였다. 문학의 밤을 마치고 최재호 지부장은 후렴 잔치에 올 사람들을 선별 공천하고 그 명단을 간사에게 귀띔으로 전달했다. 진주 최고의 요정 ‘서울집’에서 있을 잔치이므로 전회원이 왔다가는 살림이 거덜날 일이라, 극소수 극비리에 전달했다. 나는 운이 좋아 연속으로 낙점을 받았다. 사실은 이 무렵 초정 선생이나 서울의 귀한 문인이 내려오면 최재호 선생은 김석규, 박재두, 강희근 이 세 사람을 세트로 묶었다.
후렴잔치에는 큰 뒷말이 무성했다. 비초청인사가 들이닥치는 일이라든가, 그들 중에서 시비 거는 경우가 더러 있었고, 여흥에 빗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동기 선생은 단 한 번 시를 읊었다. 찹살떡처럼 찰지게 읽어내리는 매력있는 낭송이었다.
검푸른 얼굴을 하였느뇨
너는 自由를 봤는가?
아마도 自由는 둥글고 날카롭기로
건드리면 굴러가고, 대지르면 피가 흐른다
아래서 부르면 위에로 떠오르고, 눌리면 터지느니
이 山머리에, 아득히 원시의 사연을, 무거운 침묵으로 누르고 앉은 바위가 일어선다
저편을 건너야 할 골짜기에, 새들의 속삭임은 추풍에 낙엽이 지고
古木나무 어깨에 노을이 걸린다
바위여, 이제야 그 돌을 던져 버리고 황혼이 녹아내릴 벌판을
외치고 달려라. 아직은 밤이 먼 여기에.
(어쩌다가)
너는 검푸른 얼굴을 하였느뇨.
7.
우리가 뵌 동기 선생은 늘 단아하시고 점잖으시다. 그런데 한 가지씩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돈키호테 그대로였다. 동기 선생은 <東騎西想>이라는 경남일보 칼럼을 연재하셨는데 그 첫회에서 자호(自號)인 ‘동기’는 에스파냐의 세르반테스가 지은 <돈키호테>의 그 ‘돈키’에서 왔다는 것이다. 중세기의 기사를 닮고자 한 돈키호테가 산쵸판자라는 종자를 거느리고 행하는 기행은 시대착오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행위 속의 순수와 진실은 누구나 인정하는 도저한 인간기록이라 할 수 있을 것.
동기 선생이 일본에서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운동을 벌였던 것이나, ‘흑우연맹’에 가담한 일이나 만세운동을 벌였던 것은 어쩌면 돈키호테와 같은 중세기 기사도 환상이었던 것인지 모른다. 나라를 잃은 이가 취할 수 있는 태도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이 아나키즘 운동이야말로 나라가 없는 ‘무(無)’의 상태에 도전할 수 있었던 하나의 젊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8.
광복 공간을 지나고, 동기 선생은 일본에서 치과의전을 나온 전공을 살리지 않았다. 진주 농업학교에서 위생과목을 담당하면서 술은 거의 상복하시듯 했다는 소문이었다. 수업 시간에 칠판에는 글자 두자만 쓰면 가득하여 더 쓸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는 것. 이 무렵 두 개의 해프닝이 입과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장학사 린치 사건, 다른 하나는 교무실 백구야 춤 사건이다. 앞 사건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고 뒤의 것은 당시 같은 교사로 근무하다가 교육장, 교장을 지내신 고 P교장선생의 증언으로 알려졌다.
장학사 린치 사건은 장학지도 하러 온 장학사를 린치 했다는 정도의 내용으로 돌아다니는 화제다. 무정부주의자인 동기 선생이 형식이나 학교질서에 고분고분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이탈, 음주 아마 이런 것에 대한 지도감독을 받았으리라. 아나키스트의 직성은 이를 받아들일 리 없을 것이고, 주먹이 몇 대 날아갔던 것이리라.
교무실 백구야 사건은 좀 섬세하게 전해진다. 수업을 하지 않는 시간은 늘 학교 밖 술집에서 근무했는데 그날따라 내내 술을 덮어 쓰면서 보내다가 직원 종례 시간에 맞춰 교무실에 들어서는데 이미 종례는 시작되었고 분위기는 아무것도 인정되지 않을 듯한 딱딱한 것이었다. 동기 선생은 궁즉통(窮卽通), 번개같이 희화적인 행위로 춤을 들이댄 것이다. 돈 100원 지폐를 끄집어내어 침을 탁 뱉고 이마에다 붙였다. 그리고 “백구야, 머할라 쿠노, 날 잡아 봐라”하는 가사를 읊조리며 춤사위는 되도록 크게 잡고 돌았다. 웃음바다와 혀 끌끌, 이해 불능세의 흐름이 교무실을 치고 나간 다음, 동기 선생은 붉은 얼굴을 간판으로 내밀고 유유히 칠암동을 벗어났다.
9.
한때 동기 선생은 진주상업고등학교 교장이었다. 아마 여기 교장을 하기 전 남해 창선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던 듯하다. 이 학교에 가서는 소풍이 문제였다. 소풍날 교장이 술에 취한 채로 “백구야, 뭐할라 카노”하는 문답식 노래를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것다, 학생들도 좋아하고 선생들도 좋아했지만 학부형과 재단 측에서 문제 제기를 했다는 것.
선생은 얼마 안 있어 보수적인 텃세에 밀려 섬을 등으로 놓고 떠나오고야 말았다. 그때 만난 학부형이 양왕용 시인(현 부산사대교수)의 부친이었는데 얼마 안 있어 양 시인이 진주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하숙은 봉곡동374번지 동기 선생 댁으로 정했다. 길가 방이라 창문을 열어 놓은 채 잠든 것이 화근이었다. 윗도리 바지 할 것 없이 출입복을 도둑이 다 걷어 갔다. 마침 아침에 창선에 있는 아버지가 출발하여 온다는 전갈이 왔다. 중앙로타리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나가 봐야 하는데 입을 옷이 파자마 밖에 없었다. 파자마를 입고 진주고교 입학예정자 양왕용은 근신하는 마음으로 중앙로를 거쳐 중앙로타리에 이르렀다. 옷을 벗고 파자마 차림으로 나온 아들을 보고 “야. 이눔아야, 옷이 그게 먹꼬”하고 나무랐다는 것 아닌가. 그 양왕용이 시인이 되고 교수가 되고 또 박사가 되고 또 학회의 회장이 된 것이다. 양왕용은 고등학교에서 필자의 한 해 후배이다. 이름에 ㅇ이 6번이나 들어가서, 당시 얻은 별명은「상봉동동 성냥공장 공장장」이었다.
10.
동기 선생은 일시 최재호 시인(삼현여고 창립교장)의 배려로 삼현여고 한자 교사로 근무했다. 그때 이미 60을 훨씬 넘긴 때였다. 대학입시를 목표로 하는 인문계 여자학교에서 유한한 시인의 강의가 합당했겠는가, 생각할수록 최 교장 선생의 후의가 예사롭지 않다.
11.
선생의 만년은 거의 사모님에 의지해 살으신 셈이다. 사모님께서 ‘동전점’을 치셨다. 내가 싸립문 같은 대문을 밀고 들어서면 작은방 서재에 계시던 선생께서 밖을 내다보며 큰방을 향해 “강 교수 온다. 치와라”하면 사모님은 2,3명 부인네들을 앞두고 밥상 위에 동전을 던져 놓고 운명을 해설하던 일을 바로 중단했다.
동기 선생께서 서재로 쓰시던 작은방은 책으로 가득했다. 벽에다 그냥 책이 오는 순서대로 채워 나가셨다. 3면이 책이고 문쪽 곁으로 쌓아둔 책은 주로「현대문학」「시문학」「현대시학」등이었다. 책 모서리에 볼펜으로 발표된 시 작품의 제목을 적어두셨다. 잉크가 책 모서리에서 번져난 것들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12.
최용호 시인 주도로 동기 선생 돕기 시화전을 시내 녹지다방에서 개최했다. 당시 기관장들은 시화전만 한다 하면 다 도망가고 마는 그런 시기였다. 그런데도 동기 선생 시화전을 보고는 도망가지 않았다. 양심, 가난, 겸양, 순수시인 이런 덕목들이 동기 선생의 매력이었고 힘이었던 셈이다.
진양군 농협 조합장 K씨는 “이런 훌륭한 분이 진주를 지키시는데 쌀 한 가마니는 해 드려야 안되겠어요?”하고 말했다.
13.
내가 문협 상임간사를 하면서「논개문학의 밤」을 논개 기일에 맞추어 개최했다. 동기 선생께 「논개문학」에 대해 말씀 좀 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가만히 생각해보시고는 ‘논개문학’이라는 말이 성립된다고 하셨다. 어떤 일이든 그냥 넘기시지 않고 말이 되는가 안되는가, 가치 있는 일인가 아닌가를 깊이 생각하는 자세를 후배들에게 보여 주셨다.
14.
문인들은 행정능력이 대체로 약한 편이다. 숫자를 헤아리거나 경제를 따지거나 논리를 제시하는 능력이 아주 약한 것이다. 동기 선생은 이 점에서 더 뚜렷한 시인이었다. 진주예총지부장을 떠맡겨 드렸는데 3개월 만에 사퇴하셨다. 그러나 아무도 시인의 능력이 떨어졌다고 말한 사람이 없었다.
15.
하루는 사천읍에 ‘유치과’를 개원한 분이 진주에 나타나 일본 치과의전 동기에 나이 좀 더 먹었던 동창이 있었는데 진주의 이경순으로 추정된다고 타진해 왔다. 유치과 원장의 딸이 당시 우리나라 여자농구 대표선수 유경화(?)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두 분이 만나 대화하는 걸 부면서 딱 떨어지는 동창이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정황은 인정이 되고도 남았다. 동기 선생은 학병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30대에 치과의전을 들어갔고 유 원장은 20대에 다녔을 터.
16.
동기 선생은 비봉루에 계신 은초 정명수(서예가) 선생과 잘 어울리셨다. 파성 선생도 비봉루에 자주 출입한 걸 보면 정명수 선생의 그릇이 컸던 것이 아닌가 한다. 파성과 동기는 영 사이가 시원찮았다. 누가 잘하고 못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동기 선생은 만년에 새벽 등산을 하셨다. 등산이라 하여 비봉산 꼭대기를 오르는 그런 등산이 아니라 비봉루 뒤쪽 정상으로 오르는 길목쯤에 도착하여 앉아 노는 그런 수준이었다. 이 무렵 나는 새벽 등산을 비봉산으로 잡았는데 마침 동기 선생을 그곳에서 만나 뵐 수 있었다. 언제나 선생께서 먼저 도착해 계셨다. 내가 그곳에 모습을 드러내면 “강 교수, 인자 오나”하고 맞이해 주셨다. 희굼하게 동이 다 틀 때까지 문단 이야기, 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생께서는 늘 듣는 쪽이지만 대체로 동감할 때는 눈빛으로 말씀해 주셨다. 동기 선생은 한동안 내가 비봉산을 가지 못하는 사이 등산길에서 실족하여 크게 다치셨다. 이를 빌미로 선생께서는 결국 몇 개월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다. 마지막 투병 중에는 박노정 시인이 침도 놓아 드리고 조약도 정성을 드려 해 드렸다. 나같이 몰인정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투병 중에 잘 해 드리지 못한 것이 늘 가슴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 기도를 잘 하지 않는 내가 오늘은 선생을 위해 화살기구나 해 드릴까 한다. “주여 이경순 시인에게 은총을 햇살처럼 내려 주시고, 하늘나라 문을 여시고, 하늘나라에서는 시가 곧 밥이 되게 해 주소서”
18.
나는「동기 선생, 떠올리기」를 마무리하면서 시 한 편을 적는다. 제목은「그 시인은 서정시를 쓰지 않았다」이다.
그 시인은 서정시를 쓰지 않았다
--동기 선생 탄생 100주년에 부쳐
그 시인은 서정시를 쓰지 않았다
상투 자르고
연락선 타고
배멀미하고
나라 망하고 망한 나라 떠나고
망하게 한 그 나라 들어가서
그 시인은 서정시를 쓰지 않았다
편하게 목에 밥 들어가는
부채질 같은 서정시 한 줄,
연락선 타고 나와 나라의 등불
시로서 심지 돋우려던 감격의 시대 깃발의 시대에도
쓰지 않았다
그 시인은 아나키스트,
그 시인은 모더니스트, 라 잘도 풀어내지만
서정시를 피해
가난 속으로 들어가, 가난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
다시 나오지 않았던 걸
아는 사람은 없다
아 그 시인은 서정시를 쓰지 않았다
고름 덩어리 시대
벌레 먹힌 꽃과 사람, 가슴에 내내 살아 있어
죽지 않고 살아 있어